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님, 붉은 고양이를 잡아주세요!

사건번호 5. 범죄가 있다면 동기도 있다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유즈리하는 박물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보물은 보기엔 즐거웠으나, 그 역사적 배경이나 상징에 관해선 흥미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귀한 마도구와 예술품으로 유명한 벨스토렌에 거주한 지 거의 2년이 지났음에도 박물관 입장료 한번 내보지 않았는데, 고향에 살았을 때라고 마도구에 특별한 눈길을 주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관심 없던 유즈리하도 도케오 마을의 자랑이던 고양이 가면 마도구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북적이는 관광객 사이에서 밀려다니던 유즈리하가 전시대 앞에 못 박힌 듯 우뚝 섰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저와 부딪히는 바람에 욕하며 지나가는 건 깔끔하게 무시했다. 평소 활자를 필요 이상으로 읽지 않는 그의 눈이 전시대 옆에 걸린 설명판에 닿았다.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전시관 해설 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유즈리하가 고양이 가면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마도구에 관한 해설이 필요하실까요?”

뭐, 관심이 있다는 게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웃음 지으려던 걸 참고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바로 서비스직 미소를 띠며 가면을 손짓했다. 환한 조명 아래 붉은색을 입힌 나무가 탁하게 빛을 반사했다.

“이 고양이 가면은 1급 마도구로 고대 위르나 제국에서 제작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아시다시피 위르나 제국은 오랜 전쟁의 역사가 있으며….”

해설을 요청하긴 했으나 유즈리하는 직원의 목소리를 반쯤 흘려들었다. 어차피 도케오에서 학교 역사 시간에 지겹도록 들은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직원도 유즈리하가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마도구 역사를 빠르게 마무리 짓고 벨스토렌의 자랑으로 넘어갔다.

“이 마도구는 기예르 파트롱 시장님이 벨스토렌 밖에서 손수 구해온 귀물이랍니다. 얼핏 보기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수수한 외관임에도 그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사들여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볼 기회를 제공해주셨지요.”

아, 예. 이번엔 정말 비아냥이 튀어나올 뻔했다. 주말에 시간 때울 겸 들어온 무료 전시였다지만, 갈등을 빚어 강제로 쫓겨나는 건 내키지 않았기에 하고픈 말을 꾹 눌러 삼켰다. 그러나 표정 관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에 차라리 저 가면을 꺼내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술계에서 절대로 없어선 안 되는 분이죠. 시장님의 개인 소유 마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박물관에 2년째 전시를 허락해주셨답니다. 고양이 가면뿐만 아니라 다른 귀한 마도구도 빌려주셨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성왕의 레갈리아가….”

“미안한데 시간이 없어서 가볼게요.”

시장을 향한 찬양을 듣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려 자칫하면 싸움이 날 것 같았다. 유즈리하가 단호하게 말을 잘라먹자 직원은 당황했지만, 자리를 뜨는 그를 잡지 않았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전시관을 나와 뒤돌아보자, 관광객 틈새로 붉은 가면이 눈에 아른거렸다.

저 사람들은 이 고양이 가면을 벨스토렌 박물관에 전시하는 과정에서 내가 고향을 잃은 걸 알고 있을까? 유즈리하가 픽 웃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이 지긋지긋하고 고리타분한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버릇을 입에 달고 다니던 게 기억났다. 도케오 마을이 몰락하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돌아갈 마음은 없었을 테다.

하지만 자신이 그리 선택한 것과 타인에 의해 선택지를 빼앗긴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 않은가. 전시관을 바라보는 유즈리하의 갈색 눈동자가 적의로 빛났다.

묵직한 발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자마자 유즈리하가 벽의 난간에서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예술품 전시를 위해 설치한 난간이 도둑질에 요긴하게 쓰이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키득거림을 삼키며 유즈리하가 당당히 붉은 고양이 가면 앞에 섰다. 박물관이 폐장한 뒤 몰래 숨어 들어온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는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물론 충동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2주간의 시간이 걸렸다. 가면을 훔치겠다고 마음먹은 후 낮에는 박물관을 돌며 건물 구조를 익혔고, 밤에는 경비 순찰 루트를 파악하고 도주로를 살피다가 이른 아침에 집에 와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건강과 체력만큼은 자신 있는 유즈리하였지만 생각보다 고단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표를 고지에 두었다는 아드레날린 덕분인지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았다. 경비원이 예정보다 이르게 돌아오지 않는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유즈리하가 손을 가면으로 뻗었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나무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억지로 뺏어온 마도구로 예술계의 은인 행세? 웃기지 말라 그래.’

두 손이 가면을 움켜쥐었다. 유즈리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삐익 삐익!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고요하던 전시관 안에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가면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하긴, 2급 마도구인데 별다른 보안 조치 없이 전시해뒀을 리 없겠지.’

어쩐지 방범줄이 없어서 횡재다 싶었다. 멍청하게 넘겨짚은 제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치며 유즈리하가 도주로를 찾아 전시관을 훑었다. 그러나 전시관 문이 열리는 게 먼저였다.

“거기 누구야!”

철저하게 계획된 행동이 아닌 얼굴을 가리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유즈리하가 고양이 가면을 빠르게 뒤집어썼다.

고작 가면 하나 썼다고 사방이 조용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경보음을 들은 경비원이 시끄럽게 몰려들고 있었지만, 마치 텔레비전 화면 너머에서 구경하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유즈리하는 멍하니 서서 얼굴을 가린 가면만 만지작거렸다.

“가면을 벗어서 내려놓고 두 손 들어!”

그 누구도 총은 들고 있지 않았다. 경찰도 아닌 사설 경비업체 직원이 그런 위협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몸싸움을 벌일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뿐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저들은 귀한 마도구가 망가지기라도 할까 행동을 사릴 테고, 감과 민첩성에선 그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거기다 도주로도 미리 확보해두었다. 유즈리하가 가면 뒤로 씩 웃음 지었다.

‘잘난 기예르 파트롱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드레날린에 취해있긴 했지만 제 안위를 위한 최소한의 이성은 붙들고 있었다. 외관을 감춰주는 가면은 목소리까지 숨겨주지 않았기에 여전히 조심해야 했다.

“착용자의 외관을 인식하는 데 혼란을 심어줬기에 동물 가면은 정체를 감춰야 하는 첩자가 자주 애용하는 마도구였지. 붉은 고양이 가면을 비롯한 여러 가면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건 그 고양이 가면 하나로… 거기, 아이네 유즈리하! 제대로 안 듣고 있지? 이거 시험에 낼 거니까 졸지 말고 집중해!”

지루하기 짝이 없던 도케오 역사 수업이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이 희미한 추억처럼 스쳐 지나갔다.

유즈리하가 발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벽에 발을 디뎌 난간을 밟고 옆 창문에 올라탔다. 가면이 떨어지지 않게 끈을 조이고 창밖으로 뛰어내리자 우왕좌왕하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유즈리하는 가뿐하게 땅에 착지하고 그대로 내달렸다.

생에 처음 맛본 발끝까지 짜릿한 자극이었다. 기예르 파트롱에게 골탕 먹였다는 사실보다도, 고향의 마도구를 되찾았다는 뿌듯함보다도 유즈리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 벅찬 감각이었다. 사랑에 빠진 것만큼 강렬한 감정이 유즈리하를 휘감았다.

한참을 달려 아무도 없는 유흥가 골목에 다다라서야 유즈리하는 고양이 가면을 벗었다. 숨이 잔뜩 차 헐떡이면서도, 내일 근육통이 올 게 분명한 다리를 털어내면서도 활짝 피어난 미소는 시들 줄 몰랐다.

유즈리하가 두 손에 가면을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황찬란한 거리에서 멀어져 모처럼 별이 한두 개 눈에 들어왔다. 아직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아 유즈리하는 그 자리에서 별을 바라보며 한동안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괴도 레드캣이 벨스토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밤이었다.

* * *

유즈리하는 한 달 만에 쫄딱 젖은 상태로 할페른 저택의 대문을 넘어섰다. 오전부터 흐리더니 유흥가 입구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진 탓이었다. 짐에 우산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은 안 했기에 유즈리하는 냅다 뛰어서 급하게 초인종을 누를 수밖에 없었고, 발에 불나는 노력이 무색하게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그런 그를 보고 오리아나 할페른은 사자 갈기 같은 남색 머리카락이 격하게 흔들릴 정도로 대차게 웃었다.

“어째 여기 올 때마다 감기 걸리기 일보 직전인 것 같은데.”

“타고나길 튼튼해서 마지막으로 언제 감기에 걸렸는지도 기억 안 나는데요.”

자신 있는 발언은 무시당했고 유즈리하는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응접실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던 오리아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오리아나가 뜸 들이지 않고 새 여권을 그에게 밀어주었다.

“자. 돌아가는 길에 우산 하나 빌려줄게. 기껏 새로 만든 여권도 젖어서 쓸 수 없게 되면 곤란하잖아?”

“감사합니다.”

유즈리하는 사양하지 않았다. 태량과 사이가 틀어진 이상 또 여권 문제로 벨스토렌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기왕이면 그에 관한 주제로 대화 나누지 않고 일어서길 바랐지만, 곧 날아온 질문에 유즈리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오늘 태량 탐정하곤 같이 안 왔네. 많이 바쁜가 봐?”

그럼 그렇지. 유즈리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요즘 좀 바빴죠. 시장님의 단체 의뢰를 받아서 레드캣을 수사하고 있었거든요.”

혹시 몰라 준비해둔 적당한 답이 술술 나왔다. 대놓고 거짓말했다가 들키기보단 소소한 진실과 과감한 생략을 섞어 말하는 게 유리하다는 건 오래전에 터득했다. 진실은 어디서 드러날지 몰랐고,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으며, 이는 벨스토렌에도 해당했다.

정말 좁은 세상이었다. 얼떨결에 주운 탄생반지의 주인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인생이 무슨 드라마 연속극도 아니고. 유즈리하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오리아나가 이해한다는 투로 혀를 찼다.

“이틀 전 터진 스캔들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니 그쪽도 의뢰가 꼬여서 고생하고 있겠네. 아무런 상관없는 우리 사이에서도 시끌시끌하니까.”

이유는 잘못 짚었지만 반가운 화제 전환이었다. 유즈리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주제를 물었다.

“오리아나 씨는 이 스캔들에 관해 뭐 아시는 게 있나요?”

오리아나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왜, 알 것 같아?’라며 물어오는 금빛 눈동자가 답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여 유즈리하는 고개를 끄덕일뻔하다 애매한 고갯짓으로 선회했다. 별로 소용은 없었는지 오리아나가 깔깔 웃었다.

