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제 1회 란웨이 챌린지 (주제: 주사)
2020.03.16.
上
긴 전쟁이 끝나고 온 세상이 평화를 맞이하였을 때, 특별조사처만은 그 평화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동고동락한 전우를 잃었기 때문이다. 야존이 흡수한 것들을 모조리 뱉어낼 때, 에너지체인 왕정과 쌍잔도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므로 잃은 것은 자오윈란과 션웨이, 그리고 리 아저씨뿐이었다. 처장인 자오윈란의 영혼은 진혼등 안으로 들어가 육체만이 그들 곁에 자리했다.
다칭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자오윈란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서서 이 바보야! 어서 일어나! 하며 잔소리를 했다. 이전과 같은 반박이 돌아오지 않아 다칭은 허전함에 눈물도 찔끔 흘렸다. 특별 고문인 션웨이는 제 흑능량을 뽑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야존을 무력화하였기에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본디 지성인의 생명은 흑능량과 이어져 있어, 흑능량의 불이 꺼지면 그것의 주인 역시 생명을 빼앗기는 법이었다. 하지만 션웨이는 어쩐 일인지 흑능량을 모두 소모하였음에도 숨을 잃지 않았다. 린징은 션웨이가 자오윈란과 생명을 공유하여 벌어진 일이리라 조심스레 추측했다.
3대 처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과거 자오신츠가 말했던 대로 신분이 가장 확실한 궈창청이 특별조사처의 처장을 대행했다. 사실, 이름뿐인 직위였고 특별조사처의 일원들에게 궈창청은 여전히 바보같고 순진한 막내 신입이었다. 처장 대행께서는 혼자 일기를 쓰기에 최적화된 장소가 주어졌음에도 처장실을 일부러 비워 두었다. 궈창청은 떠나간 사람들 모두에게 마음의 방을 한 칸씩 분양해 주는 버릇을 못 고쳤는지, 이제는 멀쩡한 특별조사처의 사무실 한 칸까지 비워 두었다.
추홍과 린징은 궈창청을 라오(老)궈, 궈 처장님, 대장 등으로 부르며 놀려 먹는 것을 삶의 새로운 낙으로 삼았다. 궈창청은 존경하는 자오 처장님처럼 수염을 길러 볼까, 막대 사탕을 먹어 볼까 고민을 했다. 자오윈란과 션웨이가 그들의 곁에서 잠시 떠나 있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그 사실에 적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일반적인 정의의 인간은 둘뿐이었지만, 특별조사처의 일곱 명은 모두 적응을 꽤 잘 해 나갔다.
처장 대행이 처장 노릇, 그러니까 여러 식사 자리에 불려 다니기, 온갖 술자리에서 술 주는 대로 얻어 먹기, 틈만 나면 상부에 구두 보고하기 등등에 꽤 익숙해졌을 무렵, 진짜 처장이 살아 돌아왔다. 마치 자신의 자리를 돌려받겠다는 듯, 후임 처장이 잘 하고 있나 감시하겠다는 듯 그랬다. 다칭이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자오윈란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자오윈란은 침대 위에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다칭이 비명을 지르며 다가가자 자오윈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시끄럽게 왜 소리를 질러.”
“시체 비슷하게 여기고 있던 게 갑자기 일어나 있으면 당연히 놀라지!”
“아 됐고, 션웨이는?”
다칭은 나름대로 자오윈란이 깨어났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다가가 포옹을 할까, 아 그건 좀 낯간지러운가. 내가 너네 집 지키고 있었다고 자랑을 할까. 아니, 내 집이기도 한데. 눈물을 흘릴까, …그렇게까지 기쁜가? 어떤 경우든 다칭은 당연하게 자오윈란이 자신을 반가워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칭이 감격의 포옹을 하기 위해 다가가던 순간,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안부를 물었다. 이 사실이 못내 서운해 다칭은 일주일간 자오윈란과 말을 섞지 않았다.
자오윈란은 다칭에게 뒤늦은 사과를 했지만, 속으로는 션웨이가 깨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기다림이 자신에게 주어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열혈 과학도 린징이 자오윈란에게 어떤 원리로 진혼등 안에서 나올 수 있었냐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지자, 자오윈란은 “음… 맞짱 떠서 이겼어.” 라고 말하고 다시는 진혼등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션웨이가 기운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없이 사계절을 다섯 번 보냈다. 그 쯤 되니 자오윈란은 특별조사처의 새 업무에 능숙해졌다. 지성과 해성의 영원한 단절로 인해 특조처는 사실상 본래의 업무를 잃었다. 하지만 대중에 세상을 구한 영웅 쯤으로 알려진 특별조사처를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해체해 버릴 수는 없었다. 특조처는 룡성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통했고, 시민들은 특조처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전처럼 외계인 범죄자를 잡으러 다니는 업무는 거의 하지 않지만, 봉사를 하거나 학교로 강연을 다니거나 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했다.
