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ine day
도섷
1.
평범한 회사원 최현미 씨(28세)는 대한민국의 프로야구 구단 한성 웨일즈의 열성팬이었다. 한성 웨일즈는 현미 씨가 만 3세이던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현미 씨의 고향이 한성 웨일즈의 연고지인 소정광역시였고 현미 씨의 온 가족이 한성 웨일즈를 응원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다. 모든 일은 원죄로부터 비롯되었다. 현미 씨는 웨일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포수 김삼석을 가장 좋아했고 그를 중심으로 한성 웨일즈를 응원하는 트위터 팬 계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날도 현미 씨는 열과 성을 다해 칼퇴를 성공한 뒤 야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적당한 자리를 잡자마자 한숨을 쉬며 트위터를 켰다. 네임드 계정이 아니라 현미 씨의 오랜 트친들과 함께하는 비계였다. 타임라인을 아무리 새로고침해도 올림픽 소식만 잔뜩이었다. 당연함. 올림픽은 원래 새로운 덕질 대상을 찾기 위한 일종의 박람회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아이돌을 좋아했던 현미 씨의 트친들도 이제는 스포츠로 완전히 눈을 돌린 듯했다. 농구에, 양궁에, 핸드볼에, 씨름에... 이게 전국체전인지 타임라인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늘 보던 타임라인이었으나 문득 현미 씨의 눈에 한 트윗이 크게 띄었다. 그것은 현미 씨의 십년지기 트친인 메로언니가 올린 트윗이었다. 메로언니와는 모 아이돌을 좋아하며 만났으나 이제는 더 이상 겹칠 수 없는 선을 걷고 있었다. 일종의 야성미를 추구하던 메로언니의 눈에 야들야들한 아이돌은 더 이상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메로언니는 최근 동메달을 따 화제인 국가대표 유도선수 김건학이 도복을 풀어헤친 사진을 올리며 느낌이 너무 좋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그래. 언니가 좋아하게 생겼네. 메로언니와 영 취향이 다른 현미 씨가 이 트윗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바로, 유도선수 김건학이 현미 씨가 응원하는 구단인 한성 웨일즈의 진짜 유명한 승리요정이기 때문이었다. 김건학이 동메달을 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팬 계정에 와, 웨일즈휀 최대아웃풋 축하합니다, 따위의 트윗을 올린 바 있었다.
김건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시즌과 이번 시즌을 통틀어 총 54회의 직관 중 100%의 승률을 이루어 낸 미친 기리의 승리요정이었다. 일단 직관 횟수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웨일즈의 찐팬임을 인증하는 것이었는데, 그 와중에 김건학이 웨일즈파크에 뜬 날은 무족권 웨일즈가 승리를 하게 되니 김건학은 웨일즈팬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건학이 승리요정임이 알려지게 된 계기도 운명적이었다. 김건학은 그저 평범하게 웨일즈파크 1루 응원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날 중계를 맡은 캐스터가 마침 국제 대회 시즌에 유도 중계를 하는 캐스터였던 것이다. 우연히 농심가락떡볶이를 퍼먹는 김건학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자 캐스터가 자연스럽게 국가대표 유도 선수 김건학 선수가 현장에 있다고 언급을 해 버렸고, 그 후로 김건학은 웨일즈 팬들에게 제법 이름을 알렸다. 직관에 가서 김건학을 마주쳤다는 목격담도 많이 퍼졌고 심지어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에는 무슨 월리를 찾아라처럼 웨일즈파크에서 눈에 불을 켜고 김건학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김건학은 일종의 밈이 되어 웨일즈가 지고 있으면 건학씨 이리와봐유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도 했다.
현미 씨는 물론 김건학이 어떤 선수인지, 어떤 경력을 가졌는지, 어떤 플레이 스타일을 지녔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지속적으로 쌓아 온 내적 친밀감으로 메로언니에게 멘션을 보냈다. 헐. 김건학 웨일즈짱팬임. 그러자 메로언니가 바로 답을 했다. 맞아 인스타 가니까 유니폼 입은 사진도 있더라... 게시물이 3개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가 유니폼이야... 김건학이 웨일즈의 썸머 한정 유니폼을 입고 멋진 포즈를 취하는 사진도 함께 첨부되었다. 언젠가 타임라인에서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사진이었다. 현미 씨는 별 생각 없이 사진을 눌렀고 지하철이 흔들리다 보니 여차저차 그 사진을 확대하게 됐다. 그런데 눈에 확 꽂힌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건학의 왼손 약지에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지였다. 오, 여친 있나 보네. 그럼 당연하지 없겠냐 현미야. 현미 씨는 그저 웃었다. 그런데 문득 김건학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의 디자인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커플링이야 뭐 거기서 거기니까 당연히 익숙하겠지 현미야. 현미 씨는 대수롭지 않게 위화감을 넘겼다. 그렇게 트위터 화면을 끄고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내리는데 별안간 벼락처럼 그 반지를 어디서 보았는지가 떠올랐다.
