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으로
부생천영 기반 나부생 정모생 영혼 바뀐 얘기
2019.05.31.
1.
새벽 4시. 누군가는 깊은 잠에 취해 있고, 누군가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누군가는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시간. 정모생은 알람 소리에 온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한참을 헛손질하다 겨우 알람을 끄고, 몸을 일으켜 앉은 뒤 한숨을 푹 쉬었다. 핸드폰 불빛이 두 눈을 찔렀다. 내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찬 물로 세수를 하고, 부엌 불을 켠 정모생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냉장고를 열었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아직도 빛에 적응이 안 된 눈은 냉장고 불빛에도 절로 감겼다.
그러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면, 모생은 새벽부터 일어나 정운을 위한 도시락을 만드는 짓을 하는 중이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애인 임정운은 잘 나가는 미식 연구가로,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요리를 맛보려는 작정인지 얼굴 잠깐 볼 틈도 없이 바쁘셨다. 오랜만에 귀국하여 데이트 좀 하려나 싶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바로 다음날 출장 스케줄이 잡혔다는 것이 아닌가. 고급진 입맛을 가진 제 애인이 기차 안에서 허접한 도시락을 먹는 꼴은 절대 볼 수가 없던 우리의 정모생씨는, 글쎄 본인이 직접 도시락을 싸 줄 터이니 얼굴도 볼 겸 출발 전 집에 들르라 선언을 해 버렸던 것이었다. 눈구멍에 넣어도 안 아프고 콧구멍에 넣어도 안 아플 정운이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 반, 나름 쉐프 애인을 두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밥 얻어먹고 다니는 꼴에 자존심 상했던 마음 반으로 홧김에 뱉은 말이었다. 열심히 손을 놀려 요리를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솔직히 약간, 아주 아주 약간 후회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 피로가 정운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달아나 버릴 것을 알아서, 모생은 불만을 하품과 함께 털어내 버렸다.
시간 여유를 한참 두고 시작한 덕에, 정운이 오기로 한 오전 8시보다 훨씬 이른 6시에 사랑의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첫 만남이 그닥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으나, 모생이 정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 이후로 정운은 모생의 음식에 대하여 말을 아꼈다. 사실, 모생은 그 직업에도 불구하고 정운에게 자주 요리를 해 주는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종종 할 일이 생기면, 정운은 백 퍼센트 만족하는 듯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맛있게 먹어 주었다. 매 끼니 음식을 음미하고, 깊이 생각하고, 알맞은 단어를 골라 평가를 내리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가 컸다. 이 노고를 알기에 모생은 정운과 함께할 때면 최상급의 고급 요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직업이 정운의 쉬는 시간을 빼앗을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오늘도 모생의 도시락은 어느 호텔의 별 다섯 개 붙은 메뉴라기보다는, 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생은 파자마에 앞치마 차림으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정운이 편안하게 먹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2.
지나치게 일찍 일어난 탓인지, 모생은 예상보다 깊이 잠들고 말았다. 누가 그랬던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햇살이 따스하게 피부를 쓰다듬는다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좆 된 거라고.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던 모생은 입을 떡 벌리며 주변을 더듬었다. 핸드폰, 핸드폰! 지금 몇 시야! 양 손을 휘저으니 부드러운 시트와 이불이 손바닥에 착 감겼다. 어라, 분명 소파에 앉아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모생은 아주 이상하게도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벌떡 상체를 세워 주위를 둘러 보니, 생전 처음 보는 호화스러운 방 안이었다. 방 안의 모든 물건이, 심지어 쿠션과 문짝마저도 온통 금박이었으며 골동품점에서 비싸게 팔 만한 것들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설마 납치당한 건가? 나를 왜? 내가 뭐라고? 정운이는 어떻게 됐지? 설마 납치범한테... 아니야, 아닐 거야. 모생은 제 뺨을 철썩철썩 두드렸다. 아팠다. 정신도 멀쩡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분명히 꿈일 텐데.. 논리적으로, 납치를 했으면 지하실 같은 곳에 꽁꽁 묶어서 던져 놨겠지. 이런 좋은 방에 눕혀 놨을 리가 없잖아. 설마 변태인 건가? 이상 취향? 그런데 창문도 멀쩡히 열려 있고.. 잠깐, 창문? 모생은 창문 앞으로 헐레벌떡 다가갔다. 바깥 풍경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단순히 모르는 동네라기보다는, 마치 제가 살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건물의 모양과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열심히 다니는 인력거까지. 모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백 년 전의 모습이었다. 아, 드라마 세트장인가? 그러면 지금은 촬영 중? 헉. 그러면 변태 납치범이 나를 드라마 촬영장 안에 던져 놓은 건가? 왜? 나를? 모생은 창 밖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아이고, 하늘이시여, 정운이시여, 저를 좀 구해주세요. 정운아, 살려 줘...
