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on&Ner

공상은 울음이 되어

자캐 커플 로그 24.04.24.

365g by 혜윰

BGM: Hideyuki Hashimoto - You

그러니 다만 반추하게 된다. 저는 생을 바랐으나 삶을 공상한 적은 없었기에. 당신이 저를 붙들어 남겨두었다 한들 저는 본디부터 형용되지 않던 자였다. 무정형의 감각과 무채색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니기도 했다. 흔한 말로 표현하자면, 나와 당신과 그들은 기어코 한 문장으로는 행위될 수 없는 자였다.

그러나 모든 책의 어귀, 어느 모퉁이, 접힌 틈새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문장이 남겨져 있었다. 마치 숨결처럼. 모든 생은 가치 있고 그를 가늠하여 잣대 세울 수 없다. 어쩌면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문장일지 모르겠다. 당신의 곁에는 완연한 다정으로 끌어안는 이들도, 잠겨드는 슬픔을 읊조리며 어루만지는 이들도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었으니. 앳된 당신이 잠에 빠져든 순간 귓가에 속삭여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저는 그 문장을 오래도록 잊었다. 잊어버리기로 다짐했다. 잊지 않고서는 생을 버텨낼 수가 없어 아주 깊은 곳에 파묻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당신이 기어코 그 상자를 꺼내들어 부드러운 손길로 닦아주게 되었지만, 그 시절엔 그랬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문장을 잊고자하는 자들을 찾아 헤메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나는 한참을 잊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 만큼은 차마 멎게 하질 못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들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로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가장 먼저 저를 포기한 주제에 저와 같은 이를 마주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얘기다.

당신이라면 잊지 않고서도 그들을 찾아 헤멨던 것 같다. 다만 당신이 잊지 않고자 한 것인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일지는 모른다. 나는 결국 온전한 당신이 될 수는 없으므로 영영 답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랬다. 잊은 채로도 찾아 헤메었다. 어떤 부정은 끝내 견고한 긍정이 되므로. 지워내고자 하는 문장들은 끝내 그 화마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고, 꺾어내고자 하는 꽃망울들은 끝내 그 짓밟음 속에서도 씨앗을 퍼트리므로.

*

아주 먼 곳에서부터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넬은 가만 시선을 잠그듯 눈꺼풀을 걷어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을 열고 울음을 터트리는 방법을 배운 아이처럼 숨을 고른다. 그토록 몹시 고요하고 잔잔한 어둠 속에서 나지막히 호흡을 내뱉었다. 왜일까, 숨을 내뱉는 순간마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듯 날뛰었다. 두 사람의 형태로 일그러진 시트에는 눈을 밟듯 사박이는 소리가 난다. 넬은 멀리 남겨두고 온 제 터전이, 그곳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제 숨소리를 모두 삼켜주길 바라며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창가는 어둡고 반사되지 않은 달빛은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를 향하고 있다. 어둑한 밤의 장막은 아직 걷히기엔 요원해 보인다. 넬은 그 속에서 헤엄치듯 손을 뻗어 제 곁에 깊이 잠든 엘리언의 뺨에 닿았다. 제가 아닌 당신의 온기로 데워진 손이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는지, 엘리언은 잠에서 깨어날 낌새가 없다. 천천히 손 끝을 움직여 오똑한 콧잔등을 어루만진다. 덧그리며 미간을 쓸어내리고, 이어 눈가의 흉터에 닿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서서히 형체를 잡아내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숨결은 마냥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남겨진 팔을 굽혀 상체를 숙이고, 조심스레 엘리언의 가슴께에 귀를 대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듯 날뛰는 심장이 제 것인지 당신의 것인지는 구분이 가질 않았다. 깊은 물 속에 잠기듯 아주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이곳에는 막역한 어둠이 가득하고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잃지 않을 곳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여전히 이곳에 있을까. 나는 다시 돌아왔을까. 문득 그런 의문을 가진다.

우리의 삶에도 온도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야 만다.

