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서문
최근,이라고 할까. 요 몇 년 새 생긴 취미 중 기묘한 것을 꼽자면 넬슨 대륙에 풀려있는 이종족에 관한 책을 수집하여 읽는 일이었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는 그다지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지하에 틀어박혀서 자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었을까. 하지만 특정 소재에 집착하는 일 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읽는 타입이었다는 것이 지금과 다른 점이다.
집필 시기를 따져 책을 분류하는 것은 나름 재미있는 소일거리였다. 꽤나 오래된 책을 들여다보면 이종족이라는 단어조차 없이 그냥 괴물로 치부한 것들이 대다수였고, 나름 유사한 정보가 있어 호기심에 출처를 찾아봤더니 엘피도에서 넬슨으로 넘어 간 드래곤 하나가 심심풀이 삼아 몇 자 끄적인 것이 부풀리고 부풀려져 만들어졌다는 황당한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모습을 드러낸 이종족들을 관찰하고 접촉하여 쓴 신뢰도 높은 학술서까지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볼 것 같은 동화책 같은 서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넬슨 대륙에서 이종족은 인간들에게 여전히 신비의 대상이었고 그것이 사그라들려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할 터였다.
어쨌거나, 올바르든 왜곡되었든 그저 심심풀이 삼아 읽는 것이었기에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는 아이나르가 특히나 눈여겨보는 부분은 역시나 드래곤이었다. 어째서인지 드래곤은 자신의 레어에 막대한 부를 쌓아놓고 틀어박혀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 많았다.
물론 아이나르는 부자고, 집 안에 틀어박혀있는 책 속의 전형적인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드래곤이 훨씬 더 많았다. 당장에 하신만 보더라도 심각한 방랑벽이 있지 않은가. 다른 모든 이종족중에서도 드래곤은 특히나 더 낭설이 많아 아이나르는 꽤나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아홉 종족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넬슨과, 모두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엘피도의 지식 차이는 극과 극일 수밖에 없었지만 드래곤에 대해서만은 둘 다 별다를 바가 없었다. 드래곤의 존재가 전설로 통하는 것은 엘피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각 대륙의 드래곤에 관한 책을 두고 누가누가 더 헛소리를 잘하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어느 날도 아이나르는 책을 읽고 있었다. 동화 중에서도 가장 낡은 소재이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와 왕자의 러브스토리였다. 물론 공주와 왕자가 지지고 볶는 중에도 아이나르의 관심은 드래곤에게 향하고 있었다. 높고 뾰족한 지붕 위에 몸을 옹송그리고 사나운 표정을 지은 드래곤 삽화를 보며 참 불편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신은 벽난로 앞에 앉아 마시멜로를 꼬챙이에 꽂아 굽는 중이었다. 장작 아래쪽에는 언제 구해온 것인지 모를 고구마를 묻어두었고. 마시멜로가 타들어가며 탄 내와 단 내가 동시에 거실에 퍼지자 아이나르는 콧잔등을 찡긋거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하나 먹을래요?”
하신의 목소리에 아이나르는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심혈을 기울여 불에 쬐었는지 갈색으로 그슬린 마시멜로는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애초에 단 것을 즐기지도 않았고, 진동하는 단 내에 벌써 마시멜로를 몇 개나 먹은 기분이 되었으므로 고개를 내저었다.
“일 없어.”
“그래요?”
하신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마시멜로를 한 입에 쏙 빼먹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장작 밑을 뒤적거려 고구마를 푹 찔러 꺼내들었다. 걸리는 것 없이 고구마 한가운데를 관통한 걸 보면 확실히 잘 익은 것 같았다.
“그럼 고구마는요?”
다시 책에 시선을 내리다 만 아이나르가 허, 짧게 숨을 내뱉었다. 느슨하게 풀린 입가엔 '어이없음'이 대롱 매달렸다.
“너 심심하냐?”
“예. 그러니까 책 좀 그만 읽으면 안 됩니까? 누가 보면 학자인 줄 알겠네.”
책 겉표지에는 누가 봐도 5세 이용가의 유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에 하신의 말은 아무렇게나 내뱉은 심술이었다. 요새 겨울이 되었다고 외출을 줄였더니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나르는 아직 읽지 않은 동화책의 뒷부분을 팔락거렸다. 바로 다음 장에서 드래곤이 왕자에게 패배하는 장면이 나왔고 이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이나르는 미련 없이 책을 덮었다.
그럼 뭐하고 놀 건데? 하고, 이번엔 아이나르가 심술을 부릴 차례였다. 그러나 바깥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아이나르와 하신은 짧게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이 저택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은 저택과 이어진 동굴에 살고 있을 라플레어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저택에 방문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저택이 만들어진 후 한두 번이나 왔었을까. 이상한 일이다. 아이나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아이나르님.”
