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표현 방법
* 화력팀 리안+아이도+까마귀, 화력팀 애리(언급)
* 망령: 2막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안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무딘 편이었다. 동시에 주변에 관심도 별로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랬고 주변인들의 대답도 그랬다. 애리가 화를 내면 화가 날 일인가, 하고 넘어가고 휼이 좋아하면 좋아할 일인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감정을 표현하기 적합한 방법이나 표현을 찾지 못 해 그냥 아니야, 하고 끝내버리는 일도 잦았다. 예를 들어 리안은 성격 급하고 거친 수호자의 욕을 직접 듣는 것보다 그 욕을 들은 애리가 폭발하면 사라질 수리비가 더 무서웠다. 때문에 리안은 감정적으로 예민한 이는 맡기 어려운 일을 자청해서 맡곤 했다.
“-를 풀어주세요.”
그리고 이번 일을 맡길 잘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메아리를 피크룰에게서 떼어낼 수 있는 기회예요, 수호자. 에라미스라면 분명히 답을 알고 있을 거예요. 에라미스를 풀어주세요.”
저 말 들었다면 이번에야말로 후환을 제거하겠다며 샷건을 들고 감옥에 쳐들어갈 워록부터 떠올랐다.
엘릭스니의 몰락이 달렸다는 이번 일은 리안이 단독으로 맡은 일 중에서도 꽤 컸다. 그냥 비전투원 엘릭스니를 구출하는 일인 줄 알고 왔다가 생각보다 커지는 규모에 잠깐 화력팀의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착을 두었던 장소인 헬름이 붕괴하면서 사실상 복구 담당이 되어버린 애리는 쿼터에도 잘 돌아오지 못 하고 휼은 헌터들과의 이별 때문인지 오히려 퀜테이와 리안에게 의지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엄밀히 세면 리안의 단독 임무는 이제 세 번째였다. 두 번 다 그는 자발라를 따라다녔고, 리바이어던이라는 곳과 깊은 바다를 방문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선봉대와 직접 관련된 임무가 아니라 그의 조언을 구하기도 애매했다. 리안은 그저 자동 소총을 들었다가, 파동 소총을 쥐었다가, 기관총을 메었다가, 수류탄을 던지며 묵묵히 일을 진행해갔다. 인도적인 작전을 요청하는 까마귀에게 반발하지 않았고 헬름이 붕괴할 때도 에라미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리안이 수호자 생활을 이어가며 소중히 여기게 된 건 그의 화력팀과 최후의 도시, 그리고 탑이었다. 까마귀가 탑의 균열을 불러일으키던 때는 그를 적대시했지만 딱히, 좀 더 따지자면 굳이 진심으로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그가 선봉대의 헌터 선봉대장의 위치에서 제대로 된 지시만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에라미스는 적이긴 했으나 헬름을 부순 건 그가 아니었고 이미 감금한 포로에 대한 정당한 재판을 언급하는 자발라의 말에 납득하지 못 할 부분은 전혀 없었다.
다만 빛의 가문에 대한 판단은 어려웠다. 인류와 함께 도시에 거주하는 동맹이지만 애초에 다른 종족인 만큼 리안은 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이들의 어떠한 부분만 골라서 수용하는 것이 왜 옳거나 그른지도 고려해야 하고, 리안은 잘 모르는 과거의 어떠한 일이 아직도 인류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하고.
이번에는 그가 스스로 생각해보고 판단하길 원했다. 하지만 리안이 빛의 가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이에도 아이도와 미스락스의 일은 진행되었다. 리안이 부탁 받은 대로 가지고 온 재료들로 아이도의 토닉 상점엔 좋거나 기묘하거나 씁쓸한 향이 더해졌고 회수한 장비들로 점점 복잡해졌다. 수많은 반복을 통해 토닉 레시피가 늘어나는 동안 미스락스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마치 네자렉이 나타나려는 걸 알리고 싶다는 듯 이어지는 언행에 리안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보류했다. 네자렉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임무에 가까운 다른 판단만을 남겼다.
