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연인
한천부생 에어컨이 고장났다
2019.07.29.
1.
“비켜, 더워.”
“더워?”
“그래, 그러니까 좀 떨어져 있어. 뜨거워.”
“그렇단 말이지?”
“오늘따라 왜 그러는데?”
2.
확실히 한천은 조금 이상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나부생은 더위에 유독 약했다. 타고난 체질은 아닌데 어린 시절 무슨 약을 잘못 먹어 그런 거라고, 바다 건너에서 양의학을 전공하신 허성정 경관님께서 나부생의 맥을 한참 짚어 보고는 말했다. 지금 와 고칠 수는 없냐 물었더니, 마음을 착하게 먹고 화를 줄이라는 처방이 돌아왔다. 이 돌팔이 자식. 나부생은 달려들 힘도 없어 늘어진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허성정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염라대왕님! 하며 경례를 척 했다. 미친 놈.. 나부생은 혀를 차며 마치 침대와 한 몸이 될 듯 늘어졌다.
에어컨이 고장났다. 씨발. 근 몇 년간 에어컨을 틀고 살았기에 집에는 그 흔한 선풍기조차 없었다. 홍란이 빌려 준 휴대용 선풍기를 코 앞에 대자 재채기만 나올 뿐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부생은 그 토끼 귀 달린 선풍기를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품이 큰 셔츠에 무릎이 드러나는 헐렁한 바지를 갖춰 입었는데도 땀이 마르지 않았다. 힘이 쭉 빠짐과 동시에 피부가 공기의 압박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 기묘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침대는 냉기를 잃었고, 이불이 나부생의 살갗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아, 너어어무 더워. 나부생은 비척비척 일어나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차가운 대리석이 한쪽 볼과 맞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선풍기의 윙윙대는 소리에 힘입어 더위와 습기를 이겨내는 치열한 싸움을 하다 나부생이 스르륵 잠이 들었을 때, 한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잠을 얕게 자는 편이라 나부생은 작은 소리에도 금방 눈을 떴다. 하지만 더위에 지쳤는지 한천이 방 안을 가로질러 테이블 앞 소파에 앉기까지 나부생은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옆얼굴이 눌린 모습이 귀여워 한천은 나부생의 드러난 볼을 검지 손가락으로 찔렀다. 습기를 머금은 피부는 약간 끈적였지만 말랑한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한천은 쿡쿡 웃으며 나부생의 볼을 찌르고, 찌푸리는 얼굴근육을 구경했다. 몇 달을 사귀며 한 침대에서 잠든 적도 적지 않았지만 무방비하게 잠에 든 나부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듯 한천은 나부생의 이마, 콧대, 볼, 입술, 턱을 콕콕 찔러댔다. ‘우웅, 하지 마아~.’ 라며 애교 비슷한 소리가 나왔을 때 한천은 웃음소리를 크게 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엎드려 있던 나부생은 꿈이라도 꾸는지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테이블 밖으로 굴러 떨어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나부생은 무사히 테이블 위에서 몸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대자로 드러누운 나부생이 옆구리를 긁자 안 그래도 헐렁한 셔츠가 밀려 올라갔다. 한천의 시야에 어젯밤 본인이 나부생의 갈빗대에 박아 넣은 자국이 들어왔다. 그제서야 펑퍼짐한 소매 사이로 팔뚝 안쪽의 흐릿한 이빨 자국이 보였고, 발목의 손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 시각적 자극은 한천이 전날의 정사를 떠올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든 사람 상대로 이게 무슨 파렴치한 생각인가, 한천은 엄청난 변태가 된 듯한 기분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부생의 방은 혼자 쓰는 공간 치고는 아주 넓은데다 가구도 몇 없어, 한천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 안을 맴돌기에 적합했다.
미쳤다, 미친 거야. 성욕 해소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발정 난 개도 아니고, 사춘기 남자애도 아니고. 이게 다 더워서 그런 거다, 더워서 머리가 돌아 버린 거야. 나부생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게 지금... 한천은 심각한 얼굴로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살금살금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소리가 났는지 나부생이 눈을 떴다.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드니 제 애인이 꼬리 잡기 놀이를 하는 고양이처럼 방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건가, 이렇게 더운 걸 보면 분명 현실인데.
“천아, 뭐 해?”
나부생에게서 등을 지고 있던 한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3.
“왔으면 깨우지.”
“아냐, 너무 잘 자고 있어서.”
몸을 일으킨 나부생은 소파로 옮겨 앉아 컵에 물을 따랐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켜니 찬 기운이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한천이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서서 나부생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했다.
