镇魂

아이 돈 케어

헤어진 한천부생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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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1. 서론

나부생과 한천이 헤어졌다. 온 동강 사람들에게 연애를 알리려는 듯 염병을 떨던 한 쌍이 깨졌다니, 그들을 아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부생과 한천은 헤어졌다. 헤어진 것이 확실했다. 기다렸다는 듯 한천이 싫어할 만한 온갖 짓거리를 다 하고 다니는 나부생의 행태가 이별을 증명했다. 둘은 여전히 묵묵부답을 유지했으나, 때로는 말보다 행동에서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법이었다.

2. 본론

2.1.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천의 앞을 지나갔다. 유난스럽게 제 존재를 뽐내며 달리는 오토바이의 주인은 바로 나부생이었다. 염라왕은 뭐,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가 보지. 나부생은 헬멧 대신 챙이 아름답게 나풀거리는 흰색 모자를 쓰고 있었고, 나부생의 뒤에 앉은 한 여자가 나부생의 헬멧을 대신 쓰고 있었다. 여자는 홍란이 분명했다. 이 동강 내에서 나부생의 허리를 꼭 껴안을 수 있는 여자는 홍란, 단 한 명뿐이었기에 한천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 하늘거리는 모자도 분명 홍란의 것일 테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한천은 시력이 엄청나게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나부생 하나만큼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겁도 없이 헬멧을 쓰지 않은 채였기에 한천이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나부생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한천은 나부생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으나 무의식적으로 오토바이의 뒤꽁무니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오토바이 뒷자리의 여자, 홍란이 얼굴을 뒤로 돌렸다. 색이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천은 그이의 시선이 저에게 닿았음을 직감했다. 한천이 시선을 피하자 홍란의 새빨간 입술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홍란은 양 팔로 나부생의 배를 힘주어 안으며 깍지를 꼈다.

“오빠, 그 놈이 우릴 쳐다보지도 않아.”

“그 놈이라니?”

“누구긴 누구야, 한천 말이지.”

“아, 뭐, 흠, 안 궁금해, 보든 말든.”

진짜 안 보네, 나부생은 홍란의 말에 백미러로 한천의 모습을 살폈다. 보기는커녕, 한천은 아예 나부생 쪽에 등을 진 채 어딘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부생은 애꿎은 등짝만 노려봤다. 시커먼 등짝, 얄미운 등짝, 매정한 등짝. 흥이다 흥. 뒤통수에 대고 콧방귀를 끼며 나부생은 핸들을 틀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으리으리한 신식 건물이 위엄 있는 자태를 드러냈다.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였다. 홍란은 일주일쯤 전부터 나부생에게 이 카페에 함께 가자며 성화였다. 아직도 이 곳의 쇼트 케이크를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동강에서 홍란과 나부생, 둘 뿐일 거라며 홍란이 재촉했다. 장장 일주일간의 설득 및 조름 끝에, 나부생이 드디어 홍란과 함께 이 곳에 당도한 것이다. 귀찮다며, 바쁘다며, 임 형님과 함께 가라며 꾸준한 거절을 해 오던 나부생의 마음이 갑자기 왜 변했는지, 홍란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한천 역시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부생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땅에 두 발을 붙였다. 그 옆으로 홍란이 나란히 서 팔짱을 꼈다. 나부생은 거절하지 않았다. 동강 사람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그렇지만 한동안 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홍란이 나부생의 옆에 딱 붙어 조잘댔다. 나부생이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카페에 들어가는 두 인영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한 남자가 멀찍이 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페의 유리문에 비친 그 모습을 본 홍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어?”

“그냥, 오빠랑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아서.”

2.2.

재즈 클럽 미고미는 언제나 붐볐다. 동강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재즈 음악이 생생하게 연주되고, 댄서들의 화려한 군무가 눈 앞에서 펼쳐지는 곳이기에 그랬다. 하지만 미고미가 특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이 곳의 주인이 바로 홍가의 이당주인 나부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뭣 모르는 젊은이들이야 춤과 노래, 그리고 대화를 즐기기 위해 미고미를 찾겠지만, 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이들이 굳이 미고미에서의 만남을 선호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든 나부생과 안면을 터, 홍가에 연줄을 대기 위해서였다. 나부생은 겉으로는 늘 웃고 다니며 누구에게나 잘 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보여주기식 친분이라도 간절한 이들이 미고미에는 넘쳐났다. 물론, 활발히 세력을 넓히고 있는 여러 유명인사들이 미고미의 단골이기에 겸사겸사 이들과 연을 맺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미고미의 얼굴이 바로 나부생인 만큼 나부생은 매일 밤 클럽에 들러 여러 사람을 만났고, 함께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독한 술을 삼키다 보면 정신이 마비되고, 눈이 감겼다. 나부생은 매일 밤 그렇게 잠들었다. 잠 못 드는 날들을 억지로 버텨왔다.

