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파도가 치는 곳으로

도섷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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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피스텔 현관으로 내려오던 중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서호가 보였다. 밤샘 팀플을 한다더니 척 봐도 피곤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건학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현관 유리문을 밀며 서호를 소리쳐 부르려던 순간, 현이 옆에서 튀어 나와 건학의 어깨를 톡톡 쳤다. 고생하는 거 보기 싫으니 제발 집 앞에서 기다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또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학이 한숨을 누르면서도 웃으며 현에게 왜 벌써 나와 있느냐 묻는 사이 서호가 가까워졌다. 정신이 쏙 나갔는지 후드를 푹 눌러 쓴 서호의 눈에는 귀소본능만이 남아있을 뿐 초점이 없었다. 건학이 그대로 지나치려는 팔을 붙잡고 나서야 서호는 건학을 알아챈 듯 보였다.

“어어. 웬 일이야, 아침부터.”

“웬 일이긴. 오늘 약속 있어서. 이제 들어오는 거야?”

“으응. 씻고 바로 잘라고.”

“얼른 올라가. 피곤하겠다.”

짧은 대화가 끊어질 듯 이어지자 현이 건학의 손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누구셔?”

그제야 건학이 아, 소리를 내더니 현에게 서호를 소개했다.

“내가 항상 말했던 이서호 형, 나랑 같이 산다던.”

“아, 너랑 그렇게 친하다던 그 분이 이 분이셔?”

“어어.”

무심한 듯 깔끔하게 차려입은 현이 서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서호는 여전히 회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눈까지 내려오는 앞머리를 넘기지도 않은 채 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아, 네.”

눈높이가 서호보다 조금 높은 현이 서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건학이 남자친굽니다. 앞으로 종종 뵈어요.”

“아...”

서호는 눈이 부신 것처럼 잠시 눈을 깜빡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붙잡은 손은 서호의 것보다 조금은 딱딱하고 조금은 컸다. 자칫 거칠어 보일 수 있는 손이었으나 왼손 약지에 반짝이는 은색 반지가 억센 이미지를 중화했다. 서호는 피곤해서 더 이상 못 버티겠다며 자리에서 벗어났고 건학과 현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현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건학의 어깨를 한 팔로 감쌌다. 건학이 눈을 흘겼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네가 얘기했던 거랑 좀 다른 분위기여서.”

“뭐가?”

“아니야. 영화 시간 늦겠다. 얼른 가자.”

“어엉...”

2.

뜨거운 물로 온 몸을 적신 서호가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대충 던져둔 채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호는 그저 천장을 바라봤다. 잠을 자지 못해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지만 그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지금은 과제와 팀플에 파묻혀 사는 평범한 공대생 신분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호는 유명 기획사에 소속된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운 좋게 이름 있는 회사에 입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서호는 결국 데뷔라는 꿈을 이뤄내지 못한 채 일반인 신분으로 돌아왔다. 스물넷, 샛노랗게 어린 나이에 서호는 이미 늦었다는 말을 들으며 수능 공부를 했고 가수가 되기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했다. 그렇게 스물다섯에는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처음 회사에서 나왔을 때는 더 이상 부모님께 폐를 끼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고된 연습생 생활이 가르쳐 준 가장 쓸모 있는 가치는 끈기였다. 열심히 노력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몇 년을 보내다 시간을 쏟으면 쏟은 만큼 되돌아오는 일 년을 보냈다. 서호는 누구보다 바쁘게 지냈으나 회복은 그늘진 곳에 쌓인 눈이 녹듯 느렸다. 겨우 몸 누일 공간을 얻을 돈을 마련했을 때 건학이 회사에서 나왔다. 스물넷, 서호가 결단을 내렸을 시절과 같은 나이였다. 서호는 일 년간 이어 오던 상상을 그만두기로 했다. 가수가 되기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가질 수 없었을 미래를 선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학은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서호의 비좁은 원룸에 짐을 풀었다. 건학의 부모님께서 서호에게 매달 일정한 금액을 보내 주었지만 서호는 그것을 차곡차곡 모으기만 했다. 서호가 지루한 강의를 듣고 라떼 위에 크림을 듬뿍 올리고 밴드 동아리 연습에 나가고 꽐라가 된 선배 동기 후배들을 나르는 동안 건학은 착실히 합기도 도장에 다녔다. 싱글 침대에서 함께 잠든 지 꼭 일 년이 지나자 건학은 서호와 같은 대학 경호학과의 신입생이 되었고 서호는 건학의 집에서 보내 준 돈을 보태 방이 두 개 딸린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새 집으로 입주한 첫 날이 되어서야 서호는 건학에게 왜 연습생을 그만두었는지 물었다. 건학은 의미가 없었다고 답했다.

지난 몇 년간 무수히도 많은 추억을 쌓았다. 건학과 함께한 기억의 개수는 함께한 날들의 수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서호가 떠올리는 것은 이미 사라진 시간이었다. 지워내고 무시하여 아예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감정의 덩어리였다. 그 시절이 정말로 자취를 감추었다면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있는 걸까.

가장 친한 사이,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 말끔하게 정립된 관계의 이면에는 서호와 건학이 남몰래 눈을 맞추고 입술을 맞대었다는 사실이 숨어 있었다. 포장을 망가뜨리지 않은 채 영영 간직하고 싶다는 이유로 꼭꼭 숨겨 둔 진실이.

지금도 당장 눈을 감으면 그 때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새벽, 지하 연습실에는 창문이 없다. 등을 많이 켜 두지 않아 불빛은 희미하고 서호와 건학은 거울에 기대어 앉아 있다. 반대편은 황토색 벽이기에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이미 모두 퇴근한 지 오래되어 이십 층 건물 안에 오직 서호와 건학만이 숨을 쉰다. 등 뒤로 짚은 손바닥이 간지러워 무게중심을 옮기다 보면 온도가 다른 두 손가락이 짧게 스친다. 그 찰나가 아쉽다는 듯 두 손은 천천히 맞붙고 땀에 젖은 앞머리 아래의 눈이 마주치며 숨을 고르던 두 입술이 가까워진다. 짧은 접촉 뒤 잠깐의 사이를 두고 다시 깊게 맞물린다.

