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님, 붉은 고양이를 잡아주세요!

사건번호 4. 범인은 반드시 현장을 다시 찾는다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새벽이 밝아오는 티티아 박물관 안에 긴장된 정적이 흘렀다. 마크는 바닥에 앉지도,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손톱만 씹으며 텅 빈 전시대 앞을 서성였다. 평소 같았다면 흐릿하게 환해지는 하늘에 한껏 졸음을 참으며 퇴근만 고대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흘러가는 게 두려웠다.

“성왕의 검이 도난당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마크뿐만 아니라 전시관에 대기하던 모든 경비원이 어깨를 움찔했다. 이른 새벽에 숨을 헐떡이며 뛰쳐나온 티티아 박물관의 사장 앞에 마크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섰다.

오늘부로 실직하겠구나. 맞벌이하는 아내가 문득 떠올라 미안해지면서도 미래가 막막해졌다. 하필 제가 근무하는 밤에 절도가 일어난 게 불운이었고, 경비원 중 직급과 경력이 제일 높아 성왕의 검 보안 담당으로 배정된 게 죄였다. 원해서 터진 재앙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책임은 져야 했고, 마크는 운이 없었다.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누가?”

마찬가지로 억울해 팔짝 뛰겠다는 표정을 짓는 티티아 사장을 보며 마크는 홀로 목이 날아가지는 않겠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얻었다. 새파래지는 얼굴이 졸도하기 직전 같아, 마크는 다른 경비원에게 손짓해 의자를 하나 가져오게 한 뒤, 사장을 자리에 앉혔다.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사장이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경찰… 아니, 시장님에게 먼저 연락을, 아니. 경찰 신고부터 해야 하나? 일단 로비에 있는 전화를.”

“경찰엔 조금 전에 신고했습니다. 시장님께 연락드릴 수 있게 전화를 가져다드릴 테니, 우선 심호흡하시고 진정하십쇼.”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사장이 버럭 화를 내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화살받이가 된 마크에게 동료들의 안쓰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마크는 상처받기는커녕, 화도 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앉아서 편하게 기다려주십시오.”

빈말이라는 걸 마크도 알고, 티티아 박물관의 사장도 알고, 시장 비서 안비체오 에스트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정중한 말에 토 달지 않았다. 시장님은 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말을 남기고 안비체오가 밖으로 나가자, 티티아 사장이 접대실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 옆에서 마크는 시장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반으로 허리를 뻣뻣하게 세워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시간이 시간이라 티티아 사장의 전화를 받은 건 기예르 시장이 아닌 비서실 당직을 서고 있던 안비체오 에스트란이었다. 티티아 사장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던 사이, 마크는 신고받고 도착한 경찰을 맞이해야 했다. 정신없이 경찰의 질문에 답하다가 저를 동반해서 오라는 시장 비서의 전언을 듣고 시청까지 불려 왔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와 예상 질문을 떠올리며 답을 준비하고 있자니 접대실 문이 벌컥 열렸다. 티티아 사장과 마크가 동시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슬그머니 시장의 안색을 살폈다.

벨스토렌의 시장, 기예르 파트롱의 얼굴은 흙빛이어서 짧은 은색 머리카락이 흰색에 가깝게 보였다. 제대로 단장할 시간이 없었는지 보라색 정장 소매 끝은 구겨져 있었고 와이셔츠 단추 하나도 빠져있었다. 방송에 나올 때마다 정성 들여 관리하는 콧수염도 축 처져 있었다. 옆의 안비체오는 평소와 다름없는 단정한 용모여서 초췌한 인상이 더욱더 두드러졌다.

하긴, 신경 쓸 여유가 있었다면 경탄할 일이겠지. 마크는 기예르 파트롱의 명성을 떠올렸다. 예술품 애호자이자 희귀 마도구 수집가, 그리고 예술인들의 막강한 후원자. 벨스토렌의 예술 분야에 돈을 아끼지 않아 ‘파트롱’이라는 별칭이 붙어 흔히 성처럼 불리곤 했다. 그런 이의 가장 애지중지하는 보물이 하룻밤 사이 도둑맞았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보게.”

기예르의 둥그런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혼란이 점차 잦아들며 차오르는 분노가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났기에, 티티아의 사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또한 현장에 뒤늦게 나타난 건 마찬가지였기에 횡설수설하는 설명을 듣다 못 한 기예르가 사장의 말을 끊고 마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말해보게. 음산한 어조에 마크가 침을 꿀꺽 삼켰다.

“4시 무렵이었을 겁니다. 성왕의 검이 비치된 전시관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불이 꺼졌습니다. 폐장 이후 순찰용 야간 조명만 켜는데 그것마저 꺼져 처음엔 단순히 전등 오작동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비상등 스위치가 바로 옆에 있어 스위치를 누르고 검부터 확인하려 돌아섰는데.”

당시를 떠올리듯 마크가 말이 없어졌다. 시선을 떨구고 눈동자만 굴리는 모습에 기예르가 속이 터졌는지 목부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그가 분노로 폭발하기 전, 마크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솔직히 저도 혼란스러워서 제가 본 게 맞는지 완벽하게 확신은 못 하지만, 비상등이 켜지자, 전시대 위에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설마하니 그자가 검을 훔쳐 갔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레드캣이 사라졌으니 벨스토렌에 성왕의 레갈리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저도 제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습니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이었습니다.”

마크도 차라리 기예르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의 의무는 본 것을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뿐이었기에 기예르의 희망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럼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나! 무력을 써서라도 막아섰어야지!”

“송구합니다. 저희도 그러려고 노력했으나, 지원을 요청하는 사이 그가 비상등과 화재 장치를 총으로 쏘는 바람에 현장에 혼란이 심했습니다. 마치 저희의 위치를 알고 온 것처럼 도주에 군더더기 없기도 했고요.”

티티아 박물관을 봉쇄하고 샅샅이 뒤졌으나 도둑도 검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예르의 얼굴이 이번엔 정장과 비슷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얼굴은! 도둑의 얼굴은 보았을 것 아닌가!”

기예르가 쓰러지지 않을까 우려가 되긴 했으나, 이번에도 마크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보지 못했습니다. 검은 후드티를 착용해서 정체를 특정할 신체적 요소도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이게 검이 사라진 전시대에 놓여있었습니다.”

마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쪽지를 꺼내 기예르에게 건넸다. 기예르가 낚아채듯 쪽지를 받아 펼쳤다. 유려하게 흐르는 글씨를 본 기예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질려갔다. 입만 뻐끔거리는 기예르의 앞에 물 한 컵을 놓고, 안비체오가 대신 쪽지를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내렸다.

“레드캣이 못다 한 일을 끝내려 돌아왔다.”

* * *

-…라는 내용의 쪽지가 현장에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레드캣이 벨스토렌에 돌아온 걸까요? 이상 8시 뉴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만 홀로 떠들었다. 이어서 도난당한 성왕의 검이 어떤 마도구인지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리자, 유즈리하는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허리를 한번 풀고 도로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었다. 오후 내내 똑같은 뉴스만 보니 질릴 만도 했지만, 뉴스 채널을 고정한 태량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유즈리하 역시 사건에 신경이 쓰였기에 몰래 찾아보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레드캣을 사칭하는 거지.’

물론 레드캣의 유명세가 워낙 높았으니, 그가 잠적한 2년 전부터 사칭범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돈을 노리고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된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유즈리하나 대중이나 뻔한 거짓말에 관심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1급 마도구, 성왕의 레갈리아가 도둑맞았고, 상호 작용 마도구의 특성으로 인해 단번에 이목이 쏠렸다. 현장 경비원은 어떠한 속임수 없이 도둑이 성왕의 검을 잡았다고 증언했다. 성왕의 레갈리아를 화상 없이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왕관을 쓰고 주인 인식을 거친 소유자뿐. 벨스토렌 시민이 아는 레갈리아의 소유자는 단둘이었다.

상타스 마을에서 레갈리아를 사들인 벨스토렌의 시장, 기예르 파트롱. 그리고 수년 전 레갈리아를 훔쳤다가 반환한 괴도 레드캣.

당연히 기예르 파트롱은 범인이 아니었다. 또 당연하게도 전직 레드캣, 유즈리하가 범인이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후자의 사실을 아는 이가 유즈리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마도구를 전부 반환하고 사라졌는데 굳이 돌아와서 같은 마도구를 훔치겠냐고!’

억울한 마음을 속으로만 삼키며 유즈리하가 태량을 흘끗 바라보았다. 태량은 지루해하는 낌새 없이 반복되는 속보를 유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유즈리하는 태량에게 너도 레드캣이 귀환했다고 생각하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태량이 유즈리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텔레비전에서 눈을 돌렸다.

“왜? 하고 싶은 말이….”

-특별보도입니다.

고정된 채널에서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파란 정장을 입은 아나운서가 손에 큐 카드를 들고 또렷한 음성으로 소식을 보도했다.

-방금 벨스토렌의 기예르 시장님께서 전 도시의 탐정사무소에 단체 의뢰를 내거셨습니다. 성왕의 검을 되찾고 레드캣을 체포하는 의인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데요.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유즈리하와 태량의 시선이 텔레비전에 집중됐다. 화면에 기예르 파트롱이 떠올랐다. 얼마 전, 특별전시 인터뷰를 할 때와는 달리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방송을 통해 나오는 분노만큼은 생생했다.

-벨스토렌 시민 여러분. 매우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비통한 마음뿐입니다. 벨스토렌의 귀중한 보물인 성왕의 검이 오늘 새벽 티티아 박물관에서 질 나쁜 도둑에게 도난당했습니다. 2년 전까지 벨스토렌에서 활개를 치던 괴도 레드캣에게 말입니다!

따지자면 벨스토렌의 보물이 아닌 시장의 보물이었으니 평범한 벨스토렌 시민이 무슨 상관이랴 싶었지만, 유즈리하는 팔짱만 끼고 입은 열지 않았다. 쌓인 한탄이 많고 길었는지 방송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존경하는 벨스토렌의 탐정 여러분! 힘을 빌려주십시오. 이번에야말로 레드캣을 잡아, 죗값을 치르게 할 기회입니다. 벨스토렌의 모든 탐정에게 저, 기예르 파트롱이 의뢰합니다. 성왕의 검을 되찾아오는 분에게 1만 달러를, 레드캣을 성공적으로 체포하는 분에게 2만 달러를 보상금으로 지급하겠습니다.

절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정의감 한 톨 없는 사람이라도 돈에 눈이 멀어 기꺼이 의뢰를 승낙할 액수였다. 저 현상금이 걸린 주체가 저와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유즈리하는 휘파람을 불었을 테다. 기예르 시장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파란 정장의 아나운서가 새로운 큐카드를 받아 읽었다.

-의뢰를 승낙하는 탐정 사무소에 소정의 지원금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내일 오전 9시부터 의뢰서와 지원금을 시청에서 수령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면이 반복되던 뉴스로 돌아왔다. 이미 질리도록 들은 내용이라 유즈리하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고 주머니를 뒤적이며 사탕을 찾았다. 채워 넣는 걸 까먹었는지 부스럭거리는 포장지만 잡혀 유즈리하는 부엌에서 야식이라도 찾을 심산으로 소파에서 일어섰다. 태량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자리에 서서 그를 빤히 응시하자 태량이 다시 물어왔다.

“왜?”

“저 단체 의뢰 승낙할 생각이야?”

“응.”

태량이 간단히 대답하고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예상하긴 했어도 달가운 답은 아니었던지라 유즈리하는 애꿎은 입안만 잘근잘근 씹었다. 마땅히 말릴 핑계도 없었기에 더 속이 터졌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받지 말자. 경찰 인턴까지 한 태량에게 헛소리를 넘어선 개소리였다. 굳이 이 의뢰가 아니어도 받을 의뢰도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시장의 의뢰를 마다하고 다른 의뢰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보수 금액만 봐도 그렇고, 탐정으로서의 명성도 이쪽이 얻을 게 많았다. 내가 싫어서 그런데 안 받으면 안 되냐. 이건 자폭이었다.

착실히 쌓아온 과거의 업보를 두고 유즈리하는 조금 후회했다. 그러나 지금 와 그래봤자 처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기에, 결국 돌려 나온 건 뻔한 질문이었다.

“네 반지 때문에 레드캣을 쫓아보려는 거야?”

유즈리하가 탄생반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태량의 눈이 동그래졌다. 태량이 작게 웃으며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거실을 나왔다.

“마무리 못 한 응어리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장님이 이렇게 부탁하시니 벨스토렌 탐정의 의무이기도 해.”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 정의감이면 넌 그냥 경찰을 해도 됐을 것 같아.”

애초에 태량이 경찰이었다면 재미있는 일이든 뭐든 절대로 얽히려 들지 않았겠지만. 유즈리하는 태량이 저녁 운동을 나갈 채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오늘은 같이 나갈래? 예의상 묻는 말에 고개를 젓고 유즈리하는 배웅 겸 현관문 옆에 기대섰다.

“유즈, 진짜 레드캣이 돌아온 걸까?”

잘못 들었나 싶어 유즈리하는 잠시 눈만 깜빡이며 태량을 내려다보았다. 운동화를 신느라 몸을 숙인 태량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저를 의심하는 의도로 묻는다기엔 목소리에 순수한 의문만 묻어 나왔던 터라 유즈리하는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 왜 아닐거라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레드캣은 검 절도 사건의 유력한 의심 후보였다. 레드캣을 암시하는 쪽지가 아니었어도, 도난당한 마도구가 성왕의 레갈리아인 만큼 용의자는 필연적으로 레드캣으로 줄여졌다. 시장은 물론이고 경찰도 레드캣이 귀환했노라 의심치 않았다.

태량이 몸을 일으켜 어깨를 으쓱였다. 유즈리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엔 어떠한 불신도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거지. 2년 전 레드캣에 대해서도, 지금의 레드캣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는 건 많지 않으니까.”