찾아온 것은 동면에서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응 기간을 거치고 있는 라플레어였다. 온몸이 나무껍질로 덮여 인간의 형태만을 간신히 갖춘 외양이었다. 얼굴엔 작은 구멍 몇 개가 뚫려있을 뿐이라 이게 눈코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설픈 모습이었지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절벽이들… 저기 아래 사는 바위 이끼들인데요. 걔들이 말해줬는데, 그…”
라플레어는 머뭇거리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나르는 차분히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고, 대다수의 경우 하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잘 아는 하신은 몰래 입을 삐죽거리곤 고구마를 내려두고 아이나르의 곁으로 향했다.
“인간들이 이 저택 쪽으로 올라오고 있대요.”
“……!”
하신이 팔을 뻗어 아이나르의 허리를 휘감아 붙든 것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한순간 튀어나가려던 아이나르의 몸이 덜컥, 멈췄다. 천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이나르는 하신이 자신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이성을 잃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거칠어지는 아이나르의 표정을 코앞에서 본 라플레어는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까득, 이를 갈았다. 입을 열면 말 대신 고함이 터져 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목구멍을 죄고 잇새로 숨을 내쉬었다. 하신은 아이나르가 급격히 끓어오른 화를 다스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를 놓아주진 않았다. 대신 아이나르가 알고 싶어 할 만한 질문을 꺼내었다.
“몇 명입니까?”
“네 명이요.”
“근처에 잠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든가?”
“아뇨. 마을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에서부터 쭉 그 네 명뿐이었대요.”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으음. 들고 있대요.”
들은 대로 고스란히 읊던 라플레어가 히익 헛숨을 들이켰다. 아이나르의 표정이 더욱 흉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하, 하지만 거친 산을 다니는 사람들은 보통 들고 다니는 거니까요!”
하신은 라플레어의 대답을 곱씹다 짧게 턱짓을 했다. 라플레어는 하신의 뜻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인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이나르의 분노가 훨씬 무서웠다.
라플레어의 발소리가 멀어져 이윽고 사라졌다. 아이나르는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산한 적막이었다. 하신은 까만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다, 허리를 감싼 손을 가슴팍에 올렸다. 여전히 어정쩡하게 앞으로 내밀고 있는 상체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안는다. 아이나르는 순순히 몸을 기대었으나 높고 느리게 들썩이는 어깨는 진정했다 볼 수 없었다.
“놔.”
“싫습니다.”
빠르게 오간 한 번의 대화 후 다시 침묵을 지켰다. 아이나르는 눈을 내리깔아 하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한 짝. 새삼스레 현실을 마주하곤 어금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짓눌리는 혀가 날카로운 고통을 호소했지만 차라리 낫다.
“내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림자에 가라앉은 동공이 가늘게 날을 세웠다.
“그 인간들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아이나르는 인간을 증오한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무의식의 저편에 밀어두었다. 길거리를 걸으며 마주하는 인간 하나하나를 쫓아가 찢어발길 수는 없었으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없는 존재 취급 당하는 게 아이나르가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인간들에게도 이득일 터였다. 그렇게까지 일부러 신경을 끊어내었건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필요가 있는가?
“없죠.”
하신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왜.”
“그렇게 해봤자 기분만 상할 테니까요.”
흐, 아이나르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으득거리며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가 났고 애매하게 자란 머리카락으로 덮인 목덜미가 검고 매끈한 빛을 냈다. 그것을 본 하신이 굳은 얼굴로 팔에 힘을 주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변해가던 목덜미도 희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나르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든다.
“집을 부술 순 없지.”
분노를 차마 모두 숨길 순 없었지만 당장의 위험을 벗어났음은 분명했다. 아이나르는 태연하게 하신의 손등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좀 놔. 집주인으로서 그 인간들 면상 정도는 봐도 되잖아.”
“갔다 와서 같이 고구마 먹어준다고 약속하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신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풀었다. 아이나르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방을 나섰다. 외투를 챙겨 저택 바깥으로 나오자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아직 멀리 있는 모양인지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산을 오르는 인간들을 침입자로 규정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었다. 벌목해 갈 나무도 없었고, 이끼 따위나 겨우 자랄 뿐 귀한 약초가 있을 환경도 아니었으며, 산 반대편에 있는 다른 마을로 향할 때에는 산을 끼고 돌아가는 것이 두 배는 빠를 만큼 이 산은 오르기에 너무나도 험준했다. 이 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나르의 거처를 제외한다면.
