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1. 사라진 사람은 늘 발자취를 남긴다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신문 한 부 사세요, 신문! 거기 신사분, 신문 필요하지 않으세요? 단돈 4달러!”
“네? 네, 아, 아니요. 신문 필요 없는데요….”
당황으로 둥그레진 순한 눈망울을 굴리던 플로리안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오늘 내로 팔아치워야 하는 신문을 팔에 차곡차곡 쌓은 알바생 청년이 씩 웃고 플로리안에게 과감히 몸을 밀착했다. 이 사람은 분명히 팔아줄 것이다, 라는 세일즈맨의 직감이 울려왔기 때문이었다.
“아~ 혹시 관광객? 관광객 맞나보네요. 여행사 끼고 오셨나요? 아니에요? 그렇다면 신문이 그 어떤 가이드북보다 유용할 텐데. ‘벨스토렌 타임즈’ 뒤쪽엔 관광객을 위한 숙박 정보도 있고, 벨스토렌에 왔다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지도 상세하게 적혀있거든요! 전부 최신 정보로만!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쓸 만한 정보 얻지도 못해요. 어때요? 한 부 드릴까요?”
플로리안의 눈이 불쌍할 정도로 핑핑 돌았다. 결과적으로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청년의 손안에는 지폐 네 장이, 플로리안의 손에는 신문 한 부가 들려있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목적을 이룬 청년은 빠르게 떠나갔고, 플로리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몇 분 더 멍하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플로, 뭐 해? 뭐 사 온 거야?”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플로리안이 몸을 틀어 저도 모르게 신문을 등 뒤로 홱 숨겼다. 플로리안보다 한 뼘은 작은 소녀가 당당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밝은 갈색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플로리안을 탐색하자 플로리안은 괜히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되어 식은땀을 흘렸다.
“그… 신문인데요, 모모카 님. 벨스토렌의 숙박과 관광 정보가 많다고 해서.”
그런데 혹시 어리숙한 관광객처럼 보여 바가지 쓰인 것 아닐까? 갑자기 변명하는 어투가 나온 것도 그런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러나 괜한 돈 낭비를 했나 싶어 쩔쩔매는 플로리안과 달리 모모카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 모모카가 활짝 웃고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난 기념품 가게 구경하고 올 테니까 다음에 보러 갈 박물관 좀 찾아봐 줄래?”
“네? 저, 모모카 님. 이래 봬도 제가 모모카 님 호위라서, 혼자 막 다니시면 큰일 나거든요…. 모모카 님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게 아니라 들통나면 저 잘려요….”
“괜찮아, 괜찮아.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리고 플로는 이 미술관 별로 관심 없어 했잖아? 아까 졸고 있는 거 다 봤거든?”
“졸지는 않았는데요!”
울컥 반박했지만, 플로리안은 미술관에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모모카가 씩씩하게 플로리안의 등을 떠밀었다.
“10분 동안 별일 있겠어? 정 그러면 저기 카페에 잠깐 앉아있어! 뒤에 딱 붙어 있으면 정신 사나우니까. 나도 간만에 온전한 내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그렇게까지 그에겐 잠깐의 휴식을, 자신에게는 자유시간을 주장하는 모모카를 이길 방도는 플로리안에게 없었다. 영 자신 없는 눈빛과 풀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플로리안이 모모카가 가리키던 카페로 물러났다. 방긋 웃으며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모모카가 미술관의 기념품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플로리안은 결국 카페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낯선 도시에 와서 에너지가 분수처럼 차고 넘치는 모모카의 뒤를 따르는 것은 상당히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기에, 휴식이 절실하기는 했다. 플로리안이 기념품 가게에서 잠시 눈을 떼고 4달러를 주고 산 신문의 앞면을 훑어보았다. 커다란 글씨로 인쇄된 헤드라인이 그의 눈길을 반겼다.
< 괴도 레드캣이 잠적한 지 2년!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괴도의 정체는? >
플로리안은 신문을 펼친 목적도 잊고 기사를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미술에 까막눈인 플로리안에겐 값비싼 명화보다 그만한 가치의 보물을 훔치는 괴도에게 더 관심이 생기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5년 전, 예술의 도시 벨스토렌에 혜성처럼 등장한 괴도 레드캣은 3년간 훔친 마도구가 거의 세자릿수에 달하는 악명높은 범죄자다. 레드캣이 훔친 마도구 중에는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1급, 2급 마도구도 대량 섞여 있으며, 벨스토렌에서 내로라하는 경비대를 뚫으며 단 한 번도 잡힌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의 추적을 전부 따돌리며 그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겨왔다.
괴도 레드캣, 그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청년인가, 중년인가? 그는 어디서 왔고, 무슨 이유로 마도구를 훔쳤는가?
붉은색 고양이 가면 뒤에 숨겨진 수수께끼의 괴도는 2년 전, 바로 이날, 훔친 모든 마도구를 반환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끈질긴 수색 끝에 나오는 단서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없어, 그의 정체는 영원히 미궁으로 빠졌다…
순식간에 기사에 흠뻑 빠져든 플로리안의 민트색 머리가 신문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예술의 도시라는 이명답게 화려하고 부유한 벨스토렌에 처음 방문했을뿐더러, 수수께끼의 괴도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로망 가득한 청년의 들뜬 마음은 금세 불붙었다. 프로미시아 도시의 귀족 아가씨인 모모카가 벨스토렌으로 관광 겸 친구를 만나려 여행을 계획했을 때, 플로리안도 호위로 따라오게 된 게 마냥 싫지는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모카를 혼자서 제어해야 한다는 점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모모카 님 아직 안 나오셨나? 플로리안이 번쩍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신문에 정신이 팔린 사이 20분이 훌쩍 넘어있었다. 모모카는 보이지 않았다.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플로리안은 초조해져 신문을 접어 옆구리에 끼고 기념품 가게를 향해 종종걸음쳤다.
모모카는 가게 안에 없었다. 플로리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크림색의 머리카락과 장난기 많은 얼굴을 찾아 헤맸다. 1초, 2초가 흐를수록 플로리안의 심장이 타들어 갔다.
엽서 진열대 앞에도 없었다. 스케치북과 노트북을 잔뜩 쌓아놓은 가게 구석에도 없었다. 낮의 태양이 환하게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도 없었다. 직원이 홀로 서 있는 계산대에도 없었다.
거의 울먹이는 플로리안이 모모카를 봤느냐고 계산대 직원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작지 않은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플로리안이 천천히 자신 앞에 선 낯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무감정한 검은 선글라스가 플로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좋아하는 빨간 후드를 입기엔 조금 더운 날씨였을지도 몰랐다. 유즈리하는 정수리를 익혀버릴 기세로 내리쬐는 8월의 태양을 원망스레 째려보았다. 당연히 자기 눈만 부셨기에 빠르게 그만두긴 했다.
유즈리하가 벨스토렌으로 이사 온 지 어언 5년이 넘었으나, 몇 년이 지나도 도저히 여름의 열기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계절이 뚜렷한 도시였음에도 유즈리하는 여름이 그중 최고로 존재감이 뚜렷하다는데 제 월급을 걸 수 있었다.
더위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열기도 어느 정도여야 일하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야행성 생활패턴을 고수하는 유즈리하에겐 아침부터 출근하는 게 고역이었고, 해가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같이 상승하는 온도는 정말이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토바이라도 탈 수 있었으면 바람도 맞고 좀 나았을 텐데. 한탄하던 유즈리하가 햇빛이라도 가리려 야구모자를 푹 눌러썼다. 한 발짝 떼기가 무섭게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그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가방은 어깨만큼 무사하지 못해 내용물까지 바닥에 거꾸로 엎을 뻔했으나, 유즈리하는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가방을 다시 낚아채는 동시에 앞에 달려가는 사람을 향해 소리를 꽥 질렀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그쪽이 길 전세 냈어?!”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신문 한 부 싸게 3달러에… 뭐야, 유즈리하 너야? 괜히 쫄았네.”
신문을 한 아름 안고 뛰다 말고, 재빠르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던 유즈리하 또래의 청년이 표정을 풀었다. 야구모자 아래 반쯤 숨겨진 유즈리하의 얼굴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180도 바뀐 태도에 안 그래도 사나워 보이는 유즈리하의 눈매가 더욱더 가늘어졌다. 뭐가 어쩌고 저째?
“사과를 판매 기회로 삼다니 정말 천성 세일즈맨이다? 불쌍한 관광객 한둘 벗겨 먹는 건 일도 아니겠어. 그런데 3달러는 솔직히 양심 없지 않냐? 벨스토렌 타임즈면 아무 구멍가게만 가도 2달러에 살 수 있는데.”
“남의 매출 비밀을 그렇게 까발리면 의리가 없지. 자, 한 부 그냥 서비스로 줄 테니까 관광객들 보거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주는 거다? 그럼 나는 돈 벌기 바쁘니 이만!”
거절하기도 전에 유즈리하의 가방에 신문을 쑤셔 넣다시피 하고, 청년은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유즈리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너만 바쁘냐? 나도 바쁘다. 가뜩이나 배달해야 하는 우편물도 많은데, 지난주에 오토바이로 과속하다 걸려서 면허도 일시 정지당하고 발로 뛰어야 하는 내 처지가 서럽다, 서러워.
우편 물량을 분배하는 본부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하루 배달 물량을 줄이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하루치 월급 또한 반 토막 날 것이 뻔했다. 다음 달 다른 도시로 이사가 계획되어 있는 유즈리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월급을 사수해야 했다. 이사비용을 절약하려고 큰 짐은 전부 포기했지만, 기차표며 집 보증금을 포함한 정착비며 별개로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부터 후드 주머니에 들어 있는 여권을 갱신하는 데만 상당한 비용이 들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면허 없이는 돈 먹는 짐밖에 안 되는 렌트 오토바이도 아쉬운 마음을 안고 일찍 반납한 참이었다.
결과적으로 유즈리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기준 꼭두새벽부터 우편을 배달하려 탐정 거리를 뺑뺑이 돌고 있었다. 그나마 근로계약 만료일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오늘과 내일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배달을 뛰면 되겠지. 여권사무소가 문을 닫기 전 퇴근에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무거운 배달 가방을 쳐다보던 유즈리하의 눈길이 삐죽 튀어나온 신문에 머물렀다. 맞다, 이거 받았었지. 어차피 재밌는 뉴스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불만 가득한 생각이 첫 면의 헤드라인에 닿자마자 정지했다. 유즈리하는 순간 어깨를 짓누르는 일거리도, 빡빡한 스케줄도 잊고 신문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끈질긴 수색 끝에 나오는 단서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없어 그의 정체는 영원히 미궁으로 빠졌다. 아직도 그의 흔적을 쫓고 있는 유명한 탐정은 한 손을 넘고, 경찰도 그들에게 최대한 협력할 의사를 밝혔다. 레드캣이 처음 훔친 마도구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진짜 끈질김 하나는 인정해 준다. 참 나.”
신문과 인상을 동시에 팍 구기며 유즈리하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깐 후 입에 던져 넣었다.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달고 새콤한 맛에 짜증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미간이 약간 펴졌다. 인상이 더러운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여태 실마리 뭐 하나 잡지 못했으면 포기할 때쯤 되지도 않았나? 훔친 것도 다 반환했겠다,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계속 쫓고 있냐고. 치사해서 내가 이 지겨운 도시를 뜨고 말지.”
