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준쟁...인데 농구안하고 배구함
2023.08.28.
혹시나 싶어 적어 본 간단 배구 설명입니도...
문득 그 날들이 떠오른다.
흔들리는 버스 안. 미세한 진동은 서늘한 공기를 타고 천천히 퍼져 나갔고. 소근거리는 소음들이 거슬리지 않게 귓바퀴를 맴돌았다. 잠에 빠져들기 딱 좋은 환경이었으나 그 날만은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했다. 그는 제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는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끝도 없이 펼쳐지던 비슷비슷한 농가의 풍경들. 고개를 숙이지 않은 벼와 햇빛을 반사하는 비닐 하우스, 새파란 하늘과 초록 지붕의 1층집 같은 것들. 그 시기를 떠올리자면 그런 것들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펼쳐졌다. 그것들을 한참동안, 턱을 괴고 바라봤었다.
정규 시즌은 10월부터였으나 매년 여름이면 일주일간 컵대회가 열렸다. 두 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를 치른 뒤 상위 두 팀이 토너먼트로 맞붙어 준결승전과 결승전을 치르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 해의 컵대회는 강원도의 영산시에서 열렸다. 영산시는 세빛금융의 연고지인 송주시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그는 지난 해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아 세빛금융에 입단했다. 잠시의 틈만 생겨도 곧바로 눈을 붙이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악몽을 꾸었지만 그 꿈이 기껍게 느껴지곤 했다.
영산시로 가는 길에는 재유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와 재유는 같은 세빛금융에 입단해 혹독한 2년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프로에서 처음으로 받은 휴가의 일부를 부산 여행에 사용했다. 구단 유튜브에 업로드될 브이로그를 위해서였다. 재유의 메시지는 브이로그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유튜브 담당 PD에게서 그와 재유가 찍은 영상을 살릴 수 없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손에 쥐어 본 것이라곤 공 밖에 없는 두 초보자는 캠코더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그 결과 소리가 하나도 녹음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상 속에는 입을 버끔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만이 가득하다고 했다. 그는 그 소식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저 모교를 방문하고 바다를 보고 해산물을 먹을 뿐인 평범한 여행이었음에도.
아니다. 그건 그저 그런 평범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는 그 여행에서 재유에게 이별을 고하려 했다. 그렇기에 그 여행이 세상 밖에 공개되지 못하고 오직 둘만의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별을 결심한 마음이 카메라에 담길 리 없었음에도 그랬다.
그와 재유의 관계가 연인으로 재정의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숨 쉬는 것도 버거울 만큼 공기 밀도가 높던 숙소에서 벗어나고 나니 어디에 가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 공허함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고달픈 대학의 하루를 보내고 밤 늦게 기숙사의 침대에 누우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그러다 문득 휴대폰을 꺼내고, 다른 이들의 근황을 살피다 보면… 그는 재유의 삶을 볼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재유는 그가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묘하게 손질된 티가 나는 머리카락이나 피어싱이 뚫린 자국이 분명한 귓불, 미소가 익숙해진 듯한 표정 같은 것들이. 여전히 그는 그의 모든 것을 재유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재유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재유가 그가 알던 것과는 너무도 달라서, 너무도 낯설어서… 그러니까 그가 모르는 재유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차올랐고… 그래서 그는 그 감정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화면 너머로 몰래 재유를 훔쳐봤다. 색이 다른 유니폼을 입고 모르는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는 듯한 재유를 몇날 며칠 관찰하며 그는 설익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고작 그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재유는 많은 연습 시간을 함께했다. 처음에야 그의 의욕이 높았기에 그랬지만, 나중에는 둘만이 밤중의 체육관에 남아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재유가 올려주는 어떤 토스도 득점으로 연결할 자신이 있었고, 재유는 그가 어디에 있든 그가 가장 잘 때릴 수 있을 알맞은 공을 올려 주었다. 모든 공격과 수비의 합이 좋았으나 무엇보다 제일 호흡이 잘 맞았던 것은 라이트 백어택이었다. 처음 연습을 시작했을 때는 제일 맞지 않아 포기할까 고민했던 전술이 무수한 밤의 반복으로 지상고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주무기가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다른 세터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자 그는 재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재유는 그의 장점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세터였기에. 훈련을 받으며 실력이 늘어갈수록 지난날의 자신이 얼마나 부족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서히 알게 되었다. 대학 리그가 시작되고 경기에 나설 수 있게 되자 그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재유와 마주볼 때마다 다짐했었다. 언젠가 다시 한 팀에서 뛸 수 있게 된다면 그 때는 더욱 믿음을 줄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고.
