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鏡花水月
:: 거울에 비친 꽃과 물에 비친 달 ::
언젠가, 그 애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 그건 대화였다. 그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미도, 달도, 정말 아무것도.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무언가일 뿐이었겠다. 초연하게 그 시간만을 오롯 즐기던 네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더, 다신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우리의 순간을.
鏡花水月
거울에 비친 꽃과 물에 비친 달
[ 이 밤이 지나도 노래 속 이야기는 계속된다. 계속…… ]
당신의 마법은 안녕하십니까? - 東方夢想幻談錄 : 秋景夜想曲
물가에 비친 만월 위로 흐린 장미 한 송이,
그리고 캄파뉼라 한 송이.
검보랏빛의 공간 속에서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 그리고 그 아래의 땅, 다계. 그 중앙의 자리한 태초의 도시는 꽤나 조용했다. 그래, 정말 너무 조용해서 루예나 는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조용하니, 도대체 전에는 무슨 일들을 벌였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근데 진짜로 뭐 했더라? 여름 휴가, 말고… 재밌는 카페 놀이, 말고……
아, 도대체가 말이지! 이젠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
“뭐하니?”
오매 깜짝아.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물어보는 크롬벨의 면전에 대고 루예나가 그다지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놀라 했다. 아니, 이분은 왜 나한테 온 거지?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고?
………아니, 이해할 수 있다. 너무 심심하니까. 크롬벨도 그랬겠지. 분명히 그랬을 거야. 나만큼이나 지루함을 느껴서… 골똘히 고민하던 루예나는 이런 생각으로 현실 도피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눈앞의 선배님을 만족시켜드려야 했다.
“그러게요… 뭘 해야 할까요. 할 게 없어…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구, 누군가 뭘 하자고 부탁한 것도 없고, 하다못해 부업도 의뢰 하나 없어…!”
“…너 뭔가 되게 많이 손댔던 편이구나?”
“제가 좀 많이, 유능해서 말이죠.”
와, 조금 재수 없어 보였어. 크롬벨이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절대 거짓말은 아니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루예나가 책상 위로 엎드렸다. 명백한 무기력의 증거였다. 멋쩍게 웃는 크롬벨이 턱을 긁적이며 운을 띄웠다.
“에이, 그러지 말고… 그럼 나랑 놀러 나갈래? 어딘가 좀… 인간이 많은 차원으로.”
“엥, 우리 둘만?”
다른 사람들은? 반문하는 루예나에게 크롬벨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이런 걸 두고 단둘만의 데이트라고 하던가. 꽤 오타쿠적인 관점으로 생각하며 루예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가는 것까진 좋은데, 어디로 가야 한담…
“뭐, 좋아요.”
꽤 호기롭게 말했다만, 정말 어디로 가야 한담? 은퇴한 직장 상사를 모시고 나들이에 놀러 가는 것과도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루예나가 곰곰이 생각했다.
크롬벨은 위대한 다섯 금기의 일원 중 하나였다. 아주 먼 옛날 옛적에, 인간을 싫어하던 수많은 고세대… 그러니까 화석 같은 만다라들 사이에서 태어난 희대의 천재. 종족에 대한 편견이 없던, 만다라가 자부했던 최고의 재능. 그는 종족을 위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주를 떠돌아다녔고 마침내에는 인간을 사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멸할 때까지 만다라 역사에 선을 긋고 간 만다라. 다시 살아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으나 다른 만다라들은 그것을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예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존재’의 안배라는 것을. 뭐, 주인공은 이런저런 걸 알고 있는 법이니까.
하여튼, 그랬으니 크롬벨이 좋아할 만한 곳은 아무래도 다양한 인간들의 집합체인 인간의 온상과도 같은 곳인 게 틀림없다. 인간 온상, 인간 온상… 아무래도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누가 좋지?
계절 도서관에는 이종족이 너무 많다. 마법의 지구는 당연히 거름 대상 1호고, 엔스파일은 인간 온상이라기에는 애매하다. 앤블라썸드는 아직 절망적인 것들의 비중이 더 커 다양하지 못하고, 엘라는 지구인인 데다가 성격을 생각하면 역시 탈락이다. 인간의 온상은 좀 더 지구에서 벗어난 곳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다른 종족이면 몰라도 크롬벨 또한 결국 만다라니까.
다양한 온상이라고 했을 때 사실 그 애가 생각났다. 정말 다채로웠는데, 결국 사라져버린 아이. 일레나의 일은 저에게도 매우 유감이었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수많은 모습을 보여주던 흰장미는 하나로 물들어 시커메졌다. 애매하게 입장과 입장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던 그 시절이 좋았는데, 나는 매번 이렇게 떠올리기만 하는구나.
