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여명] 합연기연
"뭐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온 여명이 한숨 쉬듯 말했다. 침대 근처의 서랍에 등불을 켜놓고 책을 읽던 시화는 고개를 들어 여명을 힐끗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런했던 이불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네. 오늘은 좀 늦었네요. 아, 수건이랑 옷 저기에."
"어어, 알았어. 간만에 친구 좀 만나느라..."
"여명이 우리 말고도 친구가 있었나요?"
"어. 남자만 10명 만나고 왔다."
"하하, 어느 일족인지 참 궁금하네요."
별난 일이라는 듯, 여명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시화에게 책을 몇 권 건넸다.
"뭐야,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 이거. 저번에 말했던 거야. 어렵게 구했다."
"고마워요. 옷 줘요."
여명이 겉옷을 벗어 시화에게 건넸다. 겉옷에선 평소와 달리 아주 미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옷을 개며 잠깐 냄새의 정체를 고민하던 시화의 시선이 여명의 손목으로 향했다. 왼쪽 손목에 못 보던 팔찌가 있었다.
"근데, 못 보던 장신구네요?"
"아, 그거. 간만에 만난 친구가 선물한..."
별생각 없이 시화가 가볍게 여명의 팔찌를 당기자, 여명이 황급히 팔을 자신의 몸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반쯤 돌려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기가 달라졌다. 눈에 띌 정도로 눈빛이 차가워진 시화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여명의 왼쪽 손목을 훑었다. 여명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감으로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파요?"
"아니."
"근데 왜 방금 팔을... 고개 돌리지 말고 이쪽 좀 봐요."
"별거 아냐. 나 좀 씻고..."
황급히 여명이 옷과 수건을 챙겨 방을 나가려 했으나, 시화의 말이 먼저였다. 여명이 말없이 시화를 바라보았다.
"능력 사용한 거죠. 쓰기 전에 알리기로 했잖아요."
"야, 아니야. 손목은 그냥..."
"피 냄새 나는 거 알고 있어요? 그때 분명히..."
시화가 뭐라 말하려는 듯 고개를 빠르게 들었으나,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결혼 후 어떠한 상황에서든 둘 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주제가 있었다. 4년 전의 그날이었다.
광휘의 소멸을 두려워했던 시화의 우려와 달리, 오방신 중 가장 먼저 죽을 뻔한 이는 다름 아닌 여명이었다.
황룡경합을 무사히 치르고 륜의 즉위식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 동천 주인을 처리하고 원로들까지 청소한 후, 각자의 계획에 빠져있을 때였다. 아직까지도 이 짓을 해야하냐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은근히 들뜬 마음으로 서류를 정리하던 나날. 머리 높이까지 쌓인 서류를 보면서도 농담을 나누며 웃을 수 있던 날이었다. 6대 오방신에 대한 걱정과 자신들의 은퇴가 가까워졌음을 실감하며 얼마 남지 않은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아, 진짜 재수도 없지. 하필 너랑 올 게 뭐야."
"다른 일 더 하다가 노을이랑 올래요?"
"가자, 빨리..."
여명과 시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 다른 마을에 가 있었다. 마침 일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은 시화와 여명뿐이었고, 그리 위험한 임무도 아닐 것 같았다. 밤도 되기 전, 저녁쯤의 시간. 후딱 끝내고 밥이나 먹자. 여명이 피곤한 눈빛으로 서류를 훑었다.
"달산 주변이네? 달산이면, 너 전에 다쳤던 곳 아니야?"
"네. 그치만 달산에 가는 것도 아니고... 뭐, 그리고 여명과 같이 가잖아요?"
"그렇긴 한데, 조심해. 괜히 은퇴 앞두고 다쳐서 좋은 날에 붕대 감고 있지 말고."
여명이 키득거리며 시화의 양쪽 볼을 잡아 밑으로 살짝 늘렸다. 고개를 끄덕인 시화가 책상에 널려있는 부적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을 해도 꼭... 가죠. 아, 가는 김에 달산에 가서 주인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때 한 놈은 멀쩡했거든요."
"그래? 그럼 가는 김에 가보자. 근데 거기서는 못 난다고 하지 않았어?"
