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Colony

블루 콜로니. 3

코너노먼

CN by BX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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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회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이란 퍼킨스의 예상과는 다르게, 다음 날 디트로이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도리어 먹구름이 진 것은 퍼킨스의 얼굴이었다.

"좋은 아침!"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손에도 역시 커피를 들고 있던 노먼이 차에서 내린 퍼킨스를 맞이했다.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파트너의 얼굴을 마주한 퍼킨스는,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나 봐?"

"매우. 근래 들어 가장 좋아."

노먼이 건네준 따끈한 커피를 받아 들며 퍼킨스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제 그렇게 한바탕 쏟아놓고 빈속에 이런 거 마셔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 그것보다, 현장 조사 마무리 짓고 나면 갈 데가 있어."

"어딜?"

"오기 전에 사건 파일이랑 증거물을 좀 살펴봤는데, 사망 전날 페이지 클라인이 만난 사람이 있었어."

"의원이잖아.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람 만나러 다니는 게 그 여자 일과라고."

"선거 유세와 하등 상관없는 외곽 공장에서? 게다가 어떤 경호나 비서도 없이, 오로지 혼자? 네 말마따나 이 바쁜 선거철에 그 스케줄 하나를 위해 반나절을 비웠어."

"…수상하긴 하군. 왜 DPD에선 그에 관해 조사를 안 했지?"

"공식 일정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으로 적어놨으니까."

"넌 어떻게 알아낸 건데?"

"그야 뭐…. 그의 휴대폰 기록을 살펴봤지."

"휴대폰? 그건 증거물 보관소에 있지 않나? 아직 복구 중일 텐데?"

노먼은 대답 없이 클라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퍼킨스가 따라가며 끈질기게 물었다.

"정확히 휴대폰 기록을 어떻게 봤다는 건데?"

애써 외면하던 노먼은 계속되는 추궁에 결국 짜증을 냈다.

"ARI로 해킹 좀 했어! 어차피 포렌식 끝나면 다 나올 정보, 조금 더 빠르게 접근한 것뿐이야."

퍼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또 ARI를 사용했다고?"

"리처드. 진짜 괜찮다니까? 날 봐. 멀쩡하잖아."

"넌 정말……" 퍼킨스가 믿을 수 없단 듯 쳐다봤다. 이에 노먼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적당히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있으니."

퍼킨스는 요즘 젊은 놈들은 어쩌니저쩌니하는 말을 중얼댔고, 노먼은 이를 깡그리 무시하며 빠르게 2층으로 올라갔다.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는 노먼의 팔을 잡으며 퍼킨스가 다시 한번 충고했다.

"너 오늘은 ARI 쓰지 마. 아무래도 어제 그게 문제였던 거 같아."

노먼이 그에게 성가시단 듯 말했다.

"ARI 문제가 아니었다니까. 증상이 완전히 다른 데다 요샌 부작용 생길 만큼 사용하지도 않았어. 너, 내가 여기 오고 나서 트립토카인 들이키는 거 본 적 있어?"

"어."

퍼킨스의 즉답에 노먼은 잠깐 그게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다 다시금 반박했다.

"초반에야 조금 그랬지. 하지만 요즘엔 ARI 착용도 권장 시간 내로 지키고, 관련 후유증도 거의 없어졌어.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퍼킨스가 코웃음을 쳤지만, 노먼은 이를 못 들은 체하며 ARI를 꺼내 들어 얼굴에 얹었다. 어두워진 세상에서 필요한 정보들만이 공중에 둥근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방 안을 한차례 둘러본 노먼은 클라인이 남긴 흔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간의 위액. 염산, 염화칼륨, 염화 나트륨.'

'C₁₇H₂₁NO₄, 합성 각성제. 아세톤, 리튬, 톨루엔, 염산, 레바졸.'

레드아이스 과다 복용자의 구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보였으나 노먼은 그중 한 가지 다른 점을 발견했다.

"레드아이스에 레바졸을 섞나?"

노먼의 질문에 퍼킨스가 답했다.

"불순물로? 보통은 베이킹소다가 흔하지. 레바졸이 섞였어?"

"응."

"그건… 거의 독극물이야. 그 자 정도면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뒷골목 쓰레기들도 안 하는 걸 어디서 얻은 거지?"

퍼킨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입력했다.

"조사해 볼 만하군. 나중에 제리에게 물어봐야겠어."

"네 정보원? 그 안드로이드 꼬마?"

"걔 말고 누가 있겠어."

노먼은 ARI를 벗어 재킷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혹시 주변에 아는 SQ800 모델이 있는지도 물어봐."

"군용 안드로이드? 그건 왜?"