아이나르는 팔짱을 낀 채 꼿꼿이 서서 기다렸다. 하신은 일찌감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나르를 올려다보았다. 지옥의 수문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머리 셋 달린 개가 지키고 있다 했던가. 아이나르에게 걸리면 물어뜯기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그런 하신의 시선을 느낀 아이나르가 잠시 고개를 내렸다.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촉이 왔지만 그냥 픽 웃고 말았다. 아이나르는 하신의 꺾인 목이 뻐근할라 손수 머리를 눌러 내려주곤 다시 눈길을 돌렸다.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쪼그려 앉아있던 하신이 다리가 저리다며 다시 일어났을 즈음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거의 기다시피 올라오는 인간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시야에 들어찬 저택이 신기할 법도 하다. 이런 산에 저런 화려한 집이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을 지키고 있는 아이나르와 하신을 발견한 그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뉘, 뉘시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아이나르는 라플레어의 말대로 네 사람으로 구성된 일행을 살폈다. 추운 날씨에 견디기 위해 단단히 중무장한 복장. 허리춤에 칼 같은 것이 보였지만 위협은 못되었다. 토벌대를 자처하기엔 인원도 현저히 부족했고. 무엇보다 저 얼빠진 표정은 아무리 봐도 뭘 제대로 알고 온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저게 연기라면 세상 모든 연기자들은 실직해야 마땅했다.
머리가 식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이 산을 오르는 이유를 몰랐기에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너희는 누구지? 남의 땅을 함부로 밟지 말란 법도 모르나.”
“남의 땅….”
네 사람이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곁눈질로 흘끔흘끔 쳐다보았기에 기분이 나빴지만 아이나르는 가슴속에 인내를 한 번 새겼다.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가장 앞에 있던 사람이 말을 꺼냈다.
“그, 그럼 당신이 이 산의 주인, 드래곤이 맞습니까?”
순간적으로 아이나르의 기세가 사납게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만약 아까 그들이 보여준 얼빠진 모습이 아니었다면 아이나르는 이미 그들을 경사 밑으로 걷어차고도 남았을 것이다. 빠르게 이성을 되찾자 남은 것은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나르의 대답에 경악하며 눈을 크게 뜬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외쳤다.
“만세!”
그리고는 얼싸안으며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으려니. 아이나르는 영문모를 환희를 보이는 인간들에게 화내는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겪어본 일 중에 황당함으로 꼽자면 상위 1%에 들 것이 분명했다.
“뭐야, 이것들은.”
아이나르는 답을 구하듯 하신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하신의 표정도 마치 해괴한 것을 보듯했기에 소득은 없었다. 하신이 말려도 그냥 바로 뛰쳐나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조금 들기도 했다.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하신이 고개를 돌리다 아이나르와 눈이 마주쳤다. 저거 어쩔 거야. 왜 나한테 물어요. 죽이지 말라며. 내가 언제. 소리 없는 대화가 시선을 타고 오갔다. 아이나르는 다시 화가 끓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엔 참지 않고 왁 소리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텅 빈 산 위로 아이나르의 고함이 메아리쳤다. 화들짝 놀란 인간들은 허겁지겁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는 벌벌 떨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지만 당차게 할 말을 늘어놓았다.
“소, 소,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산에 드래곤님이 살고 계신다고...! 이렇게 힘겹게 찾아왔으니 이제 저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런 미친.”
아이나르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있기는 했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는 발언이었다. 하신은 급기야 어이없어하다 못해 이제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파들파들 떨며 쌕쌕 숨을 몰아쉬는 것이 저러다 허파가 찢어지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새하얗게 빈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읽고 있던 동화책이다. 정확히는, 그와 비슷한 책. 가난하게 살던 착한 사람이 드래곤을 만나 소원을 이루고 팔자 핀다는 형편 좋은 내용이었다. 설마 이것들이.
“…내가 왜 소원을 이뤄줘야 하는 거지? 얼토당토않은 전설집이라도 읽고 온 모양인데, 드래곤은 그런 한가한 족속들도 아니고 전능한 존재들도 아니야. 어디 왕이 되게 해달라는 둥 헛소리하면 지금 당장 산 밑까지 떨궈버린다.”
그러자 맨 뒤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설마 진짜로 그런 소원을 빌려고 했던 것인가? 아이나르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듯하여 이마를 짚었다. 어이구야. 그런 건 드래곤이 아니라 신이 와도 이뤄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간들은 여전히 희망을 놓지 못하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아이나르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이나르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나르는 냉랭하게 선고했다.
“설령 그런 능력이 있었어도 소원 따위 이뤄주지 않았을 거니까 꿈 깨.”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터무니없는 목표를 안고 언제 굴러떨어질지 모를 위험한 산을 오른 어리석은 인간들이라서. 그들이 절망하든 말든 아이나르가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소원을 위해 이리 절박하게 목숨을 걸었는지는 아이나르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인간들에게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짜증을 느꼈다.
동화책을 무슨 전문 학술서처럼 어려운 단어들을 써가며 풀어쓴 책이 몇 권 있다 싶었는데 그걸 진짜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그 책들에 별생각이 없었던 아이나르는 책의 저자를 찾아가 멱살을 쥐어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산에 드래곤이 산다는 가짜 같은 진짜 소문을 퍼뜨린 사람도 같이. 그건 아마 얻어걸린 거겠지만.
