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슬램덩크/태섭한나] 나에게 넌

태섭의 편지, 그걸 읽는 한나

재해석 by 보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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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게시일: 2023.02.25 (https://posty.pe/mnn04a)


이한나 양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편지 봉투 위 볼펜으로 눌러 쓴 듯한 글씨는 정갈했다. 수신인만이 적힌 편지의 발신자를, 한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짐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 어? 태섭아, 아직 안 갔......응?

- ......!

- 송태섭~ 내 자리에서 뭐해? 손은 왜 뒤로 숨겨?

- 하, 한나......!

- 뭘 들고 있는 거야? 편지 봉투?

- 아니 그러니까......이, 이건!

한나는 현장 검거의 순간을 회상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져서는 안절부절하면서 어떻게든 수습을 시도하던 모습.

'퍽 귀여웠지.'

평소에는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있는 대로 힘을 주고 다니면서. 한나는 빙그레 웃었다.

한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봉투 위의 글씨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글씨가 쓰여 눌린 자리를 스친 손끝이 괜히 간질거렸다.

봉투를 뒤집자 입구를 봉한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햇님이었다. 이런 귀여운 것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한나는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쩐지 아까운 마음이 들어, 봉투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스티커를 떼어냈다.

봉투와 같은 색깔의 편지지 몇 장이 한나의 손에 들렸다. 각을 맞춰 접느라 꽤나 애쓴 것 같았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고생 좀 했을 걸 생각하니 왠지 기특했다.

접힌 종이를 펼치자 신경 써 반듯하게 쓰인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손글씨가 한나를 맞이했다.


친애하는 이한나 양에게


"어머."

어쩐지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눈앞에 당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나는 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한 뒤 다시 편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이한나 양에게

안녕하세요, 한나 양.

송태섭입니다.

평소 한나 양의 이름을 소리 내 부르기만 하다가 이렇게 글자로 적어 보니 왠지 신선한 기분이 듭니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한나 양의 이름은 글자로 쓰여도 예쁘군요. 내가 좀 더 글씨를 잘 쓴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나 양의 이름을 적으며 처음으로 해 보는 듯합니다.

갑자기 웬 편지냐고 여기실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적고 보니 새삼스럽게 이 당연한 사실이 왜 이리 기분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편지만이 전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음,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 몇 번째 새로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모처럼의 편지인 만큼 멋있는 말로 써 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국어 시간에 수업 좀 잘 들어 둘걸 그랬지 뭡니까. 횡설수설하더라도 부디 헤아려 주길 바랍니다. 이제 남은 편지지가 얼마 없거든요......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은데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으니 스스로가 이다지도 바보처럼 느껴질 수가 없군요. 혹시 읽으면서 바보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럼 조금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한나 양 앞에서만 그렇게 되거든요. 당신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꽤나 솔직해지고 맙니다.

한나 양은 나를 알아 주니까요. 그리고 믿어 주니까요.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상냥할까요? 내가 나를 믿지 못해 도망치고 싶어지는 때에도 당신은 어떻게 날 믿어 주는 걸까요? 빛나는 눈동자 속에 단단한 확신을 가지고 날 지탱해 주는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따뜻할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한나 양, 나는 종종 내 마음을 바다 같다 여기곤 합니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해수욕장 같은 바다와는 거리가 먼,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커다란 암초가 있는 바다입니다. 나의 바다는, 이젠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리 온화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거센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절벽에 산산이 부서질 뿐더러 툭하면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일쑤지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당신의 눈길 한 번과 잡아 주는 손길 한 번에 거센 풍랑이 이는 나의 바다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거든요.

혹시 알고 있나요?

햇빛을 입은 파도가 부서질 때 얼마나 눈부신지, 달빛이 수놓인 해수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빛 한 줄기에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

나의 빛, 한나 양.

내가 나인 채로 괜찮을 수 있게 하는 당신을 향한 감사를 온 마음 다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날의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아직 어리기에 앞으로 살아가면서 여태까지보다 더 많은 일을 겪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 중에는 마음이 꺾이고 무너질 것 같은 일도 많겠지요. 나는 그럴 때마다 손바닥을 보려 합니다. 당신이 써 줬던 글씨를, 당신이 내게 준 믿음을 떠올릴 수 있도록요. 그리고 나도 나를 믿어 보겠습다. 아니, 믿겠습니다. 당신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한나 양이 있어 준다면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많이 부족한 사람인 탓에 아직은 어려울 수 있겠으나,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존재로 한나 양이 힘들 때 외롭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진실로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 지금 쓰고 있는 이 종이가 마지막 장인가 봅니다. 그리고......시계를 보니 당장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아침이 걱정되는 시간이 되어 있군요. 아무래도 이만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빨리 가 버린 건 아쉽지만 아침이 와야 학교에서 한나 양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당신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잠드는 매일매일의 기다림이 나는 마냥 즐겁습니다. 한나 양의 하루하루도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길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두서 없는 긴 글 읽어 주어 감사합니다.

내일도 같은 교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뵙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태섭 드림


한나는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읽었다. 다시 읽을 때마다, 편지 쓴 이가 그러했을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빠짐 없이 정성을 들여 시선을 옮겼다.

