镇魂

유전자와 현대생활

평범한 대학교수 션웨이랑 특조처장 자오윈란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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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9.

광명로 4번지는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대낮부터 시끌시끌했다. 명색이 특별조사처장이라는 놈팽이는 평소 점심 시간이 다 지나 직원들이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을 즈음에야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러고는 잔소리를 늘어지게 하고 일 하나하나에 간섭을 한 뒤 곧장 처장실에 처박혀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최근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바로 ‘외근’을 나가 있었으므로, 특조처의 일개미들은 마음 푹 놓고 월급 노략질을 할 수 있었다. 사건도 없겠다, 잔소리꾼도 없겠다, 그들이 한가하고 나태한 일상에 적응되었을 무렵, 특별조사처장 자오윈란이 행복한 점심시간에 돌연 들이닥쳤다. 왼손에는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최근 자오윈란은 션웨이라는 룡성대학 생물학 교수에게 푹 빠져 있었고, 오랜 노력(이라 쓰고 질척임이라 읽는다.) 끝에 그 교수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오윈란은 본래 새벽 다섯시까지 술을 퍼마시다 오후 세 시에 일어나는 일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이었다. 아니지, 그에게 ‘밥 먹듯이’ 라는 표현은 ‘아주 드물게’와 일맥상통하니 ‘밥 거르듯이’로 교정하는 편이 낫겠다. 자오윈란이라는 인간에 대해 말하자면, 하루에 한 끼 제대로 된 음식을 챙겨 먹어도 기적이었고, 집에는 인스턴트 식품만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때 처리하지 않아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빨래와 청소도 게을리 하여 출근길마다 새 옷을 사 입기 일쑤였고, 집은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여서 누군가 실종신고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그가 션웨이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 뒤로 잘 먹고, 잘 씻고, 잘 입는 바른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는 오전 7시 이전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을 먹은 뒤 몸단장을 하고 7시 반경 바로 앞집의 문을 두드렸다. 멀끔한 모습의 션웨이가 문을 열고 나오면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제 차에 태워 그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자오윈란은 오토바이를 즐겨 탔으나 션웨이를 픽업하기 위해 운전 면허를 새로 따고, 차를 새로 뽑기까지 했다. 또, 점심 때면 션웨이가 수업중인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를 했다. 션웨이가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보는 일이 자오윈란의 하루일과 중 가장 중요하고 보람찼다. 식사 후에는 션웨이를 다시 학교로 데려다준 뒤 특조처에 위엄있는 특조처장님의 용안을 비추었다. 그리고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식료품점으로 가 직접 장을 보고, 션웨이의 집에서 저녁상을 준비했다.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꼬시기 위해 근무 시간에 요리 학원까지 다닌 대단하신 인물이었다.

다시 광명로 4번지로 돌아와 보자면, 개요는 이랬다. 자오윈란이 여느 때처럼 션웨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고, (여기서 한 남직원이 대장, 대장이 언제부터 그렇게 젠틀했다고... 라고 말하다 자오윈란의 눈초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오전 수업이 끝날 즈음 점심을 먹기 위해 건물 앞에서 대기를 했다. (여기서 한 여직원이 우웩, 소리를 내었다가 자오윈란의 눈빛에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션웨이가 나오지 않았고, 자오윈란은 직접 강의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션웨이는 없었다. 강의실이 변경되었나 싶어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자오윈란은 불안한 마음이 덜컥 들어 션웨이의 연구실로 찾아갔고, 아니다 다를까, 그곳에는 보고 또 봐도 아까운 제 애인 대신 창백한 편지 한 통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라와 있었다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물은 간단했다. 사진 한 장과 메모 한 줄. 어두컴컴한 곳에서 정신을 잃은 채 양 손발목이 묶여 있는 션웨이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특별조사처장, 애인을 구하고 싶다면 이 곳으로 찾아와라. 추신, 혼자 와야 할 것이야. 라는 메모였다. 자오윈란은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지 헤아려 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온전히 사랑만 하기에는 적이 너무나 많은 인간임을 깨달았다. 안정된 직장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며 편안하게 살아갈 션웨이가 자신 하나 때문에 위험과 고난을 겪게 되었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사랑이 주는 안정감에 지나치게 안주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션웨이가 평생 겪을 일 없던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이 자오윈란을 괴롭게 했다. 화가 났다. 적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자오윈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들린 편지 봉투가 구겨지자 다칭이 부숭부숭한 냥발로 자오윈란의 손등을 꾸욱 눌렀다.

