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발라] 일그러진 거울 - 4
케이드 x 자발라
* 케이드x자발라
* 공미포 4400여자
* 비공계 계정에서 풀었던 썰 이용
* 지나간 시즌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 데가 설정에 대해 아는 게 없음: 오류 발견 시 수정
* 개인적인 설정 다수 추가
희게 떠오른 여행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자발라는 아주 멀리 날아간 우주선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여행자의 옆으로 시선을 비꼈다. 조용히 바라보았다. 옅은 푸른색이 가득한 하늘엔 여행자처럼 희디흰 구름 몇 개가 찢어진 것처럼 길게 흩어져 흘러간다. 눈을 감았다 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마음으로 읊조리던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된 게 언제였는지 자발라는 기억했다.
수호자의 보고서에서는 고스트를 통해 전해진 메시지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아도 떠도 어른거리는 몇 마디가 있었다.
빛은 케이드를 버렸어요. 그를 죽게 내버려 뒀죠. 빛에는 실패만 존재해요.
차갑게 식은 금속들의 뭉치에 불과한 케이드의 시신 앞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복잡했다. 슬픔, 분노, 절망, 그러고도 복수를 말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 무력함. 그 감정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 보고서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이후에도 자발라는 여행자 앞에 서 있었고, 가끔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복수심을 느끼기 전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가 가져올 이익이라곤 아주 잠시의 만족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가끔은 그 잠시의 만족마저 간절해질 만큼. 그때부터 그는 여행자를 향해 기도하지 않았다.
발 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박힌 케이드의 상징. 빛나는 눈동자가 자발라의 호흡에 따라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다가, 완연히 드러났을 땐 그저 깊게 가라앉아 허공을 헤맨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온다. 케이드의 것과 다르다. 호흡을 고르고 일어났다. 다가온 이가 몇 가지를 묻는다. 자발라는 자신에게 현기증이 없냐고 몇 번을 되묻는 민간인 의무관의 모습에 그가 고스트보단 약이 익숙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감시 카메라로 자발라의 모습을 확인하고 전했다는 것도. 괜찮다는 말로 의무관을 돌려보낸 자발라가 떠올린 수호자는 한 명이었다.
“그 친구가 너 많이 좋아하더라?”
난간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웃는다. 자발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까마귀는 말썽을 일으키곤 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었다. 모든 수호자가 응당 그래야 하듯 과거와 별개로. 만약 타르지가 힘을 잃고 자신이 위험했던 그 순간, 자신이 아닌 그 누가 서 있었더라도 까마귀는 앞에 나섰을 것이다. 자발라도 까마귀를 퍽 아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까마귀에게서마저 케이드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까마귀와 케이드에게 드는 죄책감에 입을 완전히 다물어버렸다. 말썽꾸러기, 그런데도 호감을 줄 수밖에 없는 헌터. 비록 케이드를 죽였지만 모든 수호자는 과거와 별개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되뇌었을 정도로.
다만 머릿속에서 기어 나온 죄책감 덩어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발라에 대해서 잘 알았다. 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금방이라도 탑 아래로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장난치다가 낮게 소리 내 웃는다. 순간 주변의 다른 소리들이 모두 멀어졌다. 분명히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돌아서서 확인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유쾌하게 울리는 높은 웃음소리도 케이드에게 잘 어울렸지만, 자발라는 케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작게 웃다가 자신에게 다디단 말을 속삭이던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왕자님 월권행위에 대해서 처벌은 해야지.”
탑 내부에 대한 감시는 까마귀의 일이 아니다. 엑소의 형상 옆, 좁디좁은 난간에 올려두었던 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뒤돌아섰다. 조금 흐리게 비치던 풍경은 눈을 깜박이면서 점차 투명해졌다. 자발라는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몇의 기민함에 대한 감탄을 숨겼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력팀을 잠시 기다렸다가 현상금을 정리해서 내어준 후 아이코라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사무실에서 쉬어도 괜찮냐는 부탁에 돌아온 건 [4시간, 되도록 쿼터에 가길 바라]라는 답이었다. 더 이상 흐트러지면 모두를 망친다는 마음가짐을 알아차렸는지 웃음소리가 멎는다.
자발라가 사무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다른 이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은 어차피 다른 이들은 모를 것이기에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감시 카메라의 범위 내에서도 꼿꼿하게 걸어가다가 사무실의 문이 닫힌 뒤에야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기척이 다가온다.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돌아섰다. 책상 위에 앉은 엑소의 형상이 퍽 시무룩한 얼굴로 반대편에 놓인 서류들을 쳐다본다. 케이드였다면 진작 밀어버리거나 숨겨버렸을 그 묵직한 무게감을.
“까마귀의 일은, 나중에 처벌할걸세.”
“내 생각난다고 너무 약하게 하면 안 돼. 도시의 공익, 알잖아? 기강을 바로잡아야지.”
