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즈태량

Chrysanthemum Fair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AU (100일 로그)

落葉とワルツを (ichiP) :: amu x ヲタみん

가을의 색깔은 어떤 색깔일까?

시원하고 맑은 하늘의 푸른색. 해가 조금씩 빠르게 지기 시작해 찾아오는 군청색. 나무에 알록달록 단풍이 들어 피어나는 진홍색과 노란색. 그리고 하늘과 들판에 경계선 없이 깔리는 진한 금빛.

가을의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땅에 떨어진 밤과 도토리가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 쌀쌀해진 날씨에 집마다 불을 지피기 시작하는 옅은 연기의 냄새. 이제는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가을비에 젖어 드는 잎사귀의 향기.

가을의 인연은 어떤 인연일까?

탁 트인 벌판처럼 시원한 사람일까, 주홍으로 번지는 노을같이 따듯한 사람일까? 올해도 찾아올 축제에서 내게 국화꽃을 한 송이 건네줄,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 * *

부스럭, 까득. 입안에 작고 동그란 무언가를 굴리며 옅은 레몬 향을 풍기는 소년이 시장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 오늘도 사탕이냐? 어디 가서 뭘 하고 있길래 얼굴 보기가 힘드냐, 간만에 보네. 작은 가게 주인들이 그를 보며 가볍게 말을 걸자 소년, 아니 청년은 씩 웃으며 오독오독, 남은 사탕을 깨물어 삼키고 마찬가지로 가볍게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내 주머니에 사탕 채워 넣기였는데. 아 뭐, 이것저것, 너무 깊게 알려고 하면 다칠 수도 있다?

“여전히 건방지네, 유즈리하.”

“아, 유즈라고 부르라고. 낯간지럽게 풀 네임을 부르고 난리야.”

바쁘게 물건을 정리하던 한 주인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청년은 키득이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밝은 노란색 포장지로 싸맨 사탕을 하나 꺼내 대충 깐 후 입안으로 톡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안에 새로운 사탕을 굴리며 약간 뭉개진 발음으로 투덜댄다. 그렇게 사탕만 먹다간 이빨 다 썩는다. 아니 그전에 네 돈이 다 떨어지는 거 아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 말아. 이후 몇 마디나 더 나눴을까, 유즈, 또는 유즈리하라 불린 청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재밌는 일은 없으려나, 유즈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어슬렁거리며 조금 더 한적한 시장 거리로 들어섰다. 바쁘게 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사람들, 서로 소리 높여 손님을 채가려는 가게 주인들. 평범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하긴 오늘의 마을도 어제의 마을과 별다를 게 있겠냐만. 그리 생각하며 쓱 주위를 둘러보던 참이었다. 한 빵집이 그의 눈길을 이끌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가게에서 구경하듯 가만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푸른색의 후드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레몬색 머리칼이 보인 것 같았다. 내가 저런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마을에서 본 적 있던가? 금발이라면 마을에서도 그리 드문 편은 아니었지만 방금 본 색은 조금 특이했다고, 유즈는 확신했다. 조금 더 자세하게 관찰했을까, 여러 빵 종류를 눈앞에 두고 어느 걸 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유즈는 고민하지 않았다.

“저건 딱딱해서 별로고, 저~기 옆에 있는 게 적당히 달달하고 부드러우니까 추천해!”

말을 거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던 건지,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채로 유즈를 바라보는 건 레몬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다. 푸른빛 눈동자가 빠르게 눈을 휘며 웃는 유즈의 얼굴로, 오른쪽 눈 아래 눈물점으로, 한 가닥만 붉은색으로 물들인 머리칼로, 다시 그의 눈으로 향했다.

“어, 응…. 고마워.”

당황한 티를 숨기려고 했는지 소리를 죽인, 얼버무리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유즈는 그만으로도 만족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그랬던 걸까? 갑자기 들이댔음에도 반응해준 상냥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사탕을 닮은 레몬색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유즈는 소녀가 동전 몇 개를 빵집 주인에게 건네 빵을 사고 난 후에도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소녀는 잠깐 난감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크게 싫은 건 아니었던지 꾸준히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여기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전에 본 적 없는 것 같다.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됐나 봐?”