때는 2년 전 이맘때였다. 주말이었고, 덕질메이트인 송희가 출근길을 보자며 현미 씨를 꼬셨다. 현미 씨는 솔직히 출근길에 죽치고 서서 선수 이름 외치는 행위 같은 거 이 나이 먹고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어리고 귀여운 송희는 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착한 일만 하며 열심히 살았던 송희를 감히 이딴 개끔찍구단으로 끌어들인 것에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송희를 이끌고 너그러이 출근길을 보러 갔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저 멀리서 송희의 최애 선수인 이서호가 천천히 걸어 오기 시작했다. 이서호는 한성 웨일즈의 젊은 외야수 중 한 명이었는데, 현미 씨에게는 발이 빠르고 번트를 잘 댄다는 인상만 있을 뿐 크게 와닿은 것은 없었다. 뭔가 비큐? 가 높은? 것 같기도 했지만 현미 씨는 포수콤이었으므로 솔직히 별 관심 없었다.
아무튼 현미 씨는 친한 동생인 송희가 좋아하기 때문에 이서호 선수, 이서호 선수, 싸인해주세요, 이서호 선수...를 간절히 외쳤다. 이서호 선수가 현미 씨와 송희의 앞에 친절하게 강림했다. 현미 씨는 송희가 친필유니폼마킹싸인을 받는 동안 유니폼을 잡아 팽팽하게 늘려 주었다. 그러던 중 이서호 선수의 목걸이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야구선수들은 어디서 공구라도 하는 듯 똑같은 금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뭔 두꺼운 금목걸이에 뭔 웃긴 클러치를 끼고 다녀야 야선패션 완성이었다. 그런데 이서호 선수는 얇은 은색 줄에 반지를 하나 끼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엥. 웬 반지. 뭔 아이돌도 아니고. 현미 씨는 할 일이 없어서 이서호 선수가 느릿느릿 싸인을 하며 송희와 대화를 하는 동안 반지를 구경했다. 비싸 보이는데, 안쪽에 뭐라고 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싸인이 끝나고 현미 씨는 김삼석 선수를 기다리는 일 따위 없이 쿨하게 카페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송희에게 이서호 선수가 반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별 의도는 없었고 그냥 금목걸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송희는 아마 커플링인 것 같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이왕 사귈 거면 빨리 결혼해서 결혼특수커하를 맞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나 했다. 현미 씨는 별 생각 없이 글쿤, 하며 아아를 쪼롭 빨았다. 그리고 그 기억이 시간을 한참 돌고 돌아 지금 여기 이곳까지 온 것이다. 송희는 더 이상 이서호 선수도 야구도 좋아하지 않고 배구선수를 좋아하고 있는데도... 그 기억은 여전히 현미 씨에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지가, 할 일이 없어 한참동안 구경했던 반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 파묻혀 잊고 있었던 반지가... 김건학의 손가락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
와, 이거 이서호 반지네. 현미 씨는 잠시 머리가 멍해져 개바쁜 1-2호선 환승구간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상태로 다시 휴대폰을 들어 김건학의 손가락에 끼워진 사진 속 반지를 노려봤다. 웬 할아버지가 현미 씨의 어깨를 슬쩍 치고 지나갔다. 어깨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숄더백이 흘러내렸다. 현미 씨는 숄더백을 슥 올린 뒤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뭐, 커플링 디자인이 다 거기서 거기지. 에이, 설마. 그냥 비슷한 거겠지. 설마 그렇겠어. 설마 김건학이, 이서호랑, 사귀...겠어. 설마 김건학이 이서호 때문에 개바쁜 와중 직관을 왔겠어......... 현미 씨는 잡스러운 의심들을 애써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고 오늘의 타순 생각에 집중했다. 아니 우리 팀 용타는 도대체 뭘 하는 거임. 용타가 1번이라니 실화냐. 우리가 개큰돈을 주고 테이블세터를 사 왔대요... 김삼석 5번 이건뭐죠... 우리팀 개망했구나... 현미 씨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발을 움직였다. 그래도 가야지, 직관... 응... 야외 코인노래방이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
현미 씨는 휴대폰을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버렸다. 트위터에서는 여전히 메로언니가 김건학의 인스타와 과거 행적을 털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성 웨일즈의 이서호 선수가 김건학 선수의 경기를 보러 왔다는 과거의 스포츠 뉴스 기사를 발견한 메로언니는 기뻐하며 현미 씨에게 멘션을 보냈다. 야 이거 니가 좋아하는 팀 아니냐. 개신기하지 않냐.........
2.