부적을 챙기던 여명이 생각난 듯 물었다. 광휘를 기다려야 하나. 중얼거리듯 말하자 준비를 끝낸 시화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명, 저 들고 못 뛰나요?"
"하, 나를 뭘로 보고."
굳이 따지자면 달산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을 겪어본 적이 있기에 여러 부적과, 초대 현무의 껍데기까지 챙겼다. 무려 천계 최강의 황룡과 현무다. 이 이상으로 걱정이 많다면 분명히 그것은 기우임이 분명했다.
"진짜 길고 길었다. 징글징글했던 이 생활도 드디어 끝이네. 은퇴하면 뭐부터 할 거야?"
"글쎄요. 자칫하면 아가 황룡 때문에 은퇴를 못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화가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의외로 들떠 보이기도 했다. 쯧, 여명이 측은한 듯 혀를 한 번 찼다. 나 죽기 전에 이놈 쉬는 꼴을 볼 수 있긴 하려나. 아무래도 자신의 친우는 죽을 때까지 일만 할 팔자일지도 몰랐다. 여명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으나,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묘하게 빨라졌다. 여명이 앞서가는 모양새가 됐지만, 둘 다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애기도 진짜 대단해. 너를 어떻게 구워삶아서."
"하하, 그러게요. 그래도 은퇴한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좀 쉬고 싶네요."
"그래. 이제 6대들한테 좀 양보하고, 자연에 짱박혀서 나오지 말라고."
"여명과 달리, 저는 만나야 할 지인들이..."
"많은 척 하지 마라. 우리밖에 없는 거 다 아는데."
여명이 씩 웃으며 시화를 돌아보았다. 미소가 오래가지는 못 했다. 여명의 표정이 빠르게 굳더니, 이내 시화를 빠르게 끌어당겨 자신의 뒤로 옮겼다. 갑작스러운 여명의 행동에 시화도 아무 말 없이 여명의 뒤에서 상황을 살폈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기척들이 빠르게 둘을 감쌌다. 아무리 가볍고 날렵한 상대여도 황룡의 감이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주술임이 틀림없었다. 감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황룡과, 현 현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주술. 나뭇잎에 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처음 보는 가면을 쓴 무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옷에 가면 밑에 덮어쓴 두툼한 천과 손에 들린 날카로운 창까지. 일족을 추정하기도 힘들었다. 상황 파악을 빠르게 끝낸 여명이 자신의 목걸이에 달린 무기의 껍질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쓸 생각이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면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을 뿐이다. 오랜만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당장 저들의 정체도, 능력도, 배후도 모른다. 시화의 눈짓에 여명이 재빨리 통신 부적을 꺼냈다.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지만. 통신 부적이 불에 타듯 사그라졌다.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말투로 여명이 투덜거렸다.
"공간 자체가 왜곡된 것 같은데."
"하... 그러게요. 여명, 날리면 안 돼요. 주변에 여우마을이..."
"알아."
머리를 두어 번 위로 쓸어 넘긴 시화가 짧게 고민했다. ... 써야 하나. 그 잠깐의 고민을 끝낸 건 여명의 목소리였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여명이 물었다.
"입은 한두 개만 남아있어도 충분하지?"
"... 네. 근데 여명..."
"어, 알아."
황룡경합 이후로 무기의 힘을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원로들도 많이 정리했고, 현 황룡의 위세를 보고도 감히 마지막까지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명의 신체 곳곳에서 푸른빛이 발했다. 무기의 등껍질을 재차 만지작거린 여명이 입을 열었다.
"야, 누가..."
날카로운 단도가 빠르게 날아와 여명의 볼을 스쳤다. 상처는 빠르게 재생됐지만,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머리를 올려묶었다. 이 정도만 된다면 둘이서 빠르게 끝낼 수 있다. 저 많은 인원이 전부 천계인 일리는 없고, 대부분은 주술로 만들어낸 인형이겠지. 비나리를 써야 할 정도는 아니다. 통신 부적이 먹통인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한 발짝 앞으로 나가고는 시화에게 보호 주술을 걸어준 여명이 빠르게 선두로 달려 나갔다. 시화 역시 간만의 전투였으나, 불안한 마음은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대부분은 주술이 확실한 듯, 가면을 부수거나 몸체를 반으로 가르면 힘없이 바스러졌다.