노련한 특조처의 팀원들은 이런 류의 ‘평범한’ 납치 사건의 경우 대장의 명령 없이도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잘 알았다. 추홍은 폴라로이드 사진의 스캔본에 여러 효과를 입혀 가며 빛의 각도와 사진이 찍힌 시간대 등 사진에서 캐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잡아냈다. 조 처장 화 많이 났나 보다. 린징은 사진과 편지 표면에 미세하게 남은 흑능량을 겨우겨우 긁어모아 능원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러게, 무서워 죽겠어. 얼른 끝내자. 다칭은 편지봉투 조각을 물고 나가 룡성시 고양이 네트워크에 냄새를 퍼뜨렸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내는 자에게는 참치 뱃살이 주어질 거라는 소문도 함께 퍼져나갔다. 뭐, 참치는 주인이 알아서 하겠지, 나 배고파. 왕정은 정식으로 들어온 일도 아닌데 팀원을 이용하는 것은 공권력 남용이라며 한 마디 하려다, 피가 흐르지 않는 자신보다도 더 싸늘한 처장의 시선에 조용히 뒷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미리 시말서를 작성해 두자. 왕정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찬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범인이 무능한 건지, 특조처가 유능한 건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린징이 대략적인 범위를 한정했고, 추홍이 사진 분석 결과와 인공위성 지도를 비교하여 건물을 특정했다. 원룸촌의 비교적 새로 지어진 오피스텔이 바로 범행 장소였으며, 추홍은 빛의 각도로 보아 5층에서 8층 사이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남은 것은 현장 투입뿐이었다. 메모에는 분명 특조처장 한 사람만 오라고 했으나 다칭이 자오윈란의 곁에 따라 붙었다. 그쪽에서 다칭이 말하는 고양이인지 뚱뚱보 길냥이인지 어찌 알겠는가. 윈란은 급한 마음에 오토바이에 올라 타려다, 션웨이를 데리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자동차 문을 열었다. 다칭이 조수석에 앉아 안심하라는 듯 냥냥거렸다.

감금 장소는 룡성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번화가였다. 차창 너머로 둘셋씩 무리지어 다니는 룡성대 학생들이 보였다. 바로 옆에서 납치 행각이 이루어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는 평범한 얼굴들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간땡이가 팅팅 부었구만. 자오윈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피스텔 옆에 대충 바퀴가 닿는 대로 주차하고, 급하게 차에서 내리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윈란의 심장이 그제서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직 안도할 때가 아니다, 윈란은 숨을 크게 뱉었다. 차에서 폴짝 뛰어 내린 다칭이 주변 고양이들의 증언과 풍겨오는 냄새를 참고하여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윈란은 다칭의 북실북실한 꼬리를 따라 뛰었다. 이 뚱보 고양이가 드디어 다이어트를 할 생각이 들었는지 엘리베이터도 마다하고 계단을 통해 6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여기야, 자오 처장. 바로 여기라고. 확실해. 윈란이 헉헉대며 6층 복도에 들어서자 다칭이 601호 앞에 앉아 수염을 정리하며 말했다.

자오윈란은 숨을 골랐다. 초인종을 누르고,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윈란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침착한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문고리가 돌아갔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칭이 좁은 문틈 사이로 잽싸게 들어갔다. 윈란은 권총을 뽑아 눈 앞의 상대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손 들어!

윈란?

어?

어?

션웨이?

어?

... ... ... 뭐야?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어이없게도 윈란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션웨이였다. 션웨이는 양 손을 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윈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으로는 션웨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션웨이가 도대체 왜 여기서 멀쩡하게 나오는지, 혹시 자신을 속인 건지, 그렇다면 의도가 무엇인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복잡했다. 안도보다는 의심이 먼저 든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일었다. 션웨이가 조용히 말했다.

저기, 윈란.

응.

그 총 좀, 내려 주면 안 될까.

당황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내려놓지 못한 의구심 때문이었는지 윈란은 여적 총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고, 이에 따라 션웨이도 손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션웨이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과거 윈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션웨이에게 매일같이 찾아왔을 때도, 지나친 선물 공세를 했을 때도 깔끔한 미소를 보이며 정중히 거절했다. 션웨이는 자오윈란 앞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대놓고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윈란은 총을 허겁지겁 내리고 그제서야 션웨이의 표정을 살폈다. 션웨이의 입가에는 웃음이 자리했지만, 눈썹과 눈은 명백히 난처함을 표하고 있었다.

아니, 미안.. 미안해, 괜찮아? 그러니까 이건... 션웨이, 혹시, 무슨,...

자오 처장!

자오윈란의 뇌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멈춰 버렸고, 그 대신 입이 대책 없이 움직이다 꾹 닫혀 버렸다. 션웨이는 윈란의 말을 경청하려다 계속 말하라는 듯 한 쪽 눈썹을 올렸다. 윈란이 말을 고르는 사이 구세주처럼 다칭이 털 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이리 좀 와 봐.