한천 역시 처음에는 손님으로 미고미에 왔다. 나부생의 절친인 허성정이 한천의 환영식 자리를 미고미에 마련한 탓이다. 시끄러운 장소도, 떠들썩한 술자리도 즐기지 않는 한천은 구석 자리에 앉아 혼자 물을 홀짝였다. 환영식은 명분일 뿐, 한천의 새 동료들은 저들끼리 술판을 벌이느라 신이 나 있었다. 나부생은 이 자리, 저 자리 끼어 낯설거나 익숙한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클럽 내부를 꼼꼼하게 살핀 후에야 마지막으로 허성정의 테이블에 들렀다. 허성정의 아래에서 오래 일한 경찰들은 나부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한천은 유리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살랑거리는 나부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사람은 속도 없나. 나부생은 자연스럽게 허성정의 옆에 앉아 잔을 채웠다. 자, 오랜만에 왔으니까 다 같이 건배! 나부생이 외치자 얼큰하게 취한 동료들이 술잔을 들어올리며 건배를 외쳤다. 한천은 물잔을 부딪쳤다. 나부생의 시선이 색깔 없이 투명한 액체에 닿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왔어, 이름은 한천. 잘 생겼지?”

“봐줄 만 하네. 반가워요, 한 경관님?”

허성정이 날쌔게 나부생의 말을 가로채 대답했다. 한천은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나부생이 일어나 한천에게로 손을 뻗었다. 한천은 얼떨결에 그 손을 붙잡았다. 나부생이 시원스레 웃으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잘 부탁해요, 나부생이라고 합니다. 단단한 손이었다. 부드러운 얼굴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나부생이 손을 빼고는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한천은 손이 닿았던 감각을 되새기며 나부생의 제 멋대로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지켜보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조금 앉아 있나 싶더니, 나부생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잘들 놀고 가요. 술 많이 시키라고. 조금 휘청이는가 싶더니 나부생은 꼿꼿하게 걸어갔다. 한천은 저 이상한 사람을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예상을 비껴가는 법. 한천은 화장실에 다녀오던 중, 부끄럽게도 길을 잃었다. 미고미는 동강에서 가장 규모가 큰 클럽이었다. 처음 방문한 사람이 길을 잃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천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나 길 잃었어요 광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그랬다. 길을 찾을 수 없을 때면 처음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한천은 화장실로 돌아가는 길마저 잃었다. 분명히 이쪽으로 왔던 것 같은데, 걷다 보니 낯선 복도였다. 얇은 벽 너머로 클럽의 소음이 웅성대며 들려왔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 길이라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그 때, 어딘가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천은 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조금 열린 문 사이로 이번에는 유리 조각이 달그락대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틈새로 나부생의 얼굴이 보였다. 나부생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서 한 청년이 술병 조각을 치우고 있었다.

“형님, 또 술 마셨어요?”

“알면서 뭘 물어.”

“매일 취해서 잠드는 거, 불면증에 하나도 도움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안다고 다 실천할 수 있는 거 아니다.”

“형님, 술이라도 깨고 주무셔요. 이렇게 평생 살 순 없잖아요.”

“술 깨면, 잠을 어떻게 자니. 나성아, 자장가라도 불러 줄 거냐? 너도 들어가 자라. 내일 봐. 수고했다.”

“형님!”

바닥에 누운 나부생을 향해 나성이 한숨을 쉬었다. 나성은 축 늘어진 나부생을 짊어지고 침대 위에 올렸다. 나부생의 구두를 벗기고, 불편한 자켓도 벗겼다. 나성은 형님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유리 조각을 꼼꼼하게 치웠다. 한천은 잠든 나부생의 얼굴을 바라보다, 갑자기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몸을 피했다. 한천은 나부생이라는 인간을 처음 봤음에도 이상하게 이 사람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술 없이도 편안한 밤을 보내길 빌었다. 그래서 연인이 된 이후, 한천은 나부생의 매일 밤을 책임졌다. 나부생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하지만 최근, 나부생은 다시 클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홍가의 이당주가 다시 미고미에 출근하고 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미고미는 여전히 손님으로 붐볐다. 나부생은 이전처럼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때가 되면 방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혼미한 밤들이었다.