“무리한 요청인 걸 알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이건, 이건.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 반발심. 그리고 거의 처음 느껴보는 강도의 불쾌함. 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숨을 길게 내쉬길 반복하며 스스로를 가라앉히려고 해보았다.
“거미가 좋아할 황금기 성물이 있어요.”
그리고 거미까지.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 같은 거죠.”
아이도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질 않았다. 헬멧의 기능이 고장 났을 리는 없지만 리안은 우선 헬멧을 풀어 머리에서 빼냈다. 그리고 드러난 맨 귀로 홀로그램 프로젝터의 음성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거미는 온갖 유용한 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탈옥할 땐 다들 거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어요?”
헬멧은 멀쩡했다.
“더는 지체하지 말죠. 분명히 이게 옳은 결정이에요.”
프로젝터 위 홀로그램이 두 쌍의 눈을 반짝인다.
“만약 아니라면……. 까마귀에게 사과해야겠죠.”
그 말에 리안은 순식간에 판단을 마쳤다. 말을 마친 아이도의 홀로그램이 사라지기 직전, 리안은 아이도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지지직거리던 홀로그램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두 쌍의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수호자?”
“난 안 해.”
단호하게 대답한 리안은 헬멧을 다시 썼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혼잣말만 중얼거리는 미스락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떤 식으로건 얼마 안 남았다. 이러다 기적처럼 낫거나, 아니면 네자렉이 다시 나타나는 기반이 되거나, 어쩌면, 아이도에겐 가장 비극적인 결말이거나.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빛의 가문의 켈의 상태가 괜찮을 때 와서 학살자 남작 지위를 반납하겠어. 그리고, 난 그 살인마를 풀어주는 데에 협조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당장 방법을 찾지 않으면 저 밖에선 수백, 수천의 엘릭스니들이 경멸자로 변해버려요! 지금 이 순간도요.”
그 말에 불쾌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리안은 드물게 선명한 자신의 감정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데에 유감스러움도 조금 느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신랄한 말이 쏟아졌지만 그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 감정 자체가 낯설었고 그걸 자각하면 할수록 불쾌함은 더욱 커져 분노로 변해갔다.
“나한텐 지금 네가 엘릭스니를 구하자고 인류가 수백, 수천이 죽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려는 걸로 들려.”
“아니요, 인류에게 해가 가지 않을 거예요. 에라미스를 감시하고 구원의 가문에 대한 보호를 약속하면-”
“감시는 내가 하고, 보호도 내가 하고, 약속은 내가 하면 안 되겠지.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내가 책임지고, 선봉대 몰래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죄수를 풀어준 부분도 내가 책임지고. 그러니 더욱 열심히 감시하겠지, 그런 뜻이야?”
“맙소사, 수호자, 제 말을 좀 더 들어줘요.”
“에라미스가 풀어주면 미스락스도 고치고 피크룰도 물리칠 방법을 확실히 제공하겠다고 리이스라는 곳을 걸고 맹세라도 했어? 했다고 한들 사법 거래도 정보를 먼저 받고 형을 감할 텐데, 내가 잘 못 알고 있어? 아니면 그게, 엘릭스니의 방식이야?”
“수호자!”
“전투는!”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도의 홀로그램이 움츠러들었다.
“네가 할 수 없는 부분이야, 알아!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도왔어. 재료도 모으고, 레시피도 다 알아냈어. 생색내고 싶지 않아. 그런다고 켈을 치료하진 못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보고 내가 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이제 내 손으로 직접 선봉대의 지시도 무시하고 탑과 인류를 위협할 존재를 풀어주라고?”
헬멧에 가려진 각성자 특유의 안광이 흉흉하게 빛났다.
“아니예요 수호자, 미안해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아이도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하지만 꿋꿋하게, 간곡하게 말을 이어간다.
