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자발라른

[케발라] 일그러진 거울 - 3

케이드 x 자발라

* 케이드x자발라 

* 공미포 3250여자 

* 비공계 계정에서 풀었던 썰 이용 

* 지나간 시즌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 데가 설정에 대해 아는 게 없음: 오류 발견 시 수정 

* 개인적인 설정 다수 추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각성자의 피부 위로 옅은 빛이 부서지고 다시 피어나 일렁인다. 내리깐 눈꺼풀에 얹힌 피로의 무게는 보기만 해도 무겁다. 늘 띄우고 다니는 무표정 그대로, 자발라는 그저 차분하게 회의를 이어갔다. 아이코라와 언쟁할 일도 없었고, 케이드의 장난에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지도 않는, 나직한 목소리와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만 오가는 시간. 확인과 지시를 마친 자발라가 일어서자 다른 이들도 모두 일어나 자리를 빠져나간다. 자발라는 잠시 서서 기다렸다. 입구 벽에 기댄 엑소가 무료한 듯 단검을 까딱이며 손장난을 이어간다.

“자발라.”

 ……아이코라, 입구에 누가 왔는지 보이나?

“피곤해보여.”

 그래도 사적인 자리에선 편하게 말할 만큼의 사이는 회복했다. 자발라는 아이코라가 자주 건네는 염려 중 하나에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일이 많았지. 아이코라, 자네는 괜찮나?”

“몸은 괜찮지만 마음은 피곤해.”

 드물게 적나라한 표현에 자발라는 손끝을 찌르는 시늉을 하는 케이드의 형상에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뒷짐 진 워록이 우아한 목선을 살짝 뒤로 젖힌다.

“케이드는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내게 남긴 케이드의 유언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고 있어. 예전에 내게 해온 말들도 대부분은 기억해.”

“……음.”

 케이드의 복수에 대해 둘의 의견이 충돌한 이후 처음으로 나온 케이드에 대한 이야기다. 자발라는 자신의 것과 다른, 글자 그대로 악몽인 아이코라의 케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데도 한 편으론 그리워서, 그럴싸하게 따라했으면 따라갔으리란 어리석은 생각마저 들어.”

“어리석지 않아, 아이코라.”

“에리스의 말을 더 들었어야 했는데.”

 꽉 움켜쥔 둘의 주먹은 크기만 다를 뿐 같은 형상이다. 적나라했던 표현보다도 드문 아이코라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자발라. 이걸 어떻게 버틴 거지?”

 피로가 짙게 밴 목소리, 말 끝에서 부서지는 한숨. 총명하고 단단한 눈빛 언저리에 맺힐 듯 일렁이는 슬픔. 자발라는 친애하는 친우이자 유일한 화력팀 멤버의 눈을 퍽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먼저 시선을 돌렸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목을 스치는 것 같다. 자신을 두 팔로 끌어안으면 매달리는 것 같다며 낭랑하게 웃던 목소리가 울린다. 뜨개질을 하며 앉은 안락의자 옆에서 부족한 장작으로도 따듯하게 타오르던 빛. 기어이 푸른 빛으로 떠난, 자발라가 그와의 시간을 후회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 걸 받아들인 후에야 떠난영혼. 아니, 악몽이었던 기억. 그건 사피야가 아니라 기억이기에 자발라의 일부였다.

 자발라는 차마 스스로의 과거 중 한 부분이나마 후회하지 않기로 정했단 말을 할 수 없었다. 여행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흔들렸다는 것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아이코라는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들곤 발을 돌렸다. 일정한 속도로 이어진 발걸음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엑소의 앞을 지나면서도 멎지 않았다. 열린 문은 닫혔고 반쯤 몸이 잘린 것처럼 걸쳐 있던 엑소의 형상은 몸을 마저 돌려 자발라를 향했다.

