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on&Ner

다섯 번째 계절

자캐 커플 로그 24.03.22.

365g by 혜윰

BGM: Akira Kosemura - The Two Of Us (Instrumental)

비는 돌아간 시간을 되감듯이 흘러왔다. 천둥도 치지 않는 고요한 순간임에도 넬은 괴물을 겁내는 어린 아이처럼 하얀 담요를 푹 뒤집어 쓰고 제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창 밖으로 향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하얀 천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점점이 흩뿌려진다. 마치 핏방울을 닮았지만 엘리언은 그것이 아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남겨진 손을 붙잡고 손가락의 마디를, 이어진 부분부분을, 무르면서도 가늘은 손톱을, 동그랗고 얄팍한 말단을 되짚었다. 넬은 간지럽다느니 혹은 무섭다느니의 투정 한 마디 없이 계속해 빗방울이 내려앉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엘리언.

응.

이름을 불러놓고서도 넬은 말을 잇지 않는다. 시선은 여전히 자신이 아닌 바깥을 향하고 있다. 쏟아지는 비는 여전히 잊혀질 것처럼 그저 사라지기만 한다. 저에게는 다만 투명한 빗방울로 보일 뿐이나 넬에게는 또 다른 언어로 들리고 있을 터다. 엘리언은 제 품 속에 안긴 넬의 눈동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봐야만 한다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가질 어떠한 잔혹성을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염려라는 이름의 다정이 끝내 가질 달큰한 설움을 되짚었다. 무엇을 바란다고 한들 결국 자신은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므로. 소유와 지시에는 차마 재지도 못할 반 뼘의 간격이 깊이 그어져 있고 우리는 끝내 마주할 수 없다. 그러니 엘리언은 채근하지 않고 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넬을 단단히 끌어안기만 했다.

손을 뻗어 오래된 러그 위에 올려진 발등을 어루만진다. 밤 이슬에 젖은 발등에는 언제 자리잡았는지 모를 생채기가 남겨져 있다. 말갛고 생경히 맺힌 핏방울은 굳지도 않고 시간을 되감듯 흘러내린다. 발 아래에는 물에 푹 젖은 진흙이 흩어진다. 넬은 푹 젖은 몸을 담요에 둥글게 만 채로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다. 갈망한다기에는 지나치게 피로한 시선이 엘리언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만 같았다. 넬은 신음처럼, 어쩌면 대답처럼 엘리언의 이름을 부른다. 엘리언은 언제나의 목소리로 그를 마주 붙잡는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지만 이상스러울 만큼 소란하지 않다. 희미하게 가라앉는 어둠 속에서 엘리언은 제 품 속에 있는 이의 삶을 향한 경애를 바랐다.

엘리언.

응.

얼굴을 만져봐도 될까요.

내가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던가. 엘리언은 순간 이제는 만나지 못할 이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 솟아나 눈동자를 생경하니 뜬다. 허락 없이도 고개를 돌려 엘리언의 낯을 바라보고 있던 넬은 허물어지듯 웃었다. 알아요. 엘리언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도 당신을 만난 적이 있잖아요. 넬은 그리 말하며 엘리언의 가슴팍에 느린 손을 얹고는 살짝 밀어낸다. 피로와 물기에 푹 젖어 미처 그럴 힘이 없었던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던 것인지 엘리언은 한 치의 밀림도 없이 그 자리를 견고하게 지킨다. 전해질 대답 없이도 넬은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엘리언의 뺨에 손을 대었다.

“차갑네요.”

얼마나 헤멨나요? 넬의 물음에 엘리언은 입을 다문다. 넬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음에도 묻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답이란 명확하나 엘리언은 그 물음이 그저 어떠한 정수를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바라는 대답을 하고 싶어도 넬의 언어는 너무나 깊고 투명하여 차마 깊이를 잴 수 없다. 결국 엘리언은 답없이 넬의 젖은 발등을 어루만진다. 핏방울이 손 끝에 번지며 긴 경계를 그었다. 궤적처럼 보이는 흉터 마냥, 한 순간 멀리 돌아갔다 찾아오길 다짐한 사람 마냥 넬은 희미한 시선을 한다. 치료를 할까. 분명 품 속에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꿈이 밀려오듯 시선은 자꾸만 어스름에 빠지고 만다.