탐정과 경찰이 들으면 어디서 적반하장이냐며 기함할 말이었지만, 다행히 유즈리하의 혼잣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투덜대긴 해도 유즈리하는 낮에는 일 년 내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하고, 밤이 되면 온갖 예술품과 마도구로 화려하게 길을 밝히는 도시를 사랑했다. 하루하루 새로운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에게 벨스토렌보다 안성맞춤인 도시는 아마도 없을 터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극도로 재미와 스릴을 좇는 유즈리하도 무모할지언정 멍청하지는 않았다. 아쉬움이 남더라도, 슬슬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모자를 고쳐 쓰고 벽돌이 가지런히 깔린 길을 박찼다. 떠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해야 했다. 배달할 우편은 많았고, 그에게 주어진 하루는 짧았다.
유즈리하는 빈 벤치에 앉아 플라스틱 물병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쉴 틈 없이 뛰어다녔더니 아무리 체력이 좋은 그라도 죽을 것 같았다. 조금만 물량을 줄여달라고 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도 들었지만, 일거리는 이미 제 가방에 들어가서 배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펑크라도 냈다간 바로 항의가 들어올 테고, 내일 마지막 물량을 받기는커녕 본부장이 얼씨구나 하루치 일급 아꼈다 하고 저를 가차 없이 자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즈리하가 한 손으로 가방을 흔들며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 반쯤 줄었으려나? 탐정 거리를 반 바퀴 돌았으니, 반은 배달한 것 맞겠지? 예술의 거리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종탑이 보였다. 눈부심을 참고 유즈리하는 금색 종 아래에 걸린 시계를 째려보았다.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이쯤이면 성과가 괜찮은데? 유즈리하가 머릿속으로 탐정 거리의 지도를 펼치고 아직 배달하지 못한 곳을 체크했다. 벨스토렌 서쪽 지역에 있는 탐정 거리는 길이 좁고 복잡하게 얽혀있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면 십중팔구 길을 잃기 일쑤였지만, 근 몇 년 꾸준히 배달원을 하며 유즈리하는 이제 눈감고도 탐정 거리를 한 바퀴 돌아 집을 찾아갈 자신이 있었다. 제 손바닥처럼 거리를 꿰고 있는 덕에, 평소 애용하던 오토바이 없이도 오늘치 우편배달은 문제없을 듯했다.
자, 후딱후딱 해보자. 여권사무소가 6시에 닫으니까 5시까지 배달을 마치고 버스를 타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유즈리하가 물병을 비우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가방을 고쳐 맸다. 마침 건너야 하는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빨간 불로 바뀔 것 같은 신호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건널목을 눈 깜짝할 새에 뛰어서 건넌 유즈리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곧바로 제 잘못을 뉘우쳤다.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턱과 손바닥, 엉덩이가 아려왔다.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히며 세게 넘어진 탓이었다. 상대방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지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바뀐 시야와 통증에 정신없는 와중, 유즈리하는 길바닥에 쏟아진 우편물을 가방에 주워 담으며 되는대로 사과했다.
“미안! 미안! 거기서 걸어오고 있을 줄은 몰랐어! 어디 다치진 않았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유즈리하는 우편 봉투를 하나하나 모으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었네, 이거 5시까지 다 배달할 수 있는 거 맞나? 마지막 갈색 봉투까지 가방에 쑤셔 넣은 유즈리하가 몸을 일으키고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려 했지만, 상대방 역시 옷을 털고 일어난 참이었다. 그제야 상대방이 제대로 눈에 들어와 유즈리하가 모자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흐트러진 레몬색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다듬는 여성은 유즈리하보다 약간 어려 보였다. 20대 초반쯤 되었으려나? 무표정으로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이 다행히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사과받았으니 됐어.”
뒤늦은 답변이 들려오자, 유즈리하가 안심하고 씩 웃었다. 미안하긴 미안했지만, 그만큼 눈 돌아가게 바빴기에 더 큰 상황으로 악화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진짜 미안! 좀 바빠서 서두르다 보니 그만. 다친 데 없으면 이만 갈게! 나중에 혹시 다시 마주치면 내가 커피라도 한 잔 살게!”
그 말을 끝으로 유즈리하는 레몬색 머리카락의 피해자를 뒤로하고 탐정 거리의 작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 * *
소란 없이 보내주긴 했지만, 태량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예기치 않던 충돌사고에 크게 안 다친 것만 해도 다행이었으니,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렇게 빨리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털고 간 저 배달원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태량이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옆으로 올려 묶은 레몬색 사이드테일이 그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말할 틈도 없었네…. 다치지 않았으면 되긴 했지만. 저 사람 우편은 다 주워갔으려나. ……헉.”
내 서류 봉투. 텅 빈 자기 손에 위화감을 느낀 순간, 태량이 급하게 길바닥을 훑었다. 왼쪽에도 없고, 오른쪽에도 없고, 혹시 몰라 한 바퀴를 빙 돌아보았다. 내일까지 의뢰인에게 전달해야 하는 갈색 서류 봉투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태량이 당황을 뒤로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서류 봉투에 갑자기 발이 생겼을 리 없으니 침착하게 되짚어보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좀 전에 그 배달원과 부딪히기 전까지만 해도 서류 봉투는 제 손안에 있었고, 넘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졌겠지. 불행 중 다행히도 오늘은 바람 한 점 없어 돌풍에 날려가지는 않았을 테다.
태량의 생각이 우편 봉투를 가방에 주워 담던 배달원에게 닿았다. 아! 탄성을 지르기가 무섭게 태량이 배달원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지만, 그가 아직도 그곳에 있을 리는 만무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니 뛰어서 붙잡기는 무리였다.
태량이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우체국에 가서 생김새를 수소문하면 그 배달원을 찾을 수 있겠지, 고민하던 차에 작은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땅바닥에서 주워 들고 나서야 태량은 그것이 수첩이 아닌 여권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배달원 본인의 여권인가? 그렇다면 그 사람 찾는 게 훨씬 빨라질 텐데. 작은 희망에 여권 커버를 넘기자, 태량의 푸른색 눈이 여권에 실린 사진에 닿았다. 엄지손가락 길이보다도 작은 사진이었지만 화질이 선명해 그 배달원의 얼굴을 알아보는데 문제없었다.
어깨에 살짝 못 미치는 검은색 머리카락. 그 사이로 군데군데 보이는 귀 피어싱. 사납게 뻗은 눈썹 밑에 자리한 날카로운 느낌의 갈색 눈동자. 왼쪽 눈 아래의 눈물점. 입꼬리를 씩 올려 시원시원하게 웃는 표정. 배달원이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자세하게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특징이나 분위기가 맞아떨어졌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붉은색이긴 했지만, 아마 이 사진을 찍은 후에 염색했겠지 싶었다.
이름은 아이네 유즈리하. 나이 스물넷. 사진 옆에 기록된 정보를 기억해두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인적 사항이 눈에 꽂혀, 태량은 머리 한구석에서 개인정보 침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읽어 내렸다. 어찌 보면 직업병이나 다름없었다.
“출생지가 도케오 마을… 그게 어디지? 이름이 생소한 거로 봐선 벨스토렌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같은데…. 노란색 표시는 현재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뜻이고. 그래서 벨스토렌으로 오게 된 걸까.”
마찬가지로 주어진 정보를 보고 바로 분석을 시작하는 것도 직업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아차, 내가 지금 이 사람의 과거 행적을 분석하려던 게 아니지. 태량의 눈이 순식간에 여권의 주소란으로 건너뛰었다.
메이너 2번 길, 지번 17-2. 태량에게도 익숙한 주택 지역의 주소였다. 현재 서 있는 탐정 거리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태량이 안도와 피곤이 반반 섞인 한숨을 쉬었다. 우체국보단 그 사람의 집 근처에서 기다리는 게 확실하겠지. 그편이 엇갈릴 확률이 낮을 테니까. 태량은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전부 미루고, 주택가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 * *
있어야 할 것이 없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었다. 유즈리하는 당황하다 못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다섯 번째로 제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살짝 부스러진 사탕이 몇 개 나왔고, 며칠 전의 구겨진 구멍가게 영수증도 나왔다. 그러나 가장 존재감이 컸어야 했을 여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분명히 주머니에 넣고 나왔었는데, 이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수 없어서 미치고 팔짝 뛰기 직전이었다.
혹시 우체국 사물함에 흘려두고 온 게 아닌가 싶어, 일부러 우체국까지 다시 발걸음했다. 사라진 여권은 사물함에도 없었기에 헛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유즈리하가 결국 사물함 앞에 주저앉아 가방에서 우편물을 전부 쏟아냈다. 가방에 섞여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마지막 희망을 붙든 채였다.
그렇게 유즈리하는 여권을 찾는 데 실패했지만, 우표도 주소도 없는 의문의 서류 봉투를 얻었다.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실수로 반송 우편이 물량에 섞여 들어온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사물함에 쑤셔 넣었다. 퇴근 후 반송 담당에게 맡기고 가면 될 일이었다. 당장의 우선순위는 여권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배가 꼬르륵 고파왔다. 우체국 오는 길에 샌드위치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 점심시간을 놓쳐 더욱 머리에 열이 올랐다. 머리카락을 뜯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유즈리하가 곰곰이 고민했다.
분명히 들고나왔을 텐데, 어느 순간 없어졌다. 꺼낸 적도 없는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도통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오늘 갱신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권을 분실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여권 갱신은 넉넉히 잡아 일주일이면 충분했으나, 분실 신고 후 재발급 신청하면 길게는 석 달을 벨스토렌에 묶일 수 있었다. 이사 예정일은 다음 달이었고, 월세 계약도 비슷한 시기에 만료되어 자칫하면 길거리에 나앉게 될 수 있었다. 벨스토렌은 관광 수입으로 먹고사는 도시답게 숙박시설이 널려있었지만, 그만큼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런데 진짜 여권을 가지고 나온 게 맞던가? 이쯤 되니 유즈리하의 기억에 혼선이 생겼다. 식탁 위에 올려두고 나올 때 잊은 거 아닐까? 일찍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지. 반쯤은 여권을 들고나온 걸 확신하면서도, 유즈리하는 괜한 희망을 품었다. 우선 오후 배달을 돌기 전에 집에 가서 찾아보자. 없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고. 유즈리하가 단순한 결정을 복잡한 마음으로 내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발견한 유즈리하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돌렸다.
첫 번째,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 저 사람은 경찰이고, 내가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것을 알고 체포하러 왔다. 유즈리하는 이 가정을 바로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다. 저 사람은 경찰복도 입고 있지 않을뿐더러, 유즈리하는 자기 과거를 그 어떤 경찰도 알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자기를 체포하러 왔다면 달랑 경찰관 한 명만 보내지는 않았을 터다.
두 번째 시나리오. 저 사람은 탐정이고, 위와 같은 사유로 나를 체포하러 왔다. 비슷한 이유로 유즈리하는 이 가정 또한 폐기했다. 벨스토렌에서 사설탐정과 경찰은 긴밀한 협력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마찬가지로 혼자 올 리 만무했다.
세 번째 시나리오. 저 사람은 단순히 이 동네 주민이고, 나한테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다. 제일 가능성 높아 보이는 가정이었지만, 그 용건이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월세 밀린 건 아니니 집주인은 아닐 테고, 도로에 하수도라도 터져서 알려주러 왔나? 가정을 하나씩 짚어가던 와중, 그 사람이 시선을 들어 유즈리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오전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레몬색 머리카락! 신호등 건너편! 맞지? 같이 넘어진 사람!”
딱히 우아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태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가 약간 개운해진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주억거리다 머리를 옆으로 쓱 기울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사람이 왜 여기 있고, 어떻게 나를 찾아왔지?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태량이 유즈리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다짜고짜 묻기는 좀 그렇지만, 혹시 갈색 서류 봉투 네가 가지고 있니? 이 정도 크기인데.”
