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님, 붉은 고양이를 잡아주세요!

사건번호 2. 잃어버린 물건은 언젠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정말 오랜만의 정시 퇴근에다, 정말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한 호화로운 외식이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베카의 기분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한잔 두잔 마신 맥주가 붕 뜬 기분의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베카는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붉게 상기된 얼굴에 헤벌쭉 웃음을 머금고 인도를 통통 뛰듯 걷고 있었다.

“언니 좀. 그러다 넘어져도 난 몰라.”

뒤에서 마린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자, 베카가 훌쩍 몸을 돌려 돌아보았다. 단정한 단발 때문인지, 술을 입에 한 방울도 대지 않아 이성을 잃지 않은 짙은 푸른색 눈동자 때문인지, 마린은 베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자매였음에도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엄마가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언니 언제 철들 거냐고 바로 혼났을걸?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의 잔소리에도 베카는 꿋꿋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유지했다.

“너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알게 될 것이란다. 야근 없는 저녁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됐고, 우리 집에 쿠키 남아있던가? 그 미술관 근처 빵집에서 파는 초코칩 쿠키. 그거 먹으면서 요즘 무슨 프로젝트를 하는지 얘기 좀 해봐. 아까 저녁 먹으면서는 나만 회사 얘기하다 끝났잖아.”

“그거야 언니가 대표 욕만 30분 넘게 해서 그렇지…. 아, 언니, 내가 외출할 땐 창문 닫으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베카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마린의 말대로 어느새 눈앞에 드리운 복층 집에서, 하얀색 커튼이 1층 창밖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안 닫았던가? 아침에 날씨가 좋아서 열어놓긴 했었는데, 깜빡했나 보다. 알코올이 들어간 기억이 멍하게 구성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 소식은 없길래… 미안, 미안. 다음엔 기억할게. 열쇠를 어디에 놨더라…….”

뒤적뒤적, 정장 바지 주머니를 먼저 뒤지고, 어깨에 멘 가방을 거꾸로 들어 탈탈 털 기세인 베카를 마린이 재빠르게 말렸다. 언니 열쇠는 집에 들어가서 찾고, 내 열쇠 꺼낼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 마린은 손쉽게 검지 길이의 은색 열쇠를 찾아 현관문 앞에 섰다. 여전히 가방 안쪽을 손으로 휘젓는 베카를 뒤로한 채, 마린이 손잡이 위의 구멍에 열쇠를 꽃아 반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작게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언니가 그래도 불 끄고 나가는 건 잊지 않았구나. 지나가듯 생각하며 마린이 손을 더듬어 신발장 옆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현관에 노란끼가 도는 빛이 가득 찼다. 밝은 곳에서 열쇠를 마저 찾을 생각에 베카가 현관에 우뚝 선 마린의 등을 쿡쿡 찔렀다.

“마린, 안 들어가고 뭐, 해…….”

저보다 반 뼘 작은 동생의 어깨를 슬쩍 밀며 현관으로 들어온 베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본래도 순한 인상에 눈이 동그랗게 떠져 더욱 토끼 같아 보였다. 평소 같으면 덜떨어져 보인다고 한마디 했을 테지만, 마린 역시 얼이 빠져 베카에게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현관에서 집 안쪽으로 들어가는 복도의 마룻바닥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베카의 흔들리는 눈이 복도 끝에서 끝까지 방황했다. 마치 집을 비운 사이에 물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마른 구석이 없었다.

2층은? 무사한가? 떨리는 시선이 어둑한 계단을 훑었지만, 현관 불만 켜진 상태에선 가늠하기 어려웠다.

“비… 오늘 한 방울도 안 왔는데.”

멍한 베카의 목소리에 마린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신발을 벗으려는 베카를 말리며 마린은 신발을 신은 채로 복도에 발을 디뎠다. 발밑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집안으로 퍼졌다.

“신발 벗어봤자 발만 젖으니까 그냥 들어와. 그리고 설령 우리가 모르는 새 소나기가 내렸어도 이 정도로 들이칠 리는 없잖아. 어디 누수가 생겼나? 파이프 터진 거 아냐? 지금 수리공을 불러도 다 퇴근했을 텐데.”

혼잣말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마린 뒤를 따라가며 베카는 술을 깨려 자기 뺨을 짝짝 쳤다. 경쾌한 타격음에 마린이 베카를 돌아보고 손가락을 튕겨 시선을 끌었다.

“언니, 2층으로 올라가서 상황 좀 봐줘. 난 1층 어디서 물이 새고 있는지 알아볼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감전되지 않게 조심하고.”

뭔가 발견하면 불러! 쌩하니 부엌으로 사라지는 마린의 모습을 몇 초간 멍하니 응시하다, 베카가 머리를 흔들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계단에선 물 밟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베카는 2층은 무사하길 기도하며 계단을 하나둘 올랐다.

“하………. 이거 어떡하지. 대책이 안 서는데.”

마린은 막막함에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싱크대 밑의 파이프에서 물이 콸콸 새고 있었다.

이런 미친, 수도비 어쩌지. 아니, 집은 언제 원상복구 하지? 지금 당장 저걸 멈춰야 하는데 뭐부터 건드려야 하지? 급한 대로 전기를 일체 차단하고 깜깜한 부엌에서 손전등에 의지한 채로 마린이 한숨을 쉬었다. 옆집 전화를 빌려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선 배관수리공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린은 참상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일단 언니한테 알리고 가야겠지. 찰박찰박, 물이 흥건한 복도를 다시 밟아 계단 밑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마린!! 마린!!!!”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베카가 계단 위에서 뛰쳐나와, 마린까지 덩달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왜, 왜?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마린은 혹시 베카가 어디 다친 건 아닐까 싶어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마린이 가까이 다가오자, 베카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맞잡은 손이 진동하듯 떨리자 마린이 무슨 일이냐 다그치려 입을 열었지만, 베카가 더 빨랐다. 흡사 오열에 비슷한 비명이었다.

“내 반지! 내 탄생반지가 사라졌어!”

* * *

출근은 언제나 힘겨웠다. 아무리 일이 재밌을지라도 출근하는 순간은 늘 고달팠다. 그게 월요일이면 조금 더 고역스럽고, 오늘 같은 금요일이면 약간 더 몸이 가벼울 뿐, 아침을 알리는 알람 시계에 눈 뜨는 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다. 어젯밤 갑자기 이삿짐을 정리해야겠다는 충동이 들어서 늦게 잠이 든 터라 더더욱.

이래서 계획 없이 일을 벌이면 안 된다는 생각은 했지만, 유즈리하는 그를 실천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충동을 따르는 삶이 훨씬 스릴 있고 재미있었으니까.

물론 아침은 재미없었다. 오늘 역시 그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하품을 뻑뻑하며 집 문을 닫고 열쇠를 돌려 잠갔다. 상쾌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터벅터벅 주택가의 인도를 걷고 있자니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졸음에 축 늘어져 있던 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지금이 몇 시더라… 바로 다음 버스를 잡는다면 탐정 거리에 시간 딱 맞춰 도착할 것 같은데.’

“미안한데 이쪽 길 말고 저기 골목으로 돌아서 가주세요! 지금 길을 막아놔서 이쪽으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느릿하게 세워지던 일정에 짱돌이 던져졌다. 햇살보다 잠을 효과적으로 깨우는 말에 유즈리하가 눈을 찡그리며 순순히 멈추어 섰다. 저 앞에 형광 조끼를 입은 주민센터 직원이 손을 흔들며 옆길을 가리켰다. 옆에는 밝은 오렌지색 로드 콘을 여럿 세워두고 있었다.

이건 또 뭔 일이람. 늘 그렇듯, 호기심이 짜증을 이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직원에게 다가가 어느덧 생기가 살아난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로드 콘 너머의 도로를 힐끔거렸다.

“길은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행사 준비라도 한대요?”

“행사는 아니고 메이너 길을 전체적으로 점검 중입니다. 요 일주일간, 이 부근 집 세 군데에서나 배수관이 터져서 말이죠…. 말 나온 김에 근처에 사는 분입니까?”

“여기 말고, 저 뒤쪽 메이너 2번 길에 살긴 하는데요.”

멀지는 않고, 도보 10분 정도? 유즈리하의 말에 직원이 미간을 문질렀다. 혹시 최근에 배수관 문제나, 수압 문제는 없었습니까? 사무적인 질문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저었다. 직원의 낯빛이 약간 밝아졌다. 하아, 직원이 한숨을 내쉬고 유즈리하에게 손짓했다.

“아직 2번 길에 보고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연락해주세요…. 일단 지금은 길을 돌아서 가주셔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마 퇴근 시간 전엔 점검이 끝날 겁니다.”

아침에 죽어나는 야행성인 유즈리하보다 직원이 백배는 피곤해 보였기에 유즈리하는 별다른 불평 없이 뒤돌아섰다. 다시 몇 걸음 골목길로 옮기고 나서야 유즈리하는 본래의 목적을 상기해냈다.

지금 몇 시지? 다음 버스 이미 지나갔겠지? 깨닫는 순간 유즈리하는 헐레벌떡 인도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잠을 제일 효과적으로 깨우는 것은 확정된 지각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답지 않은 존댓말이 튀어나온 건 못 보던 얼굴이 사무실에 있는 탓이렷다.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자, 유즈리하는 급격히 머쓱해졌다. 하늘색 눈동자 한 쌍, 짙은 푸른색 눈동자 한 쌍. 두 배로 혼나는 기분에 유즈리하가 조용히 변명을 웅얼거리며 빈 의자에 앉았다.

“제때 나오긴 했는데, 갑자기 도로 점검한답시고 하필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을 막아놔서….”

“그거 저도 봤어요. 메이너 길에서 오시는 거 맞죠? 저도 거기 살아서 모를 수가 없어요.”

유즈리하의 변명에 친절하게 증거를 보태준 건 의뢰인으로 보이는 짙은 푸른 눈동자의 여성이었다. 엄하게 유즈리하를 바라보던 태량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지자, 유즈리하는 그 여성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자기 입으로 조수로 일하겠다고 해놓고 일주일 만에 불성실함으로 잘리는 건 아무래도 쪽팔렸으니 말이다.

늦었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여긴 제 조수인 유즈리하라고 해요. 태량이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유즈리하는 숨을 돌리고 뒤늦게 태량의 사무실에 찾아온 의뢰인을 살펴보았다.

통통 튀는 분홍색 머리카락과 달리 표정과 분위기는 차분했고, 의자에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있는 모습이 도도한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나이대는 저와 태량보다 조금 어리려나. 옷 색감은 머리카락과 비슷하게 화려했지만, 차림새는 단정했다. 대학생 신분인지 무릎에 올려놓은 숄더백엔 벨스토렌 예술대학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전 마린이예요. 제 언니를 대신해서 의뢰를 부탁드리러 왔어요.”

의뢰인도 자신을 소개했다. 유즈리하가 늦게나마 도착한 겸,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려는 듯싶었다. 태량은 잠시 내려놓았던 펜을 들었고 유즈리하도 마린의 말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언니의 탄생반지를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소중히 여기던 거였는데, 잃어버린 이후로 계속 우울해해서 도저히 두고 보지 못하겠더라고요. 사실 이 자리도 언니가 직접 오고 싶어 했는데 결근계를 내지 못해서 제가 대신 오겠다고 어렵게 설득한 거고요.”

탄생반지? 유즈리하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고 태량의 얼굴을 살폈다. 태량은 별다른 반응 없이 메모를 적고 있었다. 탄생반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서 저 혼자 같았던 터라, 유즈리하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끼어들지 않았다.

“탄생반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나요?”

“글쎄요… 보통 언니가 보물함에 넣고 보관해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언니의 말을 들어보니 최소 나흘 전에 반지가 있는 걸 확인했다고 하더라고요.”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 날이 언제죠?”

“이틀 전날 밤이요.”

마린이 잠시 침묵했다. 입술을 꾹 다문 모양새가 다음에 할 말을 고민하는 듯했다. 태량도 이를 눈치챘는지 부드럽게 설득했다. 작은 단서나 정보라도 도움이 되니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이에 마린은 조금 망설이다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저는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언니는 누군가가 탄생반지를 훔쳐 갔을 거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어요.”

절도는 분실과 또 다른 차원의 의뢰였다. 유즈리하의 눈에 급 흥미가 스며들었다. 태량도 눈썹을 둥글게 휘고 메모지에 ‘도난?’을 적어넣었다.

“언니분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도 들으셨나요?”

“보물함에서 절대 꺼내놓지 않아서 자신이 잃어버렸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밖엔…. 그런데 언니의 말대로 집에 도둑이 들었으면 다른 돈 될 것도 많은데 반지만 훔치는 게 말이 되나요? 최근에 배수관이 터지면서 집 청소도 싹 했는데 반지 말고 사라진 물건은 없었어요.”

