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맨션

紫陽花のような恋

그러모은 너를 사랑해

* 본 이야기는 ‘레플리카’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체크아웃을 시작합니다. 우경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진 말풍선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49일 동안 맨션 안에서 겪었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이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결정하지 못했는데.

체크아웃에 앞서 블루를 집계합니다.

집계 결과 박우경 님은

다른 입주민으로부터 블루를 양도받아

블루를 가장 많이 모은 입주민입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얘기했던가. 내가 감히 그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을까. 당장 불을 질렀던 방화범을 잡아다 죽여버리고 싶다가도, 사람을 죽이는 대신 자신을 찾아오라던 그 올곧은 마음 앞에서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가? 과거로 돌아가야만 하는 강력한 당위성을 가지고도 제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전부를 넘겨준 그를 위해서, 그 반듯한 마음을 위해서. 정말 제 증오만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게 옳은 일인가?

그렇다고 그 말을 들으면 자신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박우경은?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척이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가? 답도 없는 고민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와중에도 우경을 비롯한 모든 입주자를 내보낼 준비를 순조롭게 끝낸 맨션이었다.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십시오.

15초 뒤엔 안전하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끝없는 고민과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우경은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가. 감은 눈을 뜬 자신의 앞에 누가 있을 것인가. 이제는 지워질 시간에 묻힌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설령 박우경 본인일지라도.

눈을 뜬 우경은 비겁하게도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차라리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막으라던 그의 말도,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의 죽음을 막고 싶다던 그의 강렬한 염원도, 그 어떤 것도 이뤄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미 방화 사건과 강현섭의 실종은 일어난 뒤였고, 우경은 자신의 비겁함이 역겨워 그대로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헛구역질했다. 이제 우경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대로 신류일을 찾아가 방화범의 신상을 알아내고 계획했던 것을 행동하는 것, 또 하나는 제 마음을 모두 내보이며 자신을 찾아오라던 그의 말을, 이제는 자신만 기억하고 있을 약속을 지키는 것. 이대로 도망치는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제가 나아갈 길이라곤 그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터질 듯이 고민한 끝에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 우경은 지금 자신의 선택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임을 알았다. 그때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미련과 후회가 평생 자기 발목을 잡고 늘어질 것을 알면서도 박우경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 지켜요, 형

기다릴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욕 먹이는 짓 좀 그만하고요.

그렇게나 사랑스럽던, 너무 사랑해서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은 정도인, 그렇지만 평생 못 본다고 생각하니 정작 박우경 본인이 죽고 싶어진. 박우경의 사랑이자 구원. 그 어떤 수식어들도 온전히 그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장재하,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달콤한 단어를 모아다가 붙여도 모자란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따위 후회와 미련쯤은 이겨낼 수 있을 테니까.