"침입자의 발자국이랑 걸음걸이. 모델이 그거더라고."

"불량품…. 아니 해방된 안드로이드는 고유의 걸음걸이가 생기지 않나? 모델이 특정돼?"

"나도 그게 의문이야. 아직 인간의 통제를 받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해방된 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원래의 기본 설정값을 유지하는 안드로이드일 수도 있지."

"젠장…. 안드로이드 범죄자는 그게 문제야."

퍼킨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노먼도 동감했다. 인간과 달리 안드로이드는 똑같은 개체가 너무나도 많았다. 범죄를 일으킨 안드로이드가 같은 모델 사이에 숨어버리면 그를 특정해 내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일일이 등록 코드를 확인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법 체계 하에 움직여야하는 그들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진동 소리가 울리고, 퍼킨스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제리에게 연락이 왔어. 피스크 혼으로 오라는군. 네가 말한 그 공장은 어디 있는 거지?"

"그린스 브라이어."

"반대편이네."

노먼과 퍼킨스는 응접실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을 나서며 노먼이 제안했다.

"넌 너대로 가서 조사하고 와. 오후에 사무실에서 보지."

퍼킨스가 예의 그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노먼에게 물었다. "혼자서 괜찮겠어?"

"이런 추적 조사가 한두 번도 아닌데, 왜 그래? 괜찮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퍼킨스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노먼은 손사래를 쳤다.

"됐어. 또 국장처럼 설교하지 말고 얼른 가. 어린애 기다리게 하지 말고."

퍼킨스는 여전히 께름칙한 얼굴이었으나 곧장 차로 향하는 노먼을 보며 그도 몸을 돌렸다. 운전석에 탑승하고 출발하려는데, 어느새 돌아온 노먼이 문을 똑똑 두들겼다. 퍼킨스가 창을 내렸다.

"이거 가져가서 그 녀석 줘."

노먼이 작은 장난감 탱크를 퍼킨스에게 건네주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건데, 글로브에 박아놓고 도통 꺼낸 적이 없어서. 걔가 딱 그런 거 갖고 놀 나이잖아."

퍼킨스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 녀석은…. 안드로이드야."

"그래. 어린이 안드로이드지. 매번 정보만 얻어내기 미안한데, 앞으로도 잘 봐달라는 뇌물이야."

퍼킨스는 여전히 확신 없는 표정이었다. 노먼은 다시금 문을 두어 번 치고 돌아섰다. 퍼킨스는 한숨을 쉬며 옆좌석에 장난감을 내려놨다.

노먼과 달리 그는 아직도 이 모든 상황이 적응이 안 되었다. 퍼킨스는 근 일 년간 평생에 비견할 만큼 많은 일을 겪었고, 이제는 어느정도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이란 게 존재할지도 모른단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정도는. 그러나 여전히, 반평생 기계를 통제하기만 하며 살아온 그에게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완전히 동일시한다는 개념은, 쉽사리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퍼킨스는 고개를 저으며 피스크 혼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출발했다. 사이드미러로 노먼의 자동차가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린스 브라이어에 위치한 제조 공장에 도착한 노먼은, 주차 브레이크를 걸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 크지 않은 부지 한 가운데엔 널찍한 공장이 자리했고 왼쪽으로는 일렬로 늘어선 창고 건물들이, 우측엔 사무용 공간처럼 보이는 하나의 건물이 전부였다. 휴일도 아닌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공장의 문도 굳게 닫혀있었다.

노먼은 근처의 경비실로 걸어갔다. 문에 달린 작은 창 너머로 불 켜진 내부가 보였다. 경비복을 입은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태블릿으로 야구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 노먼이 문을 두드리자, 그가 머리를 돌렸다. 노먼을 발견한 경비원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태블릿을 책상에 내려두곤 문을 열어주었다.

"누구쇼?"

"노먼 제이든, FBI입니다.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니. 지금은 바빠.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오슈."

시큰둥하게 선 경비원의 뒤로,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쉽습니다. 낮은 변화구에 헛스윙. 삼진 아웃. 이렇게 이닝 종료됩니다.]

노먼은 책상 위 머그잔에 새겨진 디트로이트 소속 프로야구단의 마크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설마. 오늘이 챔피언십 5차전인가요? 루베르노는 출전했겠죠?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감독이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선발로 뽑았겠죠."

경비원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노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타이거스 팬인가?"

"요즘 바빠서 통 못 챙겨보고 있었는데, 벌써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올라가다니. 저희 아버지가 감격해서 얼마 전에 전화까지 하셨다니까요."

해설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볼륨이라도 키워진 듯 사람들의 함성과 아우성이 크게 들려왔다.