40분만 뛰고 돌아올게. 그 말을 끝으로 태량은 마음이 점차 복잡해지는 유즈리하를 두고 집을 나섰다.

태량이 떠난 후에도 마음이 도통 잠잠해지지 않아, 유즈리하는 결국 침대에 누워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태량이 임시로 쓰라고 빌려준 방은 원래 작업실이었는지 책장과 서랍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반대편에 유즈리하가 쓸 간이침대를 펴놓았다. 사무실과 비교해도 썩 편하지 않을 거라 말하며 태량이 미안해했지만, 유즈리하는 방이나 침대로 인한 불편함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래, 불편한 건 머릿속의 소용돌이였다. 매트리스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 싶었으나 아프기만 하지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을 걸 알기에 유즈리하는 주먹만 쥐었다 폈다. 지금 제게 닥친 문제가 한둘이 아니어서 유즈리하는 간만에 머리를 차분히 굴려보려 노력했다.

첫 번째, 저 레드캣 사칭범은 누구인가. 이걸 알았다면 애초에 나머지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알아낼 방도가 달리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부차적으로 어떻게 그가 성왕의 레갈리아를 만질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의혹도 머릿속에서 떠다녔으나, 이 또한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 저 사칭범은 왜 하필 레드캣을 사칭하고 있는가. 레드캣의 광팬이 레드캣을 사칭하며 자잘한 범죄를 저질렀던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진짜 레드캣과 혼동될 만큼 대담한 절도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광팬이든 뭐든, 유즈리하는 사칭범이 눈앞에 있었다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 테다. 어떤 의미론 경찰이나 탐정보다 사칭범이 제게 더 골치 아픈 문제를 안겨주고 있었다.

세 번째, 태량이 저 사칭범을 쫓도록 둬도 정말 괜찮은가. 사실 이게 제일 신경 쓰였기에 유즈리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 방안을 서성였다. 태량이 다칠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여태 봐온 태량은 두뇌뿐만 아니라 신체 능력도 출중한 탐정이었다. 도리어 그게 걱정이었다. 사칭범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태량이 그를 잡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과정에서 사칭범의 정체가 까발려지면 제 안전도 보장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꼭꼭 숨겨둔 진실까지 수사의 가지가 뻗어나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래서 자신은 어떡할 것인가. 당장 벨스토렌을 떠나는 게 옳은 판단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직 오리아나 할페른에게서 여권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없었지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며칠 모텔에서 지내다가 말없이 떠나면 될 일이었다. 태량은 그의 변덕을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시장의 의뢰를 진행하느라 그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테고, 곧 저 자체를 잊으리라는 것도 기대해볼 만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유즈리하는 이성과 감성을 줄다리기하며 곧잘 감성의 편을 들어주는 낭만주의자였다. 태량과 같이 보낸 짧은 시간이 즐거웠고, 생각했던 것보다 합이 잘 맞아 이곳을 떠날 거란 사실을 잊곤 했다.

유즈리하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를 마주 보는 책장에 태량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있었다. 탐정 시험에 합격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인 듯, 태량은 합격증서를 들고 부모님 사이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생소했던 유즈리하는 잠시 그 사진을 바라보다 침대에 도로 드러누웠다.

“저렇게 사이좋아 보이니 선물 받은 탄생반지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나였으면 받은 날에 팔아버렸겠다. 받기나 했으면 말이야…. 태량이 별로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라고 했지만, 간식값 정도는… 가만. 반지 하나 있지 않았던가.”

유즈리하는 그대로 몸을 굴려 엎어진 상태로 침대 밑에서 가방을 꺼냈다. 몇 분간 손을 넣어 뒤적거린 끝에 유즈리하의 손에 나무상자가 잡혔다. 상자를 오래 뒤질 필요도 없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반지에서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특수한 처리 때문에 빛이 나고, 안쪽에 숫자 네 개, 문구 하나가 새겨져 있고. 탄생반지는 맞는 것 같은데, 이걸 내가 왜 가지고 있더라.”

반지를 허공에 던지고 받고를 반복하던 유즈리하의 눈에 접힌 신문 조각이 들어왔다. 과거의 업적을 대서특필한 기사를 보자마자 희미한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성왕의 레갈리아를 전부 훔치고 마지막으로 성왕의 검을 손에 넣은 밤. 저를 쫓는 경찰을 따돌리고 돌아가던 중 골목에서 빛나던 반지를 보고 신기해하며 주웠었지. 모든 마도구를 반환한 후에도 이 반지는 여전히 제 상자 안에 머물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살펴봐도 빛나는 것 외에 마도구다운 효과가 없어 값져 보이지도 않았고, 훔친 것도 아니라 돌려줘야 할 대상을 알지도 못했다. 몇 주가 지나도 빛나는 반지가 도난당했다는 기사가 뜨지도 않아, 유즈리하는 레드캣으로 활약했던 시간을 추억할 겸 반지를 기념품 삼았다. 그리고 반지는 상자 안의 다른 기념품과 같이 빠르게 잊혔다.

여기까지는 유즈리하가 크게 신경 쓸 구석이 없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반지를 잡고 고민에 잠긴 이유는 조금 달랐다.

“레드캣의 마지막 절도 사건이라 알려진 성왕의 검 도난 당시, 현장에서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레드캣이나 성왕의 레갈리아에 관한 뉴스를 보면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유심히 보게 되네.”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악의적인 운명의 장난이었다. 유즈리하는 반지를 노려보다 전등 빛에 반지 안쪽을 비췄다. 아무리 각도를 바꾸어도 네 숫자는 변함없었다.

‘0731… 생일 엽서 얘기가 나왔을 때 분명 태량의 생일이 7월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게 진짜 태량이 잃어버렸다는 탄생반지일까? 유즈리하가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기도 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유즈.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는 단순한 결단을 내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즈리하가 방문을 박차고 2층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태량이 신발을 벗다가 동그래진 눈으로 반쯤 계단 난간에 매달린 유즈리하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격한 환영이라니, 무슨 일이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이성이 반지를 꺼내는 손을 늦게나마 따라잡았다. 물어보는 것까진 좋은데, 반지를 어떻게 찾았다고 설명하지?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길 가다가 주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에서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는 건 더욱더 말이 안 됐다. 2년 전 레드캣의 절도 현장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평범한 시민인 척하는 제가 들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지? 반대로 레드캣이 반지를 갖고 있을 확률이 그보다 낮을까?

유즈리하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태량이 갑작스레 조용해진 그를 의아하게 응시했다.

“왜 그래? 질문을 까먹었어?”

“그게… 맞다, 우리 내일 의뢰서하고 지원금 받으러 몇 시쯤 시청에 가?”

그거 물어보려고 뛰어온 거야? 태량이 피식 웃고 바람막이를 벗어 거실 입구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태량이 등을 돌린 사이 유즈리하는 반지를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9시에 맞춰서 가면 사람 엄청나게 몰릴 테니까, 사무실로 먼저 출근했다가 점심 이후에 가자. 그쯤이면 인파가 대충 빠졌을 거야.”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이더니 너도 레드캣 의뢰에 관심이 생겼나 봐? 태량의 지적에 평소 같은 장난스러운 대꾸를 간신히 흉내 내 의심을 덜고, 유즈리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계단을 올랐다.

‘물어볼 기회는 나중에도 있을 테니, 확실하지 않은데 굳이 당장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어설픈 변명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반지가 들어간 주머니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 * *

점심 직후의 시청 앞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다만 태량의 추측이 빗나가진 않았는지, 의뢰서를 발급하는 담당 부서 직원들은 흡사 전쟁을 거친 것처럼 얼굴이 핼쑥했다. 태량이 신분증과 탐정 자격증을 내밀고 입을 열기도 전에 커피를 생명수처럼 빨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의뢰서 받으러 오신 탐정님이시죠? 신분증 확인되셨고요, 의뢰서 바로 출력해드리겠습니다. 지원금 50달러 동봉되었고요.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연락 가능한 번호도 같이 적혀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시라도 빨리 태량과 유즈리하를 내보내고 다시 휴식을 취하겠다는 의지가 보여, 둘은 시간 끌지 않고 서류를 받아 3층에 있는 부서를 나왔다.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을 내려오던 유즈리하의 시선이 방금 도착한 로비에 못 박혔다. 붉은 눈이 유즈리하를 마주 보았다.

“태량 탐정님과 유즈리하 조수님 아니십니까?”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알아보는 즉시 태량을 끌고 떠나려 했으나, 남자가 예리한 시선으로 둘을 아는 체하는 게 먼저였다. 유즈리하로선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유즈리하 옆에서 태량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에스트란 씨.”

“네, 안녕하십니까. 의뢰서를 받으러 오셨나 보군요.”

태량이 탐정임을 알고 있으니, 손에 들린 의뢰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측할 법했다. 의뢰가 생겨 우리도 바쁘고 그쪽도 바쁠 테니, 이만 가자고 재촉하려던 유즈리하의 계획에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아는 사람인가, 안비체오?”

화면 너머로만 듣던 목소리였지만 몰라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도, 벨스토렌 시민으로서 그의 얼굴을 못 알아보진 못했을 터였다. 기예르 파트롱은 안비체오보다 키는 작았지만, 체격이 훌륭하고 옷매무새가 화려해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유즈리하가 슬쩍 눈을 피하고 태량이 머리를 숙여 시장에게 인사하는 동안 안비체오가 그들을 소개했다.

“성왕의 왕홀과 관련된 유령 사건을 해결해주신 태량 탐정님과 유즈리하 조수님이십니다. 이벨리 아가씨도 많은 도움을 받으셨고요. 어제 보고서를 드렸습니다.”

아, 물론 기억하네. 이분들이 그 유능한 탐정이셨구나. 시큰둥하던 기예르의 눈빛이 단번에 밝아지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태량의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했다.

“안 그래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하필 오늘 일정이 꽉 차 있군요. 혹시 제 의뢰를 승낙하러 시청에 방문하셨나요?”

저 호의적인 시선을 보아하니 태량이 도난당한 성왕의 검 문제를 해결할 실력자이리라 기대하는 듯했다. 부담스러울 만도 했으나 태량은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시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탐정분들께 이 도시가 늘 신세 지고 있지요. 직접 사건에 관해 이야기해드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이러면 되겠구나. 안비체오.”

예. 부름에 공손하게 답한 안비체오에게 기예르가 손짓하고 다른 비서를 곁으로 부르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나머지 일정은 빼줄 테니 이분들에게 사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좀 해주게. 안비체오도 브리핑 때 자리에 있었으니, 정보를 제공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탐정님이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가능한 선까지 챙겨드리고.”

유즈리하가 확 찌푸려지는 미간을 간신히 펴는 사이 기예르가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바쁘게 로비를 떠나갔다. 안비체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눈짓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시장님의 요청대로 잠시 이야기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며 태량은 선선히 승낙했고, 유즈리하는 불퉁한 표정을 숨기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접대실 커피는 맛있었기에 안비체오가 절도 현장에 있던 경비원에게 들은 보고를 태량에게 세세히 전해주는 동안 유즈리하는 말없이 따듯한 커피를 홀짝였다. 안비체오의 말이 끝나자, 태량이 눈썹을 모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레드캣이 총을 사용했다고요?”

태량의 의문은 타당했다. 벨스토렌이 도적의 도시라는 악명이 있다지만, 총기 규제가 엄격해서 현직 경찰 또는 탐정이 아닌 이상 소지 허가가 쉽게 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벨스토렌 범죄자가 총기를 소지했던 경우는 드물었고, 옛날의 레드캣 또한 총기류를 일절 쓰지 않았다.

‘괜히 총을 훔쳐서 쓰다가 걸리면 추적당할 명분도 늘어나고, 배로 귀찮아지니까.’

이런 불건전한 이유가 따로 있긴 했지만 말이다. 골이 아파지는 기분에 유즈리하가 반쯤 식은 커피를 마저 들이켜고 툴툴댔다.

“어디 탐정이나 경찰이 이중생활 하는 거 아니야? 웬만한 하급 마도구 훔치는 것보다 총 훔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경찰은 공직이니만큼 큰 범죄를 숨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탐정은 시험 응시 자격 조건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우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범죄 이력 조회를 한다고 해도,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태량이 중얼거리고 반대편에 앉은 안비체오를 바라보았다.

“도둑이 남기고 갔다는 쪽지를 볼 수 있을까요?”

마침 경찰본부에 보낼 사본을 미리 만들어놨다며 안비체오가 공책 크기의 종이에 복사된 쪽지를 태량에게 건넸다. 여러 장 있으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태량은 감사를 표하며 쪽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유즈리하도 몸을 기울여 깔끔한 손 글씨를 감상했다.

“레드캣이 못다 한 일을 끝내려 돌아왔다…. 마도구 절도 사건은 반환과 동시에 끝난 거 아니었나? 못다 한 일이 대체 뭔데?”

결국 유즈리하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볼멘소리를 입 밖으로 냈다. 조금 늦게 괜한 소리를 했나 태량의 눈치를 봤지만, 의외로 태량이 유즈리하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대로 이상하긴 해, 유즈. 2년 전 레드캣과 최근 나타난 레드캣이 같은 인물이라면 행동 패턴이 모순적이지. 체포되어 강제로 마도구를 반환했다면 모를까, 레드캣이 본인 의지로 반환한 마도구를 지금 와서 다시 탐낼 이유가 있을까?”

태량이 고민하듯 검지로 턱을 쓸었다. 유즈리하는 태량의 인정에 기뻐해야 할지 제 안위를 걱정해야 할지 몰랐지만, 말을 꺼낸 건 저였기에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의문을 표한 건 안비체오 에스트란이었다.

