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붉은 악몽
* 화력팀 워록 애리 + 대변자
애리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고스트에게 인도되어 탑에 도착하자마자 적을 맞닥뜨렸고, 황금총을 쏘기 직전 케이드에게 총을 난사해 전부 빗나갔으며, 자발라의 보호막에 들어갈 줄 몰라 몇 번을 죽은 뒤, 적의 함선을 일격에 부수는 아이코라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무언가 차분히 배울 시간은 없었고 고스트가 급하게 건네는 지시는 거의 알아듣지 못 했다. 가울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가 바닥을 기며 도망쳤고 호손의 인도를 받은 후에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탑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워록은 수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방법을 배웠다. 선봉대의 지시에 따를 수 있는 수호자가 자신밖에 없는 상황이 잦은 걸 당연히 여겼고 헌신적인 고스트에게 로우라는 이름을 주었다. 상냥하고 쾌활한 타이탄과 임시 화력팀을 만들어 움직이던 차에, 애리가 버려진 패드에서 본 영상은 그가 모르는 이를 담고 있었다. 온통 망가진 방에 가득한 깨진 스크린, 불타 뒤엉켜 붙어버린 메모들, 캐비닛에 가득 찬 악필들이 담고 있는 대상. 애리는 아주 먼 훗날에야 그 방이 여행자와 대변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진 이의 것이라는 걸 이해했다.
패드는 망가졌는지 액정 중 절반은 붉고 푸르게 번쩍였다. 애리는 멀쩡한 부분과 망가진 부분을 왔다갔다 하며 움직이는 가는 인영에 집중했다. 한 단 높은 곳에서 가면을 쓴 채 아낌없이 이어갔을 연설은 심한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가면이 액정 쪽을 향한 순간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애리는 가까스로 조금 길게 들었다. 드물게 들리는 부드럽고 차분하며, 어딘가 등골을 저릿하게 만드는 힘이 담긴 목소리.
로우는 복귀 후 애리의 패드를 연결해 영상을 옮길 것을 추천했다. 애리는 순순히 고장난 패드를 회수하고 그를 기다리던 머디에게 돌아갔다. 얼른 돌아가서 뭐 좀 먹고 쉬자며 웃던 머디는 무슨 좋은 거라도 주웠냐며, 얼굴이 좋아보인다고 웃었다. 그 때 애리는, 엑소에게 그런 게 어딨냐고 농담하며 같이 웃었었다. 복귀한 후 확인한 패드는 전원이 나가 있었고 다시 켜지지 않았다. 아쉬웠고, 아쉬웠지만 애리는 감당 못 할 수리비를 구해오는 대신 그 패드를 곧바로 정리했다.
애리는 대변자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케이드와 아이코라의 언급으로 그가 왕복선을 타고 떠나지 못 했으며, 붉은 군단에게 잡혀갔다는 것만 알았다. 이런 영상을 봤는데 누군지 알고 계시냐는 수호자의 질문에 자발라는 기꺼이 몇 가지를 알려주었고 홀로그램을 통해 조금 더 생생히 대변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지위와, 그에게 도움 받은 수호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만나면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신신당부와 함께. 눈 앞에서 패드 속 영상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뻗은 손은 홀로그램을 무심히 뚫고 지나갔다. 손에 쥐어지는 건 없었다. 그리고 끝내, 대변자를 구하지 못 했다.
"……."
버려진 리바이어던. 애리는 알지 못 하는 붉은 전쟁 이전의 이야기가 어린 곳. 선봉대의 사전 브리핑을 떠올리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두어 걸음. 에리스 몬의 브리핑이 이어진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입을 여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피보다 붉게 물들은 대변자의 형상이 허공에 뜬 채 애리를 향해 꼿꼿하게 섰다. 상태를 확인하는 에리스 몬의 목소리가 아스라히 멀어진다. 애리는 문득, 자신이 엑소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열하더라도 눈을 가릴 눈물이 나지 않고 목을 태울 기침이 나질 않을 테니까.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왜 자신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빛을 가장 먼저 되찾은 것이냐 원망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가울을 물리친 후 느낀 후련함과 영광에 도취된 것도 잠깐이었다. 수없이 죽어가며 서로 의지했던 머디는 영원히 이어질 전투에 질려 발걸음을 돌려 떠났고 대변자는 다신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어째서, 자신이 조금만 더 강하고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현명하고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중요한 존재를 살려낼 수 있었을 것을, 자신이 모자라고 부족해서. 그렇다면, 그랬다면, 자발라만이 아니라 대변자 또한 자신에게 치하해주지 않았을까.