손대중으로 봉투의 크기를 가늠하는 태량에게 유즈리하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봉투를 사물함에 쑤셔 넣은 지 채 30분도 안 됐으니 잊었을 리 없었다.
“왜 우표도 없이 내 가방에 들어있나 했더니 네 거였구나. 우편 쏟아졌을 때 주워 담다가 실수로 가져간 모양이네. 미안, 미안.”
“그래도 네가 가지고 있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야. 중요한 서류라 잃어버리면 많이 곤란한 상황이라서.”
“그런데, 그게 지금 내 우체국 사물함에 들어있거든? 퇴근 후에 찾아줘도 괜찮을까?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태량이 잠시 고민하다 승낙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익숙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유즈리하의 눈이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다.
“그 여권!”
“네 거지?”
유즈리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량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 서류, 정말 중요한 거니까 돌려받을 때 네 여권도 돌려줄게. 괜찮을까? 유즈리하가 상관없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시간상 오늘 여권사무소에 들르기는 글렀으니 좀 나중에 돌려받더라도 큰 차질은 없을 터였다. 다시 찾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6시 지나서 서류 들고 찾아갈게. 어디에서 만날까? 카페 같은데도 상관없고, 집이어도 상관없는데.”
“난 오늘 일이 있어서 늦게 퇴근하니까 내 사무실로 찾아와 줄 수 있어? 주소는 여기.”
태량이 명함 지갑에서 무늬 없는 하얀 명함을 한 장 꺼내 유즈리하에게 건네주었다. 별생각 없이 명함을 받아 눈으로 훑던 유즈리하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태량 탐정사무소? 탐정 맞잖아?! 아니, 모르고 온 것 같기는 하다만, 그래도 뭐 이런 망할 우연이 다 있어?’
다행히 태량은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유즈리하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이사도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절대로 탐정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는 유즈리하는 속마음이 어떻든 겉으로나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태량의 사무실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 * *
유즈리하가 서류 봉투를 들고 태량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무렵, 붉은 노을이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가로등이 켜지기까진 두어 시간 남아있어 구석진 골목은 으슥했다. 태량의 탐정사무소로 향하는 유즈리하는 다른 이유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 했다.
‘괜히 찾으러 온다고 했나? 그냥 몇 주 싸구려 모텔에서 지내는 걸 감수하고 여권을 새로 발급받을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 와서 잠수타는 것도 수상하게 보일 테고.’
빨리 서류 주고 여권 받고 꺼져야겠다. 문을 두드린 후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유즈리하는 5분 컷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고 싶어졌다.
-네, 괴도 레드캣은 여러 의미로 벨스토렌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유명인이죠. 예고 없이 나타나서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진 점도 그렇고. 심지어 사라지기 전에 훔친 마도구를 전부 시에 반환했잖습니까? 이 괴상한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경찰을 비롯한 많은 전문가의 추측이 오갔지만, 당사자가 사라진 이상 정답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겠죠. 제일 유력한 추측은 레드캣이 높은 사람에게 꼬리를 밟혀, 자신의 정체를 함구해주는 대가로 훔친 보물을 반환했다는 것인데요. 다시 여러 의문이 제기되긴 합니다만 현재로선 이게 공공연한 정설이죠.
-그렇군요. 반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정치계, 탐정계,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레드캣의 팬층에도 파란이 일었었죠.
-아무리 유명인이라도 결국엔 범죄자인데, 그렇게 팬층이 많았습니까?
-그럼요.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만한 유명세를 타면 이유 불문하고 지지하는 팬이 생기기 마련이죠. 살벌한 경비를 비웃듯이 뚫고 보물을 훔쳐내는 괴도, 듣기만 해도 매력적인 소설 인물 같지 않습니까? 레드캣이 마도구를 돌려주고 사라졌을 때 그 선택에 실망한 팬 또한 다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엔 레드캣의 팬이라 자칭하는 청년과의 인터뷰를….
태량이 그와 대화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꺼버린 타이밍에 유즈리하는 매우 감사했다. 재빠르게 제 표정을 갈무리하고 유즈리하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태량의 책상 위에 탁 올려놓았다.
“이거 맞지? 한 번 확인해봐. 잘못 가져와서 돌아가야 하면 빨리 알수록 좋으니까.”
태량이 서류 봉투를 뜯어서 확인하는 몇 분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본래 유즈리하는 눈치가 빨랐지만, 그만큼 타인의 눈총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기에 이런 기분은 생소했고 반갑지 않았다. 하긴, 범죄자가 벨스토렌의 탐정사무소에 아무런 긴장감 없이 들어올 수 있다면, 그건 얼굴 대신 철 가면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다니는 사람일 터였다.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유즈리하는 침착하게 기다리려 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유즈리하가 책상에 놓인 명패에서, 미닫이문으로 가려진 옆방에, 그리고 다시 꺼진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애써 참았던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혹시 레드캣에 관심 있어? 뭐, 사실 탐정이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관심이 있겠지만.”
“관심이라면 글쎄. 다들 가지고 있는 흥미 정도는 나도 있어. 그와 관련된 정보를 전부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오늘은 레드캣이 사라진 지 딱 2년 된 날이니까 저 분석가 인터뷰도 재방송해주는 거겠지.”
아침부터 헤드라인에 대놓고 레드캣 어쩌고 하더니, 오늘이 그가 활동을 그만둔 지 2년 되는 날이었나보다. 세세한 날짜에 관심 두지 않던 유즈리하는 그렇게 제 기념일 아닌 기념일을 알게 되었다. 식지 않는 눈물겨운 관심이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서류는 이게 맞아. 빠진 것도 없고, 찾아와 줘서 고마워. 그럼, 네 여권….”
“살려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난데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청년이 사무실 문을 쾅 열고 들이닥쳤다. 민트색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트리고 짙은 갈색 눈망울에 공포를 가득 담은 채로 청년이 다시 살려달라고 외치자, 유즈리하와 태량은 그 순간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유즈리하와 태량이 민트 머리 청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그가 진정하기까진 시간이 상당히 걸렸고, 그가 자신을 소개할 정신을 붙잡기까진 조금 더 걸렸다.
“제 이름은 플로리안이에요, 플로리안 민체코. 모모카 님의 호위로 벨스토렌에 왔는데요, 모모카 님이 납치된 것 같아요. 사례는 꼭 해드릴 테니 저 좀 도와주세요!”
태량은 횡설수설하는 의뢰인을 받아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능숙하게 플로리안을 책상 앞의 의자에 앉혔다. 유즈리하가 어색하게 태량과 플로리안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들의 대화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본능은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라고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지만, 유즈리하는 본래 흥미로운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해주시겠어요? 모모카 씨의 정확한 신상정보와 납치 의혹이 드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주세요.”
“모모카 님은, 그러니까. 저희는 프로미시아 도시에서 여행하러 왔어요. 모모카 님은 레이카 가문의 후계자이시고요. 풀 네임은 모모카 L. 레이카예요.”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 역시 옆 도시 프로미시아의 귀족 가문 레이카 가家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경청했다. 플로리안은 설명을 이어갈수록 침착함을 되찾았다.
“벨스토렌에는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요. 모모카 님이 바로 예술의 거리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라헤센 미술관부터 들렸고요. 미술관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모모카 님은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러 가셨고, 저는 잠시 밖에 따로 나와 있었어요. 으아, 절대로 눈을 떼서는 안 됐었는데!”
플로리안이 격하게 머리를 헤집기 시작하자 태량이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렸다. 일단 진정하세요, 당장 중요한 건 모모카 씨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이지 과거의 잘못을 탓하는 게 아니니까요.
“기념품 가게 안에서 모모카 씨가 사라진 건가요? 혹시 가게 직원에게 모모카 씨가 어디로 가셨는지에 관해 들은 것은 없나요?”
“…물어볼 틈이 없었어요. 검은 옷의 수상한 사람들이 저를 강제로 어딘가로 끌고 가려고 해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거든요.”
태량과 유즈리하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대화에 초대받지 않은 상태로 엿듣던 유즈리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검은 옷의 수상한 사람? 벨스토렌이 아무리 뒤에서 도적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어도, 대담하게 대낮에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멍청한 인간은 별로 없을 텐데?”
벨스토렌은 아름다운 거리와 예술로 가장 유명했지만, 동시에 귀하고 값진 물건이 넘쳐나는 도시라 귀중품을 노리는 범죄와 도난 사건이 빈번했다. 당연히 그만큼 사설 경비업체와 경찰기관의 체계가 잘 잡혀있었지만, 머릿수에서 밀려 모든 범죄자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도시 벨스토렌에 붙은 두 번째 이명이 도적의 도시였다.
벨스토렌의 사설탐정 체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자잘한 범죄가 끝이 없는 탓이었다. 큰 사건만 맡아 처리해도 경찰서 불이 꺼질 일이 요원했지만, 벨스토렌의 시민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까지 해결해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일반인의 의뢰를 받아주는 탐정이 하나둘 생겨났고, 이제는 아예 매년 벨스토렌에서 탐정 자격증 시험을 치를 만큼 사설탐정의 규모가 커졌다. 정책이 효과가 있었는지 타 도시보다 범죄가 흔하게 일어나긴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 벨스토렌의 치안은 확실히 나아진 편이었다.
그러니 유즈리하가 플로리안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플로리안은 자질구레한 도난 사건도 아닌 납치범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플로리안이 억울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유즈리하는 그대로 흥미를 잃고 태량의 사무실을 떠났을지도 몰랐다.
“진짜예요! 검은 수트를 입고 선글라스까지 낀 건장한 사람들이 다짜고짜 와서 모시는 아가씨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으니 잠자코 따라오라는데,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데요!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도 없고, 모모카 님이 어디 있는지도 당장 알려주지 못한다고 하고! 한 명은 목에 푸른 표범 문신까지 있어서 더 수상해 보였다고요!”
“……잠깐만, 표범 문신?”
태량과 유즈리하가 시선을 마주쳤다. 서로를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시에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문신,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요? 한 번 그려볼 수 있어요?”
태량이 심각해진 얼굴로 흰 종이와 펜을 플로리안에게 밀어주었다.
할페른 패밀리. 대부분 벨스토렌 출신 주민은 성이 없지만, 첫 할페른은 스스로 성을 지어 붙이며 주변에 모인 이들의 가족 같은 유대감을 격려했다. 하지만 순수했던 첫 의도와 달리, 할페른의 이름은 폐쇄적인 마피아 이미지를 오랫동안 벗지 못했다. 실제로도 십몇 년 전엔 도난품 거래뿐만 아닌 음지의 거래까지 마다하지 않아, 할페른 패밀리를 상징하는 푸른 표범만 봐도 치를 떠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 악명 높던 시기의 할페른 패밀리라면 납치는 물론, 인신매매까지 손댔다 했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대 할페른 보스부터 범죄에서 아예 손을 뗐다고 하던데…. 그쪽 과거는 청산하고 지금은 도시 간의 예술품과 마도구 유통을 주업으로 삼고 있어서 할페른의 이미지도 상당히 좋아진 편이고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할페른 패밀리를 사칭하는 간 큰 사람이 있을까?”
태량은 침묵했고 유즈리하는 거기서 무언의 동의를 읽어냈다. 할페른 패밀리는 피로 이어지지 않은 타인이어도 원한다면 할페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결속력은 피보다 강한 충성심과 끈끈함을 자랑했다. 패밀리의 일원은 어떤 일이든 발 벗고 나서서 보호하고 그들을 해하려는 이에게는 가차 없이 대응했다.
벨스토렌의 시민은 열이면 열, 할페른 패밀리를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경찰에 자수하면 자수했지,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할페른 패밀리를 사칭해 범죄를 저지르는 무모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목 한쪽을 전부 가릴 만큼 큰 문신이었는데.”