“성왕의 검을 훔쳐 간 도둑이 레드캣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쪽지에 레드캣이 못다 한 일을 시행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본인이 레드캣이란 뜻과 동일하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레드캣을 언급한 데엔 이유가 있을 테고, 뭐든 그를 체포해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전까진 백 퍼센트 확신하진 못하죠.”

레드캣의 정체에 대해선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요. 태량의 논리적인 어조에 안비체오가 감탄사를 내고 다리를 꼬았다.

“저번 활약에도 생각했지만, 정말 요행으로 젊은 나이에 탐정 시험에 합격하신 게 아니셨군요. 몇 년의 경험을 쌓은 탐정도 그런 예리한 시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입니다.”

칭찬받는 사람이 임시로나마 제 상사라고, 유즈리하는 괜스레 뿌듯해졌다. 태량도 살짝 미소 지어 보답하고 쪽지에 시선을 주었다.

“레드캣의 정체는 당장 알아내진 못하지만, 다음 목표는 알 것 같네요.”

나머지 레갈리아 말입니까? 안비체오가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고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성왕의 검을 훔쳐 간 만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던 터라 유즈리하도 끼어들어 반박하지 않았다.

“저희, 그러니까 시장님과 저도 비슷한 추측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나머지 레갈리아의 경비를 강화하고 경찰의 협조도 요청한 상태입니다.”

운이 좋으면 현장에서 레드캣을 체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탐정님 말씀대로 그가 진짜 레드캣인지, 아니면 사칭범인지 자백을 받아낼 수 있겠지요. 안비체오가 싱긋 웃었다. 안경 뒤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 * *

안비체오의 장담이 무색하게 다음 속보는 그로부터 이틀 지난 일요일 아침에 나왔다. 레드캣 체포 소식은 아니었다. 9월의 시작을 두 번째 성왕의 레갈리아 도난으로 연 벨스토렌은 여러모로 시끌벅적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같은 내용의 보도를 반복해서 내보냈고, 어디를 가나 사라진 레갈리아 이야기밖에 들리지 않았다.

-9월 1일 새벽, 하몬드 박물관에서 레드캣으로 추정되는 도둑이 성왕의 보주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체감상 백 번도 더 들은 뉴스가 점심을 먹으려 식당에 들어간 태량과 유즈리하를 반겼다. 자리에 앉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할 일이 없어 둘의 시선은 구석에 있는 화면에 집중되었다. 익숙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화면 너머에서 그들을 마주 보았다.

-절도는 새벽 4시경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왕의 검 절도 이후로 경비가 강화되었지만, 레드캣은 마치 사전에 정보를 숙지하고 온 것처럼 빈틈을 타 보주를 훔쳤다고 당시 근무했던 경비원이 증언했습니다. 현장의 기자에게 연결하겠습니다.

식당 직원이 눈앞에 따끈따끈한 덮밥을 놓자, 유즈리하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숟가락을 들었다. 포슬포슬한 밥 위에 올려진 계란과 닭고기의 감칠맛이 식욕을 돋웠다. 유즈리하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식사를 시작한 태량은 시끄러운 주변에도 불구하고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해서 현재 하몬드 박물관의 전시를 중단하고 경찰과 탐정이 현장 수색을 진행 중입니다. 전과 비슷하게 쪽지 하나가 보주가 전시되어 있던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고 하는데요. 보도 허가가 내려왔으니, 내용을 함께 보시죠.

늦게 일어나 끼니를 대충 때운 까닭에 고개를 거의 밥그릇에 박고 있던 유즈리하도 새로운 소식에 숟가락질을 멈추고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안비체오가 보여준 첫 번째 쪽지와 유사한 유려한 필체가 화면에 뜨고, 기자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내렸다.

-레드캣이 벨스토렌에 전한다. 이것은 도난이 아닌 정당한 주인에게 귀물을 되돌려주는 것일 뿐이다. 힘없는 마을에서 마도구를 탈취해간 기예르 파트롱이야말로 진짜 도적이 아니던가? 도적의 도시 벨스토렌은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라.

뉴스를 경청하느라 조용해졌던 식당이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정말 레드캣이 맞았나 봐. 그런데 탈취라니 무슨 얘기지? 레갈리아는 시장님이 거래를 통해 사들인 것이 아니었던가? 비슷한 의혹을 품은 건 유즈리하와 태량도 마찬가지였기에 둘은 밥을 먹다 말고 시선을 교환했다.

‘저번에 레갈리아 자료에서 매매계약서도 봤던 것 같은데?’

유즈리하가 뭐라 물어보려 입을 열었으나 옆 테이블에서 주문을 소리치는 손님 때문에 목소리가 묻혀 인상을 썼다. 태량이 문을 눈짓하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오후에 하몬드 박물관의 현장을 가보기로 했었으나, 새롭게 주어진 정보가 심상치 않아 태량은 계획을 조금 미뤘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덮밥을 다시 입속에 밀어 넣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태량은 책상으로 직진해 서랍을 열고 붉은색 파일을 꺼냈다. 태량이 텔레비전까지 트는 동안 유즈리하는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태량이 파일을 들고 그의 옆에 앉아 뉴스에 눈을 고정했다. 때마침 쪽지가 화면에 띄워져 있어 태량은 빈 종이에 내용을 적고 안비체오에게서 받아온 첫 쪽지의 복사본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글씨가 똑같네.”

유즈리하의 감상에 태량이 동의했다. 같은 사람이 썼을 확률이 높지. 쪽지와 화면을 번갈아보다가 태량이 손에 든 펜으로 파일을 툭툭 건드리며 사색에 빠졌다. 한참 후에 태량의 중얼거리는 말이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들었다.

“2년 전의 레드캣과 동일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추측이 틀렸던 걸까.”

나직한 목소리여도 선명하게 들려왔기에, 유즈리하는 눈을 한 바퀴 굴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쪽지에서 자신이 레드캣이라 못 박긴 했지.”

“하지만 동일 인물이라고 가정하면 모순점이 많아. 오히려 두 번째 쪽지로 위화감이 늘기도 했고.”

모순점? 유즈리하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유즈리하야 화제의 당사자라서 레갈리아를 훔친 레드캣이 사칭범이라 확신할 수밖에 없었어도, 태량이 왜 비슷한 추리를 했는지 궁금했다. 태량이 종이를 뒤집고 빈 공간에 요지를 적으며 동시에 차근히 이유를 꼽았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2년 전의 레드캣은 총기를 비롯한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어. 도난당한 마도구는 두 손이 넘어가는데 마도구를 지키던 경비원 중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지.”

그거야 유즈리하 본인이 경비원들에게 유감이 없기도 했고, 쓸데없는 마찰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도구를 훔치는 괴도라는 이명은 괜찮았어도,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라는 악명은 사양이었다.

“그리고 쪽지 자체가 모순적이기도 해. 2년 전 레드캣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 적이 없었어. 우린 아직도 레드캣이 무슨 이유로 마도구를 훔쳤고, 또 반환했는지 모르잖아? 그런데 최근에 제가 레드캣이라 주장하는 도둑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마도구를 훔치는지 대중에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지. 그것도 상당히 정치적인 방면으로.”

“시장을 저격하는 부분 말이야?”

힘없는 마을에서 마도구를 탈취해간 기예르 파트롱이야말로 진짜 도적이 아니던가. 유즈리하가 쪽지의 내용을 되짚었다.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이 시장 선거잖아. 기예르 시장님이 인기도 있고 실적도 좋으니 재임 가능성이 높은데, 이 시기에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되면 치명적이니까.”

정치엔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던 유즈리하는 그제야 쪽지가 미칠 영향을 온전히 이해했다. 시장이 이 사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마도구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기예르 파트롱과의 인터뷰를 재방송해주는 뉴스 채널과 태량이 메모하던 쪽지를 한 번씩 보고 유즈리하가 추측을 내뱉었다.

“그럼, 이 레드캣이 시장님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는 얘기일까?”

“최소한 시장님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은 건 확실하고, 벨스토렌 도시 자체에 원한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지. 그 이유도 쪽지에 적혀있었고.”

표적이 된 마도구가 성왕의 레갈리아인 걸 보면 상타스 마을과 관련된 사람이 아닐까 싶어. 최근 레갈리아의 출처에 관한 자료를 빠삭하게 꿰어야 했던 태량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유즈리하도 그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벨스토렌 시민이 간과할 법한 사실 하나를 짚어냈다.

“벨스토렌 바깥엔 기예르 시장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 내가 전에 말했지? 유명한 마도구를 어떤 이유에서든 잃고 망한 마을이 한둘이 아니라고.”

“꼭 상타스가 아니더라도, 레드캣이 벨스토렌 출신이 아닐 확률이 높겠네.”

예리한 추측이야. 태량이 텔레비전에서 눈길을 돌려 유즈리하를 응시했다. 태량의 관심은 싫지 않았지만, 주제가 주제였던 터라 유즈리하는 조금 긴장했다.

“난 벨스토렌에서 나고 자랐다 보니 도시 바깥의 시야에 대해선 너만큼 잘 알지 못해서 그런 방면으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유즈, 혹시 더 추측가는 게 있으면 얘기해줄래?”

적극적으로 물어보다가 태량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 유즈리하의 눈치를 살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유즈리하에게 태량이 사과했다.

“미안해. 무신경한 질문이었지. 네 고향 마을을 그렇게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그건 정말 괜찮은데.”

빈말이 아니었다. 유즈리하는 고향 마을에 큰 애착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타스가 몰락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도케오가 같은 이유로 유령 마을이 되었음에도 기예르 시장을 딱히 원망하진 않았다.

하지만 별개로 유즈리하는 기예르 파트롱을 좋아하지 않았다. 타의로 제 것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유즈리하에게도 썩 유쾌하지 않던 까닭이었다. 그랬기에 유즈리하는 첫 절도 타깃을 도케오 마을의 귀물이었던 붉은색 고양이 가면으로 정했다. 추가로 그 가면 때문에 유즈리하는 레드캣이란 이명을 얻게 되었고, 가면을 제외한 외관 특징을 알아보지 못하게 해주는 마도구의 효과 덕에 레드캣의 정체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가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유즈리하가 인상을 썼다. 레드캣 사칭범이 그 가면을 훔쳤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다른 마도구와 마찬가지로 유즈리하는 잠적하기 전, 고양이 가면도 반환했었다. 레드캣의 가면으로 유명해져 벨그란데 박물관에 잠시 전시되었다가 시장의 눈치를 사서 기예르의 개인 소유로 돌아갔다고 했었지.

박물관에 내놓지도 않은 자기 소유의 마도구가 사라졌다면 기예르 파트롱이 여태 가만있을 리 없었다. 최소한 단체 의뢰를 내걸며 방송에서 언급이라도 했겠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자니 태량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정말 미안. 기분 많이 나빴어?”

“아, 아냐. 내가 미안. 잠깐 딴생각하느라.”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유즈리하는 주제를 돌렸다. 에스트란 씨가 레드캣의 외형에 관해 얘기해준 부분 기억나? 태량이 멈칫했다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붉은색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고,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고 했지. 그게 왜?”

그게 문제였다. 유즈리하가 대충 어깨를 으쓱이고 깜빡 잊어서 물어봤다고 둘러대고는 팔짱을 꼈다. 검은색 후드티. 레드캣이 착용한 가면이 도케오 마을의 마도구였다면 옷이 특정 잡힐 리 없었다.

‘레드캣 행세하면서 가면을 훔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걸까, 아니면 훔치지 못한 걸까.’

이 의문은 태량과 공유하지 못했다. 가면 마도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태량은 그 가면의 출처를 알게 될 터였고, 제 출신 마을이 어디인지 아는 그에게 이 정보를 알려주기엔 너무나도 위험했다.

진실을 계속 숨기는 게 불가능하단 걸 유즈리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적기는 아니라고 유즈리하는 자신을 또다시 설득했다. 레드캣 사칭범을 잡는 의뢰만으로 태량은 충분히 바쁠 것이었다.

“우리 슬슬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몬드 박물관으로.”

그래서 나중에 기회는 올 것이라, 유즈리하는 회피했다.

* * *

하몬드 박물관 바깥에는 안전 테이프가 붙어있었고, 경찰은 물론 조사하러 온 탐정까지 쫙 깔려있어 범죄 현장이었던 게 역력히 드러났다. 여기 사장에게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겠군. 유즈리하가 건조하게 감상하고 경찰이 지키고 선 박물관 입구를 훑어보다 눈을 깜빡였다. 자주 본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태량, 저기 페라노 경감님 아니야?”

태량의 시선도 돌아갔다. 짙은 갈색 피부에도 선명히 보일 만큼 눈가에 그늘이 져 있었고, 경찰모 아래 회색 머리가 푸석푸석해 보였지만 페라노 경감이 분명했기에 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바쁘신 것 같으니, 인사는 다음에 할까.”

태량의 배려는 빛을 보지 못했다. 입구를 지키던 경찰에게 의뢰서를 보여주고 들어가려던 차에 둘이 페라노 경감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너도 의뢰에 참여했구나. 그럴 줄 알았지. 워낙 올곧고 책임감이 강하니 말이야. 유즈리하도 오랜만이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페라노 경감은 정말 바빠 보였기에 둘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감식은 다 끝났으니 필요한 만큼 둘러봐도 괜찮고, 출입 시에만 의뢰서를 보여달라고 하며 다른 곳에서 부르자 그가 바삐 사라졌다.

보주가 전시되어 있던 홀에는 감식이 끝나서 그런지 경찰보다는 탐정이 더 많았다. 텅 빈 중앙 전시대 근처에는 사람이 북적이고 있어 태량과 유즈리하는 한 발짝 물러서서 전체 현장부터 둘러봤다.

“창문이 있네.”

태량의 말대로 천장과 가까운 창문에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전시관 층고가 어림잡아 5미터 이상은 되어 유즈리하는 머리를 젖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면적이 큰 창문은 아니었지만, 기어 올라갈 수만 있다면 평균 체격의 성인이 몸을 비집고 나갈 정도는 되었다. 근처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간혹가다 창문에 시선을 던지는 탐정 몇 명이 보였다.

