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점심 약속

카게스가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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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아이고. 많이 기다렸어? 늦어서 미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오늘은 내가 쏜다! 돈 잘 버는 남편 있으니 쏴도 되지 않겠냐고? 우왓, 너까지 그 소리야? 하긴, 너도 많이 놀랐겠지. ...하나도 안 놀랐다고? 그렇게 티가 났나. 요즘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이거저거 알아 봐야 하지, 여기저기서 전화 오지, 동네 돌아다니면 쳐다보지. 심지어 학부모 상담 전화도 부쩍 늘었다? 상담은 핑계인 거지. 네티즌들이 참 대단하다니까. 그게 나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찾았을까. 걔가 뭐 티를 내는 애도 아니고. 정확히는 티를 낼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티를 낼 곳이 없는 거지만.

야, 나도 기사 보고 많이 놀랐다. 너도 알다시피, 이탈리아랑 여기랑 시차가 7시간이나 나잖아. 내가 잘 시간에 걔는 한창 트레이닝을 할 시간이라고. 아니면 시합 준비를 하든가. 그래도 어떻게 알고 나 잘 때 되면 꼬박꼬박 전화 걸어 주는 게 기특하긴 하지만... 하여튼, 그 날도 그냥 평소처럼 통화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뭔가 애들이 엄청 말썽이었어. 운동회 날이었는데, 계주 마지막 주자가 너무 부담스럽다고 학교를 안 나온 거야. 그래서 통화 돌리고, 애들한테 계주 나갈 사람 없냐고 들들 볶고, 결국 꼴등 해버려서 애들 달래느라 또 진땀 쏟고. 안 그래도 하루종일 햇볕 아래에 있어서 힘든데 별 일이 다 있었다 진짜. 그런 날이어서 진짜 너어무 피곤했다? 전화도 비몽사몽으로, 겨우겨우 하고 있었어. 기껏 시간 내서 걸어 줬는데 나 피곤하다고 쏠랑 내빼면 그것도 미안하기도 하고, 뭐, 나도 목소리 듣고 싶기도 했고. 자기 전에 들으면 좋은 꿈 꾸거든.

그런데 걔가 갑자기 그러는 거야. 선배, 저랑 결혼합시다. 진짜 뜬금없이. 나도 엄청 놀랐다? 근데 또 내가 지 때문에 놀랐다는 걸 티 내고 싶지가 않은 거야. 뭔지 알지.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놀랐는데 웃음은 나오고, 근데 또 피곤하고. 그래서 피실피실 웃다가 그래, 그러자. 했어. 그러고 한참 말이 없더라? 그래서 그냥 뒀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걔가 또 갑자기, 선배, 잘 자고 내일 다시 얘기해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뭐 그런가 보다 싶어서, 알겠다고 했다? 그러고 졸려서 바로 쓰러졌어. 피곤해서 그런가 자기는 또 엄청 잘 잤다? 일어나서 양치하고, 아침으로 먹으려고 과일 깎아서 식탁에 내려놓고, 티비 딱 켰는데. 세상에 글쎄. 아침 뉴스에 걔 얼굴이 나오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처음에는 뭐 부상인가 싶어서 순간 걱정됐다? 대서특필이라잖아. 근데 보니까, 그런 내용이 아니더라. 그런 내용이 아니고, 그래, 너네도 아는 그거. 지 인스타에 올린 결혼 공식 입장문, 그게 뉴스에 나오고 있더라.

입이 떡 벌어졌지. 그러니까, 내가 자는 사이에 걔는 그런 걸 준비했던 거야. 여기가 새벽일 때 거기는 아직 쌩쌩한 시간대였을 테니까. 내가 자는 사이에 걔는... 올려 버린 거야. 지 장가 간다고, 상대는 일반인이고, 식은 천천히 올린다고... 내가 진짜 미치겠어 안 미치겠어. 지금도 말하는데 미칠 것 같다.

