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L

03.

오리진 로그 - 첫번째 대화 이후

창고 by 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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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에 한서율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굴러가던 시선이 이윽고 한 곳에 머무른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공간이었다. 애초에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 아니던가. 머리를 받치고 있는 팔걸이에 목이 바짝 뒤로 넘어간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색이 다소 다른 탓이었다. 아, 짧게 탄식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허리에 느껴지는 둔통과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뻐근함에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서율 씨.”

“말리부.”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 챈 한서율은 고개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옮겼다. 바지런히 움직이던 상대가 금세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제법 달갑다. 똑같이 몸을 구기고 잠을 청했건만, 체력이 남다른건지 아니면 저가 더 힘들었던건지. 어느새 깨끗하게 닦인 몸과 심지어는 옷까지 입혀져 있는 제 모습에 짧은 감탄이 터질 따름이었다.

“새벽인 거 같은데. 맞습니까.”

창 밖으로 보이는 빛은 아침의 햇살과 닮아 있었다. 간 밤, 그러니까 한 밤중도 아닌 시간에 들어와 거의 밤을 꼴딱 새고, 기어코 아침이었다. 샤워실과 침대가 있음에도 거사를 치르고 소파에서 잠든 모양새가 참 우습기도 했다.

“지금, 그렇군요. 마침 7시를 지난 참입니다.”

“벌써요. -약속은 지키셨습니다.”

“예. 깨어나도 곁에 있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제 표정을 살피는 진중한 시선에 절로 눈길이 간다. 한서율은 빤하게 옅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가만가만 말리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길이 잘 든 짐승마냥 제 손바닥에 뺨을 묻고 입술을 부비는 일련의 행동을 눈으로 담아본다.

“불면증이 있다고 했는데, 믿지 못하시겠군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여상한 어조로 한서율이 묻는다. 손바닥에 고개를 묻고 가만한 시선을 맞추고 있던 말리부는 그 말이 퍽 재밌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린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회사는 고요했으며 심지어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는 실장실은 한층 더 조용했다. 그 안에 울리는 목소리가 제법 듣기 좋았기에 한서율은 노래라도 듣는 듯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오, 어찌나 뒤척이시던지. 재우느라 혼났습니다.”

그랬던가. 그랬겠지. 상대가 그렇다고 하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간 밤과 같은 부끄러움과 쑥쓰러움은 내비치지 않은 얼굴이지만, 그렇다고 민망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애당초 누군가와 같이 잠드는 것이 퍽 오랜만이기도 했고.

한서율은 민망함에 제 눈썹 사이를 슬쩍 문질렀다. 아이를 재웠다는 듯한 뉘앙스가 부끄럽고 조금은 수치스럽다. 그제야 민망함에 열이 몰리는 기분인지라, 한서율은 고개를 모로 살짝 틀며 테이블 어딘가를 지긋하게 바라본다. 절로 그의 시선을 따라간 말리부는 테이블 위로 향한 것을 깨닫는다.

“-어제 마시던 병이랑 잔은 다 치웠습니다. 업무도 하셔야하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세지려던게 아니었는데.”

충동.

강한 충동으로 이뤄진 어제의 행위에 후회는 없다. 당신이 보여줬던 그 모든 감정과 날 것의 행위들을 믿어보기로 한다.

 

한서율은 제 휴대폰을 쥐고 깔짝깔짝 매만지다가 슬그머니 말리부 쪽으로 건낸다. 잠금화면을 풀고 버튼이 드러난 휴대폰을 보는 상대에 얼핏 웃음을 지어 입꼬리를 당겨본다. 개인번호를 알아내는 것에 어려움은 없으나, 굳이 말리부에게 요구해본다.

“당신의 의지로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당신 생각이 날 때마다 문자를 보내지 않겠습니까.”

괜한 변명을 보태며 슬쩍 휴대폰을 흔들어보인다. 재촉하는 듯한 행동이 사탕을 조르는 아이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리부는 휴대폰을 쥐고 번호를 꾹꾹 누른다. 저 커다란 손이 한서율 자신에게 참 많은 위로를 주었지. 그런 생각은 덤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서율 씨도 번호 알려주시죠.”

“그냥 통화 버튼 눌러도 괜찮았는데요.”

“-서율 씨가 직접 저한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참 비슷한 점이 많아서 바라는 것도 비슷한 걸까. 단정하게 건내진 휴대폰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서율은 천천히 번호를 하나씩 눌러보인다. 새삼 화면에 뜨는 제 번호가 낯설었다. 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번호를 알려준 적이 오랜만이어서 그런걸까.

“귀한 번호입니다.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서율 씨도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새삼스레 내려본다. 11자리의 숫자로 이루어진 번호가 새삼스레 한서율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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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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