“부생 오빠!”
그 때, 내내 닫혀 있을 것만 같던 금빛 문이 열리더니,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하이힐의 또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납치범? 저 하이힐로 나를 고문할 건가? 모생은 저도 모르게 창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자 왠지 창틀과 창 밖의 풍경도 따라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아, 세상이 떨리는 게 아니라 내 눈이 떨리는 거구나. 모생은 그 사실을 깨닫자 눈꺼풀을 힘주어 닫았다. 하이힐을 신은 납치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생에게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부생 오빠, 왜 벌써 일어났어. 아프다며? 얼른 누워! 이 홍란이 오빠 못 나가게, 아니, 아무도 방해 못 하게 지키고 서 있을 테니까!”
부생? 모생은 익숙하지만 아득한 그 이름을 듣자 정신이 돌아왔다. 그 나부생? 정운이 할머니 사랑 이야기 속의 그 나부생? 내가? 지금 나부생? 이 사람이 홍란? 나부생 동생? 모생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 그러니까, 내가, 나부생? 이라고요?” 홍란은 모생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 우리 부생 오빠가 아프더니 미쳤나 봐. 가엾은 오빠, 란란이 지켜줄게.”
3.
띵동. 띵동. 띵동띵동. 띵동. 띵동띵동.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에 나부생은 눈을 찡그렸다. 아잇, 아침부터 누구야,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부생은 눈을 꾹 감고 이불을 당겼다. 당기려 했다. 그런데 이불이 없었다. 내 이불, 콜록, 몸살 환자 이불을 누가 뺏어 간 거야. 나성아! 콜록, 콜록, 나성아!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나성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가물가물 떠 보니 천장이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가 왠지 평소보다 딱딱한 것도 같았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띵동. 생각해 보니 부생이 머무는 미고미 뒷방에는 초인종이 없었다. 나부생은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밀려 오던 잠이 쏜살같이 달아났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려 하니, 불이 꺼져 있을뿐더러 커튼까지 닫혀 있어 온통 어둑어둑했다. 부생은 다리를 끌어 모아 안았다. 여기는 어디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지? 부생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동강에 부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몇 없었으나, 부생을 납치함으로써 이득을 볼 자는 차고 넘쳤다. 누군가 하루아침에 미고미에 침입해 자신을 가둬 놓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다. 게다가 전날 몸살감기에 걸린 탓에 약을 먹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잠에 들었으므로, 경비가 최악이었을 테다.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제 탓이었다. 콜록, 콜록. 초인종 소리 탓인지, 어둠 탓인지 머리가 울렸다.
초인종은 몇 차례 더 울리더니 멈추었다. 이내, 아까와는 다른 삑삑 삑 소리가 들리더니 철컥 하며 문이 열린 듯 했다. 부생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상대가 저를 살피려 다가오는 순간 덮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러나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다른 감각을 일깨워야 했다. 들려오는 발소리가 조급했다.
“정모생?”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불렀다. 어라? 발소리가 멈추더니,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셨다. 일부러 눈을 못 쓰게 하려는 수작인가? 바로 앞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으나 시야가 흐릿했다. 부생은 우선 상대를 붙잡아 놓고,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차차 밝은 조명이 익숙해지고, 눈 앞의 얼굴 역시 또렷해졌다. 드디어 맑아진 눈으로 얼굴을 확인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부생은 입을 어버버, 어버버 하다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천영? 너 지금 여기서 뭘...”
“뭐?”
“천영!”
“정모생! 니가 잠이 덜 깼구나?”
“...정모생?”
“그래! 왜, 내가 너를 부르는 게 신기해? 에휴, 자신만만하게 오라고 해 놓고, 늦잠을 자? 늦잠을 자? 지금 우리 얼마 만에 만나는 지 알기나 해?”
“아니, 저기, 혹시, ...단천영씨 아니세요?”
“얘가 지금, 너 또 술 먹었어? 아니면 알콜 금단 현상으로 미친 거야?”