“경비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들어와서 보주를 훔쳐 갔다는데, 저 창문을 통해서 들어왔을까?”

“아마 아닐걸. 더 쉽게 들어올 방법이 있는데 굳이 벽을 타는 수고를 들이진 않았겠지.”

“왜 그렇게 확신해?”

해봤으니까. 당연히 가장 쉽고 솔직한 답변은 제외했다. 유즈리하는 몸을 돌려 비상 출입구와 환풍구를 가리켰다. 별생각 없다는 표정이 말실수한 당황을 잘 숨겨주길 바랐다.

“비상 출입구가 창문보다 드나들기 쉬울 테고, 환풍구도 가만 보면 잡고 올라갈 데가 많잖아? 들어오면서 본 건물 외벽은 유리라서 타기 쉽지 않아 보였고.”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즈리하 역시 창문을 포기하고 비상구를 통해 들어와 환풍구로 하몬드 박물관을 누볐었다. 그 내막을 모르는 태량은 그저 유즈리하의 관찰력을 칭찬했다.

“아까도 그렇고 네 시각이 큰 도움이 되네. 계속 벨스토렌에 살 거면 탐정 시험에 응시해보라고 권유했을 텐데. 탐정의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정확하게 따지자면 괴도의 재능이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와 적이 일치하니 레드캣을 잡는 데 유즈리하가 그 어떤 탐정보다 뒤처질 리 없었다. 비록 사칭범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괴도는 괴도였고, 그의 행동 범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 제가 탐정이 된다니, 유즈리하가 생각하기에도 모순이 따로 없었다.

“칭찬만 감사히 받을….”

“먹구름!”

귀에 익은 호명에 태량의 얼굴이 설핏 찌푸려졌지만, 유즈리하는 타이밍 좋게 대화를 끊어준 샤르잔에게 감사 인사를 백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수를 이끌고 다가오는 샤르잔에게 태량이 단호히 말했다.

“이번엔 대결 받아줄 생각 없어.”

“어차피 단체 의뢰잖아? 제대로 된 대결이 안 될 테니 나도 그 용건으로 온 건 아니야.”

조수 씨도 안녕하세요! 넉살 좋은 인사를 유즈리하가 활짝 웃으며 받았다. 대놓고 절하진 못하더라도 호의를 호의로 받아야 하진 않겠는가. 샤르잔이 의도적으로 베푼 호의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여기 온 거 보니까 너도 시장님의 의뢰 받았나 보네.”

“그럼! 레드캣에 관심 없는 벨스토렌 탐정이 어디 있어? 설령 관심 없다 하더라도 참여만으로 지원금도 나오고, 운 좋게 레드캣을 잡으면 후한 보상금도 주는데 마다할 탐정이 없지.”

샤르잔이 해맑게 웃었다. 유즈리하는 제발 마다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웃음 뒤로 감췄다. 불행히도 유즈리하 생각엔 주변에 레드캣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뿐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배경 조사를 좀 해봤는데. 레드캣이 벨스토렌이 아닌 다른 도시나 마을 출신 아닐까?”

그리고 그 어렵다는 탐정 시험에 합격한 이들인 만큼, 지나치게 조사에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순순히 잡혀주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유즈리하도 사람인지라 옆에서 온통 그에 관해 떠들어대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너도 그때 상타스 자료 같이 봤잖아. 쪽지 내용을 보니까 벨스토렌 부흥과 맞물려 몰락한 마을 출신일 확률이 높을 것 같지? 조수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괴도가 된 동기는 둘째치고, 결론적으로 추측이 맞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즈리하가 애매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우리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렇죠? 저번에 조수 씨가 얘기했던 대로 마도구에 의존하던 마을 사람이 어떤 경위로든 마도구를 가져간 벨스토렌에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고요. 네 생각은 어때, 먹구름?”

앞으로 생각을 두 번쯤 거치고 말해야겠다고, 유즈리하는 이뤄지지 않을 다짐을 했다. 샤르잔의 찌름에 조용히 있던 태량이 어깨를 으쓱였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태량이 대화를 받아줄 기미가 보이자, 샤르잔이 눈을 반짝였다. 대결은 글렀으니, 정보 교환만이라도 할 심산인 듯싶었다.

여기도 레드캣, 저기도 레드캣 이야기였다. 얼굴에 철판 까는 것쯤은 익숙한 유즈리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즐길 성격까지는 못 되었다. 샤르잔이 쉴 새 없이 레드캣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다 잠시 숨을 돌린 사이, 유즈리하가 태량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여기 사람이 안 빠질 것 같으니까, 밖이나 한번 둘러보고 있을게.”

멀리 가진 않을 테니 이따 정문에서 보자! 태량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샤르잔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기에 태량은 얼떨결에 고개만 끄덕였다. 태량만 버리고 가는 기분이 들어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신경줄이 전부 닳기 전에 탈출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쯤 되면 경찰에서 가짜 레드캣을 내세워 열받은 유즈리하를 유인하려는 속셈인지 의심되었다. 입 안을 잘근잘근 씹으며 유즈리하는 레드캣을 찾는 탐정이 가득한 전시관을 물 흐르듯 빠져나왔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안식처는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유즈리하는 약간 허망해져서 앞에 선 페라노 경감을 바라보았다. 하몬드 건물을 반 바퀴도 돌기 전에 유즈리하는 페라노 경감과 마주쳤고 그대로 붙잡혔다.

태량을 버리고 나온 죄를 이렇게 치르나 보다. 경감님 바쁘시다면서요. 버릇없는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유즈리하는 페라노 경감이 늘어놓는 태량의 얘기에 반쯤 영혼을 빼놓고 귀 기울였다. 레드캣에 관한 토론에 끼는 것보다는 태량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게 백배 천배는 나았다.

“…도움받은 옆집 이웃들도 태량을 정말 좋아해 줬지. 크게 헤아리는 그릇이 되라는 이름이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아이야.”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냥 흘려듣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유즈리하의 정신이 현실로 퍼뜩 돌아왔다. 페라노 경감이 친절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옆집 이웃들도 태량을 좋게 봐주었다는 이야기 말이니?”

“아뇨, 이름이요. 그거 태량의 이름 뜻인가요?”

“아하, 이름 말이구나. 그렇단다. 크게 헤아려라, 넓은 마음씨로 모든 것을 끌어안을 그릇이 되라는 뜻으로 태량의 부모가 함께 상의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지. 잘 어울리지 않니?”

네, 네.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하면서 유즈리하는 머리에 찬물을 맞은 기분으로 두 단어를 곱씹었다. 크게 헤아려라. 익숙한 단어의 조합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시 태량의 생일이 언제인지 아세요? 얼마 전이라고는 들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몰라서.”

“그러고 보니 지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 7월 31일이었으니까.”

마지막 확인 사살이었다. 크게 헤아려라. 0731. 불명의 탄생반지의 주인을 찾았으나 유즈리하는 기쁘기는커녕 더없이 마음이 심란해졌다. 미룰 핑계가 사라진 탓이었다.

태량에게 이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무슨 일 있니?”

유즈리하가 갑자기 조용해져 페라노 경감이 의아하게 물어왔다. 유즈리하가 빠르게 상념을 떨쳐내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난 지 오래되지 않아서요. 아쉽다는 어투로 대답하자 페라노 경감은 유즈리하를 의심치 않았다.

“내년엔 너도 같이 축하해주면 좋겠구나. 도둑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태량이 오네.”

화제가 틀어지는 바람에 유즈리하는 내년에 아마 벨스토렌에 없을 거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페라노 경감의 말대로 하몬드 정문에서 태량이 걸어오고 있었다. 태량을 반갑게 맞이하려던 유즈리하가 눈썹을 모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침 오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찾으러 가려 했는데, 태량과 같이 있으셨군요, 에스트란 씨.”

“우연히 전시관 안에서 만났습니다. 경감님이 태량 탐정님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는 몰랐습니다.”

저야말로 태량이 시장 비서와 아는 사이인 줄 몰랐다며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유즈리하가 태량의 곁에 다가왔다. 손을 태량의 귀에 닿을락 말락 가져다 대며 유즈리하가 소리죽여 속닥였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온 거래?”

“시장님의 지시로 보주 절도 현장을 확인하러 왔다고 하더라.”

기분 탓인가,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대놓고 그리 말할 수는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얌전히 머리만 끄덕여 인사했다. 안비체오도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페라노 경감도 안비체오를 따라 박물관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유즈.”

“그래서 더 알아낸 거 없… 응? 왜?”

별생각 없이 태량에게 질문하려던 유즈리하가 자신의 목소리 위로 태량의 부름이 겹치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먼저 얘기해! 유즈리하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태량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별건 아니고, 우선 사무실로 돌아가자.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래서.”

어색하게 시선을 피해 앞서나가는 태량을 보며 유즈리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지만, 불평 없이 탐정 거리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을 옮겼다.

* * *

“…그래서 고티카 박물관에서 특별전시를 중단하고 내일 저녁 왕홀을 회수하기로 했대.”

늦은 오후 햇빛이 내리비치는 사무실 안에서, 태량이 안비체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유즈리하에게 전달했다.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개별포장된 쿠키 포장지 하나를 뜯어 우물거렸다. 견과류와 초콜릿이 뒤섞인 단맛이 혓바닥 위로 퍼지자 복잡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검이 도난당했을 때 다른 레갈리아를 회수해갔다면 보주도 무사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보니 성왕의 왕관은? 유즈리하가 찬찬히 손가락을 꼽다가 의문을 제기하자 태량이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물어볼 틈이 없었는데, 왕관에 관한 얘기는 없던 거로 봐서 지켜볼 생각인가 봐. 왕관은 최상급 경비가 있는 벨그란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잖아? 시장님의 개인 경호 못지않게 뚫기 어려울걸.”

어렵긴 해도 마음먹으면 못 할 건 없었지만, 유즈리하는 토 달지 않았다. 어차피 레드캣 사칭범이 그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설령 도난당한다고 해도 그에겐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쿠키 포장지를 뜯으며 유즈리하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전시 조기 중단이라니, 이벨리가 엄청나게 아쉬워하겠네.”

그러게. 지금 시장님만큼 침울해하고 있을지도. 꼬마 아가씨의 마도구 사랑을 떠올린 태량이 혀를 차고 작은 수첩을 꺼내 일정을 적어넣었다.

“왕홀을 이르게 회수해간다는 이야기는 우선 경찰에게만 했대. 레드캣이 어디서 소식을 듣고 움직일지 모르니까. 우리만 예외로 시간이 괜찮으면 회수 시각에 맞춰 와서 현장을 지켜달라고 하더라.”

“굉장한 예외긴 하네. 그런데 에스트란 씨는 왜 그렇게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찝찝한 기분에 유즈리하가 쿠키를 삼키고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구겼다. 손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파에 기대어 서 있던 태량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유즈리하를 불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유즈.”

—따르릉.

기가 막힌 타이밍에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태량이 반사적으로 책상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입에 익은 소개를 했다.

“네, 태량 탐정사무소입니다.”

창문을 열어놓아 바깥이 시끌벅적했기에 유즈리하가 앉은 곳에서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 의뢰인이면 태량이 나중에 어련히 의뢰 내용을 설명해주겠거니 싶어서 신경을 끄고 커피나 타려던 유즈리하를 태량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유즈, 너한테 온 전화야.”

“나한테?”

태량의 사무실 번호를 통해서 저한테 올 만한 전화가 있었던가 되짚어봐도 걸리는 것 하나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떨떠름하게 태량에게서 수화기를 받았다. 여보세요, 인사에 경계심이 물든 걸 눈치챘는지 전화 반대편에서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려있어, 유즈리하 조수? 어쩐지 집 전화도 버리고 잠적했더니만.

몇 번 들어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벨스토렌에 사는 이라면 시장만큼이나 착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의도 없이 정곡을 찌른 농담에 입술만 애매하게 끌어올리고 유즈리하가 어깨에서 힘을 뺐다.

“오리아나 할페른 씨. 연락이 올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죄송해요. 얘기가 좀 긴데 월셋집에서 계획보다 빨리 나오게 되었거든요.”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어. 집 번호로 전화했더니 주인이 받으면서 월세 살던 청년이 이사 갔다고 했거든. 그래서 이걸 어떡할까, 하다가 태량 탐정이 네 새 거주지를 알 것 같아서 물어물어 사무실 번호를 알아내서 전화했지.

마침 같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찾기 번거로웠다며 유즈리하에게 짜증 낼 법도 했건만, 오리아나는 배포 있게 내색하지 않았다. 오리아나 할페른을 절대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던 유즈리하로선 천만다행이었기에 그도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무튼, 네 여권이 거의 준비되었다고 연락이 왔어. 기간이 아슬아슬했지만, 한 달 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지켰네! 사흘 후에 내 저택으로 받으러 올 수 있어?

“네, 물론이죠. 그럼, 목요일에 찾아갈게요. 감사합니다.”

유즈리하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태량에게 돌려 빙긋 웃었다. 사흘 후에 여권 받으러 갈 수 있대! 태량도 작게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 요 한 달간 네가 있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떠나면 많이 허전할 것 같아.”

유즈리하가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나도 조수 일에 슬슬 익숙해지는 것 같았는데. 어때, 조금 더 눌어붙을까? 농담처럼 말하면서 유즈리하는 등을 돌려 끓이려던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망설이는 머리와는 달리 손은 익숙하게 척척 움직였다.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태량 밑에서 조수로 일하며 그를 더 알아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벨스토렌이 레드캣 사칭범으로 인해 더욱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떠나는 게 현명했다. 스릴을 사랑하고 이성보다 감성의 손을 자주 들어주는 유즈리하도 이번만큼은 마음을 다잡았다.