“그렇다고 해야 할까…. 일단 그렇다고 해둘까.”

일단?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뭐 어떠랴, 가볍게 넘겼다.

“그럼 이참에 이름이나 알려줘! 얼마간이라도 여기 있을 거라면 종종 보게 될 텐데, 가끔 인사라도 하자? 난 유즈라고 해!”

“…난 량.”

그 후로도 유즈의 말대로, 둘은 가끔 마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유즈가 먼저 량을 발견해서 다가가 톡톡 어깨를 건드려, 안녕, 오늘은 어디가? 물어볼 때도 있었고 어느 정도 유즈에 익숙해진 량이 반대로 그를 먼저 발견해서 오랜만, 말을 건네기도 했다. 오늘 딱히 하는 거 없으면 나랑 같이 구경 갈래? 응, 좋아. 둘이 어울리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많은 일에, 많은 사람에 관심 없는 유즈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따지자면 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누가 누구하고 싸웠고, 누가 새로 물건을 들여왔고, 누가 어디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그렇기에 유즈가 량이 이 마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닐 거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유즈를 제외하고도 다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량'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제아무리 마당발이라 할지라도 마을의 모든 사람을 알 리는 없었지만, 아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 점은 수상쩍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량이 이방인이라 생각했냐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조금 어색한 면모를 보이긴 해도 마을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는 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해?”

량이 물어오자 유즈는 별거 없는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마을 생각?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고, 굳이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가끔 어울리는 친구 정도의 사이였고, 숨기는 게 있다면 그만큼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량은 잠시 유즈의 눈을 빤히 쳐다봤지만 이내 그래? 말을 받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유즈는 계속 이 마을에서 살아온 거야?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지? 기억날 때부터 계속 여기 살았으니까. 슬슬 지겨울 정도인걸.”

“…그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럼 이 마을이 싫어?”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긍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즈는 잠시 고민했다가 그의 마음만큼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글쎄, 싫다는 건 아니지만. 심심한 건 싫어하니까, 이쯤 되면 한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지루한 걸지도?”

“…응, 그렇구나.”

“그럼 넌? 여길 좋아해?”

손을 대충 크게 한 바퀴 휙 저으며 마을을 가리키듯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솔직히 그에게서도 그리 긍정적인 답은 나오리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량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답지 않게 표정에 놀람이 조금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좋아해. 이 마을도,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짧은 말이었지만 그만큼의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유즈도 알고 있었다. 유즈 자신은 여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참 신기하지, 아무리 한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왔어도, 결국은 서로 타인일 뿐인데 어떻게 그런 애정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닮을 수 없는 점이었기에, 그것에 더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유즈는 량을 더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일이 없는 날은 마을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도 눈은 특정 누군가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오늘은 나올까?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을까? 매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둘이 만나는 시간의 간격은 조금씩 좁혀져 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조금 시간이 흘러서는 며칠에 한 번. 가끔은 하루걸러 한 번.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량에 대해 알아가는 것 또한 많아졌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장소. 부끄러울 때, 기분 좋을 때 보이는 소소한 습관. 관심을 가질수록 유즈가 보이는 자신의 면모도 넓어졌다. 늘 웃고 있지만 선을 명확하게 긋는 그를 잘 알고 있는 몇 마을의 주민이 본다면 믿지 않을 이야기였겠지만, 량을 만난 시점으로, 유즈는 명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공원, 작은 숲, 이곳저곳 많이 가봤지만 둘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역시 처음 만난 시장 거리였다. 물건 구경, 사람 구경, 겸사겸사 맛있는 음식도 이것저것 먹으며 돌아다닐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으니. 오늘도 평상시와 같았다. 손에는 새콤달콤한 과일 타르트를 하나씩 들고, 서로 어깨가 스칠 듯 가깝게 걷고 있었다.