그 순간이 끝난 뒤에는 둘 중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유라든지, 감상이라든지, 치밀어오른 감정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이제 눈을 감으면 상상 속의 연습실에는 서호가 아닌 현이 있었다.

3.

팀 프로젝트 발표 여러 개가 겹쳤다. 서호는 침착하게 학식으로 저녁을 때운 뒤 코인 노래방에 가 천 원어치의 목청을 높이고 책상과 이불과 그리마가 기다리는 과방으로 돌아왔다. 노트북 앞에 앉아 팀원들과 씨름하고 있으려니 좆 됐다는 감각이 물 밀 듯 밀려 왔다. 어, 진짜 좆 됐다. 서호는 먼지 냄새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휴대폰을 꺼냈다. 이거 기한 못 맞출 것 같은데. 이거 내일이 발표잖아. 몇 교시더라? 새벽 한 시는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이미 정신이 빠진 서호가 입으로 생각을 술술 뱉었다. 마찬가지로 정신이 빠진 팀원이 친절하게 답을 했다. 3교시.

아, 진짜 큰일 났네. 집에 못 가겠다. 그럼 지금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날밤 까야겠다. 팀원이 그래라 그럼, 깨워 줄게. 하고 대답했다. 결심이 서자마자 서호는 건학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가 무섭게 금세 통화가 연결됐다.

‘어.’

웅성거리는 소음이 건학의 목소리 뒤로 깔려 있었다. 오늘 어디 간다고 했던가? 그런 소리 못 들은 것 같은데.

“건학아 너 어디야?”

‘어? 왜?’

“아 나 내일 발표 있는데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서. 발표할 때 입을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하려고 했지. 바쁘면 됐고.”

말끝을 흐리며 서호가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돌아눕자 동기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눅눅한 냄새가 스쳤다.

‘아니야, 갖다 줄게. 안 바빠.’

“그래? 그럼 고맙지. 근데 지금 어디야? 약간 시끄러운데.”

담요를 끌어올리곤 서호가 눈을 감았다. 들이붓듯 마신 카페인 때문에 몽롱하면서도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 있었다. 자리를 옮겼는지 소음이 사라지고 건학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렸다.

‘밖인데 이제 들어가려고 했어, 좀만 기다려.’

“어엉 그러면 천천히 와~”

‘너 지금 졸리지?’

“웅 그래서 좀만 잘라고...”

‘알겠어 그럼 끊는다?’

“어엉...”

그 말을 끝으로 서호는 잠에 들었다. 팀원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딱 한 시간이 지난 후였고, 소파 옆에는 셔츠와 슬랙스가 담긴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통화를 종료한 기억이 없는데 휴대폰은 충전기가 꽂혀 탁자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일으키니 목 아래까지 덮여 있던 담요가 밀려 내려왔다. 과실에 굴러다니던 낡은 담요가 아닌 부드럽고 뽀송한 담요가 다리 위로 구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잠결에 건학을 봤던 것도 같았다. 건학이 제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던 것도 같았고, 건학의 귀에서 못 보던 피어싱을 발견한 것도 같았다. 카페인 탓에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던 서호는 상념을 멈추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양 손으로 제 볼을 몇 번 때리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발표를 무사히 마친 뒤 서호는 건학에게 제 사진과 함께 감사 인사를 보냈다. 네 덕에 겨우 살았으니 밥을 사겠다는 오버 섞인 말에 건학은 우리가 그런 거 따질 사이냐고 답했다. 서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서호는 조금 실망했다. 그리고 그 실망의 이유를 거울 앞에 서 단추를 하나씩 풀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직접 골라 제 돈 주고 산 옷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건학에게 건학이 가져다 준 옷을 입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었다. 서호는 어깨를 으쓱하곤 옷을 정리하여 옷장에 넣었다.

4.

종강 후의 술자리는 언제나 기이할 정도로 스퍼트가 일렀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대학생의 정신상태가 알코올에 알딸딸하게 적셔진 주정뱅이의 것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서호도 밤샘으로 인한 도파민에 올라타 소주잔을 채웠다. 안주와 물을 열심히도 챙겼으나 애석하게도 서호의 간은 얼마 못 가 백기를 들었고, 서호는 밤 열 시가 겨우 넘은 시간에 테이블 위로 털썩 엎드렸다. 기분이 좋았고 마음껏 크게 웃고 싶었으며 뭐든 덜컥 약속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어서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미동도 없이 엎어진 서호를 보며 동기들은 이서호가 죽었다며 낄낄댔다. 한참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민서가 소맥을 홀짝이다 서호를 집에 보내자고 말했다. 서호와 함께 사는 친한 동생이 있으니 그 아이를 부르면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서호가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손만 높이 올려 설레설레 저었다.

“야 부르지 마, 부르지 마. 걔 오늘 애인 생일이어서 하루종일 같이 보낸다고 했단 말이야. 부르면 죽는다 진짜?”

그러나 술에 거나하게 취한 청년들은 친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무서워 보이지만 말을 붙이면 살갑게 답하고 이상할 정도로 놀릴 때 타격감이 좋은 서호의 룸메 동생을 술김에 보고 싶은 것 뿐이었다. 서호의 친구들은 학교를 오가며 건학과 마주친 적이 부지기수였고, 이미 건학과 인사에 통성명까지 마친 지 오래였다. 나이로 따지자면 대부분 건학보다 아래였으나 친구들은 서호에게 동화되어 건학을 어쩐지 동생처럼 여기게 되었다. 양반은 아닌 듯 마침 테이블 위에 놓인 서호의 휴대폰이 울렸고 잽싸게 화면 위로 뜬 이름을 확인한 주정뱅이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알코올의 해일에 함락된 서호는 눈을 감은 채로 조그맣게 안 돼, 안 된다니까...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탁자 위로 더운 숨만 내뱉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서호는 이미 제 방 매트리스 위에 있었다. 입고 나갔던 옷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로 이불까지 곱게 덮고 있었다. 사방이 캄캄하고 조용했다.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죽을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양 옆으로 돌리니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한 발을 딛자 몸이 휘청거렸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옆으로 누우니 움직이기도 귀찮아졌다. 문이 열리며 건학이 들어왔다. 서호는 기운 없이 눈만을 깜빡이며 건학을 올려다봤다.