“아버지를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해요. 엘릭스니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해요. 하지만 수호자, 방금 이야기한……, 옛 리이스의 노래로 메아리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면, 분명히 에라미스가 알 거예요. 그리고 네자렉 역시 메아리처럼 인류에게도 중요한 문제이지 않나요?”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서슬 퍼런 눈이 토닉 상점 안을 훑는다. 그가 화를 낼 걸 예상하고 아이도가 홀로그램으로 통신한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늘 말이 없었고 그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 뒤 다시 전장으로 떠나곤 했으니까. 화가 난다고 해서 저기 힘없이 늘어진 미스락스를 죽이거나 잘 정리된 토닉 연구 재료들을 불태우거나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은 말이 지나치게 나갔다. 아이도를 더 몰아붙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사과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분은 어떻게 풀어야 하지? 다른 이들처럼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다면? 상대에게 타협의 여지가 있다면 화를 계속 내는 게 의미가 없을 텐데?
“난 안 해.”
“수호자, 제발.”
“난 에라미스가 평생을 자발적으로 돕는다 해도 무기징역이나 될까 싶은데, 억지로 도우라고 시키면서 자유를 쥐여준다고?”
“다른 방법이 있나요?”
“없다고 하면 날 비난하려고? 대책을 마련하라면서?”
허탈하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힘이 없다. 손을 축 늘어뜨렸다.
“난 할 만큼 했어. 전투도 아닌 부분은 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은데, 혹시라도 누군가가 내가 너에게 탈옥을 시켰다는 식으로 말할까 걱정이네.”
그대로 다시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나오려는 사과를 삼켰다.
“그래서 선봉대에 미리 전달하려고. 알아서 해, 진짜로.”
그리곤 무언가 말하려는 아이도를 두고 돌아섰다. 문을 빠져나가며 그는 자신이 홀로그램이 사라지기 전 프로젝터를 등진 게 처음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나른한 햇살이 몸을 덮는다. 리안은 얇은 바람 속 분홍색 로브를 입은 워록이 흘러가는 물을 보고 선 모습에 정처없이 걸어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까마귀를 보고 놀라진 않았다. 애초에 그는 까마귀를 피하려던 게 맞았다. 한참 전부터 토닉 상점 입구 근처를 서성이는 익숙한 기척을 느꼈으니까.
“에라미스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했어.”
저 분홍빛 워록에게 들리지 않을 거리인걸 알면서도 새삼 그 작은 속삭임에 허리를 기울였다. 그리고 빈정대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화를 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아이코라도 아이도의 시도를 알고 있고.”
“…….”
“수호자, 다시 생각해줄 수 없나? 난 경멸자도, 우리의 동맹인 몰락자도, 인류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껴.”
조용히 각성자 헌터의 눈을 쳐다보았다. 리안도 각성자였지만 그건 리안에게 친밀감을 느낄 요소가 아니었다.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편법이지만, 난 되도록 피해를 줄이고 싶어. 이번 작전의 시작 때 내가 한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야.”
“사령관님은?”
자발라에 대한 언급에 까마귀는 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리안은 더 이상 까마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폈다. 까마귀는 추락한 헬름으로 걸어가는 리안을 두 번 잡진 않았다.
한참을 따라오던 테레오가 부서진 헬름으로 통하는 포탈에 들어가기 전 의체를 기울인다. 리안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도 잘 알았다. 이건 전혀 어른스럽지 못 한 태도였고, 아이도의 의도를 알고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선 안 되었으며, 까마귀의 말에도 조금은 더 경청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화를 내는 것도 제대로 안 되고 허탈한 무력감도 오래 가지 않고 아예 콱 막혀 답답해진 자신의 마음은. 오죽하면 그 바쁜 애리에게 굳이 찾아가려고 할 만큼 굳어버린 자신의 마음은?
“화내는 방법 좀 물어볼래.”
“일단 너한테 화를 낼 테니 보고 배우면 되겠네.”
“아니야, 늘 그렇듯 잘 가르쳐줄 거야.”
“사고치고 들어가기 싫어하는 민간인 아이 같네. 그 아이 이름이 뭐였지, 마르?”
“아, 맞다. 마르한테 과자 사주기로 했는데.”
“혼나고 사다 줘.”
꽤 무심해 보이는 어조로 가벼운 대화를 마친 테레오는 의체로 가볍게 리안의 손등을 건드린 후 사라졌다. 잠깐 서서 여전한 햇살을 바라보다가 포탈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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