“의심하는 거 아냐. 벨스토렌에선 그 누구도 푸른 표범 문신을 비슷하게라도 따라 하지 않아.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지.”
곰곰이 생각에 빠진 유즈리하가 검지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건성으로 플로리안에게 대꾸했다. 그러나 반짝 떠오르는 천재적인 발상은 없었는지, 유즈리하는 결국 눈썹을 모으고 팔짱을 꼈다.
“근데 솔직히 번지수는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이게 진짜 납치 사건이라면 개인 탐정이 아니라 경찰을 찾아가는 게 맞아. 특히 납치된 피해자가 다른 도시의 귀족이라면 말이야. 자칫하면 도시 간의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거든.”
벨스토렌 부근의 도시와 마을은 전부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보호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야 했고, 자연스레 국경과 외교 문제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 싸움에서 밀린 도시와 마을의 끝은 대체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벨스토렌의 개인 탐정은 섣불리 타 도시의 문제가 얽힌 의뢰는 받지 않으려 했고, 도시 정부 또한 외교에 간섭하려 드는 탐정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랬기에 유즈리하의 말은 냉정할지언정 틀리지 않았고, 플로리안은 단숨에 쪼그라들었다. 정신이 없어서 되는 대로 뛰다 보니 경찰서의 정반대 편에 있는 탐정 거리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주눅이 든 말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한 갈래 튀어나온 머리카락 더듬이까지 축 처진 게 불쌍해 보였는지, 태량이 플로리안을 변호했다.
“벨스토렌에 처음 왔는데 그런 일을 당했으면 더 안 좋게 대처했을 수도 있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잘해주셨어요, 민체코 씨. 일단 제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고, 경찰의 협력도 얻을 수 있을지 연락을 넣어볼게요.”
시들어 죽어가는 민트 잎사귀 같던 플로리안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플로리안이 공손하게 손을 모아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사례는 꼭 해드릴게요! 그럼 태량 탐정님, 조수님, 잘 부탁드립니다!”
“……예?”
조수? 웬 조수? 유즈리하는 자신이 모르는 새 태량의 조수가 사무실로 들어왔나 둘러보다가, 마찬가지로 어리벙벙하게 시선을 굴리던 태량과 눈이 마주쳤다. 아, 잠깐만. 플로리안의 착각을 깨달은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를 정정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경찰이나 탐정은 비밀 유지가 되니까 괜찮지만, 이 일이 최대한 일반인 귀에 안 들어가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모모카 님이 정식 허락을 받고 여행하러 오신 게 아니어서…. 혹시라도 알려지면 모모카 님뿐만 아니라 레이카 가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모모카 님과 같이 온 호위가 저밖에 없기도 했고요….”
둘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어떡해? 플로리안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유즈리하가 태량에게 눈짓했다. 태량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가 의논할 게 있어서 그런데, 옆방에서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플로리안이 투룸 사무실의 미닫이문을 닫고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유즈리하가 태량이 앉아있는 책상 앞으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죽여 속삭였다.
“미치겠네, 이거 어떡할 거야? 인제 와서 난 이 탐정사무소하고 아무 상관 없는 외부인이라고 자백하는 건 안 되겠지?”
태량은 유즈리하의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둘은 같이 책상에 기대 머리를 싸맸다. 유즈리하는 플로리안이 구구절절 사연을 내뱉기 전에 사무실을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고, 태량은 플로리안에게 정신이 팔려 유즈리하에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얘기하지 못한 실수를 자책했다.
“…일단, 아이네 씨.”
“잠깐. 일단 호칭부터 정리하자. 아이네가 성이야. 근데 나 성으로 불리는 걸 진짜 싫어해서, 그냥 유즈리하라고 불러주는 게 좋아.”
“그래, 유즈리하 씨. 미안한데 민체코 씨의 의뢰를 마무리할 때까지만 협력해 줄 수 있을까? 비밀 유지를 약조하더라도, 네가 갑자기 사라지면 민체코 씨가 더 불안해할 것 같거든.”
어찌 보면 유즈리하에게 믿음이 가지 않으니 가까이서 감시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나, 유즈리하는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믿음이고 자시고 갈 만한 게 있겠나.
그러나 유즈리하 역시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탐정과 깊게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그 탐정사무소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스스로 목줄을 채운 꼴이었다. 하지만 태량의 제안을 거절했다간, 보안을 위해서라도 태량이 자기 신상정보를 캘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쪽이 배로 위험했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자. 경찰하고 엮이지 않은 게 어디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유즈리하가 허탈하게 웃고 의자에 철퍼덕 앉아 등을 깊숙이 묻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 여권은 네가 보험용으로 들고 있어. 그러면 좀 안심이 될까?”
“배려해 줘서 고마워. 이 일이 마무리되면 바로 돌려줄게, 유즈리하 씨.”
“두 번 정정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냥 경칭은 빼줘. 매번 그렇게 예의 차려서 부르기는 귀찮을 거고, 나도 어색하니까. 대신 나도 태량이라고 부를게. 아니면 내가 조수니까 ‘탐정님’을 붙여줘야 하나?”
“아니, 태량으로 충분해.”
태량이 옅게 미소 지었다. 유즈리하가 한 손을 쑥 내밀었다. 자, 그럼 잘 부탁해, 임시 탐정님. 태량이 유즈리하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유즈리하의 반장갑 아래로 굳은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도 잘 부탁해, 임시 조수님.”
* * *
태량도 진행하던 전 의뢰를 마무리해야 했고, 유즈리하에겐 우체국 배달원으로 계약된 마지막 하루가 남아있었다. 플로리안은 혹시라도 밖에 돌아다니다 할페른 패밀리의 눈에 띄는 걸 방지하기 위해 태량의 사무실에 일시적으로 머무르기로 했다.
우선,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이려면 정보가 더 필요해. 전날 헤어지며 태량이 유즈리하에게 말했었다. 내일 우편 배달하면서 혹시 민체코 씨가 말한 인상착의의 사람이 보이나 확인해줄 수 있을까? 임시 조수로 일해 주는 만큼 시급은 쳐 줄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그 요청을 시원시원하게 수락했다.
계약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배달 물량이 평소보다 적었다. 덕분에 유즈리하는 느긋하게 탐정 거리에서 시작해, 오후가 되었을 무렵 벨스토렌 중심에 있는 예술의 거리에서 농땡이를 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중요한 서류며 서신이 오가는 탐정 거리와 달리, 예술의 거리는 비교적 우편 할달량이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예술의 거리엔 놀러 온 관광객과 일하는 벨스토렌의 주민이 뒤섞여 늘 시끌벅적하고 바빴기에, 이곳에서 뛰다간 십 보도 안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부딪히게 될 터였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를 가장한 핑계를 대며, 유즈리하는 한 손에 라임 에이드를 들고 빨대를 입에 문 채로 잘 꾸며진 큰길을 따라 걸었다. 태량이 준 임무를 완수하려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자 5년 넘게 살아온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층의 벽돌 건물이 그득한 탐정 거리나 주택가와는 다르게, 예술의 거리엔 훤칠하게 높고 세련된 건물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꾸며져 있었다. 이 건물은 콘크리트로, 그 옆 건물은 유리로, 저기 건물은 그라피티 아트로 가득해 본래 재질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예술품을 만들고 전시하기 위한 목적만이 이 거리의 미묘한 화합을 자아냈다.
왼쪽으로는 도자기 공방이, 그 옆에는 그림 스튜디오가, 길 건너편에는 각종 미술용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있었다. 계절마다 꽃을 바꿔 심는 이 거리를 쭉 걷다 보면 달마다 새로운 전시를 선보이는 미술관과 갤러리가 나올 테고, 이 모든 화려함과 부유함의 중심에는 벨스토렌의 자랑이자 규모가 가장 큰 마도구 박물관, 벨그란데가 보일 것이었다.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 틈에서 유즈리하는 검은 옷과 푸른 표범 문신을 찾아 열심히 탐색했다. 눈은 한순간도 쉬지 않아도, 플로리안이 언급한 라헤센 미술관으로 가는 발은 거침없었다. 유즈리하에게 탐정 거리보다 익숙한 곳이 예술의 거리였다. 과장 조금 보태서, 예술의 거리는 눈감고도 원하는 곳을 실수 없이 찾아갈 수 있을 만큼 빠삭했다. 어쩌다 이곳을 제집 내부처럼 꿰고 있게 되었는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지만 말이다.
유즈리하의 걸음이 처음으로 느려진 건 라헤센 미술관의 둥그런 회색 벽면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그가 방향을 슬쩍 틀어 바로 보이는 빵집에 들어갔다. 남다른 예술 감각을 뽐내는 달고 고소한 냄새의 빵을 둘러보는 척하며, 유즈리하가 창문을 통해 미술관 정문을 힐끗 흘겨보았다.
저기 시계 보는 사람 한 명. 길 건너편에 신문 거절하는 사람 한 명. 방금 미술관 안으로 걸어 들어간 두 명. 허이고, 많기도 해라. 유즈리하가 혀를 차며 빵 하나를 계산하고 야외에 딸린 카페에 앉았다. 다시 미술관 방향으로 눈길을 주자 그새 검은 옷의 사람이 한 명 더 늘어있었다. 유즈리하가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기대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속으로 투덜댔다.
‘척 봐도 척인데. 할페른 패밀리 맞네. 그런데 저렇게 어색한 티를 내며 몰려다니는 걸 봐선 패밀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초짜 아냐? 잘 비벼보면 정보 좀 얻고 튈 수 있을 것 같은데.’
평소였다면 할페른 패밀리가 연관된 순간 거액을 줘도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호기심이 강하고 스릴을 추구한다고 해도, 유즈리하는 제 안락한 일상 역시 소중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초짜 티가 나는 사람들이라면 적절히 치고 빠질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이사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 제가 조만간 벨스토렌을 뜰 거란 계산도 한몫했다.
자, 그럼 어떻게 접근해볼까. 근데 이 빵 맛있네. 남은 빵을 입에 쑤셔 넣고 우물거리며 관찰하던 차에, 검은 옷의 사람이 지나가던 행인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며 말을 거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손에 든 저거 뭐지? 유즈리하가 옆으로 목을 슬쩍 뺐지만, 워낙 작은 물건이어서 보이지 않았다. 행인이 고개를 젓고 지나치는 것까지 본 유즈리하가 손을 털고 일어섰다.
감이 외쳤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잘 털어보면 무언가 나올 것이다. 뻔뻔한 척 치고 빠지는 연기는 또 내가 적격이지. 유즈리하는 일부러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적이며 빠른 걸음으로 미술관 정문 앞에 서성이는 검은 옷의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을 내리깔며 유즈리하가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쾅! 몰래 뒤에서 접근한 유즈리하가 검은 옷의 사람과 요란하게 부딪쳤다. 우편 봉투를 바닥에 쏟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다니다 보니 그만! 연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비슷한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모험이 기대했던 것보다 효과가 컸다. 유즈리하의 조용한 발소리를 듣지 못한 검은 옷의 사람은 충격에 대비하지 못해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빠지는 꼴만 면했다. 쨍그랑! 금속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들리자, 유즈리하가 서둘러 우편물을 주워 담는 척하며 소리가 난 쪽을 곁눈질했다.
꽃 모양의 금색 로켓이었다. 유즈리하에겐 운 좋게도 바닥에 떨어지며 잠금장치가 풀린 모양이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로켓 안에 있는 사진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눈에 익은 민트색이 보였다.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눈 깜짝할 새 검은 옷의 사람이 로켓을 낚아챘다. 유즈리하는 제 운을 시험하지 않고 남은 우편물을 가방에 쓸듯 밀어 담고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 늦었는데 어떡하지, 정말.”