“나흘 전엔 반지가 있었고… 그 후로 집에 오간 사람이 있나요?”

“전 요즘 야작하느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해서 그것도 언니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메모까지 적고 태량이 펜을 내려놓았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언니분하고도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 마린 씨와 언니분만 괜찮다면 늦은 시간이어도 상관없어요. 태량의 질문에 마린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8시쯤이면 가능할 것 같은데, 탐정님도 퇴근하셔야 하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주소 적어주시면 8시에 찾아갈게요. 의뢰금도 그때 의논하기로 해요.”

이른 퇴근이 물 건너간 소리에 유즈리하는 조금 침울해졌다. 퇴근하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야근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태량이 내민 쪽지에 마린이 주소를 적고 일어섰다. 저도 한 시간 뒤에 강의가 있어서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와 함께 살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사무실 문 뒤로 사라졌다.

“그런데 탄생반지가 뭐야?”

유즈리하가 궁금했던 점을 태량에게 물은 건 점심쯤이었다. 마린이 사무실을 떠난 후 태량은 유즈리하에게 주택가 세부 지도의 사본을 구해와달라고 부탁했다. 시청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가 오니 태량은 사무실에 없었다. 태량이 돌아온 건 유즈리하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노닥거린 지 30분도 더 지난 후였다.

조금 이르지만, 점심부터 먹고 일할까? 태량의 제의에 둘은 사무실을 나와 탐정 거리의 식당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정오도 안 된 시각이어서 그런지 식당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고 각자 따듯한 우동이 담긴 그릇을 받고 나서야 유즈리하는 아침에 태량에게 물어보려던 것을 기억해냈다.

“탄생반지에 관해 모르는구나. 네가 벨스토렌 출신이 아니라는 걸 깜빡했어.”

벨스토렌 출신인 것과 상관이 있어? 유즈리하의 질문에 태량이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후후 불던 것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탄생반지는… 벨스토렌 출신에겐 소중한 보물이니까.”

뜨거운 어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유즈리하가 눈을 반짝이며 허겁지겁 음식을 삼켰다. 목구멍이 델 뻔하거나 말거나, 유즈리하는 흥미를 숨기지 않으며 빠르게 물었다.

“혹시 마도구 같은 거야?”

“그럴 리가. 그렇게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야.”

탄생반지엔 마도구처럼 특별한 능력은 없어. 그만큼 값어치 있지도 않지. 태량이 작게 웃자, 유즈리하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하긴, 그런 귀한 보물이 벨스토렌에 있었다면 내가 못 들어봤을 리가. 아예 도시 차원에서 관리해서 보기 힘들다는 2급, 1급 마도구를 직접 손에 넣어보기도 했었는데. 당연히 이런 생각을 소리 내어 꺼내는 대신 유즈리하는 간단히 설명을 요구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보물인데?”

태량이 천천히 국수를 씹어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유즈리하는 아예 젓가락을 그릇에 담그고 방치한 채 태량의 답변을 기다렸다.

“벨스토렌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문구와 생일을 반지 안쪽에 새겨서 아이가 성인이 되면 선물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어. 일종의 성인식인 셈이지.”

예를 들어 결혼반지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탄생반지도 소중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이라 벨스토렌 출신이면 대부분 자기 반지를 아끼기 마련이야. 태량의 설명에 귀 기울이던 유즈리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특별히 훔칠만한 값어치가 있는 건 아니겠네?”

한결 식은 국수를 젓가락으로 저으며 유즈리하가 묻자,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 오히려 이게 마도구 분실 사건이었으면 진작에 신고가 들어왔을걸. 마도구는 등급 상관없이 전부 정부에 등록되어 있고, 허가 없이 본인 소유의 마도구가 아닌 걸 들고 있다가 들통나면 벌금이 엄청나니까.”

보물이라 불리기는 조금 애매하긴 하네. 단 한 번도 벌금을 내본 적 없는 유즈리하의 감상에 태량이 미소를 지었다.

“비싼 귀중품 범위에 드는 물건은 아니긴 하지만, 탄생반지는 벨스토렌에서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고 객관적으로도 예뻐. 벨스토렌만의 특수 처리법을 써서 은은하게 빛이 나거든. 예쁜 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잖아?”

그건 또 맞는 말이었다. 한때 보물 좀 만져봤다 하는 유즈리하의 눈이 동의로 반짝반짝 빛났다. 태량의 말대로, 값어치와 무관하게 예쁜 물건은 그 자체로 가치 있었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네 탄생반지 구경해봐도 돼?”

아직 보지 못한 보물을 구경할 기회를 유즈리하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러나 쉽게 승낙할 줄 알았던 태량은 의외로 오래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혹시 남의 탄생반지를 보자고 요구하는 게 무례한 일이려나?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들이 탄생반지를 보통 아끼는 게 아닌 모양이건만. 유즈리하의 오해는 태량의 이어진 말에 생각보다 빠르게 풀렸다.

“있었다면 보여주겠지만, 오래전에 반지를 잃어버려서 불가능할 것 같네.”

그 답엔 유즈리하조차 입을 떡 벌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받은 의뢰를 해결하며 매사 꼼꼼한 모습을 보였던지라, 태량이 뭘 잃어버리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언제 잃어버렸는데? 중요한 물건이라니 찾아보긴 했을 거 아냐?”

따발총 같은 유즈리하의 질문에 태량이 옆에 놓인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태량의 목소리가 한층 조용해져 유즈리하는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랬지. 결국 못 찾았지만. 벌써 2년 전 일이라 지금 와서 찾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받자마자 잃어버린 거라 나도 미련이 많이 남아서 오랫동안 찾아보긴 했어. 의뢰인의 탄생반지는 찾아줄 수 있다면 좋겠네. 태량의 어조는 너무도 진지해, 유즈리하가 머쓱한 기분에 시선을 회피하고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가득 집어 입에 넣었다.

* * *

“굳이 사무실에서 기다릴 필요 없으니까 퇴근했다가 시간 맞춰서 와도 돼. 그 부근에 살지? 어차피 나도 주택가에서 출퇴근하니까 집에 들렀다 가려고.”

태량의 제안에 유즈리하는 기쁜 마음으로 찬성했다. 달리 사무실에서 할 일도 없었고, 마침 거실에 벌려두고 온 참사도 기억난 참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 들러서 가볍게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유즈리하의 기분은 좋았다.

이걸 언제 정리하지, 바닥에 다 쏟아붓는 게 아니었는데. 집에 도착한 직후 유즈리하는 난감하게 현관에 서서 거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보이는 아수라장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가관이었다. 온갖 옷가지며 자잘한 잡동사니들이 널려있어 밟지 않고 지나가기가 힘들었다.

정리 좀 하다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되려나? 대충 물건이 손에 집히는 대로 주워서 여행 가방 안에 던져넣다 말고 유즈리하가 벌러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뒷수습이 귀찮아졌다.

내일부터 주말인데 그냥 미뤄버릴까. 고민은 길지 않았고 유즈리하는 벌떡 일어서서 열쇠를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방치한 일거리를 깨끗하게 잊고 어슬렁어슬렁 여유로운 걸음으로 마린네 집이 있는 메이너 1번 길까지 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8… 7… 6번지. 여기다. 유즈리하가 붉은 지붕의 복층 집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메이너 길의 주택가가 다 그렇듯 정문으로 가는 길이 울타리 없이 터 있었다. 앞마당엔 가꾸는 꽃밭 하나 없이 파릇파릇한 잔디가 가지런히 깔려있었다. 유즈리하는 곧장 정문을 두드리는 대신 태량을 기다리며 커튼이 쳐진 거실 창문을 기웃거렸다.

창틀이 낮아서 창문을 통해 출입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성인 한 명 드나들 정도의 크기도 있고, 바깥으로 열리는 구조라 잠겨있지만 않으면 밖에서 열기도 쉽겠지. 잠겨있다 하더라도 창문 따는 거야 한 손 묶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물론 마지막은 이 분야에 경험 많은 유즈리하의 기준이었다.

“일찍 왔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유즈리하가 창문에서 한 발짝 물러서 몸을 돌렸다. 태량이 정문에서 이어지는 도로에서 유즈리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즈리하가 씩 웃으며 정문 앞으로 뛰어가서 태량을 맞이했다.

“요 근처에 사니까. 너는?”

“난 프리오리 로드에 살아.”

주택가 반대편이네. 오래 걸어왔겠다. 유즈리하의 감탄에 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멀지는 않아. 걷는 거야 일 때문에라도 익숙하니까, 운동도 되고 좋지. 슬슬 약속한 시각이니 들어가 볼까.”

태량이 초인종을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곱슬곱슬한 분홍색의 긴 머리카락을 묶고 눈꼬리를 축 내려뜨린 여성이 문밖을 빼꼼 내다보았다. 머리카락 색이나 눈 색이 마린과 똑같아, 태량과 유즈리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린 씨의 언니 되시죠? 태량 탐정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태량이고 이쪽은 제 조수인 유즈리하예요.”

아! 강아지 같은 푸른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변했다.

“어서 오세요. 오실 거라고 마린에게서 들었어요. 제 이름은 베카예요. 들어오세요.”

베카가 문에서 물러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와 함께 태량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유즈리하도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쓱 둘러보았다.

크기는 유즈리하네 집보다 컸지만, 내부 구조는 비슷했다. 현관에서 들어오자마자 왼쪽에 거실이 있었고, 안쪽으로 식탁이 있는 다이닝 룸이 보였다. 다이닝 룸 옆엔 부엌이 있으리라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현관 왼쪽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 밑에는 화장실과 캐비닛이 붙어있었다. 베카의 안내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며 유즈리하가 아까 살펴보던 창문에 길게 시선을 주었다.

‘잠겨있지 않네.’

뒤늦게 마린이 거실로 들어오며 인사하는 바람에 유즈리하의 시선이 창문에서 떨어졌다. 편하게 앉으세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태량이 고개를 젓자, 마린이 소파에 앉았다. 베카가 마린 옆에서 초조하게 손을 뒤틀었다. 태량과 유즈리하는 침착하게 자매가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반지가 없어진 걸 알아차린 게 이틀 전이었어요. 그날 동생하고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왔더니, 배수관이 터져서 집이 물난리가 되어 있었거든요. 마린이 1층을 수습하는 동안 전 2층에 올라가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는데….”

베카의 눈이 급격하게 촉촉해졌다. 마린이 한숨을 쉬며 휴지 한 장을 뽑아줬다. 눈물을 훔치는 베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위층 파이프는 괜찮았어요. 그런데 제 방문이 열려있는 거예요. 아침에 분명히 닫고 나왔는데. 방에 들어가니 옷장 문도 열려있었고,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옷장 맨 밑에 있는 보물함을 열어봤는데….”

탄생반지가 없었어요. 딱 그것만 사라진 상태였어요. 잠시 우울한 침묵이 흘렀다. 태량이 메모에 베카의 말을 받아적다가 질문했다.

“반지를 그 보물함에 보관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었나요?”

“아니요, 저와 마린밖엔…. 부모님은 호텔을 경영하시는데 그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셔서 집에 잘 안 오세요. 제 보물함은 고사하고 냄비가 어느 찬장에 있는지도 기억 못 하실 거예요.”

“그럼 보물함은 자주 꺼내 보시는 편이었나요?”

베카가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휴지 곽을 무릎 위에 올려둔 마린이 덧붙였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대청소할 때 빼곤 꺼내지도 않아요. 그게 나흘 전이었나? 언니도 저도 휴일이어서 오랜만에 집 청소를 했었거든요. 언니가 거실에 잠깐 꺼내놨었지?”

맞아, 그랬었지. 베카의 동그란 얼굴이 꾸벅꾸벅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때 굴러 나와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지. 이어진 마린의 말에 베카가 멈칫했다가 이번엔 격하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우리가 거실은 다섯 번도 더 찾아봤는데 나오지 않았잖아. 누군가 훔쳐 간 게 틀림없다니까!”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베카와 마린의 의견 차이가 자칫 말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태량이 끼어들었다. 베카가 억울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렬히 항변했다.

“그야 집에서 잃어버렸으면 진작에 찾았을 테니까요. 진짜 꼼꼼하게 뒤졌거든요. 그리고 마린의 말대로 청소 때 외에는 반지를 꺼내놓지도 않아요.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간 적 자체가 없어요.”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는 휘날리듯 규칙적으로 단정한 태량의 글씨를 보다 시선을 옆으로 기울였다. 한동안 관심사에서 벗어났던 거실 창문이 다시 유즈리하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 평소에도 이 창문을 잠그지 않는 편인가요?”

마린과 베카의 시선이 유즈리하의 손가락을 따라 커튼이 쳐진 큰 창문에 닿았다. 베카가 손끝으로 볼을 긁적였다.

