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영영인] 가약(佳約)
* 무간도 양금영×진영인
* 사///망 소재 있음
그도 사람이었으나 아무도 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감기에도 걸릴 수 있고 집 앞 편의점에 가려다가 화단 모서리에 발가락을 찧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양금영 스스로도 머릿속에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쿠키 상자에 해바라기씨가 들어있지 않고, 이별 노래로 유명한 재즈 가수의 앨범에서 불경이 흘러나올 일은 없고, 양금영의 건강도 사람들의 뇌파 속에 3월 산속의 개울과 같이 흘러들어간다. 코피가 몇 번 났을 때도 요즘 바빠서, 지명수배자를 잡느라 잠도 푹 못 자서, 맡은 일이 남들보다 많아서. 주말에 푹 쉬어도 다음 날 출근길에 코와 인중 사이에 불쾌하고 섬찟한 뜨거움이 흘렀다.
“금영아, 정말 걱정되니까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병원부터 가. 그동안 네가 제일 바쁘게 일한 거 아니까 다들 이해해 줄 거야.”
능청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영인을 달랬지만, 눈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커다란 쇳덩어리가 바닥을 깨부수고 고막을 찢을 기세로 흔들었다. 얼른 진료받고 금방 들어갈게요. 영인의 눈망울은 묵음으로 재촉하고 금영의 다리는 순종한다. 병원에 도착해서 접수하고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지루해해도, 진료실에서 먼저 나온 환자가 울먹거려도 금영은 아무렇지 않았다. 검진 과정이 예상보다 길어서 속으로 조금 짜증이 나긴 했다. 자신의 시간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영인의 시간까지 이 병원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절대 얼굴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진료실에 다시 들어온 금영은 의자에 차분히 앉는다. 허리는 꼿꼿하고 어깨는 정장 위로 곧은 선을 그린다. 의사를 정면으로 보는 양금영은 잘 다듬어진 조각상에 생생한 색을 입힌 것 같아서 누구라도 최소한 마음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 병원에 오기 전에도 수년의 경력을 쌓았으므로, 환자에게 당신은 이러이러한 이상이 있으며 어떻게 치료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일은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하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달과 별이 빛나는 당연함이다. 하지만 금영은 바닷바람을 마주하는 바위 같아서 의사는 간간이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손때와 미세한 흠이 있는 펜 몇 개가 모니터 옆 하얀색 머그컵 옆에 꽂혀 있다. 매끄러운 표면에도 책상 위에 놓은 작은 원형의 거울에도 금영의 얼굴이 비친다. 금영은 선명히 숨을 쉬고 있는데 의사는 뭔가 길고 부드럽게 설명했다. 빨리 돌아가서 영인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면 금영도 꾸벅꾸벅 졸아버릴지도 몰랐다. 요약하자면 ‘당신이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라는 문장이 도출된다.
불로불사라는 허황되고 달콤한 욕망을 꿈꾸던 옛날 사람들과는 달리 금영은 반듯한 책상에 앉아 매끄럽게 연마된 현대식 교육을 받고 성장한 인물이다. 전생과 다음 생 어느 것 하나 붙잡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다. 자신은 미친 과학자가 만든 사이보그나 부적과 암석에 봉인된 사악한 요괴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언젠가 죽는 때가 온다. 금영은 미지근한 물의 온도로 자신을 인정한다. 두렵지 않다. 두려울 일은 아니지만 영인의 눈물이 그칠 줄 모르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에요. 진영인이라는 존재에게 사랑받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서.”
“나랑 같네. 그럼 공동 1위라고 하자.”
“좋아요. 우리가 낀 반지 같다.”
금영의 퇴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요새 많이 피로한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던 동료들과 상사들은 저마다 놀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금영에게까지 닿으면서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문이 열리는 소리, 숨소리, 발소리, 휴대폰 벨 소리에 닳아서 많은 것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영의 박스에는 담기지 않는다.