재유는 좋은 세터였으나 그는 재유의 방식을 잘 알았다. 그의 학교가 재유의 학교와 경기를 할 때면 그는 팀 내에서 가장 많은 블로킹을 기록했다. 재유의 운영 패턴을 아는 것을 넘어 수많은 경험에서 흘러 나오는 어떤 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재유는 기습적으로 속공을 올리곤 했었지, 같은 순간적인 판단들이 본능처럼 튀어나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유도 그를 잘 알았다. 그의 스파이크는 높은 확률로 재유의 손끝에 걸렸다. 비교적 단신으로 높이에 부담감이 있는 재유였음에도 그를 상대할 때면 장신 선수들보다 나은 유효 블로킹을 기록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그와 재유는 짧은 눈맞춤을 한 뒤 각자의 학교로, 각자의 소속 팀으로 돌아갔다. 밤을 새워 나눈 문자 내용에는 배구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스텝 밟는 폼만 봐도 강타인지 연타인지 티가 난다느니, 운영 패턴을 바꾸는 게 좋겠다느니, 서로 공격에 가까운 논쟁을 이어 나가다가도 언제나 보고 싶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보고 싶다. 그 짧은 말에는 미처 전하지 못한 많은 바람들이 담겨 있었다. 휴대폰을 덮고 나서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재유와 같은 팀에서 배구를 하는 상상을 했다. 지친 몸은 금세 그를 잠의 세계로 이끌었으나 그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그는 미래 속에 재유를 빠짐 없이 그려넣었다.
그러나 정말로 같은 프로팀에 입단하게 되자 마음이 사뭇 달라졌다. 십대 시절처럼 같은 곳에서 연습을 하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잤다. 방이야 달랐지만 여전히 눈을 뜨면 금방 재유를 볼 수 있었다. 좋았다. 좋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정신 없이 훈련을 소화한 뒤 숨을 고를 때면 문득 멍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재유는 그럴 때마다 그의 앞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또 무슨 생각에 코 빠져 있노. 혼잣말을 하듯 그런 말들을 건네면서. 재유는 대학 졸업반에 들어서며 포지션을 변경했다. 두 번째 포지션 변경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아웃사이드 히터였다고 했다. 워낙 기량이 좋았기에 포지션을 변경한 후에도 아웃사이드 히터 후배들에게 자주 조언을 하기도 했다. 첫 번째 포지션 변경은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이루어졌다. 3학년의 졸업으로 인해 세터 자리가 공석이 되어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코트를 보는 시야와 운영능력이 워낙 좋았기에 오히려 아웃사이드 히터였을 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고, 본인도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세팅능력을 인정받아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 리그에서도 세터로서 좋은 운영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가 보기에도 대학 수준에 재유보다 토스를 잘 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러나 재유는 드래프트를 목전에 두고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의 코치는 재유의 신장으로 프로에 진출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토스 능력만을 무기로 코트에 서는 것은 대학 레벨이 한계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논리는 타당했다. 낮은 블로킹에서 오는 디메리트는 이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재유는 새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고뇌와 갈등이 있었을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재유를 코트 위에서 마주하고 나서야 그의 결정을 알았다. 그의 학교와 재유의 학교가 맞붙는 날이 재유의 리베로로서의 첫 출장일이었다. 말을 붙일 겨를도 없이 경기는 시작되었고 그가 스파이크를 때려내는 족족 재유는 그것을 완벽하게 디그했다. 그의 득점은 한자릿수에 멈췄고 그는 일찌감치 교체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재유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재유는 그제야 그에게 대학 코치의 제안을, 그간 겪었던 고민을, 그리고 결정을 털어놓았다. 이미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듯 재유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재유는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안 그래도 바쁜 시기인데 괜히 부담을 하나 더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고. 그 말에 그는 화를 냈던 것도 같다. 그 날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동안 재유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재유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 보았던 것만은 또렷하다.