“으음… 밤에 잘 때 빼고는 잠그지 않아요. 환기를 자주 시키는 편이라. 그래도 외출할 때는 꼬박꼬박 닫고 다니는데.”

“언니. 우리 배수관 터진 날 기억나? 언니가 깜빡하고 창문을 열어두고 출근했었잖아.”

마린이 상기시키자 베카가 이마를 찡그렸다. 망설이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그게 말이지.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히 닫고 나온 것 같아. 커튼까지 치고 나왔었는걸. 혹시, 혹시 그때?”

번개처럼 미친 생각에 베카의 볼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마린이 눈썹을 찡그리고 베카의 팔을 쿡쿡 찔렀다.

“진정해, 언니. 가능성 없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섣불리 결론짓는 건 성급하지 않아?”

“아니요, 가능성이 있다면 다 점검해야죠.”

태량이 다시 중재에 나섰다. 잠시 거실 시계에 눈길을 주고 메모지를 챙겨서 일어서자, 레몬색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렸다.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태량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마칠게요. 베카 씨 말대로 절도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색을 진행해볼 테니, 한 번 더 집 내부에서 반지를 찾아봐 주시겠어요?”

우선 오늘은 상담비만 청구하겠습니다. 분실이면 제 쪽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절도면 경찰에게 사건을 넘겨야 하니 자세한 비용은 월요일에 진행 상황을 보고 결정하도록 해요. 태량이 자매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유즈리하의 날카로운 눈길이 창문의 잠금장치에 길게 머물렀다. 고양이 같은 눈매가 잠시 후 들려온 태량의 목소리에 슬쩍 휘었다.

“이만 가자, 유즈.”

오케이, 시원시원한 대답과 함께 유즈리하가 마지막으로 거실을 휙 둘러보고 태량을 따라 늦은 퇴근을 했다.

* * *

유즈리하는 토요일을 좋아했다. 비단 출근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라,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 틈새에서 느낄 수 있는 복작복작함이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끝내주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즈리하는 집 안에 처박혀 있었다. 밀린 업보를 청산할 시간이었다.

유즈리하는 물건이 널려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거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본들 물건이 스스로 기립해 가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즈리하가 한숨을 푹푹 쉬며 거실 커튼부터 활짝 열었다. 햇살이 거실에 쏟아져 들어오자, 기분이 조금 밝아졌다. 창문까지 열고 마당을 내려다보자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길게 자란 잡초와 풀이 보였다.

“메이너 길의 주택들은 창문이 꽤 낮단 말이지. 솔직히 마음만 먹는다면 침입하기 쉬운 구조야.”

어젯밤 헤어지기 직전, 유즈리하는 비슷한 여지의 말을 태량에게 혼잣말하듯 흘렸었다. 태량은 흘려듣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었다. 그럼 넌 이게 도난 사건이라고 생각해? 유즈리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잘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었다.

“그건 이제부터 우리가 수사해봐야 할 일 아니겠어, 탐정님? 가능성은 열어두자는 거지. 주말 잘 보내!”

태량에게 너무 경계를 내려놓은 건 아닐까, 이제 와 약간 후회가 들기도 했다. 자기 입으로 말한 대로 태량은 탐정이었고, 유즈리하는 그 누구보다 탐정을 멀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 당시엔 태량의 사무실에 발 들이는 걸 매우 꺼렸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그곳으로 성실히, 그것도 즐겁게 출퇴근하고 있었다. 조수 일이 흥미진진해 보였다고 해도 역시 실수였을까.

유즈리하가 창가에서 등을 돌리고 목을 간질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에 모아 쥐었다. 조금 거슬릴 만큼 길었는데, 굴러다니는 고무줄 없나. 어질러진 거실을 훑던 유즈리하의 눈에 한 뼘 반 되는 크기의 나무상자가 들어왔다.

저게 저기 있었구나. 탐정에 대한 고민거리도, 고무줄을 찾으려던 생각도 시원시원하게 날리고, 유즈리하는 씩 웃으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상자를 열었다.

“그래, 지나간 일을 고민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인생 한 번 사는 거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보는 거지.”

나무상자 안에서 유즈리하가 살아온 인생의 흔적이 그를 반겨주었다. 때아닌 추억여행을 하며 유즈리하는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 보기 시작했다.

고향 도케오 마을에서 깎아 만들어 파는 물고기 모양 장식. 망한 마을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이주하며 처음 끊은 기차표. 오래 머물렀던 도시의 특산품이라 흥겨운 기분으로 사들인 싸구려 목걸이나 반지 등.

그리고 구석에 곱게 접어 넣은, 레드캣을 대서특필한 첫 신문 기사.

< 혜성처럼 나타나 값진 마도구를 훔쳐 사라진 도적, 그의 정체는? >

벌써 5년이란 시간이 지났기에 종이는 낡고 빛바랬다. 자칫 함부로 움켜쥐면 찢어질 것 같았기에 조심조심 끄트머리를 잡고 기사를 읽던 유즈리하가 폭소를 터트렸다. 기사 끝에 과거의 자신이 붉은 펜으로 적어놓은 문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날 잡아볼 수 있다면 잡아보시지!

참으로 패기 넘치는 선포였다. 결국 술래잡기는 레드캣의 승리로 끝났었다. 물욕은 없었던지라 마도구를 전부 반환했지만, 애초에 유즈리하가 원했던 건 스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슬슬 떠날 시기가 오긴 했지. 이삿짐을 싸야 한다는 목적을 상기하고 유즈리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드디어 미룬 일을 해치울 때가 왔구나 싶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집주인 계실까요?”

아니, 어쩌면 오늘도 정리할 팔자가 아니었나 보다. 창문 너머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유즈리하가 밖으로 고개를 빼서 내다보았다. 정문에서 인도로 쭉 내려가는 길에서 검은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구역 담당 배관수리공입니다. 다름 아니라 어제 여기 건너편 집에 배수관이 터졌거든요. 그래서 지금 메이너 2번 길도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있어요.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에~ 배수관 문제야 이미 잘 알고 있던 소식이라 유즈리하는 대충 대답하다가 거실 꼴이 생각나 뒤를 휙 돌아보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유즈리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온갖 물건을 밟고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오라며 돌려보내도, 미래에 거실이 더 정돈되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거실이 좀 지저분한 데 문제 있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거실은 천장만 잠시 살펴보고 부엌 찬장 밑의 배수관을 점검할 거라서요.”

괜찮다고 했겠다, 유즈리하는 정리하려는 모든 노력을 깔끔하게 놓았다. 수리공 남자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거실의 상태를 보고 흠칫했다. 왜 뭐, 왜.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유즈리하가 딴청을 피우며 일부러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수리공이 주의 깊게 거실 바닥을 둘러보고 들어갈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입구에 서서 천장을 훑었다.

“물이 샌다거나, 천장이 젖는다거나 하는 문제는 없었나요?”

“전혀요.”

빠른 대답에 수리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는지 약간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그럼, 부엌만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이쪽으로 불러주세요. 한시름 놓기엔 최근 들어 이 부근이 자주 말썽이라 말이죠.”

수리공이 주머니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내면서 모자가 흐트러졌다. 모자를 바로 고쳐 쓰는 도중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자, 유즈리하가 눈을 길게 깜빡였다.

모자 밑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짙은 갈색 머리는 흔했으나, 남자의 눈동자는 어찌나 색이 옅었는지 흰자위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유즈리하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남자가 순간 놀라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유즈리하는 순순히 시선을 쪽지로 내렸다. 제 인상이 상당히 날카로운 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고 굳이 겁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전화번호 10자리밖에 적히지 않은 종이를 보며 유즈리하가 물었다.

“근데 문제 생기면 전화해서 누굴 찾으면 되는 거죠?”

“…젝입니다. 전화할 일이 없는 게 최고겠지만요.”

아무튼, 마저 점검하고 가보겠습니다. 빠르게 부엌으로 사라지는 젝을 따라갈까 하다가 어차피 자신이 봐도 뭐가 문제인지 모를 터라 유즈리하는 다시 거실로 들어가며 옷가지를 대충 주워들었다.

맞다, 상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내용물이 흩어지기 전에, 유즈리하는 나무 상자의 뚜껑을 닫고 옷가지와 함께 가방에 던져넣었다. 이제 진짜로 정리를 시작해야 했다.

* * *

쏴아아,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는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푹푹 찌는 여름날엔 듣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소리 아니었던가. 가끔 비가 들이칠 걸 각오하고 일부러 창문도 열어놓고 빗소리를 즐기고는 했다. 더 어렸을 적엔 고무장화를 신고 나가 물웅덩이에서 찰박거리기도 했었고.

창문, 창문이 열려 있나. 여전히 빗소리는 요란했다. 유즈리하가 찬찬히 잠결에서 헤어 나왔다. 한창 짐 정리하다가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었지. 내가 창문을 안 닫았나? 아직 거실에 널려있는 물건이 많은데.

몸을 일으키는 게 먼저였고, 그보다 무거운 눈꺼풀은 손으로 몇 번 비빈 후에나 뜰 수 있었다. 낮에 하도 화창해서 밤에 비는 안 올 줄 알고 창문 그냥 열어뒀었는데. 속으로 투덜대며 눈을 뜨고 유즈리하는 그대로 굳었다. 그러나 눈을 깜빡여도 눈앞의 광경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런 미친.”

온 거실이 물바다였다. 잠이 확 달아나 유즈리하는 소파에서 구르듯 내려와 얼굴을 찡그렸다. 맨발에 차가운 물이 닿는 느낌에 눈을 바로 창문으로 돌렸다.

바깥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빗소리가 아니었다고? 유즈리하의 시선이 창문에서 거실 바닥, 다시 창문으로 향하던 중 기억 속에 목소리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부엌만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이쪽으로 불러주세요. 한시름 놓기엔 최근 들어 이 부근이 자주 말썽이라 말이죠.”

부엌. 오후에 방문했던 수리공의 말이 떠올라 유즈리하는 자리를 박차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닥에 고인 물이 발바닥 전체를 덮을 만큼 많아졌다. 부엌 불을 켜려다가 잠시 주춤하고 유즈리하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섣불리 불을 켰다가 오히려 자신이 다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빛이 크게 필요 없었다. 유즈리하의 손이 찡그린 미간을 문질렀다. 일 났네. 아무런 문제 없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했는데. 콸콸 흐르는 물소리만 들어도 파이프가 터진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주민센터든 수리소든 닫혀 있을 시간이니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유즈리하는 계단 벽장에서 수건 몇 장을 꺼내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대참사 속에서 무엇을 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테이블 위로 올려둔 여행 가방이 눈에 띄었다.

일단 저것만 가지고 아침까지 2층으로 피신하자.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대충 물기를 닦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유즈리하가 시계에 피곤한 눈길을 주었다. 새벽 4시 18분. 누군가 연락을 받을만한 시간이 되기까진 4시간도 넘게 남았다. 잠이라도 청하려고 눈을 감았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신경 쓰여 유즈리하는 결국 밤을 꼴딱 새웠다.

아침이 되었지만, 유즈리하는 여전히 주민센터에 연락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도는 했었다. 전화를 세 번 걸어도 신호음만 가고 아무도 받지 않기에, 신경질 내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유즈리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꼭 이런 일이 터지면 주말이지. 유즈리하가 투덜대며 어제 받은 쪽지를 찾아 뒤적이고 전화를 걸었다. 배관수리공이 휴일에 연락받을지는 몰랐으나 다른 수가 없었다. 부엌 파이프는 이미 자가 수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네, 배관수리공 젝입니다.

주말에도 출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환호를 삼키며 유즈리하가 생명줄처럼 수화기를 붙들었다. 마음이 어지간히 급했는지 말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튀어나왔다.

“여긴 어제 방문하신 메이너 2번 길 17-2번지인데요, 오늘 새벽에 파이프가 터졌거든요? 지금 부엌은 물론이고 거실 바닥이 물로 흥건한데 이걸 어떡해야 할까요? 새벽에만 해도 물이 정말 폭탄처럼 새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줄어든 것 같고요.”

잠시 유즈리하의 말을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는지 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여보세요? 유즈리하가 재차 물은 후에 다시 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네.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주말이라 출장비가 추가로 나올 텐데 괜찮으실까요?

안 괜찮은데요. 유즈리하가 반사적으로 지갑이 들어 있는 가방을 돌아보았다. 굳이 지갑을 꺼내 확인하지 않아도 안에 있는 지폐 수가 한 손을 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통장에 이사비용으로 빼놓은 돈을 제외하면 얼마가 있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꾸준히 알바를 뛰며 월급을 타오긴 했지만, 씀씀이가 검소한 편도 아니었기에 평상시 비상금은 쟁여놓지 않았다.

“그게… 얼마죠?”

-시간당 70달러입니다.