“그렇게 눈치 볼 필요는 없는데. 할페른이라는 이름이 아직 악명을 다 벗진 못했다지만, 내가 정보를 너무 많이 알려줬다는 이유로 널 묻어버리려고 하겠어?”

“오리아나 씨가 절 해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타인을 완벽히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요.”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리아나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다리를 꼬았다. 맹수를 닮은 눈이 유즈리하를 위협적이지 않게 응시했다.

“비관적이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당장 철석같이 믿었던 시장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벨스토렌 시민이 한둘이 아닐걸.”

“오리아나 씨도 시장님을 믿었었나요?”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유즈리하의 답을 그대로 따라 하며 오리아나는 앞에 놓인 접시에서 딸기잼이 발린 쿠키를 집었다. 오독오독 쿠키를 씹어 삼키며 유즈리하에게도 손짓으로 주전부리를 권한 오리아나가 입맛을 다셨다.

“오히려 놀랐다고 하는 게 거짓말이겠지. 할페른 패밀리도 마도구 유통 사업을 하고 있다 보니, 기예르 파트롱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거든.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여태 조용히 있었지만.”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가 오리아나는 쿠키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쿠키를 삼키고 손에 묻은 가루까지 탁탁 털고 나서 오리아나가 소파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사기를 쳤을 줄은 몰랐지. 시장직이며 재산이며 잃을 게 많은 사람이 참 대담하게도 일을 벌였다 싶어. 들킬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가 그렇게 꼭꼭 숨겨둔 비리를 털어낸 레드캣은 대체 누구일까?”

“저도 궁금하네요.”

유즈리하는 한 치 거짓 없는 진실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별개로 레드캣의 정체에 관한 열띤 토론은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만 일어나겠다고 눈치를 줬다. 오리아나가 씩 웃으며 먼저 소파에서 일어서 유즈리하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태량 탐정만큼이나 바쁠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아뒀군. 좀 시끄러워지긴 했지만, 벨스토렌에서 남은 시간 잘 보내고. 언제쯤 떠날 예정이지?”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일정상 기차표가 잡히는 대로 떠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참 아쉽군. 또 보자는 인사는 못 하겠고, 태량 탐정에게 안부 인사나 전해줘.”

깔끔한 마무리에 유즈리하는 그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거짓 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 * *

습한 공기가 시청 건물에 들어서는 태량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신발에 달라붙은 빗물을 털어내고 태량이 안내데스크로 향하며 주변을 힐끔거렸다. 평일 오후인 만큼 내부를 오가는 사람은 상당했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의아하지는 않았다. 레드캣이 시장의 비리를 폭로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후로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기예르 파트롱은 시청에 출근하지도 않고 자택에 처박혔고, 비서실은 간신히 필수적인 일 처리만 해내고 있었다. 수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예르 파트롱은 아직 공식적으로 벨스토렌의 시장이었으나, 현 사태로 판단하자면 사실상 시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작금 시장 비서실이 제일 정신없이 바쁘리라고 예상했던 터라 태량은 약속 시간을 맞춰 오면서도 상대가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는 안내 직원의 말에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10분 정도 지나자 다른 직원이 로비에 앉아있던 태량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태량 탐정님. 저를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설마 하는 마음을 안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꼭대기 5층에 도착한 태량을 맞이한 건 태량을 시청으로 불러낸 안비체오 에스트란 본인이었다. 그가 고개만 끄덕 숙이는 태량을 보고 옅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직접 전화까지 드려서 일정을 잡았는데, 어째서인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시는군요.”

“에스트란 씨는 지금 벨스토렌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 하나일 텐데, 제게 따로 내주실 시간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안비체오는 지체하지 않고 태량을 데리고 온 직원을 보낸 뒤, 비어있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커피를 예의 바르게 거절하며 태량이 테이블 한쪽에 앉았고, 안비체오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으나, 안비체오의 빠듯한 일정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저번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어서 탐정님을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성의를 보여 탐정님의 사무실로 찾아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찮아 이곳까지 번거롭게 걸음 하게 한 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안비체오의 깍듯한 말에 태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즈리하의 일이 터지고 나서 머리가 워낙 복잡해 안비체오의 추궁은 거의 잊고 있었다. 태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따지자면 안비체오의 추측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진지한 사과를 받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안비체오는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거듭 용서를 구했다.

“애먼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갔는데 어떻게 그냥 넘기겠습니까. 그날 유즈리하 조수님이 현장에 없어서 레드캣과 동일 인물이 아닌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정말 아찔할 뻔했습니다.”

아마 다른 의미에서도 아찔하긴 했을 터다. 태량은 꺼낼 말을 찾지 못해 마른세수만 하다가 무릎 위로 손을 내려놓았다.

“정말 괜찮아요. 유즈리하도 이해할 거예요.”

“조만간 유즈리하 조수님에게도 직접 사과드리고 싶은데, 일정을 맞춰볼 수 있겠습니까?”

불편한 상황을 무마하려던 태량에게 폭탄 같은 발언이 떨어졌다. 급하게 다시 흔들려던 머리를 멈추고, 태량은 고민하는 척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유즈리하가 이사 준비로 바빠서, 제가 말을 대신 전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직 레드캣에게 시장 비서가 레드캣으로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상황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유즈리하와 사이가 틀어진 사실이 그의 귀에 들어가서도 안 됐다. 철저한 성격의 안비체오라면 그 이유를 반드시 물을 테고, 태량이 제대로 둘러대지 못한다면 유즈리하의 비밀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실상 그 비밀을 지켜줄 의무가 없다는 걸 태량도 알았다. 하지만 아직 정의하지 못한 감정이 태량의 입술을 굳게 걸어 잠갔다. 저를 속였다는 배신감보단 쌓인 정이 컸던 모양이라고, 태량은 추측했다. 싸움 아닌 싸움 이후 유즈리하가 떠난 날을 돌이키면 여전히 씁쓸했다.

“…알고 있었어.”

차라리 깔끔한 시인 대신 구차한 변명이라도 들었으면 덜 심란했을까. 깊은 생각에 빠져 태량은 뒤늦게 안비체오가 저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아니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았기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안비체오에게는 절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태량은 고개를 저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답변했다.

“고민은 저보단 시장님의 문제와 레드캣 체포 의뢰를 동시에 감당하는 에스트란 씨가 많으시겠지요.”

“그 건에 관해 말씀드릴 것도 있습니다.”

사적인 대화에서 공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친절한 미소에서 사무적인 표정으로 전환한 안비체오를 보며 태량도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깍듯이 바로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릴 뻔했다.

“곧 공문으로도 나가겠지만, 시장님이 의뢰하신 레드캣 체포 의뢰는 전면 취소될 예정입니다. 태량 탐정님이 특히 고생해주신 만큼 조금이라도 미리 알려드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시장의 의뢰가 일시 중단될 수 있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아예 취소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태량은 본의 아니게 긴 시간 침묵했다. 테이블 밑으로 두 손을 조용히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던 태량이 머리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질문을 꺼냈다.

“그렇게 시청의 상황이 심각한가요?”

“의뢰를 관리하던 인력이 빠진 것도 사실이지만, 시청보단 시장님의 개인 문제가 컸습니다. 현재 기예르 시장님이 아닌 레드캣을 지지하는 시민과 탐정도 조금씩 늘고 있어서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까요.”

태량은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이 납득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심란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안비체오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사과해왔다.

“그동안 쏟으신 노력과 시간에 비해 허무한 결말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상황이 안비체오의 탓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태량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시장이 쉽게 성왕의 레갈리아를 되찾는 걸 포기했다는 게 놀라웠지만, 사기 거래로 얻은 보물인 만큼 의뢰를 계속 진행할 명분이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자신이 레갈리아의 정당한 주인이라 주장한 레드캣의 말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벨스토렌이나 기예르 파트롱이나 레갈리아를 소유할 자격을 주장하기에 꺼림직한 점이 많았다.

도시 밖의 여론도 썩 좋지 않았다. 인기 있던 시장의 추락과 화려한 유명세에 숨겨졌던 도시의 어두운 내면은 좋은 먹잇감이었고, 기자가 달라붙어 보도를 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 도적의 도시 벨스토렌의 치부. 부와 유명세 뒤에 숨겨진 기예르 파트롱의 악행의 진실은? >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뉴스는 벨스토렌과 타 도시 가리지 않고 퍼져나갔다. 기예르 파트롱에겐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저택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장 그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이 본인을 인터뷰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까.

시장직 해임은 기정사실이었다. 더 나아가 기예르 파트롱이 계약 사기죄로 체포될 가능성도 높았다. 레드캣과 사라진 성왕의 레갈리아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나, 마도구를 되찾는다 해도 벨스토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정연한 논리에 태량이 말을 얹을 곳은 없었다. 레드캣의 추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지극히 사적이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탄생반지의 서늘한 촉감이 느껴져 태량은 괜히 손깍지를 꼈다. 탄생반지를 되찾으면 레드캣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유즈리하라는 난제가 그 틈새로 스며들었다.

유즈리하와 레갈리아 도둑의 관계, 진짜 레드캣과 사칭범의 관계. 그 사이에 끼어버린 자신.

정말 이대로 모르는 척 레드캣을, 유즈리하를 두고 가도 되는지 태량은 확신할 수 없었다.

* * *

난관 앞의 난관이었다. 편도 기차표를 끊으러 역까지 갔다가 10분 만에 퇴짜를 맞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곧 기차가 들어올 예정인지 북적거리는 플랫폼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유즈리하는 느릿하게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번 주 내로 출발하는 기차표는 전부 매진입니다.”

여름휴가 시즌도 끝난 마당에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 저도 모르게 창구 직원에게 따져 물으려던 유즈리하의 시선이 옆에 붙은 광고지에 닿았다. 낯익은 문구에 눈가를 찡그리던 유즈리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요.”

유즈리하의 손끝이 향하는 곳을 잠깐 바라본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박까지 입혀 휘황찬란한, 그러나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광고지를 보며 직원이 혀를 찼다.

“네, 성왕의 레갈리아 전시 때문에 관광객이 몰려서 표는 진작에 매진이었어요.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 나온 취소 표는 도시 밖에서 들어오는 기자단이 매수해갔고요. 그러고 보니 이제 저 광고지 떼어야겠네요.”

