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아카]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친애하는,

애셔님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친애하는,


눈이 그쳤다.

클라비에는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신호를 상인들에게 전달했다. 대체로 유쾌한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조용히 웃음을 삼키느라 고역이었으나, 지금은 오랜 추위와 피로가 그들의 입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특히 대담하던 상단주는 클라비에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람 한 점 없으니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동료들의 엉덩이를 걷어찬 끝에 눈보라를 맞닥뜨린 후로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유령의 영향권은 벗어났습니다만, 아직 산을 내려가는 일이 남았으니 힘드시더라도 주의해주십시오.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도록 가능한 제가 걷는 길로만 따라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대꾸 없이 클라비에의 뒤를 따랐다. 어린 여자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던 이전보다야 한결 나은 태도였지만, 클라비에는 그 침묵을 편하게 여기지 못했다. 그들의 지친 얼굴 위로 왜 유령을 퇴치하지 않고 지나가냐는 의혹과 불안이 비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 고스트 헌터란 은제 무기로 해로운 유령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직업이라고 알고 있는 그들에게 사방이 뻥 뚫린 눈밭이라는 환경의 한계와 유령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없는 자신의 한계, 그리고 저 유령의 사연을 열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클라비에가 이 일을 하며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설명하고 이상한 시선을 받는 것보다 행동하고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호젓한 설원에서 열두 명의 사람들과 세 대의 썰매, 여섯 마리의 순록이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 날은 클라비에에게도 고단한 하루였다. 눈보라와 환영으로 사람들을 크레바스로 이끄는 유령을 견제하며 동시에 수많은 인원의 상단을 통솔해야 했고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도록 수시로 바람의 방향과 시계를 확인해야 했다. 이제는 어머니의 도움 없이도 곧잘 길을 찾을 수 있다지만,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자꾸만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그때 시야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서리 낀 눈가를 닦아내고 클라비에는 다시 정면을, 어느새 새벽처럼 환해진 주변을 살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그럴 리가. 의문스러워하기도 잠시, 무언가가 다시 어른거렸다. 그것은 어린 혼백이 눈밭을 어지럽게 뛰어다니듯이 곳곳에서 일렁거렸고, 이윽고 수천 겹의 빛살이 되어 하늘과 이어졌다. 붉은색, 보라색, 청록색… 어떤 색으로 이런 빛을 형용할 수 있을까. 창가에 내린 쉬폰 커튼처럼 빛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모두가 멈춰서서 신의 캔버스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적의 오로라군. 좋은 징조야."

"가족들이 우릴 애타게 부르고 있나본데."

"자네 돌아가신 할머님께서 우릴 돕고 계시는 거지."

그들은 피로를 잊은 채 그리운 이름, 돌아가고 싶은 장소, 간절한 것들을 염원했다. 잠시나마 웃음 소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 속에서 클라비에는 오랫동안 하늘을 응망했다. 거인의 치맛자락 같은 빛 아래에 선 채 그들처럼 무언가가 떠올라 마음을 잠식하기를 기다렸다. 자연에 대한 외경과 희귀한 것을 체험했다는 환희가 먼저, 그리고 이내 그것이 쓸려나간 자리에는 이 광경을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남았다. 돌아가면 편지를 써야겠구나. 이 광경을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지 이른 고민에 빠지길 잠시, 클라비에는 문득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렸다. 차 향기와 옅은 물감 냄새가 감돌던 어느 오후, 한낮의 햇살로 물든 깨끗한 소매와 흰 손끝을.

그리하여 클라비에는 또 한 장의 편지를 쓴다.


"정말로 여기까지 오다니."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에 묻혀버릴 듯이 작은 음성이었다. 클라비에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의 혼잣말을 알아차리고는 잘 닦은 사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납치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여유로운 태도로 농담을 덧붙이는 클라비에의 목소리에서 설렘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여행길 내내 숨어다닌 데다 그의 원래 신분을 밝히지 못해 좁은 객실 외에는 표를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지친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가짜 콧수염과 중후한 의상을 입고 창가에 팔을 올려 턱을 괸 그와 남장한 채 시골에서 이제 막 올라온 조수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요즘 서점에서 유행하는 모험 소설의 줄거리라고 해도 손색 없을 경험이었다.