“오늘은 친구하고 같이 다니냐, 유즈리하?”

예상치 않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즈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향해 고개만 슬쩍 돌렸다.

“아 진짜, 내가 몇 번을 말해. 유즈가 더 좋대니까. 참 고집도 세서.”

그러던가 말던가, 근데 너 친구도 있었냐? 아 진짜 뭔데! 잘 가고 있는데 왜 난데없이 시비야? 잠시간 투닥였을까, 이내 유즈는 가자며 량을 향해 손짓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시선이 유즈와 가게 주인 사이를 오가고 있던 량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유즈를 빠르게 따라잡았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즈리하…. 그거 진짜 이름이야?”

결국 먼저 물어본 사람은 량이었다. 유즈는 으음,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라고 하면 진짜인데, 유즈도 딱히 가짜는 아니고? 유즈라고 불리는 편을 선호하다 보니까 평소에도 그렇게 소개하는 게 익숙해져서. 좀 더 친근감 있고 좋잖아?”

“…그런가.”

평소답지 않게, 유즈는 살짝 량의 눈치를 봤다. 미움 받고 싶지 않다, 갑자기 자각한 이 감정 역시 유즈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음, 딱히 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말할 기회가 없었다 보니…. 화난 건 아니지?”

“아냐, 그런 건 아냐.”

유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 량이었지만 말의 뒷부분이 애매하게 흐려지는 걸 유즈는 눈치 챘다. 진짜 화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생각 중일까. 이내 다시 작게 웃어 보이는 미소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여전히 억지로 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웠으니까, 유즈는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 * *

그날은 량이 마을로 나오지 않은 날이었다. 유즈도 마침 일거리가 잡혔기에 적당히 농땡이를 피우며 집 건축 현장을 돕는 중이었다. 분야 전문가도 아니었던 것뿐더러 나이도 상당히 어린 편에 속하는 유즈를 호통 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입은 더더욱, 바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유즈는 그들의 대화를 대충 한 귀로 흘리다가 관심이 가는 주제가 떠오르자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였다.

“너 올해 국화 축제에서 그 아가씨한테 고백할 거라며~!”

“왜 다들 알고 있는 건데?! 무튼 헛소리 흘리지 말고, 진짜 잘 차려입고 가서 서프라이즈로 남겨둘 거니까.”

유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국화 축제라 하면 그 전통이지. 왜 그 주제가 여태 안 나오나 했다. 붉은색 국화, 노란색 국화 한 송이씩 들고 다니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붉은색 국화를 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도 전하는, 언젠가부터 빠질 수 없는 마을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고백 방식이었다. 그 사람의 친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깔깔 웃으며 그의 등을 힘을 담아 쳤다.

“이야, 좋을 때다, 좋을 때. 차이고 울지나 마라.”

“친구란 놈이 아주 격려도 못 해줄 망정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저주를 날리네?!”

“아하하, 농담이고. 유즈, 그러고 보니까 넌 올해 참가할 예정이냐?”

갑자기 대화에 끌어들여진 유즈는 그다지 놀란 기색은 없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언가의 제스쳐를 취했다. 글쎄, 기분 봐서? 잠깐, 량이 떠올랐다. 축제 날 마을에 나오려나? 온다면 같이 축제에 가는 것도 즐거울 법한데. 겉으로 보이는 반응이 영 시큰둥하자 말을 꺼낸 사람이 더욱 부추겼다.

“잘 생각해보라고~ 올해는 특별히 왕녀님도 축제에 참가하셔서 축복의 말을 해주신다더라. 보통 왕족은 성 밖으로 잘 나오질 않으니까 얼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유즈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관심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표적을 잘못 잡았다.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예의상 마지못해 한마디만 대꾸해주는 기색이 역력했다.

“왕녀님?”

