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on&Ner

한 뼘의 순간

발렌타인 24.02.10.

365g by 혜윰

계절은 변함 없고, 시간은 늘 그러하듯 난만하다. 오래되어 결이 스며든 창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며 넬은 문득 찬란이란 이름을 셈해 보았다. 삶은 벅차고 저는 힘없어 늘상 넘어지던 시절을 현재의 나날에 덧대어 본다. 그러면 꼭 당신이 찾아오는 것이다. 차마 밀어내지 못할 만큼만 어리고, 차마 상처주지 못할 만큼만 천진한 모습으로. 어디 가? 찰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다가와 물음 없이도 답을 바란다. 그러면 나는 항상 걸음을 멈추고 대답을 궁리하게 된다. 같이 가. 당신은 늘 완만히 손목을 잡아오면서도 저에게 걷지 말라 발목을 쪼아낸 적은 없었다. 나랑 같이 가. 그럴 때마다 당신이 참 앳되어 보인다고 전하면 당신은 웃을까. 그렇게 넬은 끝내 무릎을 꿇은 채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야 만다.

엘리언은 익숙한 손짓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다. 큼직해 섬세히 짜인 손아귀를 가만 바라본다. 창 너머로부터 비쳐 들어오는 햇볕이 시선이 닿는 온 곳에 가득 차올라, 살결에 스치는 손등은 열감이 머무른다. 당신은 여전히 순수를 말한다. 넬은 서로가 자리잡은 하얀 시트 자락에 발자국을 남기듯 시선을 낮추고는 대답했다.

“엘리언은,”

“응?”

순간 입을 다문다. 문득 제가 물결을 마주하곤 발목을 담궈 발장구를 치고 싶어 안달이 난 애 같다 느껴진 탓이다. 그런 제 맘도 모르고 당신은 기다려, 를 들은 강아지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기나 한다. 가슴팍의 단추를 연신 꼼질거리며 매만지던 손길이 멈췄다 말았다. 손등의 열감은 영 떠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제가 말을 잇지 않으면 계속 바라보고만 있을 작정인지. 그렇게 생각하자 얄밉다. 도통 어디서부터 삐죽 고개를 내민지 모를 치기에 저는 구슬 꿰듯 죄 외고 있을 길을 재차 헤메는 마냥 당혹을 느끼고 만다.

넬은 샐쭉하니 입술을 우물거리고는, 남겨진 팔을 들어 엘리언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엘리언은 제가 늘상 그러했듯 흉터를 어루만진다 여긴 모양이다. 쓰다듬어 줄게, 를 들은 강아지처럼 순한 눈매를 곱게 내리감곤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바보. 넬은 냉큼 손길을 아래로 끌어내려 뺨을 한가득 집고는 잡아당겼다. 토라진 만큼 희맑은 음성으로 대꾸한다.

“치사해요.”

“응?!”

제 몸에는 큼직한 셔츠자락이 와락 구겨진다. 반질한 단추는 힘을 잃는다. 손길에 벌어진 옷자락 만큼 목덜미와 허리춤으로 물밀듯 밀려오는 빛무리에 어찌할 도리 없이 노곤해진다. 바보. 넬은 한번 더 힘을 주고는 죽, 잡아당긴다. 엘리언은 뺨이 늘려지면서도 당혹스러워만 할 뿐 어떠한 반론도 덧대지 않는다. 웅변하는 것은 고작해야 제 옷자락을 재차 여미는 손 끝 뿐이어서, 넬은 결국 무력히 반복하고야 만다. 정말 치사해요.

엘리언은 그제야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입술을 살짝 달싹이곤 다시 다물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살핀다면, 제가 들은 단어를 어떻게든 그러모아 형용하려는 행동이다. 동그란 이마 속에서 온갖 뭉툭한 가정들과 가느다란 상상들이 심장 뛰듯 마구 엮여댈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숨을 쉬듯이 짧게 미소를 흘리자 문득 눈꼬리에 따스한 입술이 닿아왔다. 오늘은 기분 좋아? 자연히 제 품에 가득해지는 온기와 시야에 차오르는 목울대를 바라본다. 그렇게 당신의 언어를 본뜨고 조형하고 있으면, 당신 또한 웃음을 흘리는지 눈가에 숨결이 밀려들었다.

“기분이 좋은가요?”

“나는 막 좋아졌어.”

“좋은 일이 있었나요?”

“네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좋다는 말이 톡톡 구르듯 쌓여간다. 넬은 온기에 나른하게 녹아내린 몸을 그대로 무너뜨리면서 엘리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기분이 좋다. 갓 언어를 외기 시작하는 아기처럼 입 속에서 굴린다. 좋아요. 응, 좋아. 좋아. 나도. 서로의 코를 맞대고 지저귀듯 반복한다. 쪼듯이 입을 맞춰와 저도 숨을 반복한다. 숨결 사이로 속삭여온다. 오늘은 단 걸 먹을까. 뺨을 꼬집는 대신 그저 어루만져 오는 손길은 저를 품에 안듯 간질하고 말랑하기만 하다. 넬은 엘리언과 이마를 맞댄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엘리언은 그 시선만으로도 알겠다는 듯 입술을 마주댄 채로 웃었다. 넬은 구깃해진 옷자락에 가슴께가 간지러운 마냥 솜털처럼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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