하는 수 없이 유즈리하는 다음 주 화요일 오전에 출발하는 표를 예매하고 돌아섰다. 어쩌겠나, 준비성 부족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의도치 않게 닷새라는 애매한 시간이 떠버린 유즈리하는 지갑부터 확인했다.

“…아껴 써야겠네.”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필요한 모텔값을 빼고 나면 간신히 밥 먹을 돈만 수중에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태량의 조수 일을 하며 한 달간의 보수를 선지급 받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밖에서 노숙해야 할뻔했다.

유즈리하는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닷새는 아무런 일정 없이 지내기엔 꽤 긴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단기 알바를 구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았다.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고민에 빠진 유즈리하 앞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벨스토렌에 처음 오셨… 유즈리하, 우리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 있지 않았냐?”

돌돌 말린 신문을 한가득 품에 안은 청년이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와 별로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를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밉지 않게 쏘아붙였다.

“오늘도 신문 한 부 3달러에 팔아보려고?”

“에이, 고객님. 요즘 물가가 올라서 50센트는 더 얹어주셔야… 뭐야, 너 왜 이래.”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유즈리하가 자기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신문 판매 알바생이 당혹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슬쩍 빼내려는 움직임을 무시하고 유즈리하가 다짜고짜 부탁을 내뱉었다.

“그 알바, 나도 시켜주면 안 돼?”

길게는 말고, 딱 사흘 정도만. 나 우체국 알바 끝나서 할 일도 없어. 계약서 안 써도 돼. 용돈벌이만 돼도 좋으니까. 알바생이 떨떠름하게 말을 청산유수처럼 뱉는 유즈리하와 품에 있는 신문을 번갈아보았다. 그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가 싶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오케이를 내리자, 유즈리하가 환호했다.

“어차피 이거 내가 다 팔 수 있는 양도 아니니까, 너한테 일 좀 나눠준다 해도 별 상관은 없겠지. 그런데 너 오토바이는? 우체국 배달은 몰라도 이건 발로 뛰어야 할 텐데?”

“아, 그거.”

유즈리하도 잊고 있었다. 면허정지가 풀린 지 좀 됐지만, 태량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바빴던 나머지 반납했던 렌트 오토바이를 다시 빌리는 걸 깜빡했다. 지금 와서 빌리기엔 도시를 떠나기까지 닷새밖에 남지 않아 들어가는 돈에 비해서 손해였다.

“반납했어. 발로 뛰는 거야 문제도 없고. 어느 지역 위주로 돌면 돼? 우리 영역이 겹치면 효율도 떨어질 거 아냐.”

일리 있는 말이라며 알바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유즈리하가 시선을 돌리자 높게 올라간 유흥가의 호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선심 쓰듯 말했다.

“네가 유흥가 쪽을 돌아. 예술의 거리는 내가 더 빠삭하게 꿰고 있을 테니 이렇게 나누는 게 나을 거야.”

네가 아무리 예술의 거리를 잘 안다고 해 봤자 나만 할까. 수익이 좋은 거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속셈이 훤히 보여 속으로 투덜댔지만, 유즈리하는 군말 없이 신문이나 나눠달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차피 사탕값 벌이이자 심심풀이로 제안한 일이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알바생에게 신문 원 값을 건네주자, 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네가 원할 때 퇴근해도 돼. 신문 빨리 팔면 일찍 끝나는 거고, 아니면 네 손해고. 내일도 할 거야? 오케이, 탐정 거리에서 아침 7시에 보자.”

“뭐? 그렇게 일찍? 왜 하필 탐정 거리인데? 차라리 예술의 거리에서 만나자.”

“당일 신문이 아침에나 잘 팔리지, 조금만 발 늦으면 경쟁자들에게 치여서 재고 떨이도 못 한다고. 그리고 신문은 탐정 거리에서 제일 싸게 살 수 있다는 것도 모르냐? 잔말 말고, 그럼 난 탐정 거리 신문 배달부터 하고 있을 테니까, 9시까진 와.”

뭐라 더 불평하기도 전에 그가 신문 싸게 판다는 멘트를 외치며 발 빠르게 사라졌고, 유즈리하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제 품에 안긴 신문을 째려보다가 유흥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고작 며칠 동안 잠깐씩 탐정 거리에 돌아다닌다고 해서 태량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아무리 세상은 좁다지만, 벨스토렌이 작은 도시는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고민을 접어두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 * *

알람 시계를 가방에 챙겨온 게 다행이었다. 우체국 알바를 뛰고 그 후엔 태량의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였다지만, 유즈리하는 기본적으로 야행성 인간이었고, 요 며칠간 새벽까지 돌아다니다가 해가 뜨면 잠이 드는 생활을 반복해왔다. 그 때문인지 알람이 세 번째 울렸을 때에서야 간신히 침대에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관둘까….”

약속을 생까고 다시 드러누워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유즈리하는 얇아지는 지갑을 억지로 떠올리며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새로운 도시에서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굶을 생각이 아니었다면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놔야 했다.

오전보다 밤에 활기가 도는 유흥가 지역답게 유즈리하가 모텔을 나왔을 무렵 거리는 한산했다. 일찌감치 나와 사람이 몰리기 전에 예술의 거리로 향하는 관광객, 주택가에서 출발해 유흥가로 출근하는 벨스토렌 주민, 재료 준비를 위해 일찍 도착한 식당 종사자, 그리고 가끔 유즈리하처럼 그 속에 섞여 들지 않는 사람 몇이 전부였다.

방금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저 붉은 머리의 젊은 청년처럼.

본능적으로 기척을 죽이고 뒤를 밟기 시작한 게 먼저였고, 저 선명한 붉은색이 어쩐지 낯익다는 걸 인지한 게 나중이었다. 설마 싶어 조용히 거리를 두고 따라붙다가 유즈리하가 몸을 벽 뒤로 숨기고 건물의 비상 사다리를 올랐다.

‘위에서 따라붙으면 들키지 않고 얼굴 한번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유즈리하의 시도는 실패했다. 거리를 조금 더 좁히는 데엔 성공했지만, 영 각도가 맞지 않아 붉은 머리카락 가득한 뒤통수만 실컷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유즈리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레드캣 사칭범이다. 저번에 가까이서 봤던 터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움직임, 체격, 소소한 습관은 유즈리하의 날카로운 눈썰미에서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세상은 좁고, 벨스토렌은 그보다 좁았다.

사칭범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낡은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유즈리하가 잠시 시차를 두고 뒤를 따랐다. 그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유즈리하가 피식 웃었다. 고티카 비상계단을 올랐던 때가 데자뷔처럼 기억 속에 겹친 까닭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저놈의 정체를 알아내고 말리란 다짐으로 유즈리하가 계단을 밟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꽤 높이 올라가는 걸 보니 꼭대기 층인 3층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여전히 소리 내지 않게 주의하며 2층에 도착한 유즈리하는 순식간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여기 불법 심부름센터 천지네.’

벨스토렌은 탐정 사무소가 합법화된 지 오래되었지만, 모든 탐정 지망생이 시험에 붙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건 아니었다. 개중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떨어져도 몇 번이고 도전하고는 했지만, 당장 일이 필요하고 다음 시험 기간까지 기다릴 수 없는 몇몇 이들은 불법 심부름으로 눈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벨스토렌은 불법 심부름센터를 잡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정된 인력을 쏟기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했고, 이들의 수요가 의외로 커서 하나를 잡으면 두 개가 생겨나곤 했다. 도시의 허가를 받은 탐정 사무소와 달리 불법 심부름센터에서 받아주는 의뢰의 폭이 훨씬 넓기 때문이었다.

법과 윤리에 어긋나는 의뢰부터 타 도시가 엮일 수도 있는 문제까지, 대부분 불법 심부름센터는 의뢰금만 충분히 받는다면 의뢰와 의뢰인을 가리지 않고 받았다. 꼭 불법적인 의뢰가 아니더라도, 극비에 의뢰를 맡기길 원하는 사람들도 종종 탐정 사무소가 아닌 불법 심부름센터를 찾고는 했다. 그래서 그들은 탐정 사무소처럼 드러내놓고 영업은 못 할지라도, 이런 구석진 유흥가 건물 내에 위장용 업소를 세우고 알음알음 의뢰를 받았다.

유즈리하가 벨스토렌에 정착했던 시기가 경찰이 열심히 불법 심부름센터를 색출해내던 때와 맞물리지만 않았다면 그 또한 이쪽으로 눈을 돌렸을지도 몰랐다. 웬만한 단기 알바보다 벌이가 짭짤했으니, 정착금을 필요했던 유즈리하에게 상당히 유혹적인 선택지였다. 유흥가를 기웃거리던 첫날, 불법 심부름센터 운영자가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걸 보고 빠르게 관심을 껐지만 말이다.

‘하긴 괴도로 활동했던 내가 불법이니 뭐니 할 입장은 아닌가. 그런데 사칭범은 뭘 의뢰하러 이곳을 찾은 거지?’

도시에서 도망치기 위한 여권? 아니면 훔친 마도구의 처분? 어느 쪽이든 사실상 유즈리하가 손을 써서 방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떠나는 기차표까지 끊어놓은 마당에 그럴 위험부담을 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유즈리하는 사각지대에 숨어 사칭범이 들어간 문을 확인하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제게 엿을 먹여주었으니, 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알아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탁 트인 옥상엔 아무도 없어서 유즈리하는 눈치 보지 않고 적당한 위치를 잡아 난간을 훌쩍 넘어갔다. 조심조심 튀어나온 벽돌 틈새를 붙잡으며 창문 위에 붙은 간판에 서서 중심을 잡자 열린 창문 사이로 목소리가 여럿 흘러나왔다. 그중 귀에 익은 변조기를 쓴 음성도 있었다.

“확실한가? 가서 영업 못 하게 적당히 겁만 주고 돌아와 달라? 어디 한군데 불구로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도 어려운 건가?”

“어려울 건 없지. 하지만 나중에 일을 제대로 안 했다며 의뢰금을 주지 않으면 우리도 피차 곤란해서.”

“그럴 일 없게 의뢰금은 선불로 전부 지불할 생각이야.”

히죽히죽 웃는 소리와 거래가 시원해서 좋다는 감탄 위로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창문을 넘볼 수 있는 각도는 아니었던 터라, 유즈리하는 대금을 주고받고 있겠거니 짐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칭범의 변조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지. 의뢰 완수 확인은 내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살갑게 인사할 관계는 아니었는지 그것을 끝으로 문이 열리고 쾅 닫혔다. 사칭범의 뒤를 계속 밟으려면 지금 옥상으로 기어 올라가 계단을 내려가야 했기에 유즈리하는 중심을 잃지 않게 조심히 몸을 돌려 튀어나온 벽돌을 붙잡았다. 한쪽 발을 간판 위에서 뗀 순간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추정되는 걸걸한 목소리가 물었다.