녹초가 된 몸으로 잠들기 직전까지 재유의 플레이 영상을 봤다. 어두운 방 안에서 휴대폰의 화면만이 눈을 시리게 비추었다. 재유는 새 포지션에 무리 없이 적응했다. 오히려 재능이 있다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시도라도 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지면서도 화가 나기도 했다. 이미 그는 자신의 미래에 멋대로 재유를 끼워 넣고 있었기에. 그 상상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내고 있었기에. 재유의 배려는 고마웠으나 재유를 생각하며 보낸 모든 세월이 구름 너머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 것만 같았다. 불현듯 다시는 어떤 세계에 도달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재유가 그리는 미래에 자신이 있을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다가도 이내 그만두었다. 슬퍼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 때 그런 밤들을 재유에게 전하지 않았었는지. 지나고 나서야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가 재유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재유와는 정 반대로 배구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늘상 같았다. 그의 포지션은 운동을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하고, 프로에 가기까지 늘상 같은 아포짓 스파이커였다.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머리 위로 토스가 올라오는 것이 당연한 선수. 반드시 득점을 내 줄 거라는 믿음을 주는 해결사. 블로킹에 가로막힐 때도 뚫릴 때까지 몇 번이고 공을 때려내는 에이스. 그것이 그의 지향점이었다. 잠시 다른 포지션의 훈련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기대한 만큼의 효율이 나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역시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2라운드 4순위로, 재유는 3라운드 4순위로 나란히 세빛금융 스피드스타즈에 입단했다. 그 때부터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드래프트로부터 정규리그까지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아서, 프로 생활에 적응할 새도 없이 시즌이 시작되었다. 출장 시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고등학교 코치의 말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전학을 결정했건만, 겨우 프로에 와서도 여전히 그는 풀타임으로 출장할 수 없었다. 배구 경기를 진행하는 데 있어 아포짓 스파이커는 반드시 필요한 포지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로 구단에서는 아포짓 스파이커의 자리에 외국인 선수를 기용했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백업이었다. 배구의 신이 있다면 그에게 겨우 그 정도만을 허락한 것 같았다.
그는 제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깟 운명 따위 부수면 그만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도 재유를 떠올렸다.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점이 재유와 비슷한 것도 같았고, 생각이 거기까지 가 닿으면 잡념이 조금 옅어졌는데, 때로는 재유와 비슷해지기 위해 오히려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진재유라는 사람이 너무 어려워서, 그 속을 파헤치기 위해 닮은 생각을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럴 때면 재유의 눈을 마주치기가 어쩐지 힘들어서 재유를 그저 오래토록 끌어안고 있곤 했다. 재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무언가를 속삭였었다. 그는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기억해내지 못했다.