내심으로는 그가 이번 여행을 수락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애셔 시어도어, 그가 어떤 사람인가. 시어도어라는 막중한 고유명사를 승계하여 젊은 나이로 사업계에 발을 들이고, 그 후로는 놀라운 소식의 연속이었다. 클라비에에게 역사란 느리게 움직이는 물결이었거늘, 그는 뱃머리의 첨단에 선 채 물결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신문에서는 심심찮게 그의 이름이 연호되었고 새로운 건물, 새로운 다리, 새로운 철도, 새로운 뱃길에 새겨지는 공로자 목록에서는 어김없이 시어도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졸업식날 아카데미에서 촬영한 사진이 아니었더라면, 아카데미에서 함께 보낸 기억이 아니었더라면 클라비에는 그의 이름을 역사서나 잡지에 기재된 수많은 고유명사 중 하나로만 인지했을 것이다.

그렇게 공사다망한 인사임에도 그는 친구들의 소식이 잠깐이라도 뜸하면 답장을 독촉하는 편지를 보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어디서 또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진 않았는지, 지금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특유의 냉소적인 어투로 소식 없음을 탓하면서도 염려를 숨기지 못하는 유려한 필체에서 클라비에는 언제나 그의 다정을 읽었다.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날처럼,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글로나마 그도 함께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에 자신이 지내던 곳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답장한 것을 계기로 편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함께하고 싶다는 기원을 그에게만은 말하지 못할 줄 알았다. 이따금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편지하는 친구들과 달리 그는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는 사람이었다. 동기들이 다같이 모이는 특별한 일정이 아니고서야 그에게 먼저 함께 떠나겠냐는 말을 꺼낼 일은 없겠구나 짐작했건만, 쉽사리 함께할 수 없으니 당신을 납치하겠다는 농조에 그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짐작이 꺾이고 자그마한 가능성과 희망이 싹텄다.

단 한 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단 한 번, 그와 같이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을 보여주는 게 좋을까?

오로라는 그러한 설렘으로, 그라면 그 광경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게 될 것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된 이야기였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데다 고급스러운 침구가 아니면 잠들기 힘들어하는 그에게는 고된 여행길이겠으나, 오로라를 보러 갈 테니 당신을 납치하겠다는 계획을 그는 받아들였다.

"신기합니다."

"뭐가?"

"시어… 애셔님과 정말 오로라를 보러 간다는 것이."

"…조수가 납치의 귀재여서 말이지."

그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클라비에는 완벽한 변장으로 그의 비서와 경호원들을 따돌리던 순간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그도 그렇지만," 말을 이으며 며칠 사이 자주 웃느라 당기는 뺨을 매만졌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저는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여행을 떠날 수 있었지요."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방랑자겠지. 노숙자거나."

"그 말씀대로입니다. 꼭 집이 아니더라도 가족이 있는 곳이나 친구가 사는 곳… 하다 못해 연구해야 할 소재들과 답장을 기다리는 편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멀리 떠나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구나 하며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신기하다는 말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면서도 그는 차분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훌쩍 자랐음에도 낯익고 친근한 모습을 눈에 담으며 클라비에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애셔님은 저와 반대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셔님께서는 일찍이 남다른 책임을 짊어지셨지요. 그래서… 단단히 뿌리 내리며 가지를 뻗치기 때문에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는 사람… 바람 불듯 가끔 닿는 편지로 마음을 잠시 떠나보낼 뿐, 나무가 걸어다니지 않듯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그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생각에 잠긴 듯 눈길을 내린 채 뺨에 그림자를 드리운 그를 클라비에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떠나지 않는 것일까 떠나기를 외면하는 것일까. 어릴 적 우리는 검은 숲과 호수를 탐험하며 강한 악령이 지배하는 거대한 저택을 누비고 다녔다. 새파란 어린애들이 통솔자 없이 위험을 마주하며 곳곳을 파헤치는 동안, 그는 대열의 선두나 후미에 서서 양들을 보호하려는 양치기처럼 굴곤 했다. 비록 그 저택에서 그는 잊어버릴 수 없는 깊은 상흔을 얻은 듯했으나… 그 모든 기억이 그에게는 멀리 해야 할 위험에 불과했을까? 작은 유령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각자의 모험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던 소년은 영영 사라졌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었으나, 클라비에는 여전히 그에게서 보이는 어떤 징후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질서정연하고 흑백이 깨끗하게 나뉘며 손익이 수치로 계산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동시에 그는 무질서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자신의 여행에 대한 감상을 그토록 섬세하게 적어 보내며 다음 이야기를 요청한다. 그 두 가지는 그에게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모든 것에서 가치와 아름다움을 읽어내므로.