부생의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분명히 천영의 모습이었다. 천영의 얼굴, 천영의 목소리,.. 그렇지만 말투와 행동이 천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지만.. 풍겨오는 분위기가 다른 사람이라 말 해주고 있었다. 천영이가, 천영인데, 천영이가 아니고,.. 어느 순간 뇌에 과부하가 일어났는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부생은 온 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머리가 어지럽더라니, 이게 꿈이야, 아니면 환각이야, 아니면 정말 내가 미쳤나, 단천영이 보고 싶어서 미쳤나... 부생은 자신의 뺨을 치기 위해 손을 들다가, 맥없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임정운은 당황하며 부생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손에 닿은 피부가 뜨거웠다. 어쩐지 얼굴과 목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도 같았다.
“야, 정모생, 야!! .. 뭐야, 너 열 나잖아! 내가 못 살아!”
4.
홍란은 호들갑을 떨며 모생을 침대에 눕히고, 아주 잠깐만 기다리라느니, 꼼짝 말고 있으라느니 당부를 하고 나가 어디선가 뜨끈한 탕을 끓여 왔다. 커다란 대야같은 통에 들은 탕이 족히 오 리터는 되어 보였다. 실눈을 뜨고 대야 안을 살펴 보니, 국물은 짙은 갈색이고 희끄무레한 건더기들이 둥둥 떠 있었다. 저게 뭐람, 버섯, 청경채, ..모르겠다. 홍란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약재와 불쾌한 국물을 한 숟갈 크게 떠 모생의 앞에 들이댔다. 아~ 아앙~ 아 해, 오빠. 홍란은 예쁘게 웃었다. 모생은 한 사람의 정성과 요리사로서의 생명인 미각,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모생은 우선 기침을 하는 척 하며 제 앞의 숟가락을 엎었다. 아이고! 홍란은 급하게 식기를 치우고, 누군가에게 닦을 것을 가져오라며 크게 소리쳤다. 아까운 이불 다 망쳤네. 오빠, 좀 일어나 봐. 여기 좀 치우자. 모생은 홍란의 손길에 얼떨결에 일어나 테이블에 가 앉았다. 홍란이 또 신나게 탕을 퍼 올리려 하자, 모생은 급하게 홍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지금은, 안 먹고 싶어. 저기.. 기억을 조금 잃은 것 같아서. 혼란스럽거든.”
“어, 음,.. 그래. 그러면, 일단 대화를 하면서 기억을 되찾아 볼까?”
“그래. 물이라도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해 보자. 란란?”
모생이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자, 홍란은 눈길을 피하며 모생의 손을 떼어냈다. 마침, 누군가 대걸레와 청소용품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홍란은 그에게 이 탕과 식기들도 가지고 가라 말하고는, 물주전자와 컵을 모생에게 내밀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부생이라고.”
“그래. 우리 불쌍한 부생 오빠.. 어쩌다 기억을 잃은 거람.”
“내가.. 나부생이라고.”
“그렇다니까. 나는 오빠의 사랑스런 여동생 홍란.”
“네가.. 홍란이고.”
“그래. 오빠의 란란이야.”
“여기는 동강이고?”
“그럼. 이 동강에서 나부생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면, 단천영, 아니, 임약몽, 아니, 아니. 아무튼 그 사람은?”
홍란은 모생을 째려 보더니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한테 단천영을 찾은 거야? 나는 기억 안 나고 단천영은 기억한다 이거지? 지금 이렇게 오빠를 도와주고 있는 나는 신경도 안 쓰여? 그리고 약몽이는 잃어버린 지 오래잖아. 지금 오빠 기억이 엉망이네. 맨날 이런 시끄러운 데서 자니까 그런 거잖아, 역시 우리 집으로 들어와 지내야겠어. 당장 짐 빼!”
“아니, 잠깐만, 잠깐, 잠깐만요..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저기, 란란, 그러니까 앉아.”
씩씩대던 홍란은 칫,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나부생이다. 여기는 동강이고., 이 사람은 홍란이고. 지금은 백 년 전이고, 나는 나부생이다. 정모생은 믿기지는 않지만, 드디어 이 상황에 대해 이해를 한 듯 했다. 그래, 내가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나부생이 된 꿈을 꾸나 보다. 정운이 할머니 얘기가 인상적이기는 했지, 신기하기도 해라. 살다살다 별 꿈을 다 꾸네. 그러면, 꿈이니까, 언젠간 깨는 거겠지?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 편안하게 받아들이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으니까!
어이가 없게도,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파악하고 나자 정모생은 우기 셩지엔을 먹으러 갈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더랬다.
5.