“주소가 여기라고? 탐정 거리는 복잡하니 길 잘들 외워둬.”

“걱정하지 마셔. 탐정 거리 한두 번 가보나? 목표 이름만 잘 외워두면 되지. 태량 탐정사무소. 어렵지도 않네.”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위로 뻗은 손을 헛짚어 유즈리하는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사칭범에 관한 생각이 단번에 날아간 채, 유즈리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숨을 죽였다. 혹시 잘못 들었나 한 의문은 이어진 대화로 싹 지워졌다.

“태량 탐정사무소. 이 사진이 그 태량 맞지? 레몬색 머리카락, 20대 여성, 하늘색 바람막이. 언제 가는데?”

“미뤄둬서 뭐 해? 간단한 일이니 지금 준비하고 찾아가자.”

나가기 전에 창문 닫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유즈리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최우선 순위부터 정한다. 우선 들키지 않고 빠르게 옥상으로 도로 올라가야 했다. 다행히 최근에 이보다 까다로운 벽을 탄 적 있어서 유즈리하는 별문제 없이 몇 초 이후 난간을 붙잡고 옥상 바닥을 디뎠다. 가뿐히 뛰어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문손잡이를 잡고 유즈리하가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내려가선? 레드캣을 쫓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으나, 태량의 사무실에 깽판을 쳐놓을 거란 얘기를 듣고서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얼굴 보기 껄끄럽다는 변명으로 넘어가기엔 사안이 심각했다. 엿들은 의뢰 내용은 겁만 주라고 했지만,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불법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선을 넘어 태량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런데 레드캣 사칭범은 왜 태량을 목표로? 나라면 모를까, 태량에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설마 나 때문인가. 내가 아직 태량의 조수로 남아있다고 생각해서? 그럴싸한 추측에 유즈리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신빙성 없지는 않았다. 사칭범이 제게 적의를 보이는 이유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 화살이 태량에게 향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헤어졌든, 레드캣 사칭범 앞에서 태량은 결국 유즈리하를 감싸주지 않았는가. 유즈리하가 마음을 굳히고 계단을 날듯이 뛰어 내려갔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유흥가에서 벨스토렌 반대편에 있는 탐정 거리까지 뛰어올 수는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출근 끝물의 만원 버스에 구겨 탔다. 버스가 이동하는 내내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유즈리하는 탐정 거리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뛰는 게 빨랐다.

당연히 탐정 거리는 입구부터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간간이 가볍게 밀쳐진 이들에게 험한 말을 들어가며, 유즈리하는 익숙한 골목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한 달간 꾸준히 출근했던 사무실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낯익은 문 앞에 선 유즈리하는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급했다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왔는데 문을 열어주기는 할까? 물론 태량이 그를 모르는 체할 속 좁은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막상 얼굴을 마주하려니 온갖 상념이 들어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유즈리하가 심호흡했다. 어색하고 나발이고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쾅, 쾅. 절대 얌전하지는 않은 다급한 소리가 유즈리하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 태량뿐만 아니라 두 사무실 건너에서도 들렸을 법했다. 하지만 들어오라는 답도, 직접 열어주러 다가오는 발소리도 없이 문 건너편은 고요했다.

정말 나 못 본 척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손잡이를 한 번 흔들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태량은 사무실에 있을 땐 의뢰인의 편의를 위해 잠금장치를 늘 풀어놓았다. 문이 잠겨있다는 건 아직 출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일찍 출근했다가 다시 외출했다는 뜻이었다. 전자면 조금 기다리면 될 터지만, 여태 보아온 태량의 생활 습관을 생각하면 다른 일로 외근 나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를 어쩌나. 끈질기기로 악명 높은 심부름센터가 목표물이 늦게 돌아온다고 포기하고 떠날 리 없었다. 태량이 제대로 된 실전 훈련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불시에 여러 명에게 습격받는다면 다칠 위험이 컸다.

‘태량에게 소형 연락용 마도구는 없었지.’

유즈리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려다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식힐 겸 사탕을 입 안에 넣었다. 새콤하게 혀 위에서 퍼지는 당분의 맛을 음미하며 그가 건물 부근 턱 위에 털썩 앉았다.

기다려야 할까? 이건 반박의 여지 없이 당연했다. 태량이 됐든, 심부름센터 사람들이 됐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채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태량이 먼저 온다면? 껄끄러울지언정 일이 쉽게 풀릴 터였다. 하지만 반대로 심부름센터 쪽이 사무실에 먼저 도착한다면?

아무도 오지 않는 구석진 유흥가의 골목이라면 모를까, 탐정 거리에서 대놓고 싸움을 벌이기엔 그에게도 부담이 컸다. 레드캣 사칭범이 아직 벨스토렌에서 판치고 다니는 걸 확인했으니, 불필요한 관심이 제게 집중되는 건 피해야 했다. 차라리 제가 경찰에 신고했으면 했지, 신고당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가만,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을까? 퍼뜩 떠오른 발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유즈리하가 1초 만에 도로 주저앉았다.

‘내가 경찰서에 가는 건 토끼가 호랑이 굴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경찰에 당당히 도움을 청하기엔 켕기는 게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어차피 누가 먼저 도착할지도 모르는 판에 자리를 비우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에 유즈리하는 머리만 열심히 굴렸다. 가장 가까운 통신 센터가 어디였지? 뛰어갔다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나중에 추적당할 위험은 없을까?

머리가 아파져 땅을 노려보던 와중 멀리서 누군가 소리 지르는 게 들려왔다. 시끄럽게 무슨 난리람.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더 꺼낼지 고민하던 차에 목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야! 유즈리하!!”

목소리가 익숙했다기보단 제 이름을 잘못들을 수 없어 인상을 쓰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앞에 선 씩씩거리는 청년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넌 사람이 부르면 돌아보는 척이라도 해라!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도통 보이지 않아서 한참 찾았네.”

“잘됐다. 부탁 하나 하자.”

다짜고짜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을 보내는 신문 판매 알바생의 혼란은 유즈리하의 알 바 아니었다. 알바생의 혼란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 좀 해줘. 오는 길에 불법 심부름센터 사람들이 여기 들이닥칠 거라고 얘기하는 걸 엿들었거든? 내 친구가 여기서 일하는데, 그 친구를 지금 내가 찾으러 가야 해서. 급해서 그런데 대신 부탁할게.”

알바생의 얼굴이 황당하게 태량 탐정사무소의 간판을 가리키는 유즈리하의 손가락 끝과 뻔뻔하게 웃는 얼굴을 오갔다. 네가 친구도 있었냐? 나온 말이 저거라 미소가 험악하게 변할 뻔한 걸 참고 유즈리하가 다시 매달렸다. 관광객에게 신문을 비싸게 팔아먹을지언정,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냥 돌아서지 못할 정도로 양심 있는 사람이라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경찰에 신고만 하면 되는 거지?”

예상대로 알바생은 오래 가지 않아 백기를 들었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고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태량이라는 탐정을 노리고 있다고 신고해주면 돼. 된다면 페라노 경감님에게 꼭 전달해달라고도 해주고. 아, 나한테서 들었다고는 말하지 마! 절대로! 부탁할게, 땡큐!”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알바생이 순순히 전화를 찾으러 사라졌다. 발이 넓은 친구니 아마 어디서든 전화를 빌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테고, 어쩌면 심부름센터 사람들보다 경찰이 먼저 도착할 확률도 있었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유즈리하가 골목을 나왔다. 잠시 멈췄던 발이 단호하게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할 일은 이제 없을 것 같고. 조금 늦었지만, 그 사칭범을 잡으러 유흥가로 돌아가 볼까.’

제게 왜 원한을 품었는지조차 알지 못해 억울했던 마음에 태량의 일까지 겹치니 오기가 생겼다. 레드캣 사칭범을 체포하거나 신고할 처지는 못 되었지만, 여기서 물러서기엔 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티카 박물관에서 이미 한 번의 패배를 겪었던 유즈리하였다.

“두 번이나 봐줄까 보냐.”

유즈리하의 날카로운 눈이 위험한 이채를 띠고 반짝였다.

* * *

옛날 신문을 찾아보려 도서관에 들렀다가 사무실에 돌아온 태량을 반긴 건 속된 말로 개판이었다. 사이렌은 껐다지만 요란한 불빛을 번쩍이는 경찰차 두 대가 좁은 골목에 비집고 들어선 건 의외였고, 제 사무실 앞에서 수갑을 찬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연행되어 나오는 건 경악스러웠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구경하는 몇 사람을 헤치고 현장에 다가선 태량을 경찰관이 아는체했다.

“안녕하세요, 태량 탐정님. 같이 경찰서에 가서 상황 설명을 해드려야 하는데, 지금 시간 되실까요?”

없는 시간이라도 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태량은 자료를 가득 넣은 무거운 가방을 고쳐 매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차에 곱지 않게 쑤셔 넣어지던 사람이 태량을 힐끗 보고 나지막하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명확하게 들리지 않아도 욕설이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태량이 낯선 얼굴을 빤히 관찰하다 경찰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먼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불법 심부름센터 직원이라고 추정됩니다. 탐정님의 사무실에 강도가 들 거라는 제보가 들어와서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태량이 눈을 깜빡이다 다시 수갑을 찬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이미 경찰차 문이 닫힌 뒤라 어두운 차창 너머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태량과 대화하던 경찰관이 뒤에 세운 차로 걸어가며 손짓했다.

“이 이상은 저희도 잘 알지 못해서, 서에 직접 가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별수 없이 태량은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서에 다다라서도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태량과 분리되어 먼저 취조실로 연행됐기에, 그를 맞이한 건 안면이 있는 다른 경찰관이었다. 한때 태량의 선배였던 이가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안쪽 대기실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누며 대기실로 따라 들어간 태량의 눈에 가시방석에 앉은 표정의 청년이 들어왔다.

“여기 콜 씨가 불법 심부름센터 직원들이 네 사무실을 노리고 있다고 신고해주셨어. 우리는 신고 받고 출동해서 그 사람들이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가려는 걸 검거했고.”

말없이 듣던 태량이 콜이라 불린 청년에게 머리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콜은 극구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뜨고 싶다는 듯 대기실 문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러니까, 저도 다른 사람에게서 부탁받고 한 일이라니까요. 제가 직접 들은 건 아니라서 이 이상은 정말 말해드릴 수가 없어요.”