“아니… 그냥 가도 좋아. 앞은 잘 보고 다니고.”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는 유즈리하를 보며 머뭇거리던 검은 옷의 사람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유즈리하가 몰래 씩 웃고 고개를 들었다. 물론 표정은 싹 지운 채였다.
“감사합니다! 다음부턴 주의할게요!”
유즈리하가 빠르게 꽁무니를 빼며 머릿속에 잘 새겨두었다. 금색 로켓, 플로리안으로 추정되는 사진. 이만이면 오늘 수확으로 충분하지 싶었다.
“그거 모모카 님 로켓 맞아요! 여기 오면서 저를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쉽게 수소문할 수 있게 로켓 안에 제 사진도 넣어드렸거든요.”
저녁에 유즈리하가 태량의 사무실로 찾아와 본 것을 설명한 지 몇 분도 채 안 돼 플로리안이 외친 말이었다. 그래? 그럼 얘기가 빨라지겠네. 동그란 사과 맛 사탕을 혀로 굴리며 유즈리하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라헤센 근처 지나가는 사람들 붙들고 사진 보여주면서 이 사람 본 적 있냐고 묻고 있었거든. 정황상 여기 플로리안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 같지?”
“의문이 남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할페른 패밀리 측이 모모카 씨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거나, 단서가 될만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나도 오늘 나가서 정보를 캐봤거든. 유즈리하에게 탐정 거리와 예술의 거리를 맡겨뒀으니, 유흥가 지역 위주로 둘러보다가 할페른 패밀리 저택 정문까지 가봤는데.”
“저기, 너 혹시 고양이야? 목숨이 아홉 개야? 보기보다 겁대가리가 없는데?”
유즈리하가 어이가 사라진 표정으로 사탕을 오도독 깨물며 끼어들었다. 한때 이명에 고양이를 끼고 다닌 이가 하기엔 우스운 말이었지만, 유즈리하 딴엔 나름 진지하게 던진 질문이었다. 태량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냥 둘러보러 간 거지 쳐들어갔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렇게 따지면 그 로켓 든 사람한테 일부러 부딪힌 네가 더 무모한 짓 한 거 아니야? 아무튼 다 지나간 일이니 일단 넘어가고, 일부 소득은 있었어.”
내 동생을 찾는 척하면서 모모카 씨 닮은 사람 본 적 없냐고 수소문해 봤거든. 호텔이나 숙박업소가 몰린 지역에서는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본 적 없다고 그러던데, 유흥가 측으로 올라오니까 목격자가 한두 명 나타나더라고. 태량이 벨스토렌 지도에서 유흥가가 위치한 동쪽 지역을 가리켰다.
“카지노에서 밤새고 놀던 손님에게 물어봤더니 비슷한 인상착의의 소녀가 할페른 패밀리와 어딘가로 가는 걸 봤대.”
“어디로? 할페른 저택 안이면 빼박인데.”
“잠깐 휴식 겸 나왔을 때 목격한 거라 따라가 보지는 않았다는데.”
태량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두워져 가는 노을빛이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살짝 드리웠다. 말하기 꺼리는 걸 간신히 달래서 들었는데, 모모카 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오리아나 할페른과 같이 있었다고 하더라.
“오리아나 할페른이 누군데요?”
“할페른 패밀리 보스가? 대체 왜?”
플로리안과 유즈리하가 동시에 묻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플로리안이 벙찐 사이 유즈리하가 선수를 쳤다.
“현재 할페른 패밀리 보스, 오리아나 할페른. 외모가 유독 독특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없었을걸? 갈기 같은 남색 머리카락에다 맹수를 닮은 금색 눈에, 신장이 180인가에 달한다고 하던데. 어디서 절대 굽히지 않는 성정이라 할페른의 사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사람은 맞는 거죠?”
거의 삑사리를 내는 플로리안을 무시하고 유즈리하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사격 천재에다 격투 무술의 달인이기도 하고, 차고 넘치는 게 카리스마라 패밀리의 존경과 충성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라지. 경찰청장이나 벨스토렌의 시장조차 오리아나 할페른은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하더라.
“그나마 다행인 게 전대 보스처럼 범죄엔 손가락 하나 안 댄다고 했었는데, 그건 틀린 소문인가?”
“모모카 님이 왜 여태 얌전히 잡혀 계신지 막 이해가 됐어요.”
플로리안이 책상에 얼굴을 대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모모카 님이 납치 사건을 겪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레이카 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위험한 상황도 많이 겪으셔서 모모카 님을 강하게 키우겠다고 가문에서 납치 대처법도, 호신술도 가르치고 했어요. 모모카 님이 격투술에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가르치던 선생님이 칭찬하셔서, 대회에 나가기까지 하셨거든요?
“제 선배한테 들은 말이긴 한데 어느 정도 크고 나선 모모카 님이 납치당하면 호위나 경찰이 개입하기 전에 스스로 납치범을 때려눕히고 탈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들었어요….”
“납치한 쪽이나 납치당한 쪽이나 이만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인데.”
유즈리하의 솔직한 감탄에 태량이 슬쩍 눈치를 줬다. 유즈리하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다물었고, 책상에 펜을 굴리며 이야기를 전부 듣고 고심하던 태량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단순히 할페른 패밀리의 말단이라면 몰라도, 오리아나 할페른까지 사건에 끼어있으면 일이 많이 복잡해져요, 민체코 씨. 유즈리하가 말한 대로 오리아나 할페른은 경찰도 섣불리 건드리지 않으려 하거든요. 다른 일도 아니고 납치 같은 강력 범죄로 오리아나 할페른을 고발할 생각이라면, 현재 저희가 모은 정황상 심증이 아닌 확실하고 명확한 증거를 대야 해요.”
“네……. 그러면 어떡하면 좋을까요?”
태량의 시선이 책상에 있는 전화기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잠시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다 태량이 플로리안에게 물었다.
“민체코 씨, 혹시 레이카 본가에 연락을 취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요? 도시가 달라서 개인 전화로 연결은 안 될 테고, 장거리 통신 마도구는 안 가지고 있어요. 중앙통신장으로 가면 연락은 바로 되겠지만….”
“할페른 패밀리도 뇌가 있는 이상 플로리안을 찾으려 한다면, 당연히 거기에 사람을 깔아두지 않았을까?”
일리 있는 말에 태량과 플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플로리안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저… 생각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직접 나서서 할페른 패밀리와 접촉해보는 건 어떨까요?”
“미쳤어? 너도 고양이야?”
자기만큼 막 나가는 사람을 보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틀 사이 두 명이나 만난 기분이 들어 유즈리하가 눈을 휙 치켜떴다. 태량도 플로리안의 제안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입을 열었지만, 플로리안이 드물게 말을 막고 나섰다.
“그래도 그게 증거를 얻을 수 있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잖아요! 저까지 끌려갈 거란 장담도 없고, 혹시라도 납치당하면 탐정님과 조수님이 경찰에 신고해주면 일사천리 아닐까요?! 제가 모모카 님을 찾으면 같이 탈출을 강구할 수도 있을 테고.”
절실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플로리안을 보니 하고 싶은 말도 막혀, 태량과 유즈리하는 침묵했다. 점차 작아지는 목소리로, 플로리안이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끝맺었다.
“그리고 모모카 님이 납치당한 건 결국 호위인 제 책임이에요. 그러니 위험부담도 제가 지는 게 맞아요. 탐정님, 저를 조금만 도와주세요.”
몇 번의 설전이 오갔지만, 유순하게 생긴 플로리안은 의외로 고집이 강철처럼 셌고, 태량과 유즈리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최대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체할 것 없이 다음날, 사람이 많이 오가는 라헤센 미술관 앞에서 검은 옷의 할페른 패밀리에게 플로리안이 접촉하고, 태량과 유즈리하가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녹취하기로 합의했다. 목표는 경찰에 제출할만한 증거를 확보하기까지.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빠져나와야 해요, 알겠죠?”
태량의 당부에 플로리안이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실 태량의 입장에선, 플로리안뿐만 아니라 유즈리하를 계획에 참여시키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유즈리하를 따라 나와 여권을 돌려준 의도는 투명했다.
“협조해달라고는 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위험한 일엔 되도록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 내일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민체코 씨한테는 내가 적당히 둘러댈 수 있어. 여권은 돌려줄게.”
유즈리하가 태량을 빤히 바라보다 묵묵히 여권을 낚아채 후드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성은 경찰마저 이 사건에 얽히기 전에 빠지라고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 몰라라 갈 길 가기엔 어쩐지 찝찝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유즈리하가 물었다.
“넌 어떡할 생각이야?”
“나는 당연히 내 의뢰인을 도와야지. 그게 의뢰받은 탐정의 책임이니까. 걱정해주는 거라면 괜찮아. 내 한계는 아니까, 적절하게 경찰에 협조도 요청할 생각이고.”
“아주 정의의 사도 납시셨어요. 사설탐정 말고 경찰이 더 적성에 맞는 거 아냐?”
“실은 본래 진로가 경찰이긴 했어. 개인적인 이유로 탐정 자격증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은 탐정으로 일하고 있지만 말이야.”
태량이 작게 웃으며 얇은 하늘색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튼 고마웠어. 첫 만남이 별로 좋지 않긴 했지만, 나름 좋은 인연이었으니 혹시 미래에 의뢰 맡길 일 있으면 특별 할인해 줄게. 시간이 늦었으니 조심해서 들어가.”
그것이 분명 둘이 나눈 마지막 인사였고, 현재 유즈리하의 상황을 서술하자면, 라헤센 미술관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태량과 플로리안보다 먼저 도착해 저번에 들렀던 빵집에서 시간을 때우려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게 맞는 건가. 내가 무모한 짓은 많이 해봤다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미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으나, 유즈리하는 곧 잡생각을 떨쳐내었다. 유즈리하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선호했고, 변덕은 부릴지라도 한번 확고하게 정한 걸 바꾸는 경우는 드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좋은 아침~ 태량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며 유즈리하가 빙글빙글 웃었다. 플로리안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태량이 유즈리하의 반대편에 앉아 옆 테이블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어제 내 말에 동의한 거 아니었어? 일반적인 의뢰라면 몰라도 이번 건은 일반인이 함부로 끼어들기엔 위험하다니까?”
한껏 목소리를 죽였으나 박력이 조금도 줄지 않는 것도 능력이었다. 유즈리하가 두 손을 들자, 태량이 우선 말을 들어주겠다는 듯 조용해졌다. 유즈리하 역시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태량에게만 들리게끔 소리를 낮췄다.
“두 번 생각하고 밤새 생각해봐도 여기서 빠지는 건 심히 뒷맛이 나빠서. 너희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이유니까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래 봬도 체력도 좋고 싸움도 한가락 하니까, 여차하면 한두 명 정도는 처리할 수 있거든.”
솔직히 이 일이 위험해봤자 벨그란데 박물관에서 최상급 경비원을 전부 따돌리고 1급 마도구 훔치는 것보다 더할까. 당연히 뒷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두루뭉술한 눈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태량은 넘어가 주지 않았다.
“처리하긴 누굴 처리해? 오늘 계획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 맞아?”
어이없어하는 태량의 얼굴에 유즈리하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어차피 플로리안이 날 여기서 본 이상 갑자기 빠지면 이상하게 여길걸? 저기 검은 옷 사람들 온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을 텐데. 좋게 생각해. 딱 오늘까지만 도와줄게. 끝나면 빵이나 하나 사줘. 여기 빵 맛있더라.”