"하지만… 역시 애셔님과 함께 여행하고 싶었나봅니다, 저는."

그에게 보내던 편지 말미, 풍경을 보니 그가 생각난다거나 보고 싶다는 말 뒤에는 그러한 진심이 있었던가. 생각을 앞질러 쏟아져 나간 말을 끝으로 클라비에는 후련하면서도 안도가 깃든 미소를 띠었다. 침묵이 잠시 지나갔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이내 나 참, 탄식을 흘렸다.

"납치범의 사연치고는 너무 어린애 같군. 그걸 이제 안 거야? 너무 늦잖아."

"원래 범죄는 충동적이지 않습니까."

"말은 잘 해."


"도착했다. 정신 차리고 내릴 준비 해, 에어."

"치, 치지 마십시오… 윽."

배가 항구에 닿자 선장 보거의 지시에 따라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닻을 내리고 다리를 설치했다. 보거가 마신 술 탓인지 오늘따라 파도가 유난히 거센 탓인지 클라비에는 한층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겨우 항구에 발을 디뎠다. 선원들이 무역품과 수하물을 내리느라 오고 가며 제 어깨를 툭툭 칠 때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느라 한참 동안 난간을 붙잡고 서 있어야 했다.

"이번엔 어딜 다녀온 거야?"

"여전히 뱃멀미 심하네. 약이라도 먹지 그랬어?"

"먹었습니다…. 남쪽 대륙에 다녀오느라 배를 오래 타서 그런 겁니다. 욱…."

"저런 상태로 잘도 여행을 다닌단 말이지…."

여행은 그만 두고 틀어박혀서 연구나 하라는, 핀잔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바닷바람을 맞고 서 있자 조금씩 속이 가라앉았다. 벨루스와 웨일스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 조개 껍데기로 화려한 장신구와 장식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섬.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지도 어언 4년이 거의 차오르고 있었다. 은을 대체할 수 있는 소재에 관한 연구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마지막 시험 매개와 연구 소재를 찾고 겨우 귀환한 참이지만… 아직 밟지 못한 지역을 한참 남겨둔 채 귀환한 탓에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먼저 짐을 정리하고, 그동안 쌓인 편지와 업무 연락에 답장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세며 해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던 클라비에에게 선원 한 명이 커다란 짐을 들고 다가왔다.

"에어, 이거 너한테 온 소포야. 꽤 무거운데 들어줄까?"

"괜찮습니다. 곧 수레가 도착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배에서는 수면제를 먹고 기절해 있느라 미처 살펴보지 못했는데, 누가 보낸 걸까? 이 시기에 소포를 보낼 만한 곳이 짐작되지 않는 데다 소포의 형태가 커다란 액자 같아서 더더욱 의아했다. 수신인을 막 살펴보려던 찰나 수레꾼과 나귀가 도착했다.

"사미라님!"

"어서 와, 비비! 떠나는 줄 알았더니 기어코 돌아왔구나."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리는 잘 있지요? "

"얄미울 만큼 건강하단다. 갈 길이 멀다. 얼른 타렴."

수레를 타고 40분, 산 중턱까지 30분, 부지런히 움직여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두웠다. 산 아래 마을은 일찍 해가 진다. 정원과 입구의 기름 램프를 밝히고 휴대용 램프를 사미라의 수레에 달아주자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았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환기하고 먼지부터 치우라는 친구들의 조언을 외면하지 못하고 한참 움직이다보니 소포를 거실로 옮겼을 땐 이미 달이 산 봉우리 위로 솟아오른 후였다.

"시어도어…."

소포 겉면에 찍힌 인장이 낯익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셔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가끔 과분하다 싶을 만한 선물을 한 번씩 보내주고는 했지만… 오늘은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닌데 무슨 일로 보낸 것일까.

난롯불과 램프를 곁에 둔 채 포장을 뜯어내자 액자가 보였다. 반사광이 걷히고 액자 귀퉁이부터 다양하고 복잡한 색채가 조금씩 드러났다.

