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님, 붉은 고양이를 잡아주세요!

사건번호 3. 유령도 단서만 있으면 잡을 수 있다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밤이 되어도 쉬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이 있다. 오늘 밤의 희생자인 희라는 쏟아지려는 눈물과 함께 욕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상사가 책상에 던져놓고 간 순찰 스케줄을 보자마자 절규가 절로 나왔었다. 동료라는 놈이 안쓰럽게 제 어깨를 토닥였지만, 빈말로도 이 막장 스케줄을 나눠주겠다고는 하지 못했다.

그야 그럴 것이, 지금 희라는 장장 사흘간의 야간 순찰 당직을 앞두고 있었다. 남들이 9 to 5 근무를 끝내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러 갈 때 출근해 밤을 꼴딱 새우게 되었다 이 말이다. 경비원이라는 직업 특성상 출근 시간이 여느 회사원보다 불규칙하긴 했지만, 연속으로 야간을 뛰는 스케줄은 극히 드문 편이었다.

“알지, 알아. 나도 그렇게 짜고 싶어서 스케줄이 저 난리인 게 아니야. 그런데 희라 씨도 알다시피 고티카 박물관 특별전시가 갑자기 결정되었잖아. 성왕의 레갈리아 특별전시라 거절할 수 없었는데, 당장 다른 곳에서 인력을 빼 올 수가 없어서. 사흘만 수고해줘. 수당은 두둑이 챙겨주고 이후에 휴가도 보장해준대.”

눈을 뒤집고 팀장한테 가서 따져 물었더니 돌아온 답에, 조금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벨스토렌의 물가는 절대 싸지 않았고, 경비업체 정직원 시급이 괜찮긴 했어도, 월급에서 공과금이며 월세며 관리비며 생활비며 다 빠지면 남는 액수로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 돈에 넘어갔다. 이틀 차 야간 근무를 앞둔 희라는 한 치 부끄러움 없이 시인했다. 작고 귀여운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희라는 뻑뻑해지는 눈을 비볐다. 인력 부족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둑한 텅 빈 통로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홀로 남겨진 희라가 한숨을 쉬었다. 평소라면 2인 1조로 순찰해서 실없는 대화라도 나누며 잠을 깼을 텐데, 지금은 말을 받아줄 이 하나 없으니, 입도 눈꺼풀도 천근만근 같았다.

담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한적하고 을씨년스러운 한밤중의 박물관 투어는 공포체험에 가까웠겠지만, 희라는 그저 빛이 밝았다면 덜 졸렸을까, 그런 태평한 생각만 할 뿐이었다. 첫 야간 순찰에 당첨되었을 때나 스산하게 울리는 제 발소리와 손전등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놀랐지, 이제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통장 잔고가 더 무서웠다.

고로 희라는 일한다, 때아닌 야밤에도.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에 머무르는 기분이 들어, 희라가 빈손으로 목을 쓱쓱 문질렀다. 그러다 다시금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지 않고 손목시계에 빛을 비췄다. 초바늘이 돌아가는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까지 4시간이나 남았다니. 졸리고 추운 희라는 비참한 현실에 절망했다.

—끼익.

어디선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감겨가던 희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적에 예민해진 귀가 소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저기 특별전시관 아냐? 어디 창문이 바람에 열렸나? 비싼 물건 떨어진 건 아니겠지? 뭐가 망가졌으면 내가 물어내야 하나?

불안해지는 마음에 특별전시관으로 향하는 희라의 걸음이 빨라졌다. 복도와 복도가 만나는 곳, 중앙의 큰 이중문에 손전등 불빛이 닿았다. 검은색 나무에 세심히 조각된 화려한 문양 구석구석 그림자가 드리웠다. 얌전히 닫혀있는 문에 안도하던 희라는 문득 의아해졌다.

‘여기 열릴만한 문은 특별전시관 이중문밖에 없는데? 창문도 없고.’

졸다가 착각했나? 어쩐지 찝찝한 기분에 희라는 잠시 망설였다. 도둑이 든 거라면 어떡하지? 경비원으로서 당연히 훈련은 받았지만, 희라는 아직 신입이었고 긴급상황에서 지원해줄 동료도 없었다. 무전기로 박물관 반대편에 있는 동료 직원을 부를까 고민했지만, 희라는 이내 심호흡하고 문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직업정신이 투철한 것도 아니었고, 도둑이 있다면 잡아야 한다는 정의감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1급 마도구, 그것도 시장이 제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이 도난당한다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론 10년을 일해도 절대로 메꾸지 못할 빚이 생길 거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마 잘못 들은 거겠지. 괴도 레드캣이 사라진 지 몇 년인데, 1급 마도구를 훔치려는 간 큰 사람이 또 있겠어?’

자신을 설득하며 희라는 문제가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묵직한 이중문 손잡이에 손끝이 닿았다.

—끼이익.

문 한 짝이 오싹한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져 열렸다. 희라가 눈만 빼꼼 내밀고 깜깜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사람의 기척은 없어 안심하고 착각으로 치부하며 문을 닫으려던 순간.

……가기 싫어………

희라가 절로 나오는 비명과 함께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곧바로 무전기를 켜는 동시에 문을 열어젖히고 특별전시관 안쪽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손전등의 빛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희라가 최대한 용감하게 소리쳤다.

“누구야! 나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희라의 눈이 길 잃은 구슬처럼 이리저리 굴러갔다. 무슨 일이냐고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목소리에 힘입어 다시 한번 소리치려는 희라의 시야 끄트머리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자신을 부르는 동료에게 대답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전등 빛이 한 인영을 비추고 있었다. 아니, 인영을 통과하고 있었다. 작고 하얀 인영의 발아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인영의 고개가 조용히 돌아갔다. 하얗고 투명한 눈동자가 희라를 마주했다. 챙그랑, 결국 희라의 손에서 떨어진 손전등이 차가운 바닥을 나뒹굴었다.

“꺄아아아악----!!!”

공포에 찬 새된 비명이 어두운 전시관에 울려 퍼졌다.

* * *

“…그런 일이 있어서, 탐정님을 찾아온 거예요.”

자신을 희라라 밝힌 젊은 여성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시선을 교환했다. 아침 일찍 나와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유즈리하의 얼굴에서 잠이 달아난 지 오래였다. 어느덧 눈을 반짝이는 유즈리하에게서 시선을 떼고 태량은 의뢰 내용을 필기한 메모장을 내려다보았다.

“유령 사건이라….”

고민 가득한 태량의 중얼거림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했는지 희라가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짧게 꽁지머리로 묶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같이 휘날렸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처럼 들릴 것은 알아요! 아마 제가 목격자가 아니었더라면 저도 믿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맹세코, 월급을 걸고, 거짓말은 아니에요!”

알아요, 진정하세요, 믿어요, 태량이 차분한 목소리로 희라를 안심시키는 한편, 유즈리하는 다른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장인이 월급을 건다고 하면 당연히 믿어야지. 그런데 우리한테 유령 체험기를 이야기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정확히 의뢰하는 내용이 뭐예요?”

희라가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그의 안광이 번뜩여 광신도 같은 간절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유령을 고티카 박물관에서 쫓아내 주세요. 안 된다면 적어도 눈에 보이지 않게 해주세요. 탐정은 퇴마사가 아니니까 사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닌데…. 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제 말을 믿어주시는 분이 처음이라.”

울컥 감정이 솟아올랐는지, 아니면 며칠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희라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조금 안쓰러운 눈빛으로 희라를 보자 희라는 아예 얼굴을 손에 묻어버렸다.

“무서워 죽겠어요! 일을 도저히 못 하겠다고요! 팀장님도 안 믿어주시지! 박물관 관리 측도 묵묵부답이지! 고티카 사장이 시장님 동생이면 다야? 다냐고! 차라리 강도가 들었다면 몽둥이로 패 잡기라도 하지! 유령에겐 물리적인 공격도 안 통하는데!”

그게 문제였구나. 하긴 보편적으로 경비원에게 주어지는 호신용품으로 유령을 잡긴 어렵겠다 싶었다. 유즈리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태량이 펜 끝으로 메모장을 조용히 두드렸다. 이어진 말에 희라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희라 씨. 우선 의뢰는 부분적으로 수락할게요. 하지만 저희도 현장을 파악해야 하고, 저희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라는 걸 확인해야 하니, 그다음에 의뢰를 온전히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줄을 붙잡듯이 희라의 머리가 격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당장 지갑을 꺼내며 ‘선금은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를 외치는 희라를 태량이 간신히 제재했다. 순찰 시간에 맞춰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고 희라를 돌려보내자, 사무실에 평온한 정적이 찾아왔다.

말없이 메모장에 생각을 정리하는 태량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이 심심해졌는지 유즈리하가 커피포트를 뒤적이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전기 주전자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자, 유즈리하는 소파를 건너뛰듯 돌아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공기가 바람과 함께 상쾌하게 불어와 서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산스레 이리저리 움직이는 유즈리하에게 익숙해졌는지, 태량의 집중력은 그가 갑작스럽게 감탄사를 흘리고서야 깨졌다. 눈썹을 둥글게 휘며 올려다보는 태량에게 유즈리하가 씩 웃어 보였다.

“우유 없다. 어떡할까? 블랙으로 마실래, 아니면 근처 구멍가게 가서 하나 얼른 사 올까?”

태량은 반쯤 흘러가는 생각과 추측으로 가득 찬 메모장을 응시했다. 어차피 현재 유즈리하에게 줄 일은 없었고, 그가 심심해 보이긴 했다.

“그래. 영수증 가져와서 청구하고. 괜찮으면 돌아오는 길에 고티카 박물관에서 안내서 하나만 가져와 줄래? 밤에 갈 테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미리 숙지하려고.”

“오케이. 넉넉잡아 한 시간 이내로 돌아올게! 창문은 닫고 갈까?”

“아냐, 그냥 두고 가도 돼. 날씨도 좋으니까.”

유즈리하가 머리를 설렁설렁 끄덕이고 사무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그럼 다녀올게! 마찬가지로 활기찬 인사를 뒤로하고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그제야 태량은 진정한 고요 속에 남겨졌다.

작게 한숨을 쉬며 태량은 손깍지를 끼고 팔을 쭉 뻗었다. 유즈리하를 조수라는 명목으로 사무실에 들인 이후 전과 같은 조용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으나, 어느덧 유즈리하가 떠난 적막이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정이 무섭다는 걸까, 그를 만난 지 고작 삼 주밖에 안 됐는데. 태량이 의자에서 일어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경쾌한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유즈리하가 눈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는 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일시적인 변화로 나쁘지는 않지. 집중력이 떨어지긴 해도 한 달간 지루하진 않겠네. 태량은 유즈리하가 심부름하러 간 사이 생각을 마저 정리하려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티카 박물관은 휘황찬란한 예술의 거리에 널린 박물관과 미술관 틈에서도 눈에 띄었다. 고풍스러운 검은색 칠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벗겨짐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뾰족하게 솟은 첨탑은 현대적인 건물 사이에서 독보적인 비주얼을 자랑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박물관을 찾은 밤 10시, 고티카는 밤을 장악하기라도 할 듯 위압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유즈리하가 건물을 첨탑부터 맨 밑바닥까지 빠르게 훑었다. 몸에 밴 습관이었다. 고티카에 처음 방문하는 건 아니었지만, 파란만장했던 전 직업을 그만둔 후 유즈리하는 박물관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대략적인 구조야 한 번쯤 내부를 돌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겠지만, 그래도 태량의 말대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미리 익혀두는 게 낫겠지 싶었다.

폐장 시간이 훌쩍 넘어 육중한 정문 앞에는 어울리지 않는 벨벳 밧줄이 처져 있었고, 스산하게 부는 바람이 굳게 닫힌 창틀을 흔들어 소음을 유발했다. 자신이 이곳을 어떻게 뚫었었더라, 유즈리하가 기억을 되짚는 중이었다.

“태량 탐정님! 조수님! 이쪽이에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희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구석의 작은 직원용 문에서 희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짙은 남색의 순찰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질끈 틀어 올린 모습에서 어떤 비장함마저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딱 시간 맞춰 와주셨네요. 좀 번거로우시겠지만, 오늘 밤 저하고 같이 움직이셔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지금 전시 중인 마도구가 굉장히 귀해서 탐정분들의 개별 행동 허가가 안 내려왔거든요.”

“네, 어쩔 수 없죠. 그런데 탐정분‘들’이요?”