“이리 와 앉아. 왜 그러고 서 있어?”
“서 있는 게 더 편해서.”
“정신 사나우니까 와서 앉아. 나무도 아니고 사람인데 서 있는 게 앉는 것보다 편할 리가 있나.”
그래도 한천이 앉지 않고 시선을 어색하게 돌리자, 나부생은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혹시 치질이야?”
“뭐?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럼 앉아.”
치질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천은 나부생 옆으로 가 앉았다. 더위 때문인지 가까이 붙어 앉으니 나부생의 몸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이 더운 날씨에 식은땀이라도 흐르는지 손발이 차가웠다. 물이라도 마시려 뻗은 손이 나부생의 손과 부딪쳤다. 나부생이 그 손을 덥썩 붙잡았다.
“손이 왜 이리 차? 시원하다.”
나부생은 신기한 듯 한천의 손과 손바닥을 마주 대다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는 한천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고 한천의 손등을 제 볼에 가져다 문질렀다. 시원하다, 살 것 같다. 앞으로 여름마다 이렇게 붙어 있어야 겠다. 나부생은 한천이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면서 잘도 그런 말을 했다. 제 왼손이 나부생에 의해 움직이게 되자 한천은 오른손만큼은 제 의지대로 사용해야 겠다는 이상한 다짐을 했다. 한천은 몸을 돌려 오른손으로 나부생의 볼을 감싸고, 입술을 부드럽게 붙였다. 느긋하게 다가간 것과는 반대로 키스는 꽤나 조급했다. 나부생이 뭐라고 웅얼댔으나 말소리는 먹혀 들어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고개를 꺾은 한천 덕에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고, 한천의 혀가 나부생의 입 안으로 침범하여 곳곳을 쓸었다. 슬금슬금 나부생의 허벅지 위로 올라타 어깨를 누르는 한천의 등을 나부생이 두드렸다. 한천은 목이 마른 사람처럼 나부생의 입술을 물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몰아치는 숨에 나부생의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했다. 한천이 나부생의 목과 쇄골에 얼굴을 파묻고, 찬 손이 나부생의 셔츠 안을 파고들어 등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더워, 저리 가.”
“왜, 싫어?”
“어, 싫어, 아윽, 더워. 좀 떨어지라고, 아!”
어느새 한천이 나부생의 셔츠 단추를 풀고 가슴팍에 입술을 붙였다. 나부생은 한천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려도 보고, 한천이 올라 앉은 허벅지를 들썩여도 보고,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을 떼어 내 보려고도 했으나 한천은 요지부동이었다. 진짜 덥다고. 나부생은 고개를 뒤틀며 신음하면서도, 등줄기에 흐르는 땀이 느껴져 소름이 끼쳤다. 안 그래도 더운 날에 에어컨도 없는데 짐승같은 애인 때문에 몸에 열이 더 올랐다. 뇌의 일부가 더위에 녹았는지 나부생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고, 어느 순간 모든 사고가 더위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더운데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씻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모자랄 판에. 아, 더워. 덥다고! 나부생은 착실하게 제 몸을 빨고 있는 정수리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 한천의 복부에 주먹을 질렀다. 동강시 염라왕의 불주먹이었다.
“악!”
한천이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져 철푸덕, 엉덩방아를 찧었다.
4.
“미친!”
“그러니까 덥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사람을 패?”
“말해서 안 들으면 패야지! 너도 자판기 고장나면 일단 패고 보잖아!”
한천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려오는 꼬리뼈를 문질렀다. 화가 나기보다는 놀랐고 놀라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제 애인 직업이 사람 패는 일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저를 팰 줄은 몰랐다. 제가 나부생을 간과했듯 나부생 역시 저를 간과한 듯 했다. 한천은 사람 패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게 일이었다.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나부생이 풀어 헤쳐진 셔츠를 추스르며 소리쳤다.
“야! 내가 덥다고 했어 안 했어! 하지 말라고도 했어 안 했어! 너만 좋자고 하는 게 섹스냐? 내가 싫다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내가 싸움을 못 했으면 어쩔 뻔했어!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너 흥분한 거 받아 주고 있었을 거라고! 하기 싫은데!”
구구절절 맞는 소리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맞은 부위는 배였지만 띵한 건 머리였다. 그러고 보니 잡혀 들어갈 사람은 나부생이 아니라 한천인 듯 했다. 한천은 입이 뚫렸지만 변명할 여지가 없었고 나부생은 이씨, 우이씨, 하며 화 난 티를 팍팍 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보던 한천이 목을 가다듬고 나부생의 눈을 마주치려 노력하며 말했다.