“알았으면 얼른 꺼져.”
“지금 안 죽입니까?”
하신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이나르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하신을 쳐다보았다.
“아깐 죽이지 말라며?”
“지금 생각해보니 이대로 보냈다가 우리에 대해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곤란해지잖아요. 입을 막는 게 차라리….”
하신은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였고, 아이나르는 그 간극에서 하신의 의도를 눈치챘다. 참으로 여우 같은 속셈이지만 장단에 못 맞춰줄 것도 없다. 아이나르는 헛웃음을 삼키고 서늘한 눈으로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뿌린 그물에 훌륭하게 걸려든 인간들이 일제히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소문 내지 않겠습니다!”
“저, 정말이에요! 믿어주십쇼! 혈서라도 쓰고 가겠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아이나르는 신중히 고민하는 척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처우가 내려지길 기다리는 인간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고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명심해. 전능하진 않더라도 네 녀석들을 찾아가 목을 뽑아버리는 것 정도는 쉬우니까.”
그리곤 파리 쫓듯 손을 휘 내저었다. 인간들에게는 그 행동이 '언제 어디에 있든 찾아갈 수 있으니 가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이나르는 단순히 귀찮고 피곤해졌을 뿐이다. 아이나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신은 앞으로 몇백 년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우스운 사건의 주인공들을 한 번 죽 쳐다보고는 아이나르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인간들은 허망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눈물을 머금곤 걸음아 날 살려라 산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별 꼴을 다보네.”
저택 안으로 들어온 아이나르가 외투를 벗으며 코웃음을 쳤다. 하신은 낄낄거리며 다시 벽난로 앞에 앉아 식은 고구마를 불 근처에 던져 데웠다.
“잘 참았잖아요.”
“어이가 없어서 손을 뻗을 의욕도 안 나더라.”
외투를 소파에 대충 걸친 아이나르는 그대로 등받이에 손을 짚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까 힘을 준 탓에 갈려 날카로워진 이의 표면을 가볍게 훑곤 툭 뱉듯 중얼거린다.
“내가 죽이고 싶은 건 그딴 것들이 아니니까.”
이제 이 세상에는 없을 이들을 향한 갈 곳 없는 분노. 유효성 없는 복수심. 단단한 바위조차도 살랑이는 바람에 깎여나간다는데 무뎌지기는커녕 숨기는 것이 고작인 이름 없는 감정. 이 의미 없는 모든 것들은, 신조차도 비할 바 없이 소중한 하신이 잊으라 말해도 평생토록 버릴 수 없을 터였다.
“…….”
하신은 아이나르를 가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차게 언 얼굴이 벽난로의 온기에 녹아내리며 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신은 괜히 입가를 몇 번 씰룩이곤 꼬챙이를 들어 다시 고구마를 찔러들었다.
“형. 고구마 같이 먹어주기로 했잖아요. 와서 껍질 좀 벗겨줘요.”
아이나르는 무감각한 얼굴을 들었다. 불꽃의 색에 물들어 붉은 기가 도는 하신의 뺨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자리를 옮겨 하신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구마를 빼들고는 끝부분부터 요령 좋게 껍질을 벗겨나간다.
타닥, 작은 불꽃이 튀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리자 하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아까 그거 동화 속 한 장면 같지 않았어요?”
“뭔 소리야.”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자신이 믿던 전설이 헛소문인 것을 깨달은 인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목숨의 소중함을 깨닫고 앞으로는 깝죽거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로 끝날 것 같잖아요.”
“웃기는 소리 한다. 그럼 우리 입장에서의 결말은 뭔데?”
“흠….”
하신은 빈 꼬챙이를 잿더미 속에 푹 찔러 넣고는 고민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어때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었다. 동시에 주인공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고. 하지만 아이나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반쯤 드러난 노란 고구마 알맹이를 뚝 떼어 하신의 입에 넣어주곤 말했다.
“그건 첫 문장으로 해둘래. 어느 한 산속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드래곤들이 있었습니다, 정도?”
“으와. 형 얼굴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진짜 안 어울리는데.”
“매를 벌지?”
“그러니까 책 좀 그만 읽으라고요.”
하신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이나르는 문득 익숙함을 느꼈다. 마치 읽다 만 책의 한 줄을 다시금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이름없고, 의미없는 문장들은 먼지 냄새가 나는 책장 구석에 꽂아 둔 헌 책에 적혀있을 것 같았다. 가끔씩 펼쳐볼 수 밖에 없지만 굳이 궁금해지진 않는 그런 책. 잠시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러니까… 이다음에 올 대사가 뭐였더라. 아, 그래.
“그럼 뭐 하고 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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