“왜 일어났어? 더 자.”

“건학아...”

“왜?”

“지금 몇 시야?”

익숙한 듯 침대에 걸터앉은 건학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호의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건학은 막 잠에 들려던 사람처럼 평범한 잠옷 차림이었지만 머리는 묘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낯선 향도 풍기는 것 같았다.

“열두시 반.”

“건학아아...”

“왜, 또.”

“일찍 왔네?”

“어, 그렇게 됐어.”

서호가 더 묻지 않고 피곤한 듯 눈을 감자 건학은 이왕 깬 김에 씻고 옷 좀 갈아입으라고 충고했다. 서호는 꼼지락거리며 양말을 던지더니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건학은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정수리를 바라보며 냉장고에 숙취해소제가 있으니 더 힘들어지기 전에 마시라고 말했다. 서호는 아랑곳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잘 자,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서호는 며칠간 밤을 새운 데다 술까지 마셔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잠결에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간에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땐 해가 드는지 창밖이 어슴푸레했다. 서호는 그제야 일어나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집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적막했고 흘긋 바라본 건학의 방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닫혀 있었다. 개운해진 몸으로 서호는 다시 잠에 들었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오전 열한 시였고 더 이상 어지럽지도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냉장고에서 숙취해소제를 꺼내 마신 서호는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며 소리쳐 건학을 불렀다. 물이 끓는 동안 젓가락을 입에 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서호가 건학의 등에 업힌 채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고 있는 사진이 여러 장 와 있었다. 민서에게서 ‘야 니 동생 왤케 무섭게 생겼냐? 명절날 간만에 보면 불쑥 커 있는 사촌 동생 같음.’ 이라는 메시지가 와 있어 서호는 ‘ㅋ’을 연타했다. 서호는 저장한 사진을 다시 한 장 한 장 넘기며 확인했다. 마지못해 한 손으로 브이를 한 사진 속의 건학은 잘 입지도 않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점을 인지하자마자 문득 전날의 파편이 떠올랐다.

허연색 등. 촉감도 향기도 낯설던, 그러나 익숙하게 미지근했던 등. 그런 등에 볼을 부볐었다. 한참을 부비다 침을 흘리며 잠에 들었었다. 서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쇠젓가락이 짤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젓가락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건학의 방 앞으로 갔다. 닫혀 있던 문을 열자 빈 방이 썰렁하게 서호를 반겼다. 침대 위에는 그 희던 셔츠가 늘어지듯 걸쳐져 있었다. 어디 갔냐고 메시지를 보내니 잠깐 편의점에 왔다는 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밤새 누구도 머물지 않았던 것처럼 싸늘한 방 안에서 서호는 느리게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을 굳게 닫았다.

5.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서호는 쉴 수 없었다. 종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정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종강 후 첫 주에는 3일간의 학술답사가, 그 다음 주에는 계절학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본래 3학년은 학술답사에 동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학술답사위원장인 민서가 혼자 고학번으로 교수님들을 케어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며 울고불고 매달리자 서호는 순간의 의리에 휘둘려 답사 신청서를 제출하고야 말았다. 막상 답사 날이 닥치니 서호는 과거의 자신이 너무도 미워졌지만 그래도 새내기 시절 뭣도 모르고 납부한 학생회비의 뽕을 뽑는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답사로 인해 서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건학은 본가에 다녀 올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도 보고 집 밥도 먹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둘 중 누구도 없이 텅 빌 집을 생각할 때면 서호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허했지만 건학이 혼자서 그 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 싫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3일로 계획되었던 답사는 해당 지역의 사정으로 인해 2일로 변경되었고, 일행은 두 번째 날 늦은 새벽 차를 타고 귀가했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여섯 시였고 서호는 어느새 친해진 후배들과 기사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오전 아홉 시 즈음이었다. 서호는 어서 짐을 풀고 대강 씻은 뒤 저녁까지 잠을 잘 작정이었다.

늘 누르던 비밀번호인데 이상하게 헛손질을 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문 열기에 성공한 서호는 한숨을 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명 끄고 나갔던 것 같은 거실 불이 켜져 있었고 그간 비어 있었을 집에 묘하게 생활감이 느껴졌다. 서호는 도둑이라도 들었나 긴장하며 집 안 곳곳을 살폈다. 먼저 부엌과 베란다를 살피고, 제 방을 옷장 안까지 뒤졌다. 그리고 건학의 방문을 열었을 때 서호는 그대로 멈춰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반쯤 벗은 건학과 현이 깊게 잠든 채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드러난 몸 위에 이런저런 자국이 남아 있는 것도 같았지만 서호는 눈을 돌렸다. 인기척에 건학이 눈을 떴다. 서호는 건학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며칠 집에서 떠나 있던 탓에 무거워진 백팩을 그대로 짊어진 채.

6.