간혹 해성에 남은 지성인들이 난동을 부릴 때면 예전처럼 외근팀인 궈창청과 추수즈가 출동을 했고, 잡아 온 지성인들에게는 린징이 직접 발명한 이능 구속 팔찌를 채운 뒤 돌려보냈다. 그리 바쁘지는 않았으나 특별조사처에는 나름대로 정해진 업무 시간이 있었는데, 자오윈란은 조금이라도 한가하다 싶으면 늘 자리를 비웠다. 다칭은 자꾸 어디를 가냐며, 반란을 일으켜 궈창청을 4대 처장으로 옹립해 버릴 거라며 자오윈란을 추궁했다. 이 취조 놀이는 자오윈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입을 연 추홍에 의해 막을 내렸다. “션웨이 병실에 가더라, 자오윈란. 얼마 전에 소아 병동으로 봉사 갔다가 봤어.”
룡성대학 병원의 신경 정신과 전문의 청신옌 선생은 분명 룡성대학 병원 소속이었음에도, 특조처의 특별 주치의라도 되는 것처럼 특조처 관련 인물들을 맡았다. 그는 과거 3대 처장의 눈을 진찰했고, 부처장의 기억을 찾는 일에 기여했으며, 최근 몇 년 간은 특조처 소속의 해커라는 놈의 꾀병까지 받아 주어야 했다. 그리고, 대학 친구이자 특별조사처의 특별 고문인 션웨이 교수 역시 청신옌 선생이 맡고 있었다.
뺀질이 충보 놈이 청신옌 선생을 찾아와 커피 한 잔 하자며 꼬시고 있을 때, 아주 오랫동안 1인실을 차지하고 누워 있던 션웨이가 눈을 떴다. 연락을 받고 찾아온 자오윈란은 온 얼굴을 눈물 범벅으로 만든 채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계단으로 뛰어 왔는지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창문이라도 부술 기세로 병실 앞까지 도달했으나, 문고리를 잡는 자오윈란의 손은 심하게 떨렸다. 익숙하디 익숙한 문이 유난히 무거웠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억지로 꽉 쥐고 문을 열자, 누운 채로 청신옌 선생과 대화를 하고 있는 션웨이의 모습이 보였다. 자오윈란은 소매로 눈을 꾹 눌러 눈물을 닦아내고, 성큼성큼 션웨이에게로 다가갔다. 청신옌이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창백한 션웨이의 얼굴이 자오윈란을 돌아봤다. 자오윈란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션웨이.”
“응, 윈란.”
어떻게든 참아 보려 노력했지만, 자오윈란은 다시 눈물을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있는 연인이 자꾸만 흐려져, 자오윈란은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션웨이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갓 기운을 되찾은 팔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겨우 들어올린 손을 자오윈란이 붙잡아 제 볼에 붙였다. 차고 거친 손바닥이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할 말이 많았는데, 아주 많았는데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오윈란은 마음을 짜내고 짜내, 겨우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내었다.
“사랑해, 션웨이.”
지금까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 말을 너에게 꼭 하고 싶었어, 꼭 한 번은. 너에게 이 말을 해 줄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이 날이 오기까지 나는 후회를 하고, 또 후회를 하고… 그렇게 보냈어, 션웨이. 사랑해. 이 순간을 위해 버텼어.
中
흑능량을 잃었을 뿐, 원래도 튼튼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기에 션웨이는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션웨이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자 특별조사처는 비로소 뒤늦은 평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특별조사처의 영웅들은 매 년, 리 아저씨의 기일마다 특조처에 남아 술을 마셨다. 아저씨와의 추억을 안주로 술을 마시다 전원이 고주망태가 되어야 끝나는 광란의 모임이었다.