진짜 안 괜찮은데요. 배관 수리하려다 이사 갈 때까지 굶게 생겼다. 유즈리하의 곤란한 침묵을 알아챘는지 젝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혹시 집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이신가요?

“그렇다면 뭔가 달라지나요?”

-이런 큰 수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선 집주인에게 수리비를 청구할 수 있거든요. 표준 월세 계약서에는 비슷한 조항이 대부분 들어있습니다.

유즈리하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집주인한테 전화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기 무섭게 유즈리하가 전화를 끊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내가 월세 계약서를 어디에 뒀더라,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젖히다가 유즈리하는 클리어 파일에 대충 끼워둔 계약서를 발견했다. 꼼꼼히 읽어보는 수고는 들이지 않았다. 깨알 같은 글씨 속에서 유즈리하는 오직 한가지 정보만을 찾고 있었다.

여기 있다, 집주인 전화번호. 계약서를 쥐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유즈리하가 수화기를 들고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반복되는 신호음을 들으며 손톱을 깨물고 있자 곧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두 번째 설명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떡할까요? 말을 끝맺자, 수화기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체념한 목소리에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요즘 메이너 길에 배관 사고가 여럿 있다는 얘기는 들어서 놀랍지는 않지만, 반가운 소식은 아니네요. 어차피 아이네 씨도 한 달 후면 나갈 예정이겠다, 새로운 세입자 받기 전에 조금 일찍 수리한다고 생각해야겠죠. 제가 지금 가서 확인하고 배관수리공과 얘기도 해볼게요.

“네! 배관수리공한테 연락해서 출장 와달라고 할게요.”

감사합니다! 70달러 지출을 막은 유즈리하는 진심을 듬뿍 담아 밝게 인사했다. 젝과의 두 번째 통화는 이보다 짧았다. 여기서 출발하면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예요.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젝과 얘기하는 건 집주인이 될 거라 전달하고, 유즈리하는 소파에 털썩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벌떡 일어섰다.

“망했네.”

깔끔하게까진 아니더라도, 거실에 널린 옷가지와 물건을 적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둬야 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배관수리공 젝이 아닌 집주인이었다. 집주인은 흥건히 젖어있는 거실 바닥과 부엌으로 가는 복도를 둘러보며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난리네요.”

그렇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주셔서 참 다행이에요. 유즈리하가 동의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은 대충 치웠지만, 물웅덩이가 여전히 남아있는 거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집주인이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이래 가지곤 당장 부엌 쓰기도 힘들 텐데, 혹시 며칠만이라도 머물 수 있는 친구네 집이 근처에 있을까요? 수리가 빨리 끝난다고 해도 전문 업체를 불러서 1층을 싹 청소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 아이네 씨도 불편하실 테고.”

유즈리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친구야 있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집에 쳐들어갈 만큼 친한 친구가 없어서 그렇지. 그렇다고 괜찮은 모텔에 가자니 돈이 또 문제였다. 관광객이 많은 도시인만큼 값싼 모텔이야 찾으면 있겠지만, 그러느니 그냥 불편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는 집에 있는 것과 별 차이 없을 것 같았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해? 생각이 뻗침과 동시에 전구가 켜지듯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천재적인 발상이 떠올랐다. 주말에도 사무실에 있을 거라고 했으니 지금 전화를 걸어도 받겠지?

“잠시만요, 저 아는 사람한테 전화 좀 해볼게요.”

집주인에게 빠르게 양해를 구하고 유즈리하는 오늘 불티나게 혹사당하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부엌을 보러 들어가는 집주인의 발소리가 규칙적인 연결음과 겹쳐 울렸다.

-네, 태량 탐정사무소입니다.

“태량! 나야, 유즈. 나 부탁할 게 있는데.”

그렇게 유즈리하는 세 번째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짐은 그게 다야?”

약간 놀란 듯한 태량의 질문에 유즈리하가 해맑게 웃으며 여행 가방을 사무실 구석에 던져놨다. 사건이 대충 일단락되었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와, 유즈리하는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옷가지와 칫솔과 지갑 정도? 며칠 자는 데 달리 필요한 건 없지 않을까? 날 받아줘서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나중에 갚을게.”

됐어, 어차피 사무실 소파라 그리 편하지도 않을 텐데. 태량이 소파로 다가와 유즈리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유즈리하가 졸린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들고 태량을 올려다보았다.

“왜? 혹시 일하는 데 방해돼?”

“방해는 아니야. 그런데 배관수리공이 도착하기도 전에 여기 왔다며. 수리 확인 안 해도 되는 거야?”

“괜찮아, 어차피 내 집도 아니고. 한 달 후면 나와야 했으니까.”

집주인이 직접 왔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입을 손으로 가리며 하품하는 유즈리하의 눈가에 거뭇하게 드리운 다크써클을 보며 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 점심 먹을 때 깨울 테니까 좀 자둬.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본다.”

밤에 안 자도 낮에 자면 원래 이렇지 않은데, 요즘 낮에 일하니까 밤에도 안 자면 좀비가 되네…. 유즈리하가 다시 소파 쿠션에 얼굴을 묻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자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런 거로 해두자, 억지로 깨어있지 말고 자. 태량이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유즈리하는 천천히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유즈리하가 태량의 사무실에서 지낸 일요일 밤은 놀라우리만큼 평온하게 흘러갔다. 걸려 오는 전화도 없었고, 수도가 터지지도 않았고, 간 큰 도둑이 들지도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유즈리하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덕분에 부족한 잠도 채울 겸 푹 잠들었던 유즈리하는 하마터면 출근 시간이 0분으로 줄어들었음에도 지각할 뻔했다. 멍하니 눈을 떠 시계를 3초간 보고, 자리에서 튕겨 일어나 세수한 유즈리하는 10분 뒤 나름 깔끔한 모습으로 출근한 태량을 맞이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출근 거리가 고작해야 미닫이문을 열고 방 하나를 옮겨가는 것이 다인데, 태량보다 준비가 늦었으면 체면이 살지 않았을 터다.

“좋은 아침! 아직 8시 반인데 일찍 출근했네.”

“좋은 아침. 늘 이 시간에 출근하는걸.”

탐정사무소 영업시간이 9시부터라고 적혀있지만, 나는 그 전에 와서 오늘 할 일을 점검하고 준비해야 하니까. 단 한 번도 5분 이상 일찍 알바처에 도착해본 적 없는 유즈리하가 얼떨결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참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존경심이 약간 들었다. 불행히도 그를 본받겠다는 바람직한 마음은 콩알만큼도 싹트지 않았다.

하지만 바쁘게 자료를 뒤적거리는 태량을 보니 괜히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즈리하가 책상을 똑똑 두드려 태량의 시선을 끌었다. 하늘색 눈이 그를 올려다보자, 유즈리하가 빙긋 웃었다. 눈꼬리가 접히며 눈물점 가까이 닿았다.

“옆 카페에서 커피라도 사 올까?”

“좋아. 난 따듯한 라떼로 부탁해.”

금방 다녀올게! 유즈리하는 지갑을 들고 쌩하니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맑은 아침 공기를 흠뻑 들이쉬고 유즈리하는 탐정 거리로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단골이 된 카페로 향했다.

따듯한 라떼 한잔과 아이스 모카 한잔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태량이 수화기에 대화하고 있었다. 유즈리하는 눈치 빠르게 문을 닫고 음료를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놨다. 귀를 기울이니 전화 반대편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뢰인 동생분이네.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전화 연결이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반지는 못 찾았어요. 탐정님이 부탁하신 대로 최근 집에 방문했던 사람 목록은 작성했고요.

“감사합니다. 목록을 가지러 가는 김에 제가 집을 한 번 살펴봐도 될까요? 그 이후에도 반지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키지 않더라도 절도를 의심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게 말이죠, 탐정님.

말을 꺼낸 후, 전화 반대편에 침묵이 가득했다. 전화가 끊어진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조용해, 유즈리하가 전화기를 가리켰다. 아직 연결된 거 맞아? 태량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린의 목소리가 다시 망설이듯 들려왔다.

-어제 이웃집과 우연히 대화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 집에서 탄생반지가 사라졌대요. 언니처럼 반지를 굉장히 아껴서 어디 함부로 꺼내놓지도 않았다는데, 그래서 절도라고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언니 한 명이면 분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 건 제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해서요. 자신 없이 줄어드는 마린의 목소리에 태량이 단호하지만 다정한 어투로 긍정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곧 떠날 테니 이 이야기는 도착하면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30분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마린이 알겠다고 하자 태량이 짧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스 모카를 쪽쪽 빨던 유즈리하가 조금씩 식어가는 라떼를 태량에게 밀어줬다.

“가면서 마셔야겠네. 난 준비됐어! 버스 타고 가는 거지?”

내 면허 다음 주면 정지 풀리는데 아쉽다. 오토바이 다시 빌리면 버스보다 빠르게 태워다 줄 수 있을 텐데. 태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운전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뭔가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말이지. 정지당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니, 이거 좀 억울하다. 나 진짜 운전 못 해서 면허 정지당한 거 아니라니까? 유즈리하가 너스레를 떨며 사무실을 나서자, 태량이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사무실 문을 잠갔다.

유즈리하와 태량이 주택가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 거리는 어느 정도 한산했다. 지각했는지 헐레벌떡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사람이 간혹 보이긴 했다. 동정심인지 동질감인지 모를 기분으로 그들에게 잠깐 한눈팔고 있으니, 태량이 앞서가다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뭔 일 있어?”

“응? 아니, 그냥 여기 주택 창문 구조가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잽싸게 아무렇게나 주워 삼긴 말이었지만, 태량은 진지하게 주변 주택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딴생각하던 게 들키지 않아 유즈리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네. 이게 절도 사건이고, 반지 도둑이 동일 인물이라면, 이 부근 다른 주택에 쉽게 침입할 수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절도 사건이면 경찰 쪽으로 넘긴다며? 오늘 우리 일이 조금 싱겁게 마무리될 수도 있겠네.”

“글쎄, 그건 일단 두고 봐야겠지. 경찰 측에서 부탁한다면 경찰과 연계해서 범인 찾기까지만 의뢰를 진행하는 경우도 드물지는….”

태량의 걸음이 갑작스레 느려져 유즈리하는 앞서가던 태량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왜? 뭘 봐? 이번엔 유즈리하가 물을 차례였지만 태량은 유즈리하에게 답하는 대신 다른 곳을 보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페라노 경감님. 오랜만입니다.”

유즈리하의 시선이 태량을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 짙은 남색 경찰복을 입은 한 회색 머리의 중년 남성이 손에 수첩을 들고 무언가를 적다가 눈을 들었다. 어둡게 탄 고민 많은 얼굴이 태량을 보자 반가움으로 활짝 피었다.

“태량! 정말 오랜만이구나. 자주 연락하라고 했건만 영 소식이 없더니. 잘 지내고 있지?”

“네, 사실 별일이 없어서 연락하지 않았어요. 죄송합니다.”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긴 하니까. 그래도 가끔 소소한 근황이라도 알려주렴. 도움받을 일 있으면 내가 있으니 네 부모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한 말이 무색해지잖니.”

부모님은 잘 계시지? 가볍지만 친근한 대화에 유즈리하는 한발 물러서 조용히 관찰했다. 태량과 가까워 보이는 지인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탐정이 아닌 사무실 밖의 태량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구나. 흘린 정보를 차곡차곡 머릿속에 적립하고 있는 차에 페라노 경감이 유즈리하를 관심 섞인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쪽은 누구니? 혹시 남자친구?”

“아닌데요.”

답이 스테레오처럼 양쪽에서 튀어나왔다. 태량과 유즈리하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가 머쓱하게 반대쪽으로 떨어졌다. 부가 설명을 덧붙인 건 태량이었다.

“제 사무실에서 일하는 조수, 유즈리하예요.”

저런, 오해해서 미안하구나. 이 시간에 데이트인 줄 알았지 뭐니. 페라노 경감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유즈리하라고 했나? 반갑구나. 난 벨스토렌의 경감 페라노라고 한다. 태량은 친한 친구의 딸이라 내 조카처럼 생각해 자주 연락하는 편이지. 한때 내 밑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었는데, 그때도 참 똘똘하니 일을 잘했단다. 현장 수습과 사격은 단연코 내가 본 인턴 중에 가장 뛰어났었지. 바로 정식 경찰로 취업하지 않고 탐정 시험을 치겠다고 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물론 탐정 일도 잘 해내리라고 믿었지만, 태량은 내가 직접 경찰로 키워보고 싶었거든.”

매년 응시생은 만 명이 넘는데 백 명만 합격한다는 깐깐한 탐정 자격증 시험을 한 번에 합격했다느니, 실기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느니, 이럴 줄 알고 인턴 일과 탐정 교육도 함께 수료한 선견지명이 있었다느니, 끝없이 이어지는 페라노 경감의 자식 아닌 자식 자랑에 태량의 얼굴이 약간 홧홧해졌다.