유즈리하의 말대로 검은 옷의 수상한 사람 몇 명이 미술관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태량이 태평하게 웃는 유즈리하의 얼굴을 한 번, 하얗게 질려가는 플로리안의 표정을 한 번, 검은 옷의 사람들이 있는 방향을 한 번 쳐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리 약속한 손 제스처를 취하자, 플로리안이 유령 같은 낯으로 목에 푸른 표범 문신을 한 검은 옷의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표정만 본다면 사지로 걸어가고 있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유즈리하와 태량이 미술관 정문 옆의 조각상 뒤로 몸을 숨겼다. 들키더라도 공부하러 온 미술학과 지망생이라 둘러댈 생각을 하며 태량이 스케치북을 꺼냈다. 실제로 멀지 않은 곳에 벨스토렌의 미술대학교가 있었으므로 먹힐만한 변명이었다. 태량이 스케치북 밑으로 숨긴 녹음기의 전원을 켰다.
“나,나나나 나 찾고 있던 거 맞죠? 모모카 님은 어, 어디 계세요?”
달달 떨면서도 제 할 말 다 하는 플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와, 유즈리하는 응원이라도 해주고픈 심정이 되었다. 유즈리하와 태량은 혹여나 한 단어라도 놓칠까 봐 숨소리까지 죽이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모모카 레이카 님의 신변은 저희가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따라오시면 만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디 계시냐고 물었어요! 증거, 모모카 님을 그쪽이 데리고 있는 증거를 달라고요!”
자동응답기처럼 건조한 답에 플로리안이 울컥했다. 지나가던 사람 몇이 수군대며 둘을 쳐다보자, 할페른 패밀리 일원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이목을 끄는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주머니에서 잘그락 소리를 내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증거를 원하시면 여기 모모카 레이카 님이 맡기신 로켓이 있습니다. 소란은 원치 않으니, 마지막으로 당부드립니다. 조용히 따라와 주십시오.”
“맡긴 게 아니라 억지로 가져간 거겠지! 찔리는 게 있으니까 모모카 님을 데려오지 못하는 거 아니야?!”
검은 옷의 사람이나 플로리안이나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유즈리하와 태량이 시선을 교환했다. 할페른 측이 모모카를 데리고 있는 건 확실하니, 이 정도면 수사에 들어가는 데 문제없지 않을까? 플로리안이 더 과열되기 전에 빼내야 할 것 같은데? 유즈리하가 플로리안에게 신호를 주려 조각상 뒤에서 조심스레 몸을 빼려고 했을 때였다.
“엥, 유즈리하 너 거기서 수상쩍게 뭐 하고 있냐?”
들려온 활발한 목소리에 유즈리하와 태량은 동시에 굳었고, 검은 옷의 사람과 플로리안이 둘이 있는 곳을 홱 돌아보았다. 태량이 급하게 녹음기를 끄고 숨겼지만 이미 충분히 의심을 산 것 같았다. 대화에 너무 정신이 팔려 스케치북이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던 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제일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바로 저놈이겠지. 유즈리하가 오늘도 신문을 판매하는 안면 있는 청년을 째려보았다. 불행히도 그는 유즈리하의 불퉁한 태도에 익숙했는지 해맑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가라고! 꺼지라고! 입 모양으로 열심히 그를 쫓던 유즈리하의 옷자락을 태량이 슬쩍 잡아당겼다. 유즈리하가 돌아보자, 검은색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플로리안이 압도될만하긴 했네, 이렇게 보니 장난 아닌데. 태량과 유즈리하보다 월등히 덩치가 큰 사람이라 둘은 거의 목을 꺾어 올려다보아야 했다. 유즈리하는 빠져나갈 핑계를 찾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스케치북을 황급히 가방 안에 집어넣는 태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 저희에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말을 꺼낸 건 태량이었다. 어제 이 부근에서 염탐하던 유즈리하를 그가 알아보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우려해, 빠르게 내린 판단이었다. 유즈리하도 뒤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모자를 낮게 고쳐 쓰며 슬쩍 태량 뒤로 빠졌다. 태량의 침착한 질문에도 검은 옷의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대화를 엿들으셨는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학교 과제 때문에 스케치하러 나왔는데.”
“그렇다면 스케치북을 잠시 보여주십시오.”
하는 수 없이 태량이 스케치북을 가방에서 다시 꺼내 건네주었다. 빈 스케치북을 쭉 넘겨보는 사이, 어깨너머로 플로리안이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보였다. 유즈리하가 플로리안에게 작게 손짓했다.
이 틈에 튀어, 빨리. 플로리안이 망설이자, 유즈리하가 미간을 찡그렸다. 얘나 쟤나 왜 이렇게 말을 한 번에 안 듣는담. 가라고! 스케치북을 덮는 소리가 들리자, 유즈리하는 곧바로 표정을 고치고 플로리안에게서 눈을 뗐다. 태량이 스케치북을 돌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검은 옷의 사람은 미동이 없었다.
“실례지만 가방 안도 확인해보겠습니다. 보안이 중요한 대화여서 양해를 구합니다.”
방금 산 듯한 깨끗한 스케치북이 의심을 지워주지 않았는지, 그의 요구에 유즈리하와 태량이 다급히 시선을 교환했다. 저 사람이야 다른 그림 도구를 확인할 의도로 물었겠지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라고, 태량의 가방에는 금방 녹음을 끝마친 따끈따끈한 녹음기가 들어있었다.
숨 막히는 몇 초가 흘렀다. 가방을 건네줄 수도 없었지만, 그가 둘을 이대로 순순히 가게 놔줄 것 같지도 않았다. 유즈리하가 등 뒤로 손을 쥐었다가 폈다. 몸싸움 나는 건 아니겠지. 태량도 일단 자격증까지 딴 탐정이니 기본 훈련은 받았을 테고, 한 명이라면 둘이 어떻게 해볼 수 있겠….
“무슨 문제 있나? 어, 거기 모자. 저번에 나한테 부딪쳤던….”
유즈리하는 그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목에 문신이 있는 검은 옷의 사람의 고개가 돌아간 틈을 타, 유즈리하가 태량의 손을 낚아채고 뒤돌아서 땅을 박찼다.
상황 분석이고 계산이고 사실 필요도 없었다. 검은 옷의 사람이 한 명에서 둘이 됐고, 심지어 한 명은 유즈리하를 알아봤다. 플로리안도 더 이상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준다는 선택지는 여전히 불효했다.
그럼 달리 뭐가 남아있겠나. 튄다.
갑자기 손이 잡힌 태량도 당황하다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 뛰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절대로 뒤처지지 않는 민첩함에 유즈리하가 놀라기도 전, 이번엔 태량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쪽 말고! 이쪽! 경찰서로 바로 갈 거야!”
경찰서는 좀, 이란 말을 꺼내기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옆으로 건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행인과 부딪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종종 비명이나 욕설이 들려왔지만 사과할 틈도 없었다. 코너를 돌 때마다 무서운 기세로 둘을 쫓아오는 검은 옷의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도 참 오랜만이었다. 마도구에 손대는 짓 때려치운 후로 처음이었던가. 당연히 감성에 젖을 여유 따윈 없었지만, 전속력으로 예술의 거리를 달리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금으로 도배되어 밤낮없이 번쩍이는 벨그란데 박물관을 둘러싼 인공해저가 가까워지자, 물비린내가 코를 훅 찔렀다. 눈이 저절로 벨그란데로 향하는 것도 불가항력이었다. 시선을 끄는 눈부신 외관도 외관이었지만, 유즈리하에게 벨그란데는 아주 남다른 추억이 많은 장소였다. 물론 여기서도 향수에 젖을 여유 따윈 없었다.
“앞, 앞을 봐! 해저를 빙 둘러서 가면, 시청 지나서, 중앙경찰서 나올 테니까, 이대로 가자!”
“큰길로,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 도시 외부인도 아니고, 할페른이 길목 구석구석은, 우리만큼 잘 알고, 헉.”
태량이 급정지하며 유즈리하까지 끌어당겨 넘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균형을 잡아 엎어지는 꼴은 면했다. 저도 모르게 ‘왜!’라며 짜증 낼 뻔했지만, 유즈리하도 곧 태량이 멈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앞선 골목에서 검은 옷의 사람들이 포위하듯 길을 막고 다가오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힐끗 뒤를 바라보았다. 다 잡은 사냥감이라 생각했는지 뒤에서도 그물을 치듯 천천히 따라잡고 있었다.
앞도 막혔고, 뒤도 막혔다. 오른쪽으로 뛰어도 얼마 안 가 잡힐 테고, 왼쪽으론 인공해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둑질 한창 시절에도 겪어본 적 없는 퇴로 없는 진퇴양난을 인제 와서 생생히 겪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제 어쩔 거야, 예의상 물어보기라도 하려고 태량에게 고개를 돌린 유즈리하가 해저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고심하는 태량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무표정을 유지하는 저 정신력을 칭찬해야 하나, 생각하던 유즈리하를 태량이 끌어당겼다. 태량의 얼굴이 훅 가까워지자, 유즈리하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유즈리하, 수영할 줄 알아?”
“수영? 할 수는 있지. 그건 왜, 설마.”
해저에 뛰어들자고? 물어보기도 전에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체코 씨도 그렇게 노력을 해줬는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해저 반대편으로 수영해서 저들을 따돌리자. 평범한 녹음기가 아니라 5급 마도구니까 방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잠깐, 이 해저 시청 앞까지 쭉 이어지니까 시청에서 나와서 경찰서로 뛰는 편이 나을 거야. 저기 다리 보이지? 저 밑으로 작은 통로가 있거든? 잠수해서 들어가면 수로로 연결되는, 설명할 시간 없다. 일단 가자!”
검은 옷 사람들이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져, 유즈리하와 태량은 도로와 해저를 분리하는 난간을 기어올랐다. 그리 높이 올라온 건 아니었지만, 사뭇 달라진 눈높이와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유즈리하를 살짝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유즈리하가 난간의 고점에서 해저의 수면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다 태량을 흘낏 바라보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겠지? 뛸 수 있을까?
우려와 달리 태량의 표정은 한치 흔들림 없었다. 푸른 눈으로 빠르게 경로를 탐색하는 기색이, 아무래도 유즈리하가 어떤 계획을 들고 오든 걱정은 접어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태량이 유즈리하와 눈을 마주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준비됐어? 하나, 둘.
셋에 둘이 짙은 청회색 물이 넘실거리는 해저로 뛰어내렸다. ‘오리아나 님 불러와!’ 위에서 들려온 외침을 끝으로 물이 크게 튀는 소리와 함께 유즈리하와 태량은 차가운 해저의 적막 안으로 가라앉았다.
* * *
뚝, 뚝. 유즈리하가 신경질적으로 무겁게 축축 처지는 후드티에서 물기를 짜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태량 역시 올려묶은 머리에서 물을 털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둘의 발치에 곧 물웅덩이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골목 사이로 바람이 휑하게 불어오자, 둘이 몸을 움츠렸다. 무더운 한여름이었지만 해저의 물은 차가웠고, 잠수해서 빠져나온 수로는 어둡고 축축했다. 지금 숨어있는 좁은 골목에도 햇빛 한 줌 들지 않아 서늘했다.
“녹음기는 무사해?”
골목 밖을 슬쩍 내다보며 유즈리하가 묻자, 태량이 푹 젖은 가방 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겉면은 젖어있었지만, 다행히 전원이 무사히 켜졌다. 긍정의 답을 돌려주며 태량이 유즈리하의 어깨 너머로 같이 큰길을 내다보았다.
“아직 보이지는 않네, 그 사람들.”
“조만간 따라잡겠지. 우리도 배짱부리고 있을 시간 없을걸.”
“그래, 들키지 않게 다시 가보자.”