케이드의 유언 속에서도 속삭이던 단어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젠 케이드처럼 말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군.”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네 일부라면서? 네가 케이드가 어떻게 할지 떠올리지 못하면 너처럼 말할 수밖에.”
털썩 책상에 드러누워도 먼지 하나 띄우지 못한 엑소의 형상이 천장을 향해 손을 휘젓는다.
“그래도 최대한 네가 안 할 행동들을 골라서 해야지. 그래야 케이드가 생각나고, 네 슬픔이 깊어질 테니까.”
“나는…….”
“케이드를 버린 걸로 충분하잖아. 그렇게 자길 데리고 가달라던 케이드를.”
“아니, 케이드는 나한테 데리고 가 달라 한 적 없네. 왜냐면 나는, 황무지도 탑 밖으로도 케이드와 함께할 수 없었으니까. 케이드도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어.”
“그렇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네 불안함이 아직도 남아있잖아. 아니면 내가 이렇게 말 못 하지.”
“너는.”
“응, 자발라. 케이드의 껍질, 아니지. 케이드의 외골격은 딱딱했으니까 껍데기로 하자. 케이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자발라야.”
“너는 케이드가 아니야.”
“아직도 그걸 구분하는 데 그렇게나 시간이 오래 걸려? 정신 차려, 이제 민폐 그만 끼친다면서.”
짝, 소리가 난다. 자발라는 자신과 엑소의 형상이 동시에 손뼉을 쳤단 사실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의 습관이 아니었다. 케이드가 아주 가끔 이목을 끌기 위해 했던 행동이었다.
“나랑 갈 거지?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면 왜 계속 묻는 거지.”
“넌 입 밖으로 말해야 확실해지니까. 그래서 그만큼 말을 아꼈잖아. 그리고 너 이제 결정한다면서. 너 이 이상 내가 선명해지면 감당할 수 있어? 내가 이 이상 케이드의 기억에서 벗어나 버리면, 정말로 망령이 돼버릴지도 몰라.”
벌떡 일어나 앉아서 방긋 웃는다. 직선 파츠가 눈꺼풀처럼 옵틱을 반쯤 덮고 뺨에 불빛이 반짝이는 정도지만, 연인이 되기 이전부터 그 표정이 케이드의 웃음이라는 걸 느꼈었다. 그만큼 부드러웠으니까. 자발라는 저도 모르게 끌어안으려 내밀려던 손을 겨우 거두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소가 사라지더니 입을 벌린다. 높게 깔깔 웃는 소리가 무표정에서 흘러나온다.
“안 되잖아. 그래서, 네 마음은 어때?”
“같이 가야지.”
“어째서?”
“케이드에 대한 죄책감이니까.”
“내가 더 선명해지면 어떡할 거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와 같이 간다고 해서, 내가 네 앞에서 뿅 사라질 줄 알아? 난 네 뒤에 서서 끝없이 네 귀에 케이드의 유언을 속삭일 거야.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을, 네가 들으면서 가슴저려할 말을 마구마구 해버릴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영원히 그 목소리가 들릴 거라던 건 케이드의 유언이었으니까. 아마 굳이 내게 속삭이지 않아도 들릴 걸 알고 있네.”
“와, 저 지독하고 지고지순한 사랑. 아이코라는 어떻게 이 둘을 견뎠을까.”
지긋지긋하다는 말투로 말하면서도 히죽 웃는다. 책상에서 내려온 형상이 자발라를 향해 팔을 벌린다. 자발라는 팔을 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형상이 저를 껴안는 것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엑소의 골격을 뒤집어쓴 자발라가 그를 끌어안고 웃는다.
“며칠만 기다려, 나랑 가기로 했으니까 그 정도는 봐줄게. 하지만 난 네가 혼자 있을 때면 언제라도 네 옆에 있을 거야. 혼자가 아니라 기쁘지 않아?”
자발라는 웃을 수 없었다. 그를 놓은 형상이 웃음소리를 남긴 채 느리게 걸어간다. 자발라는 열리지 않는 문을 통해 떠난 발걸음이 아주 사라질 때까지 퍽 오래 기다렸다. 그리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타르지.”
자발라가 허공만 쳐다보고 중얼거리는 상황을 보고도 정신은 치료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 작은 친구. 떠오른 타르지가 자발라의 손 아래에서 맴돈다. 맞물린 의체가 달칵 소리와 함께 아주 작게 벌어진 틈에 각성자의 손길이 느리게 파고들었다. 둥근 구슬 같은 감촉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제게 느리게 비벼오는 몸짓을 알고, 자발라는 문득 입술을 물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미안해.”
어쩌면 타르지보다 다른 누구에게 먼저 전하고 싶었을 말을 속삭였다. 그의 고스트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그저 몸을 더 낮추어 손에 파고들 뿐이었다. 자발라는 이제 다시 만날 그 형상이 더 이상 끔찍하지 않기를 바라기로 했다. 그저, 그것만이라도. 지금도 간신히 미치기 전에 멈추었다는 실감이 처절하게 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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