“경감님은 주택가에 어쩐 일이세요? 경찰서 본부에 계시지 않고.”

페라노 경감의 말을 경청하느라 바빴던 유즈리하는 결국 태량이 중간에 끼어들자 조금 아쉬워졌다. 화기애애하게 유즈리하와 수다를 떨던 페라노 경감의 얼굴에 약간의 근심이 드리웠다.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부근에 침입 신고가 몇 건 들어와서 둘러보는 중이었단다. 자세한 조사야 밑에 애들이 하겠지만, 한 번쯤 내 눈으로 상황을 보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

페라노 경감의 말에 유즈리하와 태량이 시선을 교환했다. 어제 이웃집과 우연히 대화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 집에서 탄생반지가 사라졌대요. 마린의 이야기가 동시에 머리를 스쳐 갔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태량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신고한 주택에서 공통으로 분실됐다는 물건이 있지 않았나요?”

탄생반지 이야기까지는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자세한 상황은 페라노 경감도 보안 때문에 밝히지 못할 것이고, 태량 역시 의뢰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할 터였다. 페라노 경감은 조금 놀라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데, 비슷한 의뢰가 너에게도 들어온 모양이구나. 나중에 협력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너무 오래 붙들었구나, 나도 경찰서로 돌아가 봐야겠다. 잘 들어가거라. 페라노 경감이 손목시계에 시선을 주고 말하자 태량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유즈리하도 한 박자 늦게 머리를 숙였다. 페라노 경감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즈리하가 불쑥 말을 꺼냈다.

“맞는 것 같지? 절도.”

“백 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네.”

엄지손가락을 턱에 문지르던 태량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마린 씨에게 해드릴 이야기가 생겼네, 더 늦기 전에 어서 가보자. 도로에 있는 주택을 쭉 둘러보고 태량이 메이너 1번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즈리하도 커다란 창문들을 주시하다가 태량의 뒤를 따랐다.

* * *

의뢰인의 집에는 마린 뿐만 아니라 휴가를 낸 베카도 기다리고 있었다. 베카는 의외로 차분한 태도로 태량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비록 손가락 끝은 초조하게 꾸물거리고 있었지만, 태량의 말이 끝날 때까지 베카도, 마린도 끼어들지 않았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절도가 맞는 것 같네요.”

마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도둑이 들었었다니. 도난당한 반지는 아깝지만, 그때 저희가 집에 있었더라면… 생각하기도 싫어요. 마린이 눈을 굴려 옆에 앉은 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언니, 생각보다 침착하네.”

“차라리 절도인 걸 확신하는 게 마음은 편해.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데 내가 잃어버린 게 맞다면, 진짜 죽고 싶어질 테니까.”

반지 때문에 집을 찾아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탐정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예정대로 둘러보셔도 괜찮지만요. 베카의 말에 태량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창문을 기웃거리고 있는 유즈리하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말씀대로 집 전체를 보진 않을 거예요. 다만 거실과 베카 씨 방은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열려있던 창문으로 도둑이 침입했을 가능성이 크고, 반지가 사라진 장소도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네, 편하게 둘러보세요. 마린은 일을 보러 다이닝 룸으로 자리를 옮겼고, 베카만 거실을 지켰다. 태량이 창문의 잠금장치를 유심히 살펴보는 유즈리하에게 다가갔다.

“뭔가 특별한 거 발견했어? 전부터 창문에 관심을 보이던데.”

“아니? 굳이 말하자면 특별한 게 없어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네.”

이 창문 잠금장치 보여? 여기. 태량이 유즈리하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간단한 걸쇠였다. 유즈리하가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걸쇠가 흔들렸다.

“생각보다 이게 꽤 헐거워. 안쪽에서 잠갔더라도 요령만 있으면 밖에서 충분히 창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어. 반지가 없어진 날, 베카 씨가 창문을 잠그고 나갔다고 했었던가?”

“아마, 아닐 거예요. 창문을 닫은 건 맞는데 걸쇠를 걸지는 않았어요.”

귀찮기도 했고, 여태 아무런 문제가 생긴 적도 없었고. 베카의 기어들어 가는 변명에 태량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가 창문 틈새를 관찰하며 창문을 양손으로 밀어서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면 더 쉬웠겠죠. 틈만 제대로 잡고 당기기만 하면 열릴 테니까요.”

울상이 된 베카의 얼굴을 보고 태량이 2층 방을 볼 수 있겠냐고 말을 돌렸다. 베카가 평소 반지를 보관하고 있던 장소까지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보물함에 자물쇠도 달리지 않아 보안의 역할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고 중얼거리는 유즈리하의 발을 태량이 슬쩍 밟아 눈치를 주는 사소한 사고가 있긴 했었다. 2층에서 내려오는 태량과 유즈리하에게 마린이 기다렸다는 듯 공책에서 찢은 듯한 종이를 건네주었다.

“여기, 저번 주부터 집에 방문한 사람 목록이에요.”

태량이 목록을 받아서 들고 쭉 훑는 사이 유즈리하도 태량의 어깨 너머로 눈을 굴리며 반듯한 글씨를 읽어내렸다. 목록의 반쯤 내려왔을 때 유즈리하의 시선이 멈췄다.

“어라.”

젝, 젝. 익숙한 이름인데. 짧은 한 글자 이름을 입속에서 되뇌다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흰색에 가까운 옅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맞다! 그 배관수리공!”

이름이 흔해 기억하지 못할뻔했으나, 희귀한 눈동자 색은 잊기 힘든 편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는 사람 찾았어? 태량의 질문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으로 이름 옆을 가리켰다. 태량의 시선뿐만 아니라 베카와 마린의 눈동자도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나도 최근에 집에 파이프가 터져서 급하게 이 사람 불러서 수리를 부탁했었거든. 마침 전날에 점검차 방문했기에 연락처도 받아놨었고.”

“맞아, 우리 집에도 점검하러 왔었어요. 그게… 대청소한 날이었구나. 점검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파이프에 문제가 생겼었죠.”

주민센터에서 파견된 점검 직원인가, 유즈리하가 중얼거렸다. 고개를 기울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태량이 눈썹을 살짝 모으고 입술을 씹다가 의문을 제기했다.

“보통 같은 날이 아닌 이상 근무하는 분이 다를 텐데. …일단 그 부분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혹시 목록에 있는 분 중에 유달리 집 내부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요?”

그것까진 기억이 안 나는데, 집 내부까지 들어온 사람은 추릴 수 있어요. 마린이 노란 형광펜을 들고 와서 이름 몇몇에 줄을 치기 시작한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네 쌍의 눈동자가 현관문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내가 나가볼게, 마린.”

베카가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누군가와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린이 베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형광펜으로 줄을 마저 치고 목록을 다시 태량에게로 넘겼다. 그때 조금 놀란 듯한 베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확인하러 오지 않았었나요?”

“네?? 전 이곳에 처음 방문하는데요?”

당황으로 커진 상대방의 목소리에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싶어 마린까지 현관문으로 나가 베카 뒤에 섰다. 무슨 일이야, 언니? 마린이 묻자, 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린을 돌아보았다.

“배수관이 제대로 수리됐는지 주민센터에서 점검 나오셨다는데…. 우리 이미 이틀 전에 사태 수습하고 점검 나온 직원분이 있으셨잖아?”

젝 씨라고. 베카의 말에 주민센터 직원이 얼굴을 찡그렸다. 현관문 아래 그늘진 얼굴이 얼핏 심각해 보였다.

“젝이요? 근무하는 직원 중에 그런 이름은 없는데.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닐까요?”

현관문에 선 세 사람이 혼란스러운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태량과 유즈리하의 눈이 마린이 건네준 종이 위로 떨어졌다. 젝의 이름에 노란 형광펜이 그어져 있었다.

* * *

“일단 젝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혹시라도 떠오르거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전화로 알려달라는 당부와 함께 태량과 유즈리하는 자매의 집을 나왔다. 점심시간이라 외출한 사람이 인도에 심심찮게 보였다. 집 문을 잠그고 하나둘 나오는 이들을 보며 유즈리하는 문득 집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잘 되어가고 있으려나. 어차피 한 달 후에 나와야 할 집이었지만, 그래도 한 달이면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잠깐 들러도 괜찮냐고 물어볼까? 급하게 나오느라 옷도 한두 벌밖에 못 챙겼는데, 여기까지 온 참에 필요한 물건 몇 개 더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즈리하가 태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면 집에 들러서 짐 몇 가지 챙겨도 될까?”

마침 점심시간이니 수리하는 사람들도 나갔을 테고, 우리가 들린다고 해서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 태량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 근처였지?”

“여기 골목 지나서 바로 있어. 전에 한 번 여권 들고 찾아왔었잖아?”

근데 오리아나 할페른 씨가 여권 제때 만들어주겠다고 했는데 시간 어긋나지는 않겠지? 여권용 사진은 바로 그다음 날 찍어서 전달해줬는데. 벌써 먼 과거처럼 떠올리며 유즈리하가 중얼거렸다. 그럼 또 내 사무실에 며칠 머무르겠다고 부탁하러 올 수도 있겠네. 태량이 농담하듯 웃었다.

“그래도 된다고 한 거지? 무르기 없기다?”

어느덧 집 문 앞에 도착한 유즈리하가 주머니에서 혹시 몰라 챙겨온 열쇠를 꺼내며 밝게 웃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본 거실의 참사가 뇌리에 아직 선명했기에, 표정과 달리 유즈리하는 마음의 각오를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긴장으로 점철된 손짓이 집 내부를 확인하자 안도로 느슨해졌다. 수리 전에 어느 정도 청소를 해뒀었는지 고인 물웅덩이 하나 없이 거실 바닥은 매끈했다. 물론 수리 직원들이 신발을 신고 다녀서 신발 자국이 이리저리 찍혀있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청소하면 될 일이었다. 이만하면 사태가 잘 수습된 것 같아 유즈리하는 만족스럽게 신발을 신고 그대로 들어갔다. 태량이 뒤에서 머뭇거리자, 유즈리하가 거실을 고갯짓했다.

“신발 벗고 다닐 만큼 깔끔하게 청소된 거 아니니까 그냥 들어와. 먹을만한 게 냉장고에 남아있지 않을 테고….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거실에서 기다릴래?”

유즈리하가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다행히 소파가 높아서 물난리를 피할 수 있었기에 거실에 있는 물건 중 텔레비전과 더불어 가장 멀쩡한 상태였다. 텔레비전은 잘 작동하나? 리모컨은 어디에 뒀더라. 유즈리하의 눈이 매같이 거실을 둘러보고 소파 쿠션 사이에 껴있는 리모컨을 포착했다. 소파로 거침없이 걸어간 유즈리하가 리모컨을 빼서 태량에게 건넸다.

“혹시 텔레비전이 제대로 틀어지는지 확인해볼 수 있어?”

“어려운 일은 아니지.”

태량이 리모컨을 받고 텔레비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금방 갔다 올게! 남긴 말보다 빠르게 유즈리하는 거실을 나와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랐다.

정말 방도 개판으로 해놓고 갔었구나. 거실보다 여기가 더러울 수도 있겠네. 유즈리하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침실 방을 바라보았다.

이불은 바닥에 팽개쳐 있고, 베갯잇도 뒤집혀있지, 서랍은 반절이 열려있지, 옷의 반은 옷장이 아니라 이불과 함께 바닥에 널려있었다.

내가 이렇게 어질러놓고 갔었던가. 배낭을 하나 꺼내 입을만한 옷을 대충 집어넣으며 고민했지만, 평소에도 그리 깔끔떠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유즈리하의 생각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여기까지 청소해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건 언제 다 정리하지. 태량을 거실에 두고 와서 다행이다. 옷을 몇 벌 배낭에 쑤셔 넣고 유즈리하가 서랍으로 관심을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월세 계약서는 챙겨두는 게 낫겠지. 그런 사람 같지는 않지만, 혹시 집주인이 마음 바꿔 수리비를 나한테 청구하면 곤란하니까.

편하게 서랍을 열어보려 의자에 앉자, 주머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유즈리하의 손은 주머니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고 있었다.

“맞다, 방문 목록 내가 챙겼었지.”

유즈리하가 마린에게서 받은 종이를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여전히 형광펜이 쳐진 젝의 이름에 신경이 쓰였다. 주민센터 직원이 아니라면 프리랜서인가. 먼저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에 점검하러 찾아오는 게 보통 관례인가?