넬은 다시 한 번 엘리언의 가슴팍을 밀어낼 것처럼 손을 움칠거리다, 이내 마음을 바꾼 듯 엘리언의 손목을 잡았다. 바짝 식어서인지 시체에라도 닿은 듯한 서늘함이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엘리언은 길들여진 동물처럼 넬의 발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떼어내고야 만다. 몸을 꽉 움켜쥐고 있던 이름 모를 긴장이 훅 빠져나가며 되레 묵직한 불안이 밀려왔다. 넬. 여전히 대답은 없다. 싫어요. 다만 날이 뭉툭한 거절이 돌아온다. 지문처럼 붉은 흔적이 남아 넬이 미간을 살풋 찌푸리고는 강하게 문질렀다. 꼭 없애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다소의 짜증마저 느껴질 정도로 강박적인 행동에 엘리언은 넬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준다.

싫어요. 넬은 이번에는 길을 잃은 어린애처럼 말했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 발등에 볕이 차질 않는다는 말도 했다. 손 끝이 벌벌 떨리고 있다.

추워?

괜찮아요.

그리고 또 거짓말이었다. 순간에 희게 질린 안색이 흰 머리칼과 구분되지 않는다. 엘리언은 순간 품 속에 몸을 웅크린 넬이 그대로 오그라들어 한 줌의 얼음이 되어버리는게 아닐까하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공포를 느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직전의 말과 전혀 맞물리지 않는 문장에 엘리언은 넬이 기록하고 있을 현재를 상상했다. 저에게는 닿지 않을 어절의 광경이기에 가늠은 불가하다. 착실한 공상만이 허물 같은 삶을 형상할 수 있음을 엘리언은 넬을 보며 깨달았다. 그러니 저에게는 끝내 추상의 영역에 불과할 것이므로.

무엇이 넬의 오랜 기록을 격발시켰을지 엘리언은 알 수 없다. 저의 세계가 하나의 원판이라면 넬의 세계는 수없이 많은 층으로 구성된 행성이다. 발치에 닿은 도토리가 잃었던 팔을 떠올리게 했을 수도, 가물하니 쏟아지는 빗방울이 애원하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다. 제가 부르는 이름이 비명을 연상케 했을 수도 있으며 그가 바라던 마음이 누군가의 박탈을 연상케 했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오롯이 그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다르면서도 끝내 어떠한 형질을 공유한다. 그것이 실리로 엮어진 형태이든 추상으로 이어진 존재이든 우리의 인지는 끝내 홀로이면서 홀로일 수가 없다. 넬은 하나의 형상에서 수많은 의사를 읽어낼 수밖에 없는 이였으므로 그의 삶은 언제나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진흙탕이 되도록 태어났다. 엘리언은 그리 믿고 싶지 않았지만, 종종 발작처럼 지독한 두려움과 끔찍한 우울에 휩싸이는 넬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일상은 끝내 과거의 편린이 될 것이며 미래의 지침이 될 것이다. 바라건, 혹은 바라지 않건.

넬.

엘리언.

넬은 당장이라도 다시 어둠 속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어깨를 간헐적으로 떨어댔다. 여기는 너무 추워요…. 음절이 뚝뚝 끊어지며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엘리언의 손목을 살짝 감싸잡은 넬의 손은 볼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시소를 타는 것처럼 삐걱이는 호흡에 엘리언은 가만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눈을 닮은 머리칼은 빛이 비칠 때마다 그 색을 담아 되레 본래의 인지를 잃는다. 제 손가락에 묻었던 혈흔이 하얀 머리카락에 스며들어 형태가 재정립된다. 넬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가도 이내 눈을 뜨고 붉은 시선으로 어둠 속을 더듬는다. 넬의 시야 속에 무엇이 비치고 무엇을 정의하는지 나는 영원히 알 길이 없었고 안다 하더라도 그 결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엘리언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발등에 맺힌 피가 구슬처럼 맺혀 하얀 자락에 스며드는 것을 바라본다. 진흙은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채 바닥을 더럽히고 있지만 곧 단단히 굳을 것을 알고 있다. 넬의 손을 잡고 제 입가에 대었다. 손아귀에 입술을 묻고 제가 여기 있다는 현재의 기록을 덧씌운다. 넬은 덤덤하면서도 둔한 낯으로, 그러나 지독한 공포에 둘러싸인 시선으로 엘리언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지금 네 눈 앞에 있는 나는 어떻게 보여?”

“…….”

“음, 그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볼까. 내 목소리가 들려?”

넬은 순간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눈을 내리깐다. 엘리언의 손아귀에 잡힌 창백한 손톱 끝이, 새끼 손가락에 균열이 일듯 까딱이며 엘리언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넬은 숨을 참듯 대답했다.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죽은 이처럼 푸르게 질리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인다.

“네.”

“그렇구나. 그럼 만져지고 있을까?”