태량의 질문에 희라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순찰하던 동료 직원도 유령을 목격했었거든요. 제 비명을 듣고 뛰어와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만…. 근무 끝나고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 사표 내러 갔나 했더니, 다른 탐정님에게 사건을 의뢰했던 모양이더라고요. 10분 전에 먼저 도착하셨는데. 문제가 되진 않겠죠?”

“필요하다면 정보만 교환하고 따로 행동할 테니, 의뢰가 꼬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혹시 누구인지….”

태량의 목소리가 직원용 문으로 들어서자 끊겼다. 호기심에 태량 뒤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유즈리하의 눈에 흔치 않은 진한 주황색이 들어찼다. 그쪽에서도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태량과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고양이 눈매의 녹색 눈동자가 유쾌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어라? 목소리를 내며 빙글 돌아서자 그의 주황색 단발과 화려한 원피스가 펄럭였다. 발랄한 인사가 곧이어 날아왔다.

“오랜만이야, 먹구름!”

“……….”

유즈리하가 힐끔 태량의 얼굴을 살폈다. 꾹 다물린 입술에서 나오는 답은 없었고, 뚱한 얼굴에서 반가움은커녕 귀찮음만 역력해서, 유즈리하는 현명하게 둘이 아는 사이냐고 묻지 않았다.

주황색 단발의 사람은 자신을 샤르잔이라 소개했다. 유즈리하를 대놓고 이리저리 뜯어보는 눈빛을 봐서 흥미가 동한 것이 분명했다. 먹구름, 전에는 혼자 일하는 게 제일 편하다더니 조수는 언제 들였어? 말도 없이? 얼마 전에 생일 축하 엽서도 보냈는데 답장이 없더라. 아, 난 솔라라이즈 탐정사무소를 운영 중인데 여기 먹구름과 탐정 시험 동기예요. 그쪽 조수 씨 이름은요? 시험 준비 중인 탐정 지망생이신가?

꼬치꼬치 캐묻는 샤르잔에게 태량은 작은 한숨만으로 대꾸했기에, 유즈리하는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질문을 얼마나 성실히 답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하나의 질문만 던졌다.

“먹구름?”

“표정이 늘 먹구름 같잖아요?”

생각 없는 질문 선정에 이어 샤르잔의 답변까지 들은 태량의 뾰족한 시선을 느낀 유즈리하를 가시방석에서 구해준 것은 안절부절 시계를 보고 있던 희라였다.

“저, 이제 순찰 시작할 시간인데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나요? 효율이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오늘은 탐정님들의 개별 행동이….”

“물론이죠. 괜찮아요. 먹구름하고야 나중에 약속 잡고 이야기 나눠도 되니까. 그때 조수 씨도 소개해 줘! 갈까요?”

샤르잔은 태량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희라의 동료 직원을 따라 자기 조수로 보이는 단정한 용모의 여성과 순식간에 사라졌다.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 들어 유즈리하가 어리벙벙한 기분으로 태량을 바라보았다. 여전한 무표정에 유즈리하가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생각보다 유쾌한 친구를 두고 있었네?”

돌아온 서늘한 눈빛에 유즈리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희라의 뒤를 쫓았다.

* * *

고티카 박물관의 내부는 밋밋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재력을 뽐냈다. 타 전시장처럼 벽면에 금을 입히거나 보석을 박아놓지는 않았지만, 창틀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고, 천장이며 바닥까지 기본적인 재질에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오래된 예술품과 마도구만 취급한다는 박물관답게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희라의 뒤에서 설렁설렁 따라가던 유즈리하의 눈이 벽을 스쳐 커다란 검은색 문에 닿았다. 양쪽 문에 달린 손잡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유즈리하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유즈리하가 앞서가는 태량의 어깨를 톡톡 치자 태량이 돌아보았다.

“왜? 뭔가 발견했어?”

“그런 건 아닌데. 저기가 특별전시관으로 가는 문 맞지? 왜, 그 유령이 나타났다는.”

앞서가던 희라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둘을 돌아보는 희라의 시선이 유령을 떠올리는 듯 미묘하게 문을 피해 갔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태량이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만 안을 봐도 될까요? 순찰 시간이 지체된다면 밖에서 보기만 해도 괜찮아요.”

“…잠깐이면 괜찮아요.”

유령 출몰 지역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괜찮지 않다는 기색이었으나, 희라는 순순히 육중한 이중문을 열고 불을 켰다. 위에서 노란빛을 띠는 전등이 사각형의 전시관 내부를 밝혔다. 이중문이 있는 벽을 제외한 나머지 벽면에는 작은 마도구 서너 개가 설명판과 전시되어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 웅장한 전시대가 보였다. 전시대의 중앙에는 온통 금으로 만들어진 왕홀이 세워져 있었다.

‘이거 되게 오랜만에 보네.’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는 태량 뒤에 거리를 조금 두고 유즈리하가 건성으로 왕홀을 훑었다. 새삼스럽게 호기심을 갖기에 유즈리하는 누구보다 가까이 레갈리아를 본 적 있었고, 저 화려하게 장식된 왕홀의 머리 부분이며 매끄러운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까지 익히 알고 있었다.

“왕홀을 보호하는 유리관이 없네요?”

태량의 질문에 희라가 전시대 주변에 두른 줄을 가리켰다. 두껍고 매끈한 붉은 줄이 전시대를 휘감고 왕홀을 고정하고 있었다. 태량이 고개를 숙였다.

“방범줄이군요.”

유즈리하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방범줄은 가장 낮은 5급 마도구였지만 가격이 비교적 낮고 실용성이 뛰어나 벨스토렌의 박물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줄이 손상되거나 끊어지면 알람이 작동하는 방식이었고, 방범줄과 세트인 자물쇠가 자동으로 잠겨 따로 열쇠 없이 풀 수 없었다. 자물쇠는 당연히 특별전시관으로 들어오는 이중문에 걸려있었다. 아까 손잡이에 어쩐지 친숙한 모양의 자물쇠가 달려있다 싶었다.

“사실 방범줄보다도 이 마도구 자체가 훌륭한 도난 방지 물품이긴 해요.”

혹시 이미 알아보고 오셨나요? 희라가 묻자 태량과 유즈리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왕의 레갈리아는 상호 작용하는 마도구로 유명하지요.”

“왕관을 소유한 적 없는 사람은 여기 왕홀을 포함한 다른 레갈리아를 만지면 화상을 입잖아요. 쉽게 훔칠 수 있는 마도구는 아니죠.”

마도구는 각자 고유한 효과가 있지만, 드물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효과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고, 마도구 학자들은 이를 상호 작용이라 칭했다. 마도구 상호 작용에 관한 연구는 아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성왕의 레갈리아가 대중에 사랑받는 이유도 유명한 상호 작용 마도구인 까닭이었다. 평범한 보물보단 희귀한 보물이 더욱더 매력적이기 마련이었으니까. 사전에 공부를 꼼꼼히 해온 태량과 실전으로 지식을 체득한 유즈리하가 번갈아 가며 대답했다. 희라가 피곤한 얼굴로 열렬히 왕홀을 노려보았다.

“정답이에요. 그래서 옛날엔 시장님이 종종 특별전시에 레갈리아를 거리낌 없이 빌려주셨다고 들었는데… 레드캣 사건 이후로 불안하셨는지 이번에 경비를 늘리셨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전 살인적인 당직 스케줄을 뛰게 되었고….”

뒷말은 한탄에 가까웠고 그 당직 스케줄에 의도치 않게 기여한 유즈리하는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라의 푸념은 쭉 이어졌다.

“레갈리아 특별전시로 선정된 박물관도 철저하게 보안 따져서 빌려주셨다는데, 고티카 박물관만 인맥으로 규정을 쏙 피해 갔다고 뒤에서 다들 수군댄다고요. 저희도 고티카에서 특별전시를 하게 될 줄은 몰라서 미리 외부 인력 고용도 알아보지 못했고. 이래 놓고 무슨 사고가 나면 사정이 어쨌거나 저희 탓이 될 게 뻔하고. 저는 보나 마나 잘려서 실직자가 될 테고. 그런데 유령까지 나타나서 날 괴롭히다니!”

“진정하세요. 되는 한까지 저희가 성심껏 도와드릴게요.”

“순찰 마저 안 돌아도 되나요? 이러다가 샤르잔 씨 조가 저희 따라잡을 것 같은데.”

마음껏 불평이라도 하게 두니 희라가 점점 좌절하며 땅을 파고 들어가, 태량은 물론이고 딴청을 피우던 유즈리하까지 끼어들어 희라를 달래며 주의를 돌렸다. 울상을 짓던 희라가 화들짝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내 정신 좀 봐. 조수님 말이 맞아요, 죄송합니다. 순찰하다가 시간 맞춰 여기로 돌아오죠.”

유즈리하가 먼저 어둑한 복도로 나가고, 그 뒤로 유심히 전시관을 살피던 태량이 그를 따랐다. 마지막을 희라가 불을 끄고 이중문을 닫자, 특별전시관이 다시 깜깜한 어둠에 잠겼다.

유즈리하는 하품을 참으며 옆에 앉은 태량의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새벽 2시 48분. 한때 야행성 생활을 고수해온 유즈리하도 슬슬 피곤해질 시각이었다. 당장 침대에 쓰러져 자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희라처럼 전시관 내부를 서성일 정도로 에너지가 남아있진 않았다. 유즈리하의 갈색 눈동자만 희라의 움직임을 따라 특별전시관을 한 바퀴 돌았다.

성왕의 왕홀 앞에서 방범줄을 한 번 확인하고, 왼쪽 벽면에 있는 마도구를 쭉 살피고. 저쪽에 뭐가 있었더라, 빛을 전부 흡수하는 마도구였던가, 아니면 반대로 밝혀주는 마도구였던가? 옆에는 자동으로 필기해주는 펜 형태의 마도구… 그 옆에는 각인한 이미지를 허공에 투영해주는 마도구….

습관적으로 진열된 마도구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훑던 유즈리하가 기어코 하품을 뱉었다. 눈이 조금 무겁기도 했고, 입이 심심하기도 했던 터라 유즈리하는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포장지를 까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태량이 유즈리하를 힐끗 바라보았다. 태량과 시선이 마주친 유즈리하가 입안에서 새콤한 구체를 굴리다 사탕을 하나 더 꺼냈다.

“하나 먹을래? 레몬 맛이야.”

“응, 고마워.”

그렇게 둘은 몇 분을 조용히 앉아 새콤달콤한 사탕을 녹였고, 희라는 전시관을 세 번째로 돌았다. 유즈리하가 바닥에서 일어나 허리를 뒤틀었다. 졸린 것보다도 지루한 게 문제였다.

“유령은 언제쯤 나타날 것 같나요?”

“제가 유령을 목격한 게 세 시경이었으니까….”

“다시 나온다면 엇비슷한 시간대에 나타나지 않을까 추측했죠.”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셋이 이중문을 돌아보았다. 희라의 동료 직원과 나란히 걸어오던 샤르잔이 한 손을 들어 경쾌하게 흔들었다. 샤르잔의 조수가 뒤따라오며 문을 닫았다.

“세 시까지 5분도 안 남았네요. 넉넉잡아 30분 정도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해요.”

“그… 진짜 유령이 또 나타날까요?”

희라의 동료 직원의 얼굴이 새파랬다. 희라도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태량이 평소 같은 침착한 말투로 두 경비원을 다독였다.

“유령이 나타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죠. 혹여 나온다면 정체를 밝히는 게 우리가 할 일이고요.”

역시 먹구름, 그 든든함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흘러온 샤르잔의 감탄사에 태량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으나 샤르잔의 웃음은 여전히 해맑았다.

‘샤르잔 씨가 악의를 가지고 태량을 긁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태량의 성향이 샤르잔 씨하고 더럽게 안 맞나 보네.’

적당히 눈치를 보며 유즈리하는 잽싸게 둘 사이를 파악했다. 혹시라도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끼어들어야 하나 싶어 우선 입부터 열었으나,

마도구는 정말 백 번 봐도 멋지고 매력적이야……

저보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음성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유즈리하의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특별전시관에 모인 인원을 훑었다.

일단 저는 아니었고, 고개를 돌리며 상황을 파악하는 샤르잔의 조수도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전시관 끝에서 끝을 빠르게 돌아보는 태량과 샤르잔도 아니었고,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기절하기 직전인 희라나 동료 직원은 절대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성왕의 왕홀 전시대 앞에, 붉고 투명한 인영이 서 있었다.