우경은 지금껏 선택을 망설이며 보낸 시간이 아깝고 혹여라도 이대로 사라지기라도 할까 초조해지기라도 한 듯 결정하자마자 가장 자연스럽게,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 상황에서 재하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본래 현섭의 부고는 맨션에 입주하고 일주일이 지나서 열린 첫 블루마켓 뒤에 알게 되었으니 재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맨션에서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틸 수 있었지, 지금은 그 어떤 준비도 희망도 없이 마른하늘에 벼락처럼 떨어질 절친한 친구의 부고에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우경이 아는 재하는 언제나 옳은 일을 행하고, 바른 정도를 걷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맨션에서도 현섭의 부고로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이긴 했으나, 이내 기운을 차리고 다시 자신의 일상을 꾸려갈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정도 많고, 다정하고, 그런 성격 탓에 위험한 상황에도 도망치지 않고 거리낌이 없이 뛰어든다는 단점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게 모여서야 박우경이 사랑하는 ‘장재하’가 완성된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흐려져 가는 맨션에서의 기억을 겨우 되짚은 뒤에야 재하의 학교와 현재 그가 머무는 곳을 떠올린 우경은 자신의 근무지와 얼마나 멀어지는지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제 거주지를 옮겼다. 솔직히 그 뒤로는 하늘에 맡긴 것도 어느 정도 있었다. 대략적인 위치만 들었지, 정확한 주소까지야 알지 못한 상황에서 우연히 빈방을 알아보러 부동산에 갔을 때 스쳐 지나가듯 제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재하의 모습이 보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재하를 마주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주변 다른 건물들보다 최근에 지어진 신축 건물이라 깔끔하고 시설도 좋다며 여러 자랑거리를 소개하는 공인중개사의 말을 흘려들은 우경은 다른 것들보다 건물 주변 골목길의 가로등의 상태나 CCTV의 각도, 건물 안 소방 시설 같은 것을 유심히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고, 재하가 지내는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장재하의 인생에서 이제는 사라진 프랭크 맨션 말고는 그 어떤 험한 일도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여전히 우경의 악몽 속에 자리 잡은, 살이 녹아내릴 만큼 뜨겁고 주변 모든 존재를 잡아먹은 새빨갛고 커다란 화마는 특히나 재하의 삶에 조금이라도 얼굴을 비추지 않길 바랐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가능한 최대한으로 이른 날짜에 이사한 우경은 습관적으로 달력을 바라보다 이제 며칠 후면 재하에게 전해질 현섭의 부고 소식 이전에 그와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사 첫날 간단한 먹을거리를 들고 옆집인 재하의 집에 방문했을 때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재하의 모습에 그만 저도 모르게 웃음을 숨길 수 없었던 건 이마저도 사랑이라는 말이겠지. 맨션 밖에서 만난 재하는 여전히 우경이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정했고, 따뜻했고, 반듯한 모습에, 남의 말을 꼬아서 듣지 않고 올곧게 바라보았다.

우경은 변함이 없이 여전히 동그란 뒤통수도, 생각이 많아지면 가만히 두지 못하는 손가락들도, 훌쩍 다가가면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감아버리는 두 눈도, 장난치기 좋아하며 시원하게 미소 짓는 입술도, 박우경이 좋아하던 장재하의 모든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하나하나 눈으로 좇으며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렇게나 그리워할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더라면 그때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후회가 되다가도, 만약 과거로 돌아온 게 자신이 아니라 재하였다면 지금 겪고 있는 이 끝없는 외로움도 그의 몫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지금이 더 나은 상황이라고 느껴졌다. 적어도 장재하는 이 외로움을 영원토록 모를 테니까.

되찾았으나 상실한 것, 여전히 사랑하지만 정작 사랑한 이는 알지 못하는 것.

이 답도 없는 상실감을 선택한 것은 오롯이 본인의 선택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마음을 시험하는 자신에게 제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며 돌아올 기회를 빼앗아 왔으니 이 정도는 견뎌야 하니까. 목숨 두 개를 빚으로 달고 있으니 말할 수 없는 마음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과거로 돌아온 뒤 달력을 보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유달리 크게 보이는 날짜를 확인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머지않은 어느 날. 재하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목숨 두 개의 값. 우경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에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이내 그 값은 흔들리는 재하를 옆에서 지탱하는 것으로 갚겠노라 합리화했다. 선배가 살린 목숨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누군가가 살린 것으로 인생의 큰 부분을 잃게 될 그의 삶을 채우면, 이 정도면 꽤 괜찮을 값을 치르는 것 아닐까, 홀로 자기합리화하며 애써 자신의 죄책감을 외면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재하는 자신의 대학 동기를 통해 전해 들은 현섭의 부고에 처음엔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았지만, 현섭의 장례식장에서 장난도 거짓도 아님을 깨닫자 크게 흔들리며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우경은 그런 재하에 바짝 타는 속을 애써 숨기며 힘들면 울어도 된다고, 갑작스레 떠난 누군가의 빈자리는 너의 탓이 아니라고, 지금 상황을 미워하고 그 사람을 원망해도 되지만 너마저 너를 놓지 말라고. 마음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그 속에 숨어버린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닿기를 바라며 간절히 소리쳤다.