“부생아, 오랜만이네.”

“아, 네, 죄송해요. 제가 그 동안 건강이 좀..”

“무슨 소리야, 듣기로는 아직도 펄펄 날아다닌다는데.”

“아하하,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요.”

“얼굴 좀 자주 보자. 닳는 것도 아니고.”

“네에, 네. 이제 그럴게요. 자주 오셔요.”

앞으로는 자주 뵐 수 있을 거예요,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나부생은 혼자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속마음이었다.

2.3.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방 안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는 나부생을 위해 임가의 큰 도련님이 나섰다. 최근 영화를 찍느라 바쁜 인기 스타 단천영, 혹은 임약몽에게 직접 다시 경극 무대에 서 달라 부탁을 한 것이었다. 나부생의 절친한 친구인 단천영은 제 큰오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룡북극장의 주인장에게 가장 좋은 자리는 팔지 말고 남겨 두라 단단히 일렀다. 폭포수처럼 쏟아질 돈 생각에 신이 난 주인장은 당장 포스터를 제작하여 퍼뜨렸고, 곧 온 동강에 과거의 인기 경극 배우 단천영이 복귀한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동강의 사람들은 단천영의 경극 이야기와 함께 과거 나부생과의 염문설 역시 한 번씩 되새겼다. 한천이 동강에 오기 이전에 동강을 한바탕 휩쓸었던 소문이었다. 홍가 이당주 나부생이 허가 첫째 도련님 허성정과 사랑의 라이벌이 되었다느니, 둘 다 경극 배우 단천영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느니 하는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두 남자의 피튀기는 사랑 경쟁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아 소문 자체가 거짓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한천은 신경이 쓰였다. 떨쳐내려 애썼지만 결국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한 한천은 아침을 사기 위해 들른 빵집의 점원이 다른 손님과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글쎄, 허가 도련님이 그 아가씨를 너무 좋아해서 염라왕이 포기를 했다지 뭐예요.”

“어머, 어머나, 그 염라왕이? 왜 그랬대요? 허가 비실이를 한 대 패지 않고.”

“너무 친한 친구여서 그랬다나 봐요. 사랑 대신 우정을 택한 거죠 뭐.”

“그러면 염라왕은 지금도 그 아가씨한테 마음이 있는 거래요?”

“아무도 모르죠, 근데 제가 보기에는 백 퍼센트 있는 것 같거든요. 싫은 것도 정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친구를 위해 양보를 했다는데. 미련이 안 남을 리가 없죠.”

“누가 무슨 미련이 남습니까?”

빵을 고르는 척 가까이에 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한천은 참다 못해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인상이 좋은 점원은 잠시 얼어 있다, 정신을 차리고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한 경관님, 오늘도 오셨네요! 이거 갓 구운 거니까 한 번 먹어 봐요.”

마구 쏘다니는 편이 아닌데도, 한천은 어딜 가든 나부생의 가슴 아픈 짝사랑에 대한 일화를 들어야만 했다. 사람마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조금씩 달랐지만, 맥락은 전부 같았다. 허성정과 나부생이 단천영이라는 배우를 동시에 사랑했고, 나부생은 허성정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다. 소문 중에는 홍란이 단천영을 납치했다거나, 단천영이 제 의붓오빠와 결혼할 뻔 했다거나 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것이라 한천은 흘려 들었다. 며칠 내내 비슷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천은 단천영의 공연 당일 퇴근을 하던 도중 룡북극장의 입석 표를 덜컥 사 버리고 말았다. 절대로 단천영이라는 배우가 궁금해서 일부러 평소와 다른 경로를 선택하여 빙빙 돌아 집으로 가던 도중 룡북극장에 들른 것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닿았고, 사람이 많기에, 인파에 파묻혀 어쩌다 보니 표를 사게 된 것이었다. 한천은 얼떨떨하게 극장에 들어갔다. 맨 앞 자리, 그것도 정중앙에 익숙한 뒤통수가 앉아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천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부생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나부생의 테이블에 한 남자가 들어와 앉았다. 흰 양복 차림에 안경을 낀 꼴을 보아하니 임계개가 분명했다. 들어 오던 도중 한천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임계개는 들어오자마자 나부생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부생은 신이 난 듯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들떠 있는 것도 같았다. 막이 올라가고, 한천은 팔짱을 꼈다.