애리는 대변자가 자신을 다른 수호자 부르듯 다정하게 부르는 걸 직접 듣고 싶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붉게 물든 경애의 형상이 허공을 맴돈다. 대변자에 대한 감정이 연모는 아니었다. 우상을 대하는 것에 가까운 감정이었고 하물며 그의 구출은 선봉대가 맡긴 당연한 임무였다. 연모를 읊기에 애리는 대변자에 대해 몰랐고 동경을 말하기엔 후회가 깊고 짙었다. 무지에서 배어나온 경애는 광신에 가깝지만, 대변자를 구하지 못 한 건 신입 수호자가 마주한 처음이자 가장 큰 실패였고 그만큼 응어리가 깊었다. 대변자의 형상을 향해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는 수호자들을 나의 아이라는 다정한 호칭으로 불렀더랜다. 애리는 푸르게 빛나는 렌즈를 반만 연 채 상대를, 혹은 대상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네요."
그 덕에 오히려 유령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무언가 말이라도 했을 것을, 그저 애리의 케케묵은 죄책감과 애써 닫아두었던 상자에서 쏟아진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엉겨붙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일테니. 보고 듣고 접한 것이 없으니 그저 저를 바라볼 뿐. 총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간신히 놓치지 않은 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 당신은 꾸지 못 할 악몽인가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 어둡고 험란한 시기를 운으로 이겨내고 그 덕에 아직 웃을 수 있던 수호자가 맞이한 첫 이별. 은은히 들리던 목소리는 단 한 자락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최후를 눈에 담지도 못 했다. 애리는 리부트와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다 로우를 끌어안고 잠들기 직전까지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대변자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자신의 모든 감정 때문에 대변자에게 더 집착하게 된 것이리라고.
귀에 독을 부어넣었다는 다른 악몽과는 달리 한 마디 말도 없다. 애리는 자신이 눈물 흘릴 기능이 없는 엑소라는 데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꼈다. 목도 메이지 않았다. 그저, 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악몽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다. 애리는 리바이어던의 문에 가까워지는 대신 악몽을 따라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면서도 입을 열지 못 했다. 떼어내야 할 존재에게 매달리는 것만큼 우스운 게 있을까. 자신은 잠들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력하고 용기 없는 이다. 손을 천천히 뻗었다.
"꾸지도 못 할 생면부지의 악몽에서 깰 수는 없는 걸까요?"
에리스 몬의 브리핑이 점점 커진다. 이해할 수 없는 잡음이 귀를 가득 메운다. 손끝이 떨린다. 이런 부분마저 인간적일 필요는 없었으련만 마치 대변자의 소매라도 낚아채려는 것처럼 주체하지 못 하는 손이 거칠게 흔들린다. 몸이 흔들린다. 몇 걸음 더 따라가다 그대로 휘청였다. 몸을 반쯤 굽힌 채 뻗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브리핑을 가장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시끄러웠다. 기껏 고요해진 공간에서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이를 간신히 만났건만. 이어피스를 빼려 더듬던 손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리, 애……, ……리! ……자……, 수호자!!"
가울과 대적하던 시기에도 목소리를 높인 적 없는 로우였다. 애리는 고스트의 작은 충돌에도 큰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균형을 잃었다.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주저앉은 애리의 헬멧 앞에 붕 떠오른 로우가 의체를 빠르게 돌렸다. 조각조각 짜맞춘 의체가 벌어진 채 돌아가며 둥근 고스트의 흰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소음에 겨우 눈을 깜빡였다. 애타는 외침이 귀 밖을 메우고 불안함을 직감한 목소리가 귓 속을 채우는 동안 악몽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애리를 굽어보듯 고개를 숙인 채 떠있을 뿐.
"……로우."
이런 상황에서도 부품 파손 없는 엑소의 목소리는 매끄럽다. 의체를 제게 바싹 붙인 로우가 부드럽게 헬멧에 닿았다. 톡, 닿는 온기 한 점 없는 접촉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정리했다. 붉은 악몽이 시야 한 편에서 어른거린다. 고개를 숙였다.
"……에리스 몬, 미안해요. 염려대로 전 이 이상 진행할 수 없어요. 일전에 말했던 다른 수호자가 있는데, 필요하시다면 브리핑 내용은 제가 전달할……"
최대한 차분하게, 아마 인간이었으면 목이 졸린 것처럼 짜내어야 했을 목소리가 술술 흘러나온다. 에리스 몬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애리의 말을 들었고, 지친 목소리로 돌아오란 말을 전했다. 통신을 종료하고 일어난 애리는 로우의 의체를 가벼이 쓰다듬고는 악몽을 향해 섰다. 대면할 힘은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자신은 이 곳에서 배제될 것이고, 그 이후 다시 만나지 못 할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 진짜가 아닌 악몽이라는 걸 알면서도.
"엑소인 제게 꿈 중에서도 제일 힘든 악몽이네요. 다시는 뵙지 않길 바라요."
형상은 미동조차 없다. 애리는 그에 대해 서러워 해야 할지, 그가 정말로 죽은 후에까지 고통받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악몽 자체임에 불과하단 것에 안심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서러워졌다. 눈물 대신 목례를 남기고 악몽 곁을 스쳐 지나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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