넬은 보이지도 않으며 아프지도 않을 칼날이 제 목덜미를 베어낸 것처럼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숨이 바짝 치고 올라왔다 익사하듯 가라앉았다. 엘리언은 채근하지 않고 손아귀에 입을 맞춘 채 가만 넬을 바라본다. 저를 바라봐주길 원하지만 어떠한 갈구는 끝내 결박으로 변질되므로 엘리언은 전하지 않았다. 엘리언. 응. 넬은 피가 배어나오는 발등이 뒤늦게야 아려오는지 제 발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애원하듯 말했다. 포말이 발등을 적셔오면 어떡하죠. 엘리언은 가늘게 떨리는 넬의 손을 제 뺨으로 옮기며 간신히 웃었다. 살결이 휘는 만큼 넬의 손 끝이 조여든다. 그럼 내가 닦아줄게. 그 말을 들은 넬은 그제서야 어깨를 쭉 늘어뜨렸다.

“…네, 닿고 있네요.”

“온도는 어때? 따뜻해? 아니면 차가워? 그도 아니라면 미지근할까.”

그러자 넬은 갑작스럽게 많은 지식을 받아들인 아이처럼 혼란스러운 낯을 했다. 엘리언은 조곤히 말했다. 물질에는 온도가 있고 너에게는 온기가 있으니 느껴지고 있어. 넬은 엘리언의 조언에 숨이 턱 막힌 낯을 하더니 눈을 아주 크게 뜨고 바라본다. 가득 차오른 시선이 저 너머 어딘가로 고정된다. 매서울 정도로 차가운 체온이 맞닿아, 놀라울 만치 뜨거운 속내를 샅샅이 헤집는 것만 같다. 이제 그만…. 울상인 얼굴을 마주하고 여전히 웃어보인다. 네가 돌아오고 나면. 엘리언이 고개를 움직여 넬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대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넘칠 만큼 확장된 동공이 순간 하얗게 지워진다.

“따뜻해요….”

“다행이야. 넬은 추위를 많이 타니까.”

따뜻한 것은 좋아하잖아.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어조에 넬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빗소리는 그치지 않지만 이제는 아주 고요하다. 넬의 시선은 이제 바깥이 아닌 저를 향하고 있다. 아이의 손에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떼어내듯, 엘리언은 넬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면서 작게 미소지었다. 흰 발등에 고인 핏물은 빗물에 젖어 쭉 굳지 못하고 있다. 막히지 않은 흉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어느새 푸르게 질린 넬의 입술을 바라보며 엘리언은 조급해진 맘을 잠재웠다. 넬의 손을 이끌어 제 눈가의 흉터를 어루만지게 한다. 흠칫 떨렸던 손 끝이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였다. 넬은 아주 가만히 숨을 몰아쉬더니 오랜 자장가를 되짚듯 속삭이고는 흉을 어루만졌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넬은 눈을 감고있다. 엘리언은 저 역시 눈을 감았다. 얼음장 같던 넬의 손 끝이 제 손의 온기에 물들었는지 서서히 따스해지고 있다.

“엘리언.”

“응.”

반쯤 허물어진 모습으로, 그러나 반은 형체를 유지한 채 넬은 눈을 뜨고 엘리언을 바라본다. 온 몸을 적신 것이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긴장이 쭉 빠져 무너지는 몸과 달리 정신은 또렷하여 주변 광경이 선선히 보이고 만다. 넬은 저를 받아주는 엘리언의 품에 고개를 묻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엘리언.”

“응.”

갈구하듯 손을 긁어 어깨를 감싸안자 엘리언은 쭉 기다려주고 있던 이처럼 강하게 끌어안아 준다. 넬은 여전히 의식 어딘가에서 일렁이는 과거의 편린과 미래의 추상을 외면하며 현재의 삶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날뛰고 있다. 당장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전신의 감각이 날뛰어댄다. 그럼에도 여즉 차갑게 식은 몸이 벌벌 떨렸다. 발등이 아릿해 되레 제가 자리잡은 곳을 가늠하게 된다. 진흙은 어디서 찾아왔지. 저는 왜 이렇게 주저앉아 있지. 지금은 어느 날이고 무슨 시각이지. 엘리언은 왜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지.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지. 거울을 보며 넬은 엘리언의 시야 속에서 저를 바라본다.

엘리언, 저 무서워요.

응, 나도.

혼자인데도 곁에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또 잃을까 두려워요.

나도 잃어버리기 싫어.

추워요.

나도 따뜻해지고 싶어.

네.

응.

넬은 엘리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애걸했다. 내일은 햇볕을 쬐러 가요. 엘리언은 대답 없이 가늠한다. 우리가 찾지 않아도, 볕은 찾아올 거야. 모두에게 당연하듯. 넬은 대답 없이 추상한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는 여전하고 발등은 젖어있지만 넬은 곧 상처가 아물 것을 알았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바라건, 혹은 바라지 않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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