션웨이가 깨어나기 전, 그러니까 자오윈란이 돌아오고 션웨이가 눈을 뜨기 전까지 자오윈란은 이곳 저곳 불려 다니며 몸을 마구 축냈다. 이십여년 간 열심히 맺어 놓은 인연들이 모두 술 약속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고 1년간은 일주일에 최소 다섯 번 반쯤 취한 채로 귀가를 했고, 그 이후에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 술자리에 나갔다. 션웨이가 특별조사처로 복귀하자 사랑스러운 동료들은 그간 자오윈란이 보인 행태를 모두 션웨이에게 일러바쳤고, 션웨이는 말없이 황망한 표정으로 자오윈란을 돌아보았다. 자오윈란은 입을 떡 벌렸다. 션웨이에게 차마 거짓말은 할 수 없었는지, 크게 벌린 입에서는 ‘다시는 안 그럴게...’ 라는 말만 반복해서 튀어나왔다.
엄격한 애인님 덕에 자오윈란은 온갖 모임에 나가 탄산음료만 홀짝홀짝 마시다 돌아왔고, 션웨이는 그런 자오윈란을 칭찬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자오윈란을 계속해서 술자리에 불러대던 각종 ‘형님’들도 술 맛이 떨어진다며 더는 부르지 않았다. ‘그래! 네 부인인지 남편인지랑만 평생 붙어먹어라!’와 같은 덕담도 아낌없이 쏟아졌다. 칼 같은 션 교수님께서도 일 년에 단 하루, 리 아저씨의 기일만큼은 자오윈란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션웨이는 괜히 술도 마시지 않는 자신이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깨질지도 모른다며, 자리에 앉아 있다 하나둘씩 나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션웨이가 지긋지긋한 병원에서 벗어나자마자 자오윈란은 션웨이에게 집을 합치자며 땡깡을 부렸다. 사실, 션웨이가 병실에서 눈을 뜬 그 날부터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집에서 물건들을 조금씩 훔치기 시작했다.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도 션웨이의 집으로 침입해 션웨이의 옷장을 뒤졌다. 두 집 분량의 짐을 하나의 집 안에 모두 몰아넣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였기에,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퇴원했을 때 반드시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 노력 끝에, 션웨이가 몇 년만에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자 가구만 남아 휑하게 비어 버린 방이 션웨이를 반겼다. 자오윈란은 그 옆에서 수상쩍게 웃으며 션웨이를 맞은 편,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자오윈란의 옷장 안에 걸린 자신의 옷가지와, 자오윈란의 침대를 덮고 있는 자신의 이불을 보자 션웨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자오윈란은 이사 계획을 야심차게 세웠고, 반 년이 지난 지금은 시 외곽의 마당이 넓은 집에 션웨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검은 털의 고양이도 함께.
출퇴근이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특별조사처와 룡성대학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기에 괜찮았다. 자오윈란과 션웨이는 한 시간 정도의 통근 시간 동안 버스 안에 꼭 붙어 앉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창 밖의 바쁜 도시를 구경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은 서로가 이 평화를 함께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고양이는 닭살 커플과 한 버스를 타기 싫다며 가장 먼저 출근했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성실한 직원이 되어, 다칭은 입사 이래 최초로 ‘이 달의 직원상’까지 받게 되었다.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도착한 션웨이는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겼다. 자오윈란을 만나기 이전, 션웨이는 조용한 공간에 홀로 앉아 있을 때면 어디서 솟아나는지도 모를 외로움과 서글픔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혼자가 두렵지 않았다. 애정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 안에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행복했다. 션웨이는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커플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기대 앉아 책을 읽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이 반쯤 넘어갔을 때, 문득 얼마 전 자오윈란이 선물해 준 휴대용 라디오가 떠올랐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도 좋지만 라디오도 들어볼까, 고민하던 중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네, 션웨이입니다.”
‘교수님? 저 왕정인데요.’
“무슨 일인가요?”
‘지금 자오 처장이 많이 취했는지,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시끄럽고 불쌍해서 죽겠어요. 데리러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래는 부처장이랑 같이 집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없으면 아무 데도 안 가겠다고 떼를 쓰네요. 죄송해요, 귀찮으시겠다.’
“아닙니다. 지금 갈게요.”
‘네, 자오 처장 정신 차리게 해 놓을게요.’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기에, 션웨이는 택시를 타고 특별조사처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가 달라는 젊은이의 말에 노련한 택시 기사는 버스로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20분만에 완주했다.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허겁지겁 내린 션웨이는 성급하게 특별조사처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고양이 모습으로 리 아저씨의 자리에 앉아 털을 고르던 다칭이 션웨이를 가장 먼저 반겼다.