“아 진짜. 넌 은근 정보에 빠삭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아예 관심 없어 하더라. 태량 왕녀님 말이야!”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레몬색 머리카락이 그렇게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옆에 있는 사람까지 대화를 듣고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지, 마지막으로 왕녀님이 마을로 내려오신 게 언제였더라? 그러게, 왕녀님이 어렸을 때였나…?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지든 말든 유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곳으로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설마. 레몬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한 둘이겠어. 설마. 그렇지만 착각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유즈는 제 감을 꽤 믿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가정이라면, 다른 어색했던 점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태도. 매일 마을로 나올 수는 없다던 말. 태량, 량. 그리고 처음부터 제 시선을 빼앗아갔던 레몬색 머리칼. 이미 마음속으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어떡할까, 유즈는 잠시 고민했다. 딱히 속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아 그래서, 싶은 마음이었다. 그 다음은 작은 호기심이었다. 성 바깥이 궁금해서 나온 걸까? 아니면 답답해서 잠시 도피했던 걸까? 그럼 나는 어떡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직접 말해줄 때까진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겠지. 유즈는, 당분간은, 계속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후로, 유즈는 평소에 발길도 하지 않던 성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성 밖을 지키는 병사들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해 다니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서성거렸다. 혹시 보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물론 다음에 마을에서 량을 만났을 때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량과 어울려 놀러 다녔다. 어차피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하더라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그저 ‘량’, 자신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옆에 없으면 허전한, 다시 만나서 놀러 다닐 날이 기대되는, 가까운 사람. 기왕이면 매일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그런 사람이었다.

“량, 넌 올해 국화 축제에 올 예정이야?”

계절이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축제 준비가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시작된 시기였다. 유즈는 그날 역시, 량의 옆에서 조금씩 색이 바뀌어가는 나무들을 구경하다가 가볍게 질문을 던진 참이었다.

“국화 축제…?”

뜬금없는 질문에 되묻듯 량이 답하자 유즈는 마치 이방인에게 얘기하듯,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려나? 가을의 꽃인 국화를 테마로 매년 여는 축제인데, 마치 가면무도회처럼 다들 가면을 쓰고 참가해. 서로 얼굴은 모를지라도 다들 즐겁게 즐기자는 취지였었나…. 아무튼, 그것보단 국화꽃 전통이 더 유명하긴 하지.”

“국화꽃 전통?”

“응. 대충 설명하자면, 다들 축제 시작부터 국화꽃 두 송이씩 들고 다녀. 붉은색 한 송이, 노란색 한 송이. 그렇게 들고 다니면서 좋아하는 상대에게 붉은색 국화를 주는 거지.”

“뭔가… 로맨틱한 전통이네. 그럼 노란색 국화는?”

“어, 그건 그 상대방이… 그러니까 상대방이 고백을 받았을 때 쓰일 수도 있지? 고백을 받은 상대는 거절의 노란색 국화, 아니면 사랑의 붉은색 국화를 돌려줄 수 있거든.”

그렇구나, 유즈의 설명을 경청한 량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왕족인 만큼, 평민들의 축제는 참가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이런 전통을 처음 들어보는지도, 유즈는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량이 뭐라고 한 말을 놓치고 말았다.

“미안 미안.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줄래?”

“음…. 그럼 유즈는 축제에 참가할 거냐고, 물었어.”

글쎄? 유즈는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에게 돌려준 대답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리고 장난이었을까, 놀리듯 잠깐 떠보고 싶었던 걸까,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축제에 왕녀님이 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 나도 어쩌다 들은 거지만.”

량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유즈가 말을 괜히 꺼냈다 싶어질 때, 조그맣게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구나…. 난 아직 모르겠어. 축제에 오는 거 말이야.”

“그래? 난 네가 오기만 한다면 같이 참가할 의향은 있는데.”

장난스런 어조였지만 진심이었다. 진심과는 거리가 먼 자신이라고 생각했건만, 량과 있을 때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헤어지기 전 량은 평소보다 망설이다 유즈를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있잖아, 유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듣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

“…나 사실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어. 여태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난 또 뭐라고. 유즈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놀란 기색도 없이, 긴장했던 량이 조금 허무할 정도로.