“미안하다..”
“더 크게!”
“미안하다!!!”
“더 진정성있게!”
“미안하다아아!!!!”
“알면 이제 꺼져!”
그렇게 외치고 나부생은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한천은 나부생의 방바닥에 홀로 남아 멍하니 샤워기 물줄기 소리를 들었다. 나는 정말.. 개새끼다. 선언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잘 훈련된 애완견도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눕는다. 나부생이 꺼져 달라 했으므로 한천은 그 말을 듣기로 했다. 지금은 내 얼굴도 보기 싫어하는 것 같지만, 내일이 되면, 내일이 되면.. 정말 잘 해 줘야지. 뭘 할지는.. 이제부터 생각해 보자. 잘 해 줘야지. 진짜 잘 해 줘야지. 아무튼 잘 해 줘야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었지만 이대로 흐지부지 넘기기에 한천은 나부생을 너무 사랑했다. 하루라도 얼굴을 못 보면 눈에 핏발이 서고 손을 못 잡으면 금단현상이라도 온 것 마냥 머리가 어지러웠다. 늘 마음 속 어딘가에 간직만 하고 있던 사랑을 한천은 이제야 꺼내 확인했다. 외양간을 수리한 그 농부도 떠나간 소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으로 그런 일을 했을 것이다. 미련한 짓인 줄 알면서도. 한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과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방금 전까지 쑤셔오던 근육이 더는 아프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화장실 문이 열렸다. 나부생은 텅 빈 집안을 한참 바라보다 물기를 제대로 닦아내지도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아까의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톡, 톡 떨어졌다.
5.
에어컨 수리기사는 나흘째 감감 무소식이었다. 날은 계속 더웠고 나부생은 미쳐서 팔짝 뛸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찜통같은 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천은 ‘그 날’ 이후로 하루에 두 번씩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고, 나부생은 소파에 앉아 그 소리를 듣기만 했다. 땀을 줄줄 흘리는 나부생을 위해 나성이 선풍기를 사 왔다. 나부생은 선풍기를 조립하는 모양을 흘끔 바라만 보고 ‘형님 이러다 탈수 와서 죽어요!’ 하는 나성의 잔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천은 나부생이 만나 주지 않아 답답했고, 나부생은 본인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지 몰라 답답했다.
‘그 날’, 샤워기 아래에서 열기를 가라앉히고 나니 짜증도 따라 잠잠해졌다. 화를 낸 사유에는 후회가 없지만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행동했다는 생각이 나부생을 괴롭게 했다. 거르고 걸러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상대에게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한천의 얼굴을 다시 보기가 부끄러워졌고, 동시에 한천이 제게서 떠나갈까 두려웠다. 첫 방문을 거절하고 나니, 어느 타이밍에 제 모습을 보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바로 다음 방문에 문을 열기에는 가오가 죽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오래 버티기에는 한천이 단념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푹푹 찌는 집 안에 버티고 앉아 있으면서도 한천의 것이 분명한 초인종 소리는 반드시 들어야 마음이 놓이게 된 것이었다. 나부생의 상태가 가장 갑갑한 사람은 바로 나부생 본인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도 없었고, 타인 때문에 감정이 널을 뛰어 본 적도 없었기에 나부생은 늘 전전긍긍했다. 봄바람과 함께 다가온 나부생의 첫사랑은 폭염을 맞아 갈피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이었다.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나부생의 집 앞까지 찾아갔지만, 또다시 허탕이었다. 한천은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공안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벌써 며칠째 나부생의 얼굴을 보지 못해 애가 탔다. 퀭한 눈으로 복도를 걸으니 반대편에서 허성정이 다가왔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 인간이 정말.
“싸웠다면서요?”
“네, 뭐.”
나는 꼴도 보기 싫으면서 친구한테 호다닥 일러 바쳤다 이거지. 한천은 조금 서글퍼졌으나 그 화살은 나부생이 아닌 허성정에게 돌아갔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최대한 대화를 삼가기로 했다. 재수없게 이죽거리는 얼굴에도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참자. 저 자식, 아니, 저 사람은 상관이고, 나부생 친구고, 나부생, 하. 그래, 참자.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던 인생이었는데 나부생이 나타나며 작은 행동 하나하나부터 심지어는 생각까지 제약이 걸렸다. 마치 작은 나부생의 모습을 한 요정이 하루 온종일 제 곁을 따라다니며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천아, 그건 나쁜 생각이야. 천아, 나는 그런 거 싫어. 다른 이를 고려하며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일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하루 온종일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한천의 생활은 나부생이 없어도 나부생과 함께였다.
