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012
네 사람이 연애를 하면 열 두 가지의 사랑이 존재한다
네 사람이 연애하면 열 두 가지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리고 열두 가지의 사랑이 있다면, 열두 배로 낭만적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다. 적어도 엔도 로이야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은 비가 와서 유난히 바닥이 척척하게 얼어 걷기 힘든 날이었다. 그런 날에도 분홍색의 돌돌 말린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까지 내린 엔도 로이야루와 신 나게 웅덩이를 밟으며 걷는 도하타 모에미는 나름 즐겁게 등교 중이었다.
“지, 지각 아니에요? 모에미, 빨리 가는 게...”
“괜찮아, 괜찮아!”
로이야루는 간신히 올라탄 전철에서 모에미의 눈치를 연신 보며 고개를 숙였다. 로이야루는 야간반으로, 가끔 낮에 학교에 갈 때마다 적응에 어려워하곤 했다. 그래서 가끔 로이야루가 낮에 학교를 가야할 때 그와 함께 등교하기 위해 기다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가 올 줄 알았으면 마리아 말이나 좀 들을걸.”
“그, 그러게요~...”
두 사람과 함께 사는 동거인이자 애인, 미야베 마리아는 어제부터 허리가 아픈 걸 봐 분명 오늘 비가 올 거라고 신나서 말해대었다. 비가 오기엔 분명 달무리조차 끼지 않은 맑은 밤하늘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곧 제 추리가 분명 맞을 거라는 생각에 신 나서는 또 다른 동거인이자 애인인 아오타 이우라와 11시에 일찍 잠들었다.
그리고 모에미가 자정쯤 본 일기예보에선 분명 오늘날이 맑을거라 했다. 아나운서 언니가 또랑또랑 정확한 목소리로 말했단 말이다.
하지만 결국 마리아의 추리는 맞았고, 장마가 예상보다 하루 일찍 시작되었다. 이우라는 마리아 덕분에 비가 오는 날에도 늦지 않게 등교할 수 있었다.
[내 추리가 맞지? 비가 온다니까!]
새벽 6시에 보낸 라인은 모에미가 평소와 같이 7시에 일어나자마자 확인할 수 있었다. 단체 라인방에 도착한 메일에는 의기양양한 마리아와 피곤해서 눈그늘이 축 내려온 채 어깨를 으쓱이는 이우라가 찍힌 사진도 함께 전송되어있었다.
[6시엔 비가 안 왔나 봐?]
물음표를 띄우는 고양이 캐릭터 이모지. 모에미가 주로 쓰곤 한다. 모에미는 귀여운 동물 이모지라면 적당히 다 쓰는 편이었다.
[당연하지. 지금은 비 오지? 우산 챙겨 나와.]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들고 걷고 있는 셜록 홈스의 캐릭터 움직이는 이모지. 마리아가 주로 쓴다. 마리아는 셜록홈즈나 탐정이라면 무조건 사서 열심히 쓴다.
[이상하게 우산이 두 개밖에 없더라. 누가 다른 곳에 두고 왔나 봐. 둘씩 쓰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비 맞지 않게 조심해서 오는 편이 좋을걸. 감기 걸릴 테니까.]
이우라는 이모지 자체를 잘 쓰지 않는다.
[우산, 또 잃어버렸나 봐요...]
울상을 짓는 예쁜 소녀의 이모지. 로이야루가 주로 쓴다.
라인을 전부 확인한 모에미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직 로이야루는 자고 있었고, 평소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했으니 9시에 깨울 생각이었다. 로이야루는 아침잠이 많아 9시 전에 일어나면 내내 졸곤 했기 때문이다.
“아, 전철이 5분 뒤에 온대요.
“어?? 타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10분 정도 걸리는데, 그냥 다음 전철을 타는 건 어때요...?”
“아니야. 업혀, 로이야루!!”
모에미는 우산을 접고 잠시 발목을 풀더니 로이야루의 앞에 등진 채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 감기 걸려요, 모에미!”
“학교 가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 돼.”
로이야루는 잠시 황당해 있다 비장한 표정으로 모에미의 등에 올라탔다. 모에미는 그리고 흐아압! 하는 소리와 함께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로이야루는 엄청난 속도감에 그녀의 등에서 잠시 균형을 못잡다 곧 모에미의 등에 찹 달라붙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역에 오자마자 전철이 도착해 두 사람은 무사히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학교까지는 전철로 5역을 가야 한다. 의외로 전철로 5역은 꽤 멀다. 두 사람은 어느새 등교와 출근을 하는 아침 시간을 훌쩍 넘어 평소와 다르게 비가 그친 뒤 더 쨍하게 햇살이 들어오는 지하철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이런 날에 학교를 가는 건 손해가 아닐까?