말이야 쉬웠지만, 쫄딱 젖은 상태로 시청 앞을 당당히 활보한다면 안 좋은 의미에서 이목을 끌 게 분명했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이나 여유가 없었기에, 둘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그늘진 구석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시청에서 경찰서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경찰서 정문까지 딱 코너 두 개만 남겨두기까진 말이다.
“…이런.”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다 몰려있었나.”
머리 좀 썼나 보네, 뇌까지 근육은 아니었나 봐. 태량이 머리만 쏙 내밀고 상황을 살피던 유즈리하의 옷을 끌어당겨 골목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저걸 뚫는 건 절대 무린데. 녹음기 말고 우릴 숨겨줄 수 있는 마도구나, 아니면 저기 사람들 한꺼번에 기절시키는 마도구는 없어? 태평한 질문에 태량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유즈리하를 응시했다.
“있었으면 진작 썼겠지.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나. 혹시 경찰서로 들어가는 비밀통로 같은 거 몰라?”
“그걸 왜 나한테 당당하게 물어보는 건데? 뭘 기대하는 거야? 해저 수로는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거라고.”
그 ‘우연히’가 값을 매길 수 없는 마도구를 훔쳐 도망가다 찾은 우연이란 것은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경찰서로 진입할 수 있는 개구멍이라도 찾아볼 걸 그랬나, 후회 아닌 후회가 들었다. 경찰서에는 훔칠만한 마도구도 없고, 제가 잡힐 일 없을 거라 자신해 그쪽으로 전혀 관심 두지 않았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다.
유즈리하가 팔짱을 끼고 다시 골목 밖의 상황을 살폈다. 태량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유즈리하에게 단호히 말을 건넸다.
“유즈리하, 넌 여기서 돌아가. 이 이상 같이 움직이는 건….”
“저거.”
단 한 단어로 유즈리하가 태량의 말을 끊었다. 설핏 짜증이 목까지 올라온 기색이 보였지만, 태량은 순순히 유즈리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오토바이?”
반짝반짝한 외관을 보아하니 아주 잘 관리된 오토바이였다. 심지어 방금 주인이 타고 왔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열쇠까지 스크린 아래에 놓여있었다. 저걸로 경찰서까지 쭉 길을 뚫는 거야. 미친 계획을 세우면서도 유즈리하는 쓸데없이 당당했고, 태량은 기가 막혀 그를 바라보았다.
“이 질문 네가 전에 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너 혹시 고양이였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알려줄 생각이 없는 유즈리하가 그저 씩 웃었다. 괜찮아, 나 운전 잘해. 전혀 신뢰가지 않는 발언에 태량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거 절도인 거 알고 있지?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주고, 급한 상황이 참작된다고 하더라도 너 면허 취소될 수 있다고.”
“절도가 아니라 잠깐 빌리는 거야. 그리고 그것도 괜찮아. 어차피 면허는 저번 주에 이미 일시 정지당했어.”
“…운전 잘한다며?”
운전 못 해서 정지당한 게 아니니까. 얄팍한 변명에 입술을 가늘게 다무는 태량을 보자니, 유즈리하는 문득 마침 경찰서로 가는 길이겠다, 태량이 자신을 무면허 운전으로 신고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유즈리하가 필사적으로 협상했다.
“다 끝나고 빵은 안 사줘도 되니까, 이번 한 번만 못 본 척해줘. 녹음기를 경찰에 넘기는 게 우선이잖아?”
완전히 설득된 것 같지 않았지만, 태량은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유즈리하 말마따나 당장 급한 건 플로리안의 의뢰를 해결하고 모모카를 찾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유즈리하는 태량이 뒤에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날래게 움직여 오토바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어디 보자, 두 명은 너끈히 태울 수 있을 것 같고, 다행히 조작도 내가 쓰던 바이크하고 비슷하네. 아니, 이게 훨씬 비싼 모델인데 좀 부럽다. 이사하면 나도 돈 모아서 이 모델로 하나 장만할까.
“헬멧이 없네. 사고 안 내도록 조심할 테니까, 일단 꽉 잡아야 해?”
“사고 안 내는 게 좋을걸. 그 바이크 내 친구 거라서!”
유즈리하에게 답한 건 태량이 아니었기에 막 시동을 걸려던 유즈리하의 손이 멈칫했다. 어느샌가 곱슬거리는 긴 크림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기척 없이 나타나 오토바이 반대쪽에서 방긋 웃고 있었다.
아 씨, 깜짝이야.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떨어뜨려, 유즈리하가 열쇠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사이 태량이 검은 옷 사람들에게 위치를 들키지 않았나 빠르게 확인하고 소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친구 거라 하시면, 잠시 빌려도 괜찮을까요? 급하게 가야 하는 곳이 있는데, 이쪽으로 연락해 주시면 사례해드릴게요.”
“물어봐 줄 수야 있지만, 어디 가는데?”
“그게….”
태량이 머뭇거렸다. 경찰서로 간다고 순순히 얘기하기엔 경찰서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 도리어 뛰어가는 게 빠르지 않냐고 역으로 질문이 들어올 것 같았다. 사실대로 전부 털어놓자니 그럴 시간도 없었고, 괜히 일반인을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하는 것 같아 우려되었다. 탐정 명함을 꺼내줄지 잠깐 고민했지만, 해저에 뛰어든 바람에 잉크가 번져 이름이든 연락처든 못 알아볼 것 같았다. 열쇠를 주운 유즈리하가 한 손을 핸들에 올린 채로 태량에게 빨리 타라고 눈짓했다.
“당장 설명은 못 하는데, 사정이 있어요. 바이크는 중앙경찰서에 맡겨둘 테니 나중에 찾아가 달라고 친구분에게 전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정 급하다면 못 빌려줄 건 없지만, 그 급한 일이 뭔지 나도 알 권리가 있지 않을까? 내가 아끼는 바이크를 빌리겠다는데.”
안 그래? 작은 탐정과 조수 씨. 유즈리하와 태량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왠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열쇠는 이그니션 스위치에 꽂혀있었지만, 시동을 걸어 내뺀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검은 부츠에서부터 근육 잡힌 다리에 쫙 달라붙는 바지, 쌔끈한 가죽 재질의 라이딩 재킷으로 올라갔다. 사자의 갈기처럼 이리저리 뻗친 남색 머리카락이 튼튼한 어깨선을 타고 내려왔다. 둘이 생각하는 상황이 아닐 거라 부정하고픈 마지막 희망은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중년의 나이로 인해 눈가엔 주름이 져 있었지만, 저 금색 눈동자는 다른 누구와 감히 비교하지 못할 야생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금안 속의 새파란 동공까지 눈길이 닿자, 둘은 조용히 탄식했다.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오리아나 할페른을 이리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를 도저히 몰라볼 수 없었다. 오리아나 할페른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상체를 숙여 오토바이 핸들에 팔꿈치를 기댔다. 덕분에 그들 사이의 거리가 훅 줄어들어 유즈리하는 맹수 앞의 토끼처럼 숨을 참았다.
하필 훔치, 아니, 빌리려던 오토바이의 주인이 그 많고 많은 벨스토렌 시민 중에서 오리아나 할페른이었다니. 운도 정말 지겹게 없었다.
“애들이 뭔가 사고를 쳤다고 대성통곡하길래 서둘러서 나왔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서 다행이네. 우리 애들이 쫓아다니던 게 너희 맞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린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
“플로 어디 있는지 알아?”
태량이 용감하게 꺼낸 말이 오리아나 할페른 옆에 서 있던 소녀에 의해 잘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반복해 말하려던 태량이 문득 모모카의 호칭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되물었다.
“‘플로’?”
태량의 사무실로 찾아온 의뢰인의 이름은 분명히 플로리안 민체코였다. 소녀가 말하는 ‘플로’는 그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 도시에 처음 방문했다는 그에게, 저런 친근한 애칭으로 불러줄 사람이 벨스토렌에 있을까? 태량이 다시 소녀를 찬찬히 살폈다.
크림색 머리카락,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 생기 있는 얼굴, 플로리안보다 약간 어린 나이대의 소녀. 플로리안을 알고 있고, 친하다고 자부하는 사람.
“…혹시 모모카 L. 레이카 씨이신가요?”
“뭐? 납치당했다던 그 모모카?”
“맞는, 아니! 나 맞는데! 뜬금없이 웬 납치?”
차례대로 태량, 유즈리하, 모모카 되시겠다. 셋 사이로 복잡한 정적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웃음소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가장 빠르게 얽히고설킨 상황을 이해한 오리아나 할페른이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 * *
“플로! 진짜 오래 걸렸다. 내가 얼마나 찾은 줄 알아?”
“……그거 제가 할 말 아닌가요, 모모카 님?!”
플로리안은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할페른 저택에 끌려오다시피 한 플로리안은 너무나 멀쩡한 모모카를 보자마자 어리둥절해했고, 간단하게나마 사건의 경위를 전해 듣고 나서는 자괴감과 안도, 상당한 부끄러움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해. 의뢰는 해결됐잖아? 예술의 거리 한복판에서 분노의 질주를 벌인 게 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할페른 저택의 응접실에 도착할 때까지 태량의 만류에도 플로리안의 사과 행렬은 멈출 줄 몰랐다. 결국 문제를 초래한 유즈리하가 농담이었다며 말리고 나서야 플로리안이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응접실 밖에 대기하던 사람이 문을 열고 셋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 사람은 검은 옷이 아니네. 할페른 패밀리에 들어가려면 검은색 옷만 입겠다는 각서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유즈리하는 곧바로 허튼 상상을 처분했다. 하긴, 우리에게 준 옷도 검은색이 아니었지. 유즈리하가 제 옷과 태량의 옷을 힐끗 번갈아 보았다.
해저에 다이빙한 생쥐 꼴을 한 둘에게 오리아나 할페른은 오해를 빚은 데엔 자신의 책임도 일부 있으니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라고 권했다. 유즈리하와 태량은 달리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했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가라는 초대에 지금 오리아나 할페른의 개인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말이 개인 응접실이었지, 얼핏 봐도 비싼 소파와 양탄자, 그리고 구석구석 전시된 희귀한 유리공예를 비롯한 예술품이 압도적이어서 전시회에 온 기분이었다. 응접실에 앉은 유즈리하, 태량, 플로리안이 썩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왔구나! 여기 에그타르트 먹어봐, 진짜 맛있어.”
그러나 한 손에 에그타르트를, 한 손에 초콜릿 쿠키를 든 채로 그들을 맞이한 모모카는 마치 제집 거실에 있는 것처럼 편한 모습이었다. 옆에 앉아 우아하게 블랙커피를 홀짝이는 오리아나에게 쿠키를 건네는 대담함까지 보이자, 솔직히 이때까지 반신반의했던 셋은 모모카 L. 레이카와 오리아나 할페른이 친구 사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모카 님, 대체 언제 할페른 패밀리 보스와 친구가 되신 거예요…?”
벨스토렌에 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고요! 머리를 감싸는 플로리안을 향해 모모카가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몇 년 전이었나? 확실히 플로 만나기 전이었는데. 나 프로미시아에서 개최된 격투기 대회에서 상 타온 건 알지? 오리아나가 거기 심사위원이었거든. 대회 끝난 후에 이것저것 얘기하다 친해졌어!”
“참 재밌는 꼬마 아가씨였지. 이렇게 당돌한 아가씨는 처음 만나서, 하루의 인연으로 끝내기는 아까웠거든.”
오리아나 할페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덩달아 멘탈이 터진 것 같아 보이는 플로리안에게 유즈리하가 눈짓했다. 내가 전에 이쪽이나 저쪽이나 범상치 않은 사람 같다고 했지? 파릇파릇한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직전인 플로리안에게 모모카가 일단 사과를 건넸다.