"다치지 마. 광휘가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알고 있어요. 여명도 몸조심해요."
천년전쟁 때에도, 황룡경합 때에도, 그 외의 여러 임무에서도 여명은 몸을 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황룡경합 당시 이미 여명의 능력을 봤기에 불안한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신경 쓰이는 것은...
-여명. 그 능력을 사용할 때 생기는 부상, 아프진 않나요?
-야, 잘렸는데 안 아프겠냐? 능력의 부작용으로 평소 부상보다 몇십 배는 더 아프거든?
적들의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기에, 여명의 부상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긴 했으나, 여명은 튼튼하기로 유명한 현무였고, 속도도 힘도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통증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시화가 결계를 두어 번 손가락으로 튕긴 뒤 소리쳤다.
"여명, 내 쪽 신경 쓰지 마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여명의 주위로 더 많은 인형들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느리대도, 저 정도 인원을 여명 혼자서 감당할 수 있나. 여명 쪽을 힐끔거리던 시화 뒤로 누군가가 재빠르게 접근했다.
"야.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순식간에 시화 쪽으로 달려와 적을 쳐낸 여명이 시화에게 주술을 한 겹 추가했다. 신음소리가 들린 걸 보면 천계인인 듯 했다. 너무 강하게 쳐내서 그런지, 소리가 금세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주술을 걸던 아주 잠깐의 순간, 여명의 몸이 순식간에 조각났다.
"여명!"
역시 안에 진짜 천계인이 숨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만 황룡의 감으로도 누구인지, 어느 위치에 숨어있는지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여명의 몸은 빠르게 엉겨 붙어 원상복귀됐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인형들과 몇 명이 될지 모르는 천계인들 때문에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여명에게만 유독 몰리는 것이, 여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싸우던 중, 시화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여명에게로 향했다.
"여명, 괜찮겠..."
여명의 몸이 또다시 부서졌다. 이번에도 아까보단 느리지만, 분명히 재생됐다. 계속 여명을 신경 쓰는 탓에 시화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 늘어갔다. 다행인 것은 처음에 비하면 인형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 여명도 그 때문인지 그저 묵묵하게 계속 싸울 뿐이었다. 챙겨온 부적을 꺼낼 틈도 없었다. 한동안 둘 다 아무 대화도 없이 눈 앞의 적에만 집중했다. 인형이 부서지는 소리와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 이따금 나오는 비명과 신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시화에게 걸었던 주술이 깨진 것을 눈치챈 여명이 시화 쪽을 잠시 신경 쓸 무렵이었다.
"아...!"
세번째였다. 산산조각이 난 몸은 느릿느릿하게 들러붙어, 여명은 왼쪽 팔을 회복하지도 못한 채로 적들에게 둘러싸였다. 언제부터 난 건지 알 수 없는 피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식은땀이 여명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싸우면 다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명의 생각과 달리 적은 증식이라도 하는 것인지, 줄어들은 것 같다가도 시야를 꽉 메웠다. 이제는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 수도 없는 부적 때문에 여명의 사지에 상처가 늘어갔다. 난생 처음 보는 주술이 팔과 다리에 감겨 살을 파고 들었다. 피에 적셔진 옷이 성가시게 느껴질 때 쯤이었다. 이를 꽉 깨물고 버티던 여명의 피부가 순식간에 난도질당하던 순간, 시화는 결국 자신의 능력을 썼다. 여명의 커진 눈이 시화를 향했다.
"... 하, 비나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여명은 광휘의 곁으로, 자신은 황도의 의원으로. 당장 저들의 배후를 찾는 것보다 여명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가벼운 소원을 빌었을 뿐이다. 일렁이던 이상한 공간이 탈피하듯 벗겨지는 순간, 여명이 간신히 시화를 끌어안았다. 여명의 등 뒤로 눈이 부실 정도의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눈을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끝난 짧은 시간동안,
"... 아, 아."
"여명아!"