다 큰 성인 남자를, 그것도 온 몸에 힘이 없는 남자를 혼자 들어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역도 선수가 와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잡을 곳이 마땅하지 않아 들어 올리기 힘들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정운은 나부생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키려 애쓰다 침대로 옮기기는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축 늘어진 다리와 팔을 소파 위로 올리고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가져다 부생에게 덮어 주었다. 휴, 친구 없어서 봐 줄 사람도 없을 텐데. 나라도 있어 줘야지, 어쩌겠어. 정운은 핸드폰을 꺼내 담당자와 연락을 취했다. 가족이 심하게 아파 간병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죄송하지만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고 사정사정했다. 뭐, 나 정도 되는 스타랑 일 하려면 이 정도는 봐 줘야 하는 거지.
온 집안을 뒤져 보니 놀랍게도 구급상자를 찾을 수 있었고, 정운은 체온계를 꺼내 부생의 열을 쟀다. 37도였다. 생각보다 안 심해서 다행이네, 하여튼 허약하다니까.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대? 정운은 손수건에 물을 적셔 부생의 이마에 올려 주고, 그 옆에 앉아 부생을 가만히 관찰했다. 이렇게 한가롭게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잘난 눈, 잘난 코, 잘난 눈, 어휴, 하여간 잘났다니까. 본인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으나 정운은 제 애인의 얼굴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평생 얼굴만 뜯어 먹으며 살 수도 있었다. 그 때, 부생이 입을 열었다. 숨소리같은 말이었다. 정운은 부생의 입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어? 뭐라고?”
“...영..”
“뭐?”
“천영!!!”
악! 부생이 별안간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일으켰고,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정운은 부생에게 박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정운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코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고, 코를 붙잡고 달려가 거울을 보니 쌍코피가 나오고 있었다. 야, 이, 야, 이, 이 자식아!!!!!!!!!! 부생은 정운이 화장실에 들어가 피를 수습하는 사이, 눈알을 굴려 눈치를 보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고쳐 앉았다.
“저기, 죄송..”
“시끄러워!!!”
6.
“미래에서 왔다고? 당신이? 부생 오빠가 아니고?”
“그렇다니까.” 홍란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모생을 흘겨봤다. “...요.”
만족스러운 듯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홍란은 눈을 빛내며 모생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럼 좀 알려 줘 봐, 나랑 부생 오빠가 결혼을 하는지, 아, 여기서 오빠는 우리 부생 오빠. 당신 말고. 헉, 설마 허성정 그 개자식이랑 결혼하는 건 아니지? 그러면 정말 죽여 버릴 거야! 내가 죽는 게 아니고 죽여 버릴 거라고!”
일반적인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미래인이 과거를 바꿀 경우 큰 화를 입게 되어 있었다. 모생은 자신이 모든 진실을 홍란에게 털어놓아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일이면 또 모를까, 미래에 벌어질 일들은 홍란에게는 지나치게 잔인한 것들 투성이였다. 이렇게 해맑은 얼굴로 무작정 제 미래가 밝을 것이라 생각하는 아가씨에게는 독이면 독이지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음... 맨 입으로는 안 되지. 우기 셩지엔 사 주면 생각 좀 해 볼게.”
“뭐?”
“사..주세요.”
정모생이 보기에 이 나부생이라는 사람은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게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의붓동생이라는 홍란이 노크도 없이 남의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것부터 이상했는데, 이번에는 모생이 셩지엔을 사 달라고 하자마자 같이 나가서 동강 구경이나 하자며 난리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동강을 가장 속속들이 잘 아는 것은 바로 이 홍란이라며, 혼자 들떠서 계획을 짰다. 그러면서 잠옷 입은 꼴로 나갈 수는 없으니 옷을 입어야 하는데, 직접 입혀 주겠다며, 나부생의 옷장을 마음대로 뒤져 상의와 하의, 겉옷에 양말과 구두까지 세트로 맞춰 주는 것이 아닌가. 모생은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도 나가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는 홍란에게 뒤 돌아 있기라도 하라며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고, 홍란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보고 있으니 부끄럽냐며 방에서 나가 주었다. 아니, 네 오빠 몸이잖아...
거리로 나가자마자 홍란은 당당한 표정으로 모생과 팔짱을 끼었다. 모생이 지금 뭐 하는 거냐며, 이미 임자가 있다며 기겁을 하자 홍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깜빡이며 우리 부생 오빠와 나는 항상 이렇게 하고 다니므로 평소와 다르면 오해를 살 수 있다 말했다. 모생은 백 년 전 남매는 다 이런 식인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섯 발자국마다 한두 명씩 모생에게 이당주! 안녕하십니까! 이당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하며 인사를 해 왔다. 모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목례했다. 그러자 홍란이 모생의 옆구리를 찌르며 부생 오빠는 그렇게 예의바르지 않다 지적했다. 모생은 자신도 한 싸가지 한다고 생각해 왔기에 이 나부생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느 지경의 성질인지 궁금해졌다.