한국에서는 올림픽 기간이라고 해서 프로야구 리그를 중단합니까? 당연히 아니다.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각 구단의 젊고 유능한 선수들이 쏙쏙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지속되어야 한다. 쇼머스트고온... 분명 모든 팀에서 공평하게 선수가 차출되었을 텐데, 국가대표 소집 기간이 되자 한성 웨일즈는 귀신같이 연패를 하기 시작했다. 미친 것들. 웨일즈에서는 주전 외야수인 이서호와 필승조 멤버로 꼽히는 불펜 투수 박철순이 대표팀에 불려 갔다. 큰 손실이기는 했으나 이서호와 박철순 없이 이겼던 날도 있었기에 평범한 회사원 최현미 씨(28세)는 별 탈 없이 올림픽 기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좀 힘들겠지만 뭐, 그래도 괜찮겠지. 선발 로테 빵꾸난 팀이나 클린업 날라간 팀보단 낫지 않을까. 헤헤. 그런데 이게 웬걸.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평상시에는 누워서 껌 씹으면서 봤던 이서호의 기막힌 떨공참기 볼넷, 그리고 박철순의 무사 23루에서 어떻게든 똥꼬쇼로 틀어막기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금메달 꼭 따 와라... 이서호 박철순 없이 야구 못하겠으니까 꼭 면제 받아 와라...
현미 씨는 한숨을 쉬며 화장실 변기에 앉았다. 오늘따라 일하기가 존나게 싫었다. 아직도 수요일이라니... 하하하 최사원 오늘 화요일이야 하하하... 변기에 오래 앉아 있으면 치질 걸린다던데. 하지만 일하기 싫은 직장인에게 화장실 휴식타임은 생활 필수 요소였기에 현미 씨는 치질의 운명이 자신을 피해가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트위터 타임라인을 슬슬 넘기니 늘 보던 풍경이 펼쳐졌다. 최근 현미 씨의 야구 팬 계정 타임라인은 매일 분노로 가득했다. 정확히는 올림픽 메달 소식과 야구에 대한 분노가 번갈아가며 올라와 일희일비 레전드를 찍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탐넘에서만 친밀감을 쌓다가 어영부영 맞팔하게 된 콩이님의 트윗이 눈에 띄었다. 내용은 이랬다. 안되겠다 승리요정 김건학 데려오자 웨팤 폴대에 묶어놓자. 그 트윗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미 씨는 웃음을 지으며 콩이님에게 답멘을 보냈다. 김건학 지금 쿠알라룸푸르에 있어여... 콩이님이 곧바로 답장을 해 왔다. 아맞다김건학유도국대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유도 국가대표 선수단이 귀국했다는 기사를 봤던 것도 같은데. 현미 씨는 방금 보낸 트윗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사를 검색했다. 그런데 선수단 입국 단체사진에 김건학은 없었다. 뭐지. 동메달을 땄는데도 잘릴 수가 있는 건가. 기사를 읽어 보니 김건학은 개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늦게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개인 일정이 뭐길래 그러지. 숙소비 밥값 비행기값 기타등등 그걸 다 사비로 해결하는 건가. 쩐다. 어쨌든 현미 씨는 자신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우짜든동 일을 해야 퇴근을 할 것이 아닌가... 하기 싫어서 피한다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이쯤에서 현실도피를 그만하고 일로 돌아가야 했다. 미룰수록 점점 더 하기 싫어지는 법. 현미 씨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야구를 생각했다. 오늘은 드디어 올림픽에서 야구 경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사실 이미 전날 시작되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는 오늘부터였으니 오늘이 시작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시원하게 씻고 맥주 한 잔 하며 야구를 볼 생각을 하니 기운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재밌겠지~ 야구. 어떻게 곽진기 정민정 황경구가 다 우리 팀일 수가 있지 개신난다 진짜...
가시방석에 앉아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대강 마친 뒤 현미 씨는 최선을 다해 일찍 퇴근했다. 칼퇴는 아니었으나 이 시간에는 지하철에 사람이 없어 앉아 갈 수 있기에 오히려 럭키했다. 현미 씨는 울고 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여 목욕재계를 한 뒤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보통 혼자 사는 원룸에 텔레비전을 놓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현미 씨는 야구를 편하게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저녁으로 시킨 묵은지닭도리탕과 맥주를 식탁에 내려 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막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의 상대는 도미니카 공화국이었다. 줄여서 도공. 이서호는 2번 타순으로 좌익 수비를 보고 있었다. 경기는 순조롭게 흘러갔고 5회 말쯤 닭도리탕을 전부 부순 현미 씨는 쿠션에 기대어 반쯤 누워 있었다. 트위터와 카톡을 오가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야구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현미 씨가 번뜩 허리를 펴고 앉았다. 관중석에 있던 김건학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었다. 김건학은 쿠알라룸푸르 올림픽 기념 티셔츠를 입고 기념 모자를 쓴 주제에 얌전히 앉아 경기를 보고 있었다.
