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꽃 :: 캄파뉼라와 함께 춤을

4. 두 번째 월광, 래디아타

:: 우주에 피어난 캄파뉼라 하나 ::

그 짧고도 길었던 시간은 꿈이었을까, 환상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기적이었을까. 마법이었을까.

두 번째 월광, 래디아타

우주에 피어난 캄파뉼라 하나

어느 생엔가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져

월광을 듣는 밤은

미칠 수 있어서

미칠 수 있어서 아름답네

오랜만에 상처가 나를 깨우니

나는 다시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라

김태정, 월광(月光), 월광(月狂)

두 가지 푸른색이 어우러진 머리칼을 지닌 여인은 홀로 시들어가는 장미꽃밭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여인이 맞았던가. 예쁘장하게 자리 잡힌 이목구비는 여인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지만. 비록 여인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성이 맞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미동 없이 자리를 지켰던가, 캄파뉼라 자신도 몰랐으리라. 벚꽃 빛의 눈은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아득히 가라앉아 있었다. 우울? 분노? 후련함? 그것도 아니면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듯 뒤섞인 무언가였을까.

적어도, 그래, 후회는 아니었다. 후회하기엔 너무 멀리 왔고,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그저, 단지 궁금할 뿐이었다.

“내가 그때, 그곳에 가지 않고,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고독한 장미의 틈새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캄파뉼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기억이, 오고 간 말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꽤 다른 사람이었을 거라고.

불타오르던 혁명은 이내 사그러들었다. 푸른색 장미를 재로 태우고 진홍색 불길은 황혼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캄파뉼라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자신을 불태워, 한목숨바치리란 각오로 뛰어들었음에도, 연보라색 꽃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자신에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검을 손끝으로 매만진다. 카스타네아 오즈 올리아, 지극히 증오했던 이름을 달싹여 불러본다. 당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살렸을까요, 살려뒀을까요. 전이였다면, 그 신비한 추억을 가지기 전이였다면 대답도 궁금하지 않았을 테다. 묻지도 않았었겠지. 하늘색의 캄파뉼라, 분홍색의 동백꽃, 어느 한쪽이 피에 물든 채로 져버릴 때까지 달려들었을 테다. 그런 각오가 캄파뉼라를 이때까지 살려두었었다.

지금은? 혁명도 반란의 길도 끝이었다. 제국은 멸망했다. 새로운 권력의 시작이었다. 그렇게나 혐오했던 귀족도 여전히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바뀌었을까. 바뀐 것이 그들이었든, 자신이었든.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서 있을 자리는 어디일까. 길 잃은 아이마냥, 이정표를 잃은 여행자마냥.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처럼.

생각해본 적 없었다. 푸른색 장미를 상대로 한 혁명이 성공한다면, 이후에 자신은 무엇을 할까. 이 세계에서 무엇을 보고 살아갈까. 깊은 무의식 속, 아마도 그때까지 살아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에 남아 있다.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이 방대하고도 작은 세상에서.

캄파뉼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혼이 지며 우주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있는 우주 어딘가에서도, 저 보랏빛 하늘이 존재할까. 황혼이 되었든, 밤하늘이 되었든, 여명이 되었든. 손을 하늘로 뻗는다, 마치 그러하면 하늘에, 우주에 닿을 수 있듯이.

“당신은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을까요.”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속삭임이었다. 사실 그가 묻고 싶었던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바뀌게 된 걸까요.”

자신이, 더 나아가서는 이 태양과 장미의 세계가. 이렇게 자신의 세계가, 흘러가는 이야기가 바뀌도록 만들었으면 책임을 지라고, 문득 그런 심술궂은 생각도 들었다. 제가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도록 할 생각이었으면 나아갈 방향이라도 제시하라는, 투정 어린 불평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짓인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것만.

“뭐…. 그래도, 덕분에 찬찬히 생각할 시간이야 많아졌네요. 인연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어떤 길로 이끌지도 모르고.”

그래, 인연이 허락한다면, 다시 볼 수도 있겠지. 푸른색, 은색, 금색이 어우러진 머리칼. 다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인. 이상한 가게의 주인. 달의 만다라. 루예나.

굳이 찾아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한다고 해도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도가 있는지는 둘째 치고, 그만큼 사람 간의 관계에 미련을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궁금할 뿐이었다. 다시 보게 된다면, 당신도 자신만큼 바뀌어 있었을까.

“아니, 절 기억이나 하련지도 모르겠네요.”

우주를 지켜보는 자. 그런 사람이 자신을 마음에 드는 인간이라 칭했지만, 자신은 수많은 세계의 수많은 인간 중 그저 한 명뿐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보는 세계의 차이가 이렇게나 다르니, 그 까마득한 간격을 어찌 메꿀 수 있을까.

황혼의 시간이 짙어지고, 점점 어두운 색깔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조금 아쉽고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낱 인간이니, 당연한 것이었을까. 더 허전한 기분이 들기 전에, 슬슬 떠나볼까. 정착지도 정하지 않았건만 일단 장미꽃밭을 조심스레 걸어 나간다. 황혼에 물든 장미를 혹시라도 짓밟지는 않을지, 깃털처럼 사뿐한 발걸음으로.

저 멀리, 누군가의 윤곽이 보였다. 져가는 태양의 후광에 눈이 부셔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한 명인가, 아니 여럿인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 느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왜 이곳에?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덧 말을 걸 정도로 거리를 좁힌 이를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달리 할 말이 있었을까.

오랜만이네. 달은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캄파뉼라는 대답했다.

황혼이 지나고 어둠이 깔리는 하늘에, 달이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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