“...로이야루, 오늘 땡땡이치는 거 어떻게 생각해?”
“그, 그렇지만...”
물론 로이야루는 같은 생각을 했지만 잠시 머뭇거렸다. 모에미는 그런 로이야루를 힐끔 보다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전철이 지연돼서 늦다가 결국 못 갔다고 하면 되지!!”
모에미는 신나서 지금 있는 역을 확인해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앗, 이 역이면...
로이야루는 잠시 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미 반 친구 몇에게서 오늘 학교 오는 날이 아니냐고 문자를 받은 참이었다. 로이야루가 깜빡하고 또 학교를 오지 않을까 걱정한 게 분명했다.
이런 친절한 걱정을 받으면서도 내가 땡땡이를 쳐도 되는 걸까?
그런데 땡땡이 재밌겠다. 오랜만에 낮에 외출하는 거니까 광합성도 될 테고.
아니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모에미는 신나서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더니 SNS 계정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 역에 저번에 가기로 했던 파르페 가게가 있어. 왜, SNS에서 봤잖아. 로이야루, 장미꽃 모양 버터크림 얹어진 파르페 먹고 싶다 했잖아? 두꺼운 유리컵에 진주 달린 리본도 장식되어서 나오는데다 그 리본은 일회용 장식이라 가져가도 된다던데.”
모에미는 그렇게 말하면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에잇. 로이야루는 불안한 시선만 빙빙 굴려대었다. 진짜 땡땡이쳐도 되는 걸까? 하지만 오랜만에 가는 학교인데, 기껏 낮에 맑은 정신인데...
“아아, 애인이 같이 가주면 좋겠다. 그치?”
로이야루의 휴대폰이 여전히 여러 알람의 진동으로 웅웅 울리고 있었다. 모에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순진무구하고 결백한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곳을 혼자 가긴 곤란할 것 같지 않아? 응? 곤란하네~ 어쩌면 좋아. 로이야루, 정말 안 갈 거야?”
“아, 아...!”
로이야루는 그 말에 헐레벌떡 휴대전화를 꺼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래, 애인을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않는가! 이건 그냥 애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였다.
절대로 장미크림 파르페에 눈이 먼 게 아니었다. 절대로! 진주 달린 리본도 관심 없었다! 그 진주가 인공진주치고 상당히 예쁜 쉐잎에 색도 크리미하고 예쁘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청춘의 로맨스를 다하는 것뿐이다.
어라. 그럼 같이 안 온 이우라랑 마리아는 어쩌지.
음, 좋아. 정식 데이트는 아니고 데이트 예행연습 정도로 치면 되겠지?
로이야루는 그리 생각하며 신나서 역에서 내리는 모에미를 따라 내렸다. 밖에는 해가 떴지만 여전히 툭툭거리며 비가 오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 두 사람은 나란히 한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
모에미가 든 투명한 우산을 본 로이야루가 말했다.
“이거 편의점에서 파는 일회용 투명 우산 아니에요? 예쁜 프릴이랑 레이스 달린 우산 하나 사줄까요?”
“아, 괜찮아. 난 이건 좋아.”
모에미는 항상 투명한 일회용 우산을 쓰고 다녔다. 알록달록하니 예쁜 우산을 살 돈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화사한 우산을 잃어버리는 게 두려운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이야루는 제법 눈치가 좋은 편이었기에 그런 모에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궁금하곤 했다.
예쁜 우산을 잃어버리면 다시 새 우산을 사면 되는 일이 아닌가?
물론 학생은 항상 돈이 부족하긴 하다. 특히나 넷이서 자취를 하는 우리의 경우는 더욱 그렇고. 로이야루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파르페 집에 도착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적어서인지 안에서 앉아 먹기에 자리가 충분할 것 같았다.
“운이 좋네! 이 시간대에 파르페 집을 오는 사람이 역시 없는 걸까?”
“아무래도. 회사 가고 학교에 가니까요...”
“지금 아니면 언제 땡땡이를 쳐보겠어~”
가게 문이 열리며 딸랑, 하고 종소리가 났다. 모에미는 우산을 접어 대충 가게 안에 비치된 우산꽂이에 넣었다.