그렇게 계속 생각을 꼬리 물기 하듯 떠올리다가, 문득 그곳이 생각났다. 재미있던 카페였는데. 옥상의 식물들은 괜찮으려나 몰라? 핑계 삼아 다시 한번 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일… 아니, 아니다. 그 카페도 결국 지구에 있는 거니까. 그럼 어디로 가야……
한 때, 꽤 별나게 혼자서 그곳을 운영하던 적이 있었다. 그래, 맞아. 몇 번이고 도와주던 사람들이 바뀌던 그 시절에 나는 한 송이 캄파뉼라를 보았다.
알고 있다, 종국에는 죽을 운명의 생명이란 걸. 운명 따윈 믿지도 않는 내가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유는…… 아니, 지금은 이걸 말할 타이밍이 아니지.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 당신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지금은 당신과 저 우주 너머에 대해 깊게 얘기할 타이밍이 아닌 걸 당신도, 그리고 나도 알고 있으리라.
아무튼. 그 사람, 어떻게 되었으려나.
“크롬벨, 움직일까?”
“오, 드디어 어디 갈지 정한 거야?”
“그럼,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에요.”
우리의 빛을 머금고 피어난 장미의 세계.
왕관을 위해 검과 검이 서로를 마주하고, 그렇게 꽃으로 산산이 조각나고 마는 그곳.
푸른 장미의 제국에는 해가 떴다 지고, 섬에는 가을이 찾아왔다며 물이 밀려들고 오월의 선율에는 기억이 흐르고, 초승달 아래의 영광에는 사랑이 들고 여름에 꾸는 꿈길 위로 별이 춤추는 곳,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낙원이 개화하는 날에는 천상의 노래가 들려올 테고 그 너머로 나아가면 저 멀리 박명이 비추어 윤회가 시작되는 곳, 천제 아래의 죄지은 셀레넬리온은 스러졌고 남겨진 새장 속에서 방랑하는 이들이 자정에 불붙였던 성화가 삼켜 사라진 전설들을 업고 나아가는 세계.
그래, 그 속으로 나는 당신을 데려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대지 위에서 푸른 캄파뉼라가 나를 기다려주면 좋겠노라, 꿈꾸고 있다.
“오… 그래서 저건 정말 누구지?”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아직 어리구만, 꼬맹아!”
차원의 입구 근처에서부터 걷는 동안 자꾸 누가 보인다고 하는 크롬벨의 말은 이제 지겨워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넓은 곳의 감각은 닫아둔다. 개방했다가 물밀듯 쓸려 들어오는 무엇에 감정이 휩쓸릴지 알고 무작정……
“어휴, 공간을 뭐 이럴 때만 쓰나… 잘나셨어요, 고세대는 확실히 뭔가 다르……”
“음? 루예나? 왜 말을 하다 말아?”
……어? 잘못, 봤나? 어? 아니네…?
어, 이상, 하다. 쟤가, 왜, 여깄, 지? 아, 크롬벨이 본, 게, 쟤, 였어?
그리고 저편의 상대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우리 모두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 잠시 모든 게 멈춘 것처럼 다들 멍하니 서 있다가, 상대방이 먼저 물었다.
“아니, 왜, 네가 왜, 여길, 와?”
“………저기, 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거든…?”
“뭐야? 아는 사람이었어?”
먼저 묻는 상대와 반문하는 나, 그리고 궁금해하는 크롬벨까지. 이 무슨 혼돈의 만남이란 말이냐.
크게 뜬 눈으로도 알 수 있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려는 고 하나 반응에서부터 훤히 알 수 있었다. 상대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겨 나오는 것만으로도 크게 놀랐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쌤쌤인 셈 치기로 했다. 물론 나는 어디까지 마음속으로만, 지만. 아, 근데 쟤는 어딜 가던 중이길래 우리랑 길이 겹친데.
“그렇게 노려보지나 마… 난 그냥 놀러 나온 거고, 이건 진짜 완전 우연이거든…?”
“야, ‘쟤’가 너 이 갈면서 보는데.”
나도 안다, 나도 알아.
얘랑 크롬벨은 처음 만나고, 어리둥절해 하는 크롬벨께 설명해주기엔 상황이 딱히 좋지 않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쟤는 말이죠, 굳이 예를 들자면 엄청 대기업인 나랑 여러 문제로 싸우는 사이인데 뭔가 꼬여서 투자처 때문에 재만 사업 말아먹은 것 같은 그런 가엾은 중소기업 사장 포지션이에요.’라고 할 순 없잖아.
“하! 내 이름은 ‘쟤’가 아니고 제베르나거든!”
“아, 그렇구나! 미안하다, 내가 다시 살아난 지 얼마 안 돼서 누군질 몰랐다! 아, 너 유명한 사람인 거니?”
“…끼리끼리 친구 사귀는 거 티 내는 거야, 뭐야?”
멍청하게도, 기가 막혀 하는 제베르나는 눈앞에 있는 게 누군지 생각도 안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단 나랑 있으면 상대도 만다라일 수 있다는 걸 왜 고려하지 않고 저렇게 말하는 걸까? 저러니 슈라가 고래고래 난동을 피우지… 그리고 언제나 뒷감당은 내 몫이고…
“얘, 너야말로 이분이 누군진 아니…?”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이분은 희대의 천재이신 고세대 만다라 크롬벨이시란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신 대선배님이지!”