짙은 피비린내와 탄내가 진동했다. 날아오는 폭발 주술로부터 시화를 보호한 여명의 몸이 조각나다 못해 일부분은 갈기갈기 찢긴 듯했다.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건지, 여명의 등에서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와 살이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제대로 된 말도, 움직임도 보이지 못해 파들거리는 처참한 여명의 시선이 광휘에게로 향했다. 임무를 마치고 광휘와 합류한 황명이 여명의 신체 일부를 급히 모으고, 광휘가 재빨리 여명에게 자신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신체가 느린 속도로 서로 달라붙었으나, 경련하듯 떨리는 신체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비명으로 인해 모두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눈물이 양쪽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고, 피와 함께 이불을 빠르게 적셨다. 흐릿하게 보이는 광휘 뒤로 시화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였지만, 시화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반쯤 떠진 여명의 눈이 감겼다.
치료는 꽤나 오랫동안 진행됐다. 이미 광휘가 많은 생명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의원들의 몫이었다. 급한 불을 끄고 시화까지 치료한 황도가 의원을 나서자, 옆 방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던 오방신들은 마루에 모였다.
"...처음 보는 주술이었어요. 여명도, 나도 눈치를 못 채는 게 말이 안 돼요. "
"확실히 일반 주민이나 신선이 쓴 건 아니야. 술식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나도 본 적도 없어."
"네. 그리고 아까 봤겠지만, 한참 동안 등에서 불이 타올랐죠. 쉽게 꺼지지도 않고. 신선 원로 말고는 설명이..."
"자네는 좀 쉬고 있지 그러나. 아직도 손이 떨리는데."
여명에게로 향하려던 시화를 노을이 막아서며 말했다. 초췌한 눈빛의 시화 역시 곳곳에 연고가 발려 있었지만, 여명의 상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시화가 문고리를 잡았다. 노을이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상태만 보고 나올게요."
"굳이 봐야겠나? 서로에게 좋을 게 없을 텐데."
"... 노을. 여명 상태만 확인하고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최대한 빨리."
노을이 말없이 물러섰다. 조용히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간 시화에게 빠르게 쌕쌕거리는 여명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로 가져온 듯한 흰 이불에는 땀과 피가 조금씩 묻어있었다. 잠든 건지, 여명은 시화가 온 것을 전혀 모르는 듯 그저 힘겹게 눈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최강의 현무가 피에 적셔져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에, 시화의 속에서 무언가 울렁이듯 통증이 일었다. 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가늘게 눈을 뜬 여명의 눈동자가 시화에게로 향했다.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였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 야. 너는... 괜찮냐?"
시화의 눈이 커졌다. 발걸음을 다시 돌리고 자리에 꿇어앉은 시화가 다급히 여명에게 물었다.
"여명, 정신이 들어요?"
"... 아마. 여기 명계... 아니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와요?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냐? 눈을 떠..."
시화가 말없이 곁에 있던 물수건으로 여명의 상처를 닦았다. 여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아직까지도 피가 나오는 몇몇 상처 때문에, 수건에 피가 스며들었다. 시화가 말없이 여명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미안해요. 내가 좀만 더 빨리..."
"푸하... 하, 이거 나쁘지 않네."
여명이 눈동자를 느리게 굴려 시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죽기 전에 황룡님 이런 표정도... 다 보고."
힘없는 웃음을 터트린 여명이 쥐어짜듯 말했다. 입가의 상처에 다시 피가 고였다. 시화의 시선이 여명의 입가로 향했다.
"... 쉬어요. 나가볼게요."
"야."
문 앞에 섰던 시화가 여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숨소리가 더욱 커진 여명이 간신히 몇 마디를 내뱉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방에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나 괜찮...으니까, 삽질하지 말고... 네 몸 관리나, 잘해."
륜 역시 예정보다 이르게 즉위했다.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5대 오방신이 은퇴한 후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몇몇은 생각보다 바빴다. 가끔 옷에 피가 묻기도 했다.
"며칠 안 지났는데, 그새 기어코 다 죽였나?"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는 황명과 시화를 힐끔 바라본 노을이 물었다. 둘 다 옷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릿한 냄새에 둘을 잠시 응시하던 노을은 이내 시선을 밤하늘에 높게 뜬 달로 옮겼다. 보름달이었다.
"다는 아니에요. 입 연 자는 살려뒀어요."
"그래, 어쨌든 황도님께 치료받고 있고."
황명이 턱짓으로 방 문 쪽을 가리켰다. 시화는 못 들은 척 하며 옷을 벗었다. 붉게 적셔진 소매 탓에 팔에도 끈적하게 피가 묻어있었다.
