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맨션

기분은 파랑

re-claim 1. <권리·소유물 등의> 반환을 요구하다; 되찾다, 회수하다

* 본 이야기는 '리클레임'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듣는다면 기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오지욱은 자신의 삶을 무저갱 속에서 헤매는 이방인 정도쯤으로 생각했다. 타인의 시점에서 오지욱은 부러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을 모아 만든 결정체였다. 제가 가진 미술적 재능도 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겠지만,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것. 예를 들면 줄줄이 예술가를 배출한 어머니의 집안이라든가, 아니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흔히 재벌이라고 부르는 아버지 집안이라든가. 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부러워했기에, 그 위에 피워낸 모든 것들을 오지욱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런 뿌리를 가지고 있다면 응당 내보일 수 있는 결실쯤으로 생각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남이 가진 것,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더욱 크게 생각하는 편이다. 오지욱 역시 그런 ‘사람’이었기에 자신에게 없는 걸 갈망하는 건 당연했다. 물질에서는 더는 원하는 것이 없었기에 그가 그 무엇보다 원했던 건 아주 추상적인 무언가였다. 누군가의 치열한 노력 끝에 자신만이 확립할 수 있는 정체성이라든가,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는 올곧은 마음이라든가.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이야기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이라든가. 주는 사람은 알 수 없지만 받는 사람은 명확히 알 수 있는 그런 추상적인 것을 원했다.

하지만 타인을 바라볼 때 그를 이루고 있는 것을 완전히 떼어놓고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특히 오지욱처럼 너무나 화려한 배경에 본질이 묻히는 경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재능으로 피워낸 자기 작품마저도 온전히 바라보지 않고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니.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를 갈아서라도 자신을 증명해내고 싶은 오지욱의 발악은 본인이 멈추고 싶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첫 개인 전시회를 완판으로 끝내고 기쁨 뒤에 오는 허망함이 얼마나 커다란지 깨달은 어느 날.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이젤 위에 놓인 그의 정체성을 두고 몸부림을 치던 어느 날. 자신의 팬이라며 전시회 팜플렛과 함께 찾아온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던 어느 날. 오지욱은 그렇게도 원하던 것을 손에 쥘 수 있던 그런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의 지인도, 아버지의 관계자도 아닌 대학생 장재하를 만났던 날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조금 다른 날이었다.

평소처럼 여태 완성하지 못한 제 ‘정체성’을 앞에 두고 며칠 밤을 새운 덕에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습관처럼 이메일을 확인하던 때였다. 으레 자연스러운 인사말로 시작한 메일 내용 역시 특별한 건 아니었다. 혹여나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까 걱정이 담긴 어투로 자신을 평범한 대학생이라 소개한 메일 속 사람은 이번 전시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축하한다면서, 우연한 기회로 지욱의 그림을 접한 뒤 팬이 되었다며 조심스레 본론을 꺼내놓았다. 이번에 뉴욕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혹시 작업실에 한 번 방문할 수 있는지 아주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물음에 평소의 지욱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이번엔 그냥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서 흔쾌히 허락의 답을 담은 답장을 보냈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없었기에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뚜렷하고 확고한 지욱으로서는 무척이나 뜻밖의 결정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공간에 타인이 방문한다는 불쾌한 감정보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설렘과 기대로 들뜬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자신의 캘린더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일정을 추가했다. 마치 몇 달 전부터 그러기로 되어있던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로.

며칠이 흘러 재하가 뉴욕으로 건너오던 날도 역시나 지욱은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가며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는 당연하다 싶은 밤샘 작업에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재하의 연락이 오기 전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생각도 했지만,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누워봤자 뜬 눈으로 뒤척일 게 뻔해서 그냥 최대한 버티다 재하를 보내고 수면제 몇 알 씹어먹은 뒤 선잠이라도 들 생각이었다. 무언가가 찌르는 듯 아픈 머리도, 피곤해서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야도, 지면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것 같은 몽롱한 정신도, 이상하게 ‘장재하’만 생각하면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나 필사적일 만큼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뭘까 혼자 추측하고 끼워 맞춘 끝에 겨우 본인 스스로 납득이 가능한 결론을 도출해낸 게, ‘오지욱’에게 아무런 의도 없이 다가온 처음이자 마지막일 사람이라서였다.