“나부생 걔, 원래 더운 거에 좀 민감해요. 여름마다 그래서 나도 해달라는 거 다 해 줘요. 어쩌겠어요, 날씨는 마음대로 못 바꾸니까 나부생 기분이라도 마음대로 지랄하게 둬야지.”
진작 좀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예전부터 알고 계셨던 거라면. 한천은 불만을 목구멍 너머로 애써 넘겼다. 한천이 무표정으로 그렇습니까, 하니 허성정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들어가요, 나도 일이 있어서.”
“들어가십쇼.”
인스턴트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가는 허성정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나부생과 다퉜다는 소식을 듣고 한천의 꼴을 구경하러 온 게 분명했다. 한천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며 민트를 꺼내 씹었다. 사탕 알갱이가 부서지며 으드득, 하고 살벌한 소리가 났다.
6.
허성정은 늘 나부생의 유일한 친구인 것처럼 굴었는데, 그닥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나부생은 그 행태를 받아 주었다. 나부생이 불가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집 안에 칩거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허성정은 직접 술과 안주를 잔뜩 사 들고 나부생의 집을 방문했다. 한천은 일주일째 하루에 두 번 초인종을 눌렀고, 나부생은 도대체 이 엇갈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일주일 내내 초인종 소리에 일희일비하며 지내다 보니 나부생은 이제 한천이 오지 않을 시간에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자 허성정은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나부생이 대놓고 실망하면서 동시에 안도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으레 술자리가 그렇듯 한 잔에서 한 병이 되기는 어렵지만 한 병에서 다섯 병이 되기는 금방이었다. 술 마실 기분 아니라던 나부생은 어느새 헬렐레 맛이 가 있었고, 허성정 역시 나부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은 각자 하고싶은 말을 번갈아가며 내뱉었고 그럼에도 대화를 하는 것 마냥 동시에 깔깔 웃었다. 나부생이 잔에 투명한 술을 따르는 사이 허성정이 엉금엉금 기어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뇌가 술에 푹 젖은 사람의 특징은 지각은 느린데 반응은 빠르다는 것에 있다. 직접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번 받아들이고 나면 행동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나부생도 그랬다. 허성정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아니 흐리멍텅하게 뜨고 보았으나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깨닫고 “안 돼!” 라고 외칠 때는 이미 담배에서 연기가 폴폴 나고 있었다. 나부생은 재빨리 다가가 담뱃불을 끄려 했으나 눈에 뵈는 게 없는 허성정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왜 뺏으려고 해! 니 꺼 피우라고!” 라며 소리쳤다. 나부생이 포기하지 않고 술잔을 들어 그 내용물을 허성정의 얼굴에 뿌렸을 때, 나부생의 얼굴에도 물벼락이 쏟아졌다.
몇 달 전의 일이다. 한천은 나부생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실 담배를 피우는 행위 자체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 비흡연자인 한천으로서는 담배 냄새가 역해야 정상이건만 이상하게 나부생에게서 나는 모든 냄새가 향기로웠다.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만 담배를 피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 담배 없이 스트레스를 쌓아 두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한천은 이미 나부생이 흡연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지식과 경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불량한 자세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삐딱한 미소를 짓는 나부생이 낯설었다. 친구인지 부하인지 뭔지, 어떤 이와 담뱃불을 나누는 나부생의 모습을 보자 한천은 십대 소년처럼 심장이 뛰어 황급히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로 한천은 나부생에게 금연을 종용했다. 나부생은 “니가 홍가 운영해 봐라 담배가 안 말리나.” 라고 응수했지만 한천의 앞에서는 어느 정도 들어 주는 척을 했다. 담배를 끊느냐, 니가 무슨 상관이냐의 티격태격 대치 중에 한천은 급기야 나부생의 집에 화재경보기를 설치했다. 이 경보기는 굉장히 예민하여 담배 연기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바로 스프링클러가 작동됨과 동시에 한천에게 연락이 갔다.
