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1~fin.
너는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채 골목으로 뛰어 들어왔다.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바빠 너는 깊은숨을 몇 번이고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너를 쫓던 발걸음들이 골목 앞에서 멈춘다. 어디로 간 거야? 저쪽에서 찾아봐! 코앞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그치고 발걸음들이 멀어진다. 그제야 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눌러썼던 로브를 잠시 내려 차가운 바람을 잠시 쐬고는 다시 깊게 눌러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흑색인 너는 빛이 들지 않는 건물의 그림자를 찾아 골목을 걷는다. 시간 안에 돌아가야 했다. 손님이 기다릴 터였다. 순간이동 수업을 수강하지 않은 것을 찰나 후회하며 가까운 건물로 들어간다. 주인은 들여보내는 대신 너를 막아선다. 이제 알잖아요. 너는 한숨 내쉬듯 말하며 로브를 내린다.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카락, 빛이 없는 녹색 눈동자. 한 송이 장미를 연상시키는 외양. 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린 주인은 너를 보며 고개를 가벼이 까딱인다.
미스 피아레체, 확인 감사합니다.
너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까딱이고 안으로 들어간다. 낡은 건물 외관과 달리 안쪽은 꽤 세련된 곳. 그러나 너는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다.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로브를 단단히 눌러쓰며 망설임 없이 걸었다. 한 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는 벽난로와 소파 하나가 전부다. 너는 로브 안쪽에서 보랏빛 주머니를 꺼낸다. 그 안에 든 잿빛 가루를 손에 한 줌 쥔다. 아무렇지도 않게 벽난로로 들어간 네가 손에 쥔 잿빛 가루를 바닥으로 던지자, 에메랄드빛 불꽃이 피어오른다. 동시에,
────────.
너는 벽난로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방에는 누군가 들렸다는 흔적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벽난로. 아까와 다른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너는 흩날리는 재와 함께 벽난로 안쪽에서 나타났다. 그 앞을 초조하게 돌아다니던 이아가 네 소리를 듣고 멈춘다. 고개가 네게로 향하고, 곧이어 성큼성큼 다가와 너와 시선을 온전히 마주한다.
엘.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다고요. 지금 손님이 오셔서 기다린 지 오 분 정도 됐는데 재촉을 안 해서 망정이지. 제가 얼마나 간절히 둘러댔는지 아셔야…….
그러니까 손님이 화난 건 아니라는 거지?
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어요.
이아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로브를 벗어 이아에게 넘기기 바쁘다. 지팡이를 꺼내 무어라 주문을 외우며 흐트러진 옷차림을 멀끔하게 되돌린다. 이제 너는 뒷골목에서 쫓겼다던가, 잿빛 가루를 쥐고 벽난로를 오갔던 티라고는 하나도 나지 않는다. 너는 이제 방 안에서 단지 늦장을 부린 사람이 된다. 어느새 지팡이를 집어넣은 너는 이아의 모든 말들을 가볍게 흘린다. 오늘의 의뢰가 뭐였더라. 아니, 있었던가? 단순한 방문 약속이 전부였던가. 기억을 되짚어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은 너는 직접 부딪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는 이아가 소리친다.
엘! 듣고 있는 거 맞아요?
그제야 너는 이아를 돌아본다. 짧고도 긴 정적이 흐른다. 너는 이아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내가 여기 있는데.
지금 일을 문제 삼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걱정된다고요.
너는 소리 없이 웃는다. 이곳은 네가 너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구도 네가 엘로이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여기는 네가 엘, 또는 디어로 존재하는 공간. 연주는 하지 않지만 음악 활동은 이어가는 공간. 네가 아니면 누구도 선율을 들을 수 없었다. 됐어, 음악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니까. 모두가 평등해야 할 현재인데 일부를 배척하겠다고 구는, 시대를 착각한 무리가 아직까지도 잔존했다. 바야흐로 혼란의 시대.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지팡이를 만지작거린다.
이아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네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챘다. 이야기는 나중에도 추궁할 수 있다. 이아에게 이 공간을 맡겨 두고, 자세한 도착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외출하고 늦게 들어오기 일쑤인 네가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 엘, 데려올게요? 더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너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로 가 앉는다. 이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네 위치를 확인하고 손님을 데리러 나갔다. 그가 화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하, 괜찮아요.