“그 제보자와 연락이 가능할까요?”

“친구가 익명으로 남기를 강력히 원해서….”

끝까지 거부하니 경찰관도 별도리가 없는지 어깨를 으쓱하고 태량을 향해 돌아섰다. 태량은 이상하게 청년의 얼굴이 친숙해서 티 나지 않게 그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경찰관이 자신에게 말을 걸자 하는 수 없이 눈을 뗐다.

“배후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건 체포된 저 심부름센터 사람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지 봐야겠지. 그동안 탐정 거리의 순찰을 강화하고 네 사무실 부근을 잘 주시하라고 얘기해두긴 할 텐데, 혹시 모르니 며칠은 재택근무를 추천하고 싶네.”

태량이 제 한 몸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충고를 하며 경찰관이 콜에게 예의 바르게 웃어주었다. 협조에 감사했고 이제 가도 된다는 말에 콜이 화색을 띠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 태량을 경찰관이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뭐라도 알게 된다면 연락해줄게. 더 필요한 조치가 있으면 얘기해주고.”

“아니요,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충분한… 맞다, 민체코 씨 사건 때 그 사람!”

“응?”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는 경찰관에게 태량이 짧게 사과하고 콜이 떠난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예의를 지켜 인사를 마쳤겠지만, 갑자기 떠오른 기억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며 경찰서에서 뛰쳐나온 태량은 길을 건너기 직전 콜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저기, 저! 콜 씨!”

이름을 기억해내 부르자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찰관처럼 제보에 관해 캐물으려고 왔다는 걸 짐작했는지 난감한 낯이 되었으나, 그가 도망가는 것보다 태량이 질문을 꺼내는 게 빨랐다.

“유즈… 유즈리하 친구 맞죠?”

“아는 사이인 건 맞는데, 이걸 친구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좀 원수 같다고 해야 하나….”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릴 줄 알았다면 부탁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고 중얼거리는 콜을 보며 태량은 확신을 얻었다. 이 제보에 유즈리하가 관련되어 있었다. 태량이 최대한 부드럽게 목소리를 다듬고 그에게서 정보를 끌어내려 머리를 굴렸다.

“심부름센터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라고 알려준 사람이 유즈리하 맞아요?”

경찰에 얘기하지 않을 테니 자신에게만 말해달라고 거듭 부탁하자 콜이 마지못한 얼굴로 술술 불기 시작했다. 어쩌면 태량을 빨리 떨쳐내려는 의도였을지도 몰랐지만, 그것까진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가 털어놓는 귀중한 정보였다.

“네, 뭐. 걔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저도 몰라요. 어쩌다 엿들었다고 했었나. 그냥 자기 대신 신고해달라고 해서 했는데…. 증언 때문에 서까지 끌려올 줄 알았으면 그 자식한테 네가 하라고 할 걸. 탐정님이야말로 걔 친구 맞죠? 그쪽 찾으러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못 만났어요?”

예상치 못한 전언에 태량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콜이 입을 삐죽이고 신문이 삐져나온 가방을 고쳐 맸다.

“혹시라도 보게 되면 너 때문에 하루치 장사 망쳤으니 보상하라고 얘기 좀 해줘요. 사흘만 알바시켜달라고 했는데 딱 이틀째 되는 날에 이러니 어이가 없어서.”

그가 짧게 인사를 남기고 길을 건너 사라진 이후에도 태량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유즈리하가 떠난 이후 편치 않았던 마음이 하나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구차한 변명이라도 들어야겠다. 아니, 들어봐야 했다. 과거의 레드캣에 관해서, 제 탄생반지에 관해서, 그리고 지금 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지도. 판단은 그 이후로 미뤄도 늦지 않았다. 콜이 사라지기 전에 유즈리하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태량이 그의 말을 되짚었다.

심부름센터 사람들의 말을 엿들었다고 하니 불법 심부름센터가 밀집한 유흥가부터 둘러보면 마주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유즈리하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태량은 제게 주어진 실마리의 끝을 잡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 * *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팔짝 뛰겠네.”

주말을 전부 바쳐 유흥가를 뒤엎었지만 이렇다 한 결과를 얻지 못한 유즈리하가 레몬 소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고 상큼한 액체가 따끔따끔하게 목을 축이자 기분은 조금 나아졌으나, 이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짜증은 죽지 않고 꿈틀거렸다.

물론 유즈리하도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기를 기대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관광 도시인 만큼 유흥가 지역은 작지 않았고, 큰 거리가 아닌 좁은 골목까지 살피며 돌아다니려면 하루를 꼬박 바쳐도 모자랐다. 하지만 사흘째 이곳을 빙빙 돌고 있는데 사칭범의 붉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하며 유즈리하가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찼다.

벌써 일요일 저녁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현명했겠지만, 날린 시간이 억울해서 유즈리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오늘까지만 찾아보자, 오늘까지만. 오늘도 못 찾으면 내일은 그냥 놀고먹고, 모레 기차 타고 떠나련다. 유즈리하가 얇은 후드를 머리 깊숙이 눌러 쓰고 어슬렁거리던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길가 쓰레기통에 빈 캔을 던져 넣자, 안쪽에서 떨어지며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음이 들렸다. 유즈리하가 눈을 찌푸렸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나도 확 심부름센터에 그 인간 찾는 의뢰 넣어버릴까 보다.”

당연히 투덜거림을 빙자한 농담이었다. 불법인 건 둘째치고 유즈리하는 심부름센터의 비싼 의뢰금을 치를 재력이 없었다. 돈은 부족하고 시간만 많은 유즈리하는 억울하더라도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해도 저물어가니 몇 시간만 더 돌아볼 생각이었다. 조금만 고생하자며 스스로를 달래고 돌아서는 유즈리하의 앞을 커다란 그림자가 막아섰다.

“잠깐만 저와 같이 가주시죠.”

“내가 왜요?”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드리우는 압박감에 얼떨결에 존대를 붙이긴 했지만, 말투는 뾰족했다. 수년을 벨스토렌 뒷골목을 누비면서 시비 걸린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터라 유즈리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도주로를 살폈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 남자에게 무언의 확신을 준 듯 그의 태도가 한층 위협적으로 변했다.

“소란 피우는 것보다 얌전히 따라오는 게 이로울 겁니다. 경찰에 신고당하는 건 그쪽도 원하지 않을 텐데요.”

유즈리하의 시선이 매서워지는 동시에 남자가 몸을 숙였다. 그 움직임 때문에 옷깃에 가려진 남자의 목이 드러나자, 유즈리하의 눈이 커졌다.

* * *

벨스토렌의 유흥가에서 주말 내내 허탕 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태량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껄끄럽게 헤어진 건 맞지만, 제가 찾아다닌다는 사실도 모를 텐데 유즈리하가 일부러 피하는 건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그가 어느 모텔에 묵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 앞에서 죽치고 있었을 텐데, 콜이라는 신문팔이 청년도 그건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도 사흘 동안 우연히 얼굴 한 번 스쳐 지나갔을 법한데,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운이 정말 없었다. 각자 다른 목표를 가지고 복잡한 뒷골목만 골라서 다닌 탓이었다.

사실 유즈리하가 유흥가에 있으리란 것도 말 그대로 추측뿐이었기에 태량은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벌써 벨스토렌을 떠난 건 아니겠지? 사흘만 알바시켜달라고 했다던 말을 떠올리면 유즈리하가 오늘내일 떠난다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다른 곳도 좀 찾아볼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예술의 거리나 기차역으로 가볼까.”

“찾는 사람이 있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곳에서 들을 일 없으리라고 생각한 이의 것이어서 태량은 반신반의하며 돌아보았다. 긴 보라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묶은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안경 뒤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태량 탐정님.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예….”

저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엔 무례할 것 같아 태량은 대신 안비체오 옆에 선 이에게 눈을 돌렸다. 가슴께까지 쭉 뻗친 갈색 머리카락은 뻣뻣해 보였고, 앞머리가 길어 눈을 찌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눈을 내리깔던 여성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태량을 곁눈질했다.

“제 사촌 동생, 넬리우라입니다. 별로 닮지는 않았죠?”

안비체오가 웃으며 소개를 한 순간 탁한 금색 눈동자가 다시 바닥을 보았다. 대답이 궁해진 태량은 애매하게 마주 웃다가 넬리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넬리우라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악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태량이 어색하게 손을 거둬들이자 안비체오가 사과하듯 머리를 살짝 숙였다.

“동생이 낯을 많이 가립니다. 저 없이는 호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을 것 같아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만나러 왔답니다.”

“벨스토렌에 살고 계신 게 아닌가 봐요?”

벨스토렌 토박이로서 처음 보는 얼굴이고,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조합한 눈치 빠른 질문에 안비체오가 역시 탐정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짝 물러서 제 뒤에 반쯤 숨은 넬리우라를 돌아보며 안비체오가 어색해진 침묵을 메웠다.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레갈리아 전시 기간에 맞춰 놀러 오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일이 그렇게 되어서 말이죠.”

그 ‘일’ 수습에 누구보다 치이고 있을 사람을 앞에 두고 태량은 적당히 예의 바른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마땅한 대꾸를 찾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안비체오는 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태량 탐정님은 이 부근에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다행 중 불행인지 이 주제 또한 태량에게 반갑지 않았다. 곧이곧대로 유즈리하를 찾고 있다고 말할 순 없었기에 태량은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의뢰를 받아서 사람을 찾고 있어요.”

다행히 태량은 당황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숨길 줄 알았고, 안비체오는 의뢰에 보통 따라붙는 비밀 유지 조항을 의식했는지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대신 넬리우라에게 한 번 눈길을 줬다가 우려하듯 태량에게 주의를 건넸다.

“정확히 어떤 의뢰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라고 당부드리고 싶군요. 요즘 유흥가에 수상쩍은 사람이 불법 심부름센터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마침 넬리에게도 조심하라고 말하던 차였고요.”

“수상쩍은 사람이요?”

태량의 머릿속에 유즈리하부터 떠오른 건 불가항력이었다. 이 시기에 혼자 행동하며 불법 심부름센터를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에 관해 캐물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지 태량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작 말을 꺼낸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어깨를 으쓱이고 가볍게 대화를 이어갔다.

“저희끼리 하는 얘기지만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긴 하죠. 그래도 주의해서 나쁠 건 없… 이런.”

안비체오의 양복 주머니 안에서 작고 규칙적인 삑 소리가 울렸다. 소형 통신 마도구를 꺼내든 안비체오가 미안한 얼굴로 태량을 바라보았다.