너 진짜, 내가, 내가 너무 고맙다. 장하다, 털북숭이. 돌아가면 츄르 백 개다. 윈란은 속으로 말을 삼키고 발을 쿵쿵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크고 건장한 사내가 등 뒤로 손과 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 놈이 확실해. 이 냄새라구. 다칭이 호언장담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션웨이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션웨이의 설명은 이랬다.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하여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대학원생 한 명이 연구실로 찾아와 실험에 착오가 생겼으니 와서 봐 달라 청했다. 낯선 학생이었지만 배움에 열의를 보이는 이들 모두에게 마땅히 가르침이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션웨이는 그 학생을 따라 순순히 연구실을 나섰다. 하지만 학생은 교수동을 빠져나오자마자 션웨이의 뒷목을 강타해 기절시켰고, 바로 썬팅이 된 차에 태워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학생은 사실 지성인으로, 자오윈란이 최근 잡아 넣은 중년의 남성이 학생의 아버지였다. 그 남성은 복제 이능을 가졌다. 왼손에 물건을 쥐고 능력을 쓰면 오른손에 왼손에 든 것과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남성은 이 이능을 이용하여 해성의 지폐를 위조하였고, 이로 인해 해성감에 붙잡힌 것을 특조처에서 인계받았다.

아버지가 지성의 감옥에 갇히자, 학생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학생은 펜 없이도 종이에 글을 쓸 수 있는 엄청난 이능을 가졌는데, 지성에는 ‘배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에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학생은 해성에 남아야만 했고, 자신에게서 배움을 앗아간 특조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악의 무리 특조처의 대장과 평소 깊은 마음으로 존경하던 션웨이 교수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생이 보기에 이는 크나큰 모순이고 부조리이며 부당했으므로, 둘 모두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만약 일이 계획한 대로 풀렸다면 학생은 션웨이를 인질로 자오윈란에게 학비를 요구할 셈이었다. 하지만 학생이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션웨이가 각종 무술 유단자라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몸이 약했던 션웨이가 걱정이 되었던 어머니께서는 션웨이가 무술을 배워 몸을 단련하도록 했고, 이에 따라 션웨이는 전 세계의 격투 기술을 익힌 건장한 어른으로 자라게 되었다. 게다가 최근 션웨이는 윈란 덕에 잘 먹고 잘 자는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션웨이는 몸이 묶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으며, 눈 앞의 납치범을 우선 붙잡아 두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날려 박치기를 했다. 학생이 고통을 호소하자, ‘더 아픈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풀어!’ 라며 협박을 했고, 순진한 지성인은 그걸 또 풀으란다고 풀어 준 것이다. 감히 양심을 거스르는 거짓말을 하고 납치까지 하다니! 교육자로서 제자의 이러한 행각을 마냥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션웨이는 어쨌든 학생이니 경찰에 신고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자초지종은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금까지 자신이 묶여있던 대로 학생을 묶어놓고 심문을 했다. 학생의 딱한 사정을 듣자 션웨이는 학생의 학구열에 감동하여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겠노라 선언했고, 학생은 션 교수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제의 모습으로 사건이 일단락되려던 차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션웨이는 이 학생이 자신의 애인 자오윈란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다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어떻게든 자신을 보호하려는 애인의 모습이 귀여워 굳이 자신의 강함을 일깨워 주지 않았다는 점이 떠올랐다. 문득 자신이 저지른 이 폭력사태가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졌고, 이 행각을 애인에게 들킨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애인에게 일부러 숨겨 왔던 사실을 이렇게 급진적인 방식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누가 봐도 지금은 션웨이가 가해자로 몰릴 상황이었다. 그래서 션웨이는 마음 약한 범인이 아파하는 자신을 보고 손과 발을 자유롭게 해 준 뒤 급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다는 거짓 시나리오를 순식간에 떠올리고, 학생에게 자신이 윈란을 설득한 뒤 돌아와 풀어주겠다 약속한 뒤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는데.. 일이 커질까 봐,.. 정말 미안해, 윈란. 그동안 거짓말해서 미안해, 거기다 거짓말을 더 얹으려고 해서 미안해. 막상 얼굴을 보니까, 너무 미안해서, 거짓말을 못 하겠더라.. 나도 내가 너무 부끄러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도 네가 이렇게 나를 구하러 와 줬을까? 션웨이는 질문을 던지며 최후 변론을 마쳤다.

