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쟌

스무살

102지구라 함은 일반적으로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중앙에서 떨어진 지역, 옆집 개 목줄보다도 느슨한 치안, 삼사의 관리가 거의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 혹은 누구도 굳이 가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1에서 121개의 지구 중 하나. 하지만 그 안에도 규칙은 존재했고 나름의 일반성 또한 존재했다. 비록 똑같은 기반 아래 돌아간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가.

스무 살의 언저리, 자얀은 이곳 102지구에서 민간 경찰 일을 시작했다. 타고 나고서부터 갈고 닦은 무력과 적당히 칼 맞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을 갖춘 정신머리는 그가 무리 없이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큰 어려움 없이 조직 안에 섞여 들어가는 듯했으나 간헐적으로 그는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끼운 것처럼 삐걱거렸다.

혹자는 자얀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빈틈없는 척 하지만 허술한 놈.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 도통 알 수 없지만 솔직하기도 한. 다 자란척 하지만 아직 어린 구석이 있는, 그런 동료. 하지만 그와 한 번이라도 함께 일을 나갔던 이라면 대체로 그를 꺼림칙하게 여기거나 혀를 차곤 했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저건, 못 써먹겠다고.

**


"그으래서 네 번이나 퇴자를 맞은 소감은 어때."

"말 시키지 마세요. 당신, 일 안 나갑니까?"

"어이고. 설마 삐졌어? 너 빼고 다들 일 나가서 삐져버린 거야? 세상에나...올해 몇 살이더라?"

"아니라고, 했잖아요."

자얀이 이를 악물며 대답하자 상대에게선 요란스러운 웃음이 삐져나왔다. 약 올리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행동은 딱 그 꼴이다. 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텅 빈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아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겨우 진정한 남자의 목소리 기저에는 작은 즐거움이 깔려 있다.

"그러니까 왜 사고를 치고 그래. 수습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아나 몰라."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습니다. 왜 멋대로 해놓고 생색을 내시는지?"

"아이참. 고맙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우면 부끄럽다고 말씀을 하시라니까요."

"나이 그렇게 처먹고 그런 말투를 쓰면 토 안 쏠려요?"

"야, 나이 얘기는 하지 마라. 너는 영원히 스무 살인 줄 아냐."

정색을 하고 대꾸 하는 것에 자얀은 그저 코웃음만 쳤다. 스물일곱이나 먹은 양반이 애교 부리는 게 보기 역겹다는 게 주 이유였다. 남자가 언급한 사고는 사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규모였다. 따지자면 성가신 부류라고나 할까. 자얀은 며칠 전 문책받았던 일을 떠올리고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죽여도 되는 놈들이었잖아요."

"그래도 정도란 게 있지. 같이 나갔던 사람들이 죄다 질색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냐."

"저는 확실한 처리를 했을 뿐이에요."

"확실한 화풀이는 아니시고?"

그건 성질을 단번에 긁는 마법의 단어와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얀의 두 눈이 매섭게 치켜 뜨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표현이 못마땅하다는 증거다. 생판 모르는 남이 보면 얼굴만 좀 앳된 거지, 길거리의 갱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험악한 눈빛이건만 남자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양 귀를 파는 시늉이나 하며 손가락을 후- 하고 자얀을 향해 불어 보인다. 흡사 약을 올리려는 속셈인가 싶을지 몰라도 그건 그 나름의 진정을 위한 분위기 환기였다. 물론 그 시도는 늘 진정은커녕 짜증만 불러일으키기 일수였지만.

"우리의 목표는 용의자를 잡아서 재판에 넘긴 다였잖아. 모가지가 떨어지고 팔다리가 난자 된 걸 끌고 와서 시체 꿰어맞추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에게 당연한 사실을 가르쳐주듯 하나하나 일러주며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자얀은 울컥 솟는 반발심을 누르지 않고 내보냈다.

"지시의 내용은 생포 혹은 사살이었죠. 벌써 사람을 넷이나 죽인 놈들의 사정을 봐줘야 할 필요가 없으니."

"우선순위는 생포였어. 너도 들었잖아."

"크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잖아요."

"아니, 달라. 살려와서 재판장에 세우는 것과 시체를 끌고와 사건을 종결시키는 건 같을 수 없어."

"그딴 구색만 갖춘 처벌 받게 하면 뭐가 달라진다고."

냉소적으로 단정짓자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얀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올곧게 들이쳤다. 어떠한 뜻도 담기지 않았으나 자얀은 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이 책망을 띄고 있다고 생각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의자에 늘어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잠깐의 간극. 자얀과 남자는 큰 움직임 없이 서로를 본다. 남자는 무언가를 가늠하며 면밀히 자얀을 훑어보았다. 흡사 도자기 인형처럼 무기질적인 낯만을 내보인 남자의 고저없는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내가 너 사람 편하게 죽이라고 여기 들어오는 걸 허락했는 줄 알아?"