서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건학은 서호가 도망치듯 떠나자마자 현을 깨워 내보냈다. 비몽사몽한 현에게 정말 미안하다며,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내쫓다시피 등을 떠밀었다. 황급히 집 안을 정리하고 현의 흔적을 없애던 중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좋아하는구나. 내가 아직도 이서호에게 미련을 못 버렸구나. 자조적 웃음이었다. 텅 빈 집 안이 고요했다. 건학은 창문을 열었다. 뜨거운 유월의 햇살이 마구 내리쬐었다. 건학은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가겠다던 말은 진실이었다. 실제로 현을 보낸 뒤 짐을 챙겨 서호가 오기 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서호가 답사를 떠난 바로 그 날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고백은 현이 먼저 했고 건학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 건학은 그에게 진심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미 몇 번이고 데이트 도중 자리를 비운 건학은 죄인이었고 현의 부탁에 따라 귀향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서호는 서울에 없을 예정이었으니 건학이 방심한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건학은 서호만을 원했다. 쭉 그래 왔다. 마음은 천천히 스며들었고 건학은 그 시작도 알지 못한 채 휘둘렸다. 오래 전에는 서호와 다른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이서호는 건학이 조금만 내색을 하면 바로 꼬리를 말았고, 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추었다. 처음에는 답답하기만 했으나 같은 일이 반복되자 지칠 수밖에 없었다. 건학은 결국 서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서호를 알기에, 그런 서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뛰던 심장도 바보처럼 튀어나오던 말들도 시간이 지나며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행동이 무뎌졌다고 해서 감정이 무뎌진 것은 아니었나 보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정리가 끝난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마음은 한 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들여다볼수록 흐려지는 꽃향기처럼 함께 지내는 삶이 익숙해져 잠시 깨닫지 못한 것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서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스치듯 지나갔으나 건학은 그 표정이 단순한 당혹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없이 황급히 도망쳤다는 사실이 건학의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건학은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낼 때였다. 겉으로만 의리를 지키는 척 하는 가짜 연애도, 진심으로 닿을 수 없는 이서호와의 관계도. 다시는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대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제 마음을 털어놓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애매모호한 거짓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자신과 만날 다른 누군가에게도 못할 짓 같았다. 이렇게, 평생, 미련과 죄책감 사이에서 싸우며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낡아 빠진 희망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서호가 없는 집 안에서 건학은 하루 온종일 치열하게 고민했다.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 돌아온 서호는 식탁에 앉은 건학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짐을 내려놓고 건학의 앞에 마주 앉았다.

서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안 잤어?”였다. 건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호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서호는 눈알을 한참 굴리더니 참았던 것을 터뜨리듯 말했다.

“야, 뭐, 괜찮아. 너도 성인이고 다 컸는데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같이 사는 집인데 이런 상황 또 생기면 어색하니까, 어, 다음부터는 나한테 미리 연락하고. 나 피곤해서 얼른 씻고 잘게. 너도 자라. 기다리게 해서 미안.”

떨리던 목소리는 말을 계속하며 점점 차분하게 변해 갔다. 왜인지 몰라도 서호는 안도한 것 같았다. 건학은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까지 치솟았다가 점차 떨어지는 동안 내내 생각해냈던 말들을 한 마디도 내보이지 못했다. 건학의 진심은 어둠 속에 묻혔다. 새삼스럽게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그 전쟁과도 같던 시간이 무색하게 이서호는 이서호였다. 건학은 허탈하게 잘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원점이었다. 지겨운 평안이었다. 날아오른 기대들이 맥없이 처박히고 마는 죽음의 땅이었다. 건학은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늘상 겪어 왔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7.

그 날 이후로 서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굴었다. 본가로 돌아간 건학에게 심심하다며 연락을 해 댔고, 건학이 돌아오자 같이 게임을 하고 밥을 먹었다. 계절학기에 가는 길에 혼자 일찍 일어나기 억울하다며 꼭 건학을 깨우는 것도, 아르바이트 급여가 들어온 날에 값비싼 초밥을 사서 귀가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건학 역시 그대로였다. 현과 밤 늦게까지 통화하고, 현과 데이트를 하고, 현과 모텔에서 잤다. 현의 친구들을 만나고, 현이 사 준 것들을 몸에 걸치고, 현이 부르는 족족 달려 나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근 들어 묘하게 말이 많아진 서호였다. 수다스러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들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건학이 현과 만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면 “어? 오늘 같이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아 괜찮아 괜찮아! 잘 다녀와!” 하며 인사를 한다든가, 데이트를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으면 방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그 셔츠 못 보던 건데? 나중에 나 빌려주면 안 돼?”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든가, 약속을 위해 밖으로 나가려 하면 막 준비를 마친 듯한 모습으로 “나도 어차피 나가려고 했어! 같이 나가자!” 하며 굳이 1층에서 기다리는 현과 인사를 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대놓고 주의를 주기도 애매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건학의 신경을 거슬렀다. 마음 잡고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상승과 하강 없이 평탄한 삶을 좀 살아보려고 하는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서호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제 집 앞까지 데리러 온 현이 서호와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루틴이 되었고, 서호는 바쁘지도 않은지 건학이 집 안에서 부스럭댈 때마다 나와서 한 마디씩을 얹었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어 일상이 되어 가던 어느 아침, 건학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데도 서호가 끼어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향수까지 뿌린 뒤 서호의 방문을 열자 그 안에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서호가 있었다. 건학이 당황할 틈도 없이 얼른 다가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열이 올라 있었던 듯 열기가 배어들어 있었다. 구급상자에서 체온계를 꺼내 열을 재보니 38도였다. 건학은 지갑을 챙겨 초조하게 약국으로 뛰어 갔다. 증상을 설명하고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1층 현관 앞에 현이 서 있었다. 그제야 건학은 약속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았다, 아니, 약속의 존재를 그제야 겨우 떠올렸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러우니 오늘은 집에 있어줘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현은 당일에 눈 앞에서 약속을 취소당한 자신도 서럽다고 말했다. 건학은 그런 현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현은 이제 질린다는 듯 자리를 떴다. 그래,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럽지. 알지 나도. 그런데 네가 꼭 같이 있어 줘야 해? 걘 친구도 없어? 건학은 그 쉬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답을 바라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질책의 의미로 따져 묻는 것에 가까웠으나 건학은 입을 꾹 닫았다.