“아프다고?? 로이야루랑 모에미가??”
“그렇다는데. 어제만 해도 멀쩡하더니만... 아무리 봐도 뻔히 보이는 꾀-...”
잠깐, 하는 손짓을 취한 마리아가 가방에서 안경을 꺼냈다. 마리아가 최근에 길을 가다 산 패션 안경으로 도수는 없는 가짜 안경이었다. 안경을 쓴 마리아는 팔과 다리를 고고 앉더니 고쳐 썼다.
이우라는 헤에, 하고 어깨를 으쓱이더니 가만히 그녀의 옆에 뒷짐을 지고 섰다.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이우라가 다시 말했다.
“어려운 문제로군요, 탐정님. 어제만 해도 멀쩡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복통과 두통, 감기까지 한 번에 앓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기다렸단 듯이 마리아가 대답했다.
“좋은 지적이야. 물론 우리는 다 같은 집에 살고 있고, 감기 같은 전염병이 돌면 같은 병을 앓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 가능성으로 치면 약 90퍼센트지.”
“10퍼센트는요?”
“저번에 우리가 계속 이어서 감기 걸릴 때 다들 한 번씩 걸렸는데 로이야루만 딱 한 번 안 걸렸어.”
“아하.”
마리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 우리한텐 그 흔한 식중독조차 돌지 않았어. 말이 무슨 의미냐?”
이우라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리아는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이우라에게 사탕을 하나 주었다.
“두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거야!”
당연한 말이었다. 이우라는 역시 마리아 탐정님.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박수를 쳐보였다. 평소와 같은 두 사람이군, 싶어 반 친구들조차 눈길을 주지 않았다. 워낙 마이페이스의 마리아는 늘 그렇듯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또!”
마리아가 급히 휴대전화를 열어 안에 있는 두 가지의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전철에 탄 시간은 9시였어. 그리고 로이야루의 마지막 라인은 9시 10분에 왔고. 그다음에 내가 보낸 라인은 확인하지 않았지.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이우라는 눈을 껌벅였다.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려운 트릭이네요. 두 사람이 납치라도 당한 걸까요? 그래서 마지막 라인을 읽지 않은 거죠. 납치범이 두 사람에게 당장 내리라고 협박해서 몸이 안 좋다고 거짓말을 했을 수 있겠네요.”
그린 듯이 멋진 엉터리 추리를 늘어놓는 이우라를 보고 마리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멋진 탐정에겐 멋진 조수가 필요하다. 엉망인 추리와 멋진 추리는 꼭 같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둘 다 멋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틀렸어, 이우라군! 학교까지는 총 역 6개를 지나야 해. 그리고 한 역당 약 2분 정도가 걸리지. 그럼 두 사람은 학교 앞에 도착하는 역 바로 이전 역에 내렸다는 거야. 굳이!”
이우라는 호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은 추리였다. 이전 역에서 내릴 이유? 그런 게 있나? 학교에 오지 않고? 어느새 추리에 꽤 몰입한 이우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건 바로-...”
어라. 뭐지? 그건 모르겠는데. 마리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을 데굴 굴렸다. 음, 뭐지. 뭐지. 정말 뭐지. 이전 역에 뭐가 있나?
“바로-...”
마리아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던 이우라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나섰다.
“그러고 보니, 그 역에 파르페 가게가 생겼다더군요. 탐정님. 기억나십니까? 며칠 전에 로이야루가 SNS를 하다 발견했었죠. 학교 애들 사이에서도 인기였고. 이것 참, 집에 가면서 한 번 들리기라도 해야-..”
마리아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반짝였다. 이우라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땡땡이를 치고 파르페 가게에 간 거야!!”
“호오, 그런 결론에 도출해내다니. 역시 닥터 마리아. 최고의 탐정이십니다.”
이우라가 박수를 쳐주자 콧대가 높아질대로 높아진 마리아는 제법 의기양양한 고양이같이 웃었다. 이우라는 그 모습을 보고 역시 귀엽다는 생각이나 했다.
"그럼 학교가 끝나면 우리도 파르페 가게에 갈까. 우리 몰래 파르페를 먹으러 가다니. 용서 못 하겠는걸."
"나 용돈 다 썼는데..."
"벌써?"
"추리 소설 신간을 샀단 말이야. 그랬더니 순식간에 돈이 녹았다고. 그래, 물에 각설탕 한 조각 넣은것처럼 살살..."