‘…잠시만, 붉은색? 희라 씨의 이야기에 등장한 유령은 분명 하얀색이었는데.’

유령이 붉은빛을 띠고 있어 섬뜩할 만도 했으나, 그 형태가 새빨갛기보단 은은하게 조명등처럼 빛나고 있어서 유즈리하는 두려운 마음보단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괜한 자극은 불필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에, 유즈리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유령을 샅샅이 관찰했다.

제 허리보다 조금 높게 오는 키, 어깨 길이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티셔츠와 멜빵바지 차림에 책가방까지 메고 있는 모습. 상황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박물관에 견학하러 온 학생으로 착각했을 듯한 생김새였다.

“…희라 씨, 이게 목격하셨던 유령이 맞나요?”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건 유즈리하와 같은 의문을 품은 태량이었다. 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었던 희라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려는 찰나, 유령이 다시 움직였다. 유령이 붉은 잔상을 남기며 전시대를 천천히 돌았다. 얼굴이 흐릿해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왕홀을 바라보고 있는 건 명확했다.

……가기 싫어………

목소리도 평범한 소녀와 다름없었다. 유즈리하가 조심스럽게 유령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태량과 샤르잔도 조금씩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령은 여전히 왕홀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샤르잔이 제일 먼저 유령 근처까지 다가가 손을 내미는 순간, 유령이 멈춰서는 바람에 그의 손이 유령을 쑥 통과했다. 유령을 만진 샤르잔이나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당황하기도 전, 유령이 펄쩍 뛰고 이중문을 향해 달려갔다. 누가 뭐라 외쳐볼 새도 없이 붉은 유령은 사라지고 특별전시관 안에 여섯 사람만 남겨졌다.

* * *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이 밝았다. 희라는 밤사이 태량과 협의를 마친 의뢰 계약서에 사인하고 다크서클이 만연한 얼굴로 사본을 한 장 받았다. 수사에 진전이 있다면 아무 때나 연락을 달라는 말과 함께 근무를 교대하고 고티카를 떠나는 희라의 뒷모습은 매우 낡고 지쳐있었다. 상대적으로 쌩쌩한 유즈리하가 굳은 몸을 풀며 태량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유령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해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지. 그래서 이번 계약조항이 조금 복잡하게 들어갔고.”

태량이 유즈리하에게 계약서를 건네고 눈을 비볐다. 크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 역시 밤을 꼴딱 새워 피곤한 모양이었다. 계약서를 대충 훑어내리던 유즈리하의 눈도 빼곡한 글씨를 보며 점차 감겼다.

“본 계약에서 탐정의 의무는 일차적으로 ‘유령’의 정체를 파악할 것. 본 현상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판단되면 본 계약은 종료하고, 의뢰인이 원할 시 추가금을 지불하고 초자연 현상 분야의 전문가와 연계한다. 만약 ‘유령’이 해결 가능한 범위라 판단되면 추가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구두로 의뢰금을 다시 협의한다… 하암. 희라 씨가 처음 사무소에 찾아와서 의뢰한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맞아. 당장 정보 면에선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으니까. 우리 눈으로 유령을 직접 목격하고 실존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지.”

태량이 깍지를 끼고 팔을 위로 쭉 뻗자 작게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계약서를 도로 건네주는 유즈리하를 보고 태량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버스 정류장을 가리켰다.

“밤새우느라 고생했어. 우선 사무실로 돌아가서 계약서만 파일링하고 쉬자. 지금 출발하면….”

“먹구름!”

이제 유즈리하의 귀에도 태량을 칭하는 게 분명한 저 별칭이 익숙해졌다. 태량이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다 마지못해 돌아보았다. 밤새 눈그늘이 약간 생겼지만, 변함없이 발랄한 웃음을 머금은 샤르잔이 둘에게 다가왔다.

“지금 가려고? 혹시 그 경비원분하고 유령 잡는 계약 체결했어?”

“보안상 문제라 내가 답해줄 수는 없는데.”

“했나 보네? 들고 있는 그거 계약서지?”

태량의 무표정에 설핏 짜증이 깃들었다. 그러나 샤르잔이 워낙 밝고 당당한 태도를 고수해 태량은 결국 한숨을 쉬고 팔짱을 꼈다. 용건이 뭔데? 짧은 질문에 샤르잔이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계약 내용 물어보는 몰상식한 짓은 안 하니까 그렇게 가시 세우지 마. 우리가 다른 의뢰인에게서 비슷한 내용의 의뢰를 받은 것 같아서 확인차 온 거거든.”

“설마 협업하자는 얘기는 아닐 테고.”

“그건 재미없지! 자 들어봐, 먹구름.”

불길한 예감밖에 안 든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태량의 표정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한발 물러선 유즈리하는 팽팽히 오가는 신경전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샤르잔이 한 손을 허리에 얹고 태량에게 선포했다.

“대결하자! 너와 나, 태량 탐정사무소와 솔라라이즈 탐정사무소! 먼저 유령 현상을 해결하는 쪽이 승리하는 거야. 어때?”

어떻고 자시고, 샤르잔의 발언을 들은 태량의 얼굴에 피곤함이 배로 늘었다. 놀란 기색은 아니었으니, 이번이 샤르잔에게 저런 제의를 받은 게 처음이 아닌 듯했다. 태량이 다시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각자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될 것을 굳이 귀찮게….”

“재밌을 것 같은데?”

반은 졸음의 힘이었고, 반은 평범한 충동이었다. 거절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유즈리하에게 태량이 황당한 시선을 던지기도 전에 샤르잔이 기회를 냉큼 물었다.

“조수 씨가 뭘 좀 아시네요! 그럼, 지금부터 대결 시작으로 알게! 그러고 보니 아직 조수 씨 이름도 못 물어봤네.”

샤르잔의 초록색 눈동자가 유즈리하에게 고정되었다. 못마땅해 보이는 태량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유즈리하가 얼떨결에 저를 소개할 정도로 열렬한 눈빛이었다.

“유즈리하인데…요.”

“말은 편하게 하셔도 상관없어요. 먹구름, 유즈리하 씨, 이번엔 지지 않을 테니 각오하고 있어요! 아차, 먹구름. 저번에 보낸 생일 엽서 마음에 들었으면 잊지 말고 답장 좀 해주고!”

폭풍처럼 온 만큼 샤르잔은 저 멀리 기다리는 자기 조수를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 유즈리하에게 꽂히는 태량의 눈빛이 따가웠다. 유즈리하가 눈동자만 슬쩍 굴리며 변명을 시작했다.

“그…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의뢰는 진행해야 하고, 저쪽에서 딱히 우리한테 추가적인 뭘 바라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유즈리하.”

“잘못했습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아 유즈리하는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반성해야 했다.

커튼을 활짝 걷어놓은 사무실엔 햇살과 졸음이 가득했다. 유즈리하는 소파에 반쯤 누워 느리게 눈을 끔벅였고, 태량은 책상 앞에 앉아 빈 파일철에 계약서를 정리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태량의 손을 보며 유즈리하가 새삼 감탄했다. 탐정은 체력이 좋아야 하는 직업이구나. 본인도 어디 가서 체력이 부족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밤을 새우고 나서도 저리 부지런하게 일은 못 할 것 같았다.

빤히 쳐다보는 유즈리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태량이 파일철을 덮고 머리를 들었다. 몇 초간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즈리하를 살짝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드리웠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태량의 레몬색 머리카락이 옆얼굴을 스치며 살랑거렸다. 햇빛이 닿아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금실 같단 생각이 든 건 졸음 탓일까. 유즈리하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뜬금없긴 한데, 혹시 탐정은 미인계도 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많이 졸려?”

눈썹을 둥글게 올리면서도 태량이 성실하게 답을 주었다. 수사에 필요하다면 쓰는 탐정도 있을 테고, 미인계로 불필요한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나쁜 방법은 아니겠지. 유령한테 미인계라도 시도해보게? 유즈리하는 순간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그게 된다면 신종 퇴마 방법으로 떠오를 것 같은데. 그런데 우리가 본 게 진짜 유령이었을까?”

태량이 책상에 걸터앉아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고심 끝에 나온 말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유령의 특징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유령 현상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이라서 확신하지는 못해. 마도구나 약에 의한 일종의 환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마도구는 둘째치고 뒷세계 이야기까지 나오자, 유즈리하가 눈을 깜빡였다. 탐정이 보통 이런 위험한 의뢰까지 받던가? 맞다, 태량이 한때 경찰 취업도 준비했었다고 했지. 페라노 경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유즈리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알기론 성왕의 왕홀에 그런 효과는 없었는데. 왕홀은 진실을 판별하는 마도구잖아. 그래서 성왕의 거짓말탐지기란 별칭도 있었고.”

“자세히 알고 있네. 레갈리아에 관심 없어 보였는데, 저번에 자료 가져오면서 공부 열심히 했나 봐.”

안 했다. 2년 전의 지식을 알차게 끌어다 쓰는 유즈리하는 태량이 보내는 기특하단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혹시나 어디까지 예습했는지 퀴즈가 날아올까 싶어 유즈리하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유령이 왕홀을 노리는 걸까? 시장이 뒤집어지겠네. 그 사람 희귀한 마도구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잖아.”

다행히 태량은 유즈리하의 질문에 넘어가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태량의 표정에 약간의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유령의 말이나 행동으로 봐선 왕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건 틀림없어. 훔치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도처럼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 ‘유령’도 붉은색인데, 왠지 레드캣을 연상시키네.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화제를 틀었다가 더 큰 지뢰를 밟았다. 태량 딴에는 농담이었으나, 유즈리하는 차마 웃지 못했다. 애매하게 입가만 떠는 그를 도운 건 예고 없이 울린 전화벨이었다. 유즈리하가 전화기를 눈짓했다.

“끊기기 전에 얼른 받아 봐. 아니면 내가 받을까?”

만사에 태평하던 유즈리하가 갑자기 빠릿빠릿한 태도를 보이자, 태량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캐묻지 않고 전화기를 들었다. 유즈리하가 남몰래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네, 태량 탐정사무소입니다.”

-안녕하세요, 탐정님. 저 희라인데요.

태량과 유즈리하의 시선이 동시에 벽시계로 향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었으니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막 출근했을 무렵이지만, 희라에겐 퇴근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태량과 유즈리하도 비슷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는지 전화선을 통해 용건보다 사과가 먼저 흘러나왔다.

-쉬고 계셨을 텐데 죄송해요. 방금 고티카 사장님께 연락이 왔는데, 지금 알려드려야 할 내용이어서요.

“괜찮습니다. 사장님께서 저희를 만나고 싶어 하시나요?”

-네네. 탐정님들이 왔다 가신 이후로 제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셨나 봐요. 오늘 밤은 하루 쉬라고 휴가도 주셨고요. 박물관이 폐장하는 8시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8시에 고티카 박물관으로 찾아갈게요.”

짧은 인사와 통화가 종료되었고, 유즈리하가 길게 하품하며 소파에 누워 기지개를 켰다. 태량이 가방에 서류철을 넣고 일어서며 손짓했다.

“사무실은 잠가놓고 집에 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자. 오늘도 고티카에서 밤새울 가능성이 있으니, 체력을 비축해둬야지.”

유즈리하가 어기적어기적 포근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누워있었다고,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꺼풀에 무게추라도 단 것 같았다.

“8시면 잠은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겠네. 샤르잔 씨도 오려나?”

“우리만 불렀을 리는 없지.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겠네.”

태량은 선량하게도 그 성가심에 유즈리하가 일조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적당히 맞장구만 치는 게 덜 피곤하겠다고 체념한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당돌했던 태량의 시험 동기를 떠올리자 둘의 관계에 대해 궁금증이 샘솟았지만, 어지간히 졸렸던 터라 유즈리하는 이번에도 하나의 간단한 질문만 던졌다.

“생일 엽서는 무슨 얘기야?”

“엽서? 아… 7월에 내 생일이 있었거든. 매년 생일 엽서를 보내주고 답장을 재촉해서 이맘때쯤엔 될 수 있으면 피해 다녔지.”

태량의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구나.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머릿속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유즈리하가 사무실 문을 열고 태량도 나올 수 있게 문을 잡아주었다.

“그래도 생일 엽서를 보낼 정도면 샤르잔 씨 측에서 널 꽤 친근하게 여기나 봐?”

태량이 유즈리하를 따라 사무실을 나온 후 문을 닫아걸었다. 대답은 짧았다.

“생일 엽서를 빙자한 대결 신청을 보내는 터라.”