친구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민서로, 건학이 아직 연습생이던 시절 서호와 잠시 사귀었던 여자였다. 일식집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나다 헤어졌는데, 대학에 입학해 보니 같은 과 동기였다고 했다. 민서는 건학과 동갑이었으나 서호에게는 동생보다 친구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는 어색할 만한 상황임에도 왜인지 서호는 민서와 잘만 붙어 다녔다. 분명 자신이 서호의 곁에 없을 시절 민서가 서호를 보살펴준 적도 있을 것이다. 건학은 괜히 화가 났다. 죽을 병도 아니고 가끔가다 앓는 몸살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동요한 자신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만 가는 현과의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없던 그 자리를 대신 채웠을 민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건학은 집으로 돌아가 서호를 일으켜 약을 먹이고 그 옆을 지켰다.

벽에 기댄 건학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즈음 서호가 눈을 떴다. 건학은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서호는 상체를 일으켜 건학의 어깨를 두드렸다. 건학이 눈을 번쩍 떴다.

“괜찮아?”

“으응...”

서호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살피더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서호의 시선이 벽시계와 건학의 차림새 사이를 오갔다.

“너 왜 이러고 있어...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너는 진짜...”

아파서 기운도 못 차리는데 그런 말이 하고 싶냐?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런 말을 꼭 해야 돼? 건학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서호가 돌아누우며 “나 괜찮으니까 가도 돼.” 라고 말했을 때는 그간 참아오던 말을 쏘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왜 이러는데?”

“뭐가...”

“...먼저 도망친 거 형이잖아.”

화를 냈다고 생각했으나 튀어나온 목소리에는 물기가 스며 있었다. 건학은 버릇처럼 한숨을 참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건학은 도와 달라는 듯 간절하게 서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작 아파서 죽어 가는 것은 서호였는데도 그랬다. 서호가 몸을 돌렸다. 온통 퉁퉁 붓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물끄러미 건학을 향했다.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방황하던 건학의 시선이 결국 서호를 향했다. 젖은 눈과 메마른 눈이 서로를 담았다.

“뭐가 문젠데. 원하는 대로 친구로, 동생으로 남아 주겠다는데 왜 그러냐고. 왜 자꾸 기대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들어. 내가 형한테 뭐 잘못이라도 했어?”

열이 오른 탓인지 서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지며 건학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제 속도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서호는 가물거리는 표정으로 한참 망설이다 말했다.

“미안해.”

그 순간 맥이 탁 풀리며 건학은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 사과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답을 인지하자 자연히 정답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고...

“...아니다.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말해서 미안하다, 나도.”

“아니야... 내 잘못인데.”

멍하니 몽롱한 서호의 표정을 바라보다 건학은 탁자에 올려두었던 체온계로 다시 열을 쟀다. 열은 여전히 38도였고 건학은 다시 푹 자라고 말하며 서호의 턱 밑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제가 잘 것도 아니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서호의 가슴을 천천히 두드렸다. 서호는 무거운 눈을 뜨고 끈질기게 건학을 응시했다.

일정한 속도로 손을 움직이자 서서히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건학은 여전히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서호를 안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서호에 관해서라면 새로운 것 투성이였다. 이서호는 항상 건학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고민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고, 사랑받고 싶게 했다. 사랑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이서호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서호의 체온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건학은 죽을 사 와 식탁 위에 올려둔 뒤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 후로 건학은 서호가 깨어 있을 때는 밖을 떠돌았고, 서호가 잠들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기도 며칠, 건학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건학의 어머니에게서 냉장고에 김치 남았느냐는 안부 전화를 받고 나서야 서호는 건학이 본가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8.

오랜만에 술을 산다며 불러낸 민서는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잔을 원샷했다.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서호는 “야... 자작하면 앞에 앉은 사람 3년 솔로라는 말도 모르냐?” 하며 민서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민서는 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다시 원샷을 때렸다. 서호는 제 잔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뻥튀기를 집어먹었다.

“야...”

“뭐.”

“나 언니랑 싸웠다.”

“누가 모르냐?”

있는 힘껏 서호를 째려본 민서는 서호가 꼭 쥐고 있던 소주병을 빼앗아 제 잔에 따랐다. 3년이고 6년이고 솔로 하든지 말든지. 친구가 슬프다는데. 말이 그게 뭐야? 친군데. 서호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 앉아 뻥튀기나 마저 주워 먹었다. 친구 아니잖아... 내가 한 살 많은데. 서호가 꿍얼거리자 민서가 다 마신 소주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민서는 서호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다. 민서와 서호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엉겁결에 사귄 전적이 있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입을 준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두 사람을 어떻게든 엮어 보려는 주변인들이 많았다. 민서의 고백으로 시작한 짧은 연애는 민서의 이별 통보로 끝났다. 삼 개월 만의 일이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새벽까지 독서실에 남아 공부를 하던 중 다크서클을 퀭하게 늘어뜨린 민서가 “야. 너 솔직히 나 안 좋아하지? 헤어지자.”라고 말했고 서호는 어떠한 부정도 없이 그러자고 했다. 두 사람은 수능이 끝난 뒤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코인노래방에 가서 이별 노래를 불렀다. 둘만의 이별식이자 졸업식이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몇 달 뒤 대학에서 다시 만난 민서는 서호에게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고 통보했다. 전공 강의 오티 시간이었다. 일찌감치 강의실 맨 뒤에 자리를 잡은 서호의 옆에 떡하니 앉더니 예의상 펼쳐 놓은 실라버스에 대뜸 이렇게 썼다. ‘나연애함’ 서호는 아무리 친구로 지내게 되었기로서니 나름 구남친인데 이런 말을 왜 하나 싶었다. 서호가 민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민서는 다시 삐뚤거리는 글씨로 ‘교수가 이쪽에 관심 갖지 않게 해’라고 썼다. 뭐 어쩌라고 싶어서 서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칠판을 봤다. 민서는 그 정도의 무관심은 원하지 않았던 것인지 서호를 팔꿈치로 툭툭 치고는 마저 글씨를 썼다.