“비밀은 원래 숨기는 거니까 비밀 아냐? 굳이 그런 걸로 화낼 필요야. 그보다, 다음엔 저기 새로 생긴 국수집으로 가서 먹어보자. 사람들한테 들어보니 거기 괜찮대더라.”

…유즈 답네, 조금 안심한 듯 량은 쿡 웃었다.

단풍이 무르익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국화 축제는 다음 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즈는 심심한 듯 적당히 햇빛이 드는 곳을 골라잡아 혼자 널브러져 있었다. 진짜, 예전에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더라. 아무리 고민해도 지루하고 심심할 뿐이었다. 최근 들어 항상 량과 같이 어울려 다니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해졌나 싶었다.

“…보고 싶다.”

문득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며칠 전이었던가, 기억을 되짚어봤다. 오늘부터 한 일주일 정도는 바빠서 아마도 못 만날 것 같아, 조금 시무룩하게 량이 말해왔었다. 그래? 좀 많이 아쉬운데! 아쉬운 티를 내면서도 아마도 축제 준비 때문이겠지, 속으로 추측해보는 유즈였다. 축제 같이 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나, 왕족은 이런저런 귀찮은 책임도 많을 테고. 슬쩍 량의 얼굴을 보니 유즈 못지않게 시무룩해져 있어서 유즈는 웃음을 터뜨리고 량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래도 시간이 된다면 놀러와, 찾으러 갈 테니까. 량은 볼을 살짝 부풀린 채로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다 물음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올 수 있다고 해도, 다 가면을 쓰고 있을 텐데 무슨 방법으로 날 찾으려고? 유즈는 자신만만하게 웃었었다. 설마 가면 하나 썼다고 내가 널 못 알아볼 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널,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이 아직도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널, 량을,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잖아.

그답지 않게 오래 생각을 했고, 오래 고민을 했다. 그 누구보다 량이 자신에게 특별하다는 건 오래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정을 준 적이 있었을까? 가족과도 서먹하게 지내는 유즈는 쉽게 ‘아니오’라는 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항상 웃고 있을지언정, 선은 그보다 확실하게 긋는 그의 성격에 량은 정말 특수한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량이 자신의 첫 진정한 의미의 친구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친구라는 단어를 넘어선, 소중한 인연이라서?

사랑.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을 두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곤 했다. 이게 사랑일까? 유즈는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까지 가기도 전에, 량을 만나기 전까진 ‘애정’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가까운 사람도 전무했으니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와 별개로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 누구든 항상 선을 긋고 일정한 거리를 두던 사람들만 있었다. 그렇기에 유즈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량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건가? 나는 량을 좋아하나? 설령 량이 왕녀라서, 평민인 나와는 다른 종류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이 그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나? 나는…. 량은 나에게 무엇일까? 어떤 사람일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답은 쉬웠다.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명확했다. 제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매만지며 눈을 휘어 웃었다.

* * *

붉은색, 금색, 알록달록한 장식이 마을 전체를 휘황찬란하게 물들인 축제 당일이 다가왔다. 유즈는 지나가다 본 부스에서 발견한, 제 머리카락 색과 닮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가면을 동전 두어 개로 값을 지불하고, 집어 들어 얼굴 위로 단단히 고정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생각보다 조금 화려한 감이 있긴 했지만, 이내 손쉽게 축제의 시작을 기다리는 들뜬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자신이 모르지만, 동시에 아주 잘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5분? 아니면 10분? 아니면 그 이상이었을까. 참을성 있게 기다린 끝에 조금씩 소음도, 대화도 잦아들었다. 누군가의 힘 있는, 또각이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고개를 높이 치켜든, 품위 있고도 당당한 자세를 가진 이가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진 단상에 올라왔다. 아직은 조금 떠들썩하던 군중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화려한 푸른색 드레스. 세련된 장식들로 틀어 올린 빛나는 레몬색 머리칼. 오늘의 맑은 하늘처럼 푸르른 눈동자가 군중을 응시했다.