근데 진짜, 네티즌 무섭더라. 몇 시간 만에 다 알아내고. 일반인과 결혼한다, 이 말 말고는 힌트가 없었는데. 곧바로 상대는 초등학교에서 근무 중인 일반인 남성이다, 나이는 두 살 연상,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배구부였다, 당시 포지션은 세터였다... 과거에 그 녀석이 인터뷰에서 했던 짤막한 말들을 모아 놓은 것도 봤어. 이상형은 배울 점이 있는 연상이라고 했던 것, 2세가 생긴다면 배구 시킬 거냐는 질문에 2세가 없을 수도 있다고 했던 것, 싸인은 고등학교 선배가 만들어 준 거라고 했던 것까지... 10점 차이로 지고 있다가 결국 역전해서 이긴 날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때 선배를 떠올렸다고 했던 것도 찾아 놨더라. 심지어 고교 경기 당시 중계 화면을 캡처한 것도. 와, 나 하루 아침에 유명 인사 됐잖아. 얼굴 팔린 거야 뭐 상관 없기는 한데 애들이 자꾸 물어봐서 귀찮아 죽겠다. 내가 안 가르치는 전혀 모르는 애들까지 쫄래쫄래 따라온다고.

아니 그리고 나야 뭐 나지만, 그 녀석은 선수인데. 경기 전날 저녁에 공지 띄우는 미친 자식이 어디에 있냐고. 팀에도 민폐잖아. 솔직히 나에 대한 건 괜찮은데 괜히 주목 받아서 팀 분위기 어수선해질까 봐 그거 하나 마음에 걸리더라. 자기 전에 전화할 때 마구 혼냈지. 그 자식은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에 전화한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도 미안하지. 일부러 하루종일 연락 하나도 안 했더니 전화할 때 목소리부터 살짝 조심스럽더라. 좀 안쓰러워서 마음 약해질 뻔 했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니까. 이제 어른이고, 한 팀을 이끄는 야전사령관인데 책임감을 가져야지. 지 인생이 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고. 근데 걔가 그러더라, 자기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잘 안다고. 근데 조급했다고. 알지, 나 원래 새벽에 경기 있다고 기다려서 생방송으로 보고 이런 스타일 아닌 거. 근데 그 날은 그냥 오랜만에 중계를 봤어.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데, 잘 하더라, 그 자식. 허탈할 정도로 침착하게 잘 하더라. 괜히 걱정한 거지. 역시, 바보는 걱정하는 거 아니라니까. 평범하게 셧아웃승 해버리고, mvp 인터뷰까지 따내더라.

경기뿐 아니라 사생활 관련해서도 질문이 들어가더라고. 당연하지. 그거 물어보려고 mvp로 선정한 거였겠지. 우선 결혼을 축하한다, 경기 직전에 그런 발표를 해버려서 마음이 뒤숭숭하지 않았냐, 어떻게 멘탈을 잡았냐, 그런 질문을 하더라. 그랬더니 걔가 그러더라. 경기 외적인 부분에 의해 흔들리는 모습은 그 사람이 가장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고 경기 전에 팀에 방해된다고 엄청 혼났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혼났다는 부분에서 중계진이 막 웃더라. 그러더니 곧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영상 편지 하나 쓰라고 하더라고. 걔는 살짝 긴장한 것 같았어. 인터뷰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닌데. 눈동자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러더라. 지금쯤 아마 자고 있을 텐데, 잘 잤으면 좋겠다고. 아프지 말고. 그리고 오늘도 힘냈으면 좋겠다고. 별 얘기도 아니더라. 근데 나는 걔의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아. 그렇게 떨면서 말하는 걸 보니까 저거 누가 데려가나 싶고. 나 아니면 누가 챙기나 싶고.

몰랐는데 나 은근히 관심 받는 거 좋아하나 봐. 인터넷에서 내 얘기 하는 거 찾아 보니까 재밌더라고. 물론 이상한 말도 있기는 하지. 근데 막 그런 거 있잖아.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상형이 되고 싶었는데 상대는 고등학교 배구부 선배였다니, 나는 절대 충족할 수 없는 조건이었구나, 이런 거. 고교 시절 선배와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다니, 너무 안정적이잖아, 평소 카게야마 플레이 스타일이랑은 정 반대, 이런 것도 재미있고. 졸업한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선배라고 부르는 거 귀여워, 이런 말도 있더라. 그러게, 그 녀석 왜 아직도 선배라고 부르는 거지. 맞다, 그 시절 카라스노 백업 세터 응원했었는데,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나 궁금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건 진짜 신기하더라. 나를 아는 사람도 있었다니. 오랜만에 고등학생 때 일들도 하나씩 떠오르고. 그 땐 정말 즐거웠었는데.

