镇魂

미고미 손님과 큰형님

나성이가 들려주는 한천부생 이야기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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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6.

저는 올해 갓 성인이 된 청년입니다. 제 이름은 나성이고요. 어린 시절 갈 곳 없던 저를 홍가 이당주께서 거둬 주셨습니다. 은혜를 갚고자 지금은 그분을 큰 형님으로 모시며 일을 돕고 있습니다. 형님의 이름은 나부생이고, 홍가의 외동딸인 홍란 아가씨와 함께 자라셨습니다. 형님 아버지가 홍가 임무를 수행하다 다쳤다느니, 돌아가셨다느니, 그런 내막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 굳이 캐묻다 형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홍란 아가씨는 저랑 동갑이지만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가씨는 저와 비슷한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귀하신 분이지만, 딱 한 가지 꼽자면 형님을 좋아한다는 것이 있겠습니다. 아가씨는 형님을 잘 모시라며, 찰싹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며 간식을 사 주시고는 합니다. 여러 가지 간식이 있지만 저는 케이크를 가장 좋아해요. 바이올렛 케이크는 언제나 예약이 꽉 차 있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저에게 그곳의 케이크를 마구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은 동강에서 홍란 아가씨뿐일 거예요.

얼마 전부터 미고미에 허가 도련님의 손님이 와 계십니다. 아, 미고미는 저희 형님이 운영하시는 재즈 클럽인데, 여기에 손님방이 여러 개 있거든요. 형님도 가장 큰 방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사실 저희 형님은 어둡고 조용한 걸 무서워 하셔서, 헉,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무튼, 방이 몇 개 있어서 저도 가끔 쉬다 가곤 합니다. 형님은 자신의 방에 누가 들어오든 별로 개의치 않아하시는 것 같지만, 형님 방 청소는 제가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형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바로 저이기 때문에, 형님의 생활 패턴은 제가 꿰고 있거든요. 뭐, 매번 다른 사람이 청소를 하러 오면 어디를 어떻게 해라 설명하기 귀찮기도 하고요. 그런데 형님 방 바로 옆방에 손님이 들어오면서부터, 저는 그 방 청소까지 맡게 되어 버렸습니다. 생판 모르는 남의 방이 더러워지든 털리든 아무 상관도 없지만, 형님이 직접 저에게 부탁하신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열정을 다 해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손님의 이름은 한천이고, 허가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경찰입니다. 베이시에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허가 도련님께 파견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 동강에서 함께 일해보자고요. 어디서 들은 얘긴데, 손님은 베이시에서 높으신 분들 눈에 엄청나게 밉보였다고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거라고, 고위부가 이렇게 썩으니 이 나라 경찰 꼴이 말이 아닌 거라고, 경찰이 돈 받고 범죄자 똥 치워주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고 마구 화를 내다 베이시 경찰청장님 손에 멱살까지 잡혔다지 뭐예요. 이거는 제 생각인데, 아무래도 허가 도련님이 손님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허가 도련님은 공명정대하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는 경찰이 되고 싶어 안달이거든요. 좋은 경찰 캠페인이 혼자서는 잘 안 되니까 손님을 끌어들일 모양이에요. 뭐, 제 추측이지만요.

허가 도련님은 손님을 실은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마중을 나가 손님을 미고미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원래 파견 근무를 온 경찰은 경찰 기숙사를 배정받게 되어 있는데, 홍가 산하의 클럽에 머무르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허가 도련님께서는 아마도 손님께 특별 대우를 해 주고픈 모양이었습니다. 마음을 얻으려면 물질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 필요한 거니까요. 그런데 손님은 허가 도련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허가 도련님이 부생 형님을 소개하자마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 나부생입니다. 홍가의 이당주고, 여기 주인이에요. 앞으로 둘이 잘 지내요.” 이 말 어디가 그렇게 신경에 거슬렸는지, 손님은 형님과 악수를 하며 형님의 얼굴을 뚫어질 듯 노려봤습니다. 그렇게 불타는 눈빛은 생전 처음 봤습니다. 의로운 경찰이란 다들 그렇게 화를 품고 사는 걸까요?

저는 손님이 우리 형님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또 무시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는데 형님은 무슨 생각인지 손님을 극진히 대우해 주었습니다. 손님은 형님을 볼 때마다 굳은 얼굴로 짧은 목례를 하는데, 우리 형님은 그런 돌덩이에다 대고 오늘 아침은 뭐라느니 이게 아주 별미라느니 사실 동강의 별미는 밖에 있다느니 저녁에 일찍 들어오면 함께 먹으러 가자느니 말을 줄줄 늘어놓았습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형님은 웬만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거든요. 당황하거나 긴장을 할 때면 진심이랑은 전혀 다른 헛소리를 끝없이 끝없이 이어가기는 하지만요. 전에 천영 아가씨가 좋아서 쫓아다닐 때도, 헉. 형님이 이것도 말하지 말랬는데!