문밖에서 이아의 구구절절 설명이 뒤따른다. 너는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네, 하고 대답한다. 이아가 방을 나가고, 손님─이하 의뢰인으로 칭한다─에게 설명하고 데려오기 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누가 방문하기로 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본다. 그러나 소용없다. 애초에 정체를 밝힌 적 없나? 너는 불현듯 찾아드는 불안감에 잘 묶인 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의뢰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너와 눈을 마주쳤을 때, 네 긴장감은 한계치에 달했다. 왜? 네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나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자 일을 하고 있는 올리비아입니다.
예의를 갖춘 말투, 끌어올린 입꼬리와 상반된 웃지 않는 눈. 잔머리 하나 없이 정갈한 검은 머리칼, 소름 끼칠 정도로 상대를 꿰뚫어 보는 초록 눈동자. 너는 온몸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인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너를 알아볼까, 하는 걱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너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죽음의 위기도 여러 번 넘긴 데다 네가 아닌 신분의 사람으로 살아오기도 했다. 너는 자신에게 되뇐다. 괜찮아, 나는 쟤를 알지만 쟤는 날 몰라. 너는 업무용 미소를 얼굴에 띄운다. 의뢰인에게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첫 방문인가요?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정보를 얻고 싶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차 한 찬 하실래요?
준비해 주신다면 기꺼이. 아무거나 주셔도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차를 우리는 동안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올리비아는 소파에 걸터앉아 장갑을 만지작거린다. 너는 차를 우린다는 명목하에 올리비아를 뒤에 두고 서 있으나 모든 신경은 뒤에 쏠려 있다. 티포트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티포트를 먼저 테이블에 가져다 두고, 너와 올리비아 몫의 찻잔을 옮긴다. 올리비아의 앞에 마주 앉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너와 올리비아, 둘 모두 가면을 덮어쓴 채 서로를 대하는 중이다. 누구도 입을 먼저 열지 않아 긴장감 서린 침묵이 내려앉아 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네가 올리비아 몫의 차를 따를 때야 목소리가 들린다.
피아니스트 엘로이즈 칼리오페 샤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알고 싶은데요.
티포트를 쥐고 있는 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자취를 감춘 지 꽤 되어서 저도 정보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당신이 아는 것 전부가 필요해서.
너는 의뢰인을 본다. 섬뜩한 초록빛 눈동자를, 그 안의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를,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눈빛을. 정반대로 완벽한 미소를 그려내고 입는 의뢰인의 입꼬리를. 너는 어떤 착각─의뢰인이 네 생각을 전부 읽어내고 있다는─에 빠진다. 아, 너무 어려운 의뢰였나. 상대의 목소리가 너를 현실로 거세게 끌어당긴다. 너는 눈을 깜빡이는 단순한 행위로 엘로이즈에서 피아레체가 된다.
제가 지금 알고 있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대로 다시 연락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래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어디로 연락드릴까요, 묻자 의뢰인이 웃는다. 너는 상대의 표정을 읽어낸다. 최근에는 거의 본 적 없었다지만 7년간 거의 매일 본 사이여서 일지도 모르고, 혹은 졸업 후 현재의 행보를 걸으며 상대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번의 미소에서는 진심이 묻어난다는 것.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 너는 나를 찾고 있는 건가? 의문을 품는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이 직업은 무엇보다도 입을 조심해야 했다.
이미 샤덴을 떠났어요, 아예 연을 끊은 것처럼. 지금은 다른 가문에 몸을 담고 있다던데?
피아레체죠, 당신과 같은. 그래서 여길 찾아온 겁니다. 가까운 곳에는 정보가 많을테니까.
너는 머쓱한 웃음을 흘린다. 조금 솔직해지자, 너는 다시금 두려워졌다. 의뢰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는 언제나 정보를 주기만 하는 입장이었고, 상대는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 정보를 얻어가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네 눈앞의 의뢰인은 분명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찾아왔다. 무엇을 원하기에? 어디까지 알고 싶어서? 아니면 알고 있어서? 지금의 네 인상착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아니, 있어도 다른 이름을 기억할 터였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다. 지금 초조해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는 사실을.
비용을 먼저 받겠습니다. 갈레온─
의뢰인은 묵직한 주머니를 건넨다. 안에 든 것이 전부 갈레온이라면 너는 무게로도 금액을 예상할 수 있다. 잿빛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은 너는 헛웃음을 흘린다.