지금에 와서는 한천도 나부생의 흡연 여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본인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나부생마저 화재경보기에 대해 잊고 살았다. 그런데 잠들어 있던 경보기를 허성정이 친히 깨운 것이었다. 스프링클러가 물줄기를 흩뿌리자 나부생은 술이 번쩍 깨는 듯 했다. 넓은 방 안에 온통 물이 쏟아졌고, 허성정은 술벼락에 물벼락 연타를 맞았음에도 술에 꼴아 “비 온다~” 라며 실실 웃고 있었다. 아 이거 한천한테 연락 갈 텐데! 왜 하필 지금! 하여간 허성정 도움이 안 돼요! 나부생은 우선 털털대며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의 코드를 뽑았고, 텔레비전과 오디오, 전축 등 물에 젖어서는 안 되는 기기 위에 담요를 허둥지둥 씌웠다. 밤공기가 그나마 서늘해서 망정이지, 뙤약볕이 내리쬐는 대낮에 에어컨도 없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치우고 닦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천의 전화였다. 나부생은 침을 꿀꺽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내고 싶었으나 알코올에 장시간 노출된 목구멍은 제대로 협조를 해 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 담배, 아니.. 술 마셨어?
“조금. 담배는 내가 아니고 허성정이.”
- 지금 같이 있어?
“뭐야, 한천이야?”
“조용히 좀 해.”
- 같이 있구나.
“한천~ 지금 여기 비 오는 거 알아?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시끄러, 이거 한천 짓이야.”
“뭐? 한 경관 비도 뿌릴 줄 안단 말이야? 진짜 한신이네~”
친구로서 허성정이 부끄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가장 쪽팔렸던 경험을 꼽으라면 나부생은 고민도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외치리라 마음먹었다. 나부생은 걸걸한 목을 축일 겸, 이 상황에서 도피할 겸 술병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허성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씨발.. 왜 술이 깬 거지? 차라리 취해 있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 기다려, 데리러 갈게.
“아냐, 뭘 와.”
- ..진짜 가지 말까?
“어?”
나부생은 당황했다. 한천의 목소리가 어딘지 상처받은 것 같기도, 의기소침한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부생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하자마자 놀랐다. 결정을 내릴 때였다. 지지부진한 다툼을 끝낼지, 연장할지. 나부생은 연애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이 바로 솔직해야 할 때라는 것은 알았다. 어쩌면 술 때문에 판단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간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드디어 용기를 냈다는 데 있었다. 목소리가 형편없게 갈라진 것도 같았다.
“아니, 와 줘. 꼭 와.”
- 알았어, ... 고마워.
“응. 기다릴게. 미안해.”
7.
전화를 끊고 물이 흥건한 바닥에 누운 허성정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이불이 걱정되었다. 여름 햇살에 넣어 놓으면 금방 마르기야 하겠지만 내버려 두면 매트리스에 물이 스며들 것이 분명했다. 매트리스가 젖으면 냄새가 날 것이고, 악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햇볕에 말려야 한다. 그런데 매트리스는 들어 옮기기가 힘들뿐더러 이 더운 날씨에 무겁고 커다란 가구를 옮기는 중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부생은 순식간에 땀에 젖어 또다시 대리석 탁자에 힘없이 누워 있는 제 모습까지 상상하고는 침대로 다가갔다. 알코올이 모든 일의 인과관계를 단순화했다. 나부생이 할 일은 명료해졌다. 이불이 젖으면 걷는 거야! 온 팔에 하얀 이불을 가득 안고 나서야 나부생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불을 둘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물바다인데 도대체 어디에 보관을 한단 말인가. 이미 젖은 이불이기에 조금 축축한 곳에 놓든 많이 축축한 곳에 두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테지만 알코올은 이상한 집착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부생이 이불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한천이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악! 어떡하지, 나는 문을 열 손이 없는데. 어떡하지. 나부생이 이상한 걱정을 하는 사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허성정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신 경관님. 허성정의 혀가 잔뜩 꼬여 있었다. 허겁지겁 뛰어 온 한천은 숨이 차서 헉헉대면서도, 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나 가관이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붉은 얼굴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헛소리를 마구 지껄이는 허성정과, 물이 흥건한 바닥, 축축해지거나 싱거워진 안주 등을 눈으로 훑다 시선이 나부생에게 닿았을 때 한천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본인과 꼭 닮은 하얀 이불을 한아름 안고 있는 모양이 귀여웠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긴장한 듯 뻣뻣하면서도 술 때문인지 달아올라 있어 사랑스러웠다. 한천이 허리까지 굽혀 가며 기분 좋게 웃자 나부생도 동그랗게 떴던 눈을 접으며 따라 웃었다.
“뒷정리는 내일 하고, 일단 가자.”
“어딜?”
“우리 집.”