손님의 반응이 어찌 되었든, 형님은 손님에게 끝도 없이 잘 해 주었습니다. 손님은 형님이 뭐라 말하든 무시하거나, 짧게 답하거나, 고개를 젓는 식으로 대응하여 보는 제가 다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형님이 잘 해 주면 잘 해 줄수록 손님은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습니다. 형님의 일방적인 호의가 안쓰러워 어느 날은 형님에게 물었습니다. 아, 이 날은 형님이 직접 손님의 방문을 두드려 술을 함께 마시지 않겠느냐 제안한 날이었습니다. 동강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귀한 술병을 들어 보이며 이야기했는데, 손님은 ‘피곤합니다.’ 한 마디 하곤 면전에서 문을 쾅 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다시 손님방 문을 두드리려는데, 형님이 제 손목을 붙잡았습니다.

“아니, 저런 놈 뭐 좋다고 잘 해 준대요, 형님은?”

“나성아,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니.”

형님은 씩씩거리는 제 얼굴을 빤히 보다가, 제 손목을 놓고 토닥토닥 두드렸습니다. 그러고는 ‘내일 보자’ 한 마디 하고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는 화풀이를 할 곳이 없어 텅 빈 복도에 대고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형님은 여느 때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 있다가, 손님이 나오자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습니다.

“한 경관, 좋은 아침.”

“저 나가겠습니다.”

“응, 나가 봐요.”

“이 집에서 나가 다른 데서 살겠다고요. 오늘 집 알아볼 겁니다.”

깜짝 놀란 형님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왜요? 갑자기? 계속 있지. 뭐 불편한 거 있어요?”

“나부생씨,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 줍니까?”

멀찍이 서서 형님을 쏘아보던 손님은, 갑자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더니 형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혹시 베이시 경찰 측 뒷배가 필요한 거면, 잘못 물었습니다, 나부생씨. 저 그런 거 딱 질색이거든요. 여기까지 쫓겨난 이유도 이 성질머리 때문이라고. 순수하게 잘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면, 그냥 하지 마세요. 바라는 거 있어서 뻔한 의도로 친절 베푸는 꼴, 저도 질립니다. 괜히 사람 동아줄 취급 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마음대로 사시든가.”

“당신이 뭘 안다고 우리 형님한테 막말이야!”

“나성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 한마디 던졌더니, 형님이 저를 똑바로 보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저 경찰놈의 손아귀를 털어내고 때려눕히지 않는 형님이 답답했습니다. 형님은 그 무례한 손길을 치우지 않고, 그저 눈알만 굴렸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손놈, 아니 손님의 얼굴을 뜯어보는 듯, 눈을 맞추는 듯 시선만 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무거운 공기 틈으로 형님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나는, 나는... ...원래 친절해서.”

손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자 형님은 바로 “미안해요.” 라고 덧붙였습니다. 형님은 한숨을 살짝 쉬더니, 손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성정이가 당신이랑 친해지고 싶은지 몰래 잘 좀 해 주라고 하도 성화여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근데 나 진짜, 그런 의도는 없었거든요. 솔직히 내가 동강 떠날 일도 없고, 당신이 베이시에 어떤 프라이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동강 사람이거든요. 동강에서 태어났고, 이곳을 사랑하고, 죽어도 여기에 묻힐 거라고요. 솔직히 경찰이랑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는 것도 쪼끔 애매하고, 그래서 성정이한테도 말을 했었는데, 자기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지 않냐고, 아, 음. 미안해요. 싫으면 이제 안 달라붙을게.”

손님은 미동도 없이 타는 눈으로 형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형님은 처음에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 시간이 흐르자 어색했는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형님의 멱살을 쥔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형님이 “진짜 집 구하러 가는 거예요?” 라며 소리를 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멍한 형님의 등에다 대고 저런 놈팽이 나가는 게 훨씬 좋다 말했더니, 철 없다며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나 입 조심하라고 얼마나 당부했는데,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거냐, 야단을 치는 형님의 얼굴을 보며 저는 손님이 형님의 얼굴에서 대체 뭘 봤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손님은 며칠이 흘러도 방을 빼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형님과 꽤 가까워진 듯 했습니다. 그러자 저도 자연스럽게 손님에 대한 적의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저도 자연스럽게 손님에게 “한 경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라며 인사를 하게 되었고, 손님은 해맑게 웃어 주지는 않았지만 손을 들어 보이며 답했습니다. 지내다 보니, 손님은 원체가 목석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난날 형님에게 한 짓은 악의를 가지고 한 게 맞습니다만, 친밀하게 지내는 날에도 손님은 따뜻한 미소나 다정한 표정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뭐,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기는 하지만요.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손님에게서 풍겼습니다. 마치 저와 형님, 그리고 이 동강을 적으로 보지 않고 마음 깊이 받아들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전의 손님이 마치, 뭐랄까, 낯선 이를 만나 경계하며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았습니다. 이제는 뭐, 아늑한 담요 안에서 털을 부드럽게 눕힌 고슴도치고요. 가끔은 저에게,

“너희 형님 어디 계시니?”