우경은 지금껏 질리도록 많이 들은 위로들을 똑같이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 걱정 속에 담긴 마음 같은 건 지금까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던 마음 중에는 부디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이대로 스러지지 않기를 강력히 바랐다는 거 하나만큼은 세상 사람 그 누구보다도 절절히 알게 되었다. 나의 이기적인 바람이 당신을 힘들게 할지라도, 부디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절망 속에서 살아남아 다시 나에게 돌아와 주길.

재하는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뒤에야 눈 밑이 푹 파여 다 죽은 눈빛을 하고 당장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나와 우경을 마주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는 다 짓물러 빨갛게 부어있었고 안 그래도 마른 애가 살이 다 내려서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에 우경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어하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 그래서 그보다 먼저 재하와 만나려고 노력했던 거면서, 새삼스레 가슴 아파하는 자신의 모순에 환멸이 느껴졌다. 어쩜 매일 최악의 모습을 갱신하는 걸까. 우경은 제 입 안을 깨물며 쓰린 속을 참았다. 자신의 비틀린 모습이나 망가진 모습 같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재하에게까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속이 얼마나 문드러지든, 비틀리고 못난 모습을 가지고 있든, 재하에게만큼은 언제나 든든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지금처럼 언제나 올곧던 재하가 흔들리는 순간이면 더더욱.

끈질긴 노력 끝에 우경에게만큼은 곁을 내어준 재하는 어딘가 고장 난 로봇처럼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문득 어느 순간 눈물을 흘렸고, 거슬릴 게 없는 죽을 먹으면서도 입 안에 모래를 잔뜩 넣은 것처럼 한 술 제대로 떠서 넘기기도 어려워했다. 그런 재하의 곁에서 우경은 당장 혼자 둘 수 없다며 간단한 짐을 챙겨 재하의 집으로 들어와서는 그를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갑자기 소리도 없이 눈물이 흐를 때면 그를 품에 안고 달래주었고, 한 숟가락 넘기기 어려워할 때면 무리하지 말라며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차려주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이니 학교에 갈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그런 재하가 걱정이 된 그의 동기인 유리가 가끔 찾아올 때면 우경은 가볍게 인사하곤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직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우경은 옆집에 사는 형보단 가깝지만 그렇다고 연인이라고 소개하기엔 아직 이른. 그 어떤 관계의 정립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차마 재하와 그의 동기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들을 수 없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재하를 몰아붙여 우리 사이는 대체 뭐냐고 다그칠 마음도 없었지만. 그저 재하가 누군가에게 우경을 소개할 때 옆집 사는 친한 형으로 소개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뿐이었다. 언제쯤이면 당당하게 장재하의 옆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초조한 기다림이었지만 적어도 재하가 우경을 거부하지 않을 거란 작은 확신은 있었다.

이미 선의 경계를 넘을 듯 말 듯 행동하는 우경이 불쾌했다면 일찍이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재하는 자기 집에 밀고 들어오는 우경을 막지도 성큼 다가와 저를 품에 안는 우경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그 온기에 기대어 위로받고 조금씩 제 모습을 회복해가는 게, 우경에겐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손길이 훨씬 더 강력한 확신이었다. 맨션에서의 재하도 이렇게 서서히 사랑에 빠졌으니까.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조금씩 천천히 사랑에 잠식해가는 자기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하는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현섭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며 천천히 자신의 일상을 회복해갔다. 예전처럼 눈물이 툭 터지지도 않았고, 여전히 마르긴 했지만 이젠 끼니를 거르지도 않았다. 여전히 꿈에서는 없어지지 않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악몽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며 고른 숨소리가 잔잔히 어두운 새벽에 가라앉았다. 우경은 잠들지 못한 새벽 내내 재하를 바라보다 이제 어느 정도 회복도 됐으니 돌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새근거리는 재하의 숨소리가 자신의 적막한 새벽을 채울 때면 이만큼 달콤한 시간이 없어서, 제 손으로 직접 놓을 수 없어서 외면했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 이 안온함 속에서 가만히 재하를 끌어안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새벽을 보내고 싶었다.