떠날 수 없게 되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전화 오기 전에 뭐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태량이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잊어버렸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생각나면 나중에 말해줄게. 태량이 책상 서랍에서 종료된 희라의 의뢰 파일을 꺼내서 두툼한 고티카 박물관 자료를 책상에 펼쳤다. 유즈리하가 눈썹을 모았다.

“그거 설마.”

“내일 저녁 고티카로 갈 예정이니 복습해야지. 유즈, 넌 이쪽 자료부터 먼저 봐.”

내가 정말 탐정 조수 일을 계속하고 싶은지 시험에 들게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대신 유즈리하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 * *

태량의 집에 돌아온 유즈리하의 무릎 위엔 나무상자가, 손 위엔 빛나는 탄생반지가 놓여있었다. 반지 안쪽의 글씨는 이미 여러 차례 재확인했다. 확신의 단계를 지났으니 이제 유즈리하에게 필요한 건 행동이었다. 어디 가서 행동력 부족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건만, 지금은 왜 이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내려가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네 탄생반지 아니냐고 물어보는 거야. 맞는다면, 태량이 더는 레드캣에 미련 가지지 않을 테니 의뢰에서도 발 뺄 핑계가 생기는 거고.’

꿈 같은 희망이라는 건 유즈리하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찾았다는 말을 태량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책임감 있는 그라면 반지를 되찾았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은 의뢰를 중간에 내팽개칠 리도 없었다.

조금만 덜 올곧아도 좋았을 텐데, 반지를 손안에 굴리며 유즈리하가 입속으로 투덜거렸다. 빈말이자 투정이었다. 애초에 모르는 사람의 여권을 직접 찾아와줄 정도로 책임감 있지 않았으면 둘의 만남은 지나가듯 짧게 그쳤을 테고, 생판 타인이던 의뢰인을 도우려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또한 없었으면 유즈리하는 태량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터였다. 자신과 달랐기에 시작된 호기심이었다.

돌이켜보면 유즈리하가 태량에게 끌리게 된 건 필연이었다.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어 유즈리하는 시인했다.

단지 태량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있는 그대로의 태량을 좋아했으니까. 이대로, 태량의 옆에서 안주하고 싶었다. 철없는 욕심임을 알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털어놓으라는 이성의 목소리를 누르고 유즈리하는 반지를 다시 나무상자 안으로 넣어 뚜껑을 대충 덮었다. 저녁부터 먹으면서 차분히 생각해보자. 계단을 내려가며 복잡한 기분을 달래려 사탕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다 유즈리하가 발을 멈췄다.

사탕이 없었다. 바지 주머니를 다 털고 윗옷 주머니까지 뒤집어봐도 포장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바빠서 사탕 사러 갈 틈이 없었구나. 내일 출근하면서 구멍가게를 들릴까 고민하던 유즈리하의 눈이 시계에 닿았다.

‘문 닫기 전까지 시간이 있네. 그래, 행동력 뒀다 어디에 쓰겠어.’

나머지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온 유즈리하가 거실에 앉아 자료를 펼쳐보는 태량을 눈에 담았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지 불러도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 유즈리하는 잠시 망설이다 말없이 신발을 신었다. 뛰어갔다 오면 30분도 안 걸릴 테고, 여분 열쇠도 있으니 문제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집중하는 태량을 방해하기 미안하기도 했고, 당장 얼굴 보기도 어색했기에 유즈리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태량의 머릿속도 유즈리하 못지않게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다. 고티카 박물관의 내부 지도를 외우려 탁상에 펼쳐놓았지만, 그림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태량은 결국 작게 한숨 쉬고 종이를 옆으로 밀었다. 그 밑에 반쯤 가려져 있던 명함이 보이자, 태량이 손을 멈추고 명함의 이름을 검지로 쓸었다.

“업무 관련 질문이 생기면 편하게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혹여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뒤에 사택 번호도 적어놨으니 그리로 전화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명함을 건네며 뜻 모를 미소를 짓던 명함 주인의 얼굴이 떠올라 태량은 몇 시간 전, 하몬드 박물관에서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마주했던 때로 기억을 되짚었다.

“안녕하십니까, 태량 탐정님. 오늘 유즈리하 조수님은 대동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샤르잔을 간신히 떼어놓고 나서 뒤돌아서니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뜨린 시장 비서가 인사를 건네왔다. 마주 인사를 건넨 태량이 고개를 젓고 문을 눈짓했다.

“같이 왔어요. 지금 박물관 바깥을 둘러보고 있는데, 유즈리하에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반대로 탐정님에게 용건이 있다고 해야겠군요. 조수님이 듣기엔 곤란한 질문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곤란하다는 말인가요?”

당황스러울 만도 했으나 태량은 침착하게 물었고, 안비체오는 주변을 쓱 살피고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잔잔히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만큼은 날카로웠다.

“태량 탐정님은 유즈리하 조수님의 풀 네임과 출신을 알고 계십니까?”

다분히 사적인 질문이라 태량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유즈리하 본인의 소개를 받기 전에 여권 정보부터 본 터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타인인 안비체오에게 말하는 게 꺼려졌기에 태량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유즈리하의 개인 정보는 무슨 이유로 물어보시나요?”

안비체오 역시 태량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텅 빈 전시대를 훑고 추억을 회상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왕의 보주까지 이렇게 손쉽게 훔쳐내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만, 저희가 대비하지 못한 실책 또한 있겠지요. 검을 훔쳐냈을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거든요. 진짜 레드캣이 돌아온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사칭범인 건지.”

혼잣말 같기도 했고,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태량은 침묵했다. 그러나 태량의 시선은 안비체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 따가운 눈빛을 느꼈는지 안비체오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두 번이나 성왕의 레갈리아를 훔치다니, 더 이상 의심할 여지는 없겠지요. 아시다시피 레갈리아에 손댈 수 있는 인물이 극히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 성왕의 왕홀을 부상 없이 만진 당신의 조수를 포함해서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안비체오의 의도는 명확했다. 태량은 이를 알아듣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따지듯 물었다.

“지금 유즈리하가 레드캣이라고 의심하는 건가요?”

순간 사나워진 태량의 표정에도 안비체오는 주눅 들기는커녕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합리적인 의심이지요. 태량 탐정님도 그날 밤 같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유즈리하는 분명 왕홀을 만지지 않았다고 해명했어요. 에스트란 씨도 함께 들으셨듯이요.”

안비체오의 붉은 눈이 태량을 길게 응시했다. 마치 그의 말을 믿느냐는 눈빛 아래 태량은 제 동료에 대한 신뢰를 시험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유즈리하가 제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왕의 왕홀 앞에서 맹세라도 한 듯한 믿음이군요.”

거짓을 붉은빛으로 밝히는 성왕의 왕홀. 태량은 그 붉은 빛을 본 적이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만지지 않았어. 괜찮아, 정말로. 유즈리하가 웃으며 저를 안심시키듯 두 손바닥을 다 내밀어 보여주던 순간, 유령이라 착각한 이벨리의 환영이 사라지며 일순 붉은빛을 뿜었다고, 태량은 기억했다.

…맞겠지? 환영에 의한 붉은빛이 유즈리하의 거짓에 반응한 빛일 리는 없겠지?

갑자기 움튼 의심의 싹을 잘라내듯 태량이 머리를 흔들었다. 유즈리하가 레드캣일 리가 없어요. 태량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검이 도난당한 밤, 유즈리하는 저와 같이 고티카 박물관에서 밤새 유령이 나타나지 않는지 지켜보았어요. 반세르 사장님도 증인이 되어줄 거예요.”

무엇보다 확실한 알리바이였기에 태량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안비체오도 그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도 그렇군요. 의심이 불쾌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2년 전, 레드캣이 처음으로 훔친 마도구가 도케오 마을에서 발굴된 마도구여서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봤습니다.”

“…도케오 마을이요?”

익숙한 마을 명에 태량이 멈칫했다. 안비체오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시장님께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다 유즈리하 조수님의 인적 사항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기막힌 우연이지 않습니까.”

명함을 건네주고 순순히 물러난 안비체오는 태량에게 몇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찝찝한 기분만 남겨주었다. 정말 그저 기막힌 우연일까. 가장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유즈리하에게 직접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즈리하를 믿는 것과 별개로 태량의 입은 종일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돌려 묻든, 제가 유즈리하를 의심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했다. 태량은 유즈리하가 떠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둘의 시간에 악감정이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다.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기억이 자꾸 돌부리처럼 태량의 머릿속에 걸렸다. 하몬드 박물관에 쉽게 들락날락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유즈리하. 집에 든 도둑을 제압하던 날렵한 몸놀림. 벨그란데 인공 해저의 통로로 저를 이끌던 자신 있는 손.

점차 쌓여가는 불신을 떨쳐내듯 태량이 거실 소파에서 일어섰다. 사건의 윤곽이 더 확실해진 뒤에 물어도 늦지 않겠지. 우선 내일 아침 사무실로 출근하자. 레드캣의 파일에 그가 옛날에 훔친 마도구 목록이 있으니, 안비체오의 말이 진실인지 판별할 수 있을 터였다.

태량은 유즈리하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저를 만나기 전에는 우체국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나, 얼마나 오래 일해왔는지, 그전에는 뭘 하고 살았는지도 몰랐다. 태량이 유즈리하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를 되짚었다. 벨스토렌에 정착한 지 5년, 6년쯤 되었다고 했던가. 가족은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몰락한 마을 출신 중 과거가 화두에 오르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종종 있었기에, 태량도 일부러 유즈리하에게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당장 유즈리하의 과거를 물을 순 없어도, 유즈리하의 고향 마을에 관해 찾아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시외 지도는 유즈리하가 임시 침실로 쓰고 있는 옛 작업실에 있었다. 지금 유즈리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을지는 몰랐으나, 지도만 빠르게 가지고 나올 생각으로 태량은 2층으로 올라가 살짝 열린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유즈, 혹시 안에 있어? 잠깐만 뭐 찾으러 들어가려고 하는데.”

답이 없었다. 태량이 문을 조금 더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유즈리하는 외출했나? 올라오며 인기척을 느꼈을 법한데, 고요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니 오랜만에 집에 태량 홀로 남은 것 같았다.

꺼내 본 지 오래되었지만, 태량은 책장에서 지도를 문제없이 찾아들었다. 돌돌 말린 종이를 쭉 펴서 제가 원하던 지도임을 확인하고 나가려던 태량을 순간의 눈부심이 붙들었다.

바깥에서 누가 손전등을 비추고 있나? 태량이 고개를 돌려 창문을 확인했지만, 커튼이 쳐진 걸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본 건가? 다시 시선을 돌리는 태량의 시야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반짝임이 일었다. 태량의 눈길이 아래로 향했다.

유즈리하가 쓰는 간이침대 위에 작은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다. 사무실에서 짐을 쌀 때 봤기에, 태량은 유즈리하가 들고 다니던 상자임을 쉽게 알아보았다. 헐겁게 닫힌 뚜껑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홀렸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궁금했어도 섣불리 타인의 소지품에 손대는 대신 허락을 먼저 구했을 터였다. 태량도 자신답지 않은 행동임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성이 말리기 전에 손이 뚜껑을 잡고 올렸다.

나무상자 안에 빛나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반지 안쪽을 보기 전에도 태량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2년 전 자신이 잃어버린 탄생반지였다.

반지를 집어 드는 손이 떨리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태량이 주먹을 꼭 쥐었다. 차가운 반지의 감촉이 이성을 깨워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반지를 왜 유즈리하가 가지고 있지? 레드캣을 쫓는 현장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유즈리하가 어떻게 갖게 된 거지? 의뭉스럽게 웃는 안비체오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아이네 유즈리하가 레드캣임을 의심하던 표정이 선명했다.

“그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잖아.”

자기 세뇌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유즈리하가 이번 검 절도의 범인일 리 없었고, 그러니 당연하게 레드캣이 아니었다.

…하지만 2년 전 레드캣이 이번에 나타난 레드캣과 동일 인물임이 확실한가? 태량은 처음부터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에 의심을 품었었다. 레드캣이 동일 인물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도둑이 남긴 쪽지의 내용과 레갈리아를 화상 없이 만졌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증거는 레드캣이라는 가능성을 높여줄지언정, 확실한 근거는 아니었다.

차라리 둘이 동일한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다면 태량도 마음이 편했을 터다. 유즈리하를 의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태량의 시선이 상자 안에 닿았다. 자잘한 물건 사이에서 접힌 신문 기사가 보였다. 제법 오래된 종이를 태량이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푸른 눈이 작게 인쇄된 글씨에, 그 밑에 써진 손 글씨에 닿자 얼어붙었다.

밑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태량이 기사를 접어 상자에 넣고 뚜껑을 도로 닫았다. 나무상자를 침대에 있던 위치 그대로 두고 반지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태량이 방을 나왔다.

해야 할 질문도 있었고, 물어볼 이유도 명확했다. 그러나 태량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건,

“잠깐 구멍가게에 다녀왔어! 사탕 하나 먹을래?”

밝게 웃는 유즈리하의 얼굴을 보고, 이미 정을 너무 많이 준 걸 깨달은 까닭일 터였다.

* * *

매우 피곤한 얼굴의 태량을 힐끔 훔쳐보며 유즈리하는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잠을 잘 자지 못했을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와 더 캐묻지도 못했다. 이번 레드캣 의뢰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나 보네, 이걸 어쩐다. 새로 산 사탕을 입속에서 굴리며 궁리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역시 어제 반지에 관해 말했어야 했나.’

그러나 방에 올라와서 상자를 다시 열어보지도 않고 치워버린 유즈리하는 뒤늦은 후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털어놓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여태 미루고 있지도 않았을 터다. 마음이 불편해져 이리저리 부스럭거리는 유즈리하를 태량이 불렀다.