하며 케이크 한 상자를 덜컥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아마 홍란 아가씨가 저에게 주는 것을 보고 따라한 것 같아요. 함부로 받을 수 없다며 거절을 하면,

“네 형님이랑 나눠 먹어라, 형님한테 확인할 거다.”

라며 억지로 떠안게 했습니다. 말로는 같이 먹으라 하지만, 상자 안에는 형님이 가장 좋아하는 맛이 들어있을 게 뻔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 케이크 상자를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조심 들고 형님에게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몸을 사리며 형님이 있는 장소에 가 보면, 항상 손님이 먼저 도착하여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가 느림보처럼 발걸음을 늦추는 동안 바이크를 타고 쌩하니 달려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손님은 형님과 무언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다, 제가 나타나면

“나 이제 일 하러 갑니다. 나성이도 수고해라.”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습니다. 둘이서 무슨 비밀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다 큰 어른들이 이제 성인인 저보다도 더 치사하다 싶었습니다. 마음씨 넓은 저는 말없이 형님과 마주 앉아 케이크 상자를 열 뿐이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형님이 가장 좋아하는 맛이 들어 있었습니다. 형님은 케이크를 한참 들여다 보다,

“도대체 누가 내 정보를 이렇게 퍼뜨리고 다니는 거야?”

라고 꿍얼거리시더니,

“너 혼자 다 먹어라.”

하곤 자리를 뜨셨습니다. 손님이 꼭 같이 먹으라 당부했다며 아무리 외치고 매달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또다시 혼자서 이 값비싼 케이크를 맛있게 먹어치우게 되었습니다. 아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님은 어쩌면 베이시에서 ‘한가 도련님’이라고 불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케이크를 턱턱 사 낼 수 있는 사람은 이 동강에서 홍란 아가씨 뿐일 테니까요. 홍란 아가씨처럼 뇌물용 간식거리에 돈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니, 손님도 사실은 대단한 사람인 게 틀림없습니다.

한번은, 형님에게

“손님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형님 어디 계시냐 물을 때마다 케이크를 가지고 온다니까요? 안 그래도 되는데. 아, 그러니까 형님, 맨날 좀 어디 숨어 계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말했더니, 형님은

“야! 니가 뭐 거지라도 돼? 누가 그렇게 얻어먹고 다니래, 누가 그렇게 가르쳤어!”

라며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런 형님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는 걸 보고 저는 형님이 정말 화가 많이 나셨나 보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생각하였습니다.

하루는, 형님이 경찰모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형님에게 그게 뭐길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계시느냐 물었더니, 형님은 마침 잘 왔다며 이것 좀 경찰서에 가져다 주라고 했습니다. 왜 형님이 직접 가시지 않느냐 물었더니 지금 급한 일이 있다며 더듬더듬 말하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소파 위에 누인 몸을 일으킬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요. 저는 평소처럼 경찰서에 가 허가 도련님을 만났고, 도련님에게 모자를 전했습니다. 허가 도련님은 이미 모자를 반듯하게 쓰고 있어서, 왜 굳이 바쁜 저까지 동원해 이런 배달 일을 시켰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형님이 시킨 일을 완벽하게 완수하고, 항구로 가는 길에 임가 도련님과 홍란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임가 도련님과 팔짱을 낀 홍란 아가씨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오빠는 어디에 두고, 혼자 이러고 있어?”

“형님이 따로 일을 좀 시키셨거든요.”

“무슨 일? 오빠 오늘 별 일 없을 텐데.”

“아, 허가 도련님이 미고미에 모자를 놓고 가셨는지 저한테 경찰서로 가져다 주라고 하셨거든요.”

“허성정이? 어제 미고미에 갔어?”

“네? 그러고 보니 아닌 것 같네요.”

얼떨떨하게 답을 하자 홍란 아가씨는 깔깔 웃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홍란 아가씨가 배를 쥐고 마구 웃자 임가 도련님께서는 피식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홍란 아가씨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동강 시내 한복판에서 유명 배우 홍란이 포복절도를 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임가 도련님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저에게 “이만 가볼게. 부생이 잘 챙기고.” 라고 말하고 홍란 아가씨를 이끌었습니다. 제가 멍하게 그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홍란 아가씨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형님께 보고를 하려 미고미로 돌아가자, 형님이 다짜고짜 저를 혼내셨습니다.

“이 바보야, 누가 허성정한테 가져다 주랬어?”

“그럼 누구한테 줘요! 경찰청장님한테 줘요?”

“아니 그럼 당연히!”

“당연히 뭐요!”