수십 명에게 인사를 받으며 거리를 한참 걷다 보니, 멀리서도 길고 긴 줄이 눈에 들어왔다. 홍란이 부생 오빠는 원래 줄을 서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제대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고 말해 주었다. 모생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줄의 맨 뒤에 섰다. 설레는 심장이 표정으로 티가 났는지, 홍란이 왠지 저를 한심하게 보는 것 같았다. 줄이 얼마나 줄어들었나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니, 시야에 정운과 똑 닮은 사람이 들어왔다. 옆에는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가 함께 걷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정운이랑 닮았지? 모생은 저 사람이 혹시 정운의 전생이 아닐까, 지금부터 잘 해줘야 하나 찰나의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들과가까워지자, 곧 그이가 바로 정운의 할머니인 단천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홍란이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낸 데서 온 합리적 추론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생은 하루빨리 부생과 천영을 이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천영에게 말을 걸었다.
“나부생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홍란이 팔꿈치로 모생의 옆구리를 찔렀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큰 위기가 닥쳤을 때 누가 옆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모생은 정운이 들려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취해 있었다.
“나부생, 너 미쳤어?” 천영이 성정의 팔을 붙잡으며 눈을 흘겼다.
“오늘 셩지엔은 내가 쏘도록 할게, 친구.” 성정이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모생의 눈에는 세상 가장 재수없는 웃음으로 보였다. 홍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 낀 손으로 모생의 손등을 꼬집었다. 그럼에도 모생의 정의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좀 착하게 살아요, 허성정씨.”
“뭐?”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란 무엇인지, 권력이란 무엇인지..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시구요. 아 됐고, 착하게 좀 사십시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밖에 몰라? 부잣집 도련님들이란! 하여튼 세상이 다 자기 손 안에 있는 줄 안다니까. 살다 보면 못 가지는 것도 있고 그런 거라고요.”
정모생은 부잣집 도련님의 몸으로 부잣집 도련님 욕을 한 바가지 했다. 홍란이 대신 부생 오빠가 몸살을 크게 앓더니 헛소리를 자꾸 한다며 변명했다. 단천영은 나부생을 조금 이상하지만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으나, 많이 이상하고 마음이 따뜻한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가는 사람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나부생씨는 나한테 감사해야 돼. 내가 이렇게 연애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 정모생 혼자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7.
“그러니까, 저는.. .. 나부생.. 이라는 사람인데요.”
“당신이 정말 나부생?”
“네.. 어떻게 증명을 할 수는 없지만 정말이요.”
“홍가 둘째 주인? 경극을 사랑하고 우기 셩지엔을 사랑하는?”
“네, ...저에 대해 잘 아시네요.”
“당연히 알죠! 는 개뿔. 정모생 너 장난 그만 쳐! 어딜 장난칠 게 없어서 우리 할머니 사랑 얘기 가지고 장난은 장난이야! 한 대 더 맞을래?”
해열제를 먹고 열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부생은 정운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정운은 심통이 난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양 콧구멍을 휴지로 막았다. 정모생 이 자식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여워서 봐 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재미도 없는 장난에 고집이었다. 정운은 거울을 가만히 보다 휙 치우고, 부생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아야, 제가.. 진짜 나부생인데, 근데 방금 뭐라고...”
“한 대 더 맞을래?”
“아니, 사랑 얘기라고 아까 분명.”
“너 지금 나 천영이라고 불렀지, 니가 나부생이랬지, 그러면 이게 우리 할머니 사랑 얘기가 아니고 뭔데. 너 진짜 죽을래?”
“사랑? 그.. 천영이랑 제가 사랑을 하나요?”
임정운은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 익숙한 제 애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사실 아직도 모생의 어이없는 장난질이 아닐까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끔 넘어가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랑이 죄다, 사랑이 죄야.
마음 같아서는 제 할아버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온갖 산해진미를 먹여 주고 싶었지만, 부생의 열이 쉽사리 내리지 않아 둘은 집 안에 콕 박혀 있는 수밖에 없었다. 정운은 입맛이 없어도 안 먹으면 기운이 더 떨어지는 법이라며 모생이 저를 위해 준비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예상대로 화려한 임금님 식단은 아니었으나, 누구나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을 만한 가정식이었다. 정운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부생은 정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말했다.