반대쪽 소매로 대충 팔을 닦은 시화는 씻겠다며 나가버렸고, 황명과 노을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실종 처리 말고는 답이 없겠지."
"그러지 않겠나. 그나저나, 배후는 용케 다 알아냈군."
"... 내가 좀 도와줬어. 그리고..."
"아, 어쩐지 조금 아파보이더군."
굳이 달산 주변에서 거사를 치른 이유는 여우마을 때문이겠지. 황명이 중얼거리며 벽에 힘없이 기댔다. 주변의 여우 마을 때문에 아무리 분노한 황룡이라도 그 일대를 날려버리지는 못할 것이고, 둘 중 한 명이 살아있다면 배후를 찾으러 다시 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몇 명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잠복하고 자신들을 기다린 것일 거라며 황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결론적으로는 멍청한 짓이었지만. 능력까지 쓸 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여명에게 알려야겠나?"
"... 물어보면 답해주자.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을 거야."
"간호는 내가 하겠네. 자네는 이만 가봐야 하지 않겠나."
"응, 부탁할게. 아, 이거 통증을 줄여주는 부적이야. 혹시라도..."
황명이 소매에서 부적 여러장을 건네자, 노을이 웃으며 건네받았다. 시화는 언제쯤 돌아올 것 같냐는 노을의 질문에, 황명은 뒤돌아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황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여명의 방문을 열려던 노을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려있는 문 틈으로 여명과 눈이 마주쳤다. 많이 회복되어 평상시와 비슷한 상태로 돌아온 여명은 뭐라 말하려는 모양새였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노을이 너도 쉬어. 피곤할텐데. 부적은 두고 가고."
"... 다 들었나?"
"그런 것 같지? 걔도 참... 은퇴했다고 막 나가는건가."
"... 옆 방에 있을테니 필요하면 부르게."
"응. 잘 자."
시화가 아무리 성질머리가 더러웠어도 원로를 죽인 적은 없었다. 보안을 철저히 했을테니, 일개 실종으로 처리되어도 할 말은 없겠지. 속이 시원하면서도, 여명은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정말 죽을 뻔했어요."
"나도 알아."
여명이 시화의 시선을 피했다. 화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4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피해왔기에. 한동안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지금 농담하는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네요."
"알지. 근데, 지금이랑 그때랑 상황이 같아?"
"하... 계약 사항이랑 어긋나잖아요."
시화가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이제는 그가 여명의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여간 화난게 아니었다.
"... 알았어. 다음에는..."
여명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분노한 시화 앞에서 가볍게 거짓말을 할 수도, 오방신 현무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이 더이상 남을 위해 몸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도 없었다. 답답함에 갑작스레 4년 전의 그날부터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솔직히 모르겠다. 얘랑 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이 이유로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번에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그저 표면 뿐인 계약 사항 가지고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여명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팠다.
"... 하나만 묻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무슨 뜻이에요."
"네 말마따나, 그냥 계약이었잖아. 현실적으로 내가 능력쓰기 직전에 너한테 연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흥분한 듯 여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격양된 분위기임에도 여명은 흔들림없이 시화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는 여명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너 나랑 살기 싫니? 그럴 거면 결혼하자고는 왜... 아니야. 흥분해서 미안하다. 진정 좀 하고 내일 들어올게. 너도 머리 좀 식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여명이 겉옷을 어깨에 걸쳤다.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짧은 시간동안 감정을 조금이나마 추스린 듯, 어느정도 여유를 찾은 시화가 여명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고는 겉옷을 다시 벗겼다.
"내가 나갈게요."
"야, 너 습격당한지 얼마나 됐다고..."
"여명 말대로 머리 좀 식히고, 진정되면 들어올게요."
"마음대로 해. 근데, 나한테 할 얘기 정도는 준비하고 들어와. 네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이유 진짜 모르겠으니까."
여명의 말에 잠깐동안 시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동안 망설이던 시화가 입을 열었다.
"... 여명한테 이 이상 뭔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겠지. 애초에 좋아해서 한 결혼도 아닌데."
어이없다는 듯 시화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는 부드럽지만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여명은 친우가 크게 아프면 결혼하자고 할건가 봐요."
"뭐?"
"애초에 말을 그렇게 했던 내 문제겠죠. 내 잘못이에요."