팬이라는데, 내 그림을 좋아한다는데, 그 사람 앞에서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당연한 거 아니냐며 본인 자신에게 설득하는 꼴이라 좀 우습긴 했지만, 지욱은 최대한 멀끔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 끝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에서 벗어나 겨우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재하를 맞이할 수 있었다. 지욱은 작업실 이곳저곳을 소개하며 무의식적으로 재하를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저를 바라보며 환히 웃는 재하에 순간이지만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으로 바뀌어 망막에 새겨지는 것처럼, 지욱에게 재하의 미소는 그런 의미였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래.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같았다.

간단한 소개를 끝내고 손님으로 방문한 재하에게 마실 것이라도 내어주겠다며 2층으로 올라간 지욱은 잠시 커피 머신을 예열하는 동안 여태껏 참고 있던 두통이 한 번에 몰려와 몸을 웅크린 채 한 손을 올려 제 이마를 감쌌고, 그 순간 시야가 까맣게 변하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 장재하 걱정할 텐데.

재하는 지욱의 손을 가득 탄 작업실을 꼼꼼히 구경하다가 문득 지욱이 2층으로 올라간 뒤로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달았다. 피곤과 피로가 가득 매달고 있던 지욱의 눈이 기억나 걱정이 되어 스마트폰을 꺼내어 문자를 보내었으나 확인도 하지 않자 당장이라도 올라가 봐야 하나, 슬쩍슬쩍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시선을 주고 있을 때였다. 작게 우당탕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울려 퍼졌고, 재하는 빠르게 계단을 오르며 속으로 지욱을 탓했다. 하여튼 오지욱 손 드럽게 많이 간다면서.

뉴욕에서 누군가의 병간호를 할 거라곤 약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오자마자 할 줄은 몰랐던 재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최대한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지욱이 안쓰러워 그의 이마를 살살 쓸어준 뒤,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어주곤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준 다음 조심스레 침실을 벗어나 아까 유독 자세히 봐두었던 ‘정체성’이 있던 곳으로 몸을 옮겼다.

미완성된 그림은 ‘오지욱의 정체성’답게 그의 모습 한 조각을 옮겨놓은 듯 어딘가 닮아있었고, 마저 채우지 못한 부분은 증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노력과 발버둥과 끝끝내 놓을 수 없는 미련이 치덕치덕 발려있었다. 재하는 그 그림을 천천히 손으로 훑으며 그곳에 담긴 지욱의 마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놓고 싶지만 놓을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제 망막에 그림을 새겨넣었다. 이제 오지욱의 마지막 미완성작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장재하 단 한 사람일 테니까. 손끝으로 꼼꼼히 훑고 세세한 부분까지 머릿속에 그려 넣은 재하는 망설임 없이 주변에 있던 페인팅 나이프를 들어 지욱의 미련을 끊어내었다.

아주 오랜만에 깊게 잠이 들었던 지욱은 쿡쿡 쑤시는 눈가도, 지끈거리던 머리도 말끔히 나아 지금이라면 그림을 완성할 수만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가벼운 몸으로 이젤 앞으로 간 순간이었다. 분명 자신 이외에 어느 사람도 건드릴 수 없어야만 하는 그림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채 자신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오늘이야말로 그림을 완성하기 딱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새하얘진 머릿속에 재하의 모습이 떠올랐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지욱은 지금껏 얌전하던 말투를 집어치우며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씨발 너 미쳤어??”

갑자기 걸려온 전화와 난데없는 욕설에도 재하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이 인간 일어나자마자 그림 그리러 갔다며 속으로 쯧 소리를 내며 잠시 귀에서 떨어트렸던 스마트폰을 다시 얼굴 옆으로 가져가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지욱 작가님, 아직 쉬셔야 하는데요.”

“그림 망쳐놓고 태연하게 쉬라는 말이 나와? 씨발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변상할게.”

“변상? 대체 뭐로? 돈으로?”

그 오지욱이 그린 그림을 망쳐놨으니 분명 엄청난 것을 내놓아야 할 게 분명했으나, 재하에겐 그 어떤 것보다 쉬운 것이었다. 지욱이 그림으로서 얻으려고 했던 것, 그가 평생을 걸쳐 가장 바라고 소망했던 것. 그것을 재하는 마땅히 내어줄 생각이었기에 조금의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툭 내놓을 수 있었다.