그렇다면 할 말이 없었다. 다시 태량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나 고민하던 유즈리하가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하품을 삼키자, 태량이 어서 집에 가자며 그를 잡아끌었다. 그 눈물겨운 다정함에 유즈리하는 사무실에서 내쫓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 * *

고티카의 사장인 반세르는 하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체격 좋은 남성이었다. 둥그런 얼굴은 벨스토렌의 시장을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젊었다. 초조한 얼굴로 고티카 박물관 앞에서 기다리던 반세르는 태량과 유즈리하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아직 8시가 되기까지 시간이 남았던 터라 샤르잔은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경비원에게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어제 유령을 목격한 탐정분들인가요?”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짧은 자기소개 끝에 태량과 반세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휴, 고티카에 오랜만에 손님이 많아질 거라고 좋아했더니. 유령이 성왕의 왕홀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면서요? 많고 많은 마도구 중에서 하필…. 형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하기도 싫네요.”

“알죠, 시장님이 얼마나 마도구에 집착… 아니, 마도구를 아끼시는지요. 벨스토렌 시민이 그걸 모르면 간첩이죠.”

유즈리하가 맞장구쳤다. 반세르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점차 어둠에 잠겨가는 고티카 박물관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 미련이 가득 담겨있었다.

“성왕의 레갈리아를 제 박물관에 전시하는 건 정말 좋은 기회지만, 전 형님과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당장 아쉽더라도 왕홀을 조기 반환하거나 더 뛰어난 보안을 제공할 수 있는 박물관에 양보할지 고민 중입니다.”

“그 생각은 조금 보류해도 될듯싶습니다.”

부드럽게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태량도 유즈리하도 아니었다.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낮게 묶은 젊은 남자가 셋을 향해 머리를 살짝 숙였다. 반세르가 제일 먼저 남자를 알아보고 그를 태량과 유즈리하에게 소개했다.

“벌써 오실 줄은 몰랐는데…. 시장 비서 되는 안비체오 에스트란 씨입니다. 이분들은 탐정 태량 씨와 조수 유즈리하 씨고요.”

그런데 보류라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반세르의 의문에 안비체오가 싱긋 웃으며 둥그런 안경을 고쳐 썼다.

“시장님의 전언입니다. 이벨리 아가씨를 봐서 왕홀의 반환은 요청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대신 이 유령 사태는 확실히 수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벨리가 또 뭔 일을 터트렸나요?”

반세르가 잠시 망설이다 묻고, 태량과 유즈리하를 돌아보며 설명했다. 이벨리는 제 딸인데요, 형님을 닮아 마도구 사랑이 엄청나서 둘이 친합니다. 올해 9살 생일 선물로 무려 4급 마도구를 받았지 뭡니까. 안비체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세르의 말에 동의했다.

“시장님이 조카분을 굉장히 예뻐하셔서 저도 아가씨를 자주 봅니다. 오늘도 시장님을 찾아오셔서 어떻게 아셨는지 제발 왕홀 전시를 중단하지 말아 달라고 시장님께 부탁드리고 있더라고요.”

반세르가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벨리 이 녀석, 또 학원을 빼먹고. 중얼거리는 한탄이 얼핏 들려왔다. 안비체오가 웃으며 손사래 쳤다.

“관심 분야가 확실한 아가씨지요. 학원에 보내기보다 고티카의 명예 직원으로 고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가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풀타임 직원과 맞먹을 텐데 말이죠.”

아무튼, 그래서 시장님이 사건을 해결할 여유 시간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유령이라도 특수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왕홀을 직접 만지지는 못할 테니까요. 반세르가 긴장감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느리게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안비체오 씨. 형님께 최대한 빠르게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에스트란 씨, 부탁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용건이 끝났는지 돌아서는 안비체오를 향해,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태량이 예의 바르게 물었다. 안비체오가 고개를 돌려 붉은 눈동자로 태량을 주시했다.

“들어보겠습니다.”

“성왕의 레갈리아에 관한 자료를 받아볼 수 있을까요? 마도구의 특성이 유령 현상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니, 상세한 정보가 있는 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시장님은 레갈리아의 주인이시니 시중에 풀리지 않은 자료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요. 안비체오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고민은 짧았는지 다시 미소 지으며 선선히 수락했다.

“시장님께 갈 것도 없이 제 선에서 충분히 해드릴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내일은 일정이 차 있다 보니, 오늘 밤에도 고티카에 계실 예정이라면 조금 후에 가져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오히려 늦은 시간에 민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요, 사건이 빨리 해결될수록 저도, 시장님도 좋으니까요. 안비체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태량을 바라보았다.

“거의 8시네요. 자료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니 10시쯤 다시 오겠습니다.”

먼저 돌아가 보겠다는 인사와 안비체오가 떠나갔다. 반세르가 길게 숨을 내쉬고 굳어있던 어깨를 돌리며 풀어냈다.

“젊은 나이에 시장 비서실에 들어가 형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대단한 인물이지.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 자료는 문제없이 가져와 줄 거예요. 다른 탐정분도 오신다고 했으니, 정보는 그때 공유하시면 될 터고… 저기 오는 저분인가 보네.”

멀리서 가로등 아래 선명한 주황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샤르잔 씨와 그쪽 조수도 도착했네, 유즈리하가 흘러가듯 말하자 태량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어. 반세르가 어리둥절하며 샤르잔과 태량을 번갈아 보았고, 유즈리하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어색하게 삼켜야 했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약속한 시각에 자료를 가지고 고티카 박물관에 나타났다. 손가락 한 마디 두께의 파일철을 보자마자 유즈리하는 저도 모르게 질색했다. 반면 태량은 무덤덤하게 안비체오가 건네는 파일을 받아 로비 의자에 앉았다. 그 옆에서 샤르잔과 조수도 자료를 휘리릭 들췄다.

생각보다 탐정이란 직업이 적성에 안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유즈리하는 도피처를 찾아 눈알을 굴렸다.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손이 비어 한가해 보이는 안비체오를 포착했다. 유즈리하가 대놓고 인기척을 내자 안비체오가 그를 돌아보았다. 유즈리하가 눈꼬리를 접으며 씩 웃었다.

“자료 진짜 많네요. 에스트란 씨는 저걸 다 읽어보셨나요?”

“물론입니다. 시장님이 제일 아끼시는 마도구 컬렉션인데 이 정도는 기본 소양이죠. 유즈리하 씨는 같이 자료 안 보셔도 괜찮겠습니까?”

“…나중에 보려고요. 기본적인 정보는 숙지했거든요.”

성왕의 레갈리아가 네 개로 이루어진 상호 작용하는 마도구고, 그래서 왕관을 소유한 적 없는 사람이 나머지 레갈리아에 손댈 수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어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될까 봐 유즈리하는 재빠르게 제 지식을 줄줄 읊었다. 안비체오가 열정적인 학생을 보는 선생의 눈빛으로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관 소유의 기준도 아십니까?”

꾀부리는 학생에게 깜짝 퀴즈가 돌아왔다. 그나마 범위가 유즈리하가 실전으로 공부한 부분이었다.

“왕관을 써 본 적이 있는가… 맞죠?”

느긋한 박수와 함께 안비체오의 눈이 가느다랗게 휘었다. 시험을 모두 통과한 유즈리하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 동시에 옆에서 자료를 흡수하던 샤르잔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날아왔다.

“그리고 왕관을 쓰고 책봉식을 하지 않을 경우 소유권을 박탈당한다고 해요. 소유권을 잃으면 다른 레갈리아와 마찬가지로 왕관을 만져도 화상을 입는다고 하고.”

그건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놀란 나머지 조금 위험한 질문이 유즈리하의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다.

“그럼 2년 전 레드캣이 부상 없이 레갈리아에 손댄 건 어떻게 설명이 되는 거지? 왕관을 훔친 이후 책봉식이든 뭐든 한 적 없는데?”

안비체오의 시선이 유즈리하에게 길게 머무르자, 유즈리하는 제 말실수를 깨닫고 급하게 변명거리를 찾아 진땀을 빼며 머리를 굴렸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다행히 안비체오는 유즈리하의 발언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이해하려면 레갈리아의 출처부터 설명해야 할 듯싶군요.”

혹시 탐정님께서 필요한 정보를 익히셨다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비체오의 제안에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꺼운 자료를 넘겨 한 지도를 검지 끝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겠지만, 성왕의 레갈리아는 벨스토렌에서 발굴된 마도구가 아니에요. 본래는 상타스라는 마을의 귀물로 마을 이장이 대대로 관리했다고 합니다.”

태량의 설명은 명료하여 공부라면 학을 떼는 유즈리하조차 귀 기울여 경청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고대 상타스 왕국이 점차 축소되어 상타스 마을이 되었다고 추정하던데, 레갈리아는 왕국 시절 왕의 책봉식에 쓰이던 마도구라고 하네요. 왕조가 몰락했어도 그 전통만큼은 상타스 마을에 이어져 내려왔다고 해요.”

“책봉식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든 유즈리하에게 화내는 대신, 태량이 레갈리아의 사진이 인쇄된 장을 펼쳐 손으로 네 개의 레갈리아를 번갈아 가며 짚었다.

“책봉식이 거창한 예식은 아니야. 왕관을 쓰고 유예기간 이내로 나머지 레갈리아-검, 왕홀, 보주-를 전부 착용하면 레갈리아를 다룰 자격이 부여된다고 해.”

“엄히 말하자면 왕의 자격을 부여한다기보단 마도구 주인 인식에 가까운 절차죠.”

샤르잔이 빙긋 웃었다. 마도구 중엔 그런 까다로운 것들이 종종 있다고 해요. 주인을 가려 받는다든지, 특정 상황에서만 제대로 효과가 발동되는 마도구라든지. 연구가 끝이 없어 학자들이 환호하고 동시에 절망하는 분야죠.

“그래서 한때는 왕가의 진정한 후손만이 레갈리아를 소유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고. 소유자가 기예르 시장님으로 바뀌고 자세한 연구가 진행돼서 이만한 정보가 추가된 거라고 하더라.”

태량이 설명을 끝마쳤다. 유즈리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2년 전 기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시 레갈리아는 삼엄한 경비 아래 네 마도구가 벨스토렌의 자랑인 벨그란데 박물관에 다 같이 전시되어 있었지. 왕관을 시작으로 저는 패기롭게 레갈리아를 전부 훔치는 데 성공했고.

유즈리하는 인정했다. 과거의 자신은 운이 끝내주게 좋았다. 태량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자료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레드캣이 성왕의 레갈리아를 훔쳐낼 수 있던 이유죠.”

“저는 개인적으로 레드캣이 잠적하기 전에 레갈리아를 포함한 마도구를 반환한 게 더 믿기지 않아요. 무려 1급 마도구 네 개가 세트인 상호 작용 마도구인데.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잖아요. 사실 그렇게 따지면 상타스 마을에서 시장님에게 그 보물을 내어준 것도 신기하지만요.”

“레드캣의 의중은 모르겠지만, 기예르 시장님의 경우는 레갈리아 값을 정말 후하게 쳐줬다더라.”

샤르잔의 조수도 토론에 한몫 거들었고, 샤르잔이 옆에 있는 파일철을 가리켰다. 거기 자료 좀 넘겨주렴. 몇 장을 넘겨 나온 매매 계약서를 샤르잔이 펼쳐 들었다.

“계약서 사본이래요. 아직 안 봤으면 한 번 봐요.”

레갈리아의 몸값이 궁금하긴 했기에 유즈리하는 눈 아픈 깨알 글씨를 참아내며 숫자를 세었다. 백만, 천만, 억, 십억… 끝없이 불어나는 단위에 유즈리하는 셈하기를 관뒀다. 시장이 엄청난 부자라더니 풍문은 아니었나 봐. 질린 얼굴로 유즈리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금액이면 왕가의 보물이든 황가의 보물이든 팔만하네. 왕국 하나 새로 세울 수 있겠어.”

“아니요. 상타스에겐 거래에 응한 게 제일 큰 실수였습니다.”

안비체오의 단언이 칼처럼 자르고 들어왔다. 유즈리하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안비체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안경 뒤의 눈매는 날카로웠다.

“대금을 받은 당시엔 좋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상타스는 작고 외진 마을이었습니다. 상타스를 찾는 사람 중 9할은 성왕의 레갈리아를 보러 온 관광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자연스레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던 상인도 떠나고, 주민은 돈이 있어도 생필품을 구하지 못하게 되었죠. 그렇게 하나둘 주민도 떠나가고 상타스는 몰락했습니다. 이제는 지도에서 지워진 마을이 되었죠.”