웨일즈의 팬들은 최근 웨일즈가 연패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며 난리였다. 승리 요정이 쿠알라룸푸르에 있는데 웨일즈가 어떻게 이기냐고. 이 때를 틈타 어떻게든 웃긴 말을 한 마디라도 더 해 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현미 씨의 손가락은 갈 길을 잃고 말았다. 문득 마음이 심란해졌다. 현미 씨는 트위터에 올라온 김건학의 캡처와 영상에서 집요할 정도로 약지만을 노려봤다. 설마 김건학이 이서호 하나 보려고 쿠알라룸푸르에 남아 있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 것인가. 심란한 탓인지 화면 속 김건학의 얼굴도 어딘지 결연해 보였다.
김건학과 이서호가 사귄다는 증거로 1) 김건학이 야구 직관을 자주 감 2) 이서호도 유도를 보러 감 3) 둘의 반지 디자인이 유사한 것 같은데 뭐 확실한 건 아니고 2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그런 것도 같음. 이렇게 총 세 가지를 든다면 누구든 현미 씨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현미 씨도 오랜 세월 아이돌을 좋아해 본 만큼 웬만한 아이돌 연애 의혹 알계는 많이도 접해 봤기에 자신의 추측이 얼마나 망상에 가까운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왜 자꾸 그 둘을 연관짓게 되는 것일까. 현미 씨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김건학과 이서호에게 이토록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고작 이 정도 증거로 사귄다고 생각하는 게 말이 돼? 무슨 과몰입 알페서도 아니고? 아니 사귄다고 치면, 그러면, 나랑 뭔 상관이냐고. 솔직히 현미 씨는 야구 선수가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결혼 버프나 분유 버프 같은 말들은 믿지도 않았고 약간 꺼리기까지 했다. 연애 대상이 미성년자라거나 기혼자인 경우만 아니라면 야구 선수의 사생활 따위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평소 크게 좋아한 적도 없는 선수인 이서호가 승리 요정과 사귀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현미 씨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초등학생 시절 아이돌 팬픽을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았다. 더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차오르려고 하면 그저 궁금하고 재미있을 뿐인 충동이 현미 씨를 사로잡았다. 현미 씨는 결국 야구 중계를 끌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 알 바임? 사귀든 말든 알 바냐고. 내가 굳이 신경쓸 일은 아니지. 그럼그럼. 이서호가 누구랑 사귀든 말든. 메로언니가 사커고 싶어하는 남자가 사실 게이이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바이일지도. 뭐 아무튼. 현미 씨는 머리를 말린 뒤 카피바라가 유자 온천에서 목욕하는 입체음향을 틀어 놓고 애써 잠에 들었다. 자신이 이미 마음 속으로 이서호가 김건학과 사귄다는 결론을 내려 버렸다는 사실은 자각하지도 못한 채.
3.
드디어 올림픽이 끝났다. 대한민국의 야구 대표팀은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대놓고 불안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에 의해 약한 라인업으로 취급되던 대표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해냈다. 그리고 김건학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직관했다는 이유로 제법 화제가 되었다. 해외에서도 코리안 유도 브론즈 메달리스트(쏘핫가이)가 코리안 베이스볼을 빠짐없이 모두 관람했으며, 이 선수는 원래도 케이비오 리그 한성 웨일즈의 빅 팬이라며 소소하게 바이럴되었다. 웨일즈가 아닌 다른 구단의 팬들은 100% 확률의 승리 요정이 이렇게 달달한 거였냐고 감탄하면서도 앞으로 웨일즈와의 경기 때 김건학씨를 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웨일즈 팬 사이에서나 화제였던 유도요정, 아니 승리요정 김건학의 명성은 한국 야구팬들 사이에서 점점 높아져만 갔다.
이제 이서호도 박철순도 돌아오겠지, 그럼 웨일즈도 이제 지긋지긋한 연패를 끊어낼 수 있겠지. 그렇다. 한성 웨일즈는 대표팀이 소집된 뒤 치러진 모든 경기를 패배하여 무려 15연패라는 대기록을 이루어냈다. 완전히 파죽의 15연패였다. 미친것들. 올림픽 기간이라 사람들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덜 욕먹은 걸 다행인 줄 알아라. 현미 씨는 퀭한 눈으로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탔다. 역시 아침에는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미 씨는 다년간의 지하철 출퇴근 경력으로 인해 손잡이를 잡지 않고도 충분히 편안하게 지하철에 서서 휴대폰을 즐길 수 있었다. 현미 씨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밀린 카톡을 확인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웨일즈에 울고 웃었던 송희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송희는 2년 전 가을야구가 끝난 후 심심하다는 이유로 배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그 길로 배구에 붙잡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송희는 한국 여자배구가 언제 다시 올림픽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며 쿠알라룸푸르로 날아가 올림픽을 직관하기까지 했다. 젊은 게 좋구나. 젊고. 돈 많고. 월세 안 내도 되고.