“행복해 보이네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자, 자연스레 말이 없어졌다. 부생은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살던 시대로부터 백 년 후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천영이 손녀고, 나는... 자고 일어나니 여기였고, 이 몸은 원래 임정운씨 애인이다. 정운이 열심히 들여다 보던 거울을 흘끔 보니 언뜻 본 얼굴이 제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그럼 뭐, 다음 생이라도 되나. 부생은 실없이 웃으며 다 꿈이겠거니, 자고 일어나면 원래대로 돌아가 있겠거니, 하며 마음을 놓기로 했다. 오늘 일어난 변화는 갑작스러웠지만 제 앞에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 있으니 왠지 안심이 되었다.
“나부생씨는, 요리 못 하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다 아는 방법이 있죠. 이 도시락, 정모생이 만든 거예요.”
놀란 듯 식탁으로 깔았던 시선이 정운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에 낯선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요리를 하느라 생긴 듯 했다.
“실력이 끝내주는데요? 요리사 해도 되겠어요.”
“어... 직업이 요리사예요.”
말과 함께 정운의 웃음이 터졌고, 부생도 따라 소리내어 웃었다. 부생은 이렇게 웃으며 누군가와 식사를 한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려 보았다. 어쩌면 그 때 그 끔찍했던 생일 이후로 처음인 것도 같았다. 마치 가족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낯선 세계에 뚝 떨어져 가족의 편안함을 느끼다니, 제가 생각해도 역설적인 일이었다. 정운의 인상이 천영의 것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천영의 다정함이 정운에게서 느껴졌다.
8.
더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지 지옥의 조동아리 정모생이 두려웠던 홍란은, 제 장갑 낀 손으로 정모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재갈이라도 물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홍란은 다정한 여동생인 척을 하며 귓속말로 ‘좀 닥치고 있어’라고 했다. 모생은 이 맹랑한 갓 성인의 말에 소름이 돋아 입을 꾹 다물었다. 느릿느릿 줄어들던 줄이 점점 짧아지더니, 드디어 모생의 차례가 왔다. 허성정은 모생의 폭언에 기분이 상했는지 셩지엔을 사 주겠다던 약속을 어겼다. 모생은 속으로 역시 부잣집 도련님이란, 입만 살았다니까? 하며 부잣집 아가씨가 사 주는 셩지엔을 받았다. 홍란은 더 이상 정모생과 같이 다니고 싶지 않았다. 자꾸 헛소리를 내뱉지를 않나, 띨빵한 짓을 해 우리 부생 오빠의 명예를 실추시키지를 않나. 홍란은 모생을 셩지엔과 함께 미고미에 버려두고 떠났다. 자신의 혼사같은 건 잊은 지 오래였다.
아직 영업도 시작하지 않은 재즈클럽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몸이 쑤셨다. 셩지엔은 맛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만드는 편이 훨 배 맛있었다. 어쩌면 정운과 함께 먹지 못해 그 맛이 덜한 것 같기도 했다. 모생은 기지개를 펴다, 슬금슬금 미고미 안을 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막 안주 준비를 시작한 주방에 들어서게 되었다. 분주히 일하던 직원들이 모두 멈추고 이당주께서 여기는 웬 일이시냐며 뒷걸음질을 쳤다. 모생은 저를 명백히 거부하는 반응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제가 뭐라도 만들어 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익숙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를 시작하자 모생은 그제서야 주변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부생씨 요리 못 하는구나.. 큰 일 났네. 안타깝게도 모생은 요리를 잘 하는 법만 알지 못 하는 법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손 가는 대로 완벽한 동파육 한 접시를 만들어 버린 모생은 요리 신내림을 받았다며, 당장 동파육을 만들지 않으면 신병을 크게 앓았을 거라며, 이제 바람대로 동파육을 내놓았으니 신이 떠날 거라며 안심하라고 둘러대곤 주방을 나갔다. 직원들이 이당주가 미쳤다는 소문이 진짜였다며 수군거리다 동파육을 한 젓가락씩 맛보고 미미(美味)를 외쳤다.
거 참, 나부생씨가 평소에 어떤 인간인지 알 길이 없으니 뭘 함부로 할 수가 없네. 모생은 자신이 나부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으나, 사소한 특성이나 습관까지는 미처 몰라 왠지 주눅이 들었다. 나부생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혀 알 필요가 없고, 알아서 앞으로 별다른 쓸모가 없을 것임에도 그랬다. 나부생의 방 안에 축 늘어져 있던 모생은 전축으로 다가갔다.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조심조심 구경만 한다는 것이, 결국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음악이 재생되어 나왔다. 경극인 듯 했다. 모생은 경극이라고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지나가듯 본 경험밖에 없지만, 이 녹음본이 바로 그 유명한 단천영의 것이리라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다. 묘하게 마음이 풀리는 경극 음악을 들으며 소파에 늘어져 있으려니, 웬 젊은 남자가 달려와 “형님! 일났어요!” 하며 법석을 떠는 것이 아닌가.