‘근데여자임’

‘헐’

삐뚤거리는 글씨 아래에 꾸물거리는 글씨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 종이에 새겨졌던 ‘여자’가 바로 방금 민서의 입에서 나온 ‘언니’였다. 새내기가 3학년이 될 때까지 만났으니 제법 긴 연애였고 민서가 서호에게 그 언니를 소개한 적도 있었다.

“이번엔 또 뭔데.”

“몰라 임마... 술이나 마셔.”

“어엉...”

서호는 다시 민서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민서의 잔에 따랐고 마침 안주가 나와 민서는 이모님께 후레시 한 병을 더 달라고 말했다. 서호의 잔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 잔 아래로 물웅덩이를 만들어낼 때까지 민서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여자친구와 싸워서 부른 주제에 민서는 더 이상 여자친구의 여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지나간 추억이나 팔아먹었다. 서호도 흥이 올라 제법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민서가 두 병을 비우는 동안 두 잔 정도는 마셨다.

처음에 시킨 오뎅탕을 거의 비우고 다음으로 시킨 콘치즈를 기다리고 있는데, 민서가 대뜸 말했다.

“야, 미안하다.”

“뭐가.”

“그 왜, 있잖아. 옛날에 내가 너한테 존나 니가 나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잖아.”

팔짱을 끼고 쿠션에 등을 깊게 기댄 서호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친구가 아닌 연인이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 두 사람만의 술버릇이라면 술버릇이었다. 서호는 등이 배기는 것 같아 후드를 뒤집어 썼다.

“그랬지.”

“근데 사실 그거 내가 너 안 좋아하는 거였더라.”

“취했냐?”

“아니, 좀 진지하게 들어 봐.”

진지하게 들으라고 하는 사람 치고 민서의 발음은 이미 꼬여 있었다. 서호는 피실피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 때는 그냥, 내가 너무 미웠는데 날 미워하고 싶지가 않았거든. ...나를 부정하고 싶지가 않으니까 남을 부정한 거지. 그래서 남탓을 그렇게 했어요.”

“그러냐?”

“어. 그니까 사실은 내가 너 안 좋아했던 거야. 미안하다. 그 때 거짓말하고 너 핑계대서.”

온 얼굴을 붉게 붉힌 민서는 입을 다물곤 물끄러미 서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서호도 더는 장난으로 웃어넘길 수 없었다.

“괜찮아. 너 안 좋아했던 거 맞으니까.”

“그리고 나 너 이용했어.”

“또 뭔데.”

“여자가 좋은데, 그게 인정이 안 돼서 너랑 사귀었던 거야. ...너 같이 잘난 애랑 사귀는데도 도무지 좋아지지가 않더라. 덕분에 인정했어. 미안하다.”

달아오른 얼굴과 숨에 섞인 알코올 향, 그리고 뭉개진 발음은 민서가 단단히 취했음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서호는 민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날 정도로 민서가 부러워졌다. 서호는 답을 하지 않고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민서는 그런 서호를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서호는 몇 번을 마셔도 익숙해지지 않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 말했다.

“좋겠다.”

의아한 눈길로 민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호는 쓰디쓴 약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할 수 있어서.”

억지로 잔에 든 술을 모두 삼켰지만 아직도 혀끝은 쓴 맛으로 인해 저렸다. 서호는 여전히 숨기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자신을 둘러싼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으며 변화된 관계가 불러올 불안정이 두려웠다. 그래, 두려웠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모두 날아갈까 봐 두려웠다.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계속해서 소중히 여기고 싶었고, 그것들이 자신을 계속해서 소중히 여겨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건학을 향하려는 마음을 쇠로 된 상자에 집어 넣어 자물쇠로 굳게 잠갔다. 변명이지만 서호는 나름대로 이러한 방식이 자신을, 그리고 건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건학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것이리라고 믿었다. 민서와 같은 사람은 저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 같았다. 술이 썼지만 스스로 절감한 비겁함보다 더 쓴 것은 없었다.

“왜 못 해?”

“나는 네가 아니잖아.”

제 잔에 직접 잔을 채우며 서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민서는 서호의 잔을 빼앗아 다시 한 번에 쭉 마셔버리곤 소주병까지 품 안에 끌어안았다. 서호가 손을 뻗자 민서가 술찔이가 왜 객기를 부리냐며 놀렸다. 그러면서 1학년 시절 갔던 엠티에서 술에 꼴은 서호가 얼마나 진상이었는지 과장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서호는 장난스럽게 돌아온 분위기에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이런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민서는 이미 굳어 버린 콘치즈를 퍼먹으며 말했다.

“근데 진짜 왜 못 해?”

서호가 답을 않자 민서는 그저 이모님을 외쳐 부르며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그 후로 자리가 파할 때까지 민서는 다시 실없는 대학 시절 이야기들이나 줄줄이 꺼냈다. 서호는 가볍게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쉼 없이 의문을 던졌다. 근데 진짜 왜 못 해? 왜? 나는 왜?

9.

진탕 취한 민서를 여자친구에게 맡기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두 시였다. 민서는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서호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게 했고 결국 서호는 멀쩡한 정신으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1층 현관 앞에는 가로수처럼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서호는 건학이 집으로 돌아온 줄로만 알았다. 지금쯤 자신이 집에 없어서 당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와 동시에 그렇다면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아쉬움이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발걸음을 최대한 천천히 늦추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해 온 것은 뜻밖이었다.

“서호씨, 맞죠.”

“어어... 네.”

“다행이다. 기다렸어요.”

“네? 저를요?”

언제나와 같이 말쑥한 차림으로 현은 서호를 향해 인심 좋게 웃어 보였다. 서호는 조금 경계하며 느릿하게 다가갔다.

“제가 좀 멀리 살거든요. 지하철 타고 두 시간은 가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막차가 끊겼지 뭐예요. 그래서 같이 밤을 새워 줄 사람을 좀 찾고 있었죠.”

“그 사람을 저희 집 앞에서 찾으신 거예요?”

“네.”

“그럼 그 사람이 설마 나예요?”

“잘 아시네요.”