“글쎄, 평생 옆에 있으면서 갚으면 되는 거 아니야?”

항상 남이 쥐여주는 것만을 가져왔던 오지욱에게, 평생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을 가져본 적이 없던 오지욱에게,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에서 헤매던 오지욱에게, 장재하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 자신과 마음과 영혼 모든 것.

재하의 말에 씨근덕거리던 지욱은 겨우 진정하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 재하는 그림의 값으로 자신의 인생을 주겠다고 얘기했다. 온전히 자신만 가질 수 있는 것,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 오지욱의 장재하. 지욱은 이 거래가 말도 안 되고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껍게 속아주는 마음으로 그를 곁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어디야.”

“너 줄 물수건 만들어서 가는 길인데”

“빨리 튀어와, 그리고 너. 제대로 변상할 때까지 아무 데도 못 갈 줄 알아.”

바라시는 대로. 얼핏 들리는 재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지욱은 몸을 돌려 다시 침실로 돌아가 몸을 뉘었다. 그렇게나 자신을 괴롭히던 증명에 대한 욕심이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지금 앞으로는 무엇을 그려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묘한 후련함이 느껴졌다. 완전히 제 손에서 그림이 떠난 뒤에야 그곳에 묶여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재하가 미안함에 어설프게 망쳐놓았다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 감정에 속 시원하게 인정하고 내일부터는 다른 그림을 그려야겠다, 마음먹은 지욱이었다.

지욱의 미련을 끊어버린 재하는 그 뒤로 지욱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고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여행객 신분으로 뉴욕에 방문했던 터라 나름 넉넉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던 귀국일도 어느 순간 성큼 다가와 비자 문제라던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러 한국에 들어가야 했을 때도, 지욱은 당당하게 평생 옆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자신의 비행기표까지 끊고는 같이 한국에 들어와 재하의 집에 머물기도 했었다. 재하의 오랜 친구이자 형제와도 다름없는 현섭과 같은 과 동기인 유리를 소개받고, 그의 가족들과도 인사하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재하의 연인을 넘어 예비 남편쯤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걸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재하의 모든 인간관계에 자신의 얼굴도장을 박아넣었다.

그런 와중에 또 당연하다는 듯 지욱은 자신의 가족에겐 재하를 소개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이미 다 파악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게 1번이었고, 장재하는 자기만 알면 됐지 굳이 남들에게까지 알리고 싶지 않은 게 2번이었다. 오히려 재하가 나서서 부모님께라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말했을 때도, 나중에 직접 뉴욕에 오시면 그때 소개해도 늦지 않는다며 자신을 흘겨보는 재하를 품에 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지욱이었다. 재하는 그런 지욱을 슬쩍 째려보다 이내 얕게 한숨을 쉬곤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손으론 지욱의 머리를 찬찬히 쓸어내리고 다른 한 손으론 그의 허리를 두르며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어렵사리 되찾은 그의 안온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쉽게 끼니를 거르고 동시에 그에 대한 스트레스로 불면에 시달리는 지욱을 알게 된 재하는 가장 먼저 그의 생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엔 화도 내보고 싸우기도 했지만, 붓만 들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형태에 재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비척거리며 겨우 이젤 앞을 벗어난 지욱에게 선언했다. 같이 먹고 같이 자든가, 아니면 둘 다 안 먹고 안 자던가. 한 번 끝장을 보자. 저 자신의 건강은 거의 없는 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하던 지욱도 재하의 건강만은 끔찍이도 생각했는데, 오죽하면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닫으며 아주 작은 혼잣말로 춥다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도 겨우내 여름처럼 살 수 있도록 온갖 방한용품이며 온열 기구를 주문해 한가득 쌓아두는 것은 애교일 정도였다.