"무슨... 말을 똑바로 해."
"눈치도 없지. 여명은 진짜 짜증나네요. 정리 좀 되면 들어올게요. 하... 그동안 여명도 좀 진정해요. 제발 몸 좀 사리고."
여명의 눈이 커졌다. 시화가 나가고 난 뒤 한참 뒤에야 머리 속이 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한때 짧게 가졌던 감정이 떠올랐다. 너나 나나, 결국 같은 걸 두려워했구나.
여명은 꽤나 오래 전에 자신의 감정을 알아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옅어진 기억을 굳이 떠올리려 애쓰지는 않았다. 어쨌든, 자각한 뒤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뭐 어쩔건데? 은퇴하기 전에는 계속 얼굴 봐야 할 사이인데, 고백이라도 하게? 거절당하면 둘 중 하나는 강제로 은퇴하겠네. 받아줘도, 뭐. 일에 치이고 치이다가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그럼 은퇴 시기가 좀 더 앞당겨지려나. 둘 사이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시화는 예상보다 이르게 5대 황룡으로 즉위했고, 여명은 현무가 되었다. 즉위 직후부터 반송장과 다를 바 없는 시화를 보며 얼마나 마음 졸여야 했던가. 옛날옛적에 가졌던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요, 몇천년의 우정과 오방신으로서의 동지애만이 남아 그의 회복과 생존을 바랐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함께 천계를 재건하느라 바빴고, 이제 그에게는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잘된 일이었다. 언젠가 5대 오방신이 함께 은퇴하고,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그와는 계속 친우로 남아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화 때문에 자신이 죽을 뻔하고, 회복 중에 청혼받기 전까지는. 그는 참으로 담담하게 고백했다. 점심 식사로 무얼 먹고 싶은지 물어보는 것처럼.
"여명, 나랑 결혼할래요?"
"... 야. 아직 회복도 안 끝난 환자한테 이런 욕을..."
여명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지금 시화와 눈을 마주친다면, 뭔가 단단히 틀어질 것 같아서. 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바로 시화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는 마지막이고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해요. 견제도 확실할 거고."
"... 하아. 야."
"지금 당장 답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강요할 생각도 없고."
"아니... 어, 그래."
"... 쉬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그래도 회복하는 동안 생각은 해봐요."
최강의 현무답게 회복은 빨랐다. 황도님이 그러셨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인데, 회복이 이렇게 빠른 것도 안 믿긴다고. 눈에 띌 정도로 몸이 쾌유되자, 그는 평소의 장난기를 되찾고는 말했다. 솔직히 자기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여명은 헛소리 말라며 방에서 내보냈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의 눈빛에서 집요함이 보였기 때문에 꽤나 깊게 고민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안다. 쟤가 지금 나를 좋아해서 저러는게 아니라는 걸. 그냥 얼마 안 되는 친한 친구를 잃을 위험을 더이상 만들고싶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옆에 두고 싶어서 저러는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결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성사됐다. 별 이유는 아니었다. 여명이 언제부턴가 시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게 두려워졌기에.
결혼보다는 계약에 가까웠다. 둘 다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사랑하는 연인 사이를 흉내낼 생각도 없었다. 천계인들은 오방신 청룡과 용의 수장의 결혼 이후 간만에 보는 황룡과 현무의 강력한 조합에 놀라워했을 뿐, 그들의 속사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당연하지. 당장 나도 별 생각이 없는데."
혼례를 마치고 들어온 여명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엉킨 머리를 정리했다.
"... 그러게요. 당사자도 이런데. 그 늙은이들이나 떨고 있겠죠. 좋네요."
"어, 맞아. 너 걔네 다 죽였더라? 뒷일은 생각 안 했나봐?"
"아... 황명이 말해줬나요?"
"아니. 그냥 내가 자다 깨서 들었어."
"... 어차피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자들이었어요."
"내가 그걸 몰라? 그걸 얘기하는게 아니라... 아, 저거 먹을래? 무기가 결혼한다니까 선물해줬는데. 엄청 독하대."
"그래요."
결혼은 생각보다 별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결혼을 해서 별게 아닌 걸까. 얼핏 보면 친구와 하는 동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계약 내용만 뺀다면.