"..."

"나는 아직도 너같이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이 너무 짧은 놈들은 원래 경찰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해."

"그럼 처음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어야죠."

"그럴걸 그랬다는 생각도 해보긴 했어."

남자를 바라보던 보랏빛 눈동자가 강하게 일렁였다. 일순 자얀은 오욕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을 했다. 그에게만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기에 질척이는 불쾌함이 뱃속을 타고 꿈틀댔다. 자얀은 책상을 내리치듯이 짚고는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으나 남자는 그저 침착한 태도로 손안의 라이터를 이리저리 돌려 보이기만 했다. 낮게 갈라져 위협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자얀의 목구멍에서 끓어올랐다.

"지시를 지키면 다른 건 괜찮다고 했던 건 당신이잖아."

"앉아, 자얀.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어."

"알아. 그래도 앉아줬으면 좋겠어. 기다릴 수는 있잖아. 부탁할게."

흉흉하게 타오르던 감정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남자가 뱉은 마지막 단어가 거짓말처럼 제동을 걸었다.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하던 어깨가 멈추고 책상을 파고들듯이 힘이 들어가던 손가락이 멈췄다. 남자는 일련의 과정 동안 자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규칙적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끝에 자얀은 다시금 자리에 앉는데에 성공했다. 비록 책상 밑으로 내려둔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남았긴 했으나. 저릿한 손끝을 피며 자얀은 자신의 행동에 칭찬이라도 건네듯 금세 입을 헤하고 벌려서 웃는 남자를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요지만 말하세요."

"으으으음."

"짧게."

"조금만 호흡을 고르자. 네 등 뒤에는 아무도 없어. 알잖아?"

그때랑 지금은 다르단 걸. 그렇지 않냐는 듯 남자는 천진난만하게 동의를 구해온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였는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남자는 날카롭게 돌아오는 반박이 없다는 사실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세 콧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얼음장 같았던 분위기는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앞에서 계속 화가 나 있어 본들 피곤하기만 한건 본인이라는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깨달은 자얀은 긴장을 유지하던 몸에 힘을 풀고 다시금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남자의 잇새로 일정하게 이어지는 익숙한 음률의 흥얼거림이 샜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또다시 당했다는 감상이 들었으나, 굳이 말하자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뜻을 꺾은 것에 패배감을 느끼기에는 상대가 논외였다. 자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숨만 내쉬다 어쩐지 조금 힘이 빠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 중에 당신만큼 속 편한 사람이 있으려고."

"엥. 갑자기 욕을 하네."

"칭찬인데요."

"그래, 너는 무대포에 손속이 드러워서 사람의 머리통을 곧잘 쏘는 걸 보니 참 화끈하고 말이야."

"..."

"..."

"역시, 죽어."

"왜?! 칭찬한 건데!"

너무하다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는 남자는 성가시고 시끄러웠다. 두 귀를 틀어막고도 선명하게 들리는 소음에 자얀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제 언제 화가 치솟았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눈앞의 상황이 귀찮기만 했다. 이게 다 뭐 하는 짓거린가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는 것이 어째 평소랑 다를 게 없기도 하다. 책상에 턱을 괴고 심드렁한 낯을 하며 들리는 말을 죄다 흘려보내고 있는 자얀에게 쉼 없이 우는소리를 하던 남자는 어느 순간 은근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기만 했다. 그것을 못 버틴 자얀이 뭐냐는 듯이 고갯짓하자 장난기가 빠진 멀건 얼굴을 한 남자가 천천히 입을 뗐다.

"손잡이 정도는 있어야 칼을 쓰지. 날만 있으면 되겠어."

"저는 총도 쓰는데요."

"검을 더 많이 쓰잖아."

"날붙이가 용도만 다하면 됐지."

"쉿, 조용. 자꾸 태클 걸지 마. 깜찍아. 나 말하잖아."

"씨발."

"어허, 고운 말."

자기 입을 두드리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인 남자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다갈색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것은 낯익은 온정을 품고 있다. 속절없이 밀려드는 감정이 빈자리 없이 속내를 메워 와 자얀은 일순 숨을 멈췄다.

"그래도 넌 잘하고 있어. 그건 확실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문 자얀을 보며 남자는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손을 뻗어 자얀의 뺨을 감싸고 가볍게 문질렀다. 숨겨지지 않는 미미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손길. 스스럼없이 건네지는 행동들은 익숙한 것이라 눈을 올려 유순하게 그를 바라본다. 한쪽 뺨이 조금 붉어진 자얀이 나른하게 책상에 엎어지자 남자가 손을 내렸다. 굳은살이 배겨 조금은 딱딱한 손이 살짝 뻗친 검은 머리칼 사이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귓바퀴에 닿는 손끝이 간지러웠으나 피하지 않았다.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넌 내가 필요하지 않게 될 거야."