세빛금융의 주전 리베로가 입대로 자리를 비운 데다, 그의 자리를 대신한 젊은 리베로가 크게 부진하여 재유가 예상보다 많은 기회를 받았다. 대부분 후위 수비 강화 목적으로 교체 투입되어 프로 수준의 리시브와 디그도 안정적으로 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 신인임에도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점, 공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난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길게 보고 육성하기 위해 데려온 신인 선수가 첫 해부터 기대치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니 팬들로서는 10년간 수비 걱정은 덜었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입단할 때부터 운동능력보다는 멘털리티로 프로 관계자들에게 어필되었다. 프로 세계에서는 유사한 능력치의 선수라면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를 선호했다. 중요한 순간을 스스로 극복해 본 경험이 있는가. 재능이 발에 채이는 세계에서는 정신력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합격이었고 구단의 당초 계획보다 많은 기회를 받았다. 교체 투입되어 예리한 득점과 결정적인 블로킹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했다. 시즌 중후반 외국인 선수가 부진하여 그가 대신 몇 세트를 통으로 책임지기도 했다. 그의 활약과 별개로 그가 코트에 들어서면 승리의 기운이 따르는 경우가 잦아서, 팬들은 패색이 짙어질 때면 어차피 진 거 승리 토템 성준수라도 넣어 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반응이 떨떠름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신인왕을 노릴 정도의 퍼포먼스는 아니었으나 독특한 캐릭터로 이름을 알린 그의 프로 첫 해는 제대로 공 한 번 만져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방출되곤 하는 선수들에 비하면 충분히 빛났다. 그럭저럭 괜찮은 루키 시즌이었음에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 반드시 코트 위의 한 자리가 비워져 있던, 무조건 머리 위로 공이 올라왔던 그 시절을. 프로는 학교와 달랐다.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스레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 아니었다. 기용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적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저 버티고 버텨야 했다. 코트 위의, 재능과 노력이 넘치는 수많은 선수들이 나가 떨어질 때 까지, 혹은 그것들을 이길 때까지. 코트 위가 아닌 바깥이 자신의 위치임을 받아들이는 시간은 힘들었다. 고된 하루하루가 이어져도 재유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어려운 시절도 함께 보냈기에.
하지만 재유를 마주할 때면 자꾸만 과거가 떠올랐다. 자주 짓는 표정대로 길이 생긴 재유의 얼굴 위로 열아홉 시절의 무심한 얼굴이 겹쳐졌다. 기나긴 어둠을 지나 겨우 빛을 붙잡았을 때.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던 그 때를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불현듯 재유를 향한 감정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언뜻 연관성 없는 사고의 오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때 그것들은 모두 그의 안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재유와 함께할 때면 미화된 과거의 증폭된 행복을 조금씩 나누어 꺼내 먹고 있을 뿐인 것 같았다. 지금의 재유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와서는 불안과 고단함은 모두 편집되어 아름다운 순간만 남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팀원들이 그를 필요로 하고, 그도 자신있게 보답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성취감과 고양감을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대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그것을 이룬다면 무엇이든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했던 그 시절이 어째서 그렇게 눈부시다고 여겨졌던 걸까.
사랑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현재의 그에게, 그리고 재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함께 있으면 자꾸만 재현이 불가능한 시절을 원하게 되었다. 재유가 주는 안정에 취해 안주하고 싶어졌다.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손을 단단히 붙든 두 사람의 앞에는 미성숙한 과거로의 회귀만이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을 놓아야만 비로소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그래서 헤어지려고 했다. 부산 여행 둘째 날, 해가 막 지고 주위가 온통 짙은 군청색이었던 시간. 저녁을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과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속이 더부룩했고 해안의 여름이 피부를 끈적하게 내리눌렀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재유는 평소처럼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 상태로 충만했건만 이상하게 그 날따라 무언가 비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말을 꺼냈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그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있잖아…
그 말에 재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횡단보도 건너편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가로등 주변의 나무들이 초록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것들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재유를 바라봤다. 재유는 무언가를 예감하지 못한 듯, 그러면서 무감하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유는 언제나 그런 얼굴로 그를 바라봤던 것 같다고, 그는 새삼 생각했다. 그래서 말을 더는 이어가지 못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때마침 신호등의 불이 바뀌었고, 그들은 느리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맞잡은 손 사이에서는 새어나가지 못한 열감이 느껴졌다. 그는 땀을 흘리며 도대체 무엇을 채우려 했었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팀에 복귀했다. 정신 없이 하루하루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려니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컵대회를 위해 영산시로 이동하던 그 버스 안에서야 비로소 회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의 허전했던 밤공기에 대해서.
컵대회의 조별예선에서는 무난하게 2승 1패를 했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모든 팀원이 큰 실수 없이 집중해 준 덕이었다. 외국인 선수와 국가대표 차출 선수가 출전하지 않는 컵대회의 특성상 그에게 많은 기회가 부여되었다. 자리를 비웠던 주전 리베로가 제대하여 재유는 오랜 시간 출장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매 경기 교체되어 코트를 밟았다. 누군가의 대신이 아닌 그 자체로 코트 위에 존재하는 경험이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조금 들떴던 것도 같다.