송희의 메시지를 눌러 처음부터 읽어 보았다. 송희는 배구 선수들을 보기 위해 폐막식까지 관람했는데, 우리 나라 대표팀이 입장할 때 어쩌다 보니 야구 선수도 조금 찍었다며 영상을 보내 왔다. 송희는 지난 해 휴대폰을 바꿀 때 오직 올림픽만을 위해 아이폰에서 갤럭시 어쩌구 울트라로 갈아탄 바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송희의 메시지에 고생했다고 얼른 한국 와서 푹 쉬라고 답장을 보낸 뒤 송희가 보낸 5분짜리 영상을 눌렀다. 시작하자마자 낯선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이서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니 참나. 송희야. 야구 선수를 우연히 찍은 게 아니라 그냥 니 구오빠를 찍은 거잖아. 어이가 없었지만 현미 씨는 영상을 계속 시청했다. 100배줌이라는 게 진짜 대단하다 싶었다. 딱히 가까운 자리도 아니었을 텐데 선수들의 얼굴이 제법 깔끔하게 찍혀 있었다. 영상 속의 이서호는 국가대표 단복을 입고 해맑게 웃으며 폐막식 회장으로 잘만 입장을 하더니, 돌연 뒤로 돌아 뛰어갔다. 송희의 카메라도 당황한 듯 흔들리다 이서호가 아닌 다른 선수들을 찍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송희의 카메라는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배구 선수들을 찾는 듯 했다. 그러다 다시 이서호가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어쩌다 보니였구나 송희야... 오해해서 미안하다. 이서호의 옆에는 김건학이 있었다. 엥. 또 김건학이다. 현미 씨는 영상을 끄고 싶기도 했고 끄지 않고 싶기도 했다. 마침 출근길 콩나물 시루 지하철 안에서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핑계를 들어 영상을 끄지 않았다.
영상 속의 이서호는 여전히 해맑게 웃다가 고개를 휙 돌려 김건학을 바라봤다. 김건학도 마찬가지로 실실 웃다가 이서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이서호가 은근슬쩍 김건학의 팔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손 깍지를 끼어 잡았다. 엥. 이게 뭐지. 현미 씨는 당황하며 영상을 10초 전으로 돌렸다. 다시 봐도 김건학과 이서호가 손을 잡고 있었다. 응. 그래. 이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이서호가 팀 동료들이 어깨동무라도 하려고 하면 덥다고 바로 내쳐버리는 인간이지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겠냐고...) 현미 씨는 애써 차오르는 생각을 부정하며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이서호와 김건학이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서호가 김건학을 툭 치더니 뭐라고 말했다. 망할 갤럭시 100배줌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선명히 보여 주었다. 김건학은 이서호의 얼굴을 한참동안 뜯어보다 세 음절을 말했다. 앞뒤 맥락 없이 입모양만으로 말을 정확히 추측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현미 씨는 어쩐지 그 순간 김건학이 이서호에게 한 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해. 그 세 글자가 현미 씨의 머리에 또렷하게 박혀 들어왔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었다. 현미 씨는 영상을 뒤로 돌렸다. 사랑해. 다시 돌렸다. 사랑해. 또 다시 돌렸다. 사랑해... 사랑해였다. 김건학이 이서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현미 씨는 전의를 상실한 채 영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서호와 김건학이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자기들끼리 웃으며 소근대고 있었다. 카메라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배구 선수들이 입장한 모양이었다. 송희는 그저 신이 난 것 같았다. 송희의 환호성 소리와 함께 영상은 애매하게 끝이 났다. 현미 씨는... 멍하니 검은 화면을 바라봤다. 내가 방금 본 게 맞나... 내가 운동선수 알페스충이라니... 설마 아니겠지. 뭐 손 잡고 사랑한다 말하고 이런 거 친한 사이면 그냥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 뭐 막말로 김건학이 이서호를 사랑하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않은가. 깊은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지하철 문이 열렸고 현미 씨는 헐레벌떡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일단 출근을 하자.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 가자. 그리고 그만 생각하자. 이서호에 대해, 김건학에 대해...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 일은 여전히 하기가 싫었고 커피를 마신 탓에 화장실에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변기에 앉아 업데이트한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메로언니가 올린 사진 한 장이 동동 떠 있었다. 메달 두 개가 겹쳐진 채 나란히 놓여 있는 사진이었다. 하나는 동메달, 하나는 금메달. 김건학이 1억년만에 인스타에 올린 사진인데 이게뭐지... 라는 트윗과 함께였다. 현미 씨는... 그냥...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가려는데 한성 웨일즈 구단 인스타에 새 게시물이 올라왔다는 알림이 떴다. 확인해 보니 화제의 승리요정 올림픽 유도 동메달리스트 김건학이 웨일즈파크에 시구를 온다는 내용이 현미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미 씨는 소리라도 마음껏 지르고 싶어졌다.