“왕녀님이시다!” “태량 왕녀님!”

침묵은 한순간이었고 사람들 사이로 환호가 터졌다. 인식이 좋은 왕가인 만큼, 왕녀 역시 마을 사람들 눈에는 호감으로 비쳤다. 축복의 말을 전하려, 태량이 목을 잠시 가다듬자 군중은 어느새 다시 조용해졌다.

“올해 국화 축제에 참가해주신 마을의 주민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유즈는 미소 지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개화한 국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나날이 앞으로도, 모두와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가을을 축복하는 날, 축제를 마음껏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어느새 다시 시작된 환호에 묻혀 태량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엄이 서려 있었다. 짧았지만 강렬한 축복을 마치고 태량은 단상에서 내려오려 몸을 살짝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듯, 유즈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몰라야 하는 얼굴, 그러나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했다. 유즈는 씩 웃으며 입 모양만으로, 소리 없이 제 메시지를 전달하고 축제를 즐기러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기다리고 있을게.

누군가는 떠들었고, 누군가는 웃고, 아이들은 서로 몰려 뛰어다녔다. 처음 보는 사람, 오래 알던 친구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만개한 축제를 즐겼다. 그 속에서 국화 축제의 이름값을 하듯 국화꽃은 이곳저곳 만발해 있었다. 저 가게의 테이블 위에, 저 부스의 천막 아래, 저 사람의 가슴팍 위에, 그리고 유즈의 손에도 두 송이가 들려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틈새에서 조금 뒤로 빠져나온 유즈는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를 대라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겠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꼭 온다. 이곳에 꼭 온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그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의향이 있었다.

유즈의 기다림에 보답하듯, 그의 갈색 눈동자에 그 어느 색보다 익숙한 레몬빛이 비쳤다.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내려 간단하게 묶고, 아까와는 다른 하늘색의 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다른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보았다. 몰라볼 수 없었다. 그럼 나만의 왕녀님을 데리러 가볼까, 유즈는 씩 웃으며 아직 자신을 눈치 채지 못한 듯, 두리번거리는 량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 찾아?”

“유즈!”

놀라서 뒤돌아보자 유즈는 더 환하게 웃었다. 량도 덩달아 웃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나 어떻게 알아봤어?”

“내가 말했잖아, 널 절대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럼 우리도 축제 속으로 가볼까?”

어, 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유즈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량의 손을 꼭 잡아 이끌었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량이 가까이 따라붙자 둘은 서로의 손을 붙든 채로 축제의 색으로 섞여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둘의 손에는 지나가다 마음에 든 장식, 먹거리를 비롯해 자잘한 물건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이거 일단 먹을 건 다 먹고 다시 움직이는 게 편하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그럼 여기 잠깐 앉았다 갈까? 둘은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벤치에 앉아 사 온 주전부리를 오물오물, 한입씩 사이좋게 나눠가며 먹었다.

“…유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알고 있었어?”

사 온 음식도 다 먹고, 언제 사람들 속으로 다시 들어갈까 느긋하게 생각하던 참에 량이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직감적으로 아까 물었던, 가면을 쓴 자신을 알아봤냐는 질문과는 다르다는 걸 눈치 챈 유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조용히 중얼거린 량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글쎄, 정확히 언제라고 하기엔 애매한데….”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량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순간부터? 아니면 ‘태량 왕녀님’에 대해 들었을 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추측이 확신으로 바뀐, 량을 그 단상 위에서 봤을 때?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는 유즈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숨겨서 미안해.”

“응? 아니, 딱히 사과 받을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것보다 전에도 비슷한 사과 한 적 있지 않아?”

량의 표정은 내려뜨린 눈꼬리 때문인지 가면을 쓰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아니, 진짜 괜찮은데,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닐만한 일도 아니고, 유즈는 개의치 않아 한다는 것을 열심히 피력했다.