경극이라고는 학창 시절 현장 체험 학습으로 가서 본 것이 전부였던 한천은 사실 단천영이라는 배우의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한천의 눈에는 모든 경극 배우가 비슷했다. 진한 화장을 하고, 인간이 절대 낼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소리로 노래를 하고, 유연한 몸으로 재주를 마구 넘는 사람들. 하지만 극장 안을 꽉 채운 관객이나 객석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단천영은 뛰어난 배우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무대 바로 앞 정중앙에 앉은 나부생이 준비된 차도 제대로 마시지 않고 푹 빠져 바라보다 ‘좋다, 잘한다, 좋아!’ 를 외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천에게 단천영은 대배우였다. 나부생의 시각이 틀릴 리 없었다.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는 나부생의 얼굴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정말로. 한천은 어쩐지 서글퍼져, 예의가 아닌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공연 중에 극장을 빠져나왔다.

2.4.

저녁 여덟 시, 경찰의 주간 근무가 끝날 시간. 누군가 나부생의 방문을 부술 듯 두드려댔다. 나부생은 시계를 흘끔 훔쳐봤다. 아무도 없는 방 안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볼까 두렵다는 듯 그랬다. 심장이 뛰었다. 혹시, 설마, 설마. 문을 열자 이십년지기 친구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허탈했다. 나부생은 차갑게 식은 심장으로 말했다.

“왜 왔는데?”

“친구로서 위로해 주려고 왔지.”

“필요 없거든.”

“핑계고, 그냥 내가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들어와.”

허성정은 양 손에 가득 든 짐을 내려놓았다. 커다란 봉투 안에는 술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리 집이 술집인데 뭐 하러 술을 사 왔어. 나부생은 찬장에서 글라스를 꺼냈다. 허성정이 장난스럽게 선물이야, 하며 탁자 앞에 앉았다. 나부생과 허성정, 그리고 임계개는 기억도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사이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머리가 크고 나서는 함께 술을 마셨다. 하지만 나부생과 허성정이 임계개를 형님으로 여기며 따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둘은 임계개와 술을 마시면 윗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만 깍듯해졌다. 마음 놓고 취해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임계개가 알면 서운할 테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래서 둘은 자주 단둘이 만나 술을 마셨다. 그것도 아주 경쟁적으로 마셨다. 술을 잔뜩 준비해 놓고 다 마실 때마다 빈 병을 각자의 옆에 세워둔 뒤, 술자리가 파할 때쯤 마신 병의 수를 세어 승패를 가렸다. 나부생이 이길 때도 있었고, 허성정이 이길 때도 있었으며, 결판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나면 둘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나부생의 침대 위에서. 둘이 함께 꼭 끌어안고.

한 번은 한천이 뭣도 모르고 나부생의 방 문을 벌컥 열었다가, 허성정과 붙어 있는 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한천은 허성정을 깨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물었다. 화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참으려 했지만 싸늘한 목소리와 얼어붙은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잠을 잘 못 자는 나부생을 알기에 한천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갑자기 움직이면 잠이 깰까 싶어 허성정을 거칠게 흔들어 깨우지도 않았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허성정의 옆으로 가 어깨를 톡톡 쳐서 깨우고, 눈을 마주치며 명확하게 묻기만 했다. 허성정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다,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나부생과 잔뜩 화가 나 있는 한천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서서히 잠이 깨며 허성정의 머릿속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허성정이 부정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자 한천이 검지손가락을 들며 씁, 했다. 허성정은 조심스럽게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엑스 자를 만들었다. 한천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려 보이곤 이따 봅시다, 하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발걸음 소리도, 방문을 닫는 소리도 아주 작았다. 허성정은 생각했다. 왜 나만?