금영은 몇 개월간 입원을 했고, 영인의 간호와 본인의 정신 상태와 현대 의학 기술로 예상했던 것보다 1년 반을 더 버텼다. 첫눈이 눈곱처럼 내려서 바닥에 쌓이는 것도 없던 어느 날, 금영은 더 이상의 치료가 무의미함을 확정했다. 환자는 지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떨게 하는 치료비와 입원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깨진 독에 물을 부으면 안에 물방울이라도 맺히지만 금영은 그냥 내부에 촉촉한 물기만 약간 남아있는 신체였다. 퇴원하자마자 금영은 영인에게 반지를 내밀었고 둘은 그 자리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의 애정과 미래를 압축한 부케와 그에 어울리는 높은 케이크는 없었지만 구경하던 몇몇 사람들은 진심으로 박수를 쳐준다. 한 아이가 자기가 갖고 있던 토끼 모양 솜 인형을 내밀고는 얘한테도 리본이 있으니 부케 대신 던지라며 내밀었다. 신랑 둘은 동시에 높이 던지고 며칠 전 애인에게 선물로 초콜릿과 향수를 받은 간호사의 품에 안착했다. 사람들이 꺄르르 웃는다. 그 간호사는 다음 달 애인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집에서 주로 지내게 된 금영은 영인이 출근한 동안 얌전히만 있겠다고 했지만 창틀을 닦거나 싱크대를 정리했다. 몸은 점점 약해져서 평소보다 몇 곱절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영인이 집에 돌아오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너 가만히 쉬라고 했는데 왜 일을 하냐고 잔소리를 하면 뺨이 더 동그래지며 웃었다. 그러면 눈꼬리가 삐죽 치솟아 천장을 찌르던 영인도 킬킬 웃었다.
“너 때문에 또 웃잖아. 사람들이 쟤는 왜 맨날 실실 웃냐고 욕할 거야. 미친 새끼로 찍히면 어떡해.”
“잘 됐다. 형이 미친놈으로 소문나면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
“어휴, 얄미워. 얼굴 값하지, 아주?”
집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점점 버거워지고 더 푹신하게 준비한 침대 위에서 유언을 남길 때까지 금영은 영인을 보며 웃었다. 마지막 말을 세상에 남길 때 영인에게 손짓을 하고 귓속말을 했다. 주위에 그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몇몇 지인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나 금영은 작은 목소리로 작은 공간에서 미세한 바람을 흘려보냈다. 영인 외에 그가 어떤 말을 남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궁금해서, 재밌을 것 같아서, 마음 아파서 물어보면 영인은 절대적인 비밀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장례가 끝난 지 1년이 지나고 영인은 퇴사했다. 이쪽 일이 워낙 마음에도 몸에도 험하다 보니 흔히들 말하는 정년 퇴임 시기까지 오래 일하는 사람도 있고 그전에 나가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이유는 다양하다. 진영인은 건강 같은 평범한 이유를 기입한다. 그 스스로도 영인의 사직서를 받은 사람도 가까이 지낸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심지어 방금 전 잡혀 들어온 죄인도 절대 한두 단어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갈려나가고 불태워져도 꿋꿋하게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정의를 수호했으므로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거부하지 않는다. 영인의 퇴장은 모든 인류가 순응해야 한다.
그는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두 사람이 살던 집은 한동안 아무도 없다가 어떤 부부가 새로 들어오면서 다시 채워졌다. 한 명은 중년이고 다른 한 명은 청년인 나이 차 꽤 되는 커플이었다. 영인은 소수의 몇몇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제일 최근 연락에서는 인도네시아였고, 바닷가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으며,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는 먼저 오는 것도 없고 답장도 없고 종종 소식을 올리던 sns도 조용했다. 그를 알지만 데면데면했던 누군가가 걱정되지 않냐고 묻고, 그와 연락을 종종 하던 누군가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고개를 젓고 하품을 했다. 영인은 메일을 보낼 때 금영이 생전에 말하기를 자신과 함께 했던 만큼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그 말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그게 유언인지 평소에 하던 애정 표현인지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오늘도 별은 밝게 밤하늘을 새벽으로 물들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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