단추처럼 노란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션웨이는 자신이 아직도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 잠옷 위에 입은 코트를 여몄으나 튀어나온 바지는 누가 봐도 실내복이었다. 션웨이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다칭이 자오윈란은 처장실에 혼자 있다고 말해 주었다. 션웨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쏜살같이 다칭을 지나쳤다. 다리를 빠르게 휘적이며 로비를 가로지르는 션웨이의 모습에 술에 얼큰하게 취한 직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던졌다.
“션 교수님, 힘 내세요!”
“자오윈란 이 멍청아!”
“대인… 저는 언제나 대인을 위해 이 한몸… 딸꾹!”
“다… 다들 취해서… 마, 말이… 많네!”
“션 교수님을 위하여 건배! 대과학자가 될 이 몸을 위해서도 건배!”
1층에서 흥에 겨운 인간과 동물과 기타등등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이, 막 2층에 도착해 처장실 문을 연 션웨이는 문 안의 풍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처장실 안은 연기와 향으로 가득했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책상 앞으로 다가서자, 자오윈란이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오윈란은 누군가 들어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책상 위만을 노려봤다. 책상 위에는 향로가 놓여 있었다. 작은 향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션웨이는 그 향을 알고 있었다. 두 세계의 단절이 일어나기 전, 두 세계를 잇는 연락 수단을 피울 때 나는 향이었다. 당연히 잊을 수가 없었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옆으로 다가가 연인의 어깨에 손을 짚고, 조용히 목을 가다듬었다.
“윈란.”
낮은 목소리가 연기를 지나 자오윈란에게로 닿았다. 자오윈란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은 눈물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였다. 눈물로 젖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자오윈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휘청였다. 션웨이가 자오윈란을 부축하려 팔을 뻗은 찰나, 자오윈란이 션웨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축축한 소매가 션웨이의 목덜미에 닿았고,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짙은 향 냄새 사이로 알코올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보고 싶었어, 션웨이. 션웨이, 정말로, 왜 이제야 온 거야.”
속삭이는 소리에 션웨이는 품 안의 몸을 조금 더 당겨 안았다. 마른 등을 천천히 토닥이자 귓가에 닿는 숨소리가 점차 편안해졌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가. 괜찮아. 션웨이는 대학에 갓 들어온 새내기들과 상담할 때처럼 목소리를 꾸몄다. 괜찮아, 윈란.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분명 자오윈란을 위로하기 위한 말들이었지만, 션웨이는 이 말들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다고 느꼈다. 가만히 션웨이의 품에 안겨 있던 자오윈란이 갑자기 몸을 떼어내더니, 션웨이의 볼을 쥐고 션웨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짜 션웨이네….”
“…그럼, 진짜지.”
“진짜 션웨이다. 정말… 션웨이다.”
당황한 얼굴을 양 손 안에 넣고 마구 문지르던 자오윈란은,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겨우 멎은 눈물을 다시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어, 윈란, 왜 그래… 션웨이가 얼굴을 붙잡힌 채로 자오윈란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애썼다. 자오윈란은 엉엉 소리내어 울다 손을 제 얼굴 위로 얹고 주저앉았다. 엉엉엉엉. 엉엉엉. 션웨이가 자오윈란을 따라 쪼그려 앉아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쩔쩔맸다. 자오윈란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울었다. 이래서 시끄럽고 불쌍하다고 한 거였나. 션웨이는 전화선 너머로 들었던 왕정의 목소리를 회상했다.
“저기, 윈란, 윈란… 그렇게 울면 몸 상해. 그러니까 그만 울어.”
“션웨이… 션웨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션웨이…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네가 없으면 안 되는데… 네가 없었어. 그게 너무 슬펐어. 그래서… 너를 부르려고 했는데, 네가 안 왔어.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없었어. 션웨이, 나 너무 무서웠어. 네가 그랬잖아, 네가 없을 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그래서 나 아무 데도 안 갔어. 여기서 너 기다렸어, 션웨이… 너무 보고 싶었어. 너를 잃을까 봐, 영영 다시 못 볼까 봐… 션웨이. 션웨이… 사랑해. 사랑해… 정말 사랑해.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해.”
“그만 울어, 윈란. 그만 울고… 이제 집에 가자.”