[타이거스 타자 브룩스. 바깥쪽 밀었고- 유격수 3루 포기! 1루 선택해서 아웃카운트 하나 올라갑니다! 원아웃에 주자 3루-]

"이런 젠장! 좀 더 시원하게 쳤어야지! 하여간 브룩스 저 자식은 힘이 없어서 문제야!"

노먼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사무실로 성큼 들어가자 경비원은 얼떨결에 몸을 비켜주었다. 노먼은 태블릿을 집어 들고 그 안에 얼굴이라도 박을 듯 경기를 지켜봤다. 경비원은 확신 없는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으나, 이어지는 경기 내용에 그도 노먼 쪽으로 몸을 기울여 화면에 집중했다.

[타석에 루베르노 선수- 끌어당기는 타구에 왼쪽-! 빠져나가는 안타! 점수 9:9 동점을 만들어 냅니다! 9회 말,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 루베르노!"

노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경비원을 끌어당겨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마치 삼십년지기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제 마지막 찬스를 앞둔 타이거스, 우익수 잡았고, 루베르노 출발, 홈에 승부- 홈에—! 끝내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고 좋아했다. 경비원이 환하게 웃으며 노먼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으하하! 디트로이트가 월드 시리즈에 들어가다니! 내 평생 숙원이 오늘 다 풀린 기분이야!"

"저야말로 어린 시절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기분이에요! 월드시리즈는커녕 챔피언십도 못 올라갔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이런 중요한 경기를 놓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그래! 확실히 야구는 혼자 보는 것보단 같이 봐야 제맛이지! 가만 보니 자네가 오늘 내 행운의 열쇠였구먼? 자, 자. 거기 서 있지 말고 여기 앉게나."

노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일 하러 가야 해서요."

"아아. 내가 바쁜 양반을 붙잡고 있었구먼. 미안하네. 그렇지, 아까 뭐 물어볼 거 있다지 않았어?"

"있긴한데…. 바쁘다 하셔서……."

"바쁜 거 다 끝났어! 얼마든지 물어봐."

노먼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여기 직원분이 아무도 안 보이는데, 혹시 휴가 기간인가 해서요.”

“공장에 휴가가 어딨어? 여긴 지금 무기한 휴업 상태야. 원래는 안드로이드 내장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였는데, 알다시피 일이 뚝 끊겨서. 사장만 죽어라 돌며 다른 루트 뚫으러 다니는 중이지.”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안드로이드 직원도 아예 없는 건가요?”

“예전에는 있었지만, 인간들이 나갈 때 다 같이 나가버렸어. 그렇지만 또 몰라. 망가진 안드로이드는 그냥 창고에 쌓아놨거든.”

“그럼, 공장 근처에서 이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흠… 많이 본 얼굴인데. 가만 이 여자, 죽은 하원의원 아냐?”

“맞아요. 사망 전날 이곳에 왔다고 들어서요. 보신 적 있나요?”

“아니. 전혀 못 봤어. 보안 캠에 찍혔을런지 모르겠네.”

“잠깐 살펴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경비원은 흔쾌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노먼은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보안 카메라의 날짜를 조정했다. 한참을 돌려보던 중, 드디어 공장 부지 뒤 공터로 들어오는 차량을 발견했다. 노먼은 ARI를 착용했다.

‘차량 번호 인식. …인식 완료. 페이지 클라인 소유 차량.’

차에서 한 여성이 내렸다. 눈에 띄지 않는 평상복을 입은 클라인은 차 문을 닫고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긴 뭐 하는 곳인가요?”

“부지 가장 끄트머리에 붙은 창고야. 폐기 될 쓰레기들만 쌓아놔서 딱히 잠궈놓지도 않았는데, 저긴 왜 들어간 거지?”

노먼이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자 화면은 바뀌고 창고 안쪽이 보였다. 환한 밖과 대조되어 한층 더 어둑해진 내부는 사물의 모양이 다소 흐릿하고 불확실하게 비쳤다. 정리되지 않은 커다란 상자가 이곳저곳 무작위로 쌓여 올라간 데다, 그 위로 천까지 덮여있어 클라인이 그사이를 걸을 때마다 모습이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어느 지점에서, 클라인은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상자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고 클라인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상자 너머로 손 하나가 나타나 그 물건을 건네받았다. 누군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각도는 없나요?"

"없어. 창고에는 이 카메라 한 대뿐이야. 사람 불러서 물건들이나 좀 치워둘 걸 그랬네."

노먼은 집중해서 영상을 관찰했다. 이번에는 클라인이 상대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고 가방 속에 바로 집어넣었다. 봉투의 형태로는 안에 든 게 무엇일지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았다. 레드아이스인가?