“... 한 경관한테 줬어야지.”

형님은 주위를 살피더니 저에게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한 경관님 얘기를 하는 것이 부끄럽기라도 한 듯 말이에요. 제가 멍하니 있다 죄송하다 말하자, 형님은 제 얼굴을 보며 “아니다, 갑자기 화내서 미안하다. 내일 보자.” 하곤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니 형님이 제대로 말도 안 해 줘 놓고!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형님이 저를 혼내는 게 싫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 혼낸 후에 미안하다며 눈을 보고 진심으로 사과를 해 주시거든요. 형님의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 곧은 시선과 마주하고 있으면 형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너무 잘 보여서, 조금 올라왔던 화도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집니다. 저는 형님의 눈이 좋습니다. 뭐, 진짜 화가 나서 제가 미웠다면 이미 저를 패서 반쯤 죽여 놓았겠지요. 어쩌면, 그마저도 아까워서 단칼에 저 세상으로 보냈을 수도 있겠네요. 형님이 가신 후 주방에 부탁해서 야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인사를 했더니, 손님께서는 머리에 쓴 모자를 들어 보이며 “오늘 고마웠다.”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허가 도련님께서 손님께 전해 준 모양이었습니다. 홍란 아가씨와 임가 도련님의 반응까지 종합해 보면, 정말 이 동강에서 눈치가 없는 인간은 저 하나뿐인 것 같았습니다.

언제 한 번은, 손님께서 저를 찾아 오셨기에 평소처럼 형님이 어디에 계시냐 물을 줄 알고 대답할 준비를 했습니다.

“너희 형님 뭐 좋아 하시니?”

“영화관에요. 홍란 아가씨랑 같이요.”

“..영화관을 좋아하신다고? 영화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경극을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네, 아니, 아니. 방금 뭐라고 물으셨어요?”

“뭐 좋아 하시냐고. 먹는 거나, 쓰는 거나..”

“그거라면.. 셩지엔이죠. 저만 따라 오세요.”

지금까지 우기 셩지엔 앞에 늘어졌던 줄의 길이를 재어 막대로 만들면, 아마도 바다의 바닥을 두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기 셩지엔은 동강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게였습니다. 손님은 오며 가며 줄이 긴 것은 봤지만 실제로 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동강의 명물인 우기 셩지엔을 맛보는 것이 처음이라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들떴습니다. 우기 셩지엔은 최고니까요. 줄이 많이 길어서, 손님과 대화를 조금 나누었습니다. 손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겉으로는 딱딱해 보이지만, 친한 사람이 말을 걸면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고, 은근히 재미있는 농담도 할 줄 아는 분이시거든요. 무엇보다 이야기를 하면 집중하여 들어 주신다는 점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점에서 형님이랑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제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러면 나부생씨는, 연애라고는 한 번도 안 해 본 건가?”

“제가 알기로는 그럴 거예요. 제가 애인 좀 만들라구 했는데 형님이 네가 하루종일 붙어 있는데 어떻게 데이트를 하냐? 라고 하시는 거 있죠. 아, 그런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어요. 헉. 이거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

허겁지겁 양 손으로 입을 막자 손님께서는 저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무 말 않으셨습니다. 그저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헤아려 보고, 뒤를 돌아 벌써 우리 뒤에 이만큼 섰네, 하셨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게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까 입을 막아서 그런지 새로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래 손님과 하는 대화는 잘 끊기는 일이 없거든요. 손님은 줄을 보다, 품에서 수첩을 꺼내 보다 했고, 저는 그런 손님을 보며 안절부절했습니다. 앞 사람이 여덟 명쯤 줄었을까, 손님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봤습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떼다가, 금방 닫아버리곤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형님은요, 단천영이라는 아가씨를 좋아했는데요. 아, 요즘 동강에서 최고 유명한 경극 배우예요. 그래서 형님이 한동안 그 극장 문지방 닳도록 다녔어요. 그런데 천영 아가씨는 결국 허가 도련님이랑 약혼을 했지 뭐예요. 허가 도련님이 그 아가씨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는 바람에, 형님은 천영 아가씨한테 좋아한단 말 한 마디도 못 해보고 주변만 맴돌다 그냥 친구로 남았답니다. 저는 옆에서 다 봤거든요, 형님이 천영 아가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도와주는지, 무슨 선물을 주는지... 그랬는데도 천영 아가씨는, 형님을 친구로만 생각하더라구요. 우리 형님이 뭐가 모자라다고. 형님한테 아쉽지 않냐 했더니, 자기 친구 둘이 행복하면 됐다, 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슬퍼 보이더라구요. 착각인 지도 모르겠지만요.”

“아, 그래?”