- 넌 언제나 답을 알아. 그게 오답일 수는 있지만, 아예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것보단 낫지! 뭐라도 해봐야 부서지든 되살아나든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발라, 아이코라가 너무 끙끙대면 옆에서 좀 들어줘. 아무리 봐도 아이코라보다 네 사고 방식이 더 섬세하거든.

“그걸 어떻게 버텼어?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버티고 있어?”

 팔에 손을 얹고 몸을 기울여 소곤소곤 격려하던 케이드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뒤를 이어 엑소의 형상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갑다.

“내 말 기억하지?”

그러니 빨리 결정해. 나랑 갈지, 나를 사랑할지, 나를 통해 내 너머의 것을 볼지. 아홉도 어둠도 빛도 아닐 거야. 고난을 포기하면 성장하지 않는 대신 주저앉지도 않겠지.

“아이코라한테는 어떻게 대답하고, 너와 나한테는 어떻게 대답하려고 아직도 생각 안 하고 버티는 거야. 케이드는 네 답을 좋아했어. 명료하건, 섬세하건, 굵고 거칠건.”

“자네가 케이드가 아닌 건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사람이나, 엑소, 그런 존재로 취급하려고 사근사근하게 부르는 거야?”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 하고 있어.”

“나한테 어떻게 할 지 정하고 찾아. 이름을 줄 때 흘러 들어가는 건 이름만이 아니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코라가 물었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 떠올랐다. 악몽, 기억, 과거, 자기 자신과의 결론. 조금 전의 아이코라처럼 드물게 소리 내어 개인적인 것을 물었다.

“내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나?”

“케이드라면 네 애인이자 네 소중한 화력팀의 일원이자, 뭐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재미있는 자리만 원했겠지.”

“예를 들자면?”

“당연히 모르지. 오,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이제 알았나 봐?”

 자신이 모르는 것은 대답하지 않는다. 자발라의 기억 속 케이드를 흉내내면서도 자발라를 비난한다. 유언을 남긴 진짜 케이드는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 자발라가 스스로에게 해온 행동. 아이코라의 말에 떠오른 푸른 기억이 나풀대며 떠나던 순간 느꼈던 상실감. 케이드의 형상이 웃는다.

“내 기억.”

“악몽이 아니라고 하는 건 내가 빨갛지 않아서 그래?”

“……악몽으로 규정짓기엔 흐릿하니까.”

“그래, 그러면 일단 그런 걸로 해두자.”

 헌터답지 않은 거친 손놀림으로 빙글 돌아간 단검이 바닥에 떨어진다. 소리도 흔적도 없이 바닥을 구르는 단검을 밟은 케이드의 형상은 자발라의 기억 속 케이드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하는, 뭐 케이드의 가죽을 뒤집어쓴 자발라, 죄책감, 뭐 그런 걸로 말이야.”

 다른 이름을 지어줄 거야?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물으며 서글픈 듯 렌즈를 굴리다 그대로 다가온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내민 손으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뺨 위를 더듬고는 성큼 다가든다. 품에 안겨, 만족한 듯 살짝 숨을 내쉬고, 떨림 하나 없는 손길로 허리를 그러안던…………. 아, 순간 흘러나온 탄식에 스스로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허상에 지나지 않아야 할 상대를 그러안으려던 제 손을 거두었다.

“아니면 용서할 거야? 케이드의 복수를 네 손으론 시도조차 하기로 한 걸, 더 이상 후회하지 않을 거야?”

움켜쥐고 있다 못해 피가 흐르기 직전까지 부은 손을 억지로 폈다. 힘들게 허리를 펴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이는 웃지 않았다. 자발라는 그저 걸어가다가, 한참 동안 벽에 손을 짚고 한숨을 푹 푹 연거푸 내쉰 후 다시 허리를 세워 천천히 걸어갔다. 엑소의 형상에게서 먼저 발걸음을 돌린 건 처음이다. 퍽 새삼스러운 사실을 짓씹으며 그저 걸었다. 복도 곳곳에 켜진 감시 카메라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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