여전히 눈을 감으면 모든 걸 삼키는 화마가 우경을 덮쳐오는 느낌이 들다가도 귓가에 재하의 숨소리가 들리면, 습관적으로 재하의 손목을 쥐고 둥둥 규칙적으로 울리는 맥박을 느낄 때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지금껏 들었던 그 수많은 위로보다 손에 잡히는 그 작은 것들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장재하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박우경의 불안과 근심을 가라앉혀주는 것이었다. 여전히 비틀리고 망가진 박우경이 완전히 부수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어 주는 유일한 지지대. 우경은 재하가 없었더라면, 맨션에서 마지막으로 해주었던 말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모습으로 떨어질 것임을 알아서 그는 이 자그마한 온기를 차마 스스로 놓을 수 없었다.

완전히 마음을 추스른 재하는 현섭의 유골이 봉안된 봉안당에서 마지막으로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가라앉은 그리움을 털어냈고, 다음엔 걱정 끼치지 않겠다며 씩씩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우경은 마음을 다잡는 재하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주었고 재하는 그런 우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눈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있었으나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우경은 이제는 한 발 멀어져야 할 때임을 알았다. 비 내린 뒤에 땅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재하는 이후에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어 한층 더 성장할 터였다.

그런 재하의 곁에서 아무런 관계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머물기만 한다면 훌쩍 멀어져 버릴 그를 알기에, 우경은 잠시 멀어져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다 앞서나가던 재하가 잠시 뒤돌아보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훌쩍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고백하려 했다. 좋아하고 있노라고, 네가 알지 못하는 순간부터 아주 오래도록. 너를 마음에 품고 있으니 부디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그리 말하려 했다. 이 모든 계획은 재하가 먼저 관계를 정의하지 않을 것이란 전제로 쓰였다는 게 우경이 미처 놓쳐버린 작은 흠이었다.

재하는 우경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단단했고, 한껏 절망하는 와중에도 성장하고 있었으며, 그리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었단 것을. 어찌하여 자신에게 다가오는 우경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품에 안겼는지, 재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그를 힘들게 하고 있었기에 아무나 붙잡고 위로를 받은 게 아니었음을 우경은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재하는 현섭의 봉안당에 다녀온 후 기운도 차렸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제 짐을 챙기는 우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무슨 사이예요?”

진실로 지금 이 관계가 헷갈려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재하가 먼저 말을 꺼낼 줄 몰라 당황한 우경이 놀라며 재하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이미 확신이 가득 차 흔들리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재하의 눈동자에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재하는 자신의 마음도, 우경의 마음도 모두 확신을 가진 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괜히 때를 노리며 물러서려는 우경에게 먼저 고백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준 것뿐이었다.

“좋아해,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고 있어 재하야.”

온 세상에 존재하는 어여쁜 말을 모아다가 고백해도 모자랄 판에, 우경의 입술을 타고 나온 말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상상 속에서는 어느 로맨스 소설이나, 아름다운 시 구절에서 나올 것처럼 한껏 유려한 문장이었는데, 실제로 말하려니 그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벅차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제 사랑을 고백했다. 재하는 우경의 투박한 고백에도 환하게 웃으며 자신도 우경을 좋아하고 있다며, 형이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며 먼저 두 팔로 우경의 목을 감싸며 온몸으로 그에게 안겨 왔다. 우경은 제 품에 안기는 재하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곤 다른 팔로는 그의 허리를 감싸며 조금의 빈틈도 없이 껴안았다.