생각에 잠겨 눈동자를 굴리던 유즈리하의 시선이 책상 위에 꺼내둔 월세 계약서에 닿았다. 아차, 나 짐 싸는 중이었지. 유즈리하는 종이를 책상에 올려두고 계약서를 끼워둔 클리어 파일을 집어 들어 배낭 안에 구겨 넣은 후 더 잊은 건 없는지 확인하러 서랍을 전부 잡아당겨 열었다.

유즈리하가 빵빵해진 배낭을 메고 거실로 내려오자, 위층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던 텔레비전 특유의 치직거리는 소음이 새어 나왔다. 태량이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배낭을 내려놓고 태량 옆에 털썩 앉았다.

“텔레비전은 멀쩡하네. 뭐 재밌는 거 해?”

“벨스토렌 문화 채널에서 시장님 인터뷰를 하고 있어. 다음 전시 기획에 관한 내용인가 봐.”

태량의 말대로 텔레비전에는 정치에 관심 없는 유즈리하도 익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40대 중후반 중년 남자의 둥그런 얼굴, 짧게 깎은 은색 머리와 같은 색의 멋들어진 콧수염, 자수정의 색을 닮은 눈동자. 의심 한 치 없이 벨스토렌의 시장 기예르 파트롱이었다.

-큰 결심을 하셨네요. 성왕의 레갈리아는 오랫동안 박물관에 전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죠. 2년 전 괴도 레드캣한테 그 보물을 도둑맞고 영영 돌려받지 못하나 생각이 들었을 땐, 박물관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레드캣도 자취를 감춘 지 한참 지났겠다, 벨스토렌의 시민과 관광객을 위해서라도 짧게나마 다시 전시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레드캣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장의 둥그런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이고 콧수염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실룩였다. 방송국 인터뷰어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화제를 전환했다.

-성왕의 레갈리아는 먼 도시에서도 구경하러 올 정도니까요. 정말 기쁜 소식이군요. 언제부터 전시를 시작할 계획인가요?

-이미 협력 박물관과 이야기는 전부 끝났습니다. 빠르면 사흘 후부터 전시를 시작할 예정이에요. 레갈리아가 네 개이니 벨그란데 마도구 박물관을 비롯한 네 개의 박물관에 나눠 전시할 겁니다.

벨스토렌의 박물관에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클로징 멘트와 함께 화면이 전환되었다. 최근 라헤센 미술관에 화제의 신인 작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으로 이어지자, 태량이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섰다.

“짐은 다 챙겼어?”

“응. 텔레비전 껐고, 창문도 닫았고…. 다 확인했으니 직원들 돌아오기 전에 가자.”

유즈리하가 태량에게서 리모컨을 받아 대충 소파 위로 던졌다. 둘은 별말 없이 거실을 나와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작게 찰칵이는 소리와 문이 잠겼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갑작스레 찾아온 긴장 서린 정적만 남았다.

* * *

밖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태량의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사무실 문틈에 끼워진 광고지였다. 유즈리하가 조심성 없이 광고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찢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매끈매끈하게 코팅된 종이는 무식한 악력에 굴하지 않고 틈새를 빠져나왔다. 유즈리하가 대충 광고지를 훑어보고 시큰둥한 얼굴로 태량에게 건넸다.

“이거 아까 그거네, 성왕의 레갈리아 전시 광고. 혹시 관심 있어?”

“응. 광고지 나 줄래?”

태량의 손에 광고지를 넘겨주고 나서야 답이 뒤늦게 유즈리하의 머리에 인식되었다. 있다고? 날카로운 각도의 눈썹을 둥글게 휘며 유즈리하가 태량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벨스토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 솔직히 마도구 전시가 질릴 만도 하지 않아?”

“마도구라서 관심 가지는 게 아니야.”

태량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즈리하도 신발을 밖에 대충 털고 태량을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바싹 뒤를 따라붙으며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왜?”

“레드캣이 마지막으로 훔쳤고, 또 맨 마지막으로 반환한 마도구니까.”

이번에 유즈리하가 태량을 쫓던 걸음을 멈춰 선 이유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유즈리하가 팔짱을 끼었다.

“저번엔 레드캣에게 특별한 흥미 없다고 했잖아?”

유즈리하가 처음 태량의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나눈 대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태량이 잠시 기억을 더듬듯 고민하다가 이내 아, 짧게 감탄사를 내었다.

“레드캣이라는 인물 자체에 관심 있지는 않아. 실제로 레드캣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만큼만 알고 있어. 나보다 레드캣을 자세히 조사한 탐정은 이 거리에 수두룩해.”

벨스토렌을 뜰 때까지 절대로 걸리지 않고 얌전히 지내야겠단 다짐을 다시 깊이 새기며 유즈리하가 팔짱을 풀고 소파 팔걸이에 손을 짚어 걸터앉았다. 그럼? 유즈리하의 눈빛에 태량이 의자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며 책상에 비스듬하게 기댔다.

사실 그리 재밌는 이야기는 아닌데, 태량이 서두를 열었다.

“내가 페라노 경감님 밑에서 인턴으로 잠깐 있었다는 얘기는 기억하고 있지?”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붙임성 있게 다가온 페라노 경감과 태량에 대한 그의 자랑을 겸한 수다는 아무래도 잊기 힘든 편이었다.

“그때가 딱 2년 전이었어. 레드캣이 활동하던 시기와 겹쳤었지. 한두 번 레드캣의 절도 현장에 수습반으로 불려 나가기도 했었고.”

“본 적 있어?”

레드캣 말이야. 본능적으로 빠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유즈리하가 뒤늦게 덧붙였다. 태량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 상사들도 잡지 못한 괴도인데 한낱 인턴인 내게 모습을 드러내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을 리가 없지. 욕도 칭찬도 아닌 말에 유즈리하는 애매하게 콧소리만 내었다.

“그때 레드캣을 잡지 못한 미련이 남은 거야?”

솔직히 이건 아니기를 바랐다. 태량이 다시 고개를 저었을 때 유즈리하는 몰려오는 안도감을 느낌과 동시에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럼? 태량이 오른손으로 왼쪽 검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레드캣의 마지막 절도 사건이라 알려진 성왕의 검 도난 당시, 현장에서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레드캣이나 성왕의 레갈리아에 관한 뉴스를 보면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유심히 보게 되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려? 왠지 이 대화를 나눈 게 처음이 아니라는 기시감에 유즈리하는 소파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거.

“네 탄생반지 이야기야?”

“맞아.”

중요한 이야기는 다 마쳤는지, 태량이 책상에서 몸을 떼고 빙 둘러 의자에 앉았다. 서류를 찾는지 서랍을 여는 태량을 잠시 응시하다 유즈리하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진 광고지에 닿았다.

“혹시 레드캣이 네 반지를 훔쳐 갔다고 생각해?”

태량이 잃어버린 반지에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유즈리하는 객관적으로 자기 잘못과 자기 잘못이 아닌 것을 칼같이 구분하는 편이었다. 반지가 없어진 것과 레드캣의 활동 기간이 겹친 것은 운 나쁜 우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태량이 레드캣에 대한 작은 오해를 사는 건 어째선지 거슬렸다. 레드캣이 범죄자라서 미움을 사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즈리하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하고 싶었다.

수많은 마도구를 훔친 전적은 있지만, 나는 절대로 네 반지엔 손댄 적 없다고.

유즈리하의 질문에 태량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태량이 팔꿈치를 책상 위로 올려 턱을 손에 괴고 침묵하는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뭐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아닐 거야.”

레드캣은 값비싼 마도구에만 관심을 가졌으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탄생반지에 그런 특수한 기능이나 값어치는 없어. 잔잔하게 귀에 꽂혀오는 말에 유즈리하가 긴장했던 몸을 풀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잃어버린 건 유감이네. 유즈리하의 대꾸에 태량이 웃음 어린 한숨을 지었다.

“그러게. 레드캣이 내 탄생반지를 가져갔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훔친 물건을 전부 반환했을 때 그 안에 반지가 섞여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조금 품었었거든.”

그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는지 태량은 침묵했고, 유즈리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침묵했다. 조용한 숨소리와 시계 초침,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남은 사무실 안으로 여름의 더운 오후 햇살이 가라앉았다.

* * *

“유즈, 마린 씨에게서 받은 방문자 목록 어디에 뒀어?”

태량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온 건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태량의 일이 끝날 낌새가 보이지 않아 근처 카페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할 일이 없어 아침에 도착한 신문이나 넘기던 유즈리하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라?”

손에 잡히는 게 없자 뒤이어 왼쪽 주머니도 뒤적거렸다. 혹시 내가 가방에 넣었었나? 배낭에 눈길을 주기가 무섭게 유즈리하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그거 내가 아까 집에 들렀다가 내 책상 위에 놓고 온 것 같은데…. 미안! 지금 당장 필요해?”

“그건 아니지만… 의뢰인의 보안을 침해할 수 있는 정보니 빨리 가져오면 좋겠지.”

말은 다급하지 않았지만, 태량의 얼굴에 조금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유즈리하가 소파에서 일어선 후 배낭에서 집 열쇠를 꺼내 챙겼다.

“그럼 지금 가지러 갈게. 내일 사람들 또 출근하기 전에 갔다 오는 게 낫잖아?”

유즈리하가 벽시계를 힐끔 보았다. 아직 8시였다. 느긋하게 다녀와도 막차 끊기기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시간이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듯한 유즈리하를 응시하다 태량도 일어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가자. 슬슬 퇴근해야 하니까. 사무실 여분 열쇠는 가지고 있지?”

여기, 집 열쇠 옆에 달아놨지. 유즈리하가 검지에 열쇠고리를 끼우고 재주 있게 빙글빙글 돌렸다.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고 숄더백을 걸쳤다. 마지막으로 사무실 창문이 제대로 잠겨있는지 확인하고 둘이 사무실을 나섰다.

늦은 저녁의 탐정 거리는 한산했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예술의 거리가 휘황찬란한 마도구의 불빛으로 저녁을 밝히고 있다면, 탐정 거리는 가로등뿐만 아니라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사무실의 전깃불이 도로를 빛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탐정 거리를 지나가고 있자니 불빛이 빠르게 옆을 스쳐 지나가 밤의 놀이공원에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다니. 이렇게 보면 탐정은 유난히 성실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로 옆 좌석에 앉은 태량을 보면 썩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유즈리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태량이 돌아보았다.

“왜? 사무실에 뭐 두고 나온 것 있어?”

“아니. 그냥 너도 참 열심히 산다 싶어서. 넌 늘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해?”

좀 뜬금없는 질문이네. 그러나 또 성실하게 유즈리하의 질문에 답을 하려 고민하는 태량을 보며 유즈리하가 키득키득 웃었다. 답해주지 않아도 이미 행동에서부터 티가 나니, 말보다 행동이 확실하다는 명언이 이를 가리키는구나 싶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중에 후회는 남지 않겠지. 시간이 흘러 이 순간을 돌이켜봤을 때 ‘그때 더 잘할걸’이라는 생각만 들면 서글프지 않겠어?”

그런가. 솔직히 백 퍼센트 공감하지는 못했기에 유즈리하는 애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를 눈치챘는지 태량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난 너도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내 조수 일을 자처하며 이것저것 배우고 있잖아?”

“그런가? 열심히 살기보단 즐겁게 사는 게 내 좌우명이라서.”

태량이 자기를 좋게 봐주는 건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나, 유즈리하는 솔직하게 실토했다.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에 플로리안의 의뢰에 끼어들어 탐정 일에 발을 들였고, 또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에 태량의 사무실에 들락날락하며 일을 도왔다.

더 먼 과거를 짚어보자면 단순히 재미있는 곳 같아서 벨스토렌에 정착했고, 재미있어 보여서 마도구를 훔치며 괴도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물론 체포되는 건 재미없어 보였기에 적절한 시기에 전부 반환했지만 말이다.

“그것도 나쁜 건 아니잖아. 나한테 그렇게 살라고 하면 오히려 그게 힘들 것 같지만.”

“힘들게 뭐가 있어? 그럼 이건 어때? 나 이사 가기 전에 하루 날 잡고 벨스토렌 쭉 돌면서 놀아보자. 태량, 너만큼 여기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구경하고 놀기 좋은 데는 빠삭하게 꿰고 있거든.”

유즈리하의 충동적인 제안에 태량이 눈을 깜빡이다 활짝 웃었다. 좋아, 기억하고 있을게. 그리고 우리 이제 내려야 해.

태량의 말대로 버스는 어느새 주택가 메이너 길 정류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버스에서 내리자 깜깜해진 밤하늘이 둘을 반겼다.

유즈리하의 집으로 가는 길은 이제 태량에게도 익숙했다. 저 멀리 늦게 퇴근하는 사람 한둘 빼고는 텅 빈 인도를 걷다 보니 곧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유즈리하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구멍에 넣고 돌렸다.