소년의 마음은 깊었고 생각은 진중했다.

그걸 담은 글, 하물며 손으로 직접 쓴 편지가 지닌 무게는 실로 엄청나서 수신자의 마음도 삽시간에 감정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한나는 편지지 뭉치에 얼굴을 묻었다. 괜히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기분 탓인가, 손끝에 닿는 귓바퀴의 온도가 평소보다 높은 것 같았다.

한나는 그녀에게 전해진 귀한 마음을 소중히 갈무리해 봉투에 넣었다.

봉투를 닫은 한나의 눈에 그 햇님 스티커가 다시 보였다. 창을 타고 넘어온 노을빛이 스티커의 반들반들한 표면에 은은하게 번졌다.

한나는 환히 웃었다.

"바보."

작게 중얼거린 입술이 그 위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한나는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학교에서 그 애를 만날 내일이 기대되었다.


— 며칠 전

"......하아."

태섭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놈의 종류가 이렇게 많아......."

그의 눈앞 진열대에는 가지각색의 편지지 세트가 펼쳐져 있었다.

아라의 준비물을 사러 문구점에는 종종 오는 편이었지만 지금 태섭이 서 있는 이곳은 좀처럼 올 일이 없는 팬시 코너였다. 모처럼 큰 결심을 하고 한나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는데, 멋 없게 공책을 북 찢어서 쓰자니 그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탓이다.

태섭은 생각했다.

'그래, 송태섭. 사내답게 살 거 빨리 사서 나가는 거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편지지 종류의 다양성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에, 태섭은 보무도 당당하게 문구점에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정하지 못했던 거대한 변수를 마주한 지금은 가게 문을 열어젖히던 조금 전의 기세를 모두 잃고 진열대 앞에 오도카니 서 있을 뿐이었다.

태섭은 아득해지는 정신머리를 가까스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송태섭. 누가 편지를 주거나 받는 걸 본 기억을 되살려 보는 거다. 내 주변에 있는 놈들 중에 편지를 가장 많이 받아 본 건......서태웅이겠군. 그 녀석 신발장에 편지봉투 한두 개는 항상 들어 있지. 그게 대충 무슨 색이었더라. 분홍색이 가장 많았던 것 같은데. 좋아, 그럼 분홍색으로 하자......아니 잠깐만. 근데 그건 러브레터니까 분홍색이었던 거 아냐? 내가 한나한테 쓰려는 편지가 러브레터인가? 아닌데? 그런 의도로 쓰려는 건 아닐텐데? 아닌가? 어라? 어랍쇼? 어어?'

......태섭은 생각을 그만뒀다.

오늘 저녁 당번은 자신이었다. 이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태섭은 그냥 눈 딱 감고 손을 뻗었을 때 잡히는 걸 사기로 스스로와 합의점을 찾았다. 

결정의 시간이었다.

태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걸로도 모자라 고개까지 돌린 태섭의 손이 잠시 허공을 방황하다가, 편지지 한 묶음을 집었다.

빼꼼히 실눈을 떠 확인한 편지지의 색깔은—

"……."

연분홍색이었다.

사나이 송태섭은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야심한 새벽.

태섭은 기진맥진하여 책상 위에 엎드렸다.

쓰레기통에는 구겨진 연분홍색 종이 뭉치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태섭은 편지를 쓰는 동안 책상 위에 엎어 놨던 (세워 둔 채로는 한나가 지켜보는 기분이 들어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액자를 다시 세웠다. 한나의 사진과 눈이 마주치자, 왠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한나......내가 해냈어."

태섭은 레이업 슛을 처음 성공했던 때만큼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두서라고는 없이 구구절절하기만 한 편지로서 자격 미달인 물건을 도무지 직접 전해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치열한 고민 끝에 태섭은 하교 시간을 노리기로 했다. 반 아이들이 모두 나가고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 한나의 책상 서랍 속에 편지를 몰래 넣어 두면 될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태섭은 삐뚤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 서랍을 열었다.

잠시 후, 서랍을 닫은 태섭의 손에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일러스트 스티커가 들려 있었다.

그림들 중 하나를 떼어내는 태섭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거 하나를 위해 산 거니까.'

연분홍 편지 봉투 위에 샛노란 햇님 스티커가 더해졌다.

편지지를 고르고 계산대로 향하던 중 우연히 눈에 들어온 스티커였다. 밝게 웃는 햇님 그림을 보자마자 한나가 떠올랐다.

그 순간, 태섭은 한 번 더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붙여 보니 봉투와 색깔도 제법 조화롭게 어울렸기에 태섭은 자신의 선택이 썩 마음에 들었다.

실실 웃으며 편지 봉투를 들여다 보던 태섭이 엄지손가락으로 스티커의 표면을 살짝 어루만졌다.

"음."

스티커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태섭은 마침내 어떤 결심을 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태섭은 조금 전 다시 세워 둔 한나의 사진이 든 액자를 곁눈질했다. 곧 한숨과 함께 태섭의 손이 액자를 뒤집었다.

양손으로 편지 봉투를 받쳐 든 태섭의 표정만큼은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비장했다.

태섭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소년의 입술이 스티커 위에 스치듯 닿았다 이내 멀어졌다.

어두운 창밖에는 달빛만이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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