마리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자 이우라는 흔쾌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줄게. 그 정도야 뭐."
"정말? 다음 달에 용돈 들어오면 갚을게!!! 진짜로!!"
"안갚아도 돼."
"아냐. 다음 달엔 추리소설 신간이 없거든."
"계획된거였냐고."
마리아는 후후,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수업이 끝나고 두 사람은 학교 밖으로 나오던 중 실내화를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그러던 중 진짜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마리아의 신발장에 무려 수제쿠키가 있었다.
"어?"
마리아가 수제쿠키를 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뭐지?"
"누가 고백하려고 넣어둔 거 아니야?"
"응? 그렇다기엔 편지가 없는데."
"독살이라든지."
이우라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마리아는 평범하게 독살, 밀실, 청산가리와 살해동기에 심장이 뛰는 평범한 그 나이 또래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독살!"
...음. 큰일 났네. 이우라는 잘못 말했다 싶어 제 뒷머리나 긁었다.
"틀림없다. 주는 사람의 이름도 없고 리본도 묶이지 않았어. 로맨틱한 기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선물로 주기엔 투박한 쿠키긴 했다. 쿠키 자체도 모양도 아니었고, 예쁜 포장도 아니었다. 그냥 지퍼백에 여러 개 넣어놓은 모양새는 고백한다기 보다 친구들과 나눠 먹는 용도일 것 같았다.
"누가 잘못 두고 간걸지도 모르니까 그냥 두고 가자. 독살일지도 모르잖아."
"범인은??"
"내일 로이야루랑 모에미가 왔을 때 밝혀도 늦지 않겠지."
"맞는 말이야. 그럼 이제 집으로 가면 되겠다."
"파르페는 어쩌고?“
마리아는 신발을 신고 허리를 폈다.
"당연한 추리를 묻는구나."
환하게 웃은 그녀가 말했다.
"두 사람이 우리 몫도 포장해왔을걸."
그리고 집에 도착한 이우라는 제법 감탄했다. 정말로 파르페 두 개가 냉장고에 고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좋은 추리인걸."
"응? 무슨 소리야?“
샤워를 끝내고 나온 모에미가 말했다. 이우라는 로이야루가 보기 전에 그녀에게 파자마를 건네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음? 뭐지. 모에미는 파자마를 입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보다, 땡땡이치고 파르페 가게에 간 거야? 로이야루를 잘도 동참시켰네.”
“으음~? 무슨 소릴 하는 걸까.”
“파르페까지 사왔으면서 딴청을 피우는 배짱은 높이 살게.”
“하하...”
모에미는 눈을 빙 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마리아가 파르페 상자를 꺼내는 이우라를 보고 옆에 찹 달라붙었다.
“정말 장미모양 크림이네! 우와. 리본도 엄청나게 예쁘다. 비쌀 것 같아!”
“잘 먹을게?”
이우라의 말에 모에미는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로이야루는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마리아가 학교에 등교하자 신발장에 쿠키는 그대로 있었다.
“어, 쿠키 선물 받은 거야?”
“독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응...?”
이우라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마리아의 신발장 안에 있는 기름 쩐내도 나지 않고, 새로 구운 티가 미묘하게 났다. 어제와 똑같이 일정하지 않은 크기에 대충 구운 감이 있었지만 지퍼백 틈을 타고 올라오는 바닐라 오일의 향이 달랐다.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바닐라 신 나서는 이보다 조금 더 싸구려 향이 난다. 하지만 이 쿠키에서 나는 건 대용량이라기보다 소량으로 판매하는, 비싼 바닐라 오일 같았다.
그제서야 이우라는 이 쿠키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쿠키와 한참 동안 팽팽한 대치를 이루던 이우라는 쿠키를 하나 꺼내어 톡, 하고 부쉈다. 그러자 쿠키가 쉽게 파사삭, 갈라지며 안에 든 게 나왔다.
다름 아닌 얇은 커터칼이었다.
“어라...”
마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커터칼? 쿠키에? 왜? 일부러 해치려고?
추리 소설을 동경했지만, 그 안에서 탐정이 아닌 역할을 맡는 건 상상해본 적 없었다.
모에미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표정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로이야루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신고해야할까요..? 여, 역시... ...범인을 잡아서 직접 보복하는 게...”