내 머릿속에서 제발 나가, 이것들아~~!!!!!
4.
유도 요정, 아니, 승리 요정 김건학의 시구는 올림픽이 끝나고 일주일 뒤 토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대표팀에 소집되었던 이서호와 박철순이 복귀하였지만 한성 웨일즈 미친것들은 연패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화요일은 폭취, 수요일은 우취, 목요일은 명품투수전인지 보세빠따전인지 구분도 안 되는 1:0 미친 개답답 패배, 금요일은 차라리 취소되었다면 모두가 행복했겠다 싶은 17:1 패배였다. 올림픽에서 제법 괜찮은 타격과 주력을 선보였던 이서호는 복귀하자마자 귀신같이 타격감을 잃더니 9회 말이 되어서야 뜬금없는 솔로 홈런을 쳤다. 평상시에 홈런이 많지도 않은 녀석이 솔리런을 때려 내니 웨일즈의 팬들은 그래 너도 참 답답했나 보구나 싶을 뿐이었다.
대망의 토요일. 바로 전날 17연패라는 구단 사상 최다 연패 타이 기록을 달성하며 신기록을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와중 웨팤에 유도 요정, 아니 승리 요정이 떴다. 그것도 관중석이 아니라 마운드에. 사탄의 구단에 요정의 등장이라... 웨일즈의 팬들은 드디어 연패를 끊는 날이 오겠구나 하며 들떴고 상대 팀의 팬들은 승리 요정의 100%라는 기록을 깨는 날이 오겠구나 하며 들떴다. 양 팀이 각자의 이유로 기대에 찬 와중 김건학이 웨일즈의 마스코트인 윈둥이와 함께 등장했다. 평범한 회사원 최현미 씨(28세)는 딱히 김건학에게 관심도 없고 김건학이 누구와 사귀든 전혀 상관 없었으나 사랑스러운 트친 메로언니만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티켓팅하여 웨일즈파크에 앉아 있었다. 현미 씨는 김치말이국수를 뒤적이며 윈둥이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김건학을 구경했다.
김건학이 마운드에 올라서자 웨일즈의 주전 포수인 김삼석과 외야수인 이서호가 타석으로 향했다. 엥. 잠깐. 이서호라고. 현미 씨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제발 현미야. 망붕 좀 그만해. 야동 처음 본 남중딩처럼 도대체 왜 이러니. 현미 씨의 최애 선수인 김삼석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타석에 서서 타격 폼을 잡고 있는 이서호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현미 씨가 혼란을 겪든 말든 김건학은 심호흡을 하더니 시원하게 공을 뿌렸다. 잠만. 방금 뭐야? 구속 몇이야? 미친 거 아니야? 저 사람 당장 불펜장으로 보내. 김건학의 공은 김삼석의 글러브 한가운데 꽂혔고 이서호는 별 의미 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야. 방금 뭐냐고. 커터야? 뭐야 지금. 오늘 당장 나와도 될 것 같은데? 현미 씨는 김건학의 투구에 혼이 나가 자신이 방금까지 하던 망상도 잊고 트위터를 켰다. 한성 웨일즈 지명하겠습니다. 1라운드 주현체육고등학교 투수 김건학...
그렇게 김건학의 프로 못지 않은 시구로 시작한 경기는 한성 웨일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스코어는 5:4. 8회까지 1점도 내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으나 결국 9회에 4점을 추가하여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진 연장 10회에서 이서호가 끝내기 안타를 때려낸 아주 재미있는 경기였다. 특히 1번으로 나섰던 이서호가 1회부터 무려 17개의 공을 본 뒤 볼넷으로 출루한 것을 시작으로 전 타석 출루를 기록함과 동시에 끝내기까지 이루어 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8회까지만 해도 코나 파고 있던 웨일즈의 팬들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김건학을 칭송했다. 역시 승리 요정이다, 진퉁이다, 벤츠다, 강동원이다 등 온갖 좋은 말들이 김건학에게 쏟아졌다. 도파민에 취한 웨일즈의 팬들은 야구장 출구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지하철역에서도 응원가를 불렀다. 그 사이에 끼어 있던 현미 씨는 사랑한다 웨일즈를 열창하며 김건학을 떠올렸다.