물론 그로 인해 벨스토렌은 더욱 부유해졌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이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비체오의 말이 끝나자 씁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즈리하가 먼저 인상을 펴고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쭉 뻗어 벽에 등을 기댔다.

“뭐, 마도구 관광으로 먹고살던 마을이 망한 사례가 한둘인가. 일이 년만 지나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이주한 주민들의 여권에나 노란 흔적으로 남을 뿐이지.”

유즈리하의 가볍지만 신랄한 어투에 태량은 웃을 수가 없었다. 유즈리하의 여권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출생도시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정이 깃든 고향이라도 태량은 도시의 잘못까지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안비체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벨스토렌에 정착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어릴 적 살던 고향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으니까요. 누군가의 뿌리가 흔적으로만 남는 건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즈리하는 주제에 흥미를 잃었는지 대꾸하지 않았고, 태량은 자기가 입을 열어도 되는 주제인지 확신하지 못해 말을 아꼈다. 샤르잔과 그의 조수도 마찬가지였는지 조용히 자료만 정리했다. 어색한 침묵에서 그들을 구원한 건 교대를 위해 고티카에 출근한 경비원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희와 순찰하며 유령 현상을 수사할 탐정분들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홀로 유령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얼굴에 역력한 경비원들과 인사하고, 태량은 안비체오를 배웅하러 돌아섰다.

“늦게까지 감사했습니다. 자료 정리해서 돌려드릴게요.”

“혹시 제가 순찰에 끼어도 괜찮겠습니까?”

네? 태량은 물론, 경비원과 잡담을 나누던 샤르잔과 유즈리하도 안비체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비체오가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였다.

“얘기 나누다 보니 흥미가 생겨서 말입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면 시장님께 상황을 전달해드리기도 수월할 것 같고요. 문제가 될까요?”

“시장님의 비서이신 만큼 보안상 문제 되지는 않겠지만… 새벽까지 기다리셔야 할 텐데 괜찮으세요?”

태량이 재차 확인했다. 안비체오의 미소가 진해졌다. 철야는 익숙합니다. 시장 비서실엔 늘 끝나지 않은 서류가 밀려있기 마련이니까요. 그의 아련한 발언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말을 얹지 못했다.

“필요 없는 철야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만큼 유령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얼떨결에 태량의 조에 합류한 안비체오에게 유즈리하가 복도를 돌며 넌지시 묻자 그가 유쾌하게 웃음을 흘렸다.

“유령을 직접 보는 게 흔한 기회가 아니잖습니까. 듣자 하니 붉은 유령이 나타난다는데, 한때 벨스토렌을 떠들썩하게 뒤집어놓았던 괴도 레드캣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레드캣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태량의 질문에 안비체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 옆으로 흘러내려 섬세하면서도 이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벨스토렌 주민 중 레드캣에 관심 없는 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적인 흥미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군요. 레드캣 활동기는 제가 비서실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2년을 시장님 곁에서 일하며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도 많습니다.”

대부분은 레드캣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범죄자고, 지금 감옥에서 썩어가지 않는 게 통탄할 노릇이라는 한탄이지만요. 안비체오의 시선이 태량을 거쳐 유즈리하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앞을 응시했다. 어쩐지 저를 꿰뚫어 보는 불편한 느낌이 들어 유즈리하는 더 말 붙이지 않고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 * *

새벽 세 시가 되기 직전, 특별전시관에 일곱 명이 모였다. 태량과 유즈리하, 샤르잔과 그의 조수, 안비체오 에스트란, 경비원 둘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들고 온 시계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초침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긴 시곗바늘이 12를 지나쳤다.

“…나왔다.”

유즈리하가 조용히 속삭이자, 태량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형상을 띤 붉은 유령이 왕홀 주변을 맴돌았다. 지난밤에 보인 행동과 한치 다른 점이 없어, 이 현장을 영상으로 봤으면 같은 녹음이라고 해도 믿었을 테다. 두 번째로 유령을 보는 태량과 샤르잔 측은 놀란 기색도 없이 유령 관찰에 바빴지만, 경비원들은 새파래진 안색으로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그 비서도 마찬가지려나? 유즈리하가 안비체오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태량과 샤르잔 뒤에 선 안비체오는 자리에서 미동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호기심 가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뒤늦게 겁에 질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유즈리하의 날카로운 눈이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저건… 의아함인가?’

안비체오의 입술이 달싹였다. 때마침 샤르잔과 태량이 대화를 시작했기에 그의 혼잣말이 묻혀서 들리지 않았고, 조명이 밝지 않아 입술 모양만으로 내용을 유추할 수 없었다. 유즈리하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안비체오가 그를 돌아보았다. 유즈리하가 곧바로 입을 열었지만, 안비체오에게 캐물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제가 조금 늦었나 봅니다.”

새로운 목소리에 모두의 관심이 잠시나마 유령에게서 떨어졌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하얀 로브를 걸치고 희끄무레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여인 뒤에 샤르잔의 조수로 추측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네가 불러온 사람이니?”

“유령인지 아닌지 빠르게 판별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서 유명한 퇴마사를 고용했어. 어서 오세요,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퇴마사라 소개된 여성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왕홀 앞에 붙어있는 유령에게 눈을 고정했다.

“저 아이가 제가 살펴볼 혼이군요.”

긍정의 답을 받기도 전에 퇴마사가 성큼 유령에게 다가가 유령의 시선 높이로 몸을 낮췄다. 유령은 그를 본 체도 하지 않았지만, 퇴마사는 굴하지 않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낮게 웅얼거렸다. 유즈리하가 그 기묘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태량에게 속삭였다.

“효과가 있을까? 퇴마 말이야.”

“시도할만한 가치는 있겠지. 진짜 유령이면 성불시켜서 해결할 수도 있고, 아니라면 다른 대책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인재를 등용하는 방면에선 흠잡을 데 없으니까, 허튼사람을 데려오진 않았을 거야.”

태량이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자, 유즈리하도 어깨를 으쓱이고 뒤로 물러서 퇴마사와 유령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대화라기보단 퇴마사의 일방적인 독백 같았지만 말이다. 유령이 끝까지 반응이 없자 퇴마사가 상체를 일으키고 샤르잔을 바라보았다.

“소통되는 것 같지는 않군요. 악의를 보이지 않으니 원혼은 아닌 듯하나, 한 장소에 깃든 물건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어 지박령일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혹시 최근 이곳에서 사고가 있지는 않았나요?”

“그건 없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유령이 맞습니까?”

매끄러운 대답은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왔다. 퇴마사보다 유령을 유심히 응시하던 안비체오가 반대로 퇴마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퇴마사가 오랫동안 유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진 않아요. 보통 미련이 남아 이승에서 떠도는 유령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도 살아있는 사람과 소통을 시도하는 게 보편적인데, 지금 이 소녀는 온전한 혼보다는 흔적에 불과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요.”

“당신의 능력으로 유령 현상을 없애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인가요?”

샤르잔이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유령과 퇴마사를 번갈아 보았다. 짜증보다는 흥미가 담긴 어조에 퇴마사가 장담하지 못한다는 듯 미묘한 몸짓을 했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니 대화로 설득하지는 못합니다. 허가해주신다면 유령과 저 마도구에 부적을 사용해 강제로 성불시키는 방법을 써볼 수는 있어요.”

샤르잔의 얼굴에 고민이 스쳤다. 유령에겐 뭘 시도해도 괜찮지만, 왕홀에 직접 손대는 건 보안상…. 말을 얼버무리며 샤르잔이 경비원에게 허락을 구하듯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난감한 낯이었다. 이 시간에 고티카 사장님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내일 다시 와야 하나 고민하는 샤르잔과 퇴마사에게 안비체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적이 왕홀을 훼손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마도구에 깃든 악령을 부적을 써 여러 번 퇴치해봤지만, 마도구엔 어떤 악영향도 남지 않았습니다.”

끈끈이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퇴마사의 확언에 안비체오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시간 낭비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한번 시도해보시죠.”

태량이 조금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샤르잔은 기쁘게 안비체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봐 주세요! 샤르잔의 지시에 퇴마사가 넉넉한 소매 안쪽에서 노란 종이에 붉은 문양이 그려진 부적을 꺼냈다. 마침 유령 소녀는 왕홀 전시대 앞에 미동 없이 서 있었다. 퇴마사가 부적 한 장을 쥐고 유령에게 손을 뻗었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부적이 유령에게 닿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통과했다.

퇴마사는 당황했는지 순간 눈을 깜빡이며 깔끔하게 붉은 유령을 통과한 부적을 바라보다가 손을 거둬들였다. 마찬가지로 손은 부적을 든 채로 저항 없이 유령을 가르고 돌아왔다. 퇴마사의 손과 부적도 멀쩡했고, 유령은 그보다 멀쩡해 보였다.

비단 실망한 표정을 지은 건 유즈리하뿐이 아니었다. 저 뒤편에서 경비원들의 아쉬운 침음이 들려왔고, 안비체오의 미소 또한 구름 끼듯 흐려졌다. 오직 태량만 담담하게 기다리는 와중 샤르잔이 퇴마사에게 설명을 재촉했다.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유령이 부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우도 있나요?”

그래도 예의는 발랐다. 유즈리하였다면 아무 생각 없이 사기꾼이 아니냐 물었을지도 몰랐다. 퇴마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악령의 힘이 막강하면 부적이 이기지 못하고 타는 경우는 있었지만… 부적도 유령도 멀쩡하니, 그는 아닌 것 같네요.”

“유령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는 얘기인가요?”

태량의 질문에 퇴마사가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전시대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을 따라 퇴마사의 색 옅은 눈동자가 따라붙었다.

“왕홀에 부적을 붙여보겠습니다. 그럼에도 유령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경우, 이는 제 능력 밖의 일이라 판단해야겠어요.”

동의는 빨랐고, 퇴마사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퇴마사가 이번엔 유령을 무시하고 왕홀에 다가갔다. 안비체오의 손짓에 경비원 둘이 유령과 거리를 두려 애쓰며 방범줄을 당기지 않고 최대한 옆으로 걷어냈다. 손 넷으론 턱없이 부족했기에 태량과 유즈리하가 한쪽에서, 샤르잔과 조수 둘이 반대쪽에서 거들었다. 퇴마사가 조심히 부적 한 장을 왕홀 막대기 부분에 붙였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째깍 흘렀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유령은 여전히 어떠한 반응 없이 부적 붙은 왕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결론이 났네요.”

경비원들의 어깨에 긴장이 풀리는 반면, 태량과 샤르잔의 얼굴에 고민이 동시에 떠올랐다. 둘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유즈리하는 예상했다.

‘그럼, 이 유령 같은 유령 아닌 붉은 소녀는 대체 뭘까?’

퇴마사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작은 한숨을 내쉬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봤지만, 제 능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군요.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노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머지 대금은 바로 치를게요.”

샤르잔이 시원시원하게 답하며 조수 둘에게 눈짓했다. 챙겨온 의뢰금 좀 꺼내주렴. 조수가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샤르잔에게 건네는 동안 퇴마사가 효력을 전혀 보이지 않은 부적을 제거하려 돌아섰다.

“—아!”

때아닌 비명에 잠시 숨돌리던 인원 전부가 화들짝 놀라 퇴마사를 돌아보았다. 부적을 떼는 과정에서 손이 왕홀에 실수로 닿았는지, 새빨갛게 화상 입은 퇴마사의 피부가 유즈리하의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기우뚱, 전시대에 세워진 왕홀이 위태롭게 기울었다.

습관적인 본능이었다. 유즈리하는 넘어가는 왕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즈!”

태량답지 않은 날카로운 주의에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내민 손을 거둘 시간 따위는 없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화상을 입히는 마도구. 소유자가 아니어서 화상을 입은 퇴마사. 과거 소유자의 자격을 얻은 레드캣. 탐정에게 쫓기는 레드캣. 탐정인 태량. 숨겨왔던 제 비밀.

제가 레드캣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태량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유즈리하는 이를 악물고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왕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곳에서 도주할 퇴로를 떠올리는 것보다 태량에게 할 변명이 생각을 가득 채워, 유즈리하는 뒤늦게 태량의 목소리를 인지했다.

“이게, 그러니까.”

“유즈, 안 다쳤어?”

…응? 제가 생각해도 멍청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태량의 인내심은 깊었고 혼란스러워하는 유즈리하를 위해 천천히 질문을 반복했다.