“유즈, 지금 바빠?”

“아니? 왜, 뭐 시킬 일 있어?”

차라리 일거리가 반가웠기에 유즈리하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태량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 동전 지갑을 책상 끝으로 밀어놓았다.

“그럼 가서 커피 좀 사 와줄래? 내 것은 진하게 부탁해.”

라떼 맞지? 금방 올게! 동전 지갑을 낚아채서 나가는 유즈리하의 등 뒤로 태량이 천천히 와도 된다고 얘기하기도 전에 붉은 후드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 사라졌다. 발소리가 귀에서 멀어지자마자 태량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과거 종료된 사건만 모아놓은 파일 맨 아래에 아무런 표식 없는 검은색 파일이 하나 있었다.

유즈리하가 돌아오기 전에 필요한 자료를 전부 살펴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태량은 책상 위에 파일을 두고 망설였다. 마지막까지 이게 쓸데없는 의심이 아닐지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아직 제 안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기에 태량은 결국 파일의 첫 장을 펼쳤다.

제일 먼저 태량을 반긴 건 익숙한 옛 신문 기사였다. < 혜성처럼 나타나 값진 마도구를 훔쳐 사라진 도적, 그의 정체는? > 어제 똑같은 기사를 접했기에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이 보존된 기사는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태량의 검지가 보이지 않는 글씨를 기사 위로 그렸다.

어디 날 잡아볼 수 있다면 잡아보시지!

필체를 완벽하게 따라 하진 못해도, 글씨의 소유자가 지닌 특유의 경쾌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붉은 펜으로 적은 문구가 뇌리에서 유즈리하의 목소리로 메아리쳤다. 태량이 입술을 꾹 다물고 종이를 넘겼다.

다음 장에는 레드캣이 훔친 마도구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태량의 시선이 목록 맨 위로 향했다. 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사진이었지만, 붉은색 고양이 가면임을 알아보기엔 어렵지 않았다. 옆의 글씨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고양이 가면 (이름 없음). 마도구 등급 2등급. 가면을 제외한 착용자의 외관 특징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지니고 있음. 알려진 상호 작용 효과는 없음.

비고. 마도구 발굴지는 도케오 마을로 xxxx년, 당시 벨스토렌 도시의 시장 기예르 파트롱이 도케오 마을 대표와 가격을 협상해 매수했고, 마도구의 현 소유자는 기예르 파트롱이다.

태량이 파일을 덮었다. 이 이상의 확인은 필요 없었다. 미룬 답은 이제 본인밖에 줄 수 없었다. 때마침 발소리가 들리고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태량이 검은색 파일을 다시 서랍에 넣고 몸을 바로 세우자, 종이 캐리어에 음료 두 잔을 들고 온 유즈리하가 보였다.

“커피 식기 전에 얼른 왔어! 태량, 이건 네 거.”

고맙다는 인사와 태량이 뜨거운 라떼를 한 모금 삼켰다. 쌉쌀한 커피 향과 액체가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자, 기분이 조금 진정되었다. 소파에 기대 음료를 홀짝이는 유즈리하를 곁눈질하며 태량이 가벼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너도 곧 본격적인 이사 준비로 바빠지겠네. 벨스토렌에 6년인가 살았다고 했지? 오래 있었으니 떠날 때 서운하기도 하겠다.”

“글쎄. 한동안 허전하긴 하겠지? 고향 마을을 떠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긴 했지만, 정착했다고 말할 만큼 길게 머물렀던 곳은 벨스토렌이 유일하니까.”

“고향은 언제 떠났다고 했더라?”

대화가 협조적으로 흘러가자, 태량이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긴장한 기색이 눈에 드러날까 봐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지만, 유즈리하는 오히려 과거를 되짚는지 천장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게… 7년? 도케오 마을이 망한 시기가 상타스 마을과 비슷했거든. 맞아, 7년쯤 됐을 거야.”

“…7년 전이면 성인이 되기도 전이었을 텐데,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유즈리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담담해 보이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다는 얼굴이어서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17살이면 앞가림 못할 나이는 아니긴 하지. 마음고생보단 솔직히 돈 버느라 몸 고생이 심하긴 했지만. 벨스토렌 물가가 절대 싼 편은 아니잖아? 그래도 그걸 감수할 만큼 여기 사는 게 재밌어서 여태 있었고.”

“벨스토렌이 왜 그렇게 좋았는데?”

태량이 손에 턱을 괴자, 유즈리하가 씩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출근 시간대가 지난 탐정 거리가 점차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의뢰를 맡길 탐정을 찾으러 골목을 배회하는 시민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탐정들, 그 사이에서 느긋하게 자기 할 일을 하러 길 가는 사람들이 섞여 도시의 화음을 자아냈다.

이 시각 벨스토렌의 어느 곳이든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을 터였다. 예술의 거리도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광하는 여행객과 벨스토렌의 예술인으로 가득할 테고, 시청 부근은 직장인들로, 유흥가며 시장과 주택가도 평일임에도 고요하단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었다. 낮에도 생명력 넘치고, 밤에는 더욱 밝고 화려하게 타오르는 벨스토렌은 그런 낭만적인 도시였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하고 있고, 밖에서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잖아. 벨스토렌은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태량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도시. 유즈리하의 말이 썩 틀린 건 아니었다. 많은 자유도시 중에서도 벨스토렌은 활기 있고 화려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정든 고향이 아니었어도 태량 역시 벨스토렌을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고, 도시에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면 도우려 나섰을 테다. 레드캣을 잡는 의뢰를 한 치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사건을 파고들수록 태량의 순수한 애정 위로 그늘이 조금씩 드리웠다. 이 도시의 강력한 빛은 다른 도시와 마을의 생명을 빨아들여 빛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괴도라는 거창한 이명을 뒤로하고, 레드캣은 말할 것 없이 범죄자가 맞았다. 하지만 그 피해자인 벨스토렌이, 벨스토렌의 시장이 진짜 깨끗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그리고 설령 벨스토렌이나 기예르 파트롱이 선량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레드캣의 도적질을 정당화할 수 있나?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어느 문제에도 쉬운 답은 없었다. 태량이 일회용 컵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치는 유즈리하를 바라보았다.

레드캣은 뭐가 옳다고 생각해서 행동했어?

“유즈, 넌 레드캣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그냥 전반적으로 물어보는 거야?”

진짜로 물어보고 싶은 걸 삼키고 태량이 대신 물은 질문에도 유즈리하의 심장이 펄쩍 뛰었다. 종이컵을 구겨버릴 뻔한 충동을 간신히 참은 유즈리하는 컵 테두리를 잘근잘근 씹다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제일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벨스토렌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장본인이니 좀 흥미롭다 정도? 굳이 더 파고들자면, 지금의 레드캣이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것?”

그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 남은 벨스토렌 거주기간을 살얼음판으로 만들어 놓은 짜증 나는 사칭범이었지만, 그대로 태량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태량이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정말 미뤄뒀던 질문을 던질 시기였다.

“레드캣 사건에 관해 짐작 가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 그게 2년 전의 레드캣이 되었든, 현재의 레드캣이 되었든.”

긴 침묵이 흘렀다. 사실상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테지만, 사무실에서 눈 마주친 두 사람은 지나치게 긴 시간이라고 분명히 느꼈다. 초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의 흐름이 귀에 울린다는 착각이 들 만큼.

점차 늦은 오전으로 넘어가는 아침 햇빛이 유즈리하의 갈색 눈동자에 닿았다. 유즈리하의 고개가 슬쩍 돌아가 태량은 그의 오른쪽 눈 아래 눈물점만 볼 수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없어.”

“…그래.”

전보다 무거운 정적이 작은 사무실을 채웠다. 태량과 유즈리하 둘 다 불편한 적막을 깨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고티카 박물관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의 묘한 어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며 일상적인 대화가 오갈 정도로 긴장감은 풀어지긴 했으나,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꺼낼 수 없는 불편한 말이 목에 걸린 탓이었다. 그랬기에 둘은 왕홀 관계자가 모인 곳에 도달했을 때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탐정님, 조수님. 오랜만…은 아니지만, 체감상 오래전에 뵌 것 같군요.”

고티카의 사장, 반세르가 인사해왔다. 태량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가벼운 인사를 받았다.

“더 좋은 상황에서 다시 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이벨리가 많이 아쉬워하겠어요.”

말도 말라며 반세르가 머리를 흔들자, 이벨리를 닮은 정돈된 하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반세르가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한탄을 늘어놓아 윙윙거리는 목소리가 스산한 박물관 복도에 퍼졌다.

“안 그래도 오늘 마지막으로 와서 보고 싶다는 걸 뜯어말려야 했어요. 누가 보면 성왕의 레갈리아가 형님의 소유물이 아닌 이벨리의 소유물인 줄 알 걸요.”

차라리 투명화 마도구를 안비체오 씨에게 맡긴 게 안심이에요, 이벨리라면 충분히 마도구를 슬쩍해서 나왔을 수도 있으니까요. 반세르가 로비 입구를 눈짓하자 방금 도착한 기예르와 안비체오, 그리고 시장 경호원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분노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정신이 반쯤 혼미해 보이는 기예르 파트롱은 간략한 인사만 하는 체했으나,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둘과 눈을 마주치고 살갑게 웃었다. 태량은 그에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고 유즈리하는 아예 못 본 체 눈을 돌렸다.

“오실 분들은 다 도착했으니 바로 전시관으로 갑시다.”

마찬가지로 태량과 눈인사를 마친 페라노 경감이 앞서 걸어가고 기예르 파트롱과 반세르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한 발짝 물러선 안비체오가 뒤따라오던 태량과 유즈리하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시간 내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드캣에 관한 수사는 잘 되어 갑니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의뢰에 참여한 탐정에게 하는 간단한 안부 인사였지만, 어제 안비체오와의 대화를 떠올린 태량은 마냥 웃으며 답할 수가 없어 제일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대놓고 주제가 불편했던 유즈리하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것으로 본분을 다했다.

“아무렴요. 유령 사건을 해결하신 실력을 제 눈으로 보았으니 믿고 있습니다. 워낙 신출귀몰한 괴도이니 쉽게 잡히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시장님의 혈압을 위해서라도 왕홀의 회수가 사고 없이 진행돼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앞서가는 시장에게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리는 안비체오의 옆얼굴이 조명 탓인지 낯설어 태량이 눈을 깜빡였다. 옆에서 팔을 툭툭 건드리는 감각에 태량이 돌아보자, 유즈리하가 익숙한 이중문을 눈짓했다.

“도착했어. 우리도 같이 들어가는 건가?”

특별전시관을 지키고 선 경비원들이 신원 확인을 마치고 문을 열어주었다. 육중한 문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어우러졌다. 태량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시관으로 따라 들어가다 유즈리하의 기척이 없자 뒤를 돌아보았다.

“안 오고 뭐 해?”

“…아냐. 갈게.”

미묘하게 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껴 복도를 노려보고 있자 태량이 불렀다. 유즈리하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제 예민해진 신경 탓으로 넘겼다. 폭풍전야 같은 전시관에 괜히 불을 지펴서 제게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특별전시관 내부는 조명이 켜져 있었지만, 창문이 없어 어둑한 분위기를 풍겼다. 벽면에는 예전에 본 소형 마도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고, 중앙 전시대에는 황금색 왕홀이 곧게 세워져 있었다. 지난주 이곳에서 여러 밤을 새우며 익숙해진 풍경을 둘러보다 유즈리하가 이상을 감지하고 왼쪽 벽면부터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여덟, 아홉, 열, 열하나.

반세르가 다른 전시관으로 치웠다는 이미지 각인 마도구를 제외해도 마도구 개수가 하나 모자랐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훑어도 빈 숫자가 채워지진 않았다.

전시 구조를 그 짧은 사이에 개편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안 그래도 지금 성왕의 레갈리아 절도로 시끌벅적한데, 현재 왕홀을 소유에 둔 반세르가 그 정도로 여유가 있을 리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경이 거슬렸기에 유즈리하가 태량의 소매를 티 나지 않게 흔들었다.

“태량, 들어봐. 여기 뭔가 이상….”

쾅! 바깥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모두의 집중이 순식간에 전시관 입구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베테랑답게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하려 페라노 경감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문밖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잠시 우왕좌왕하다 무전기로 연락받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정문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부상자가 있어서 지원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박물관의 주인인 반세르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창백하게 질렸다. 특별전시관에 있는 열댓 명의 경찰과 경호원을 차출해 자신도 현장으로 뛰어가려다 반세르가 멈칫했다. 사장으로서 박물관을 우선하는 본능이 강했지만, 기예르 파트롱과 왕홀의 경호로 데려온 인력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예르는 반세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소란이 일자마자 위기를 직감했는지, 기예르는 바로 중앙 전시대에 다가서 왕홀을 회수하려 손을 뻗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반세르가 페라노 경감을 쳐다보았다.

“경찰 인력을 데리고 가세요. 이곳은 저와 시장님의 경호원으로 충분합니다.”

안비체오에게서도 안 된다는 말이 없었기에 전시관을 나가는 경찰을 따라 반세르도 특별전시관을 나서려 했다. 그가 문밖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이었다.

음산한 소음과 함께 이중문이 움직였다. 비정상적인 속도로 빠르게 닫히는 무거운 문이 다가오자, 반세르가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쿵 소리와 문이 닫히고 반세르가 손잡이를 흔들었다.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문이 잠겼어!”