이렇게 많은 선금이라면 제가 부담되는데요. 설마 일부러?
소문에는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더라고요? 미리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음악을 그만둔 것처럼 굴어요. 필요 없다고 했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했나.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바빠서 얼굴 제대로 본 적도 없네요.
의뢰인의 표정이 찰나 굳어졌다. 눈치 빠른 너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물론, 눈치챘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아, 그렇군요. 느릿하게 중얼거리며 곱씹는 의뢰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몇 초 뒤, 의뢰인은 소파에서 일어난다. 찻잔에는 손도 안 댄 채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웅하기 위해 일어선다. 밖으로 나서는 문을 열고, 의뢰인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린다. 네─그러니까 지금이 아닌 음악가의 너─기사를 쓰는 기자. 정보도 자료도 흘리는 것 거의 없음에도 어디선가 귀신같이 정보를 물고 활자 위에 펼쳐두는 이. 모든 게 정답은 아니지만, 먼 길을 돌아서 오고 있지만 분명 너를 향해 느린 걸음으로나마 가까워지고 있는 이.
너는 고민한다. 어디까지 네 정보를 주어도 될지. 그리고 의뢰인이 알고 있는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소파에 앉아 눈을 감는다.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서.
졸업식, 다른 이들이 혼란 속에 남겨져 있을 때. 너는 가문의 입김으로 안전히 빠져나왔었다. 어떤 예술 활동도 하지 못했던 너는 요양 목적으로 한참을 친가에서 보냈다. 여유를 되찾은 뒤 너를 돌아보고 처음부터 시작했었다. 샤덴의 이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불사조 기사단의 표적이 되어 테러의 대상이 되기 전까지. 그것은 너에게 또 하나의 전환기였고, 다른 길이었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알 여유조차 없었던 일들에 대해 알게 되고 학창 시절의 너를 추스르기 바빠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날 이후 너는, 엘로이즈는 디어가 되었다. 샤덴을 버리고 피아레체가 되었다.
도피자의 말로.
어렸을 적의 소망.
모두의 소리를 들을래.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전해줄 수 있게.
이제는 빛바랜 소망.
간직하기에 그쳤다. 필요한 건 음악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발로 뛰고, 끝없이 주문을 외우며 정보를 모았다. 세상이 변하길 바랐으니까. 원하든 원치 않든 과거 친구였던 이들의 행적을 알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네 본래 직업인 작곡가는 잊히고 무형의 것을 사고파는 정보상만이 남았다. 룩스, 너는 어땠지?
의뢰인이 너에 대해 썼던 기사들을 떠올린다. 불안한 시대에 언론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 기사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긴 글이라지만 사람들은 제멋대로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런 의미에서 네 의뢰인은 탁월한 작가였다. 대중이 피아니스트와 작가를 철저히 분리할 수 있게 도왔으니까. 네가 두 사람이 되어 서로를 헐뜯고 갈라선 것처럼 보이는 모호한 서술. 상상력의 기초가 되는 두루뭉술한 서술. 의뢰인 자신이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그건 재능이었다. 너는 그렇게 확신했다. 나는 네 글이 좋았으니까.
너는 책상에 앉는다. 다른 자료나 정보원, 정보 수집은 필요 없다. 이것은 네 이야기니까. 의뢰인의 글을 흉내 낸다. 모호한 서술, 두루뭉술한 이야기,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글. 너라면 분명 여기서 좋은 글을 써낼 테지. 너는 확신한다. 학창 시절 종종 의뢰인은 본인을 깎아내렸으나, 너는 그의 노력과 태도, 모든 것에 긍정했다. 그러니 이 정보는 그에 대한 신뢰의 증거인 셈이다. 눈치챌 수 있을지, 그건 그만의 문제이므로 너는 망설임 없이 써 내려간다. 이아가 들어와서 홍차 한 잔을 우려서 네 옆에 두고 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건 그에게 바치는 찬사. 그에게 보내는 초대장. 오랜만의 안부 인사.
고개를 든다.
편지를 쓴다.
잉크를 말린 뒤 말아 리본으로 묶는다.
부엉이에게 맡기고 창문을 열어 날려 보낸다.
정보가 준비되었으니 편할 때 방문해 주시길.
Dea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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