“급한 연락이어서요. 잠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용건이었는지 안비체오는 태량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다. 여전히 바닥만 내려다보는 넬리우라와 단둘이 있게 된 태량은 서먹한 정적 속에 남겨졌다. 태량이 힐끗 그를 쳐다봤지만, 넬리우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통화가 길어지는지 몇 분이 지나도 안비체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태량이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전시가 중단돼서 아쉽겠지만, 벨스토렌에서 보낸 시간은 괜찮았나요?”

사교적인 접근이라기보단 예의상 묻는 말에 가까웠다. 여태 안비체오를 통해서만 얘기를 나눠 태량은 그가 대답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의 시차를 두고 넬리우라의 입에서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나왔다.

“솔직히 실망스러웠어요.”

꾸밈없는 답변에 태량이 눈을 깜빡였다. 성왕의 레갈리아 전시를 많이 기대하고 오셨었나 봐요. 이어진 태량의 질문엔 대꾸하지 않고 넬리우라는 엉뚱한 맞질문을 던졌다.

“조수를 찾고 있는 거예요?”

“네?”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 정곡을 찔려 태량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되물을 뻔했다. 넬리우라가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태량을 응시하는 눈빛에 콕 집어낼 수 없는 열기가 존재했다.

실망감인가? 아니면 분노? 어느 쪽이어도 오늘 처음 만난 넬리우라에게서 마주할만한 감정이 아니었기에 태량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하게 대답할 이유도, 의무도 없다. 그러나 반대로 물어보고 싶은 건 있었다.

“넬리우라 씨, 제 조수를 알고 계시나요?”

개인 성향에서든, 재정적인 이유에서든 모든 탐정이 조수를 두지는 않았다. 태량만 해도 유즈리하를 만나기 전까진 홀로 일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 분야에서 일해본 적 없는 이들은 탐정과 조수를 한 세트로 묶는 일이 흔했지만, 넬리우라의 질문에는 그를 넘어선 확신이 서려 있었다. 태량에게 조수가 있고, 어떤 이유에서 지금 그 조수를 찾고 있다는.

그 추측이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점이 태량의 의심을 싹틔웠다.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유즈리하와 불화가 있었다는 얘기를 한 적 없는 까닭이었다. 입을 도로 조개처럼 다문 넬리우라가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태량은 이번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먼저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태량과 넬리우라의 시선이 동시에 안비체오를 향했다. 질문의 형태를 띠긴 했지만 진짜 허락을 구하는 의문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태량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안비체오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 목소리를 낮춰 사정을 설명했다.

“시장님이 마지막 남은 레갈리아, 왕관의 회수를 요청했거든요. 사항이 사항이다 보니 제가 직접 인계 처리를 해야 해서요.”

“법원에서 시장님의 소유권에 관한 결정이 난 건가요?”

점차 놀러 나온 사람이 많아진 거리를 의식한 태량이 속삭이듯 묻자 안비체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날 수 있는 결정이 아니고 레드캣을 제외한 이가 소유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니, 제한적 허가가 난 듯합니다. 시장님은 여권도 일시 정지당해서 벨스토렌을 떠나지 못하니까요.”

시계에 눈길을 준 안비체오가 넬리우라를 돌아보았다. 혹시 못다 한 대화가 있으면 남아있어도 된다는 말에 넬리우라가 머리를 흔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리자, 넬리우라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조그맣게 말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호텔로 돌아가려고.”

“그래, 혼자 늦게 돌아다니는 건 나도 추천하지 않으니까. 호텔까지만 바래다주고 갈게.”

빠르게 뒤돌아서는 넬리우라를 잡을 명분은 태량에게 없었다. 어차피 안비체오 앞에서 유즈리하에 관해 파고들 수는 없었기에 태량은 둘이 떠난 길을 찝찝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늘이 완전히 밤에 물들고 사방에 별처럼 건물 창문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서야 태량은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곱씹으며 익숙한 길을 걸어가자, 유흥가의 시끌벅적한 거리가 사라지고 금색으로 빛나는 벨그란데 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도 참 희한한 추억을 하나 만들었었지. 태량이 벨그란데를 둘러싼 인공 해저를 내려다보았다. 할페른 패밀리를 따돌리려고 다짜고짜 해저를 수영하자는 제안에 당황한 것도 잠시, 유즈리하가 시청 부근으로 이어지는 해저 통로를 알려줬었지. 돌이켜보니 유즈리하가 멋모르고 흘린 단서가 많아 태량은 애매하게 웃음 지었다.

눈앞에 있는 레드캣을 알아채지 못한 건 탐정으로서 실격인가. 의심보다 호감과 친근함이란 감정을 먼저 품게 된 것이 실책이었을 터다. 넘실거리는 검은 해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마도구의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예술의 거리가 보였다. 저 너머에 민체코 씨와 같이 찾았던 라헤센 미술관도 있을 테고, 유즈리하가 저를 조수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던 빵집도 있을 텐데.

하루 종일 돌아다닌 데다 시간이 늦어져서 이리 감성적인 기분이 드나 싶으면서도 찾는 범위를 넓힐 겸, 내일 그 길을 되짚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태량은 마지막으로 벨그란데에 시선을 길게 주었다.

벨스토렌에서 보안이 최고라는 박물관도 뚫은 유즈리하 아니던가. 험한 소문이 돌고 현재 안부는 알 수 없어도 그에게 별일 없겠거니 믿고 싶었다.

* * *

이건 또 무슨 별일인지. 거의 연행되다시피 끌려온 유즈리하가 팔자 좋게 다리를 꼬고 푹신한 소파에 폭 파묻혔다. 사실 연행이라기엔 저를 위협하듯 협박하던 남자가 누군지 알아채고 얌전히 따라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정말 미안하네. 두 번이나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에 또 보자는 인사는 해둘 걸 그랬어.”

“미안하다면 혹시 정보 공유해줄 생각 없나요?”

사흘 만에 보는 오리아나의 넉살 좋은 사과를 유즈리하가 뻔뻔하게 받아쳤다. 오리아나가 깔깔 웃으며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커피는 어때? 유즈리하가 고개를 흔들자 오리아나가 주변에서 서성이던 사람을 손짓으로 물러나게 했다.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되자 유즈리하가 투덜댔다.

“표범 문신 보기도 전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양복 빼입고 분위기 잡는 게 딱 나 할페른 패밀리요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진짜 주의 좀 줘야겠네. 조용히 정보만 알아 오라고 시켰는데 그렇게 티 내고 다니면 곤란하거든.”

“불법 심부름센터와 관련된 정보인가요?”

응접실에서 오리아나를 기다리며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유흥가 뒷골목을 살금살금 들쑤시던 며칠간의 행적과 그 남자가 저를 붙잡기 전에 중얼거린 말을 조합하면 추측은 쉽게 나왔다. 오리아나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정보 달라는 것 치곤 이미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확실히 아는 것과 어림짐작하는 건 다르니까요.”

유즈리하의 말에 오리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말은 잘하네, 조수 씨. 그의 요청을 거절할 마음은 없었는지 오리아나는 짧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최근, 이 근방에 누군가가 심부름센터를 들쑤시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높은 확률로 법에 저촉되는 의뢰를 들고서 말이지.”

“이쪽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잖아요.”

유즈리하의 지적에 오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리를 반대로 꼬아 손깍지를 끼고 유즈리하를 바라보는 금색 눈이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만약 심부름센터가 전부 그 의뢰를 거절했다고 하면?”

“그건… 좀 이상한데요.”

유즈리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의뢰는 돈에 눈이 멀어서라도 받을 법한데, 한둘도 아니고 방문하는 심부름센터마다 의뢰를 거절했으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뒷세계 큰손이 엮어있거나, 잘나가는 정치인의 입김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의뢰금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컸거나. 소파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유즈리하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의뢰 내용이 뭔지 알고 있나요?”

“정확한 내용은 아직 몰라. 의뢰를 거절한 이유는 알아냈지만.”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유즈리하가 오리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의 압박에 오리아나는 굴하지 않았으나 유쾌하게 여겼는지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여기까지는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우리 애가 실수해서 늦은 시간에 끌려왔으니 보상 삼아 말해주지. 어디 가서 떠벌리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쉬운 약속이었다. 어차피 태량과 사이가 틀어진 이상 유즈리하가 이런 이야기를 일상 대화에서 꺼낼 만큼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오리아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주의를 준 것치곤 망설임 없이 대화를 이었다.

“의뢰 대상이 경찰과 연루된 인물인 것 같아. 실제로 의뢰를 처음 받은 심부름센터가 있었는데 수행 중에 전부 경찰에 체포되었지. 페라노 경감이 직접 움직였다던 얘기도 있더라고.”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곧바로 흩어진 점을 선으로 잇듯, 엿들었던 레드캣 사칭범의 의뢰도 퍼즐처럼 조각이 맞춰졌다.

태량을 협박해서 사무소 영업을 방해해달라는 의뢰. 경찰에 체포되었다던 심부름센터 직원들. 경찰 인턴을 했고 페라노 경감과 안면이 있는 태량. 성공적으로 사칭범의 의뢰에 훼방을 놓았다는 기쁨도 잠시, 그가 계속 태량을 해하려고 시도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저 사칭범은 대체 왜 태량을 노리는 거지? 역시 자신, 진짜 레드캣이 본 목적일까?

“표정을 보니 재미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나와 공유해줄 생각 있나?”

오리아나가 옆구리를 찌르자 유즈리하는 제가 표정 관리도 안 하고 폭주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눈치 빠른 그를 속이려 들기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오히려 일부 진실만 적당히 걸러낸다면 할페른은 유즈리하에게 든든한 아군이 될 수도 있었다. 득과 실의 계산을 빠르게 마친 유즈리하가 오리아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오리아나 씨가 알지 못하는 그 의뢰 내용, 제가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가 무슨 수로 그걸 알고 있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대신, 오리아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유즈리하가 심호흡하고 자신이 아는 정보를 싹 털어놓았다. 고티카 박물관에서 요즘 뉴스를 타는 레드캣을 마주한 것과, 우연히 유흥가에서 그를 발견하고 뒤를 밟은 것, 심부름센터에서 태량을 협박하라는 의뢰를 엿들은 것까지. 물론 그 레드캣이 사칭범이고 자신이 진짜 레드캣이라는 사실은 쏙 빼놓았다.

“경찰에 신고를 넣긴 했지만, 그냥 두기엔 찝찝해서 그 사람을 찾으려고 유흥가를 뒤지다가 할페른 패밀리한테 잡혀 온 거예요.”

