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240205
이제 그만둘까.
이어지는 말은 없다. 하나의 방 안에 두 명의 사람이 존재함에도 왜, 라는 흔한 질문은 돌아오지 않는다. 선연한 녹색의 시선이 가닿을 뿐이다. 그는 손에서 펜을 내려둔 지 한참이다. 그저 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박자 맞추어 톡, 톡. 제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두드릴 따름이었다. 너는 손에 힘을 주어 쥐고 있는 악보를 구긴다. 악보에 그려진 음표들이 하나둘 종이 속으로 사라진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없어? 써지지 않는 날.
너는 피아노에서 악보로, 그리고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캔버스에 박제된 사람마냥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은 채다. 그는 너에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양피지를 들어 흔든다. 양피지에 문자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각각 크기가 다른 잉크 얼룩들, 그리고 난잡하게 허공을 떠다니는 음표들. 너는 그것을 보고 웃음 짓는다.
나는 너를 보고 글을 써. 네가 없으면 내 글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턱이 없다.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부터 똑같았다. 입만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둔 채 눈은 한없이 진지하게 떠서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게 만드는 습관. 일을 하면서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미궁 속으로 인도하는 습관. 너는 그가 글을, 기사를 쓰는 모습을 떠올린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제 행적을 옮겨 적었던 날들, 직접 흘린 정보를 쫓아 코앞까지 다가왔던 날들, 결국 네가 걸음을 멈추고 그가 따라오는 걸 기다려줬던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펜을 놓은 적 없는 그였다. 너는 어떤 의문을 떠올린다. 지금의 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잖아. 그는 네 마음을 읽은 듯 입을 연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걸음이야? 가끔은 뒤로 갈 때도 있지. 새로운 곡을 늘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넌 예술가야. 작곡만 하는 게 아니라고. 네 음악을 들어 줄 사람이 늘 곁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나는 무엇이든 좋은데.
너는 피아노에서도, 악보에서도 손을 뗀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는 네 시선을 느끼고서도 말을 이어가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고 만다. 어두운 방에 앉아있기만 해서 그래. 지금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기나 해? 하며 두꺼운 커튼을 걷기나 한다. 당장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너는 웃는다. 모든 생각 떨쳐버리고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를 따라 걷는다. 오랜만에 그가 좋아했던 곡이나 쳐봐야지,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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