-라고 어제까지는 생각했었다. 가끔 얘가 왜이러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얘나 나나 나이를 꽤 먹었고,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고 한 결혼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를 부인으로 생각하고는 있구나. 웃기면서도 기분이 괜찮았고, 어렸을 때의 감정이 떠올라서 나름 즐겁기도 했다.
"하아..."
쟤를 좋아했던게 몇 살 때더라. 여명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었다.
"여명."
며칠이 지난 뒤, 시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밤 늦게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시화를 반겨주는 것은,
"어, 어서 와."
"잠깐, 잠깐... 여명. 나를 죽이고 싶은 건가요?"
엄청난 양의 술병이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며 술병을 세던 시화는 20병이 넘어가면서부터 세기를 포기하고는 여명에게 다가갔다. 여명은 뭐가 문제냐는 듯 시화를 응시하며 잔을 건넸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시화는 이내 잔을 받아들었다.
"솔직히 너나 나나 맨정신에는 말 잘 못할 거 아냐."
"맨정신이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저거 다 먹으면 둘 다 죽겠어요."
"응, 괜찮아. 그 전에 끝을 봐야지."
"그 끝이 목숨의 끝은 아니겠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시화는 순순히 상 앞에 앉았다. 여명도 자리에 앉은 뒤로는, 둘 다 말 없이 술을 들이켰다. 이 어색한 공기가 싫었고, 며칠만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저 놈도 싫었다. 술병이 하나둘 비워지고, 어느새 술이 찬 술병보다 빈 술병이 많아졌을 때. 둘 다 말이 꼬이고 발음이 어눌해질 무렵이었다. 시화의 눈은 반쯤 풀린지 오래였고, 여명도 술기운이 진하게 올라 정신이 오락가락할 쯤이었다. 이정도면 됐겠지. 상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시화의 뒤통수를 잠깐 바라본 여명이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대충 들어도 술냄새가 풍기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왜 했냐고. 결혼."
"... 여명은. 왜 했어요."
"네가 하자며..."
"... 그러네요."
"화는 왜 냈어."
"..."
"너, 진짜 나 좋아해?"
자는건지, 말이 없었다. 졸려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였나. 무슨 충동이었는지, 여명은 시화의 양쪽 얼굴을 잡아끌어 냅다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지만, 둘 다 피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여명은 시화의 목을, 시화는 여명의 목과 허리를 감쌌다. 몽롱한 상태에 열기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명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본 시화가 다급히 떨어졌다. 술을 많이 먹긴 한건지, 그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잔을 비웠다. 여명이 다시 가까이 고개를 들이댔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허,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너 진짜 나 좋아하긴 하는구나."
"안 믿었나 보네요."
"너같으면... 믿겠냐고."
"그건 그렇네요... 아, 오늘은 따로 자요."
"왜? 나 술냄새 나?"
여명이 양팔로 시화의 목을 감싸자, 시화가 시선을 피했다. 입가를 손으로 가린 시화는 그저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다 이내 여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하면 술김에 하는 거 같잖아요."
깔깔거리며 웃던 여명이 시화와 눈을 맞췄다.
"푸하, 그래! 아, 근데... 언제부터야?"
"... 뭐가요?"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원래 은퇴하면... 얘기는 꺼내보려고 했어요... 그렇게 분위기도... 뭣도 없이...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비틀거리며 고개를 든 시화의 시선은 여명에게로 향해있었으나, 여명은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이후 시화가 뭐라고 중얼댔지만,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자신도 혀가 몇번 꼬여 잠시 심호흡을 한 여명이 마지막 술잔을 비웠다. 잔을 놓칠 뻔해서, 정말 그만 먹어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뭐라는 거야. 왜 딴소리만 해... 야, 근데. 그거 알아?"
잠이 갑작스레 쏟아졌다. 몸이 너무나도 무거운 탓에, 여명은 시화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마치 안기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눈이 감겼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가만히 있어도 사방으로 튀어다니는 정신 탓에, 여명은 갑자기 신나게 웃었다.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어릴 때... 너 좋아했다."
"네?"
"어릴 때... 좋아했었다고..."
이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렇게 시화의 어깨에 이마를 처박고 잤고, 토는 안 했던 것 같다.
... 다음날 정신을 차린 건 침대 위에서였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