절대 노력한 것은 아니고, 절대 시구자가 어디 앉는지 찾아 본 것도 아닌데, 현미 씨는 아주 우연찮게 김건학의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니, 그냥, 밥 편하게 먹으려고 테이블석 예매한 건데, 어쩌다 보니 김건학이 딱 보였다. 현미 씨는 경기 내내 심드렁하게 팥빙수를 먹다가도 앞자리의 김건학을 흘긋 쳐다봤다. 옆자리에 앉은 메로언니가 자신이 김건학을 수상하게 신경 쓴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 약간 고생스러웠다. 현미 씨는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메로언니에게 윈둥이마카롱을 사다 바치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훔쳐본 김건학은... 정말로 야구에 집중한 것 같았다. 현미 씨가 지루해서 하품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김건학은 이서호의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조그맣게 움직이는 입모양에서 현미 씨는 정체 모를 감동을 느꼈다. 뭔가, 뭐랄까, 간절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나니 현미 씨는 어쩐지 심장이 뛰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그래, 이것들아. 내가 인정한다. (뭘?) 예쁜 연애 해라.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들키지 말고...
그 후로 3일 뒤, 한성 웨일즈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웨일즈티비에 김건학의 시구 비하인드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이 근무 시간 도중에 올라왔기에 현미 씨는 영상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퇴근길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들고 이어폰을 꼈다.
영상은 김건학이 웨일즈파크로 들어서며 매우 떨려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직관 하러만 와 봤는데, 이렇게 시구 하러 오니까 긴장된다는 말도 함께였다. 웨팁의 피디가 그럼 올림픽 때랑 비교했을 때 얼마나 떨리세요? 라고 묻자 김건학은 웃으며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보다 더 떨립니다, 라고 답했다. 잠시 후 불펜장에 도착하자 작년 시즌 신인왕의 주인공인 윤선남이 시구 선생님으로 김건학을 맞아 주었다. 김건학은 착실히 윤선남의 지시에 따랐다. 윤선남이 놀라며 너무 잘 하신다고, 공이 저보다 좋다고 칭찬하자 김건학은 사실 어릴 때 야구를 했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때여서 다 까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야구를 좋아한다는 말도 함께였다. 피디가 그럼 포지션이 뭐였냐고 묻자 김건학은 크게 웃으며 포수였다고 말했다. 포수였다고? 호감. 그 뒤로 김건학이 시구를 하는 장면과 시구가 끝난 뒤 너무 긴장됐다고 말하는 장면, 피디가 진짜 잘 했다며 추켜 세워주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휑한 벽 앞에서 간단한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 언제부터 웨일즈의 팬이었나요? : 스무살 때부터입니다. 경기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팬이 되었습니다.
- 가장 만나 보고 싶었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 김삼석 선수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도 잠깐 포수를 했었거든요. 너무 멋있습니다.
- 승리요정이라고 요즘 화제인데, 승리에 비법이 있나요? : 네? 저요? 저는 그냥 재미있게 야구를 보는 것 뿐이고 선수 분들이 열심히 하신 것 같습니다.
- 솔직히 승요 승률 신경 쓰인다, 안 쓰인다? : ...쓰인다!
- 마지막으로 웨일즈 선수분들과 팬분들께 한 마디 해 주세요. : 네, 우리 웨일즈 선수 여러분. 날도 더운데 몸 건강히 챙기시고요. 팬 여러분도. 더운 날에 직관하다 쓰러지시면 안 되니까 물 많이 챙겨 드시길 바랍니다. 한성 웨일즈 파이팅!
끝나나 싶었던 영상은 쿠키로 이어졌다. 윤선남 선수와 함께 열심히 시구 연습을 하던 김건학에게 깜짝 손님이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멀리서 카페 캐리어를 든 이서호가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현미 씨는 여기서 잠시 영상을 멈췄다. 엥. 내가 뭘 본 거지. 여기서 또 이서호가 나온다고. 일단 보자. 오케이. 현미 씨는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이서호가 캐리어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꺼내 윤선남 선수와 웨일즈티비 피디에게 건넸다. 피디가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묻자 이서호가 응원 왔죠, 라고 답했다. 그리고 트레이에서 망고 스무디를 꺼내 김건학에게 건넸다. 김건학 선수 동메달 축하드립니다, 그런 평범한 말과 함께였다. 김건학은 익숙하게 스무디를 받아 들곤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서호가 오늘 힘내세요, 라고 하자 김건학은 네, 힘내세요, 라고 답했다. 눈은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 뒤 이서호는 그럼 수고하십쇼, 라고 말하며 가볍게 사라졌다.
웨일즈티비의 피디님은 이 영상을 이서호 미담이라고 생각하며 올렸겠지만 현미 씨는 어쩐지 또 다시 심각해졌다. 아니, 둘이 대놓고 저래도 되는 거야? 어떤 관계라고 대놓고 발표한 적이 있나? 혹시 나만 모르는 건가? 평소 같았으면 이서호 선수와 원래 아는 사이냐, 어떻게 아는 사이냐 등의 짤막한 인터뷰가 이어졌을 텐데 그런 것도 없이 그대로 영상이 끝났기에 더욱 수상했다. 현미 씨는 복잡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김건학과 이서호에 관련된 과거 기사를 뒤졌지만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알 수 없었다. 서로 직관만 존나게 다녔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 현미 씨는 그렇게 찝찝한 기분으로 무사히 귀가했다. 모르겠다, 밥 먹고 자기나 하자.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5.