“그게, 사실 저희 형님이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거든요. 어두워도 못 자고, 조용해도 못 자고,.. 그래서 항상 그 넓은 방에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천영 아가씨 노래를 들으면서 주무셔요. 원래는 거의 못 주무셨는데, 천영 아가씨가 동강에 오신 이후로는 그 노래 들으면 편히 주무시니 잘 됐지 뭐예요. 그런데, 천영 아가씨를 좋아하는 마음을 그렇게 접었는데도, 그 노래가 없으면 잠을 못 주무시더라구요.”

“그랬구나.”

“한 경관님.”

“왜.”

“동강에 계속 계실 거지요?”

“어?”

“아, 이제 저희 차례 거의 다 왔네요. 몇 개나 살 거예요?”

입이 멋대로 움직여 주절주절 긴 얘기를 하는 동안, 손님은 아까처럼 줄을 보고, 수첩을 보고, 손톱을 보고 하셨습니다. 평소처럼 제 얼굴을 보지는 않으셨지만, 이상하게도 손님이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님의 옆통수에 대고 줄줄, 형님이 절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 당부한 것들을 풀어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형님은 그 약혼식 이후로 종종 슬픈 얼굴을 하셨는데, 손님이 오신 뒤로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꺼내려다 목구멍 안으로 삼켰습니다. 손님은 결국 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약간 멍해 보이는 손님은 저에게 알아서 시키라고 말하곤, 지갑을 꺼내셨습니다. 저는 형님 것, 손님 것, 그리고 제 것도 주문했습니다. 여기까지 모시고 와서 줄도 함께 서고, 게다가 말동무까지 해 드렸는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겠어요?

“나성이, 오랜만에 왔네? 어, 옆에 이당주 친구 분도 계시고. 기분이다! 이당주 친구 분이 같이 오셨으니까 서비스로 많이 준다!”

“와! 항상 고마워요. 매번 이렇게 핑계 대서 많이 주시고.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

“친구분은 왜 이렇게 얼굴이 심각해? 뭐, 친구 아닌데 친구라고 해서 화 났나?”

“아니에요, 그냥 아까부터 기분이 조금 그러신가 봐요.”

“그래? 우리 가게 셩지엔 먹고 기운 차려요. 기운이 펄펄 날 거야.”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고, 셩지엔 세 봉지를 품에 안은 저는 두 봉지를 손님께 건넸습니다.

“자요. 한 개는 한 경관님 몫, 한 개는 우리 형님 몫.”

손님은 한 봉지만 받더니, 종이봉지가 구겨지도록 콱 쥐셨습니다. 그러고는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떠올랐다며 형님 몫은 직접 형님에게 전해 주라 하시곤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저 쪽은 경찰서로 가는 길이 아닌데, 싶었지만 손님의 뒷모습이 이미 혼자만의 사색에 빠진 것 같아 말을 거두었습니다.

그 날이 지나고, 한동안 손님은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공연히 나불거리는 바람에 손님과 형님의 사이를 벌려 놓았나, 손님이 동강에서 정이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덜컥 겁이 났습니다. 만약 손님이 떠난다면, 그리고 그것이 저 때문이라면 저는 정말로.. 형님께 죄송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손님도, 홍란 아가씨도 저를 찾지 않아 오랜만에 제 돈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샀습니다. 그런데 케이크를 보니 또 손님 생각이 나 우울해졌습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미고미 테이블 한켠에 앉아 케이크를 앞에 두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으려니, 형님과 손님이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친하게 장난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깜짝 놀라 얼떨결에 “두 분, 좋아 보이네요?” 라고 말했더니 형님이 사색이 되셨습니다. “야, 나성아, 오늘 본 거 어디 가서 말하지 말아라.” 하며 말까지 덧붙이셨고요. 거 참 임가 도련님과 허가 도련님이 형님께 형제 하나 더 생겼다고 배신하거나 실망할 인물도 아닌데 말이에요.

다음 날 아침, 평소와 같은 시간에 형님 방문을 두드렸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시지는 않더라도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들어오라 한 마디는 꼭 하시던 분인데,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방 안은 잠잠했습니다. 무언가 큰 일이 난 듯 싶었습니다. 형님이 아프시거나, 밤새 습격을 당하셨거나, 최악의 경우 이미 숨을.. 으! 손을 들어 제 뺨을 철썩철썩 때렸습니다. 정신 차려! 형님께서는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 수 있다며 대처법을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머릿속으로 그것들을 떠올리고, 숨을 들이마신 뒤 문고리를 돌리는데, 옆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엉망일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니 형님이 멀쩡히 서 계셨습니다.

“형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왜 거기서 나오셔요!”

“그게...”