한천은 시시각각 변하는 나부생의 표정을 보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아, 어떡하지. 정말 사랑인가 봐. 한천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 듯 웃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도 같았다. 나부생이 어색하게 다가오자 한천은 짐덩이를 내려놓게 한 뒤 나부생의 빈 손을 소중하게 쥐었다. 손만을 바라보며 한참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드니 나부생이 한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부생과 눈을 마주치자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한천의 심장에서부터 울컥 올라왔다. 나부생의 눈동자가 물기가 있는 듯 반짝거렸다.
“가자.”
“허성정은?”
“어떻게든 되겠지.”
8.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걷는 내내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낮에는 그렇게 덥더니 지금은 시원하네, 밤바람 기분 좋다’와 같이 단순한 말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동안 잘 지냈냐는 식의 안부 인사도 생략했다. 둘은 다만 손을 잡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리를 걸으며 둘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맞닿은 손바닥과 얽힌 손가락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나부생은 팔을 크게 흔들거나 자기만의 리듬에 맞추어 발걸음을 늦추는 등 장난을 걸었고, 한천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손등에 엄지손가락을 문지르거나 술을 머금은 나부생의 다리가 무너질 때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거나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천은 나부생을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온 몸에 물을 맞은 다음 바로 바람을 쐬었으니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라 일렀다. 자주 와 본 한천의 집이기에 나부생은 익숙하게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물소리를 들으며 한천은 나부생을 위해 새 속옷과 잠옷을 준비했다. 전에 세탁해 둔 나부생의 옷을 화장실 문 앞에 두며 한천은 실실 웃었다. 제 것과 같은 향이 났다. 치기 어린 질투심으로 설치했던 스프링클러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 마음이 덜 여물어 나부생에 대한 감정마저도 흔들리려 할 시절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자면 한천은 지금보다 더 막무가내였고, 나부생에 대해 잘 몰랐으며, 관계에 있어 우위를 선점했다 믿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랑을 하면서도 이기려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나부생 표정 하나에 울고 나부생 행동 하나에 웃으며 나부생에게 휘둘리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처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미 너무나 커져 버린 제 안의 나부생이 앞으로 얼마나 불어날지 무서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더욱 사랑할 날들이 기다려졌다.
침대 위에 앉아 추억에 젖어 있으려니 나부생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에 둔 옷을 입고 익숙한 방을 어색하게 느릿느릿 걸어 한천의 앞에 도착했다. 한천이 나부생을 올려다보다 에어컨을 틀었다. 삐빅, 소리가 나며 상쾌한 바람이 공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앉아.”
“어디에?”
제 옆을 툭툭 치자 나부생이 한천에게 붙어 앉았다. 살을 마주 대고 있으면서도 나부생은 제 손가락만 쳐다봤다. 한천이 나부생의 옆모습을 뜯어 보다, 일주일간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과였던 말 한마디가 기다림을 만나 살을 붙여 나갔다. 한천은 초조하게 제 입술을 핥았다.
“저기.”
“응?”
손가락 장난을 치던 나부생이 고개를 돌려 한천을 눈 안에 담았다. 한천은 나부생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마주할 시간이었다.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한 거야. 그날 미쳤었지, 나는 왜 내가 원하는 건 당연히 너도 원할 거라 착각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인데.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서 그랬나 봐. 미안, 정말 미안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고 싶어. 일주일간 혼자 생각을 많이 해 봤어. 나의 마음, 그리고 너의 마음에 대해서, 그랬는데,”
“있잖아.”
“응, 부생아.”
진지한 한천의 표정을 감상하던 나부생이 한천의 볼을 감싸쥐고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산뜻하게 입술이 떨어졌다. 첫 키스보다도 수줍은 입맞춤이었다. 나부생이 발그레한 얼굴로 한천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입꼬리가 떨렸다. 나부생에게서 한천과 완전히 같은 향이 났다. 그럼에도 한천은 그 향이 마냥 좋았다. 술을 진탕 마신 건 나부생인데 제가 취한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그치.”
말을 겨우 내뱉고 나부생은 다시 한번 한천에게 입을 맞췄다. 아까와는 달리 깊게 파고들자 한천이 화답하듯 나부생의 허리를 껴안고 천천히 침대로 몸을 숙였다. 나부생의 뒤통수에 푹신한 베개가 닿자 한천은 나부생의 몸에 제 것을 밀착하며 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부생이 한천의 등을 껴안고 토닥였다. 한천이 속삭였다.
“그러게.”
시원하고, 행복했다. 행복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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