그 녀석도 어딜 가든 결혼 질문을 받아서 곤란한 모양이야. 얼마 전에는 전화하다가 문득 우리 얘기를 어디까지 해도 되냐고 묻더라. 그래서 뭐든 다 말해도 된다고 했지. 그 바보가 선 넘는 발언까지 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퍼지면 걔가 내 거라는 게 만천하에 알려지는 거니까. 나야 좋지 뭐. 얼마 전에는 애인도 배구를 했으면 평상시에 배구 관련 피드백을 받지는 않냐는 질문에, 걔가 그러더라. 나의 전문성과 팀 코치진의 능력을 존중하기 때문에 플레이 관련해서 간섭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기세나 관계 측면에서는 제법 지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지난 경기에서 우리 팀 아포짓 스파이커가 연속으로 라인 아웃 범실을 한 적이 있다. 그럴 때 선배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봤다. 그래서 최대한 웃으며 격려하고 힘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경기 영상을 본 선배가 풀 죽은 동료에게 왜 그렇게 무섭게 압박하냐고 물었다. 나는 웃은 거였는데... 이런 면에서는 아직도 선배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 같다. 너무 재미있지 않아? 그게 웃은 거였다니. 아직도 그 녀석 표정이 읽히지가 않는다니까. 나 참. 어쩔 땐 참 뻔한데, 어쩔 땐 참 황당하고.

짓궂지만 결혼하면 신혼집은 어디에 꾸릴 생각이냐고, 배우자분도 이탈리아 현지에 들어오는 거냐고 묻는 질문도 있더라. 참 무례하지. 그런데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더라. 신혼집은 고향에 있을 거고, 선배가 이탈리아에 이사해 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선배도 선배의 일이 있고, 선배는 그 일을 사랑하고, 자기도 선배의 일을 존중한다고. 난 그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 안 그래도 이탈리아 따라가서 뒷바라지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종종 고민하고는 있었거든. 비시즌에 국내로 돌아올 때마다 하루도 떨어져 있지를 못하게 하더라고. 많이 외로웠나보다 싶었지. 그래도 시즌이 방학이랑 조금은 겹쳐서 다행이야. 느긋하게 여행 겸 가볼 수 있고.

요즘 기분이 어떻냐고? 뭐,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밌어. 배구부 애들은 자꾸 카게야마 선수랑 영상 통화 시켜 달라고 하고. 시차 때문에 어렵겠지만 시즌 끝나면 한 번쯤 얼굴은 비추게 해야겠어. 동료 선생님들도 처음에는 그래서 소개팅 다 거절한 거냐고 엄청 놀라더니 이제는 벌써 익숙해진 것 같아. 애인 있다고 진작 말하지 그랬냐고, 지금까지 곤란하게 해서 미안했다고 하는 선생님도 있고. 응, 직장에는 굳이 누구랑 사귄다 뭐다 말 안 했거든. 아,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청혼했냐고? 나중에 물어 보니까 그냥, 원래도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이야 했었는데, 졸려서 웅얼거리는 거 들으니까 확신이 생겼다고 하더라. 도대체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나, 뭐라나. 누가 그런 걸 듣고 확신을 얻냐고.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어서 재미있다니까.

유명인과 결혼해서 알려진다는 게 참 골치 아프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가끔은 상상해 봤던 일들이라 괜찮은 것 같아. 뭐? 당연히 미리 예상했지. 내가 그 녀석 아니면 누구랑 살겠어. 이런 식으로 청혼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두고 봐, 프로포즈 다시 제대로 안 하면 국민 파혼남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설마 그런 말 몇 마디로 때울 셈은 아니겠지. 날 이렇게 귀찮게 해 놓고! 아, 너무 내 얘기만 했나? 미안,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데 어차피 너도 이런 얘기 궁금했던 거 아니야? 엉? 행복해 보인다고? 그런가? 어라, 잠깐만. 토비오한테 전화 왔다. 미안 미안, 잠깐 전화 받고 올게.

어, 웬 일이야. 지금 거기 새벽 아니야? 응, 응. 으이구, 괜찮아, 이 바보야. 나? 지금 오랜만에 아사히랑, 아, 바꿔 줄까? 아니다, 응, 밥 먹는 중. 괜찮아, 괜찮으니까 계속 말해 봐. 목소리 더 들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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