그 대회에서 재유는 주로 그가 후위로 내려왔을 때 대신 들어가 수비를 했고, 로테이션이 돌아 재유가 전위로 올라갈 때가 되면 다시 그가 들어가 공격을 했다. 휘슬이 불리고 그의 번호가 적힌 푯말을 들고 있는 재유를 바라볼 때, 그리고 재유와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하고 코트를 떠날 때의 기분을 그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 재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응원의 말을 건네거나 상대 팀의 정보를 물어 왔다. 그는 웜업존에 서서 재유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재유도 그가 재유의 번호가 적힌 푯말을 들고 있을 때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시합 중의, 두 사람이 짧게 스치는 그 순간에 그 많은 것들을 물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지워내려 해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마음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어느 한 때와 같은 것들이.
사건은 준결승전 도중에 발생했다. 세빛금융이 먼저 2세트를 따내고 셧아웃 승을 향해 마지막 한 세트만을 남겨 두고 있던 상황. 10점대에 진입한 두 팀이 시소게임을 유지하고 있을 때 세빛금융의 선발로 나왔던 세터가 쓰러졌다. 블로킹 후 착지 과정에서 발목에 이상이 생겼다. 군입대와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그 대회에서 경기를 뛸 수 있는 유일한 세터였다. 다음 경기는 기권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작된 경기를 중단하기는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세터 경험이 있는 재유가 세터로 출장하기로 결정되었다. 재유가 리베로로 등록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공격수와의 합도, 수비 동선도 맞춰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으로 경기에 나온다는 것은 선수 본인에게도, 함께 뛰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리스크가 컸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상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유가 세터로 나서는 것이 최선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 코트에서 뛰는 것은 처음이었다. 등 뒤로 작전을 지시하는 재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그가 그동안 바라 왔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자연히 알았다.
리베로라도 토스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재유의 토스는 어색하지는 않았다. 첫 토스는 전위 레프트로 향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깔끔한 C퀵이 득점으로 연결되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환호성 소리가 뒤늦게 고막을 때렸다. 재유의 토스를 받고 공격을 성공시킨 선배가 재유에게 엄지를 치켜 올렸다. 관자놀이에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재유는 그제야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에게 털어놓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안정적으로 올라온 리시브에 감탄했다고도, 이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것은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존경심이었다고.
세빛금융의 서브가 네트 너머로 날아갔고, 상대팀은 그것을 받아내어 공격으로 연결했다. 세빛금융의 리베로는 예리한 연타성 공격을 가까스로 퍼올렸고, 재유는 전위 라이트로 토스했다. 그 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스무살도 채 되지 않았던,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한없이 어리던 시절 무수히 맞춰 보던 호흡이었다. 그래, 너는 항상 그랬지. 너는 눈 한 번을 깜빡이지도 않고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었어. 그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타이밍에 도움닫기를 했다. 정점에 올랐을 때, 가장 높은 곳에서 때려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스파이크.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그런 쾌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공은 그의 기억 속 감각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그는 급하게 공을 상대 블로킹에 쳐냈다. 약간 삐끗했지만 터치아웃 득점으로 이어졌다. 손바닥에는 찜찜한 감정이 남았다. 재유의 토스는 완벽하다. 완벽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토스가 아니었다. 그였다.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기에 대학에 진학한 후로도 얼마간 키가 자랐다. 드래프트를 신청할 때도, 입단 후 메디컬 테스트를 받을 때도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근육량이 늘었고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새로 배우기도 했다. 그는 그제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가 이미 과거의 어느 한 순간으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의 호흡으로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자연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 너무도 많이 변해 버렸다는 것, 과거로부터 이미 멀리 떠나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안정적인 리시브가 올라왔고 재유는 다시 라이트로 토스했다. 여전히 그의 높이에 맞지 않았다. 그는 빈 공간을 노려 연타성 득점을 했다. 재유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는 좋았다고 말했다. 부담 없이 공을 올려 달라고도 말했다. 전부 해결해 주겠다고도, 걱정하지 말라고도. 찰나의 타이밍에 많은 말들을 했다. 어쩌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눈을 마주쳤을지도. 그 순간 많은 것이 전해졌을지도.