문이 찰칵 열리는 소리, 경첩이 작게 끼익 비틀어지는 소리, 태량이 뒤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는 소리가 차례대로 조용한 집에 울려 퍼졌다. 유즈리하가 현관에서 한 발 안으로 내딛다 우뚝 멈추어 섰다. 살랑이는 바람이 유즈리하의 뺨을 간질이고 있었다.

“목록만 찾아서 갈 거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유즈리하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명확한 무언의 메시지에 태량이 목소리를 죽이고 입만 뻐끔거렸다.

왜 그래?

가늘어진 유즈리하의 눈이 홀로 불 켜진 거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커튼이 조용히 펄럭이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긴장한 고양이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유즈리하가 태량에게 소리 없이 속삭였다.

여기 우리 말고 누군가가 있어.

태량이 잠시 굳었다가 조용히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그러면서 눈은 경력 있는 탐정답게 빠르게 현관과 복도, 거실까지 훑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거실 창문이 열려있었다. 낮에 집에 들렀다 떠나기 전, 창문이 닫혀있는 걸 분명히 확인했었다. 수리 직원들은 한참 전에 퇴근해 현관에 신발은 없었다. 방문자가 있었다면 유즈리하와 태량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자연스럽게 확인하러 나왔을 터였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거나, 들키면 곤란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메이너 길에 침입 신고가 몇 건 들어와 보러 왔다는 페라노 경감의 말. 이웃집에서도 탄생반지가 사라졌다는 마린의 이야기.

유즈리하가 거실을 가리켰다. 저기야. 완전한 침묵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유즈리하가 신발장 옆에 있는 장대 우산을 집어 들고 태량을 돌아보았다.

너 호신용품 있어?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즈리하가 복도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신발을 신고 있는데도 어찌나 소리 하나 없는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태량이 감탄했을 법했다.

전직 괴도의 집을 털려고 하다니, 간도 크지. 도둑은 물론이고 옆의 태량조차 알 리 없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유즈리하가 복도와 거실을 가르는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손잡이가 위를 향하게 우산을 고쳐 쥐었다. 태량이 바로 뒤에서 소매를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지만, 유즈리하는 슬쩍 고개를 돌릴지언정 시선은 거실에서 떼지 않았다.

“네가 내 뒤로 와. 우산보단 이게 더 위협적이니까… 앞에!”

태량이 무얼 들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 유즈리하의 눈이 반 돌아간 찰나, 머리 위에 위협적으로 드리운 그림자를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유즈리하가 빠르게 우산을 휘둘렀다. 콰득, 하는 소리와 우산이 휘었다. 유즈리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자세를 낮춰 온 힘을 담아 침입자를 밀쳤다. 두 사람이 엉킨 채로 요란하게 거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쪽은 유즈리하였다. 다치지 않게 낙법 치는 정도야 눈 감고서도 할 수 있었다. 침입자가 바닥에 널브러져 잠시 얼어붙은 사이, 유즈리하가 그의 무릎 위에 무게를 실어 꾹 눌렀다. 침입자의 모자가 반쯤 벗겨져 환한 거실 전등 빛이 얼굴 위로 들이쳤다.

“어쩐지 이름 보자마자 싸했더라니. 왜, 또 배관이 터지기라도 했답니까?”

배관수리공 젝 씨. 하얀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매섭게 유즈리하를 올려다보았다. 젝의 손이 움찔거리자, 유즈리하는 그가 떨어뜨린 망치를 집어 옆으로 던졌다. 참 살벌한 도구를 갖고 다니시는군. 부러진 우산마저 버리고 유즈리하가 빈손으로 젝의 멱살을 잡았다. 악력이 상당했는지 젝이 캑캑거리며 숨 막힌 소리를 내었다.

“태량, 우리 의뢰인의 사건과 동시에 경찰 쪽 사건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화 좀….”

유즈리하가 태량을 뒤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돌아보려고 했다. 매섭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유즈리하는 본능적으로 젝의 멱살을 놓고 바닥을 굴러 거리를 벌렸다. 긴장을 바짝 세우고 시선을 올리자 한 손으로 목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 스패너를 잡고 유즈리하를 노려보는 젝이 보였다.

진짜, 직업 도구가 아주 흉기야. 내가 망치를 어디에 던졌더라. 멀리도 던져 놨네. 유즈리하가 어느 쪽으로든 몸을 피할 준비를 하며 무릎을 반쯤 들은 순간이었다.

-탕!

유즈리하도 젝도 얼어붙었다. 일상에서 들을 일 없는 소음이었지만, 이명이 울려오는 커다란 파열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둘 다 알고 있었다.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거실 입구에서 태량이 손에 총을 들고 차분히 젝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은 실탄이야. 스패너 내려놓고, 천천히 손들어.”

유즈리하가 태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신용품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게 총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긴 탐정도 경찰처럼 총기 허가가 나긴 했지. 페라노 경감님이 태량이 사격에 뛰어났다고 했었던가.

유즈리하의 시선이 김이 살짝 피어오르는 총구 끝에서 젝에게로 옮겨갔다. 공포탄에 겁먹은 듯 보였지만 그의 손에는 아직 스패너가 들려있었다. 태량과 젝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젝이 태량의 손에 들린 총을 눈대중으로 재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스패너를 든 젝의 손이 움찔했다. 유즈리하는 아까 던진 망치를 찾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잡이를 위로 향하게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불시에 뒤에서 후두부를 얻어맞은 젝이 쓰러졌다. 유즈리하가 발끝으로 툭툭 쳐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기절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총을 든 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량이 눈에 들어왔다. 유즈리하가 망치를 내려놓고 두 손을 들었다.

“실탄에 맞는 것보단 망치로 맞는 게 낫지 않을까? 손잡이로 때렸어. 죽진 않았을 거야, 아마도.”

태량이 한숨을 쉰 후 안전장치를 걸고 총을 내려놓았다. 슬쩍 태량을 본 유즈리하가 젝 옆에 무릎을 꿇고 주머니와 벨트를 뒤지며 도구를 빼내기 시작했다. 태량이 가방에서 수갑을 하나 꺼냈다. 유즈리하의 눈이 단박에 수갑에 고정되었다.

‘살벌하기는 이쪽 직업 도구도 진짜 살벌하네.’

“유즈, 집에 밧줄 같은 거 있어?”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괜스레 찔려 시선을 피했던 유즈리하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있, 있던가? 찬장 뒤져보면 나올지도 몰라. 가서 찾아볼까? 태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수갑은 채워놨고 곧 깨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 괜찮겠지. 내가 감시하는 동안 경찰에 신고 좀 해줄래?”

태량이 신고해야 경찰이 더 호의적으로 대응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태량이 총의 안전장치를 다시 빼 드는 모습을 보며 유즈리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다, 아무래도 도둑 감시는 전직 도둑이 아니라 탐정한테 맡기는 게 제일이겠지.

거실 전화를 찾아 119 세 숫자를 누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결음 소리를 들으며 유즈리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살다 살다 제 손으로 경찰에 도둑을 신고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찰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요?

“여기는 메이너 2번 길 17-2번지인데요. 집에 도둑이 들어서 기절시켜서 수갑 채워놨어요.”

전화 건너편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유즈리하가 눈을 굴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인생 사는 거,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보는 거라 했지만, 어쩐지 이 짓을 또 하라고 하면 사양하고 싶었다.

* * *

그 이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종결되었다. 유즈리하의 신고에 경찰은 바로 출동했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젝이 진짜 수갑을 찬 채로 거실 바닥에 기절해있는 걸 본 경찰은 처음엔 기막혀했지만, 옆에 있는 태량을 보고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경감님이 탐내신 인재는 다르긴 다르네, 그런 중얼거림을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문제는 젝을 경찰에 넘기고 떠난 이후에 드러났다. 유즈리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거실을 바라보았다. 물건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는 건 둘째 치고, 마룻바닥이 성한 곳이 없었다.

더 살살 던질걸. 급한 대로 망치를 확 던졌던 터라, 무거운 머리 부분이 당연히 마루에 먼저 떨어지게 될 걸 생각하지 못했다. 부서진 부분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유즈리하는 고민에 잠겼다. 혹시 이거 내가 물어내야 할까? 따지면 이 파손은 내 과실이긴 한데, 도둑이 든 것도 천재지변으로 쳐주나? 누군가 팔을 톡톡 치는 느낌에 유즈리하는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돌아보았다. 태량이 말없이 마루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저거… 미안. 공포탄이긴 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발포한 거라 손상이 갔나 봐.”

새까만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태량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부분은 뜨거운 열기가 스쳐 간 듯 그을려있었다. 막막해진 유즈리하가 죄 없는 미간만 열심히 꼬집었다.

물론 유즈리하만큼이나 태량의 잘못은 없었다. 유즈리하가 망치를 젝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았거나, 태량이 공포탄을 쏴 젝을 일시적으로 얼어붙게 만들지 않았다면 저 꼴이 난 건 유즈리하나 태량 본인일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집이 손상되었다는 소식을 두 번째로 듣게 될 집주인에게도 그 논리가 유효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에라, 고민만 해서 뭐 하겠어. 일단 집주인한테 알리고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지. 기다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도 않을 테고.”

유즈리하의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그보다 더 빨랐다. 도둑이 들었다는 말에 집주인은 기겁했지만, 이미 경찰이 다녀가고 다 해결되었다고 전하자 침착하게 자신이 지금 갈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뒤돌아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태량이 보였다.

“아차. 기다리게 해서 미안. 집주인 온대니까 넌 이제 집에 가도 괜찮아. 시간도 늦었잖아.”

“파손에 내 책임도 일부 있는데 그냥 갈 순 없지. 집까지 여기서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태량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유즈리하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이런 데서 올곧게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성격이란 건 파악한 터라 시간 낭비임을 알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대신 소파에 털썩 앉아 옆자리 쿠션을 팡팡 쳤다.

“빨리 온다고 했지만, 그쪽도 도착하려면 좀 걸릴걸? 앉아서 기다리자.”

태량이 이번 제안은 거절하지 않고 유즈리하의 옆에 앉았다. 유즈리하가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 난리 통에 텔레비전은 망가지지 않았는지, 화면은 멀쩡하게 나왔다.

벨스토렌 지역방송 9시 뉴스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성왕의 레갈리아 전시가 곧 시작된다는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와 유즈리하가 조금 지겨운 표정을 지었지만, 태량이 관심을 가질까 싶어 채널을 돌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방금 우리가 도둑 체포한 것도 내일 뉴스에 나올 수도 있겠네?”

뉴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 든 생각이 불쑥 유즈리하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태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시민의 협조로 도둑을 체포했다고까지 밖에 안 나오겠지만. 혹시 아쉬워?”

유즈리하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관심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 시민의 관심은 물론이고 경찰의 관심까지 받는 건 위험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과거를 자세하게 캐려 들려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할 건가. 선량한 사람이라면 찔릴 게 없겠지만, 불행히도 유즈리하는 찔릴 게 많았다. 자신이 9시 뉴스를 타게 된다면 그건 특집 중의 특집일 터였다.

“그래도 우리 팀워크는 꽤 괜찮지 않았어? 사건 해결을 기념하며 치어스!”

생글거리며 건배 대신 유즈리하가 주먹 쥔 손을 태량에게 내밀었다. 태량이 잠시 유즈리하의 얼굴과 주먹을 번갈아 보다가 마주 웃으며 자기 주먹도 톡 가져다 댔다. 처음 보는 태량의 밝게 웃는 얼굴에 유즈리하가 눈을 깜빡였다.

“꽤 괜찮았지, 우리.”

응, 그렇지.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초인종이 울렸다. 유즈리하와 태량의 시선이 마주치고 유즈리하가 먼저 벌떡 일어섰다. 집주인인가 보다, 내가 나가볼게! 태량이 대답하기도 전 유즈리하는 이미 거실을 나서고 있었다.

별로 유쾌한 대화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유즈리하의 얼굴엔 만연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하아.”

집주인은 한숨을 쉬었고, 유즈리하는 가시방석에 앉아있었고, 태량은 유즈리하 옆에서 침묵했다. 집주인은 애꿎은 콧잔등만 계속 문질렀고, 유즈리하는 그 기분을 알 것 같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집주인이 입을 열었다.

“배수관 수리와 청소는 내일 끝날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거실 수리는 연장해야겠네요.”

집주인이 주머니에서 플래너 수첩을 꺼내 펼치고 고민에 빠졌다. 유즈리하는 얌전히 선고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집주인의 얼굴이 점점 난감한 기색으로 물드는 걸 보며 마음의 각오를 다지기도 전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수리비는 따로 청구하지 않을게요.”

유즈리하의 귀가 번쩍 뜨였다. 하늘이 보내준 천사인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집주인이 펜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지만, 혹시 짐을 일찍 빼주시는 게 가능할까요?”

천사의 후광 직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유즈리하가 입을 뻐끔거리며 집주인을 응시하자 집주인이 황급히 덧붙였다.