이우라는 아서라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턱을 괴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그러다 우리가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선물 받은 쿠키 안에서 커터칼이 나왔다고 신고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마리아는 멍하니 앉아서 쿠키 전부 톡톡 쪼개고 있었다. 쪼갤때마다 안에서 커터칼이 나왔다. 대충 뭉친 모양치고 제법 꼼꼼히 넣어놓은 작태였다.
“만지지 마, 마리아. 위험하잖아.”
“그, 그래... 다칠지도 모르니까...”
모에미는 잠시 생각해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이 있어? 없지 않아?”
“아무래도 그렇지. 마리아를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굴 필요도 없을 텐데요... 정말 못됐어요. 역시 직접 묻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 그건 과격해, 로이야루.”
어라? 잠깐. 이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뭐지? 잠시 고민하던 이우라는 무언가 하나 떠올려내고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결국 이우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슥 문지르던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닛 에닉과 언록은 경쟁 사이에 있는데, 기묘하게도 거기에 과몰입한 팬들은 몇 되지 않는다. 어차피 게릴라 라이브로 마주치면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척’을 할 뿐이지, 사실은 두 그룹 다 그런 경쟁을 즐기는 티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되지 않는단 건 존재한단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학교일 수 있고, 누군가는 마리아를 알 수 있고, 누군가는 언록의 팬일 수 있고, 누군가는 악의를 가질 수 있다.
이우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걸 마리아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멋진 탐정으로 남아 못된 트릭도, 악의도 전부 부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사물함에 그 쿠키를 넣어놓은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거의 살인 미수에 가까운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듣던 마리아는 잠시 허공을 보았다. 말을 하려고 입을 뗐다 닫고, 입을 뗐다 닫았다. 한참을 반복하는 그녀를 미우라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잃어버리는 게 무서워서 좋아하지 않는 짓은 안 할 거야.”
마리아가 처음으로 한 말은 뜬금 없게도 그런 것이었다.
“그렇잖아? 나는 멋진 조수도 있고, 동료들도 있는데다, 아직 노래를 더 하고 싶단 말이야. 괜히 의미 없는 악의에 무릎 꿇는 건 멋진 탐정이 할 만한 짓이 아니야.”
그리 말한 마리아는 뒤를 돌아 미우라를 바라보며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탐정에겐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미우라는 굳이 그게 탐정과 무슨 상관이냔 말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을 뿐이다.
어쨌든 탐정이 그렇다지 않던가.
추리소설의 세계에선 탐정의 말 한마디는 절대적이다. 그러니 제 사랑스러운 애인이 탐정으로 살길 바란다면 미우라는 기꺼이 조수 정도는 되어줄 것이다.
절대적인 말에 당연하단 듯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여름 막바지가 되자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그 날도 저번과 비슷한 날이었다. 일기예보는 틀렸다. 다른 점이라면 마리아가 전 날 비가 올거란 사실을 추리하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간만에 다 같이 늦은 시간에 등교했다. 그 날은 로이야루도 낮에 학교를 가는 날이라 함께 등교하고 싶던 세 사람이 기다려주기도 한 것이었다.
밖에 나가 모에미는 짧은 단우산을 꺼내어 고정용 똑딱이를 톡, 하고 풀어냈다.
“어, 어... 모에미. 우산 샀어요?”
“아, 응.”
모에미는 자동 버튼을 눌러 우산을 펼쳤다. 팡, 하는 소리가 들리며 우산이 활짝 펴진 모습을 올려다보자 우산 안쪽엔 주황색 꽃그림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역시 잃어버리는 게 무서워서 좋아하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인 것 같아서.”
모에미의 말에 로이야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같이 쓸래? 예전 우산보다는 훨씬 크거든.”
로이야루는 아, 하고 밝게 웃으며 그녀의 우산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아와 미우라는 ‘둘만 쓰다니, 치사하다!’ 라는 말을 하며 뒤에서 달려왔다.
“나도 같이 써!”
“나도-”
“너무 많아!!”
모에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우르르 우산 하나를 쓰고 -거의 장식용으로 든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다 함께 우산을 쓰기 위해 달라붙는 일은 제법 기분 좋은 게 아니던가- 걸어갔다.
세 사람의 손목에는 작은 단우산이 들려 있었다. 형형색색의 단우산을 언젠가 잃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 더 예쁜 우산을 찾아다 사면 되는 일이다.
마리아의 말대로 잃어버리기 전에 지레 좋아하는 걸 포기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네 사람이 다 함께 사귄다는 기묘한 선택지를 고른 것처럼, 포기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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