팀 내에서 정식 세터로 합을 맞춘 적이 없기에 미들 블로커진을 사용하기는 무리였다. 그렇기에 토스는 자연스레 좌우 날개로 편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유는 편안하게 경기를 운영해 나갔다. 생각해 보면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훌륭한 세터였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재유는 계속해서 그에게 토스했고, 토스는 계속해서 빗나갔다. 그는 그것을 득점으로 연결하기 위해 손목을 비틀기도 했고, 왼손을 쓰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공은 그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반드시, 무조건.
로테이션이 돌아 그가 후위로 내려갔을 때 그의 번호가 적힌 푯말을 들고 교체를 기다리는 재유는 없었다. 그 대신 재유는 그의 대각에 서서 수신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점수가 20점대에 접어들며 양 팀의 집중력이 높아졌다. 랠리가 길어지며 숨이 가빠왔고 복잡한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공이 넘어오자 그는 관성적으로 공격 준비를 했고, 문득 재유가 자신에게 토스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본능과도 같은 예언처럼 재유는 후위에 있던 그에게 공을 올렸다. 무수히도 맞춰본, 그들의 자랑이었던, 다시는 해 볼 수 없을 것 같던 라이트 백어택이었다. 올라온 공은 그의 높이와 속도에 딱 맞았다. 미처 상대의 블로킹이 완전히 뜨기도 전에 공은 바닥에 세차게 내리꽂혔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유의 표정을 통해 그가 온 몸으로 기뻐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따름이었다. 그는 그저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새삼스러운 감각이었다.
경기는 상대의 서브 범실과 세빛금융의 서브 에이스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피가 몰려 붉어진 오른손 바닥을 한없이 쳐다봤다. 다시는 그런 공격을 할 수 없을 줄 알았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체감을 맛볼 수 없을 줄로만 알았다. 현실을 실감한 후에야 그는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단체로 환호성을 지르고 코트를 뛰어 다닌 뒤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재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재유는 짧은 시간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훈선수로 선정되어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드물게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승리의 기쁨보다는 깨달음의 허탈함에서 온 웃음이었다. 그가 재유와 나누고 있던 것은 과거의 모방이나 회귀의 소망이 아니었다. 그 명료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자신이 바보같았고, 더듬거리며 인터뷰를 하는 재유의 얼굴이 자신보다도 더 바보같아서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그의 미련함을 안다. 항상 먼저 행동하고 나서야 생각이 뒤따르는 조급한 성미도, 깊게 생각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적 없는 인생사도. 정말 헤어지고 싶었던 대상은 재유가 아니었다. 대회가 끝난 후 그와 재유는 다시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브이로그용 영상을 다시 찍기 위해서였다. 유튜브 담당 PD는 만류했지만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처음 갔던 여행과는 사뭇 다른 여행이었다. 그와 재유는 지상고의 체육관 안에서 공을 주고받았고, 전복 라면을 먹으며 숙소에서의 기억을 떠올렸고, 바다를 바라보며 미래를 나누었다. 우리 진짜 재미 없다. 이거 살리려면 피디님 고생하시겠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함께였다.
밤바다를 말 없이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층 더워진 날씨에 목 뒤로 땀이 흘렀으나 두 손 안의 열기는 그대로였다. 대화도 없이 느릿한 걸음으로 걷던 도중 그는 가로등 빛에 나뭇잎이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온통 새카만 가운데 손바닥 같은 녹색 이파리만이 밝았다. 맹꽁이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길에서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벌써 두번째였다. 둘 사이가 비어 있다는 느낌. 그리고 무언가로 채워 넣어야 할 것만 같은 강박.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운을 뗐다. 그 무엇인가가 그의 등을 밀었던 것 같다.
있잖아…
재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봤다. 그 얼굴을, 언제나 한결같이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던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 때 마저 하지 못했던 말들이 이어졌다. 비어 있다고 느낀 것은 내 안이 말들로 부글거리며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안과 밖이 너무도 달라서, 그 비대칭을 깨고 싶어서 그런 거였구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입이 열리고 난 뒤였고, 튀어나오는 말들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우리 같이 살자.