즐거웠던 쿠알라룸푸르 올림픽으로부터 1년이 지났다. 평범한 회사원 최현미 씨(29세)는 오늘도 변함없이 만원 지하철에서 출근을 하고 있었다. 팔로워가 2000명대에 달하는 현미 씨였기에 어그로가 가득 담긴 스핀을 받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오늘의 콘텐츠는 이것이었다. ‘포수콤이라면서 요즘 이서호얘기밖에 안하시네요 갈아탔으면 당당하게 갈아탔다고 얘기하세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같은 팀의 야구선수?를 좋아하는데도 갈아탄다?라는 개념이 있는 것인가. 아니 도대체 무슨 의도로 보낸 스핀인 것인가. 현미 씨는 황당했지만 굳이 먹이를 주지 않기 위해 스핀은 무시했다. 그리고 반성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최근 트윗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이서호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같았다. 시작은 이서호의 목에 걸려 있던 그 반지를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보기 위해 이서호가 나왔던 온갖 영상들을 다 찾아 보았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사실 그놈의 반지를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출근길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트친인 콩이님이 트위터 닉네임 옆에 이서호의 등번호인 ⁶⁷을 달고 이서호지지선언을 했기에 명분도 자연스러웠다. 뭐, 이서호 좋지. 발 빠르고. 번트 잘 대고. 선구안 좋아서 볼도 잘 고르고. 주루 센스 좋아서 도루도 많이 하고. 타격도 뭐. 장타는 안 나와도 필요할 때 쏠쏠하게 잘 치고. 기본적으로 공 몇 개는 보는 것도 좋고. 음. 이서호 좋지. 좋은 선수다.
현미 씨의 오랜 동반자인 메로언니는 여전히 김건학을 좋아하고 있었다. 유도 선수 덕질은 어떻게 하는 거냐며 울부짖던 언니는 오늘도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가 볼까 싶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김건학의 경기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 정보를 어디서 알았냐고 물었더니 메로언니는 당당하게 말했다. 김건학이랑 같은 현주시청 실업팀 소속 선수 안고독방에 일반인 참석 가능 대회 공지 다 올라온다고. 꼭 그런 식으로 정보를 구해야만 하는 거냐고 묻자 메로언니는 슬프게 긍정했다. 김건학은 떠들썩하게 주변에 알리고 그런 거 안 하더라고... 그치만 그런 매력이 있는 거지. 하루에 프롬 800개씩 보내는 아이돌 좋아하다가 반년에 한 번 올라오는 인스타에 환호하게 만드는 운동선수 좋아하니까 뭔가 건강해진 기분 듦. 디지털 디톡스?같고. 존나 맨날 저속노화 식단 먹다가 갑자기 맘스터치 핫치즈순살 먹는 느낌. 메로언니의 말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현미 씨는 언니가 행복하니 오케이라고 생각했다. 메로언니는 직관에 갈 때마다 맨날 똑같은 모자에 시꺼먼 마스크를 낀 몸 좋은 남자가 있다며, 이 남자도 혹시 선수인 거 아니냐며 트윗을 올리곤 했다. 양심적인 메로 언니가 불법촬영을 하지 않았기에 그 의문의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서도 현미 씨는 속으로 응그사람이서호야~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앞으로 꺼낼 예정도 물론 없었다.
왜냐하면, 모르겠다, 왠지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미친 소리인 거 아는데, 이서호도 김건학도 평범한 29세 회사원 최현미의 존재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데, 뭔가,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고, 보호해 줘야 할 것 같고,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현미 씨는 다시 한숨을 쉬며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한 발을 디뎠다. 발빠진 쥐. 발빠진 쥐. 무사히 갈아탄 뒤 다시 휴대폰을 꺼내 보니 메로언니가 기뻐하고 있었다. 김건학이 간만에 인스타에 본인 얼굴이 나온 사진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김건학이 웬 카페에서 청포도 에이드를 앞에 둔 채 폼을 잡고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문제의 그 반지는 오늘도 김건학의 손에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그런데, 어라, 이 카페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현미 씨는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걷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걸어 사무실 책상 앞에 도착했을 때, 불현듯 떠올렸다. 아, 여기 소정시 은영동이잖아. 얼마 전에 이서호 선수 왔다고 사장님이 인스타에 올렸던 데잖아.
...그렇구나.
...흠.
...그래라~...
김건학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총 113회의 직관을 했음에도 여전히 100%의 승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떠올릴 때면 마법처럼 뭐든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현미 씨의 평범한 하루는 이렇게 또 다시 시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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