“…집?”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울음 섞인 말을 웅얼대던 자오윈란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온 몸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굳어 있던 션웨이가 뻣뻣하게 자오윈란의 얼굴을 닦아냈다. 그래, 집에 가자. 우리 집에. 자오윈란이 킁, 소리를 내더니 맹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가자. 션웨이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보이며 자오윈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물로 젖은 손이었지만 자오윈란은 그것을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얼른 가자!”
“그래, 그래. 잠깐, 콧물 좀 닦고….”
下
묘하게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자오윈란은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자 세상이 돌았다. 우욱, 속이 울렁거리며 무언가 올라오려 했다. 토기를 겨우겨우 참아 낸 자오윈란은 주변을 돌아봤다. 션웨이와 자신의 행복한 집, 홈 스위트 홈이었다. 음. 우리 집이군. 음. 내가 어제 어떻게 집에 왔더라? 음. 음. 음… 좆 됐군. 자오윈란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재빨리 눈을 돌려 션웨이를 찾았으나,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설마 가출?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헉. 안 돼! 션웨이는 핸드폰도 없는데! 자오윈란은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이었다. 방 문을 열자 알싸한 차 향이 코 끝에 감겨 왔다.
“션웨이?”
“아, 윈란. 일어났어?”
보글보글 끓는 냄비 앞에 서 있던 션웨이는 푹 잠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뻗친 머리에 까칠한 얼굴을 한 자오윈란이 어색하게 션웨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션웨이가 마주 웃으며 불을 끄고 차를 잔에 따랐다.
“속 아프지? 차 마셔. 생강꿀차야.”
“으응….”
“괜찮아? 머리 안 아파?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마셨어.”
“아, 잘 조절하고 있었는데… 추홍 그 자식이 뱀술을 가져오는 바람에 페이스 조절…을….”
“그랬어?”
션웨이는 차를 한 잔 더 따른 뒤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끌어 탁자 앞에 앉았다. 자오윈란은 얼떨결에 션웨이의 앞에 앉았다. 션웨이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띤 채였다. 자오윈란이 눈치를 보다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앗뜨뜨! 자오윈란이 혀를 내어 깨물자 션웨이가 사려 깊은 목소리로 “많이 뜨거워?” 라고 물었다. 자오윈란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 아니, 하나도 안 뜨거워. 하나도.”라고 답했다. 정적이 흐르고, 션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는…”
“내가 미안해!”
“응? 뭐가?”
“내가 꽐라가 돼서… 너 귀찮게 하고, 진상 부리고… 못 볼 꼴 보여서 미안.”
“음, 그건 괜찮아. 윈란, 내가 궁금한 건… 어제 대체 왜 그렇게 울었냐는 거야.”
“어? 나? 그냥, 잠깐 졸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네가 내 눈에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좀 착각을 했나 봐. 왜, 너 예전에 뭐 찾으러 다녀 온다고 해 놓고 한참 안 온 적 있었잖아. 그 때 생각이 좀 나면서… 션웨이! 갑자기 어디 가?”
가만히 앉아 자오윈란의 말을 듣던 션웨이는 그 뜨거운 차를 한 입에 털어 넣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자오윈란이 션웨이의 뒷모습을 열심히 쫓았다. 션웨이가 빈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찻잔이 수돗물로 가득 채워졌다. 물이 넘치는데도 션웨이는 꼭지를 잠그지 않았다. 션웨이, 션웨이? 아무리 불러도 션웨이는 뒤를 돌지 않았다. …있잖아. 수돗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션웨이의 말을 덮었다. 자오윈란이 잘 못 들었다는 듯 되묻자 션웨이가 이어서 말했다.
“이제 정말로, 너를 두고 떠나지 않을게. 그러니까...”
“응?”
“불안해하지 마. 내가 미안해, 네가 그런 상상을 한 것도 내 잘못이겠지.”
“션웨이?”
“나도 너를 정말 사랑해, 윈란.”
말을 멈춘 션웨이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황급히 방을 향해 걸어갔다. 자오윈란이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션웨이, 션웨이?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자오윈란은 헤벌쭉 웃으며 션웨이의 뒤를 따랐고, 그의 시선은 션웨이의 붉어진 뒷목을 향해 있었다. 머리가 띵하고, 위장이 뒤집혔지만 자오윈란의 입꼬리는 자꾸만 하늘로 치솟으려 했다. 아직 남은 술기운 때문에 환청을 들은 걸까, 비현실적인 상황에 자오윈란은 점점 더 크게 웃었다.
“션웨이! 다시 한 번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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