반세르가 당황해서 열리지 않는 문에 매달렸다. 방범줄, 태량의 목소리에 유즈리하가 중앙 전시대를 돌아보았다. 두꺼운 붉은색 밧줄의 일부가 끊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시장이 급하게 움직이다가 실수로 줄을 끊었나? 유즈리하가 싹둑 잘린 줄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이 태량이 반세르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마 열쇠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을 테지만, 그보다 거친 목소리가 먼저 고립된 전시관 안에 울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가라앉은 전시관에서 기예르의 겁먹은 신음만 들렸다. 유즈리하가 천천히 시선을 바닥에서 전시대로 올렸다. 끊어진 방범줄 일부를 기예르의 목에 감고, 총구를 관자놀이에 겨눈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검은색 후드티를 푹 뒤집어쓴 인영은 늘씬한 체격에 키가 상당히 컸다. 기예르 파트롱의 체격이 워낙 좋아서 티가 안 날 법도 했으나, 그와 비교해도 작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조잡한 고양이 가면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어서 그의 특징은 잡아내기 어려웠다. 목소리도 변조 마도구를 착용했는지 조율되지 않은 기계음처럼 거칠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자가 벨스토렌에 다시 나타난 자칭 레드캣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저게 그 사칭범이구나. 유즈리하가 가면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눈길을 느꼈는지 레드캣이 고개를 돌렸다. 잠깐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든 찰나.

탕! 귀청을 세게 울리는 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김이 피어오르는 총구가 다시 기예르의 머리에 겨눠져 있었다.

“세 번째 경고는 없어.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몸을 바짝 긴장시킨 유즈리하가 눈동자만 굴려 레드캣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자,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려던 페라노 경감이 멈칫한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눈만 굴려 둘러보니 다들 실탄 발포에 경계를 올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뜨거운 총구가 머리에 닿은 기예르의 얼굴이 시시각각 창백해지자 그나마 제일 가까이 있던 안비체오가 침착하게 레드캣과 대화를 시도했다.

“다가가지 않을 테니 진정하고 총을 내려주십시오.”

두 손을 귀 높이로 올리고 차분하게 말하는 안비체오의 면전에 레드캣이 코웃음 치고 오히려 총구를 더 세게 관자놀이에 짓눌렀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우선 무기를 내려놔. 당신도, 저기 경호원도 전부.”

고양이 가면 뒤의 눈길이 안비체오부터 페라노 경감, 기예르의 경호원부터 태량과 유즈리하까지 쭉 훑었다. 아무도 미동이 없자 기계음 같은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시장이 손 하나쯤은 못 써도 상관없는가 보지.”

“일단 시키는 대로 하게!”

겁먹은 시장이 외치자, 태량이 망설이며 페라노 경감을 곁눈질했다. 페라노 경감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안비체오를 바라보았다. 안비체오도 조용히 끄덕였다.

“시장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레드캣이 총기를 다룰 실력과 의지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기예르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둘 총기와 호신용 마도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태량도 총을 내려놓는 동안 호신용품이 없던 유즈리하는 주머니를 뒤집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손을 들었다. 혹시 빈틈이 생기지 않을까 계속 레드캣을 노려봤지만, 레드캣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기예르의 목을 감은 방범줄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당신의 요구대로 무장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시장님을 풀어주십시오. 아니면 따로 원하는 바가 또 있습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조금씩 충격이 가시기 시작했는지, 기예르의 얼굴이 하얀색에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숨이 막히는 게 아닌, 분노가 두려움을 억누른 모양이었다. 총이 겨눠진 상태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돌아서서 레드캣에게 삿대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양심 없는 강도 같으니! 원하는 게 뭔가? 시장직? 돈? 희귀한 마도구?”

“진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와 동떨어진 단어에 불을 뿜던 기예르도 말문이 막혔다. 잠깐 생긴 정적에 레드캣의 목소리만 명료하게 특별전시관을 울렸다.

“나는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해.”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기에 레드캣은 찰나의 침묵 후에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법정에 선 증인처럼 또렷한 발언이 전시관의 배심원 앞에 펼쳐졌다.

“벨스토렌의 시장, 기예르 파트롱은 제 정치 실적과 개인 욕심을 위해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마도구를 강제로 탈환했다. 화제가 된 성왕의 레갈리아 역시 상타스 마을에서 훔친 보물이며, 이로 인해 상타스는 몰락하게 되었다. 비록 상타스뿐이 아니다. 도케오 마을, 오브레아 도시, 알레톨 마을, 플레사스 마을…. 한두 번 있던 사건이 아니며 양심 없는 강도는 내가 아닌 바로 이자다.”

“말도 안 되는 모함일세!”

기예르 파트롱이 목이 잡힌 상태에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조차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들어봤더니 터무니없군! 성왕의 레갈리아는 물론이고 내 소유의 모든 마도구들은 다 정당한 계약을 맺어 값을 치르고 사들인 보물들이네!”

“당신이 작성한 건 매매계약서가 아닌 사기 계약서였지. 그마저도 협박을 통해 성사된 계약임을 내가 모르지 않아.”

오로지 마도구 한두 개에 의존해 관광 수입으로 먹고사는 마을에 당신은 돈을 써서 관광객의 발길을 끊어버리겠다고 압박했지. 그렇게 몰락할 바에야 당신과 계약을 맺고 대금이라도 받는 게 낫다는 식으로 회유하면서 말이야. 가면 뒤에서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예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방범줄이 목을 졸랐는지 기침을 뱉었다. 레드캣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그 대금마저도 온갖 핑계를 대가며 제대로 치르지 않았지. 마도구를 빼앗아 온 마을이 몰락할 때까지, 사기 계약서가 무효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해서 당신이 도둑이 되지 않을 줄 알았나? 당신의 욕심 때문에 터전과 고향을 잃은 주민이 수백 명을 넘어.”

“새빨간 거짓말!”

터질듯한 얼굴로 기예르가 외쳤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마저 붉게 보일 정도로 분노한 듯했다. 유즈리하가 눈을 비볐다. 아니었다. 기예르의 눈동자는 확실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주체 못 한 분노로 인한 빛은 아니었다.

기예르 파트롱의 손에 들린 성왕의 왕홀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기예르를 비롯한 전시관 안의 모든 사람이 알았다. 핏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손이 차마 왕홀을 내동댕이치지 못하고 힘없이 떨렸다.

새빨간 거짓말. 성왕의 왕홀은 기예르 파트롱에게 선고했다.

“훔쳐 간 마도구로 인해 당신 또한 몰락하게 된다니. 운명적이지 않나?”

이건 모함일세! 발악하는 기예르를 잡고 있는 레드캣은 담담했다. 유즈리하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기예르 파트롱의 동생인 반세르는 물론이고, 페라노 경감마저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태량도 표정 관리가 뛰어난 편이었으나,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니 이렇게까지 사기를 쳤으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듯했다. 기예르가 고용한 경호원마저 얼빠진 모양새라 유즈리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지지율 높던 고향 도시의 시장이 알고 보니 사기꾼에 도둑이었다는 증거를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면 머리가 굴러가지 않을 만도 했다. 유즈리하 본인은 외부 출신인 데다 기예르 파트롱이라는 인물에게 호감이 없었기에 이성을 유지하는데 별문제 없었다. 유즈리하의 생각이 마지막 남은 인원에게 미쳤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그도 외부 출신이었지만, 동시에 시장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 이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충격을 받았겠지. 여기서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 같네.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던 유즈리하의 시야 끝에 기묘한 변화가 보였다. 유즈리하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저 사람… 방금 웃은 것 같은데.’

그러나 다시 살펴봤을 때 손 뒤의 입가에 미소의 흔적은 없었다. 유즈리하의 눈이 안비체오에게 길게 머물렀다.

“이것은 도난이 아닌 정당한 주인에게 귀물을 되돌려주는 것일 뿐이다. 힘없는 마을에서 마도구를 탈취해간 기예르 파트롱이야말로 진짜 도적이 아니던가?”

성왕의 보주를 훔친 현장에 남긴 쪽지를 레드캣이 그대로 읊었다. 그 뒤의 내용은 유즈리하는 물론이고 속보를 수십 번은 들은 벨스토렌 시민 모두 외우고 있었다.

도적의 도시 벨스토렌은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라.

레드캣이 빠른 움직임으로 총을 벨트에 끼우고 후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전구처럼 생긴 물건이 무엇인지 유즈리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특별전시관에서 유즈리하가 찾지 못한 마도구. 공간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마도구였다.

눈 감으라고 태량에게 미리 언질 주지도 못했다. 유즈리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시관이 암흑에 잠겼다는 건 옆에서 들려오는 당황한 목소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유즈리하가 눈을 떴다. 밤눈이 여느 타인보다 밝은 편이었지만, 그조차도 새까만 어둠에서 사람들의 윤곽을 구분해내는데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유즈리하의 고개가 홱홱 돌아갔다. 옆에 태량이 있고, 조금 더 멀리에 페라노 경감이, 그 부근에 경호원들이, 그리고 반대편에 안비체오가. 전시대 앞에 나동그라진 기예르의 인영도 흐릿하게 보였다.

레드캣 사칭범은? 유즈리하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희미한 빛줄기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저기다. 마도구가 마지막 남은 빛을 빨아들이고 다시 완전한 어둠만 남았지만, 유즈리하는 레드캣이 어디로 향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중문 옆에 커튼으로 숨겨진 비상구. 박물관 보안 관계자에게만 알려진 문의 존재를 레드캣이 어떻게 아는지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더 뒤처지기 전에 유즈리하가 달아나는 발소리를 쫓았다. 시력이 어둠에 빠르게 적응해서 손으로 벽을 더듬을 필요 없이 바로 손잡이를 찾아 돌렸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문 안쪽으로 유즈리하가 들어섰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다행히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 머리 위의 비상등이 희끄무레하게 켜졌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뛰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발소리 죽이는 법도 모르는 걸 봐선 이런 일에 미숙한 것 같은데, 숨겨진 통로는 기가 막히게 알고 있네.’

유즈리하 또한 수년 전 이 비상구를 이용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그에게도 문을 찾기 위한 몇 번의 사전답사가 필요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오르면서 유즈리하는 결론을 내렸다.

박물관 관계자거나, 아니면 관계자만 아는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거나. 이 사칭범은 실력과 감이 아닌 정보력으로 성왕의 레갈리아를 성공적으로 훔쳐내고 있었다.

2층 비상구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유즈리하가 잠시 발을 멈추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기다렸다. 아직 제가 따라붙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니 괜히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조금 기다린다고 하여 그를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폭발 소동을 일으켜 난리를 피운 만큼 정문은 경비가 강화되었을 터다. 고티카 박물관에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경비가 깔린 계단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남은 건 창문밖에 없지.’

유즈리하가 머릿속으로 고티카의 지도를 그렸다. 고티카 부지에서 몰래 빠져나가려면 뒤편의 정원이 제격이었다. 탁 트여있는 정문과 달리 뒷문으로 가는 길은 성인 키의 덤불로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사칭범이 생각이 있다면 당당하게 문으로 나가지는 않겠지만, 덤불이 빽빽하게 심어진 건 아니라 그 사이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특히 해가 져서 시야가 좁아진 밤이라면.

그렇다면 레드캣이 뒷문에서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내려갈까? 유즈리하는 그 가정을 폐기했다. 발이 빠르긴 했지만 서투르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벽을 타는 실력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고티카 뒤쪽 벽은 잡을 곳이 넉넉지 않아 숙련자가 아닌 이상 타고 내려가기엔 어려웠고, 1층 층고가 높아 뛰어내리면 2층이어도 부상을 입을 터였다. 도망치는 입장에서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옆 벽면으로 내려가겠지. 옆면은 장식대며 깃대도 여러 개 있어 밧줄이 없어도 조금의 요령과 용기가 있다면 충분히 내려갈 만했다. 주변과 창문 밖을 살피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유즈리하는 창틀을 밟고 몸을 바깥으로 빼냈다.

고티카의 옆 벽면은 아니었다. 좁은 창틀에 중심을 잡고 바람을 맞는 유즈리하의 발아래에 덤불이 펼쳐져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스릴감에 유즈리하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밧줄이라도 있었으면 잡을 데가 있건 없건 손쉽게 내려갔을 테지만, 아쉬운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즈리하가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고 밑의 튀어나온 벽돌을 목표로 잡고 몸을 날렸다.

‘하마터면 어디 한군데 부러지는 줄 알았네.’

벽을 타고 내려오며 중간에 손이 미끄러질 뻔한 걸 떠올리자 아무리 여유만만한 유즈리하도 약간 식은땀이 났다. 낙법을 쳤어도 위험한 높이였기에 바로 아래의 틈에 손을 끼워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신을 믿지도 않건만 대충 감사 인사를 올리며 유즈리하가 박물관 건물 모퉁이를 주시했다.

레드캣 사칭범이 유즈리하를 앞질러 도망쳤으면 눈에 띄었을 테니, 아직 벽을 완전히 내려오지 못한 듯했다. 유즈리하가 재빨리 모퉁이가 잘 보이는 위치의 덤불 뒤에 숨어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검은색 옷을 입고 왔을 텐데. 그나마 어두워진 시각이라 다행이었다. 밤 속에 숨어들 수 있는 사람은 저 사칭범뿐이 아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딱딱한 콘크리트를 때리는 신발 소리가 들리자, 유즈리하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곧 흙과 잔디를 밟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바뀌고 기척이 가까워지자, 유즈리하가 몸을 숙이고 기다렸다. 밤에 익숙한 갈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검은색 후드가 덤불 틈새로 보인 순간 유즈리하가 발에 힘을 주고 덤불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레드캣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틀었지만, 유즈리하의 손은 이미 그의 어깨를 밀치고 있었다. 균형을 잃은 레드캣이 비틀거리자, 유즈리하가 빠르게 발을 걸고 가면에 손을 뻗었지만, 같이 넘어지는 바람에 빗나가며 바닥만 짚은 꼴이 되었다. 한쪽 팔을 가면 위로 올린 채 바닥에 넘어진 레드캣은 충격이 컸는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떨어뜨린 왕홀이 잔디를 굴렀다.