“아무튼 미안. 기념품 가게에서 우연히 오리아나를 만났는데, 바로 헤어지긴 너무 아쉬웠거든. 오리아나가 사람을 보내서 플로리안도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도망을 칠 줄은. 기껏 내 로켓까지 들려서 보내줬는데.”
“솔직히 플로리안을 탓하기도 그렇지. 내 패밀리지만 초면인 사람이 저렇게 입고 나타났으면 나라도 오해했을 것 같거든. 하여간 신입들 겉멋만 든 건 알아줘야지, 원.”
딴에 지들끼리 수습해보겠다고 그런 수상쩍은 수색전을 벌일지도 몰랐고. 투덜거리는 말에 애정이 배어있어, 유즈리하와 태량은 오리아나가 할페른 패밀리를 상당히 아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리아나가 다리를 반대로 꼬고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우리 애들이 아직 미숙해서 거기 작은 탐정과 조수 씨에게 폐를 끼치게 됐네. 이름이라도 알려주지 않을래? 달랑 옷과 커피 한 잔으로 빚을 청산했다 치면 할페른 패밀리 이름이 안 살거든. 나중에 도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내 이름 대고 찾아와.”
호탕하게 웃는 오리아나를 보고 있자니, 태량이나 유즈리하나 품고 있던 경계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모모카의 납치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오리아나의 사람 됨됨이로 판단하건대 그는 소문대로 할페른 패밀리의 옛 치부에 다시 손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태량이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살짝 풀고 자기를 소개했다.
“태량이에요. 명함이 젖어서 드리지는 못하겠네요…. 개인 탐정사무소를 차린 지 1년밖에 안 됐지만, 의뢰인으로 찾아오신다면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1년 차? 앳돼 보인다 싶었더니 신입 티를 갓 벗었구나. 우리 애들 따돌리는 실력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몇 년은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줄 알았는데. 미래가 기대되는걸. 그럼, 이쪽 조수 씨는?”
“유즈리하, 인 데… 정식 조수는 아니고,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돌아보면 어디 한군데 꼬이지 않은 구석이 없는 나날이었다. 태량과의 첫 만남부터, 플로리안이 도와달라며 사무실로 뛰쳐 들어온 것도, 플로리안의 착각이며, 이어진 유즈리하와 태량의 착각까지. 오해가 전부 풀린 지금이야 사실대로 말할 수 있었지만, 기나긴 해명이 귀찮았던 나머지, 유즈리하는 적당히 납득갈만한 설명을 각색해서 내놓았다.
“잠깐 임시로 조수 일 하던 중이었거든요. 알바 계약도 끝났겠다, 이사일까지 한 달이 비었던 터라, 여권 갱신하러 나갔을 때… 으아악!”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여권의 존재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태량에게서 돌려받은 후, 후드티 주머니에서 꺼내는 걸 까먹은 여권. 해저 안으로 다이빙할 때 그와 함께했던 그 후드티 주머니에 있는 여권. 쫄딱 젖어 쓸모없어진 태량의 명함처럼, 여권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난데없이 펄쩍 뛰며 비명을 지른 유즈리하를 희한하게 쳐다보던 오리아나가 노크 소리에 응접실 문을 돌아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손님분들의 옷 세탁이 끝났습니다. 나가면서 찾아가시면 되는데…. 그, 세탁하면서 주머니에서 이런 게 나왔습니다만.”
한때는 여권이었지만, 이젠 흐물흐물한 종이 무더기에 불과한 잔재가 유즈리하의 손에 돌아왔다.
아, 망했어요. 위협적으로 쫓길 때도 나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유즈리하였지만, 지금만큼은 울고 싶었다. 한 달 후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땅땅.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권을 제때 주머니에서 꺼내 안전한 곳에 보관하라고 제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량도 조용히 절규하는 유즈리하와 푹 젖은 여권을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플로리안 역시 유즈리하와 종이 무더기를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옆 단지로 이사하는 건 아니겠죠?”
“…기차 타고 다른 도시로 이주할 계획이었는데….”
아. 깐깐한 도시 간 통관을 거치려면 여권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을 아는 플로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유즈리하의 불행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지만, 태량이 왠지 미안한 마음에 혹 도와줄 것이 있을까 물어보려 말을 꺼내려던 순간, 모모카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들려왔다.
“오리아나, 혹시 여권사무소에 아는 사람 없어? 특별히 부탁해서 여권 좀 빠르게 재발급해달라고 하는 건 안 되려나?”
“모모카 님, 아무리 오리아나 님이라도 그렇게 막 물어보시면 있을 리가….”
“있는데?”
있냐고요. 오리아나의 호쾌한 대답에 플로리안이 아연실색했다. 이 사람 대체 없는 게 뭐지? 돈도 있고, 실력도 있고, 인맥도 있네. 벨스토렌의 중심 권력 한 축을 담당하려면 이정도 인물은 돼야 하는구나. 오해 아닌 오해를 쌓고 있는 플로리안을 뒤로하며 오리아나가 유즈리하에게 여권을 달라고 손짓했다.
“나도 급하게 여권 새로 만들어야 했던 때가 있어서, 그때 알게 된 친구한테 부탁해볼게. 여권용 사진만 빨리 준다면 며칠은 무리여도 한 달 안에는 새 여권 받아볼 수 있을 거야.”
“와, 살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맡겨둘게요.”
“에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이 정도 간단한 부탁이야 눈 감고 타르트 먹기보다 쉽지. 새 여권 나오면 연락할 테니 집 전화번호 적어두고 가.”
단시간에 머리 아픈 문제의 발생과 해결까지 본 유즈리하는 지쳤지만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할페른 저택을 나설 수 있었다.
* * *
“…미안.”
저녁 해가 짙게 깔리는 큰길을 걸으며 태량이 유즈리하에게 사과를 건넸다. 작지만 귀에 선명히 들려온 솔직한 단어에 유즈리하가 드물게 당황했다.
“아니, 뭐가? 여권 얘기면 전날 멍청하게 주머니에서 안 뺀 내 잘못이고. 뭐가 더 있어?”
“같이 의뢰도 해결해줬잖아? 보통 의뢰가 이리 고생스럽지 않아서 잠깐 조수 역할을 해달라고 했는데, 일이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뭐, 이 정도 고생이야 특출난 편은 아닌데.”
유즈리하 딴에는 진심이었지만, 그의 화려한 과거를 알 리 없는 태량은 눈썹만 추켜세웠다.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분위기라, 유즈리하는 고민하다 태량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럼 빵이나 사줘. 오늘 아침에 일 무사히 끝나면 사주겠다고 했잖아? 라헤센 미술관 근처에 있는 유명한 빵집으로 가자. 서두르면 문 닫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방향을 바꿔 직진하는 막무가내인 유즈리하의 모습에 태량이 어리둥절하다 작게 미소 짓고 뒤를 따랐다. 다행히 둘이 빵집에 도착했을 무렵, 넉넉히는 아니어도 만족할 만큼 빵이 남아있었다. 음료까지 값을 치른 후, 둘은 야외 테이블에 빵을 하나씩 들고 앉았다. 퇴근하는 사람들과 밤거리를 구경하러 나온 관광객들로 인해 인파는 낮에 비해 조금도 줄지 않아 시끌시끌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갤러리며 박물관의 야간 등이 들어왔다. 손으로 직접 불을 붙이는 등불부터, 장식용 마도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깨진 무지갯빛까지, 벨스토렌의 밤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유즈리하는 낮보다 밤의 예술의 거리를 좋아했기에 빵을 우물거리며 잠자코 거리를 구경했다. 태량도 분위기가 싫지 않았는지, 빵을 다 먹고 난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유즈리하와 대화를 시작했다.
“벨스토렌에서 오래 살았어? 저번에 여권을 발견했을 때 주소를 알아보려 잠깐 안을 봤었거든. 기분 나쁘다면 미안. 이곳 출신은 아니라고 적혀있더라.”
“별로 상관은 없는데. 5년? 6년? 그쯤 됐으려나. 오래라면 오랜 시간이긴 하지만, 벨스토렌에 질릴 만큼 긴 기간은 아니지.”
솔직히 이만큼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도시는 없을걸? 유즈리하 특유의 칭찬에 태량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벨스토렌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직 이 도시의 모든 구석을 알고 있다 자부하기는 이른 것 같으니까.”
태량, 벨스토렌 토박이였구나. 사무실 명패에 성이 없어 짐작하긴 했었다. 구멍가게에서 산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유즈리하가 물었다.
“그럼 20년 좀 넘게 같은 도시에서 살아왔단 얘긴데, 지겹지는 않아?”
“정확하게는 22년이야. 한 번도 지겹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그럼 넌 이제 벨스토렌이 지겨워져서 떠나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뭐, 이유가 복잡하긴 한데.”
태량이 탐정인 이상 절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유즈리하가 일부러 말을 흐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태량도 굳이 캐묻지는 않아 둘은 잠시 편한 침묵 속에 머물렀다.
“한 달 후에 이사하면 다시 만나기 힘들겠네. 탐정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런데 오늘 보니 탐정 자격증을 따서 직접 사무소를 차려도 될 실력이라, 굳이 날 찾아올 필요가 없긴 하겠더라.”
“와, 엄청난 칭찬이네. 탐정 자격증 시험에 응할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일단 고마워. 조수 일도 하루 이틀 해보니까 나쁘지는 않더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빠른 행동력은 유즈리하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었고, 충동에 힘입어 유즈리하는 큰 생각을 거치지 않고 태량에게 곧바로 물었다.
“태량, 혹시 탐정사무소의 조수로 일하려면 자격증 같은 거 필요해?”
“조수? 아니, 탐정은 자기 사무소를 차리려면 자격증이 필수지만, 조수로 일하는 데엔 그런 조건은 없어.”
“그럼 나 벨스토렌을 떠날 때까지 한 달간만 조수로 써줄 수 있어?”
여권 나오기까지 시간도 있겠다, 알바 계약도 끝나 한가하겠다, 오늘의 추격전도 가슴이 콩닥거릴 만큼 즐거웠겠다. 탐정을 절대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지만, 정신 나간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즈리하는 제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원래 변덕이 잦은 동물이었고 유즈리하는 한때 이명에 고양이를 달고 다니던 인물이었으니, 이름 따라 사람 가지 않겠는가.
뜬금없는 요구에 당황할 만도 했으나, 태량의 표정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것 외에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가 고민하는 모습이 뻔히 보였기에 유즈리하는 두근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답을 기다렸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 태량이 짧게 질문했다.
“갑자기 왜?”
구구절절 호소할만한 큰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유즈리하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사는 걸 좋아했다. 재미있으니까 하고, 재미없으니까 하지 않는다. 무모할 정도로 스릴을 추구하는 건 그편이 훨씬 즐겁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사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유즈리하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좀 흥미가 생겼거든. 한 번 해보니까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도 많겠다, 이런 경력 쌓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무리한 부탁이야? 되묻는 유즈리하에게 태량이 잠시간 고민하다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손을 내밀었다.
“단기 조수 알바 정도면, 괜찮을 거야. 네 실력은 오늘 봤으니, 민폐를 끼치진 않을 테고. 어쩌면 내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될 수도 있겠네.”
다시 잘 부탁해, 유즈리하. 한 달간 잘 지내보자. 유즈리하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태량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냥 유즈라고 불러줘. 나도 잘 부탁해, 태량 탐정님.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아.”
기실, 처음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그러나 본래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니 즐거운 것 아니겠는가. 탐정과 이렇게 진하게 엮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유즈리하는 기꺼이 제 손으로 친 그물 안에 웃으며 뛰어들었다.
붉은 고양이는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빛나는 이 도시를 누비다 유유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Written 2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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