뻔뻔한 현의 얼굴에 서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현을 근처 맥도날드로 데려갔다. 어쩐지 현을 집 안으로 들이기는 싫었다. 현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서호를 따랐다. 현은 한 시간이나 서서 서호를 기다렸다고 했다.

맥플러리와 맥너겟과 감자튀김을 사이에 두고 서호와 현은 마주앉았다. 현은 어쩐지 싱글벙글했고, 서호와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편하게 잡다한 이야기들을 했다. 어떤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했다느니, 옆 동네 전봇대에 고양이를 찾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대화를 나누어 볼 기회가 없었다 뿐이지 현은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여서, 서호는 조금은 웃었고 조금은 맞장구를 쳤다. 서호가 거의 손대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녹아 가자 현은 양해를 구하고 그것을 해치웠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물을 마신 뒤 현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사뿐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닮았어요. (네?) 닮았다고요. (어디가요?)

그냥... 둘러싼 공기 같은 게. (아...)

...애가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꼬치꼬치 캐물으면 또 답을 다 해 주더라고요.

생일인데, 기념일인데. 잠깐 어디 갔다 올게, 30분만 나갔다 올게, 아니면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이런 말들을 했던 게 다 서호씨 때문이었다고요. (죄송합...)

탓하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처음에 서호씨 얘기로만 알았을 땐 걔가 절 대용품으로 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에?) 딱 봐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게 훤해서요. 기분이 나쁘기는 했는데 그래도 뭐,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엔 충실한 내 애인이었으니까, 별로 신경은 안 썼어요. 결혼할 것도 아니고. 평생 만날 것도 아니고. 잘 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서호씨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나 대체품 아니었구나.

나랑 너무 달랐거든요. 다른 세계 사람 같았어요. 갑자기 쫓겨난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애초부터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 쫓겨난 것도 아니겠네요. 난 분명 걔랑 같은 땅을 밟고 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더라고요. 두 사람만 같은 세상에 살고 있었고 나는... 그냥 다른 세상 사람이었어요. 나 혼자. 아니, 혼자는 아니지. 두 사람만 같은 세상에 있었고 나는 그 밖에 있었던 거니까 혼자는 아니죠. 나는 다른 사람들, 완벽한 타인들이랑도 걔한텐 같았을 테니까.

서호씨를 만나고 나니까 그냥... 마음이 확 풀리더라고요.

나는 처음부터 안 되는 거였구나, 하고.

진짜, 평생 만날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는데,

근데...

아, 괜찮아요. 안 울어요. 그냥 좀 빡쳐서.

이 말을 내가 서호씨한테 왜 하고 있나, 그런 표정이네요. 갑갑해서 그래요, 갑갑해서. 그래서 애꿎은 사람 붙잡고 하소연하는 거예요. 서호씨 죄 없는 거 알아요. 아니다. 진짜 죄 없는 건 서호씨가 아니고 나잖아. 그니까. 나처럼 죄 없는 사람들 더 괴롭히지 말라고요. 부부사기단도 아니고 진짜. (에?) 그냥 둘이 지지고 볶고 잘 살라고요. (네?)

걔가 힘들게 하면 나한테 연락해요. 같이 욕해줄 테니까.

나 걔한테 차였거든요. (네에?) 욕 신나게 해줄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 말 놓을까요? 어차피 동갑인데. (아 넵... 아니 응...)

현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안 서호는 가만히 들었다. 그러면서 앞에 놓인 감자튀김도 집어 먹고, 물도 마셨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과 공포감이 공존했었다. 자신에게 손을 뻗는 건학을 알고 있었으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그 손을 내칠 수밖에 없었다. 건학이 자신에게 다가올 다음 순간을 기다리면서도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을 수 있는 용감함은 건학이기에, 김건학이라는 인간이 타고나길 용기를 넘치게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한 종류의 과감함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런 위선에 빠져 있었다.

여름의 태양은 뜨겁고 모든 바닷물은 짜다. 건학도 당연히 두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고뇌했을 것이고, 당연히 갈등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찾아온 구애는 당연할 리가 없었다. 이 단순한 사실을 현과의 만남을 통해 겨우 깨달았다. 나는 네가 아니어서, 그래서 못 해. 안 해. 불과 몇 시간 전 민서의 앞에서 내뱉은 말들이 비현실적이었다. 깨달음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비롯한 여러 감정들이 폭포처럼 몰아쳤다. 현은 또 다시 어느 강아지가 감동적으로 반려인과 재회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서호는 창밖을 바라봤다. 짙게 끼어 있던 구름들이 청색으로 변하며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얼른 건학을 만나고 싶었다.

10.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서호는 현을 지하철역에 데려다 주었다. 현은 손을 흔들며 서호에게 잘 지내, 라고 말했다. 서호는 그래, 라고 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산했고 간혹 일찍 일어난 새들만이 벌레를 잡는 듯 신나게 울었다. 도시 전체가 안개에 포근히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서호는 망설이다 건학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게 아팠던 그 날 이후로 처음으로 하는 연락이었다. 이른 새벽임에도 통화는 금세 연결되었다. 용기가 났다. 아무래도 용기는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위할 때 퐁퐁 솟아나는 성질을 가진 것 같았다. 휴대폰 건너편에서 건학이 한참을 망설이다 이서호? 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서호는 어쩐지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거리며 참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건학아.”

‘응?’

“왜 안 자?”

‘그냥, 형한테 전화 올 것 같아서.’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서호는 일부러 힘을 주어 조용히 걸었다. 세상이 모두 숨을 죽인 한 가운데 건학의 목소리만이 제 귀에 꽂히는 것이 좋았다.

“거기도 구름 많이 꼈어?”

‘그럴걸?’

“대답이 그게 뭐야.”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서호는 괜히 제 귓바퀴를 문질렀다. 목구멍이 떨렸다.

“있잖아.”

‘응.’

“나 전에 과제하다가 갑자기 혼자 막 머리 쥐어뜯은 적 있다?”

‘그랬어?’

