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오리진 로그 - 러닝중
찰나의 순간은 참 많은 것을 감내하게 만든다. 한서율은 문득 눈 앞의 사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천히 닿는 자리가 넓어질수록 새겨짐도 계속된다. 그 생소한 기분이 참으로, 어쩔도리 없이 기쁘다는 점이 여러모로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뺨을 쥐고 매만지며, 천천한 시선을 느긋하게 돌린다. 적막이 가득한 공간은 아까와 사뭇 다른 공기가 흘렀다. 한 마디정도는 커다란 손이 제 손을 떼낸다. 사소한 접촉에도 시선이 따라붙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아, 이건. 조금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생소한 긴장감과 묘한 박동감 속에서 애써 그런 변명을 자아내본다. 피부에 닿는 보드라운 담요의 감촉에 시선이 아래로 향했으나, 기어코 상대에게 붙잡힌다. 가만가만한 시선을 들고 눈동자를 맞춰본다. 옅은 청회색의 눈동자를 오늘따라 유달리 많이 마주한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코 끝에 닿는 다정한 숨결에 재차 눈이 감긴다. 찰나의 어둠이 시야를 잠식했으나 그럼에도 상대의 존재감만은 지나치게 또렷하다.
다정한 말이 귓가에 떨어진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신의 마음을 감싸기만 할 뿐인 말들 뿐이라서, 한서율은 저도 모르게 감정이 요동친다. 담요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해묵은 과거를 상기 시키는 물건을 매만진다. 갈작, 손톱으로 문지르다가 이윽고 감추듯이 꾹 말아쥔다.
마음가는대로, 던졌다가 무슨 꼴을 당했더라. 허나, 지금 이 단단함을 믿고 싶어지는 자신이 존재한다. 충돌하는 마음은 한서율의 고민을 가속화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말리부, 당신이 꼭 그리 되어 줄 것처럼 굴고 있는 건, 아십니까.”
믿음은 쉽게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그것이 깨졌을 때의 파장은 크다. 한서율은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존재하나, 그 때문에 잃은 것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덤덤하게 웃는 입매를 본다. 질문이 아닌 말을 상대에게 던져본다. 어쩔도리 없이 자꾸만 비겁하게 굴게 되는 스스로가 참 비참하고 우스웠다. 입매가 비틀렸으나, 당신의 품에 고개를 묻는 것으로 그것을 무마시킨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안도감도 있었다.
“약속하셨습니다.”
작게 품에 묻힌 채로 그리 말하기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당신과의 최초의 약속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천천히 담요 위를 도닥이는 일정한 손길에 절로 가물한 눈이 감긴다. 깜빡 깜빡, 무거운 눈꺼풀이 여러번 뜨였다 감기길 반복한다. 안경을 벗긴 해야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품에 옴짝 갇힌 몸을 딱히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음엔, 제가 먼저 보고 싶습니다.”
반쯤은 잠에 취해 몽롱한 목소리로 혹여나 있을 다음을 기약해본다. 이윽고 입술 새에서 깊은 날숨이 새어나오며 천천히 고른 호흡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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