거래를 마친 클라인이 입을 움직여 무어라 더 얘기하더니 이내 뒤를 돌아 걸어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나서 차를 타고 다시 부지를 빠져나갈 때까지, 다른 인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먼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눕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카메라의 각도가 틀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기울여 상자 뒤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클라인이 떠나고 몇 분 후에 한 남자가 상자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뒷모습뿐이었으나 단정하게 정돈된 밝은 금발과 검은 정장, 꼿꼿하게 걷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는 노먼의 눈에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노먼은 ARI로 분석 명령을 내렸으나 별다른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가 클라인이 향한 방향으로 걸어나가 창고 문을 나서자 드디어 외부 카메라에 얼굴이 드러났다. 작은 화면에서도 확연히 보이도록 깊숙이 들어간 눈매의 음영과 높게 솟은 콧날 등 전형적인 백인 남성의 골격을 가진 그의 미간에는, LED가 박혀있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함께 모니터링하던 경비원의 입에서 벙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드로이드?"

"ARI. 저 모델을 분석해."

ARI가 빠르게 깜빡이며 정보를 띄웠다.

'사이버라이프 제조, PL—모델. 가사 도@#$용 안드로#D'

'데이터 충돌 감—'

노먼은 빠르게 얼굴에서 ARI를 벗겨내 책상 위로 던졌다. 코에서 다시금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노먼이 고개를 쳐들고 콧등을 움켜쥐는 모습을 본 경비원이 호들갑을 떨며 휴지를 뽑아다 건네주었다.

"아이고, 갑자기 왜 그래?"

노먼이 코 밑에 휴지를 대며 잠시간 피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순간적으로 오싹한 느낌이 들었으나, 바로 안경을 벗어서인지 다행히 어젯밤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노먼은 떨리는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유리 재질의 작은 원통형 물체가 손끝에 만져졌다. 차갑고 매끈한 그 물건은 닿는 것만으로도 묘한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노먼은 그것을 손안에서 굴리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빈손을 빼내었다.

트립토카인은 증상 완화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ARI를 남용하도록 만드는 데에도 지대한 도움을 주는 약물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돌아온 후 그는 이걸 전부 변기에 쏟아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약물 자체가 아니었다. ARI. 그게 노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고, 트립토카인은 그저 안경에 따라오는 부작용을 억제해 주는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ARI에 따른 심각한 환각작용을 겪은 후 어쩔 수 없이 다시금 트립토카인을 처방받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이 약물은 거의 손대지 않은 채 그저 위급상황을 위한 부적처럼 품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현 증상에 트립토카인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었다. 몸은 오랜 기간 ARI를 착용해 온 그에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신호를 보내어왔다. 그는 안경을 벗기 전 화면에 뜬 시스템 창을 기억했다.

데이터 충돌.

분명 어제도 비슷한 문구를 본 기억이 났다. 노먼이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잠깐 창고를 둘러봐도 될까요?"

"나야 상관없네만…. 자네 정말 그렇게 막 움직여도 돼? 좀 쉬었다 가지 그래."

"괜찮아요. 요즘 잠이 부족해서 가끔 이럽니다."

"쯧쯧. 아직 젊은 친구가. 그런 식으로 혹사하면 나중에 고생해."

싱겁게 웃은 노먼이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언제라도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사람이든, 안드로이드든."

"그러지. 문은 열려있으니 들어가서 얼마든지 살펴봐. 혹시, 같이 가줄 사람이 필요해?"

"아뇨. 혼자서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노먼은 정중히 인사하며 경비실에서 나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알리는 서늘한 공기가 서풍을 타고 재킷 안으로 불어왔다. 단추를 여미며 몸을 살짝 움츠린 노먼이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언뜻 고개를 돌리니, 아까와 달리 공장 건물의 두터운 철문이 약간 열려있었다.

노먼이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안을 흘끔 들여다보는데, 입구로 들어오는 빛을 막아선 탓에 내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공장 가동은 중단되었으나 난방이나 정비 시설 등 기본적인 기기는 여전히 돌아가는 모양인지 초록색과 빨간 불이 곳곳에서 반짝였다. 그 사이, 무언가 파란빛이 움직이는 듯했다. 노먼은 발을 조금 움직여 문을 살짝 뒤로 밀었다. 길게 뻗어 들어오는 태양 빛의 면적이 넓어지고 그림자 속에 선 한 사람의 구둣발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뜬 노먼이 문을 확 열어젖혔다. 순식간에 실내가 밝아지며 어둠 속에 묻힌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회색 유니폼 뒤, 삼각형의 문양이 노먼의 눈에 비쳤다.

"당신은…."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바로 어젯밤의 장면이 다시금 노먼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안드로이드가 여상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제이든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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