형님은 입을 뻐끔뻐끔 하며 말을 얼버무리시더니, 목과 귀끝을 빨갛게 물들이셨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머리가 부스스한 손님의 얼굴이 빼꼼 나타나더니, 손님의 손이 형님의 손에 부드럽게 깍지를 꼈습니다.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털이 제 멋대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꼴도 어색한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손님의 손이 형님의 손을 붙잡자 사고가 멈췄습니다. 형님이 고개를 돌리자 손님이 형님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하려다 형님의 손바닥에 막혀 멈추었습니다. 형님이 저에게 뻣뻣한 눈길을 주니, 갑자기 온 몸의 피가 빠르게 흐르는 듯 했습니다. 얼빠진 얼굴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낯설고, 간지러워서 저는 그만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형님이 나성아, 하고 부른 것도 같았지만 환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성아, 하는 소리가 무언가에 의해 먹힌 듯 했지만, 이 역시 환청이겠지요. 으악!

그 날 이후로, 저는 형님과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멀리서라도 보면 괜히 얼굴이 빨개져 어디로든 숨었고, 형님을 깨우는 일은 다른 이에게 떠맡겼습니다. 처음에는 문을 두드리고 도망갈까 했는데, 그 사단도 문을 두드리다 난 것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원체 저 없이도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하는 분이셨고, 저는 그저 형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옆에 붙어 있었던 것 뿐입니다. 형님의 삶에 제가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제가 없어도 형님은 잘 해 나가실 것입니다. 제가 형님을 보고싶어 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평생 이렇게 허둥지둥하지는 않겠지요. 언제쯤 괜찮아질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평소 하던 일은 빠짐없이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형님을 만나야만 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보내도록 했고요. 다만, 방 청소같은 작지만 사적인 뒷바라지를 다른 이에게 맡길 수는 없어 형님과 손님이 없는 시간대에 얼른 끝내기로 했습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손님 방 쓰레기통을 비우는데 웬 번듯한 서류 봉투 하나가 덜렁 들어 있었습니다. 혹시 중요한 물건인데 실수로 버린 것인가 싶어 내용물을 꺼냈더니, 슬슬 베이시로 돌아오라는 소환장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봉투를 품 안에 넣었습니다. 큰 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형님이, 이제야 웃음을 되찾은 형님이 걱정되었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전에 손님과 이야기할 때 이곳에 계속 있을 것이냐 물었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형님을 피하고 있던 것도 잊고 한달음에 형님이 계실 장소로 달려갔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바로 형님이니까요.

그렇게 형님을 찾아가 서류를 보여드리고, 형님과 함께 미고미로 돌아오기까지의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서류를 확인한 형님의 얼굴조차 기억 속에 없습니다. 다만, 그 서류봉투와 마주한 이후로 형님은 달라졌습니다. 손님이 동강에 오시기 이전의 형님과는 또 달랐습니다. 형님은 종종 슬픈 표정을 짓는 대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다 미소지었습니다. 저는 그런 형님이 마치 연습을 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손님이 더 이상 동강에 계시지 않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한 연습을요. 저는 그런 형님이 저에게서 저만치 멀어진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마치 제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전처럼 형님의 일상을 곁에서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형님을 혼자 둬서는 안 될 것 같았고, 형님을 따라가 필요할 때 의지가 되어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적이 많은 생을 살기에, 형님은 저에게 당부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조금은 어겨도 질책을 약간 하실 뿐 크게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형님의 당부를 절대 어겨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위태로웠고, 여유가 없었고, 그렇기에 작은 부분이라도 틀어지면 어딘가 끊어져 영영 사라질 사람처럼 굴었으니까요. 형님은 언제나 그랬듯 저에게 입조심을 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한 경관이 나 찾아도 절대 대답하지 마라, 뭐 가져다 바쳐도 절대 받지 마라, 아무한테도 나랑 한 경관 친하다는 티 내지 마라, 그리고, 입조심 해라. 저는 멍청하게도 왜 그래야 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형님이 말했습니다.

“이 바보야, 경찰이 조폭이랑 친하다 하면 앞길에 도움이 되겠어?”

이렇게 말하고, 형님은 다시 제 눈을 똑바로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소리가 촉촉해져 있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물어 형님 입으로 직접 참담한 심정을 내뱉게 한 제가 바보같았습니다.

“나성아, 나는 더 바라는 거 없다, 이렇게 란란이랑 의부랑, 너랑 성정이랑 천영이랑.. 임 형님이랑 성원이랑.. 전처럼 이렇게만 잘 지내면, 그거면 감사고 행복이다.”

“형님은 천영 아가씨 이름을 언제부터 그렇게 잘 말했대요? 부끄러워서 제대로 꺼내본 적도 없던 분이.”

“너,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아주 기어오르지?”

“형님.”

“왜.”

“저는 한 경관님 좋습니다.”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형님은 씩씩대다, 조그맣게 미안하다 덧붙이셨습니다.