골때리는 지욱의 행동에도 재하는 그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자신의 답 없는 콩깍지를 탓하며 평소에도 잘 챙기지만, 지욱의 앞에선 더욱 유난스럽게 건강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알콩달콩 지내오던 차에 내려진 선언이었다. 재하의 말에 지욱은 거의 지금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듯 표정이 무너지며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며 따졌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은 재하는 앞으로 자신의 모든 생활 패턴을 지욱에게 맞추겠다고 얘기했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 순간 매초 옆에서 붙어있으며 모든 것을 함께할 것이라고, 이대로 같이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오래오래 같이 살든가, 아니면 이대로 단명해서 같이 죽든가 고르라며 극단적인 선택지를 내미는 재하를 이길 수 없던 지욱은 자신이 재하의 생활 패턴에 맞추겠다며 제 고집을 꺾는 것도 이제는 일상의 모습 중 하나였다.

재하가 본인을 지욱의 손에 쥐여준 뒤로 그의 예민한 기질은 한풀 꺾인 기세였지만, 요즘 문득 이상한 기시감을 느낄 때가 많아졌다. 언제라고 콕 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 없이 쓰던 립밤이 재하의 손에 들어갔을 때라든가, 첫 개인전 팜플렛이 우연히 시야에 들어올 때라든가 하는 그런 일상 속의 어느 순간에 아주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듯이 운명이 강하게 내지르는 소리처럼. 지욱의 기시감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고, 그 모든 기시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연결되는 곳에는 재하가 있었다.

요즘 부쩍 지욱이 이상해졌다. 맨션에서의 일을 모조리 잊어버려야 함이 당연한데, 지금껏 그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는데. 맨션에서 둘이 겪었던 일과 그 당시의 물건들과 관련된 것이 시야에 들어오면 눈에 띄도록 행동을 멈추고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재하는 눈가를 찌푸리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나누었던 시간과 감정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그것들을 혼자 기억한 채로 새로운 감정과 관계를 쌓아 올린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일방적인 친밀감에 예민한 지욱이 경계하고 돌아서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날도 있었고, 뭐 솔직히 좋지 못한 기억들이 많았지만, 그 끝에 맞닿은 서로의 감정과 약속을 혼자 기억함에 외로웠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불구하고 재하는 결과론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지욱에게 돌아왔음을, 이번에도 다시 서로가 맞닿았음을. 그 어떤 괴이가 다시 자신의 앞을 막는다고 하여도 그것만 생각하면 재하는 어떤 어려운 미로 한가운데로 떨어져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의 도착지는 언제나 그의 옆이었으니까.

지욱의 오랜 기시감은 무척이나 허무하리만큼 쉽게 풀렸다. 여느 당연한 일상들처럼 재하와 같은 침대에 누워 그를 품에 안고 깊게 잠이 들었을 때. 수상하리만큼 짙은 안개 속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의 일이 꿈에서 빠르게 흘러갔기에, 그는 과거이자 지나간 미래의 순간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감상할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은 빨리 감기를 누른 것처럼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가고, 또 어떤 부분은 현실인 것처럼 무척이나 느리게 지나갔기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단 하나만큼은 매우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제 마음 하나 자각 못 하고 철없게 굴던 모습이나, 미친놈 소굴에서 제발 몸 사리라며 악을 쓰던 모습이나, 네가 소망하는 것이 이뤄지길 바란다며 억지로 손에 쥐여준 것들까지. 그 모든 것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사랑임이 틀림없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지욱은 곧바로 자신의 품에 안겨 규칙적인 호흡을 내쉬는 재하를 바라보다 그의 왼손을 끌어와 네 번째 손가락 위에 작게 잇자국을 내었다. 오지욱과 장재하가 서로를 소유하는 데에 있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한 번도 같은 것을 나누어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흔한 커플링마저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 대신이라는 듯 재하의 왼쪽 손 네 번째 손가락 위에 새겨진 잇자국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지욱은 그 위로 짙게 입을 맞추었다. 일방적인 약속을 지켜준 재하를 향한 고마움과 사랑스러움이 넘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욱은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속으로 맹세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놓치지 않겠노라고.

‘누가 그림값으로 자기 자신을 줘, 딱 봐도 밑지는 거래잖아.’

이토록이나 올곧고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장재하.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이던 지욱은 아직 이른 새벽임을 확인하곤 마지막으로 재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에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면 반지 사러 가야지.’

스스로와 하는 작은 약속을 하나 만들어두곤.

오지욱의 장재하를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되찾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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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놀라는 소라고둥

    으아악 너무 달달해요.. 너무 좋아요 지욱이가 결국은 모든 걸 기억해서 둘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까지 너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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