조금만 힘을 세게 주기라도 하면 으스러질 거 같아서 손을 바들바들 떠는 우경에 재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우경의 뺨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살이 좀 빠지긴 했어도 그 정도 힘으로 부서질 만큼 연약하지 않다며 장난스레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 반짝여서 우경은 그대로 재하의 조잘거리는 입술을 머금으며 그가 내뱉은 모든 숨과 말을 빼앗았다.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재하의 뺨으로 옮겨져 있었고 점점 깊어지는 입맞춤에 우경의 몸이 앞으로 기울자, 반대로 재하는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위태로웠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우경의 목을 껴안으며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점점 벅차오르는 숨결에 재하가 급히 우경의 어깨를 치며 그를 밀어내자 우경은 미련이 가득 남은 듯 마지막으로 진득하게 재하의 입술을 핥은 뒤에야 떨어졌다. 제 품에 이마를 기대며 밭은 숨을 내쉬는 재하의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천천히 그의 귓가를 쓰다듬던 우경은 결 좋은 머리카락 위에도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사랑해 재하야.”

꿀에 절인 것처럼 다디단 목소리로 고백하는 우경에 재하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니, 우경은 그의 눈가 주변에도 입을 맞추며 다시 한번 더 고백했다.

“정말 많이, 내 모든 걸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 재하야.”

사랑한다는 말 이외엔 모든 언어를 잊어버린 듯 온통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우경에 재하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절절한 고백에 답했다.

“나도 사랑해요. 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이미 모든 걸 내어준 적이 있는 재하의 말에, 우경은 잠시 멈칫하며 굳을 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미소 지으면서 재하를 제 품에 끌어안으며 찬찬히 머리끝부터 목덜미를 지나쳐 어깨와 등허리가 닿을 때까지 쓸어내렸다. 마치 이 순간이 한순간 깨어질 꿈속은 아닐까 확인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느린 손길이었지만, 재하는 알지 못했다.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무척이나 행복한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재하의 동기인 유리가 두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면 초점을 흐리며 동태눈깔을 할 정도로, 남들이 보기엔 염병 천병 닭살을 풀풀 날리는 커플이었기에 온 세상이 핑크빛일 것만 같았지만 재하는 무어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절절했던 고백 이후로, 우경은 계약 기간이 한참은 남은 자기 집을 두고 재하의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동거를 시작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알 수 있었다.

우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안전에 민감했고, 그건 재하가 관련되었다면 곱절로 예민해져 그에게 자그마한 손톱만 한 상처가 남는 것도 볼 수 없다며 날을 세웠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친구와의 약속으로 늦게 들어가는 날이 있으면 30분에 한 번씩 연락이 오는 건 물론이었고, 실수로 우경의 연락을 받지 못하거나, 연락 없이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유독 재하를 몰아붙이는 것도 당연한 부분이었다.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재하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음을 모를 수 없었기에 재하는 최대한 우경에게 맞추어주려고 노력했다. 이 모든 것들이 우경 나름의 사랑 표현이라고, 너무 사랑해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우경의 마음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날따라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어서 그런지 새벽녘에 잠시 잠에서 깨어나 습관처럼 우경이 누운 쪽으로 파고든 재하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다시 잠에 빠지려던 순간. 일정한 박자로 제 등을 토닥이는 우경에 여태 잠자리에 들지 못했나 싶어 가물거리는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을 때, 잠기운 하나 없는 얼굴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우경의 모습에 재하는 제 발에 엉겨 붙은 찜찜한 느낌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사는 무언가가 속삭였다. 지금 우경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지금껏 설마 하며 넘겼던 순간들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솔직히 이미 알고 있던 부분 아니었냐고.

박우경은 언제나 장재하에게 달게 행동했다. 사랑에 빠져 다른 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재하의 대학 동기들도, 우경의 직장 동료들도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누군가는 그를 사랑꾼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재하에게 그리 사랑받으니 부럽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는 재하는 드물게 우경이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자신의 뒤로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을 할 때면 재하는 때때로 불안해졌다. 이 벅차오르는 사랑의 주인이 자신이 아닐까 봐, 제가 사랑하는 저의 연인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 봐. 그러면서 차마 직접 우경에게 물어보기엔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혹여나 제 불안이 사실일까 두려워 애써 눈 감고 외면하며 우경이 건네주는 사랑 한 톨까지 긁어모아 버겁게 품에 안았다. 설령 뒤늦게 남의 것임을 깨달아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게끔 힘껏 끌어안으며 그 속에 숨어들었다.

