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ission

우리는 영원을 추억한다

커미션 24.01.19.

365g by 혜윰

우리는 모두 길을 잃는다. 삶이란 죽음이라는 결말을 향한 무한한 상실과 허무의 순례라고 여겼다. 그러니 영원이란 존재치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끝내 말라 시들어가듯 소멸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빠듯한 생들이… 끝없는 고통과 결벽한 슬픔으로 가득찬 생들이, 우리는, 어디로 걸어가야 평온을 맞이할 수 있는지. 오래된 활자 속에서나 존재하던 평화에는 여전히 우리의 자리가 남겨져 있는지. 끝내 서늘한 말미와 창백한 숨결로 되묻게 된다. 모든 생이 단 하나의 가치로 수렴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길을 찾아 헤메어도 더는 혼나지 않을지.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했던가.

*

물에 흠뻑 젖은듯 투명한 눈매는 언제나처럼 한없이 무르고 다정하다. 안주하지 말자, 버릇처럼 되새기던 말도 당신의 용서에 거품처럼 녹아내린지 오래라. E는 헛된 부정을 반복하는 대신 기꺼이 그 온기를 마주한다.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제 오랜 연인을 바라본다. 그렇게 매 숨마다 느끼던 감상을 재차 돌이켰다. 멸망한 세상에도 생은 찾아오고, 우리는 언젠가 손 안에 가득 차오를 보석보다도 여즉 부드럽다. 당신은 그게 아주 자연한 진리인 마냥 오래된 찻잔을 조심스럽게 쥐고 입가로 기울인다.

"무언가 벅찬 일이라도 찾아왔나 보구나."

창가의 햇볕에 물든 덕인지 D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하얀 우유 거품에 깃털처럼 가라앉던 초콜릿 조각들이 떠오를 만큼. 마치 달음박질쳐 찾아오다 무릎이라도 까진 어린애를 토닥이는 듯한 어투에, E는 그만 몹시도 무력하고 어리숙한 얼굴로 웃게 된다. 찻잔의 온기는 오래도록 맴돌다 옅은 숨만을 남겨두었고 장미 꽃잎이 섬세히 새겨진 접시에는 투박한 견과 쿠키가 삐뚜름하게 놓여있다. 저희들이 지나쳐온 삶에는 참 어울리지 않게도, 다정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당신에게 저는 아주 조그마한 유리 인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짧게 스쳐지나갔다. D는 항상, 저의 속내를 모두 꿰뚫은 마냥 손을 뻗어오곤 했으므로. 그러니 당신에게 제가 굴복하는 것도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납득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매끈히 다듬어진 손톱에 찻잔이 마주 닿는다.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당신의 미소는 제가 기억하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아 항상 그리워하게 된다. 그렇게 대답은 한 발짝 늦게 새어나왔다.

 "제가 힘겨워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아니."

 "그렇다면요?"

D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나 그러했듯 얇고 가느다란 손길을 뻗어오기만 했다. 낡은 의자가 꺼끌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고, E는 끝내 바라던 만치 견고하지는 못할 온기를 가득 받아들인다. 당신의 손길은 메마른 뺨을 간질이고 곧은 콧등을 살풋 어루만진다. 짙은 눈꺼풀의 선을 따라 쓰다듬는 만큼 오랜 향이 맴돌았다.

너는 나에게 무언가 전하고 싶을 때마다 아주 외로운 낯을 하니까. D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듯 잔잔하다. 지금의 저를 외롭다 말한다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마주 닿는 목소리는 초라하게도 아주 외로이 들린다. E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저를 어루만지는 D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랜 향은 저에게 닿는 만큼 모두에게 다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숨을 내쉬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서럽고 차가웠으므로. 그러니 나는 항상 당신이 저 스스로에게 다정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E는 손을 들어 제 뺨을 어루만지는 D의 손을 감쌌다. 여전히 우리의 세상은 맑고 투명한 만큼 날카로워서, 삶은 제가 바라던 만큼 따스하지 않고 생은 제가 원하는 만큼 부드럽지 않다. 다만 아직 우리는 기원해도 된다는 사실만이 따스하고 부드러이 우리를 감싸온다.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래서 그만 과하게 들떠버렸나 봐요. E의 머쓱한 말에 D는 도리어 즐거이 웃어버린다. 이런, 그래서 내 손아귀 안으로 숨어버리기로 했을까. 왼손 약지를 들어 뺨을 가볍게 두드린다. 꼭 저를 놀리는 듯한 모양새에 E는 앳된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고야 만다.

"D 씨."

 "그래, E."

네가 바라던 선물을 받고 싶구나. 그럼에도 E는 손을 놓지 않는다. 자연히 손길을 걷어내려던 D는 그 온기에 붙들려 가만 바라보기만 한다. 햇볕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는 오래 전의 구름처럼 푸르고 깊다.

 "오래 전부터 D 씨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부스러지듯 달콤한 향과 화려한 색채의 포장지는 우리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D는 테이블 위로 자리잡은 작은 상자를 몹시도 연약한 것처럼 바라본다. 물론 D 씨는 저만큼 단 것을 좋아하진 않으시니. 조심스럽게 뻗어오는 손길에 목소리는 건반을 치듯 날아오른다. 아주 작게 만들었어요. D 씨의 새끼 손톱보다도 작게요. 아주 달지도 않아요. 다만 저번 농담처럼 말씀하셨던 보급용 탄의 화약보다는 덜 쓰게 만들었어요.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역시 파우더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요…. 마음이 달뜬 탓인지 쓰잘데기 없는 농까지 치고야 만다. E는 가만 입을 다물고 상자의 끄트머리를 어루만지는 D의 손가락과 그 위에 얇게 가로놓인 손톱을 바라본다. 언제 또 흰 흔적이 올라왔을까. 조만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손의 긴장을 풀어주어야겠다 다짐하면, D는 숨을 몰아쉬듯 인사를 건네왔다.

"고맙구나, E."

아주 그리운 맛일 것 같아. 그리 말하는 당신의 문장이 햇볕에 산산이 명멸하고, 어둑한 허공에 아련하니 자리잡는다. E는 문득 오래된 주방에 놓인 투박한 초콜릿과 거친 생크림을 기억한다. 낡은 도마 위에서 어설프게나마 칼질을 하며 당신이 어떠한 낯으로 제 애정을 받아줄지를 가늠했다. 본래의 형체를 잃고 가라앉는 초콜릿과, 그 안에 희미하게 섞여드는 생크림을 바라보며 제가 상처주었던 시절의 당신을 떠올렸다. 그 시절의 우리는 여즉 어렸고, 조금 더 절박했으며, 아주 많이 둔탁하여 현재의 삶을 상상치 못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포장을 풀어주겠니? 저는 이제 울지 않는데, 당신은 여지껏 그래왔듯 제 눈꼬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기꺼이요. E는 D의 온기를 기꺼이 받아내며 속삭였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곧은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이 바라던 언제나의 미소를 감싼 채 당신의 미소를 그리고자 한다.

D는 여전히 E의 눈꼬리를 어루만진다. D 씨. 대답이 돌아오리라 자연히 믿는 부름에 그래, 하고 언제나의 다정한 어조로 대답한다. 그러니 결국 나는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영원을 맹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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