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2차 창작 / 2018년 작
탄생의 순간을 완벽히 기억하는 자가 또 있을까?
아무리 천재적인 인간이라도, 그래 예컨대 나의 ‘창조주’라도 그것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인간과 나의 차이는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은 아주 작은 백지를 품고 태어나, 그것을 모두 색으로 채우게 되면, 서서히 늘어나는 여백에 따라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칠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나의 창조주만큼이나 뛰어난 자의 머리로 만들어진 내게는, 탄생서부터 대지보다 광활한 여백이 온통 희게 빈 상태로 주어진지라, 그것을 감당키에 갓 태어난 나는 몹시도 연약했다.
심장은 첫 박동을 뛰었고 혈관으로 피가 돌며 육신이 전기의 충격으로 진동할 때, 나는 그 공허함과 무섭도록 텅 빈 감각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여 나는 절망을, 실존에의 고뇌를, 가치의 무력함을 업고 태어난 것이다.
눈을 뜨고는 무엇을 했던가? 마침내 입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연속되는 공포에 질려 끔찍한 비명을 질렀던가? 멈추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목 부근과 육체에서의 고통에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몸을 가누기 위해 애써 팔다리를 꺾으며 허리를 뒤틀었던가? 파도처럼 밀려와 숨통을 죄는 허무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호흡하고자 꺽꺽거렸던가? 내가 상상치도 못할 수많은 경험과 눈부신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이 분명한 내 머릿속의 공간은 내게도 곧바로 무언가를 빨아들이라, 닥치는 대로 삼키라, 욱여넣으라 종용했다. 구원받지 못할 끔찍한 갈증이었다.
욕구와의 불일치라는 간극 속에서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허덕이며 채워 넣을 것을 찾아 헤맸다. 그러니, 어지러운 시야 속에, 미칠 듯한 갈급을 넘어 보인 것을, 어찌 내가 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의 신이여, 나의 창조주 당신께서 내게 보인 것은 실로 달콤한 축복이었다. 나를 보는 그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애정, 걱정, 불안, 행복, 그리고 치솟는 희열과 번뜩이는 승리감. 당시의 나는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알아차리기는커녕 처음 비친 애정 하나에 매달려 당신 눈에 담긴 별빛의 개수나 헤아리고 있었건만 이제 와 생각하자면 그리 말하겠다. 타인의 두려움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나를 자극하고, 비명이 귀를 찢는 어두운 실험실 안에서 당신께서는 홀로 마치 태양처럼 빛나며 타오르고 계셨다. 하여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이 공허를 채우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듯한, 애써 응축되어 있던 것이 폭발하듯 터져나온 감정의 집약체였다. 아무리 빛을 내리쬐어도 재가 될 것 같지 않은 태양, 혹은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 않을 듯한 영원한 샘, 무어라 빗대는 것이 좋을까? 아니, 중요한 것은, 그리하여, 나는 내 무한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 당신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그건 어미를 찾는 새끼와 같은 행동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당신을 향했고, 당신은 기쁨 속에 나를 부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앙리. 처음으로 들은 이름을 기억한다. 창조주 당신께서 그 이름을 부를 때의 표정을, 눈빛을, 떨리는 입술과 섬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마저도 모조리 빠짐없이. 앙리, 아직 혀를 놀릴 줄도 몰랐건만 나는 그것을 입속에서 굴렸다.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 마침내 그 죽은 이름이 나를 삼키려 들 때까지.
지각이 없는 어린 동물이 공격에 대해 방어하려 드는 건 당연한 이치다. 미물부터 시작해 고귀함을 자처하는 인간들마저도 갓 태어났을 땐 모두가 마찬가지다. 왜 그들은 무지하고 사나운 어린 생명을 배척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가? 그들은 약하기 그지없어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면, 내 고통의 시작은 내 강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은가? 나는 무지함에 있어 다른 어린 존재들과 같았으나, 불행히도 나의 창조주 당신께서 몹시도 강한 육체를 선사하셨기에, 나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그로써 내게 허락된 이름은 괴물이 되었다.
당신만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탄생부터 시작될 나의 고뇌를 당신은 어찌 몰랐던가? 처음 맛본 타인의 적의와 그의 피는 그다지 달콤하지 않았다. 괴물로 불린 나는 그에 합당한 행위로 그 이름에 가치를 부여했고 창조주 당신께서도 내게 등을 돌렸다.
폐부 깊은 곳에 몸을 숨긴 채 기생하던 저주가 이윽고 당신의 목에서 맴돌던 울음을 찢고 나와 새로이 탄생하였던가? 나는 그 저주가 내게 내린 선물을 입에 머금고 손에 묻힌 채 영문 모를 적의를 감내했다. 나의 신이여, 당신의 애정이 어려 있던 목소리는 어느덧 타버린 시체의 색을 띤 증오를 핏방울 위로 후두둑 떨어뜨리며 내게로 토해졌고, 빛처럼 쏟아지던 축복은 시커먼 저주로 돌변하여 내 목을 졸랐다. 나는 그 저주를 올가미처럼 목에 건 채 도망치며 갓난아이의 첫울음을 뱉었다.
괴물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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