줄곧 바라보던 먼 경계, 머리맡에서 부스러지듯 속삭이는 별들, 그리고 빛마저 질리는 어둑한 그림자. 그 찰나와 영원의 틈새로 찾아오는 이가 있다. 밤길에 흐트러진 제 머리칼을 어루만져오는 엘리언의 손길은 아주 부드럽다. 존재하길 아주 연약하고 소중한 것에 깃드는 마냥 조심스레 끝자락에 닿았다 망설이듯 눈꺼풀에 닿는다. 불안정한 허의 질량, 또는 가늘은 시선의 말단을 맴돌다가도 이내 뺨에 손등을 대고 온기를 잰다.

별이 공전하듯 혹은 함께 이끌리듯 넬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탄식인지 안도인지 모를 숨이 새어나왔다. 나는 항상 길을 잃고 당신은 나를 찾는 것이 몹시 당연하다는 마냥 굴고 결국 나는 돌아가지 못함에도 당신은 나의 길을 일궈낸다. 그리하여 저는 마침내 우리가 함께할 체온을 채 재어보기도 전에 바라게 된다.

“넬.”

당신의 대답이자 부름은 늘 나를 기다리고 붙들어매 차마 거절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치사해요. 입 안에서 단어를 굴린다. 너무해요. 차마 탓하지 못할 언어를 혀로 꾹 눌러 삼켜낸다. 이미 오래 전부터 깨닫고 있었음에도 넬은 새삼스러이 단념한다. 고개를 기울여 엘리언의 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언은 제 머리의 형태를 가늠하듯 둥글게 어루만지고 뺨을 간질여왔다. 꿈을 꿨어? 오히려 저가 꿈을 꾸는 마냥 부들하고 나른한 목소리에, 넬은 그저 손을 뻗어 손가락을 엮었다. 그 감각이 간지러운지 엘리언은 제 머리맡에서 속삭이는 별과 같이 작게 키득대는 웃음 소리를 냈다. 손장난을 치며 서로의 손끝을 겹치고 손톱을 가볍게 문지른다. 넬은 엘리언의 손가락 사이, 손아귀 틈새로 자리잡은 옅은 생채기와 굳은 살을 손톱 끝으로 간지럽혔다. 그러자 엘리언은 어린 아이처럼, 나뭇가지 틈새로 비쳐드는 바람처럼 웃었다. 그 목소리에 넬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내뱉고 나서도 이치를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이 오질 않는다면 함께 밤 산책이라도 할까. 엘리언은 그리 말하면서도 울부짖던 아이와 동물들을 재우던 재주를 저에게도 부리며 어깨 부근을 잘게 토닥인다. 넬은 거부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듯 저에게 다가와 허리와 날개뼈를 감싸고 끌어당긴다. 품에 가득해지는 것이 저의 온기인지 당신의 온기인지 모르게 될 만큼.

저항하지 않고 끌어안기면 아주 오래 전 홀로 담요 속으로 파고들던 시절이 떠올랐다. 둥글게 제 몸을 감싸오는 등허리는 멀고 견고하던 지붕을 닮았고 제 허리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손길은 담요 사이로 가물하니 새어들어오던 별빛을 닮았다. 어둑할 때마다 유난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떠오르는가 했더니, 직전 작게 울리며 흐트러지던 웃음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고 정돈해주며 쉬이이, 속삭이는 음절에는 끝내 모든 잔상이 쓸려내려갔다. 한 차례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물러가듯, 답을 갈구하며 연신 흐느끼던 심장도 가라앉는다. 그것이 당신의 울음이었는지 저의 물음이었는지는 이제 알아챌 길이 없었으나 어쩌면 본디부터 나누어 정의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넬은 그제서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엘리언.”

“응.”

“저 안 울어요.”

“응, 알고 있어.”

“엘리언은요?”

“네 꿈 속에서의 나는 울고 있었어?”