“누구세요?”
“아휴, 형님 이상해졌다는 말 듣기는 했지만, 아무튼 일어나요!”
“나 싸움 못하는데? 너 누구야? 니가 책임 질 거야?”
“저 나성이잖아요!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얼른 오셔요!”
하도 재촉을 하는 통에, 모생은 나성의 손에 이끌려 어느 으슥한 공사판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진짜 좆 되는 거 아냐? 꿈 속에서 죽으면 평생 못 깨어난댔는데. 모생은 덜덜 떨며 나성의 등 뒤에 숨었다. 홍가의 일원들이 이당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물었지만 나성은 자기도 잘 모른다며 묻지 말고 정신이나 똑바로 차리자 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던 바로 그 때, 골목에서 누군가 ‘이당주, 죽어라!!!’ 하며 날아왔다. 그는 각목으로 모생의 뒷목을 때리려다 홍가의 일원들에게 저지당했다. 하지만 모생은 너무나 놀란 탓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손이 떨려 제대로 바닥을 짚지도 못한 탓에 모생은 이마를 그대로 부딪히게 되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나성은 형님이 이상하다는 사실은 홍란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 지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당황하며 모생을 들쳐업었다. 저는 형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실 테니 잘 살펴 달라 부탁하고는, 나성은 웬 건물 안을 달리기 시작했다.
나성의 등짝에 업혀, 모생은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자 직감적으로 지금 정신을 놓으면 꿈도 끝이겠구나, 싶었다. 형님, 정신 차려요. 형님! 아, 나부생씨한테 편지라도 썼어야 하는데, 허성정한테 더 욕을 해 줬어야 하는데, 홍란한테, 홍란한테 한 마디 조언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 큰 충격을 그 순수한 아가씨가 어떻게 혼자 이겨, 내가 미리 언질을 해 줬어야, 아, 나부생씨한테도, 할 말이 많았는데, 하루를 의미없게 보내 놓고 모생은 이제 와서야 후회가 되었다. 형님, 뭐예요, 뭐 이런 거 가지고 기절을 하고 난리래요? 무슨 일 있어요? 모생은 흐려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 나성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죽지 마라, 절대 죽지 마라, 네 형님이 많이 슬퍼하신다. 죽으면 안 된다.
이 말을 끝으로, 모생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9.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정운은 부생에게 약을 한 번 더 먹이고, 침대에 눕도록 했다. 정운이 그 옆에 앉아 부생을 지켜봤다. 부생은 정운을 보며 제가 아플 때마다 호들갑을 떨고 말도 안 되는 요리를 해 주던 홍란을 떠올렸다. 그러자, 홍란이, 그 곳의 형제들이, 제 세상이, 그리고 단천영이 너무나 보고싶어졌다. 약기운 탓인지, 따뜻한 이불 탓인지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잠이 들 듯, 말 듯 몽롱해지자 부생은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부생의 시선이 정운의 손에 닿았다. 가지런한 손가락에 은색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졸리면 자요, 옆에서 보고 있을게요.”
“정말 고마웠어요, 오늘.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믿어도 주고.”
정운은 어쩌면 제 할아버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부생이 졸린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도 입을 뻐끔거렸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했다.
“저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정말 단천영씨랑 사랑하는 사이가 되냐고요?”
어쩐지 부생도, 정운도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부생에게 동의였지만, 정운에게는 고민이었다. 정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러면..”
“더 이상 묻지 말아 줄래요?”
“...고마워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꼭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우리 할머니한테.”
“알았어요. 꼭 행복하게 해 줄게요, 천영이.”
부생은 힘 없는 손을 들어 정운과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정운이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이자 부생은 울지 말라고, 닦아 줄 힘이 없으니까 웃으라고 말했다. 정운은 울음을 삼키며 애써 웃어보였다. 부생은 행복해 보이네요, 라고 말하곤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들었다.
10.
정모생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과 전등이었다. 제 몸을 감싸는 담요의 촉감 역시 익숙했다. 제 옆에는 사랑하는 얼굴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천영?” 모생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니가 잠이 덜 깼구나! 천영은 무슨 천영이야.”