“쫓아내려는 건 아니고요, 거실 마루 전체를 뜯어내고 교체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서요. 그다음에는 세입자 구인 광고를 내야 하는데 집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것도 불편하실 테고.”

당장 나갈 수 있는 사정이 안 되면 계약대로 있으셔도 괜찮긴 한데, 가능하다면 한 달 치 월세에 조금 더 얹어 돌려드릴 테니 일찍 짐을 빼는 걸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집주인의 제안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거실로 돌렸다. 집주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매일 수리 직원들이 들락거릴 텐데,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가까이 공사가 이어진다면 남의 눈 신경 안 쓰는 유즈리하에게도 스트레스가 될 것이었다. 그에 이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온다지만, 예비 세입자들마저 불시에 들이닥친다면 차라리 태량의 사무실에 빌붙어 사는 게 편하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태량의 사무실에 며칠 이상 머무는 건 무리가 있었다. 태량에게 허락받는다 쳐도, 애초에 사무실인 만큼 숙소로 쓰기엔 편의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고, 한 달 동안 소파에서 웅크리고 잤다간 허리가 나가 이사 말고 병원을 먼저 가야 할 터였다. 모텔에 한 달 머무는 건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돌려받은 보증금을 한 달 숙소비로 다 날릴 순 없잖은가.

이번엔 집주인이 아니라 유즈리하의 얼굴이 점차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집주인도 이를 눈치챘는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유즈리하 역시 팔짱을 끼고 한숨 릴레이를 이어갔다. 그 사이로 태량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즈, 한 달 머물 곳만 있으면 문제없는 거지?”

그건 그렇긴 하지? 유즈리하가 눈을 깜빡였다. 태량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집에 머물러도 괜찮아. 부모님은 일 때문에 장기간 다른 도시에 가 계시고, 손님방도 있거든.”

유즈리하에게나, 집주인에게나 정말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벌써 구세주를 보는 듯 눈을 반짝이는 집주인 옆에서 유즈리하는 잠시 망설였다. 냉큼 좋다고 해도 괜찮나? 아무리 아는 사이라지만 갑작스럽게 성인 남성을 집안에 들이는 것도 걱정이 될 법한데. 미약하게 남은 양심이 유즈리하를 콕콕 찔렀다. 그런 유즈리하를 태량이 다시 설득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이편이 나도 마음 편하니까. 수리 때문에 일찍 나가야 하는 덴 내 책임도 일부 있고.”

너 달리 갈 곳 없는 것도 알아. 아니면 수도 터졌을 때 며칠 머물게 해달라고 나부터 찾아오진 않았겠지. 예리한 지적에 유즈리하는 할 말을 잃었다. 시선을 빙글빙글 굴리는 유즈리하를 응시하다가 태량이 빙긋 웃었다.

“세 번은 안 물어볼 거야.”

“감사합니다.”

유즈리하의 판단은 늘 빨랐다.

* * *

다음 날 아침, 유즈리하와 태량은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바로 짐을 태량의 집으로 옮겨야 했고, 태량은 페라노 경감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어젯밤 사건에 관해서 해주실 이야기가 있으시대서 이쪽으로 찾아오신대. 유즈, 네 짐 다 옮기고 경감님과 대화한 후 점심쯤 사무실로 가자.”

유즈리하가 흔쾌히 동의했다. 다행히 짐은 별로 없으니까 두어 번만 왔다 갔다 하면 다 가져올 것 같아.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과 손을 흔들어주는 태량을 뒤로 하고 유즈리하는 메이너 2번 길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유즈리하가 짐을 전부 옮겼을 무렵, 페라노 경감이 태량의 집 초인종을 울렸다. 저번 만났을 때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페라노 경감이 태량의 손을 한 번, 뒤이어 유즈리하의 손도 한 번 세차게 악수했다. 정말 수고가 많았구나! 작정하고 도둑을 잡은 게 아닌 우연에 의해 친 사고에 가까웠지만, 태량이나 유즈리하나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저 겸허히 칭찬을 받아들였다. 자세히 파고들면 칭찬이 아니라 괜한 위험을 감수했다며 잔소리가 날아올 것 같았다.

“젝이라는 그 도둑, 탄생반지를 다른 도시에 고가로 팔아넘길 생각으로 훔쳤다고 자백하더구나. 벨스토렌 내에서야 상징성뿐인 가치지만, 타 도시에선 희귀성 있는 물품이라 판단한 거겠지.”

태량이 내준 커피를 홀짝이며 꺼낸 페라노 경감의 말에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 도시에 팔아넘길 계획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일리는 있네요.

“그래서 탄생반지를 목적으로 배관수리공이라는 직책을 앞세워 당당히 타인의 집에 들어가 반지가 있는지 조사하고, 일부러 배관을 망가뜨린 거군요. 다시 집에 방문할 핑계를 얻기 위해.”

“그래. 그렇게 훔친 탄생반지만 다섯 개였지. 전부 무사히 회수하고 지금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중이란다.”

전체 상황 파악 진짜 빠르네. 유즈리하가 옆에서 속으로 감탄하며 커피와 함께 내온 크래커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유즈리하 역시 판단력이야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긴 했지만, 머리 회전은 태량이 한 수 위인 걸 인정해야 했다.

레드캣 활동 당시 인턴이 아니라 정식 경찰이었으면 따돌리는데 조금 애먹었겠어. 짜릿하긴 짜릿했겠네. 벨스토렌 전체를 누비며 술래잡기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벨스토렌 토박이보다 더 벨스토렌을 잘 알게 되었을 수도. 생각의 흐름이 그곳까지 미치자, 유즈리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내 집은 왜 털었을까…요? 탄생반지가 목적이었다면 벨스토렌 출신이 아닌 사람의 집을 노릴 이유가 없는데.”

유즈리하의 의문에 태량과 페라노 경감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그러게, 합당한 의문이네. 페라노 경감이 팔짱을 끼고 곰곰 생각에 잠겼다.

“혹시 다른 반지나 액세서리를 보고 착각한 것 아닐까? 첫 방문 땐 일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을 테니 네 물건을 자세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유즈리하가 젝이 처음 집에 방문했을 당시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짐 정리하느라 거실을 그렇게 어질러 놓았는데 충분히 착각할 만했겠지. 페라노 경감도 태량의 추측에 힘을 실었다.

“유즈리하네 집에 여러 번 침입한 모양이던데, 탄생반지를 못 찾아서 과감하게 여러 번 오가다가 이번에 잡힌 모양이더구나. 뜻밖의 행운이었지.”

페라노 경감이 유즈리하를 흘끗 보고 민망한 듯 기침했다. 물론 유즈리하 입장에서는 불운이었겠지만 말이다. 유즈리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집을 예정보다 일찍 나오긴 했지만, 태량의 도움 덕에 실제로 피해 본 일은 없었다. 태량의 집이 살던 월셋집보다 훨씬 넓고 좋아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아무튼,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니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얘기해주고 싶어 들렀단다. 더 대화 나누고 싶지만 나도 쌓인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가봐야겠구나. 커피 잘 마셨다.”

페라노 경감이 커피를 마저 들이켜고 일어섰다. 너희도 바쁠 테니 배웅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할 일이 많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는지 페라노 경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즈리하가 남은 크래커 하나를 입에 밀어 넣고 접시를 손에 들었다. 반대편에서 커피잔을 손에 든 태량이 앞서 부엌으로 걸어가며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우리도 이거만 치우고 사무실로 가자. 거기 있는 네 짐도 가져와야 하니까.”

입안 가득 크래커를 물고 있던 유즈리하는 그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량의 사무실에는 둘보다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었다. 환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예쁘게 올려묶은 베카가 잠긴 사무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량과 유즈리하를 보고 활짝 웃었다.

“탐정님! 조수님! 좋은 아침이에요!”

베카의 이렇게 밝은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둘은 잠시 얼이 나가 눈만 깜빡였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전후 상황을 파악한 건 태량이었다.

“경찰에게서 반지를 무사히 돌려받으셨나 보네요.”

“네! 탐정님이 반지 도둑을 체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셨다고 얘기도 들었어요. 감사 인사도 드리고 싶었고, 의뢰 대금도 드리러 왔어요.”

“기다리고 계실 줄 알았으면 일찍 나왔을 텐데,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저도 회사에 전화해서 휴가 처리하느라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안내하는 태량을 뒤따르며 베카가 방싯방싯 웃었다. 진짜 기분이 좋은가 보네, 유즈리하는 베카의 통통 튀는 걸음을 눈으로 따라가다 문을 닫고 들어섰다.

태량이 책상 앞에 앉아 의뢰 파일철을 찾아 펼쳤다. 중간에 사건이 경찰에 넘어간 점도 있어서 계산이 조금 복잡해지는데 찬찬히 설명해 드릴게요. 태량이 빽빽하게 글로 채워진 종이를 들고 베카에게 설명을 시작하자 유즈리하는 눈치를 보다 사무실 미닫이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쏙 들어갔다. 듣고 있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 같으니 굳이 그가 필요한 일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짐이나 챙기고 있는 게 효율적이겠지.

다행히 태량의 사무실에 머무른 게 며칠 되지 않아 짐을 풀어놓지도 않았으니 챙길 물건이 적었다. 의자에 널어둔 겉옷을 집어 들고, 수건, 칫솔과 치약을 챙기고 나니 더는 할 게 없었다. 대충 쑤셔 넣느라 울퉁불퉁 튀어나온 가방을 보다가 유즈리하는 가방을 거꾸로 들어 소파에 물건을 탈탈 쏟았다. 이대로 메고 갔다간 뾰족한 모서리가 제 등을 찔러 멍이 들 것 같았다.

자, 맨 밑에는 수건과 옷을 깔고. 그 위에 칫솔 담은 파우치를 넣고. 뭐야, 계약서도 있잖아. 이건 작은 주머니에 구겨서 넣고. 남은 게… 어디 보자.

유즈리하의 손끝에 거칠거칠한 나무 표면이 닿았다. 그의 시선이 가방 안에서 손에 닿은 물건으로 옮겨갔다.

“이것도 가방 안에 넣었었구나.”

배수관이 터지기 전날, 거실에 주저앉아서 구경하던 나무 상자였다. 유즈리하가 두 손에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가방 안에 있어서 그런지 젖은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다. 측면에 달린 잠금장치를 딸깍 풀고 유즈리하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레드캣에 관한 기사, 온갖 자잘한 장식과 쓰레기라 착각해도 할 말 없는 유즈리하만의 기념품이 상자 안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젖어서 못 쓰게 되었다면 조금 아쉬웠을 테니 가방 안에 넣어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유즈리하의 눈에 반지 하나가 들어왔다.

다른 반지야 한두 개 더 있었지만, 창문도 없는 방에서 홀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던 터라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유즈리하가 반지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이거 설마?

“이걸 탄생반지로 착각하고 훔치러 들어온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유즈리하가 배수관이 터진 직후 상자를 가방에 넣어 태량의 사무실로 옮겨놨으니, 젝이 못 찾았을 법도 했다. 매끈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유즈리하가 반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진짜 탄생반지인가? 태량의 설명과 비슷하긴 한데. 이게 어디에서 났더라? 기억을 되짚으며 반지를 손안에서 굴리던 유즈리하의 눈길이 반지 안쪽에 닿았다.

반지 안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유즈리하가 눈을 찌푸리고 작은 글씨를 더듬더듬 읽었다. ‘크게 헤아려라.’ 그 옆에는 생일이라 추정되는 날짜가 적혀있었다. 0731, 네 숫자였다.

“벨스토렌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문구와 생일을 반지 안쪽에 새겨서 아이가 성인이 되면 선물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어.”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이걸 왜 가지고 있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유즈리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저기서 사거나 얻어온 물건이 한둘이 아니라 단번에 기억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느라 유즈리하는 태량이 미닫이문을 두 번째로 두드렸을 때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즈, 짐은 다 챙겼어? 뭐 도와줄 거 있어?”

“아냐, 다 됐어! 베카 씨는 벌써 갔어?”

유즈리하가 반지를 다시 상자 안에 던져넣고 뚜껑을 닫았다. 상자를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근 직후 태량이 미닫이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유즈리하를 들여다봤다.

“방금 정산 끝내고 가셨어. 너도 끝났으면 우리도 점심 먹으러 가자.”

좋아! 나 저번에 본 덮밥 가게 가보고 싶어. 반지에 대한 고민을 잊은 채로 유즈리하가 해맑게 웃었다.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면 줄이 길지 않을 거야. 챙겨둔 가방을 소파 밑으로 내려놓고 유즈리하가 미닫이문을 넘어 태량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미닫이문을 닫았다.

모든 사람이 떠난 방 안, 나무 상자 속에 잠든 반지는 여전히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Written 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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