제 의문에 답을 건네는 대신 되레 되묻는 엘리언의 목소리는 제 손을 꼭 잡아주던 손아귀 마냥 견고하다. 어떻게 들으면 기다리고 있었다 전해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달리 관망한다면, 길을 잃은 아이에게 방향을 일러주는 표지를 닮았다. 그 의문을 듣고 난 뒤에야 정말로 제가 꿈을 꾸었구나 가늠했다. 되짚어보면 근래에는 항상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 마신 데운 우유가 유난히 부드럽고 따스하여, 의자에 앉아 볕 쪽으로 쭉 뻗은 발등이 금세 빛에 물들어 버려서, 아이들을 한참 돌보고 지켜보다 보니 괜시리 고단하여…. 계절이 변하는 틈새라 그럴까. 그리 중얼거리며 제 위로 담요를 조심스레 덮어주던 손길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꿈을 꿨구나. 꿈이었구나. 그러자 막혀있던 숨이 탁 트이듯 훤해졌다. 어떤 꿈이든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저 평온하고 안전하다고만 느낀다면 좋겠다 귓전에 속삭이며 이마에 입을 맞춰주던 온기가 바로 지금이라도 닿은 마냥 선명했다. 시선을 갈음하여 엘리언의 낯을 살펴보려 하지만 제 허리를 끌어안아 품에 가둔 힘이 강해 미처 볼 도리가 없었다.

“엘리언.”

“응.”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러자 당신은 아주 천천히, 저희를 하나로 붙들어매던 팔을 풀어주었다. 켜켜이 쌓인 밤과, 추억하던 그리움, 끝내 우리가 보내주었던 하얀 새를 떠올린다. 그러자 둘이 되어도 외롭지 않았다. 당신도 그런지 알고 싶어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볕이 들어찬 길을 따르며 당신의 시선을 마주하고 내내 걸어왔던 꿈을 되짚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당신은 끊임없이 제 뺨을 간질이고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유난히 더운 손이 제 피부에 닿아와, 까닭 없이 바짝 긴장했던 몸이 조금씩 풀려왔다. 어둔 공간 속, 갈 길 없이 헤매던 시야가 선명해진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기억하는데.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돈 되지 않은 문장이었으나, 당신은 말없이 시선을 낮추었다. 어린 아이 앞에서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경청하는 이가 되어 귀를 기울였다. 넬은 창백하나 그럼에도 끝내 따스할 눈동자를 바라본다. 당신이 그러하듯 저 역시 오랜 비밀을 속삭이는 아이가 되어 엘리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했다. 언젠가 담요 속으로 홀로 파고들던 순간, 그 파편 같은 찰나에 가늘게 빛을 발하던 빛무리를 쫓고 싶어하던 아이의 눈망울이 동그랗게 빛났다.

하지만 전 엘리언이 울고 싶다면 계속 울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속삭임을 들은 엘리언은 순간 눈을 깜빡인다. 내가? 말간 시선과 함께 어색하게 자아진 글자가 어둑한 샛별 사이로 굴렀다. 꼭 다람쥐가 떨어트린 도토리를 머리 위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엉뚱한 표정이다. 그 얼굴을 보자, 끝내 형용으로서 손에 잡히지 않던 꿈결 속, 당신의 어슴푸레한 낯이 뒤늦게나마 밝아지는 것 같아 넬은 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이내 부드럽게 휘어 웃는다.

넬, 혹시 네 꿈결 속에서 내가 보기 흉하게 울부짖기라도 했어? 무엇이 그리 당혹스러운지 제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뚝 멎었다. 그러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색하게나마 재차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긴장이 푹 풀렸다. 어정쩡히 등을 토닥이는 온기에, 넬은 까무룩 잠들 것처럼 눈을 천천히 껌뻑였다. 신기하지, 꿈 속에서는 당신이 너무 울어 그만 무너져 내릴까봐 그렇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전혀 무섭지 않다.

엘리언은 점차 가라앉는 가느다란 숨소리 사이로 넬의 언어를 되짚으려 시선을 내린다. 하지만 체온에 노곤하게 녹아내린 넬은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잘게 중얼거리고는, 언제나 그러했듯 둥근 이마를 엘리언의 품에 문지르기만 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엘리언을 품 속에 남겨둔 채로 저 홀로 꿈 속에서부터 꼭 말하고 싶었다며 킥킥 웃는다.

넬, 꿈 이야기 자세히 해 줄래? 엘리언이 답지 않게 손가락을 딱딱 울려가며 조심스레 재촉해 보지만, 넬은 영 들은 체를 하지 않는다. 배라도 부른 양 만족스러운 낯으로 다시 잠에 빠져든다.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제 이름을 연신 부르면서도 착실히 등을 쓰다듬는 엘리언의 손은 제가 늘 기억하던 것과 같아, 넬은 안심하고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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