동강은 나라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대도시입니다. 부를 원하면 동강으로 가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입니다. 뭐, 홍가와 임가, 허가가 동강을 꽉 잡고 있는 한은 부자가 되기 쉽지 않을 테지만요. 아, 동강이 큰 도시라는 이야기를 왜 꺼냈냐면요, 제아무리 복잡한 동네여도 경찰의 힘이 있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형님이 아무리 피해 봤자 동강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기 염라왕 지나간다 생각할 것이고, 제가 아무리 피해 봤자 상점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성이 오늘도 일하러 가니? 열심히 하고 형님께 안부 전해 드려라, 할 것입니다. 즉, 형님과 저는 이 동강에서 손님의 눈을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찾는 것과 그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손님은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답하지 않고, 아무리 친한 척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냉담일 뿐이니까요. 처음에는 무시하는 이유라도 알려달라며 형님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형님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노선을 바꿔 저를 구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처럼 케이크를 가져와도 보고, 직접 줄을 서 셩지엔을 사 와도 보고, 심지어는 어떻게 설득했는지 허가 도련님을 보내 탐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형님처럼 마냥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는 신분이기에, 매번 핑계를 대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님이 부르셔서, 일이 바빠서, 싸움이 벌어져서, 신입 교육을 시켜야 해서, 홍란 아가씨가 심부름을 시켜서... 저는 원래 거짓말이 서툽니다. 거짓말도 똑똑한 사람이나 하는 거지요, 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바로 들키는 멍청한 축에 속합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거짓말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저의 아이디어 창고는 금방 바닥을 보였습니다. 바닥을 보인 것은 제 아이디어 창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의 인내심 역시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

평소처럼 형님을 방에 데려다 드리고, 미고미를 빠져나온 순간 손님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갓 성인이 되어 주량도 제대로 모르는 저를 술 한잔 하자며 꼬드겼습니다. 아주 비싸고 좋은 술이었습니다. 저는 맛만 보고 자리를 뜰 생각으로 응했고, 손님은 저를 자신의 방으로 들였습니다. 탁자 위에 먹음직스러운 안주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작정을 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주는 저에게 유혹하듯 손짓하여, 탁자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한 입, 향이 좋은 술을 한 모금, 어울리는 안주를 한 입, 또 입가심으로 한 모금, 하다 보니 어느새 알딸딸해졌습니다. 머리가 핑 돌아,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거울을 보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술로 사람을 낚다니, 이런 파렴치한 경찰 같으니! 술에 이렇게 약하다니, 이런 파렴치한 몸뚱아리 같으니! 분명 생각으로만 한 것 같은데, 입 밖으로 나왔는지 손님이 픽 웃었습니다. 손님은 술잔에 든 술을 한 번에 쭉 들이키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습니다.

“나성아, 너희 형님 왜 그러시는 거니? 너는 형님 말을 듣느라 그런 거겠지. 도대체 너희 형님은 갑자기 왜 나를 피하시는 거라니?”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무언가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며 쌓아 온 분노가 술기운의 힘을 빌어 꼬인 혀를 타고 나왔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습니다.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토록 굳게 지켜왔던 입을 열고 혀를 놀리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아니, 두 분 왜 저를 사이에 두고 이러시는 건데요? 나만.. 나만 존나 힘들어. 나는.. 돈도 없고... 애인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나만. 둘 다 가진 싸람들이 말이야 나만 가지고, 양쪽에서 나만 가지고... 한 쪽에서는, 나성아,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나성아, 나성아. 절대 말 하면 안 된다. 나성아. 알겠지. 다른 한 쪽에서는, 나성아, 너희 형님 어디 계시니. 너희 형님 왜 그러시는 거라니. 나성아. 말 좀 해봐 나성아. 아!!!!!! 이제 저는 모르겠으니까! 그냥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시고! 알아서 해결하시라고요! 나도 몰라! 이제!”

말을 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말이 제 안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저, 머리가 돌았고, 이 돌아버린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술을 더 마시고 싶었습니다. 지금 술이 깬다면 접시에 코를 박고 싶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독한 술을 마시고, 입을 닦은 뒤 손님의 팔을 잡아 끌었습니다.

“갑시다.”

“어딜?”

“아 어디긴요! 똑똑한 사람이 말이야!”

지체없이 방문을 연 뒤, 바로 옆 방문을 쾅 하고 열었습니다. 노크 없이 형님의 방 문을 여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요.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형님은 역시나 아직도 못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전에는 잠이 안 오면 천영 아가씨 극의 녹음본을 틀었는데, 요즘에는 그마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형님은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나성아, 너 술 마셨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한 손에 쥐고 있던 손님의 팔을 형님 쪽으로 홱 던지고, 팔짱을 끼었습니다.

“자꾸 저 곤란하게 하지 마시고 그냥 두 분이 이야기하시라고요!”

라는 말을 끝으로, 저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문을 닫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저를 향해 엄지를 치켜 보이는 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칭찬을 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개뿔! 내가 지 애완견인 줄 아나!