티 없이 맑은 확언은 불쾌하지 않은 울렁거림을 불러왔다. 그의 말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들은 말이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나온 몸짓이었다. 서투르고 형편없더라도 단 한 번의 조급함 없이 발밑을 받쳐주는 이가 있다면 무엇이든 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에 자얀은 맹목을 닮은 신뢰를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다는 듯 자리해 길을 밝히는 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목을 타게 한다. 당신을 더 이해할 수만 있다면, 더 가까이 가도 좋을텐데. 지척에 자리한 이상향에 눈이 멀 것만 같아 자얀은 부러 두 눈을 감았다. 뜨겁게 달궈진 것을 조금이라도 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를 벗어난 온도는 그저 타인을 데이게 만들 뿐일 테니. 한동안 말없이 닿아오는 체온을 즐겼다. 그러다 남자의 손짓을 따라 이마 위로 흐트러지는 실타래 같은 감촉을 털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새 식어 내린 눈동자는 매끄럽게 굳은 겉면을 드러냈다.

"하여간 밀린 경위서나 작성하세요. 위에서 언제 제출하냐고 성화니까."

"아. 그거 언제까지지?"

"오늘이요."

"..."

"오늘이라고요."

"거짓말."

자얀은 망연하게 되물어오는 남자를 최선을 다해 비웃어주었다. 눈꼬리가 둥근 호선을 그리고 도톰하게 눈 밑이 접히는 모양새가 얄궂었다. 나름의 작은 앙갚음이었다.

"수고하세요."

"너는 다 썼어?"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배신자."

"누가 할 소리를?"

매정하게 대꾸하며 의자에 걸쳐 있던 겉옷을 챙겨 들자 남자의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물론 자얀은 그것마저 깔끔히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친절하게 남자의 잔업 목록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과장스레 한숨을 뱉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자얀은 방을 가로질러 문 쪽으로 향했다. 나가기 전 뒤를 돌아보자 투덜거림을 뱉는 것과는 달리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역시 놀림이 별로 타격이 없는 사람이다. 자얀은 받은 것을 다 되돌려주지 못한 게 영 아쉬운지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옷 덜 가져갔던데. 저녁 먹으러 오면서 챙겨갈래?"

"아, 그럴게요."

"아예 자고 가도 괜찮아. 네 방 아직 그대로 있어."

"그냥 치우지 그래요?"

"뭐, 언젠가는 하겠지."

"상습적 미룸."

"난폭한 무뢰한."

"해보자는 겁니까?"

"아이고,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네."

묘한 표정으로 남자를 본다. 그가 정말 대가를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란 것은 알지만 자연스레 상념이 피어올랐다. 속으로나마 대답한다.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어. 받은 것을 헤아릴 수조차 없어서 엄두도 나지 않는다면 뭐라고 대답해 줄까. 물음은 나오지 못하고 의문인 채로 남아 언제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실 남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래도 좋기도 했다. 스스로가 갈취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철저하고 잔혹하리만치 공정한 명제의 잣대 아래의 유일한 예외는 오로지 그 뿐이었다. 손톱이 뜯기고 살점이 짓이겨 뭉개져도 멈추지 못하고 손가락을 좁은 틈새로 밀어 넣어야만 했던 비참함을 여태 기억하기에 뼈를 저미는 고통 없이도 속에 들어와 준 이를 뱉는 법을 몰랐다.

그러니 받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서 이 이상 손을 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차마 아직도 말하지 못한 본심이다. 무심코 생각한다. 언젠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내어줄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이 정도는 봐줘도 괜찮잖아. 여태 그래왔으니까. 태평하게 이어지는 어리광 같은 생각을 미련없이 가볍게 끊어냈다. 자얀은 입안 가득 들어찬 이름을 혀 위에 올렸다.

"시몬."

"으응?"

"이따가 봐요."

정오의 햇살이 커튼 새로 새어든다. 물결처럼 퍼지는 너울 같은 그림자가 벽을 타고 내려와 시몬을 덮었다.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으며 자얀은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이리도 달가운 무게감을 선사하며 지면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한다. 뜨거운 칼날이 꽂힌 목구멍을 식히는 것과 같은 감각. 아마 뱃가죽이 갈라지지 않는 한 이것을 죽어도 뱉어낼 일 따윈 없겠지. 감히 그리 단언하며 문을 열었다.

뒤이어 묵직한 소음이 닫힘을 알렸다.

홀로 남은 시몬에게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사도 음도 뒤죽박죽이지만 듣기에 썩 나쁘지 않은 흥얼거림은 문 너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I let my guard down
And then you pulled the rug
I was getting kinda used to being someone you loved

- Lewis Capaldi, Someone You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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