그 설명을 끝으로 오리아나가 긴 감탄사를 흘렸다. 잘못 꼬인 넥타이가 제대로 풀린 것 같은 시원한 미소가 유즈리하를 향했다.

“이제야 그림이 좀 맞춰지네. 설마하니 태량 탐정이 연루되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불법 심부름센터가 공식 탐정사무소와 사이좋지 않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태량 탐정에게 경찰 인맥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탐정이 싫다고 해도 경찰에 체포되는 것보다 싫을 리는 없으니까.”

어쩐지 곧 벨스토렌을 떠난다던 사람이 유흥가를 들쑤시고 있다 했더니, 태량을 걱정해서 그런 거였냐며 오리아나가 혀를 찼다. 태량과의 불화를 설명할 생각은 여전히 없었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유즈리하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리아나가 다 이해한다는 웃음을 띠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하고 걱정하는 게 참 보기 좋단 말이지. 벨스토렌에 눌러앉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데.”

“사정이 있어서요.”

대답이 곤란해진 유즈리하가 짧게 일축하자 오리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어 자리에서 일어선 오리아나가 반가운 제안을 던졌다.

“정작 내가 도움받은 꼴이 됐으니, 빈손으로 보내기도 뭐하고. 태량 탐정이 협박당하고 있다면 모르는 체할 순 없지. 경찰 쪽에서도 주시하고 있겠지만, 이쪽에서도 뭔가 더 알게 된다면 공유해줄게.”

“그렇다면 감사하죠. 음, 전 모레면 이곳에 없을 테니 태량 쪽으로 연락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이거면 됐다. 경찰과 할페른 패밀리가 태량의 안위에 관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면 레드캣 사칭범이 뭘 꾸미든 간에 쉽게 태량을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진짜로 저를 노리고 있는 게 맞는다면 제가 없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 태량에게서 관심을 아예 끌 수도 있고. 저를 쫓아온다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해결하면 됐다. 역으로 붙잡아서 원하는 게 뭐냐고 탈탈 털어볼 기회가 생길 테니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할페른 저택을 떠나는 유즈리하를 누군가가 정문에서 붙잡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아주 곤란하셨죠!”

누군가 했더니 아까 저를 할페른 저택으로 끌고 온 남자였다. 끌려왔다기엔 순순히 제 발로 걸어왔던 터라 단어 선정이 좀 과한가 고민하던 유즈리하가 대충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오리아나 씨하고 할 얘기도 있었으니까 됐어요. 신경 안 써도 돼요.”

“사죄의 의미로 내일 밥이라도 한 끼 사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제가 사게 해주세요!”

이 사람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다. 이리 절실하게 매달리는 걸 보니 윗사람한테 일 제대로 못 한다고 엄청 깨졌겠구나 싶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유즈리하가 승낙할 때까지 저러고 따라올 것 같기도 했고, 밥 한 끼 값 아낀다면 나날이 가벼워지는 지갑에게 희소식이긴 했다.

“알았어요. 거창한 거 말고, 샌드위치 같은 점심거리로 퉁치죠.”

“자비에 감사합니다! 맛집 싹 조사해서 내일 모시겠습니다!”

정말 많이 깨졌나 보다.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기에 구태여 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유즈리하는 저보다 험난한 하루를 보낸 듯한 남자에게 마음속으로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 * *

“…여기인가요.”

“예! 빵은 역시 라헤센 미술관 옆의 빵집이 보기도 좋고 맛도 좋다고 선배님들이 다들 입을 모아서… 혹시 이곳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유즈리하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저었다. 싫어하지는 않았다. 이 빵집 자체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여기 빵이 맛있다고 예전에 태량에게 추천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그래, 그게 문제였다. 문제라기보단 유즈리하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별생각 없이 공짜 점심이나 얻어먹으려다가 굳이 떠올릴 필요 없던 추억의 궤도나 걷게 생겼으니 말이다. 다행히 점심치곤 늦은 시간이라 가게 인파가 조금 빠진 상태였다. 덕분에 유즈리하는 할페른 남자의 적극적인 추천을 흘려들으며 멍때리고 빵을 트레이에 주워 담을 수 있었다.

여권을 돌려받은 다음 날, 자신이 태량을 찾아 이 빵집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맘 편히 벨스토렌을 떠났을까? 한 달간 그럭저럭 심심해하다가, 레드캣 사칭범 사건이 터지고 나서 기웃거리고 싶은 심정을 참고 이 도시에서 멀어졌겠지. 진짜 고양이의 꼬리가 밟히기 전에.

딱 오늘까지만 도와줄게. 끝나면 빵이나 하나 사줘. 여기 빵 맛있더라.

아니면 그때 한 말처럼 그날을 끝으로 태량과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은 가정을 하나둘 곱씹으며 유즈리하가 카운터 위에 빵이 수북이 담긴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옆에 남자가 지갑을 꺼내 계산하는 걸 내버려 두고 유즈리하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회색의 둥그런 라헤센 미술관 건물을 바라보던 유즈리하가 이윽고 상념을 털어냈다.

어차피 내일 벨스토렌을 떠나는 마당에 만나지도 않을 사람을 생각해서 뭐 하나. 태량과 만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별했던 방식에 아쉬움과 섭섭함은 남을지라도, 탄생반지는 제대로 된 주인에게 돌려줘서 다행이라고는 여겼다. 제 것도 아닌 물건을 계속 들고 있어 봐야 찝찝하기만 했을 테니까. 레드캣 활동을 접기 전에 훔친 마도구를 전부 반환한 것처럼, 둘의 관계가 정리되기 전에 반지를 돌려준 것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 있습니다.”

카운터로 돌아선 유즈리하에게 두 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빵 봉투가 안겨졌다. 잠시 당황하던 유즈리하가 기억을 되짚었다. 내가 이렇게 많이 담았던가? 딴생각하느라 무슨 종류로 담았는지 기억나지도 않아 유즈리하가 머쓱하게 남자를 돌아봤다.

“생각보다 많이 산 것 같네요.”

“이 정도는 뭘요! 이것으로 어제 일에 관한 용서가 된다면 괜찮습니다.”

애초에 그리 손해 본 일이 없던 유즈리하의 양심이 잠깐 고개를 들었으나 지갑 생각 앞에서 다시 수그러들었다. 저도 좋고 저 남자도 만족하면 다 좋은 일 아닌가. 하루치 식비를 아낀 유즈리하가 들뜬 마음을 안고 빵집 출입문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곧바로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밝은 레몬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올려묶고 하늘색 바람막이를 입은 낯익은 사람. 익숙한 푸른색 눈동자가 동그래져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유즈리하는 긴장하며 탈출구를 찾았지만, 유일한 출입구 앞에 제가 가장 피하고 싶던 이가 서 있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태량이 어디 다친 곳 없어 보인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안도감은 안도감, 당황스러운 건 당황스러운 거였다.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갈까? 싸우고 태량의 집을 나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여기서 2차전을 하려고 하진 않겠지? 슬쩍 눈을 피하려던 찰나 유즈리하의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오리아나 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태량 탐정님이시죠? 여기 조수님 마중하러 나오셨습니까?”

유즈리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저 남자의 제안을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다. 그러나 먹을 걸 사준다는 얘기에 홀라당 넘어간 과거의 자신을 저주해봤자 당장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저를 지목한 우렁찬 목소리에 태량은 조금 놀란 듯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를 데리러 왔냐는 질문에 수긍한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남자가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바쁘신 분들을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게 아닌가 싶네요. 저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빵은 두 분이 나눠 드십시오.”

큰 덩치가 무색하게 남자는 태량을 지나쳐 빠르게 사라졌다. 어색한 침묵 속에 태량과 남겨진 유즈리하는 속으로 기함했다. 방황하던 시선이 잠깐 태량에게 닿았다. 저처럼 당황하긴 했으나 생각보다 화가 나 보이진 않았기에 유즈리하는 조그만 희망을 품었다.

이 틈을 타서 빠져나갈까? 품 가득 빵 봉투를 안고 스리슬쩍 출입구를 향해 움직이는 제 모습이 제법 우스웠으리라 생각했다. 본인의 일이 아니었으면 유즈리하도 흥미롭게 상황을 관람했을 터였다.

한 발짝, 한 발짝. 드디어 문이 코앞이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치솟았으나 유즈리하의 이성이 사심을 내리눌렀다. 잘 지내라는 말, 조심하라는 말을 꺼내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이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 유즈리하의 팔이 붙잡혔다.

“잠깐만.”

다급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잡은 손길이었기에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악력이었음에도 유즈리하는 그대로 굳었다. 눈만 간신히 옆으로 굴리자, 저를 붙잡은 채로 응시하는 태량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처음에 저를 보고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는 어느덧 잠잠했다. 며칠 듣지 못한 낮은 음성도 평소처럼 침착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저기, 이런 말 하기는 그런데, 혹시 지금 와서 나 체포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헛소리한다더니, 자신이 딱 그 꼴이라 유즈리하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덕분에 어색하던 분위기에 실낱같은 금이 갔다. 태량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듯 움찔거리다 희미한 미소에 정착했다.

“지금은 넘어가 주기로 할까. 나도 빚진 게 있는 것 같으니까.”

며칠 전 경찰에 익명 신고 넣은 거 너지, 유즈리하?

유즈리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한 침묵이 긍정임을 태량과 유즈리하 둘 다 알고 있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들어선 태량의 사무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집처럼 편하게 들락거린 장소건만, 유즈리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귀가 많은 빵집은 꾹꾹 눌러두었던 대화를 꺼내기에 적절하지 않았기에, 둘은 예술의 거리에서 그나마 가까운 태량의 사무소로 자리를 옮겼다.

보장된 보안과 약속된 불안. 저를 체포하려는 게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태량이 원하는 대화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해 유즈리하는 티 나지 않게 입 안을 깨물며 소파에 앉았다. 커피 두 잔을 타서 중간 테이블에 내려놓은 태량이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침묵을 견딜 자신이 없던 유즈리하가 바로 선수를 쳤다.

“심부름센터가 너를 노리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은 거야?”

“그것도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건드리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량이 시선을 올려 유즈리하와 눈을 맞췄다. 솔직하고 정직한 단어들이 정면으로 부딪쳐왔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단편적인 질문을 통해서가 아닌, 네가 해줄 수 있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유즈리하가 간절히 바라던 기회였다. 그러나 정작 기회가 주어지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꼬인 실타래를 앞에 두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이와도 같았다. 눈가에 절로 힘이 들어가서 미간을 문지르자, 태량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인제 와서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래.”