“뭐?”
“믿기지 않겠지만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단다. 너랑 똑같은 반응이었지.”
“넌 나 봤다가 1초 만에 침착해졌잖아.”
“조용히 해요, 크롬벨. 이럴 땐 모르는 척, 그런 척해줘야지.”
크롬벨과 헛소리에 가까운 말들을 주고받는데도 제베르나의 태클 따위가 걸려오지 않는 이유는 너무 충격적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 네가 아직 제베르로서 나를 만날 의향이 있다면 이미 다 알려줬을 텐데.
아, 이건 어쩔 수 없다. 불가항력이야, 정말. 나는 원래부터 그랬어. 과거를 그리워하고 추억이라는 향수에 폭 젖어 옛날의 행복을 들여다본다. 그래, 그러니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새롭게 시작하던 처음이 제일 즐거웠던 법이다. 너의 꽃잎은 내게 있어 책장 사이에 끼워둔 오랜 추억과도 같아. 그러니,
“제베르.”
“…뭐? 제베르가 어딨어,”
있지, 나는 우리가 아직,
“제베르.”
“그렇게 부르지 마.”
이 정도의 조금이라면, 되돌아가서,
“제베르.”
“부르지 말라고!!!”
다른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
“제베르. 있지, 나랑 갈래?”
얼굴로부터 드러난다,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냐’, 고.
하지만 제베르, 이건 기회야. 너도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면 바로 알겠지. 그리고 깨닫는 순간이 오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그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할 테지,
“……그래.”
라고.
내가 크롬벨에게 제베르나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고 나자, 크롬벨은 얼씨구나 하고 제베르나에게 제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주었다. 끝까지 다 듣고 난 제베르는 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긴, 이해하느라 바쁘시겠지. 그리고 사실 저 멍청한 표정이 좋다. 관찰하는 데에 있어 제일 재밌으니까. 아, 방금 좀 나쁜 사람 같았다.
“지금… 나보고… 이걸 다, 받아들이라고.”
“이해 안 가는 건 쟤가 더 잘 말해줄걸?”
크롬벨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진짜 너무 사실이라서 어깨나 한번 으쓱해주었다. 정말로, 여기서 나보다 더 모든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 아니, 됐어, 요. 그건, 됐어. 됐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어색한 존대를 붙여가며 크롬벨에게 대꾸한 제베르가 내게 물었다.
“음… 인간 온상?”
“그런 단어 쓰면 너 말고 아무도 못 알아들어!!”
제베르가 빽 소리쳤다. 하긴. 그렇지, 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목적지를 정말로 그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뭐라고 해줘야 할지…
“으음… 그럼, 크롬벨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있는 곳, 너랑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이 있는 곳. 이러면 될까?”
“으……”
칠색 팔색이라는 어조에, 더 이상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꽤 기대하고 있다. 흐린 장미와 푸른 캄파뉼라의 만남을. 생각 없는 지배자들을 증오하고 혁명을 꿈꾸는 두 꽃을.
그리고 그걸 지켜볼 두 사람의 시간을.
정말 기대하고 있다, 나는.
그곳은 늦은 낮이었다. 그래, 초저녁 무렵이었다. 아직 노을로 접어들지 않은 오후의 태양이 꽤 따사롭게 대지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풍요의 황금빛으로 작게 빛나는 이 행성이 아닌, 기나긴 공허의 우주를 저 멀리서부터 빛나는 별들의 빛을 발판삼아 걸어 지나오며, 나는 줄곧 생각했다. 이 시간, 이 땅에 네가 있을까, 를. 내가 아직 늦지 않았을까, 를.
“장미꽃밭…”
제베르가 중얼거렸다. 타파티움이라도 생각났나 보지, 그 녀석은 이제 정원사니까. 주위를 둘러보는 크롬벨과 요 앞치의 장미꽃들로 평원을 가득 채운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제베르를 내버려 두고, 발을 움직여 앞으로 향했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 절대, 결코, 정말로. 조금 잊어먹을 수는 있겠지만, 벚꽃을 눈에 담고 나아가는 캄파뉼라의 향기는 절대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내려온 거니까.
저 멀리, 누군가의 윤곽이 보였다. 져가는 태양을 등지고 스러져 가는 햇살 속의 너를 보았다. 하나도 변함없는 그 모습에 어쩐지 안심했다. 사실 그리워하는 것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그리고 넌 내가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니까, 그래. 길게 늘어진 노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네게로 점차, 그렇게 끝까지 다가갔다. 그래, 맞다. 네가 맞다. 이상하지, 아직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아니야, 이런 생각보다 더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요.”
마침내 찾아온 밤하늘은 미소의 만월이었다.
캄파뉼라야, 한 송이 푸름아.
나가자꾸나.
더는 태양 아래만 있지 않아도 되니까.
나가자꾸나.
저 우주로.
달과 별의 빛으로 아득한, 저 머나먼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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