그러자 모생이 벌떡 일어나 정운을 끌어안았다. 돌아왔구나, 결국 돌아왔구나. 내 사람 곁으로. 정운이 모생의 옆구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웅얼댔다. 내 도시락 내 놔! 모생이 그제서야 시계를 찾았다. 약속 시간에서 훌쩍 지난 열 두시였다. 뭐야, 어떡해! 정운이 허둥지둥하는 모생을 보며 코미디라도 보는 것처럼 깔깔 웃어댔다. 도시락 찾으러 왔는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안 나오구. 그래서 다 까먹고 잠들었구나 싶어서 처들어 왔더니 네가 소파에서 너무 불편하게 자고 있는 거야. 악몽이라도 꾸는지 얼굴 찡그리고 땀 흘리고 죽지 말라 횡설수설하고. 그래서 일 취소하고 옆에서 보고 있었지.
“난 또.. 나 때문에 못 간 줄 알고.”
“너 때문에 맞는데?” 장난스러운 표정의 정운이 모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도시락 아까우니까, 같이 피크닉이라도 나갈까? 오랜만에 우리 둘이, 하루종일 있자. 어때?”
“원하신다면 분부대로 하지요.”
그 꿈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스쳐 지나가는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모생이 지금까지 꿔 왔던 꿈들은 모두 비논리적이고, 아무리 강렬했어도 깨고 나면 순식간에 잊혔다. 하지만 백 년 전 동강으로 돌아가 나부생이 되어 보냈던 하루는 오랜 시일이 지나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바보같지만 혹시 저의 말과 행동이 과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마음에 걸려, 정운에게 넌지시 할머니의 연애담에 대하여 한 번 더 물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야기는 이전에 들었던 내용과 다르지 않아서, 모생은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모생의 앞에서 직접 이야기를 해 주는 것 마냥 생생해서 모생은 그 이상한 꿈을 한 번은 더 꿔 보고 싶어졌다.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11.
이상한 꿈을 꿨어.
부생은 휘황찬란한 침대에 폭 파묻혀 눈을 떴다. 꿈 속에서 내내 미열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모든 장면들이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흐렸다. 다만, 천영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고,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을 들은 것도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감이 그랬다. 부생은 꿈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기묘한 꿈을 꾸었다 단정하고 주어진 하루를 살아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부생의 머릿속 깊은 곳에 잠복하고 있다가, 부생이 천영에 대한 사랑 때문에 힘이 들 때면 수면 위로 올라와 마음 한 켠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아련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너무도 따스했다. 부생은 도대체 어떤 꿈을 꾸었기에 이토록 오래 남아있는지 궁금했으나, 일생동안 같은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총을 몇 발이나 맞았을까, 부생은 자신이 곧 죽으리라 직감했다. 죽음은 잔인하다면 잔인하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부생은 자신의 삶을 천영을 구하는 일에 바쳤기에, 꽤나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어지고 나면 더 이상 지켜 줄 사람이 없는 것이 걱정이기는 했지만, 천영은 스스로를 구할 줄 알았다. 사실, 이렇게 제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천영에게는 불필요할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런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어 천영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안겨 주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부생은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려도, 몇 번의 기회가 주어져도 천영을 구하는 선택을 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 온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욕심이었다. 천영은 제가 천영을 구했다 생각했겠지만, 사실 천영이 저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생은 천영이 선물해 준 이 멋진 삶을 반지로서 마무리하고자 했다. 제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부생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천영에게 내민 순간, 제가 이 반지를 끼워주지 못하리라 예감했다. 그리고, 평생의 주마등이 스쳐지나가야 할 상황에 부생의 머릿속에는 어이없게도 오래 전에 꾸었던 꿈 하나가 떠올랐다. 부생이 힘들 때면 언제나 희망을 일깨워 주었던, 고통이라는 수조 속에서 끝없이 침전하는 저를 끌어올려 주었던 그 꿈이. 마치 마지막 마중을 나와준 듯 했다.
일생의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부생은 비로소 그 꿈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꿈에서 저는 천영의 손녀를 만났다. 천영은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아이를 낳아서, 천영이 제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아남은 것이 분명했다. 단천영이 나부생 없이도 다른 가족을 만들 것이라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또한, 부생은 이제 정운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제가 천영을 위해 준비한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록 천영에게 직접 반지를 끼워 주지는 못했으나, 미래의 누군가가 천영의 손녀에게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 반지를 끼워 준다 상상하니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나부생은 그걸로 되었다. 부생은 천영의 얼굴을 영원히 기억하기라도 할 듯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바라보다, 이내 감은 눈을 영영 뜨지 않게 되었다. 부생의 눈꺼풀 뒤로 천영의 웃는 얼굴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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