술에 기대어 몸과 정신을 맡긴 채 일을 치기는 했는데, 막상 문을 닫고 나니 현실감이 밀려왔습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두 분이 싸우거나 욕하면 어쩌지, 사이가 이미 많이 틀어진 것 같은데, 틀어진 것도 이렇게 된 것도 나 때문이다, 멍청한 나성아.. 알코올에 젖은 뇌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대화를 엿듣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라고 배웠지만, 혹시라도 안에서 큰 소리가 나면 들어가 말릴 작정으로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아니고, 뒷수습 하려고 그런 거였습니다. 진짜요. 숨을 죽이고 오른쪽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니, 이야기 소리가 작게 들려왔습니다.

“나같은 거랑 엮여서, 경찰 앞날에 도움 하나도 안 돼.”

“그럼 허성정 경관은.”

“걘, 어릴 때부터 나랑 친구였고, 걔네 아빠가 청장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나부생씨, 나 왜 여기로 쫓겨났는지 알아? 뒷돈 안 받고, 뒷거래 안 받고, 구린 짓 다 거부했더니 융통성 없대. 그래서 대놓고 눈칫밥도 먹었고. 그러니까 나부생씨랑 지내면 오히려 점수 딸 수 있는 거야.”

“술 많이 먹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그럼 지금 나부생씨 얘기는 말이 되는 줄 알아?”

“아니 내 말은.. 됐다. 말을 말자.”

“나는 하고 싶은데.”

“하.. 그러면 이제 점수 다 땄으니까 돌아가서 출세하겠다 이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소환장.. 봤어. 돌아오라고 했다며, 베이시에서.”

“나부생씨 내 방도 뒤져?”

“나는 아니고, 나성이가.”

“내 방에 스파이도 심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아니지, 그냥 술 마셔서 그런가 봐.”

“그래서, 언제 돌아가는데.”

“내 말 좀 들어 봐. 쓰레기통이라는 게, 쓰레기를 버리는 통이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거, 중요하지 않은 거, 쓰레기. 말 그대로 영영 볼 일 없는 것들. 소환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거는, 쓸모가 없다는 뜻이야. 이미 안 돌아갈 거라고 상부에 얘기해 놨어.”

“뭐?”

“연고 하나 없는 곳에 눌러앉을 각오까지 했는데, 나부생씨가 날 외면하면 어떡해. 왜 내 말은 안 들어 보고 혼자서 결정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나, 잔류 결정 번복하고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어.”

“진짜?”

“거짓말. 나부생씨가 나 안 받아줘도 이렇게 끈질기게 붙어 있었을 거야.”

“나쁜 새끼.”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아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음 놓고 눈을 감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아, 죽는다는 게 아니고, 술 때문인지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거든요. 이 상태로 밤거리를 걸었다가는 소매치기와 날강도들의 좋은 표적이 될 것 같아 남는 손님방에서 한숨 자고 가기로 했습니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자 졸음이 밀려들었고, 눈을 감자 바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꿈도 없이 편안한 잠이었습니다. 이렇게 질이 좋은 잠을 잔 것도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최근 형님과 손님의 일 때문에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요. 잠자리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잘 자는 제가 이 정도인데 형님은 얼마나 잠을 설치셨을지, 상상만으로도 죄송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머리가 미친 듯이 지끈거려 자동으로 눈이 뜨였습니다. 술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가. 시계를 보니 형님을 깨울 시간이어서 쑤시는 배를 붙잡고 헐레벌떡 뛰어가 형님 방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찬 물 대신 뜨끈한 녹차를 마셔야 겠다 생각하며 형님을 기다리는데, 문이 살그머니 열리며 손님이 부스스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평소 형님은 잠을 잘 못 주무시기 때문에 조그만 소리가 나거나 옆에 사람이 지나가면 금방 깨는데, 웬일로 깊게 잠이 드셨나 봅니다. 손님이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에 붙이더니, 부생이 자니까 조용히 해라, 하셨습니다. 저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동안 걱정도, 정리도, 마음의 준비도 많이 했는데 결국 손님이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준비한 것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는데도 기쁜 경우가 이번 말고 또 있을까요? 결국 평화롭게 동강에 남을 손님이었는데 제가 괜히 들쑤셔 둘 사이를 잠시 동안 멀어지게 한 셈이 되었습니다. 일을 벌인 것은 제 탓, 해결한 것은 제 덕이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어느새 잊은 것인지 형님은 제가 당부를 어긴 것에 대해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혼이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조금 허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님이 행복해 보이니 다행이었습니다. 며칠 뒤, 짐을 실은 배가 와 손님이 베이시에서 쓰던 물건들을 내려다 놓았습니다. 홍가의 형제들이 짐을 직접 미고미로 날랐고, 손님은 비로소 미고미에 자리잡아 더 이상 손님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손님을 손님 대신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는, 형님이 저에게 비밀을 터놓고 말 해 주느냐에 달렸습니다. 한 경관님이 될지, 아니면 형님 애인이 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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