“손 안 다쳤어? 한번 봐봐.”

세지 않게 잡아당기는 힘에 유즈리하는 얼떨결에 손을 내주고 깨달았다. 제 손은 비어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태량의 얼굴엔 유즈리하가 예상했던 혐오감, 모욕감, 하다못해 속았다는 분노조차도 없었다. 순수하게 보이는 걱정에 유즈리하의 시선이 왕홀이 쓰러지던 전시대로 빠르게 돌아갔다.

전시대의 쿠션 위로 왕홀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부드러운 천이 충격과 소음을 흡수했구나, 차차 충격에서 벗어나는 유즈리하의 뇌가 이성을 되찾았다.

제 손에 화상은 없었다. 당연히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직 탈출구는 존재했다. 유즈리하의 머리가 차게 가라앉았다.

“괜찮아! 닿지 않았거든. 휴, 태량 네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도 화상 입을 뻔했지 뭐야. 고마워!”

태량이 미간을 찡그렸다. 유즈리하가 난감해하거나 말거나 태량은 단호하게 그의 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뒤집었다.

“사소한 부상도 방치하면 큰일 날 수 있어. 하물며 화상은 초기에 빠른 처치가….”

멀쩡한 손을 보는 태량의 푸른 눈동자에 의문이 들어찼다. 유즈리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흐려진 말꼬리를 재빨리 잡아챘다.

“그러니까, 닿지 않았다고.”

저걸 만졌다면 이렇게 멀쩡할 수가 없겠지, 그렇지? 답이 정해진 질문을 반복하자 확신했던 표정이 점차 흐려지는 게 맨눈으로도 보였다. 유즈리하가 그대로 밀어붙였다.

“아슬아슬했지만 만지지 않았어. 괜찮아, 정말로.”

태량이 결국 한발 물러섰다. 전시대 반대편에 있던 샤르잔도, 다친 퇴마사 부근에서 우왕좌왕하던 경비원들도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터라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유즈리하가 마지막으로 안비체오를 바라보았다. 저를 무표정으로 길게 응시하던 남자도 어깨를 으쓱였다.

“어, 먹구름. 유령이 빛나고 있는데.”

샤르잔의 부름에 태량의 시선뿐만 아니라 모두의 눈이 소동 때문에 잠깐 잊힌 유령에 닿았다. 샤르잔의 지적대로 소녀 유령이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전날 밤에도 이랬던가? 기억을 되짚어보던 유즈리하의 눈에 붉은빛이 비쳤다. 빛이 나오는 곳은 유령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다.’

진실을 판별하는 성왕의 왕홀. 왕홀 앞에서 거짓을 고하면 왕홀은 붉은빛으로 거짓을 비춘다. 태량의 시선 또한 왕홀에 닿았다는 걸 유즈리하는 깨달았다. 유즈리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태량이 저를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두 번째 각오가 심장을 조여왔다.

“유령이 사라지려나 봅니다.”

낮은 목소리의 주인은 안비체오였다. 태량의 눈이 왕홀에서 유령으로 옮겨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유즈리하는 참았던 숨을 몰래 내쉬었다. 조금씩 사라지는 붉은 유령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쳤다. 아니, 연이은 소동에 지친 건 맞았지만 유즈리하를 지배하는 기분은 그보다 복잡했다. 저를 젖은 빨래처럼 쥐어짠 것 같은 긴장과 탈력감. 다사다난했던 밤이 마무리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탁 놓이는 낯선 감각.

태량이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로비로 돌아가서 휴식하자, 유즈. 여상하게 다가온 말에 제 감정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안도감이었다.

“…왕홀에 문제가 생기지 않은 건 확실하죠?”

밤에 일어난 일을 전부 전해 들은 후 반세르가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안비체오가 총대를 메고 나서서 고개를 저었다.

“쿠션 위로 쓰러졌으니 흠집 하나 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화상을 입을 우려가 있어 제대로 세워놓지는 못했는데, 이 건에 대해선 시장님에게 연락하셔야 할 듯합니다.”

상호 작용 효과 때문에 처음 세팅도 시장님이 직접 하셨으니까요. 그에 반세르가 부모님께 잘못을 고백해야 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되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는지 안비체오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사에 진전은 있었어요. 이 현상이 초자연적으로 발생한 유령이 아니고, 마도구의 효과일 가능성이 커요.”

샤르잔의 말에 반세르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지만, 이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유령을 만들어내는 마도구는 고티카에 없을 텐데요. 그의 의문을 태량이 받았다.

“상호 작용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비슷한 효과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죠.”

“그래서 그 방면으로 수사 방향을 새로 잡으려고요. 고티카 박물관의 모든 마도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한데, 이를 제공해주실 수 있을까요?”

승낙은 빨랐다. 오후까지 전체 자료 사본을 마련해줄 테니 안내원에게서 받아 가라는 말에 샤르잔은 조수를 보내겠다며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태량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열심히 해봐, 먹구름. 나를 이기고 싶으면!”

그 난리 통에도 대결을 잊지 않았구나. 집념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누르며 태량은 조수들과 떠나는 샤르잔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던 태량이 유즈리하에게 손짓했다.

“유즈, 우리도 가자.”

하품을 삼키던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반세르와 얘기를 끝마친 안비체오가 다가와 그들에게 인사했다.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저도 일정이 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안비체오를 보자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그가 유령을 처음 목격하고 보인 반응이 떠올랐다. 안비체오가 시계를 확인하고 짧은 질문이면 괜찮다고 허락하자 유즈리하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유령을 보고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제대로 듣지를 못해서. 혹시 유령에 관해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요?”

“음, 사실 확신하지 못해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만.”

안비체오가 힐끔 뒤에 있는 반세르를 확인했다. 그가 교대를 마친 경비원과 대화하느라 바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목소리를 낮춰 유즈리하와 태량에게 속삭였다.

“잠깐이지만 유령이 이벨리 아가씨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얼굴의 형태는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나 머리 스타일이 눈에 익었거든요.”

유즈리하와 태량이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안비체오는 잠시 숙였던 몸을 세워 팔짱을 꼈다. 느슨해진 보라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려 그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가볍게 넘겼다.

“이벨리 아가씨는 확실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니 유령으로 이곳에 나타났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하지만 이 현상이 유령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 지금으로선 조사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네요.”

태량이 안비체오의 말을 끝맺었다. 태량 또한 반세르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반세르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벨리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반세르 씨에게 한번 물어보시죠. 고티카를 자주 찾는 아가씨니,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안비체오의 말대로 반세르는 이벨리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물을 뿐이었다.

“이벨리가 이 일에 연관되어있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따님이 고티카에 자주 방문하고 시장님께도 마도구에 관해 전해 들은 정보가 많으니, 새로운 시각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선의의 거짓은 쉽게 나왔다. 태량의 배려는 말썽꾸러기 딸을 둔 학부모의 표정을 짓던 반세르를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럼, 오후에 자료를 가져가시면서 이벨리와 얘기 나누고 가시죠. 요즘 왕홀을 구경하겠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뛰어오는 터라, 4시 반쯤 오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가만 놔두면 숙제도 여기서 하고, 밥도 여기서 먹고, 잠도 여기서 잘 기세예요. 딸의 마도구 사랑은 못 이기겠다며 혀를 차고 반세르는 바삐 사라졌다. 떠나가는 그의 등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태량은 그들을 기다리던 안비체오에게 돌아섰다.

“에스트란 씨를 너무 오래 붙잡아뒀네요. 많은 도움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질문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요구였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태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비체오의 어조는 평온했다.

“저희가 본 게 유령이든 무엇이든, 만약 이 현상이 진짜 레드캣의 흔적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순간 정적이 깔렸다. 예상 밖의 질문에 태량은 눈을 깜빡였고 옆에서 딴짓하던 유즈리하는 경직된 목을 돌려 안비체오의 의도를 살피고픈 욕구를 참아야 했다.

안 그래도 밤의 일 때문에 심란한데 괜한 반응을 보이면 수상쩍게 여길 터였다. 그러나 아예 반응하지 않으면 일부러 주제를 피한다고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유즈리하의 두뇌 회로가 타버리기 전에 태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답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레드캣의 성별도, 나이도, 출신도 불명이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어린아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신체적인 제약이 많으니까요. 성왕의 레갈리아를 훔친 전적이 있다고는 해도, 왕홀에만 이런 현상이 생길 만큼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고요. 태량이 차례차례 이유를 꼽자, 유즈리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논리에 탑승했다. 그도 그렇군요, 순순히 인정하며 안비체오가 유즈리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즈리하 씨도 같은 생각입니까?”

“뭐, 그렇죠. 잠적하기 전에 훔친 걸 모두 반환하고 갔으니 돌아올 이유도 없을 거고요.”

안비체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부드러운 동의가 도리어 불편했다. 에스트란 씨는 정말 레드캣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셋의 대화가 가볍게 마무리되었다.

아슬하게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한 경험이 있는 만큼, 유즈리하는 그만큼 제 직감을 신뢰했다. 그 감이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가까이하지 말라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삿날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이제 삼 주 조금 안 남았다. 어차피 도시를 떠날 것, 그동안 조금만 더 조심하면 될 터였다.

걱정과 고민은 유즈리하의 취향이 아니었다. 고티카 박물관을 나서며 맞이한 눈 부신 햇살에 미간을 찡그리며 유즈리하는 아침 메뉴로 생각을 돌렸다.

* * *

“안녕하세요, 탐정님. 저는 이벨리예요.”

반세르가 소개한 소녀는 동그랗고 반짝이는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얀색 고수머리를 반만 모아서 리본으로 묶고, 토끼가 그려진 티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은 모습은 부정할 수 없이 귀여웠기에, 태량도 유즈리하도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깨가 무거웠는지 이벨리가 책가방을 고쳐매고 둘을 올려다보았다.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이벨리가 이곳에 전시된 마도구에 대해 잘 안다고 하던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마도구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눈을 빛내는 모습으로 보아하건대, 반세르가 한탄한 이벨리의 마도구 사랑은 과장이 아니었다.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책가방을 뒤적이려는 걸 제지하고, 태량이 이벨리를 로비 의자에 앉히고 저도 옆에 앉았다. 빛 같은 속도로 책가방에서 스케치북 사이즈의 커다란 노트 하나를 꺼내든 이벨리가 자신 있게 첫 장을 펼치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유즈리하도 불렀다.

“1 전시관의 마도구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조수님도 같이 와서 보세요.”

단언컨대 유즈리하는 대학 강의를 들어본 적 없었지만, 이벨리의 카리스마는 그 어떤 교수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반세르가 약간 질린 얼굴을 하며 태량에게 손짓했다.

“볼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필요한 게 생기면 입구 근처에 안내원이 있을 테니 불러주세요. 탐정님 너무 귀찮게 하지 말고, 이벨리.”

벌써 마도구 강의에 푹 빠진 이벨리에게선 알겠다는 대답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조차 익숙했는지 반세르는 일말의 서운함도 보이지 않고 사라졌다. 그런 반세르를 동정할 시간적 여유는 태량에게도 유즈리하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벨리가 바로 강의에 돌입한 탓이었다.

“이 마도구는 20년 전 프로미시아 도시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최소 500년의 역사가 있다고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마도구의 효과에 있는데요….”

박물관 해설원 뺨치는 지식과 열정이었다. 마도구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가리키는 노트의 그림도 어린아이가 그렸다고 생각지 못할 만큼 정교했다. 1 전시관에 있는 열댓 개의 마도구 설명을 마치고 2 전시관의 마도구로 옮겨가기 전, 이벨리의 목 상태를 우려해 태량이 물을 건넸다. 꿀꺽꿀꺽 물을 받아마시면서도 이벨리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왜 반세르가 거의 도망가다시피 사라졌는지 깨달은 유즈리하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시장의 마도구 사랑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마도구가 왜 그렇게 좋은 거야?”

“당연히 백 번 봐도 멋지고 매력적이기 때문이죠! 전 세상에서 마도구만큼 신기한 걸 보지 못한걸요.”

이벨리의 답은 아이답게 간단명료하고 순수했다. 그러나 태량과 유즈리하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마도구는 정말 백 번 봐도 멋지고 매력적이야.’

이벨리의 대답이 붉은 유령이 왕홀을 맴돌며 읊조린 말과 놀랍게도 유사한 까닭이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시선을 교환했다. 태량이 이벨리를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럼, 성왕의 레갈리아도 좋아하겠네요? 마도구 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마도구잖아요.”