그렇게 점점 몸집을 불리던 불안은 그 새벽녘을 기점으로 터져 나왔다. 재하는 우경이 자기 자신에 대해 본인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할 때마저 사실은 오롯하게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음을 깨닫자 울컥 감정이 격해져 손가락 하나하나 얽혀있던 우경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제발 기만 좀 그만 해요!!”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 없던 재하가 감정에 북받쳐 소리치자 우경이 놀라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이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겨우 기도하듯 제 두 손을 마주 잡은 재하는 날카롭게 우경을 쏘아보며 말했다.

“형은, 형은 날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하면서, 대체 나한테서 누굴 보는 건데요.”

우경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형이 나를 통해 누굴 보는지 모르겠지만, 난 장재하라고요.”

단연코 재하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본 적 없었다.

“나는 누군가의 대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러니까 형도 제대로 봐요.”

다만,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장재하’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적은 있었다.

어쩌면 이미 없어진 존재를 자신이 붙잡고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멍청한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재하가 알아차릴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다.

“지금 형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내가 맞긴 해요?”

맨션이 없어진 후, 맨션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했음을 바보처럼 이제야 깨달아서 사랑만 주고 싶었던 재하에게 제 손으로 직접 상처를 주었음에 우경은 땅 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재하의 물음에만큼은 단호한 확신 어린 답을 내놓았다.

“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장재하 너밖에 없어.”

“그런데 왜 나는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데요.”

“그게 아니라, 꿈에서. 어떤 기묘한 저택에서 너를 만난 꿈을 꿨어.”

맨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상대에게 맨션을 설명하려니 뜬구름 잡는 말밖에 할 수 없음에, 뛰어나지 못한 제 말솜씨를 탓하며 우경은 어렵사리 맨션에서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개로 둘러싸인 커다란 저택과 그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축약하여 설명하는 우경의 말을 조용히 듣던 재하는 중간중간 설명하기 어려워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끝까지 설명하는 모습에 그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는 우경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완벽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큰 틀에서 맨션에서 벌어진 일들을 얘기한 우경은 중간중간 현섭의 부고를 미리 알고 있었던 점이나, 제 뿌리 깊은 트라우마 같은 내용을 숨겼지만, 결론적으론 현실과 혼동이 될 정도로 선명했던 꿈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라 얘기했다. 재하는 우경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요 몇 달 사이 현실처럼 선명한 꿈을 몇 번 꾸었던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이해를 한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어요. 그래도 전 형이 꿈에서 본 장재하가 아니에요.”

“나한텐 둘 다 똑같은 장재하야.”

“둘을 헷갈려서 나한테 꿈속 사람을 투영시킨 주제에 그렇게 말해 봤자 안 믿어요.”

“그건…….”

“그리고 설령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 형 옆에 있는 사람은 나예요.”

재하의 단호한 말에, 그제야 우경은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듯 또렷한 시야로 올곧게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꿈이랑 헷갈리지 말고, 그냥 형이 보는 그대로 나를 바라봐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프랭크 맨션이나, 괴이 따위는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우경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함께했던 경험을 잊었을지언정 언제나 그는 올곧게도 ‘장재하’였다. 왜 이 간단한 부분을 일찍이 깨닫지 못했을까 싶어 우경은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장재하가 아니었더라면 그 다정함이나 따스함 같은 걸 느낄 리 없었을 텐데도 꾸역꾸역 둘을 다른 사람 취급했으니 제 어리석음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나를 사랑해요?”

“사랑해, 너 아니면 당장 여기서 죽어버릴 정도로 사랑해.”

“다른 사람이랑 헷갈린 것도 아니죠?”

“내가 사랑하는 건 장재하 너야, 만약 내가 헷갈린 거 같으면 네가 날 죽여버려.”