“어차피 네가 ‘왕녀님’이든, ‘태량님’이든, 나한테는 ‘량’이잖아? 그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그건 그렇지.”

약간 안도한 듯 피식 웃는 량을 보는 유즈가 눈을 휘었다. 있잖아, 이번에는 유즈가 말을 꺼냈다.

“잠깐 눈 감아볼래?”

“눈? 갑자기 왜?”

“그냥 잠깐만.”

열심히 설득하는 유즈에 량은 약간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길게 깜빡였지만 이내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응, 그대로 잠깐만 있어 봐. 당부하고 이때를 위해, 소중히 들고 있던 것을 평소보다 배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량의 머리카락에 가져갔다. 잠시 부스럭부스럭, 짧은 순간이 지나갔다. 응, 다 됐어, 눈 떠도 돼! 유즈의 말에 량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대로 활짝 웃고 있는 유즈를 마주 보았다.

약간 긴장된 그의 눈동자에, 량이 비쳐 보였다. 자자하게 칭찬을 들어온 레몬색 머리칼에, 붉은색 국화가 한 송이 꽂혀있었다.

‘국화꽃 전통?’

‘응. 대충 설명하자면, 다들 축제 시작부터 국화꽃 두 송이씩 들고 다녀. 붉은색 한 송이, 노란색 한 송이. 그렇게 들고 다니면서 좋아하는 상대에게 붉은색 국화를 주는 거지.’

좋아하는 상대에게, 붉은색 국화를 선물한다.

유즈는 자신의 얼굴을 량에게 가까이 가져왔다. 거의 이마를 맞대고, 가면 뒤의 눈동자에 서로가 확실하게 비쳐 잠겨버릴 것 같은 분위기에, 속삭였다.

“네가 원한다면 널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줄게. 네가 원한다면, 신분이든 무엇이든, 숨겨야 하는 것 없이 살게 해줄게.”

사탕처럼 달콤한 어조였다. 아까까지 나눠 먹었던 레몬 향기가 그들을 맴돌았다. 유즈는 싱긋 웃었다.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계속 기다릴게. 네가 잠시 숨돌릴 틈이 필요하다면, 그 휴식이 되어줄게. 항상 옆에 있어 줄게.”

돌아오는 가을마다 나를 만나러 와주면, 붉은색 국화꽃을 선물할게.

잠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이 스쳐 지나갔다. 한순간도, 유즈는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눈만큼은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처음으로 전하고 싶다고 생각한 감정이었다. 설렘과 갈망이 동시에 어우러진 색이었다. 이내, 량이 입을 열었다.

“유즈…. 잠깐만 눈 감아줘.”

침착한 목소리였을까, 떨리는 목소리였을까. 유즈 역시 순순히 눈을 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에서 제일 긴 순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눈 떠도 돼, 그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푸른색 눈동자 안에, 제 머리카락 사이에 붉은색 꽃잎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동시에 량의 볼에도 발그레 꽃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환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단풍과 국화 아래, 웃으며 손을 마주 잡고 있었을까. 둘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경쾌한 음악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도 한두 명씩, 음악이 울려 퍼지는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로 어울려, 가면과 미소를 쓰고,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스텝을 밟고 있었다. 왈츠, 출 수 있어? 일어서서 옷을 털며 묻자 유즈는 뭐, 그럭저럭? 웃었다. 몰라도 하면서 배우면 되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사람들 틈에 섞여들어 같이 빙글빙글 돌며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한 손을 허리에 살포시 받치고. 한 손을 어깨에 가볍게 올리고.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가을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춤을 추었다. 이 세상에 마치 둘만 남은 것처럼. 노을의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햇빛에 그 누구보다 반짝이며.

낙하하는 단풍잎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그렇게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그 가을에 피어난 인연은 붉은 국화꽃이었다.


Written 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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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스마(@6_smile9)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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