반쯤 벗겨진 후드 속에 짧게 층을 친 머리카락이 흩어져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밝은 붉은색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경계를 뚫고 가면을 벗기려 궁리하는 유즈리하 밑에서 레드캣이 기침을 뱉었다. 가면 뒤의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유즈리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서린 적대감은 피부를 찌르듯 따가웠다.

“당신이 진짜 레드캣이구나. 이 위선자.”

빈틈을 잡고 가면을 낚아채려던 손이 굳었다. 유즈리하는 아래에 깔린 이를 빤히 내려다보았지만 가면은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부정이 먼저라고 이성이 경고했으나 저도 모르게 입에서 질문이 굴러 나왔다.

“위선자?”

음성변조기를 거친 웃음은 건조했다. 가면을 가리던 팔이 유즈리하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음에도 유즈리하는 그대로 팔을 내주고 말았다. 고양이 가면의 텅 빈 눈이 유즈리하를 응시했다.

저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유즈리하가 눈썹을 찡그렸다. 민첩성은 제가 우위여도 악력은 상당했다. 멍이 들 게 분명한 손목을 뿌리치려는 찰나, 레드캣의 이어지는 추궁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도케오 마을의 아이네 유즈리하. 당신은 왜 강탈자 기예르 파트롱에게 그의 것이 아닌 보물을 되돌려주었어?”

“…그러는 당신은 누구야?”

사실상 제가 레드캣임을 시인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사칭범이 제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기에 혼란이 유즈리하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레드캣이 자유로운 손으로 주먹을 쥐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레드캣의 위선에 배신당한, 당신과 비슷한 사람.”

복부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한 건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르는 유즈리하의 눈에 왕홀이 들어왔다. 유즈리하와 레드캣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유즈리하의 손이 먼저 차가운 금속을 쥐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레드캣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유즈리하의 눈에 총구가 비쳤다.

젠장, 잊을 게 따로 있지, 레드캣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실탄이 장전된 총이라는 걸 직접 봤기에 유즈리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아무리 빨라봤자 총알보다 빠르진 못했다. 레드캣이 왕홀을 턱짓했다.

“왕홀을 이리로 던져. 그리고 당신 뒤의 동료에게 총 버리라고 말해.”

유즈리하의 숨이 멈췄다. 머리를 살짝 돌린 시야 끄트머리에 착각할 수 없는 레몬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바람막이가 얼핏 보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지.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왕홀을 내놔. 당신이 진짜 레드캣이라 할지라도 그 보물은 당신의 것이 아니야.”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유즈리하의 눈이 흔들렸다. 레드캣이 동요를 눈치챘는지 유쾌한 낮은 웃음소리가 가면 뒤에서 흘러나왔다.

“설마. 저 탐정, 당신이 레드캣이라는 걸 모르고 당신을 조수로 들였어?”

위선자! 2년 전 사라졌을 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네. 깔깔대던 웃음이 멈추고 총구가 유즈리하의 머리에 겨눠졌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뚜렷하게 보였다.

“왕홀을 어서 내놔. 어때 탐정님, 배신자의 머리에 구멍 하나쯤 뚫려도 상관없겠지?”

“……그만.”

태량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딱딱해진 태량의 목소리에 유즈리하가 가만히 숨을 삼켰다. 제게 겨눠진 총이 아니었어도 돌아보지 못했을 터다. 무언가에 겁먹은 적이 손에 꼽았건만, 저를 향한 태량의 실망한 눈빛을 마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유즈리하를 상처 없이 놓아준다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랬기에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레드캣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런 말 없이 태량을 빤히 바라보다가 총을 든 손을 슬쩍 옆으로 비틀었다.

“왕홀부터 이쪽으로 던져.”

잠시 기다렸지만, 요구에 수긍할 생각인지 태량에게서 항의는 없었다. 레드캣의 경각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유즈리하는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손에 힘이 빠지며 왕홀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렸고, 레드캣이 막대 부분을 손쉽게 잡아챘다. 레드캣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면 뒤로 비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운 하나는 정말 좋구나, 아이네 유즈리하. 배신당한 탐정님이 불쌍하니, 나도 약속은 지키도록 하지. 단, 누구 하나라도 쫓아왔다간 그게 누가 되었든 무사하지 못할 거야.”

끝까지 총을 내리지 않고 레드캣이 뒷걸음질 쳤다. 충분히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했는지, 그가 뒤돌아서 덤불을 뚫고 사라졌다. 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도 유즈리하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뒤에서 작은 발걸음이 다가왔다. 더 멀리서, 도망간 레드캣을 찾아 체포하라는 시장의 고함이 들려왔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유즈리하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여전히 시선까지는 마주하지 못했다. 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변명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침묵을 깨뜨린 건 태량이었다. 아래로 내리깐 유즈리하의 눈에 태량이 내민 손이 보였다.

“유즈리하, 손 한번 봐봐.”

그래, 이건 눈 돌리고 모른 척 회피한 데에 주어진 벌이었다. 유즈리하는 말없이 손을 펼쳐 내밀었다. 결코 깨끗하지 않은 제 과거와 모순적이게도 손은 화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의 손은 차마 태량에게 닿지 못했다.

* * *

차라리 수갑을 차고 어슴푸레한 전등만 켜진 취조실에 붙잡힌 게 마음은 더 편했을 것이다. 환히 불이 밝혀진 태량의 옛 작업실 방바닥에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난리가 난 고티카 박물관에서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태량의 집에 돌아오면서 둘 사이에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죄인의 기분으로 선고를 기다렸다. 딱딱하게 굳힌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은 없었지만, 가슴은 맨몸으로 벽을 타고 내려올 때보다 방망이질 쳤다.

“…네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려고 했는데, 물어볼 때가 온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해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이미 전부 들통난 상황이 아니었어도, 저를 담담히 응시하는 투명한 푸른 눈동자를 보면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 네가 2년 전 사라졌던 레드캣이야?”

단도직입적인 첫 질문에 내놓아야 하는 답은 쉬웠다. 유즈리하는 깔끔히 시인했다.

“맞아.”

그토록 태량에게 숨기고 싶어 한 진실이 그동안의 고뇌에 무색하게 덤덤히 드러났다. 언제부터 확신했을까. 태량의 얼굴에 놀란 흔적이 전혀 없어, 유즈리하는 그의 의심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넌 레드캣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아침의 기억도 새로운 어조를 띠고 유즈리하를 다시 찾아왔다. 유즈리하가 설명, 혹은 변명하리라 기대했는지 태량은 말을 얹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으나, 짧은 긍정 후 침묵만 이어지자,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지금 레드캣이라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하곤 무슨 관계야?”

이건 조금 어려웠다. 도리어 유즈리하가 사칭범에게 묻고 싶었다. 유즈리하의 기억 속에 저런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자는 없었다. 혹시 도케오 마을 출신의 동향일까 싶어 오래된 흐릿한 기억을 뒤져봐도 비슷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당신은 누구이길래 나를 사칭하며 적대하고, 레드캣을 위선자라 부르는가.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 그쪽은 나를 아는 것 같았는데, 네가 그에 관해 아는 것 이상으로 나도 아는 게 없어.”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가 믿지 않는다 해도 진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으나, 태량은 그 이상 유즈리하를 추궁하지 않았다. 바짝 긴장했던 유즈리하의 어깨에 조금씩 힘이 풀렸다. 어쩌면 대화로 악화한 관계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피어난 희망은 다음 순간 산산이 조각났다.

태량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 유즈리하에게 내밀었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 빛나는 반지가 놓여 있었다. 반지 안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즈리하가 나무상자에 감춰둔 태량의 탄생반지였다.

언제 발견한 거지? 어젯밤엔 상자 안에 있는 걸 확인했는데. 내가 나간 사이? 아니면 오늘 아침에?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유즈리하의 눈을 마주하며 태량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게 내가 잃어버린 탄생반지라는 걸 알고 있었어?”

유즈리하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다. 제가 가지고 있던 건 맞지만 훔친 반지는 아니고 우연히 발견한 거였다. 최근까지 이걸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아예 잊고 있었다. 이 반지가 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 건 고작 어제였다. 진실이었지만 동시에 구차한 변명이었다.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을 찾지 못했다. 이거야말로 거짓말이었다. 기회는 많았고, 외면하길 택한 건 유즈리하였다. 그 선택에 따라온 대가는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알고 있었어.”

그리고 솔직함을 약속한 유즈리하에게 남은 하나뿐인 답이었다.

태량은 유즈리하에게 어떤 비난의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먹을 쥐어 반지를 감추고 손을 거둬들였다. 그 행동으로 태량과 쌓아온 신뢰가 무너졌다는 걸 유즈리하는 뼈저리게 자각했다.

태량의 사무실은 더는 유즈리하가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 집 또한 이제 유즈리하가 떠나야 할 곳이었다.

“나는 이만 갈게.”

반지를 쥔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태량이 고개를 들었다. 유즈리하가 시선을 피하고 조금 느릿하게 반복했다.

“짐 챙겨서 바로 나갈게. 피차 불편한 건 싫을 테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날 체포해서 경찰에 넘길 거야? 겉으로만 가볍게 날린 질문은 심술이었다. 태량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집까지 오지도 않고 고티카에서 유즈리하를 페라노 경감에게 넘겼을 터였다. 한 달 동안 쌓은 정 때문이었을까? 유즈리하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체포될 생각은 없었기에, 태량의 손을 제지한 게 무엇이든 간에 기꺼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뒷맛이 씁쓸했다. 가방 두어 개에 필요한 짐을 전부 쑤셔 넣고 계단을 내려오자, 태량이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찰나였고, 망설임도 그보다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나머지 짐은 버려도 상관없어.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이 닫혔다. 태량은 유즈리하를 잡지 않았다.

초침 소리가 한참이나 흐르고 나서야 태량이 천천히 계단으로 눈을 돌렸다. 유즈리하가 오기 전에도 한동안 홀로 살던 집이었는데, 이상하게 적막의 무게가 달랐다.

이만 쉬어야겠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계단에 발을 올리려던 차에 거실 전화기가 울렸다. 오늘 밤만큼은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몸은 성실하게 태량을 거실로 인도했다. 서늘한 수화기가 귓가에 닿았다.

“여보세요.”

“태량 탐정님 댁 되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태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예약 없이 당일 밤에 잡을 수 있는 벨스토렌의 모텔은 낡고 비쌌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군말 없이 돈을 지불하고 방 열쇠를 받았다. 벽지엔 희미하게 얼룩이 남아있었고 전등은 이따금 점멸했지만, 곰팡이 특유의 냄새는 없었고 최소한의 가구는 맞춰져 있었다. 급한 대로 타협할만했다.

사실 잘 곳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씻고 옷도 갈아입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으나, 유즈리하에게 평온은 찾아오지 않았다. 얇은 벽 너머로 시끄럽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고 넘겼을 테지만, 오늘따라 신경질이 나 벽을 두드리고 항의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거 들었어? 기예르 파트롱이 마도구를 부당하게 강탈해 왔다고 저녁 뉴스에 속보 떴잖아.”

“무슨 소리야, 너 벌써 취했냐? 레스토랑 텔레비전으로 뉴스 볼 때 나도 같이 본 거 까먹었지!”

술을 마셨는지 발음이 약간 새는 목소리 여럿이 겹쳐 벽을 타고 들어왔다. 벽을 두드리려던 것도 잊고 유즈리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알코올이 혀를 느슨하게 풀었는지 말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변 사람들 다 충격받아서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잖아. 여행객으로 좀 눈치 보이더라.”

“우리가 왜 눈치를 봐? 속보 내용이 틀리지 않다면 벨스토렌이 외부인의 눈치를 봐야지. 예술의 도시이자 마도구의 성지로 유명해진 게 부당 계약과 도둑질 덕분이었다니.”

“맞아, 지난달에 결혼한 내 친척 동생 있잖아? 결혼한 사람이 몰락한 마을 출신이라더라. 플레사스? 신혼여행지로 벨스토렌을 추천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나 같아도 사기 계약으로 고향이 몰락했는데 그 사기꾼이 유명 도시의 부자 시장으로 떵떵거리고 있으면 암살 충동이 들긴 하겠다.”

경호를 훅 늘려야겠네. 그런데 그런 시장을 경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긴 할까? 남 일이라고 유쾌하게 입방아를 찧는 여행객들에게 짜증이 샘솟은 것도 잠시였다. 벌써 속보가 떴나? 레드캣 사칭범이 왕홀을 훔쳐 간 지 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라도 켜고 싶었으나, 낡은 모텔의 가장 싸구려 방에 텔레비전은 당연히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유즈리하는 건너편 방에서 취객들이 계속 떠들기를 기대하며 벽에 바짝 붙었다.

“2년 만에 돌아온 레드캣이 폭로한 거라며? 추가 증거물을 경찰과 법원에 동시에 발송했다니, 기예르 파트롱은 이제 도망갈 구석도 없어진 거지.”

“요구사항도 딱 하나라더라. 기예르 파트롱이 강탈한 마도구를 전부 정당한 주인에게 되돌려줄 것. 이렇게 보면 괴도 레드캣이 오히려 영웅 아니야?”

“하하, 그러면 우리 몰락한 마을들의 영웅을 위해 한 병 더 딸까?”

영웅은 염병. 갈수록 정보는 없어지고 개소리만 늘어가 유즈리하는 침대에 도로 털썩 앉았다. 레드캣이나 기예르 파트롱이나. 어느 쪽이든 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유즈리하는 제 유흥만을 쫓던 행동을 선으로 포장할 생각은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레드캣 사칭범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길 원하는 걸까?

유즈리하는 침대에 드러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곧 벨스토렌을 떠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 되뇌면서도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들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 원인을 모르지는 않았다. 담담한 평정 뒤에 숨겨진 배신감 어린 푸른 눈동자가 뇌리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달갑지 않은 잔상을 지우려 유즈리하가 눈을 감았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Written 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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