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L

02. -하는

오리진 로그 - 고록

창고 by 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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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의 귀를 기울여본다. 천천하고 다정한 그 목소리와 음색이 이제는 제법 귀에 착 감긴다고 한 서율은 문득 생각한다. 크루즈 안의 공기는 답답했으며, 때로는 후덥지근 했고 때로는 바다내음이 새삼 강하게 나곤 했다. 그런 공기 중에 섞인 당신의 체향을 찾아낸다. 예민하지 않은 후각은 자연스레 그를 따라갔으며, 기어코 당신을 찾아낸다.

“그래요. 기억납니다. 사진을 같이 보지 않았습니까.”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 때의 시간은 충동적이었고 즐거웠으며 또 충동적이었다. 타인에게 스스로가 가진 아픔을 내보이는 작업이 한 서율에게는 제법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머뭇거리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이야기를 한 상대가 말리부, 당신이어서 다행이라고 한켠으로는 생각해본다.

제 손가락에 남은 것을 매만져본다. 지난 흔적을 기억해주는 물건이라곤 그것 뿐이었으며, 그것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음도 알고 있다. 처음으로,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상대는 눈 앞의 사내 뿐이다.

탐이 난다, 자꾸만.

눈 앞의 사내를 온전히 제 소유로 만들고 싶었고 닳고 닳은 인내심은 종지부를 찍으라고 종용하고 있다.

제 말을 오롯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당신을 보고 새삼 즐거운 기분이 든다. 쥐고 있는 손에 더 강한 힘을 주었고, 기어코 당신의 입에서 나온 문장이 한 서율을 무장해제 시킨다.

내기에서 제가 이긴다면 서율씨의 약지에 있는 반지... 그거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비겁한 한 서율은 이번에도 당신의 손을 빌어본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건지 혹은 아닌지, 이제는 알 길이 없었다. 오히려, 한 서율 스스로가.

밀폐된 공간이 주는 안정감에 자연스레 몸이 긴장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잠시 가늠해본다. 천천히 곧은 등을 세워 상대를 바라본다. 유순한 눈동자는 여전히 저를 따라나니고,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그에 갈증이 나는 것은 자신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

욕망하는 것.

당신과 나는 그것이 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긴 말을 해야할지 아니면 짧은 말로 괜찮을지 영 어려운 문제였지만 영리한 당신은 알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본다. 한 서율은 두 팔을 뻗어 단단한 목을 끌어안는다. 순순하게 제게 내어주는 커다란 품을 가득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본다. 둘 뿐인 공간이건만 어쩐지 쑥쓰럽고 어려운 기분이었기에.

“-말리부, 내기의 댓가가 아니라도 당신이 이 반지를 빼주면 좋겠습니다.”

태연하고 뻔뻔한 어조를 가장해 물어본다. 당신의 손을 들어 제 왼 손에 올려본 채 지긋이 당신의 표정을 살핀다. 이 문장이 시사하는 바를 당신이라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금은 둔한 당신에게 말을 더 흘려보기로 결정한다.

“사랑하는 당신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자아낸다. 조금은 떨리고 쑥쓰럽고 다소 충동적인. 그런 단어들이 한 서율의 입에서 툭,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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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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