당연하죠! 이벨리는 미끼를 덥석 물었고 유즈리하가 매끄럽게 태량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혹시 성왕의 레갈리아 그림도 있어? 다른 레갈리아는 보지 못해서 구경시켜준다면 좋을 것 같은데.”

전직 괴도다운 뻔뻔한 발언이었지만 이벨리가 그를 알 턱이 없었다. 잠깐만요, 레갈리아는 다른 노트에 그려놨거든요. 이벨리가 의욕적으로 가방을 뒤지는 사이 태량과 유즈리하가 눈빛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벨리와 유령이 보인 유사성으로 판단하건대, 이 소녀는 어떤 방면으로든 유령과 연관이 있는 게 확실했다. 제일 빠르게 확인하는 방법은 이벨리에게 직접 묻는 거겠지만, 어떻게 돌려 묻든 추궁하는 것처럼 들릴 터였다. 높은 확률로 혼나는 게 두려워 도망칠 게 뻔했기에, 이벨리가 새 노트를 찾을 때까지 태량이나 유즈리하나 섣불리 유령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레갈리아는 여기에 그려놨어요. 왕홀은 다 그렸지만, 다른 레갈리아는 아직 그리는 중이에요. 그거라도 괜찮다면… 앗.”

무릎에 아슬아슬하게 책가방을 올려놓고 두 손으로 노트를 꺼내다가 가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자, 이벨리가 작게 비명 질렀다. 교과서, 필통, 도시락통을 비롯한 자잘한 물건이 로비 바닥에 흩어졌다. 괜찮아요? 허겁지겁 바닥에서 물건을 줍는 이벨리를 태량이 거들었다. 필통이 떨어지며 열리는 바람에 연필과 색연필이 사방팔방 구르고 있었다. 꽤 멀리 굴러간 연두색 색연필을 따라간 유즈리하가 옆에 있던 펜도 같이 주워들었다.

‘요즘 애들 볼펜 엄청 요란하네.’

볼펜이 맞나? 흔히 아동 만화에 나오는 요술봉과 비슷하게 생겨서 캐릭터 문구인 줄 알았지만, 아무리 봐도 볼펜 심이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에 손안에서 볼펜 크기의 요술봉을 굴려보다가 엄지에 걸리는 버튼을 얼떨결에 눌렀다. 그냥 장난감인가? 이걸 누르면 막대기 끝부분에 달린 둥그런 구체에서 빛이 들어오려나?

“유즈.”

부름보다는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가까웠다. 유즈리하가 태량을 돌아보았다. 저를 보는 태량의 푸른 눈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이벨리가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얼어붙어 있었다.

“왜 그래? 유령이라도 봤어?”

태량이 말없이 유즈리하를 가리켰다. 유즈리하가 의아한 눈빛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 봤구나, 유령.

희끄무레하게 투명한 발아래에 로비 바닥이 투시되어 보였다. 한 손에 쥔 색연필과 요술봉도 마찬가지로 반투명했다. 갑자기 닥친 유령화에 두렵다기보단 어이가 없어, 유즈리하는 이성적으로 제 행동을 되짚었다.

‘내가 색연필 줍다 죽었을 리는 없고. 이것 때문인가?’

요술봉의 버튼을 다시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자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색이 서서히 돌아오며 몸이 평소처럼 불투명해졌다. 유즈리하가 요술봉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이쯤 되면 이게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마도구네. 투명 효과 마도구.”

우리가 찾던 유령의 정체가 이 마도구인 것 같은데? 유즈리하가 요술봉을 태량에게 건넸다. 태량이 요술봉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이벨리와 눈을 맞췄다. 이벨리는 여전히 자리에 얼어있었다.

“혹시 왕홀 앞에 나타난 유령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잠깐만요!”

번개처럼 로비 밖으로 뛰쳐나가는 이벨리는 태량의 저지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태량이 벌떡 일어서서 급하게 이벨리의 뒤를 따랐다. 겁먹은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몰랐기에 최대한 빠르게 잡아서 진정시켜야 했다.

코너를 돌며 사라지는 이벨리를 따라가던 유즈리하가 혀를 찼다. 무슨 꼬마가 저렇게 발이 빠르담. 그래도 열려있는 박물관 출입구가 하나였기에 이벨리가 달아날 방향은 명확했고, 운이 좋다면 놀란 안내원이나 반세르가 아이를 잡아줄지도 몰랐다.

아야! 시야에서 사라진 이벨리가 누군가와 부딪히며 흘린 비명이 들려왔다. 태량이 유즈리하보다 먼저 넘어진 이벨리를 따라잡았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이벨리가 다쳤는지 살펴보던 태량이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벨리 아가씨, 박물관에서 뛰어다니시면 혼납니다. 누가 다치면 어쩌시려고요.”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한쪽 눈썹을 날카롭게 올리며 가볍게 꾸짖었다. 이벨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자 안비체오가 당황했다. 제가 그렇게 심하게 혼냈습니까? 말보다 선명한 표정으로 태량을 응시하자 머릿속으로 상황을 축약해서 설명하려던 태량이 난감하게 한숨을 쉬었다. 안비체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난장판에서 한 발짝 물러선 유즈리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태량이 사준 핫초코를 마시는 이벨리에게서 간간이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소녀는 이제 대화를 나눌 만큼 진정한 상태였다. 이벨리를 달래는 동시 안비체오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태량은 말이 꼬이기 시작하자 안비체오를 유즈리하에게 맡겼고, 안비체오가 껄끄러워 거리를 두려던 유즈리하는 우는 아이를 달랠 자신은 더더욱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대충 설명을 마쳤다. 다행히 유즈리하의 서툰 설명으로도 안비체오가 전후 사정을 다 파악했기에, 지금 한적한 로비에 네 사람이 앉아있었다.

“특별전시가 시작된 첫날 밤엔 몰래 들어온 건 맞아요. 잘못했어요.”

그 누구도 이벨리의 말을 끊지 않았기에 기죽은 고해는 끝까지 이어졌다.

“뭘 하려던 건 아니었고요…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레갈리아를 전부 그리고 싶었는데 전시 기간이 2주밖에 안 되잖아요. 학교 갔다 와서 그리면 네 개를 다 완성하기에 시간이 부족했어요.”

여기까진 태량도, 유즈리하도, 안비체오도 납득했다. 그동안 보아온 이벨리의 마도구 사랑으로 충분히 할 법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반세르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서 직원용 출입구 열쇠를 빼돌렸다는 말엔 유즈리하조차 박수를 칠뻔했다. 전직 괴도로서 말하건대 이건 칭찬받아 마땅한 대담함이었다. 물론 표정을 보아하니 태량과 안비체오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마도구를 써서 들어왔어요. 4급이라 완벽하게 모습을 숨겨주진 않는데, 어둠 속에서 사용하면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빛이 직접적으로 몸에 닿으면 보셨다시피 투명 효과가 불완전하게 나타나서….”

마도구 이야기로 돌아가자 잠시 생기가 되살아난 이벨리가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다시 울상을 지었다. 파닥파닥 움직이는 작은 손이 간절한 심정을 내비쳤다.

“경비원님에게 들킨 건 제가 맞아요. 그때 놀라서 저도 바로 도망갔거든요. 하지만 그 이후로 밤에 들어온 적은 없어요! 열쇠도 아빠 서랍에 돌려놓았고요.”

“믿어요, 이벨리.”

상냥한 어투에도 안심하는 기색이 아니어서 태량은 재차 반복해서 이벨리를 달래야 했다.

“정말이에요. 희라 씨가 처음 본 유령과 저희가 본 붉은 유령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거든요.”

“단순히 색이 붉은색이어서 말입니까?”

안비체오의 의문에 태량이 애매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잠깐 마도구를 빌려도 될까요? 태량의 요청에 이벨리가 마도구를 태량에게 넘겨주었고, 태량은 버튼을 눌러 투명 효과를 활성화했다. 투명해진 채로 유즈리하에게 손짓하자 유즈리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다. 투명한 태량의 손이 유즈리하의 불투명한 손 위로 겹쳤다. 태량이 유즈리하의 손을 잡고 들어 올리며 안비체오를 돌아보았다.

“이 마도구는 보이는 모습만 투명하게 해주지, 진짜 유령처럼 사물이나 타인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이벨리도 열쇠를 따로 가져왔겠죠. 그러나 어젯밤 저희가 본 붉은 유령은 어땠죠?”

“퇴마사의 손과 부적이 유령을 그대로 통과했었지.”

유즈리하의 회상에 안비체오도 이해한 듯 작게 소리 내 감탄했다. 태량이 마도구의 효과를 끄고 이벨리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왜 이벨리를 닮은 붉은 유령이 나타나서 왕홀을 맴도는지만 알게 되면 수사의 끝이 보일 것 같아요. 어른 셋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이벨리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붉은색이면 혹시 왕홀에 의한 효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왕홀?”

유즈리하가 순간 긴장했다. 거짓을 고하면 붉은빛을 발하는 마도구 때문에 제 과거가 까발려질 뻔한 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이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중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마도구와 상호 작용한 효과일 가능성은 없나요? 한 마도구가 꼭 하나의 마도구와만 상호 작용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왕홀이 상호 작용 마도구 중 하나라면 붉은빛이 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테고요.”

최근에 발표된 상호 작용 논문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어요! 자신감 충만한 이벨리의 발언에 안비체오가 미묘한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학술지에 실린 논문 아닙니까? 어떻게 구했는지는 둘째치고, 읽고 이해하셨다는 게 놀랍습니다만….”

공부를 그렇게 하셨다면 반세르 씨도 아가씨에게 잔소리하지 않을 텐데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날아오는 어른의 훈계에 이벨리가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전 마도구 학자가 될 거니까 이게 제일 중요한 공부예요. 아무튼! 그래서 탐정님이 특별전시관에 있던 마도구를 하나씩 둘러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고마워요, 이벨리. 잘하면 오늘 밤 사건 해결을 볼 수도 있겠네요.”

유즈리하가 이벨리가 도착하기 전에 받은 고티카의 마도구 자료를 꺼내오자 이벨리가 단번에 하얀색 파일철을 가리켰다. 저게 특별전시관 마도구 자료예요. 저것도 읽어봤냐고 한숨 쉬듯 묻는 안비체오를 무시하고 이벨리가 태량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저 고티카의 마도구는 다 외우고 있어요. 마도구 상호 작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요.”

또 두꺼운 종이 더미를 뒤적일 생각으로 우울해진 유즈리하에겐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고, 태량도 이벨리의 제안이 기꺼웠는지 사양하고 싶은 표정은 아니었다.

“시간 절약에 많은 도움이 되긴 할 텐데. 곧 집에 갈 시간 아닌가요, 이벨리?”

“오늘은 숙제 없으니까 괜찮아요! 아빠가 먼저 퇴근해야 하면 비서님이 저를 집에 데려다주시면 돼요.”

“이제 제가 시장님의 비서인지, 아가씨의 비서인지 모를 지경입니다만.”

오늘도 시장님이 아가씨가 사무실에 두고 간 지갑을 전해달라고 하셔서 여기 온 겁니다. 토끼가 그려진 아기자기한 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내주자, 이벨리가 지갑을 받고 눈을 휘며 생글생글 웃었다.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하신 비서님! 혹시 이번 일에 관해서 아빠하고 큰아빠한테 비밀로….”

“안 됩니다.”

이벨리의 입이 다시 비죽 튀어나왔다.

* * *

유령 소동의 해결이 코앞이라는 희소식에 반세르는 안도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벨리가 밤에 혼자 나와 고티카 박물관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기함하며 딸을 따끔하게 혼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했는지 아니? 마도구 사랑도 적당해야지, 이 정도면 네게 썩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 않구나.”

2주간 박물관 출입 금지와 한 달간 투명화 마도구 압수라는 벌을 듣자마자 이벨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짧은 시간 동안 이벨리와 대화하며 레갈리아 특별전시가 이벨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된 태량이 소녀의 절망 섞인 얼굴을 보다못해 끼어들었다.

“이벨리가 저희 수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굉장히 협조적이었으니 출입 금지 벌만큼은 면제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벨리도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고요.”

이벨리가 저를 변호하는 태량을 구세주처럼 우러러보았고, 반세르는 확인을 구하듯 태량을 거쳐 안비체오를 쳐다보았다. 이벨리 아가씨의 도움이 크긴 했습니다, 안비체오가 시인하자 반세르가 10년 늙은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박물관에 놀러 가는 건 된다. 하지만 어디 가는지 엄마나 나한테 반드시 말하고 가야하고, 마도구는 여전히 한 달 압수야. 이리 주렴.”