“갑자기 소리 지르고 싶어서 강의 중간에 코노로 뛰쳐나간 적도 있어.”

‘재밌었겠네.’

“왜 그랬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잠시 숨을 멈췄다 다시 크게 쉬었다. 몸 안으로 새벽의 공기가 들어왔다. 서호는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답답해서.”

‘무슨 말이야.’

“나는 아직도 세상이 너무 무서운가 봐. 이게 내 마음대로 잘 안 되네. 그래도 말해볼게. 네 목소리 들으니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서호는 긴장이 되어 무의식 중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숨이 가빠왔다.

“너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그래서 너랑 평생 같이 있고 싶었어. 내가 너를 평생 좋아하고 너도 평생 나를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더 두려웠나 봐. 혹시 어긋날까 봐. 내가 뭔가 잘못할까 봐. 근데, 아직도 세상이 너무너무 무섭고 겁나는데 너를 포기할 수가 없더라. 나는... 이런 게 바로 사랑인 것 같아.”

숨이 차올라 서호는 잠시 멈춰 섰다. 말을 제대로 맞게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해가 점점 떠올라 주변이 환해지고 있었다. 서호는 구름 너머에서 밝게 빛을 내뿜고 있을 태양을 상상했다.

“네 마음에 들 만큼 내가 변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잘 할게, 미안해. 사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모르겠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 아닌가, 이제 네가 없어지려나.”

농담인 척 진담을 숨겼다. 서호는 평소에도 거짓말 속에 진심을 담곤 했다. 건학이 무언가 답을 하려 하자 서호가 말을 가로챘다.

“잘 살아보자. 건학아. 응?”

겨우 눌러 놓았던 무언가가 다시 북받쳐 오를 것 같았다. 서호는 조심히 목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골랐다.

“응? 나랑, 잘 살아보자.”

건학은 한참 말이 없었다. 서호는 정처없이 걸으며 건학의 최후통첩을 기다렸다. 집에 다다랐을 즈음 건학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 하지.’

“응? 뭘?”

‘머리 쥐어뜯고 소리 지르고 그랬다며. 그거 내 앞에서 하지.’

“무슨 뜻이야?”

‘지금도, 바보같이 혼자 고민하고 있을 거잖아. 그러니까 내 앞에서 했어야지.’

의문을 가득 품은 채 서호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관에 익숙한 크기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서호는 그 신발을 한참 바라보다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왜 이제 와.”

“어?”

“나 보고 말하지, 왜 이제 오냐고.”

“너, 언제부터...”

“나 없는 데서 쓸 데 없는 생각이나 하고.”

적당한 온도의 손이 서호의 볼을 붙잡았다. 서호는 피부로 닿는 손가락의 모양이 그리웠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당분간 볼 일 없을 줄 알고 솔직하게 말한 거였는데. 부끄러웠다. 그러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건학이 서호의 눈가를 조심히 문질렀다. 안 울었어? 우는 목소리였는데. 서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제 앞에 다가온 건학의 얼굴을 뜯어봤다. 제가 알던 건학이었다. 서호는 입술을 삐죽이다 이왕 쪽팔린 김에 한 걸음을 더 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대답은?”

“어떨 것 같은데.”

오래 지낸 사이인 만큼 서호는 건학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건학의 목소리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서호는 그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형.”

“응.”

“이서호.”

“...왜.”

“진짜 미워.”

“어?”

“진짜, 너무 밉다.”

그러면서 건학은 무너지듯 팔을 벌려 서호를 끌어안았다. 서호는 얼떨결에 건학의 어깨 위로 팔을 뻗어 마주 끌어안았다. 건학은 한참동안 중얼거렸다. 너무 짜증나. 미워 죽겠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진짜 미워. 그러면서도 절대 싫다,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호는 건학이 진정할 때까지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어느새 조용해진 건학이 몸을 떼어냈을 때, 서호는 물끄러미 건학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손끝이 닿고 손바닥이 맞붙으며 눈이 마주쳤다.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다시 맞물렸다. 그렇게 정해진 순서처럼 기억에 이끌려 코를 부비고 숨을 나누었다. 긴 호흡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안 도망가.”

“변하지 마.”

누가 먼저인지도 모를 만큼 같은 순간이었다. 이내 두 사람에게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닮아 버린 웃음 소리에는 눈물도 애정도 시간도 모두 모두 실려 있었다.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함께 아침을 먹고 낮잠을 잔 뒤 미뤄둔 영화를 봤다. 저녁을 시켜 먹고 산책을 한 뒤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가위바위보로 씻을 순서를 정하고 뽀송한 몸으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지만 불투명한 커튼을 통과한 빛이 해와 달의 움직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있었다. 발끝에 닿았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졌다. 비로소 어두컴컴한 연습실 안에 갇혀 있던 감정이 흐르기 시작했다.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그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쩌면 그 시절에 비해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문이 활짝 열리고 바람이 불어 들어오며 지하실에도 해가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줄곧 한 곳으로 향하던 빛은 쉽게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관성의 법칙이 그가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안내하기 때문이다. 서호와 건학은 이제 그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과 같은 날들을,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계속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해가 비치지 않는 곳에서도,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그렇게, 계속, 앞으로.

0.

그래서 진짜 대답은?

나도 사랑 같애. 몇 년간 지겹게 화내고 울고 자책하고 후회하게 하면서도 결국 못 놓는 게. 몇 번이고 실망해도 또 몇 번이고 기대하게 하는 게. 날 무슨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게.

...내가 그랬어?

응.

미안.

나도 사랑해.

어?

이 말 하려고 한 거 아니었어?

으응, 사랑하지...

알아.

네가 뭘 알아.

뭘 알긴. 다 알지. 내가 너보다 먼저 알았는데.

그래, 고맙다.

어 나도 사랑한다니까.

그만 좀 말해, 부끄럽게.

계속 말할 건데. 평생 말할 건데.

...

사랑해.

...

진짜 사랑해, 이서호.

...

대답 안 해줘도 사랑해.

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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