과격한 우경의 말에 재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눈가를 찌푸렸고, 우경은 그런 다정함에 피식 웃으며 재하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깊게 입 맞췄다. 이제야 제대로 숨 쉬는 방법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장재하는 기억을 잃어도, 혹은 우연히 모든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 오더라도 언제나 박우경을 살아있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니지, 이젠 장재하가 없다면 박우경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한 치 앞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한 악몽 속이더라도 함께 쌓은 시간이 존재한다면 우경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이정표는 언제나 이곳에 존재함을 알기에, 사실 이 모든 건 백일몽의 탈을 쓴 악몽이 아닐까 하는 자신을 좀먹는 불안함 따위는 이겨낼 수 있었다. 장재하는 살아있다. 숨 쉬고 움직이고 환하게 웃기도 하면서 제 옆에 있다. 그 어떤 화마도 그를 덮치지 않았다.

“그런데 형, 혹시 잠을 제대로 못 자요?”

“응?”

갑작스레 자신의 수면 상태를 묻는 재하에 우경은 이해를 다 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하는 잠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단어를 고르는 것 같더니 이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저번에, 새벽에 형이 잠을 안 자고 날 바라보는 걸 알게 된 적이 있어요.”

“아,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때 꼭 내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보는 거 같아서….”

생각도 깊고 눈치도 빠른 장재하는 박우경이 숨긴 자신의 트라우마 일부마저도 금세 눈치채곤 조심스레 제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내놓았다.

“형이 그런 걱정 안 할 수 있게, 내가 형 잠들 때까지 재워줄게요.”

“하하, 재하가 형을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는데.”

“아니면, 한국에서는 법적 효과는 없지만. 우리 결혼할까요?”

“뭐?”

우경의 트라우마 밑바닥은 방화와 같은 타인의 악의가 일으킨 사고로 인한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완전한 상실이기에 재하가 말한 것들이 완벽한 해답은 아니었지만, 굳이 중요한 부분에 방점을 찍는다면 방화와 같은 사고보단 훨씬 뒤쪽에 있는 ‘상실’이었다. 그저 연인이란 이름으로서 묶어두는 관계가 얼마나 느슨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경이기에 언제나 이대로 재하가 제 손을 놓아버리고 떠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불안했던 날도 있었다. 저 자신조차 티 내는 줄 몰랐던 그 불안을 재하는 결혼으로서 해소해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재하는, 형이랑 평생 같이 살 자신 있어?”

깊은 곳에서 올라온 울음 때문에 목이 메여서 답답한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우경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재하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얼마나 비틀리고 망가졌는지 모르고 있으므로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언젠가 이 모든 걸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냐는 우경의 물음에 재하는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평생 같이 살 사람 아니었으면 동거도 안 했는데요?”

“하하하……, 재하 너무 고지식한 거 아니야? 동거했다고 다 결혼하려고?”

“뭐라는 거야. 형이니까 동거도 했고, 결혼도 한다는 말이거든요.”

이토록이나 명쾌한 답변에, 우경은 다른 것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하를 제 품으로 끌어와 품 안 가득 안으며 말했다. 좋다고, 제발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언젠가 자신이 추태를 부리는 날이 오더라도 그냥 한숨 푹 내쉬고 부디 버리지 말고 데리고 살아달라고.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날처럼 꾸밈이라곤 하나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지만, 그 모든 말들이 사랑임을 알고 있는 재하는 한숨처럼 웃어 보이곤 어떤 순간이 와도 자신이 우경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끔 찌질하고, 가만히 바라보면 못난 모습도 보이고,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지만, 그걸 여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능글맞은 성격이나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숨겨둔 주제에 사실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는 이 사람의 모든 부분을 사랑해버려서,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장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기껍게 품에 안을 생각이었다. 장재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당장 죽어버리겠다던 박우경의 말이 그가 하는 사랑의 증명이라면, 박우경의 어떤 모습도 품어주고 그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게 장재하가 하는 사랑의 증명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존재함으로 서로에게 사랑의 증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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