박물관 출입을 사수한 이벨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지만, 가방에서 마도구를 꺼내는 손길에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요술봉처럼 생긴 마도구를 손에 꼭 쥐고 있던 이벨리가 안비체오를 올려다보았다.

“아빠는 진짜 바쁘니까 분명 일주일만 지나도 내 마도구를 어디 뒀는지 까먹을 게 분명한데…. 비서님한테 대신 맡기면 안 돼요? 큰아빠 보러 갈 때 비서님도 늘 계시니까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이벨리, 안비체오 씨는 형님의 비서지, 네 비서가 아니야.”

어처구니없이 딸을 바라보던 반세르가 뒤늦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안비체오는 너그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아가씨를 자주 보는 건 사실이니까요.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한 달간 마도구를 맡아드리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벨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냅다 안비체오의 손에 마도구를 쥐여주며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한 비서님! 반세르는 다시 한숨을 푹 쉬었고 유즈리하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저거 단골 멘트였구나. 반쯤 해탈한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반세르가 태량을 돌아보았다.

“그럼, 당장 유령 현상을 없앨 수 있나요, 탐정님?”

“시도해봐야 알겠지만, 희망적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 저도 같이 지켜보겠습니다. 유령이 확실하게 사라졌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형님에게 말씀드려야 하니까요.”

반세르의 시선이 안비체오에게 돌아갔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가 일정이 안 될 것 같으니 반세르 씨에게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비체오가 빠지고 반세르와 태량이 시간 약속을 잡느라 분주한 사이, 이벨리가 유즈리하에게 다가와 셔츠 자락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유즈리하가 내려다보자, 이벨리가 눈을 반짝이며 귀를 달라고 손짓했다.

“상호 작용 효과 사건이 해결되면 저한테도 어떻게 됐는지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꼭 부탁해요!”

유령 사건도 아니고 상호 작용 효과 사건이라니. 끝까지 한결같은 이벨리의 마도구 사랑에 유즈리하는 깔깔 웃으며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해결책을 찾으셨다면서요!”

순찰에 복귀한 희라의 얼굴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한 줄기 희망이 표정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밖에 가로등 대신 희라를 세워놓아도 문제없을 것 같단 허튼 생각을 하며 유즈리하가 준비한 자료를 챙겼다. 종일 자료를 들여다봤더니 눈이 빠질 것 같았기에, 유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밤샘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새벽 두 시 반, 고티카 박물관의 특별전시관에서 유즈리하는 오늘 의뢰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몸보다 머리를 쓰는 의뢰는 자신과 영 상성이 맞지 않았다.

“먼저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유령이 나타났던 자리에 태량이 서서 잠시 왕홀을 응시하다가, 제게 귀를 기울이는 반세르와 희라에게로 돌아섰다. 잠잠한 전시관 안에 태량의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첫 번째로, 희라 씨가 처음 목격한 유령의 정체는 사장님의 따님인 이벨리였습니다. 투명화 마도구를 써서 몰래 들어왔다가 희라 씨에게 들켜서 도망갔다고 자백했어요.”

“네, 거기까진 교대 직전에 전해 들었어요.”

조그만 소녀 때문에 기절할 듯 놀랐던 과거가 부끄러웠는지 희라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그럼, 둘째 밤에 나타난 붉은 유령에 관해 설명해드릴게요. 태량의 말에 유즈리하가 들고 있던 하얀 파일철을 휙 펼쳐서 희라에게 건넸다. 중간중간 태량의 지시에 따라 유즈리하가 이벨리의 메모를 받아 적은 게 보였다. 휘날리는 글씨체가 썩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못 읽을 정도로 악필은 아니었기에, 희라가 쓱쓱 자료를 넘기다가 커다랗게 별표를 친 마도구에서 손을 멈췄다.

“이건 녹화용 마도구 아닌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 투영 마도구죠. 각인한 이미지를 허공에 투영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요.”

희라가 특별전시관을 여러 번 오가며 눈에 익힌 마도구 사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직사각형 모형의 마도구는 은색 구체에 빛이 나오는 세 개의 구멍 때문인지 커다란 주사위를 연상시켰다. 희라가 자료에서 눈을 떼고 네모난 마도구가 전시되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전시대는 텅 비어있었다.

“오늘 밤엔 그 마도구를 특별전시관이 아닌 다른 곳에 보관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태량이 희라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희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이듯 물었다.

“그 마도구가 유령의 이미지를 투영했다는 얘기인가요?”

“비슷해요.”

유즈리하가 태량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 시계를 눈짓했다. 세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라가 침을 꼴깍 삼키고 왕홀 전시대를 곁눈질했다. 언제라도 유령이 튀어나올까 염려하는 눈치라 태량은 희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뜸 들이지 않았다.

“저희는 유령이 이미지 투영 마도구와 성왕의 왕홀의 상호 작용 효과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이벨리가 첫날밤 이곳에 몰래 들어왔었죠. 그 모습이 마도구에 각인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벨리가 감상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마도구는….”

“왕홀이었겠네요.”

점차 이해의 빛이 희라의 짙은 눈동자에 들어찼고 태량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왕홀의 효과는 알고 계시죠? 태량이 전시관 안에 있는 모두를 둘러보았고, 고개를 젓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왕홀은 거짓을 판별하는 효과를 발휘할 때 붉은빛을 띠는 마도구예요. 희라 씨의 의뢰에 따라 저희는 특별전시관에서 유령을 찾으려 했지요. 이벨리가 들어왔던 시각에 맞춰 이미지 투영 마도구가 그 모습을 투영했을 때, 저희가 실재하지 않는 유령을 찾으려 하니 왕홀의 효과가 같이 활성화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두 번째 밤부터 유령… 그러니까 투영된 이미지가 붉은색을 띠게 되었다는 말이군요.”

“네. 상호 작용하던 마도구 하나를 다른 곳으로 옮겼으니, 유령의 모습으로 발현하던 효과도 이제 사라질 거예요.”

반세르가 제일 먼저 정답을 짚자, 태량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희라가 머리를 홱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초바늘이 세 시까지 몇 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57, 58, 59.

시곗바늘이 세시를 지났다. 희라도 반세르도, 태량과 유즈리하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 고요한 전시관에 긴장 서린, 그러나 평온한 침묵이 머물렀다. 유즈리하의 눈길이 왕홀과 시계 사이를 오갔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의 큰 손이 2를 지나자, 태량이 길게 숨을 뱉었다.

“반세르 씨, 그 마도구를 다시 이곳으로 가져와 주실 수 있을까요?”

반세르가 태량의 요청대로 네모난 마도구를 특별전시관으로 가져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도구를 감싸던 두꺼운 천을 들치자 마도구의 세 구멍에서 반짝이는 빛이 나타났다.

마도구는 정말 백 번 봐도 멋지고 매력적이야……

앳된 목소리가 특별전시관을 가득 채웠다. 작은 소녀의 형상이 붉은 잔상을 남기며 왕홀을 맴돌았다. 붉은 유령, 아니, 투영된 과거의 이미지를 보는 희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사랑해요, 탐정님.”

희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 * *

“사장님이 말씀해주셨는데, 마도구의 각인 효과는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 갈 거래요. 혹시 모르니 특별전시가 끝날 때까지 다른 전시관에 두겠다고 하셨어요.”

이제 보충 인력도 늘어났고, 유령 현상도 사라졌으니 살맛 난다며 희라가 행복하게 남은 의뢰금을 치르고 떠났다. 평화로운 사무실에서 태량은 책상에 앉아 희라의 의뢰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고, 유즈리하는 며칠간 밤낮을 바꿔 생활한 탓에 눈을 반쯤 내리뜨고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멀리서 시계탑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자, 태량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점심은 먹고 자라고 유즈리하를 깨워야 하나 고민하던 태량이 다음 순간 화들짝 놀랐다.

쾅, 쾅!

똑똑 보다는 강도 있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유즈리하도 눈을 번쩍 떴다. 둘이 잠시 닫힌 사무실 문을 멍하니 응시했다. 먼저 일어선 사람은 유즈리하였다.

“희라 씨가 뭐 두고 갔나?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

절로 나오는 하품을 삼키며 유즈리하가 뚜벅뚜벅 사무실을 가로질러서 문을 열었다. ‘잊으신 물건’까지 나온 유즈리하의 인사가 불시에 끊겼다.

어차피 상관은 없었을 테다. 불퉁해 보이는 표정의 샤르잔은 유즈리하를 쌩하니 지나쳐 태량의 책상 앞으로 빛처럼 다가갔고, 그 사이에 유즈리하에게 건넬 안부가 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여긴 갑자기 무슨 일….”

“이번엔 진짜 이길 수 있었는데! 마도구 효과의 실마리를 거의 다 풀었었다고!”

샤르잔이 울분을 토했고, 유즈리하가 눈을 끔뻑였고, 태량이 이마를 짚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샤르잔은 둘에게서 협조적인 반응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조수를 여럿 동원해 성왕의 레갈리아의 효과는 물론, 고티카 박물관의 모든 마도구 효과를 꼼꼼히 교차 비교하고 있었다느니, 엇비슷한 효과가 있는 마도구에 관한 자료는 전부 찾아봤다느니, 샤르잔의 억울함이 이어졌다. 유즈리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꿈쩍하지 않는 태량을 힐끔 바라보았다. 태량이 대꾸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유즈리하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초대받지 않은 전쟁에 껴서 얻는 건 불똥밖에 없었다.

“그치만 역시 내 라이벌다워. 이번에도 멋지게 해결했다며? 방심하진 마, 다음엔 내가 반드시 이길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샤르잔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는지 매우 개운한 표정을 지었고, 유즈리하는 약간 얼빠진 상태로 태량과 샤르잔을 번갈아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잠이 확 깨긴 했다. 태량은 그런 샤르잔에게 익숙했는지 큰 반응 없이 한숨만 쉬고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봐도 돼. 우리도 점심시간이라 지금 손님은 받지 않으니까.”

“잠깐 기다려봐, 먹구름. 놀랄만한 소식을 하나 들고 왔다고.”

이건 너도 아직 못 들었을걸? 속보 타지도 않은 따끈따끈한 뉴스라고.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음에도 샤르잔은 실망하지 않고 당당히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어젯밤 티티아 박물관에서 성왕의 검이 도난당했대.”

“성왕의 검이?”

“확실해?”

태량과 유즈리하의 관심이 동시에 샤르잔에게 쏠렸다. 샤르잔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럼, 내 정보망을 얕보는 건 아니겠지? 샤르잔이 엄지로 사무실의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오늘 아침에 박물관에서 극비에 오가던 얘기였으니, 아마 곧 뉴스에 속보로 나올 거야.”

“…그래, 소식 고마워. 그런데 이걸 굳이 뉴스보다 빨리 내게 전해준 이유가 뭐야?”

어차피 오늘이 지나기 전에 알게 됐을 텐데. 의아하게 묻는 태량을 뒤로하고 유즈리하가 텔레비전을 켜려 리모컨을 찾아 소파로 돌아왔다. 샤르잔의 발랄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유즈리하의 귀에 꽂혔다.

“누가 훔쳤는지가 중요하거든. 검을 훔친 게 레드캣의 소행이래!”

손끝이 리모컨에 닿기 직전, 유즈리하가 얼어붙었다. 먹구름, 너 레드캣에 꽤 관심 가졌었잖아, 샤르잔의 말이 어쩐지 멀리서 들려오듯 멍했다. 태량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어떤 정신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고 전원 버튼을 눌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뉴스 채널로 고정된 텔레비전에서 심각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태량과 샤르잔, 유즈리하까지 반겨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즈리하는 샤르잔이 무언가 잘못 알아 온 걸 거라고 믿고 있었다. 화면에서 아나운서가 입을 열었다.

-속보입니다. 어젯밤 성왕의 레갈리아 특별전시에 참여한 티티아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성왕의 검이 사라졌다고 대본을 읽는 아나운서의 어조는 잘못 들을 수도 없이 담담하고 깔끔했다.

-검을 훔친 도둑이 본인의 정체를 밝히는 쪽지를 현장에 남기고 갔습니다. 벨스토렌에서 한때 악명높은 이름이었죠.

유즈리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나운서의 입술이 익숙한 과거의 이명을 호명했다.

-레드캣이 벨스토렌에 귀환했습니다.


Written 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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