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영영인] 무색무취

darling by 달링

* 무간도 양금영×진영인

은밀하고 치열한 삶의 반동이다. 영인은 이따금씩 끝없는 우울에 빠져들었다. 부서져라 누르는 것도 아니고 무중력 상태처럼 둥둥 떠다니지도 못한다. 누군가가 괜찮으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면 영인은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때라며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비 올때쯤 팔다리가 쑤신 것보다 더 갑갑할 것 같다고, 금영만이 영인의 속을 읽는다. 양금영과 진영인은 두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끈으로 묶여 있다. 그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질기고 단단하고 맑은 것이다. 영인은 금영이 밥 굶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면 귀엽다고 웃으면서도, 자신에 대해 그쪽으로 걱정하면 일말의 필요조차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상대방이 다른 누구도 아닌 금영이라서다.

잠시 나갔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온 진영인은 책상 위에 올려진 꽃 한 송이를 발견한다. 오늘은 연분홍색에 오묘한 보랏빛이 섞인 둥글고 탐스러운 꽃이다. 누가 준 것이냐는 말은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주변의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당연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사실이므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영인은 꽃송이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댄다. 꽃 모양처럼 둥글고 꽃잎 색처럼 탐스럽고 이파리처럼 여린 향이 영인의 머릿속에 만발한다. 오랜 잠입 수사 활동이 그에게 준 수천의 흔적 중 하나로 영인은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미소는 망설임 걱정 초조함 분노 경멸 자괴감 실망 기대감 그 무엇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일과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을 텐데 아둔한 시간은 자신과 박자를 제대로 맞춰주지 않는다. 노고만큼 몸을 불린 피로와 짜증은 금영의 발목부터 어깨까지 열심히 기어오르다가 로비 앞에서 허무하게 녹아내린다. 대부분의 사람이 퇴근해서 고요함도 비어버린 로비에 영인이 있었다. 건물 전체 소등까지 37분이 남았다. 오늘 밤은 그믐달이라 꼭대기 천장에 달린 등이 달빛 흉내를 낸다.

“먼저 가지 그랬어요. 많이 기다렸겠네. 힘들었겠다.”

“너야말로 지금까지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무슨. 저녁도 못 먹었지?”

“그다지 배고프지 않아서 형이 저번에 준 초콜릿에 루이보스 밀크티.”

“좀 더 든든한 거로 먹지. 그래도 잘 했어.”

연한 흉터 자국과 굳은살이 잔잔히 붙은 울퉁불퉁한 손에 금영은 얼굴을 기대었다가 떨어진다. 솜사탕을 본뜬 감정이 두 사람의 목덜미를 간지럽혀서 둘은 속삭이듯 웃는다. 어서 집에 가서 쉬자. 손은 손을 붙잡고 손은 손에 수긍한다.

짙은 회색 바탕에 흰색 선이 그려진 횡단보도 앞에 선다. 회색 불이 켜지고 조금 다른 회색 불이 켜졌다. 금영의 세상은 검은색과 어두운 회색과 짙은 회색과 무거운 회색과 가벼운 회색과 날카로운 회색과 산뜻한 회색과 우유부단한 회색과 하얀색으로 채워져 있다. 머릿속을 두들기는 피곤함과 늦은 시간의 낯선 공기에 눈을 마주친다. 온통 같은 세상에서 이 사람만이 금영에게 찬란하게 빛난다. 딴 따단 딴── 금영이 흥얼거리자 영인은 갑자기?라며 킥킥 웃었다. 손깍지를 팔짱으로 바꾸었다가 맞은편에 도착하고 회색 불이 다른 회색으로 바뀌었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손과 손을 맞잡는다. 밤하늘의 별 대신 길가의 가로등들이 집에 가려면 아직 더 가야 한다며 둘을 재촉한다.

“이러니까 우리 데이트하는 것 같다.”

“주말엔 진짜 어디 같이 가요.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 넌 어디가 좋아?”

“형이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

“내가 키즈카페라도 가자고 하면 어쩌려고.”

“아, 그럼 우리 아기는 데이트에 이용당하는 건가요?”

어둠 이불을 뒤집어쓴 나무들과 풀들이 저거 대답하는 거 보라며 발갛게 수군거린다. 불 구경 물 구경 싸움 구경만큼은 아니더라도 커다랗게 자란 사람들의 늦은 연애는 나름 볼만한 모양이다. 밤은 아직 길다. 밤은 한창 더 멀고 더 넓은 곳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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