허성정과 나부생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로, 한천은 어이가 없었으나 둘의 결백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허성정은 깐족대며 또 보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는데? 했고, 나부생은 억울한 표정으로 알겠어, 했다. 평소보다 묘하게 풀이 죽은 나부생에게 한천은 부드럽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나부생은 허성정과 함께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단 둘뿐만 아니라, 여럿이 낀 술자리도 허성정이 있으면 가지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야 할 경우,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나부생은 한천을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한때는 물처럼 마시던 술이었는데, 어쩐지 쓴 것 같았다. 알싸한 향에 코끝이 찡했다. 절대 눈물이 날 것 같다거나, 슬퍼서 울컥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술이 썼다. 허성정이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술을 사 왔나 보다. 나부생은 허성정을 탓했다. 술이 맛이 없다, 다 너 때문이다. 허성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 병, 두 병, 세 병, 나부생의 옆으로 술병이 쌓여갔다. 나부생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을 떴더니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부생의 옆에는 허성정이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나부생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천은 오지 않았다. 전날은 술의 향 때문에 코끝이 찡하더니, 지금은 과음한 탓인지 목구멍이 얼얼했다. 나부생은 울지 않았다. 오랜 기간 다져온 덕에 나부생은 숙취가 없었다. 한천은 나부생이 허성정과 술을 마시든 말든 나부생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관심이 없다. 몰라도 되는 사이였다. 이젠.

2.5.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늘 바람처럼 가볍게 굴었지만, 나부생은 사실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부생의 머릿속은 가족과 친구, 책임져야 할 일,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자신만의 선과 규칙 등으로 복잡했다. 나부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힘을 생각에만 쏟아도 하루가 모자랄 텐데, 자꾸만 머릿속이 감정으로 가득 찼다. 어느 정도 자란 후로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누르고, 또 눌러 왔다. 기나긴 연습과 습관도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 감정이 틈새로 마구 빠져나와 나부생을 괴롭혔다. 나부생은 고통스러웠다. 일과 걱정에 정신을 쏟으며 바쁘게 지내면 금방 감정을 날려보낼 수 있을 터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나부생은 그 감정이라는 놈을 없애 버리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러웠음에도 그 고통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저에게 남은 그의 마지막 흔적이라 생각하니 더 그랬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다치고 말았다. 평소라면 손쉽게 막았을 공격이었음에도 나부생은 맥없이 맞고 말았다. 감히 염라왕의 머리를 각목으로 내려친 무뢰배는 알고 보니 막 흥륭관에 들어간 피라미였다. 피라미는 나부생을 기절시켜 놓고도 스스로가 한 일을 믿지 못했다. 정말로 나부생을 때려눕힐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홍가의 몇몇이 나부생을 짊어지고 병원에 갔다. 나부생의 피가 남은 장소에서 홍가의 형제들은 그 피라미를 붙잡아 족쳤다.

한때 허성정이 나부생을 살려냈던 병원에서 나부생은 한번 더 살아났다. 나부생이 병원 침대에서 눈을 뜨자 홍란이 엉엉 울며 나부생의 침대 위로 엎드렸다. 나부생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홍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뒷목이 뻐근했다. 목을 돌리려고 하자마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윽, 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홍란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나부생이 홍란을 달래기 위해 쩔쩔매는 사이, 임계개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성정도 함께였다. 근무 중이었는지 허성정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임계개가 나부생에게 깨어나 정말 다행이라 말하더니, 홍란을 데리고 나갔다. 깨어난 거 봤으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너도 쉬어야지. 홍란은 울음이 가득한 얼굴로 나부생을 바라봤다. 나부생은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입 안이 찢어졌는지 피 맛이 났다. 홍란은 눈물을 삼키며 임계개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나부생이 침대맡에 앉아 있는 허성정에게 물었다.

“몇 시야?”

“일어나자마자 궁금한 게 고작 그거냐?”

“너 일 하다 온 것 같아서.”

“그래. 너 깨어났다는 말 듣고 잠깐 온 거야.”

“권력 남용 하지 마시죠, 허 단장님.”

“내가 갔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일 해서 나 먹여 살려. 나 이제 싸움도 못 해. 너만 믿는다.”

“그런 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누가 들을까 무섭다.”

허성정이 몸을 감싸 안고 덜덜 떠는 척을 했다. 나부생은 미친놈, 하며 웃었다. 정신이 조금 드니 입꼬리도 아픈 것 같았다. 멍했던 머리가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허성정은 나부생에게 네가 삼일이나 누워서 깨지 않았으며, 그 동안 홍란이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않고 네 옆을 지켰다 말해 주었다. 나부생은 지금 당장 홍란에게 가 봐야겠다며 몸을 일으키다,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허성정은 나부생이 다시 눕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제지도 하지 않고 낄낄대며 웃었다. 나쁜 새끼, 형제가 아픈데 비웃기나 하고. 나부생의 불평에 허성정이 진지하게 답했다. 오늘 아침까지 한 번도 못 웃었거든. 그래서 지금 웃는 거야. 나부생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을 고르고 고르다 고맙다고 말하려던 찰나, 허성정이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다.”