자오윈란은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위험하다고, 지켜줘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던 애인이 사실 각종 무술 유단자라니! 범인을 때려 눕혔다니! 협박까지 했다니! 저 순한 얼굴로, 화를 내면서!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온 과거가 부끄러웠다. 겉모습만으로 약할 것이라 판단하고 과보호를 해 온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션웨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단 한 줄기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션웨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고, 앞으로도 이런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거짓말을 했다며 자책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션웨이는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 나니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내가, 미리 말을 했어야 하는데. 이게 다 내 실수야. 미안.. 많이 걱정했어? 바로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윈란. 내가 미안해. 션웨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짧은 엄지손톱 끝을 매만지며 말을 이어가다, 말이 없는 윈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오윈란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 션웨이를 온 몸으로 꼭 끌어안았다. 다칭은 곧 못 볼 꼴이 펼쳐질 것이라며 문 밖으로 대피했고, 등 뒤로 손발이 묶인 학생은 원하지도 않던 교수님의 애정행각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션웨이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린 윈란이 말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위험하게 만든 거야. 나랑 이렇게, 이런 사이가 안 됐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어. 다 내 탓이야. 네 탓이라고 하지 말아 줘, 내가 너무, 미안하니까. 그리고.. 아까, 의심해서 미안해. 내가 미쳤지, 감히 어떻게 너를 의심할 수가 있었을까.

윈란의 등을 토닥이며, 션웨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당연하지, 나는 윈란 네가 그래서 더 좋았어. 사실 지금까지는.. 무슨 처장이라고는 하는데, 맨날 놀고 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아, 나는 그래도 좋았지! 직업이 무슨 상관이겠어. 좋았는데, 진짜 좋았는데! 오늘에서야 네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 오히려 거기서 의심을 안 했으면, 직업정신 없다고, 실망했을 지도 몰라.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아이고, 아이고. 션웨이. 웨이야. 윈란은 찰싹 달라붙어 있던 몸을 떼어내고, 션웨이의 어깨를 붙잡아 눈을 맞추었다. 화답하듯 곧장 닿아 오는 시선이 맑았다. 오늘은 운 좋게 넘어갔지만, 나랑 이렇게... 지내다 보면, 또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공격을 당한다거나, 협박을 당한다거나.. 우리 자기가 이렇게 세다는 건 이제 알았지만... 더 센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그런데도 나랑 계속.. 이렇게.. 살아줄래?

당연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션웨이가 느릿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내가 그 정도 각오도 안 했을 것 같아? 너를 사랑하는데?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분홍색 하트가 뿅뿅 솟아나는 것 같아, 손과 발이 묶인 학생은 눈까지 꽉 감아 버렸다. 눈꼴 시려 못 살겠네, 왜 남의 집에서 이러고 있는 거람.

본래 해성인에게 해를 가한 지성인은 지성의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지만, 자오윈란은 결국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점, 가장 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외적 이유로 들어 학생을 벌하지 않았다. 션웨이는 약속대로 학생에게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고, 남은 학기는 학과 조교로 일하며 벌기로 했다. 사실, 윈란은 이 학생을 엄중히 처벌하여 제 애인을 건드리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본보기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특별조사처에 합당한 방식으로 내려온 사건이 아닐뿐더러, 특조처장이 사적 이유로 권력을 남용한 것이 명백한 사실이므로 특조처의 일개미들이 윈란을 말렸다. 다른 특조처장이 부임해 오면 지금까지와 같은 안온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윈란을 설득했고, 윈란은 너희가 나를 언제부터 그렇게 챙겼냐며 은근히 기뻐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윈란은 아무리 생각해도 션웨이가 걱정이 되었다. 권투 선수가 와도 엎어치기를 할 션웨이였으나 윈란은 불안했다. 하루 온종일 션웨이 생각만 하는 윈란에게, 다칭이 ‘드디어 네가 사랑이라는 걸 배웠구나.’ 라고 말했고, 윈란은 다칭에게 ‘늙은 것도 모자라 이젠 꼰대까지 된 거냐? 우리 아빠가 오신 줄 알았네.’ 라고 답했다. 매일같이 특조처 소파에 누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라며 쪼아 대는 처장님의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린징이 휴대용 흑능량 결계를 만들었다. 작고 투명한 구슬의 형태였는데,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오 미터 이내의 지성인은 해성인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윈란은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발명했냐며 핀잔을 주었다.

이 구슬을 목걸이로 만들어 션웨이가 걸고 다니도록 했더니, 눈치 빠른 학생들이 못 보던 목걸이를 알아채고 애인이 주었느냐 놀렸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션 교수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직한 대답을 했던 그 션웨이 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비밀이라 답했다. 이 소식은 곧 생물학과 전체에 퍼져, 너도 나도 션 교수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션 교수가 보일 때마다 목걸이를 언급했다. 션웨이는 장장 한달간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동료 교수들에게서도 목걸이와 관련된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션웨이는 종종 혼자 연구실에 앉아 목걸이를 바라보며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윈란의 끝없는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이 오래토록 이어졌다. 특조처의 직원들이 월급을 열심히 루팡하고, 윈란이 션웨이에게 밥을 먹이며 흐뭇해하고, 션웨이가 윈란의 앞에서 솔직해지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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