지금도 같이 살고 있지 않나.
그런 거 말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면서.
어디 살라고.
글쎄… 송주시?
송주시? 숙소 바로 옆에? 굳이?
…우리가 다시 시작한 곳이니까.
그 말에 재유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먼 하늘을 바라봤다. 계속 함께… 이렇게… 미래를 향해 가고 싶었다. 원점이 있어야 먼 곳을 내다볼 수 있는 거니까, 발 붙일 땅이 있어야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거니까… 너는 나의 시작점이니까.
문득 고등학생 시절 함께 야간 연습을 한 뒤 밤하늘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별은 보이지 않았고 희끄무레한 구름만이 무거운 몸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단 것을 자제해야 했음에도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숙소를 멀리 돌아 한참 헤매며 찾아갔었다. 그 때부터 재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그런 날들을 생각하며 두 번째 고백을 했다. 어쩌면 첫 번째 고백일지도 몰랐다.
말을 꺼내고 동의를 받은 것이 무색하게 그 후로 몇 달간 그들은 새 집을 구하지 못했다. 프로 2년차의 비시즌은 바빴고, 조금 숨통이 트이자마자 바로 정규 리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본격적으로 새 집의 조건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곰팡이가 잘 슬지 않는 집, 창이 커다랗고 탁 트인 집, 빨래가 잘 마르는 집. 그런 항목들이 서서히 채워졌다.
그렇게 그들은 오 년을 함께 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 앞에 앉아 함께 빗소리를 들었고, 주말 오후에는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피해 이불 안으로 숨어 키득대기도 했다. 시즌 중 숙소 생활을 하느라 오 년의 전부를 그 집에서 보낸 것은 아니었으나 그 집은 그들에게 애틋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그들은 싸우기도 했고, 울기도 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은 그런 집에서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얼마 전 나갔던 국제 대회에서 재유를 높이 평가한 해외 관계자가 있었다. 그 관계자는 재유에게 자신의 팀으로 올 것을 제안했고, 재유는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한국과 수준의 차이가 크게 나는 리그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 낮은 레벨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더 나쁜 조건에, 더 낮은 연봉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외 리그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재유를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재유는 니가 나한테 가르쳐 준 거다, 같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를 설득했다. 그는 재유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나누었고 결국 재유가 해외로 진출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는 언제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지 모를 연인과의 마지막 밤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겨우 잠에 들었다가도 금방 깨어나 품 안의 재유를 다시 확인하고, 다시 가물거리는 잠에 빠져드는 일을 반복했다. 바깥이 밝아질 기미가 없는 어둠인데도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상체를 세우고 앉아, 제 속도 모르고 편안히 잠들어 있는 재유를 바라보고, 그와 함께한 날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재유의 내일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대로 해가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 날, 그 호흡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몇 시간 후면 재유가 눈을 뜰 것이고, 그는 재유를 배웅한 뒤 황량해진 집 안을 돌아볼 것이다. 그는 홀로 남아 마저 짐을 정리할 것이고, 이삿짐을 본가로 보낼 것이고, 새로운 거처를 정할 때까지 서울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재유는 비행기에 실려 머나먼 타지로 떠날 것이고, 그곳의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며 낯선 음식을 먹을 것이고, 낯선 언어로 낯선 이들과 소통할 것이다.
이제 그는 재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리고 그를, 그 자신을 알고 있다. 고작 허전함 따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어슴푸레 밝아 오는 바깥을 바라본다. 그의 옆에서는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그는 습관처럼 재유의 가슴을 천천히 토닥인다. 그 박자에 맞추어 재유가 숨을 쉬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그의 심장이 뛰는 속도와 같다. 그는 소리 없이 상체를 숙여 재유를 끌어안는다. 서서히 품으로 파고들자 재유가 무의식 중에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등을 토닥인다. 그는 재유의 가슴에 볼을 대고 재유의 얼굴을 바라본다.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눈썹이 들썩인다. 그는 작게 미소짓는다.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재유와 자신이 나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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