“잘 가. 돈 벌어 와요, 여보. 많이 벌어 와요.”

“꺼져.”

문이 닫히고, 병실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시계 초침 소리만이 나부생의 귓가를 조용하게 두드렸다. 나부생은 다시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족 생각, 친구 생각, 일 생각, 생각을 하자. 생각을. 나부생은 눈을 감았다. 시계 초침이 백 번 정도 똑딱였을까,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부생은 눈을 감은 채로 방금 들어온 사람이 신원을 밝히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설마 귀신인가. 오싹해진 나부생이 눈을 떴다. 경찰 제복이 옆에 서 있었다. 뭐야, 허성정인가. 고개를 들어 보니 핼쑥한 얼굴이 표정을 굳힌 채로 나부생을 보고 있었다.

“왜 보기만 한대?”

“…”

“어쭈, 정말 보기만 할 작정인가 본데.”

“…”

“안녕하세요?”

“…”

“한 경관님?”

나부생은 마치 한천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던 그 때처럼 한천을 불렀다. 망부석이 된 듯 나부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않던 한천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불러?”

“왜 왔어?”

“…”

“왜 오셨어요, 한 경관님?”

“나도, 나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는지.”

“우리 한 경관님, 우리 이제 다정하게 부를 사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불렀어. 한 경관님, 왜 오셨어요. 왜 저를 보러 오셨어요. 이럴 사이 아닌데. 응?”

미고미의 어중이 떠중이들을 대할 때처럼 나부생은 웃었다. 한천은 그 미소를 견딜 수가 없었다. 전과 같지만 다른 나부생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나부생은 생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천을 눈 앞에 두자 그동안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생각을 하고 싶었다. 이 감정을 다 쏟아 내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사라지겠지. 감정과 함께 눈물도 함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참아야 했다.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내가 란란이랑 같이 팔짱 끼고 동강 시내를 돌아다니든, 임 형이랑 같이 천영이 공연을 보러 가든, 허성정이랑 같이 술 먹고 뻗어서 자든. 이제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신경 안 쓸 거잖아요. 한 경관님, 이렇게 부르는 게 잘못됐어요?”

“나부생씨.”

“그래, 그렇게 불러요. 이제.”

“다시 신경 써 주기를 바라는 겁니까?”

한천은 나부생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창고와 붕대로 둘러 싸인 머리. 한천은 나부생이 누구와 데이트를 하든, 누구와 함께 자든 괜찮았다. 어찌 되었든 그의 마음은 한천의 것임이 분명했기에. 한천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나부생이 다치는 것만은, 그래서 그를 다시 보게 될 수 없게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헤어진 이후 나부생이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든 괜찮았다. 괜찮지 않았을지라도 괜찮게 만들려 노력했다. 그런데 나부생이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괜찮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해도 괜찮아질 수가 없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부생을 바라보며 한천은 말했다. 나는 신경 써 주고 싶어요, 나부생씨. 나부생이 놀라 정면만을 바라보던 고개를 급하게 돌렸다. 통증이 밀려오는지 나부생이 신음성을 냈다. 한천이 황급히 나부생의 목을 받치고 똑바로 눕혀 주었다. 나부생이 한천을 올려봤다.

“신경 쓰여요. 신경 쓰인다, 부생아.”

“…진짜?”

“그래. 그러니까, 우리…”

3. 결론

나부생과 한천이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다시 온 동강 사람들에게 연애를 알리려는 듯 염병을 떨기 시작했다. 염병이래 봐야 어디 앉을 때 꼭 붙어 앉기, 길거리 다닐 때 인적 드문 곳이면 슬그머니 손 잡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만 만나면 꿀 떨어지는 눈으로 보기 등등뿐이었지만 그들을 아는 모두가 그들을 눈꼴 시려 했다. 나부생과 한천은 재결합을 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둘은 애초에 헤어졌다는 말도 안 했는데 무슨 재결합이냐며 반박했다. 주변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더 말도 섞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았다. 한천은 딱딱하던 표정이 한층 유해졌으며, 나부생은 특유의 생기를 되찾았다. 둘은 이제 함께여야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래, 둘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잘 됐으면 좋겠다. 이미 잘 된 것 같다. 결혼해. 애는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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