"오로라."

그날의 그림이다.

클라비에는 액자를 정면으로 세워 탁상에 기대어 둔 채 그림이 한 눈에 보이는 곳까지 물러나 앉았다.

머리 위로 차가운 바람과 빛으로 일렁거리던 커튼이 쏟아졌다. 도시나 마을의 불빛, 작은 모닥불로도 금세 흐려지는 연약한 광망, 그러나 충분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색채를 바꾸며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던 극북의 선연함. 난로 앞인데도 추위가 덮쳐들어 빈 손을 말아쥐었다. 온기가 없어 서로의 손에 겨우 의지하던 때처럼.

함께 여행자가 되어 선 눈밭에서 그는 무언가에 휩쓸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티 나지 않을 정도의, 아마 그의 오랜 태도와 습관이 만든 바대로 고요히 도사릴 뿐인 동요. 그는 인내하는 사람처럼 목도리와 털 옷에 파묻힌 채 침묵을 지켰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군요.'

그때 자신의 표정은 괜찮았을까. 아쉬움이 너무 많이 드러나진 말았어야 할 텐데. 그에게 충동은 자신에게 그렇듯 경이로운 미지로 이끌어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클라비에는 그에게 자신이 먼저 단호해지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납치는 자신이 그에게 줄 선물이어야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가 말한 목표를 스스로 어기게 부추길 수는 없다고. 부디 의기양양한 얼굴이기를 바라며 미소지었다.

'정말로 견디기 어렵다면, 다시 납치를 기획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니 다음을 기약하자. 우리 우연히 만나 서로의 이름을 알았듯이, 나는 당신의 모험으로 남아 당신이 만든 발판을 디디어 만난 세계를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 마땅한 보상이라면, 당신이 바라기만 한다면.

'그건… 나쁘지 않군.'

밤이 물러나며 설익은 해가 눈밭을 환히 밝혔다. 맑은 홍차 같던 그의 홍채가 새벽빛으로 물들었다.

한겨울의 기억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가는 동안, 클라비에는 오래도록 그의 손을 잡아 지탱해주며 기원했다. 잊지 말아주길. 눈 감는 시간조차 아까운 그의 빠듯한 삶 속에 그가 만들어준 풍경을 반드시 데려갈 것임을. 삶의 관성이 그를 지치게 하는 순간 지지대가 되어줄 것임을.

'그럼, 다음에 또 편지하겠습니다. 그리고…'

설원 아래 산의 초입, 클라비에는 그를 마중 나온 비서와 경호원들을 죄책감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시어도어 가의 주인으로 돌아간 그를 눈에 담았다. 헤어지고 나면 그는 그의 세계로, 자신은 자신의 여행길로 멀리 떠날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한 번씩 일상을 망치러 오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해준 그에게, 저도 모르게 어리광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말았다. 쑥스러워 어색한 미소를 짓자, 가만히 서 있던 그가 두 걸음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끌어안아주었다. 서리 바람 냄새가 나던 그의 옷깃에서 평소의 그와 어울리는 단정하고 포근한 향이 났다.

'그래. 그때까지 건강히 지내.'

'네. 애셔님께서도 부디 건강히.'

'답례를 보내지.'

'그러지 마십시오. 이번 여행으로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만족스럽든 말든 받아두라던 그의 답례가 이런 형태일 줄이야. 방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유화 냄새를 맡으며 클라비에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발광석으로 밤하늘처럼 빛나는 비스테인 탄광, 바람이 불면 파도처럼 일렁이는 드넓은 러셸의 밀밭, 노을이 단풍 숲으로 스며들어 광염을 일으키는 루테스의 숲, 고래가 얼음을 깨고 숨을 내뿜는 웨일스의 겨울바다, 거북이와 물고기가 돌아다니는 산호 숲을 이룬 벨루스의 바다… 그리고 더욱 멀리, 남쪽 대륙의 사막을 비롯해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 그곳에서 이어진 역사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미 과거에 종결되어버린 유령들의 이야기, 동물과 식물의 생태. 힘이 닿는 한, 걸음이 허락하는 한 클라비에는 욕심껏 나아가 모든 것을 기록해 사람과 사람을, 이야기와 이야기를 엮을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들이 있으므로.

친애하는 그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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