또 다른 오해가 생기기 전 유즈리하가 다급하게 해명했다. 태량의 표정이 풀리자 유즈리하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곧 벨스토렌을 떠날 테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지만, 태량과 화해하고 싶었구나. 마지막 모습을 오해가 쌓인 형태로 기억하기는 싫었구나.

생소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도. 잘못을 제대로 풀어보고 싶다는 소망도.

유즈리하가 태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차례 흔들림이 지나가고 단단해진 제안이 입을 타고 나왔다.

“네가 질문하고 내가 답하는 게 제일 쉬울 것 같아.”

“저번처럼?”

과거의 정체가 까발려지고 취조 아닌 취조를 진행했던 밤을 떠올리자, 유즈리하와 태량 둘 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슬쩍 인상을 썼다. 유즈리하가 애써 억지웃음을 지었다.

“두 번째니까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질문을 하든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해줄게.”

손가락 도장이라도 찍어줄까? 과장된 너스레에 조금 분위기가 풀렸다. 태량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김이 수그러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저번에 네가 정말 레드캣이냐고 물었고 너는 그렇다고 했었지.”

그랬지, 유즈리하가 수긍했다. 태량이 잠깐의 침묵 끝에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내가 물어보지 않았더라고. 네가 마도구를 훔친 이유, 레드캣으로 활동했던 동기를 말이야.”

예상 못 한 질문은 아니었다. 대답하기 껄끄러운 종류도 아니어서 유즈리하가 말을 정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재수 없어서 훔쳤지. 다른 마을에서 뺏어온 마도구를 벨스토렌 박물관의 관광 간판으로 달고 홍보하는 게 아니꼬웠거든. 그 이후론…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미있어서 했어. 마도구가 특별히 탐났던 건 아니고, 훔친다는 스릴이 즐거웠거든.”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진정성 없다고 생각할까 우려가 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태량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을 거두지 않고 도리어 유즈리하가 빼먹은 부분을 먼저 짚어주었다.

“처음 훔친 물건이 네 고향 마을의 마도구였던 고양이 가면이었지? 훔친 나머지 마도구도 시장님이 다른 마을에서 가져온 것들이었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질문이 혀끝까지 나왔다가 태량이 정보 조사에 상당히 유능한 탐정임을 상기하고 유즈리하는 입을 다물었다.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자 기다렸던 것처럼 태량에게서 추측이 쏟아져나왔다.

“고양이 가면을 도케오 마을에서 구매했다고는 하지만, 드러난 정황으로 기예르 시장님이 정당한 값을 치렀을 것 같진 않네. 그 영향으로 네 고향이 사라진 것 맞지? 그 때문에 악감정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고.”

전부 정확한 추측이라 보탤 것도 없었다. 하지만 태량이 답을 기다리듯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즈리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세세한 디테일을 뽑아냈다.

“사실 고향에 애정이 있거나 하진 않아서 큰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떵떵거리게 내버려 두는 게 재수 없었다고 할까…. 별개로 도케오가 그때 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떠났을 거야. 정말 재미없는 곳이었거든.”

바깥에 한 무리가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는지, 닫힌 창문을 통해서 소음이 새어 들어왔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시장 일은 차치하고 벨스토렌 자체가 마음에 든다는 건 진심이야. 늘 활기차고, 떠들썩하고,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잖아. 이 도시, 저 도시 떠돌다가 여기 오래 머무르게 된 이유도 그게 다야. 마도구를 훔치게 된 건 부가적으로 따라붙은 짜증 풀이이자 무료함 달래기였고.”

언론과 대중은 레드캣을 세기의 괴도로 올려 치곤 했으나, 실상은 그런 시시한 진실 따위였다. 위대한 목적이 있는 것도, 정의를 구현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유즈리하는 그저 제멋대로 제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게 조금 비범한 방식이었을지라도.

“활동을 접은 것도, 마도구를 반환한 것도 별 이유 없어. 벨그란데에서 1급 마도구까지 훔쳐봤으니 달리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 이상은 위험하단 걸 나도 알고 있었거든. 시장이 도둑질해간 마도구라 할지라도 정당한 주인이 나인 것도 아니었고.”

과거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다. 레드캣이 사라지고 아이네 유즈리하로 돌아오고선 조금 심심하게, 소소한 일거리를 하며 지냈다. 종종 화려했던 과거를 곱씹고, 즐거웠던 추억에 빠지곤 하며. 그렇게 유즈리하는 태량을 만났고, 두고 왔다고 생각한 과거에 발목을 잡혔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고 후련해진 마음으로 태량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커피잔을 향해 손을 뻗던 와중 유즈리하의 눈이 태량의 손에 닿았다. 왼쪽 새끼손가락에 탄생반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핑계처럼 들리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남은 오해는 전부 바로잡고 싶었다. 유즈리하가 반지를 눈짓하자 태량이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반지를 내가 몇 년간 가지고 있던 건 맞아.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길가에서 주웠다는 건 기억하고 있어. 네 탄생반지인 걸 알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어. 널 처음 만났을 땐 당연히 몰랐고.”

중간에 말이 잘리기라도 할까 변명이 빨라졌지만, 태량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진짜 하고 싶던 말을 꺼내기 전, 유즈리하가 심호흡했다.

“네게 미리 알릴 기회가 있던 것도 사실이야. 내가 레드캣이었다는 게 밝혀질까 봐 숨겼던 것도 맞고. 그거에 대해선 사과할게.”

태량은 한참 말이 없었다. 유즈리하가 손에 쥔 커피잔 너머로 태량의 눈치를 살폈으나 표정을 읽기 쉽지 않았다. 초조하게 애꿎은 컵만 힘있게 쥐던 유즈리하의 귓가에 잔잔한 목소리가 닿았다.

“네 사과받을게.”

네가 거짓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태량의 맑은 눈이 유즈리하를 응시했다.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이미 금이 갔던 관계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이제 금이 간 부분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걸로 갈라진 틈을 메꿀 가능성이 생기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신고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잠시 평온한 휴식 시간이 지나고 태량이 문득 생각난 듯 물어왔다. 땅콩 가루가 뿌려진 빵을 덥석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유즈리하가 빠르게 음식물을 삼켜 넘기고 입을 열었다.

“아, 그거. 내가 우연히 그 사칭범을 유흥가에서 목격했거든. 기회다 싶어서 몰래 따라붙었는데.”

“…내가 보지 않을 때도 넌 늘 위험천만한 일을 하고 다니는구나.”

뜨뜻미지근한 눈빛이 유즈리하에게 닿았다. 그나마 이번엔 목숨 아홉 개인 고양이냐고 뼈아픈 농담을 던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유즈리하가 손사래 치고 빵 봉지를 들여다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위험천만할 것까진. 사칭범이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고. 그러다가 그가 불법 심부름센터에 너를 협박해달라고 의뢰하는 걸 엿듣게 된 거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심부름센터 내부의 의뢰를 엿듣게 된 거라고?”

태량은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조목조목 맞는 말에 유즈리하는 입으로만 웃으며 대충 둘러대기를 포기했다. 어쨌거나 정보 전달은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잔소리쯤은 감수해야지.

“사무실 안쪽으로 침입한 건 아니야. 그쪽 사무실 창문이 열려있었거든. 3층이라 방심했었나 봐. 그래서 벽을 타고 바깥에 매달려서 엿들은 건데.”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우위를 가리기 힘들다는 태량의 중얼거림을 얼핏 들은 것 같았지만 유즈리하는 외면했다. 왕홀을 들고 도주하던 레드캣 사칭범을 쫓아 고티카 박물관의 벽을 탄 건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 할 것 같았다.

하여튼 중요한 건 사칭범이 의뢰한 내용이었기에 유즈리하는 기억을 되살려 그날의 일을 얘기했고, 태량은 끼어들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덧붙여 오리아나 할페른에게서 얻은 정보도 말해주고 나니 목이 말라서 유즈리하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태량이 노트에다 정보를 빠짐없이 정리해서 적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도 많은 일이 있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에스트란 씨에게도 요새 유흥가에 수상한 사람이 돌아다닌다고 듣기는 했는데, 레드캣 사칭범과 연관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겠네.”

“에스트란 씨를 최근에 본 적 있어?”

“어제. 유흥가에서 널 찾아보려다 마주쳤었어.”

레드캣을 찾다가 저를 늘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게끔 주시하던 남자를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은 것에 매우 감사할 따름이었다. 봉투 안에서 샐러드빵을 꺼내 들던 유즈리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근데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유흥가에서 만났다고? 그 사람이 거기엔 왜 있었대?”

시장직이 공석이나 마찬가지인 지금 시장 비서인 그가 유흥가에 방문할 만큼 한가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한가했더라도 이미지상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관람하면 했지, 유흥가에 자발적으로 오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을 터였다. 유즈리하의 의문이 타당했는지 태량이 설명을 덧붙였다.

“사촌 동생이 레갈리아 전시를 구경하러 벨스토렌을 방문해서 얼굴 보러 왔다고 했어. 넬리우라라고, 나도 잠깐 만나봤고. 에스트란 씨와 닮지는 않았더라. 긴 갈색 머리카락도, 금색 눈동자도, 낯을 가리던 모습도.”

짧은 만남을 되새기던 중, 넬리우라가 저를 보고 추궁하듯 한 말이 갑자기 떠올라 태량이 멈칫했다. 그 사이에 유즈리하가 빵을 하나 더 해치우고 휴지로 손을 닦았다.

“에스트란 씨 가족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하긴, 그 사람도 벨스토렌 출신이 아니니 도시 밖에 친척이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 어디 마을 출신이라고 했었더라? 기억이 안 나네.”

넬리우라의 이름에도, 외관 묘사에도 반응하지 않는 유즈리하를 보며 태량은 그가 너를 아는듯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얘기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빵 봉투를 다시 들여다보느라 눈치채지 못한 유즈리하가 혼잣말하듯 투덜댔다.

“그 사촌 동생이라는 사람도 하필 이 시기에 맞춰 온 게 안타까운 일이긴 하네. 남은 기차표가 없어서 일찍 돌아가지도 못했을 텐데. 나도 사실 표가 없어서 아직 못 떠난 거였거든. 가장 빠른 표가 내일 거였어.”

“벨스토렌을 떠나는 날이 내일이야?”

넬리우라에 관해 곱씹던 생각을 싹 날려버리는 발언에 태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유즈리하가 어깨를 으쓱이고 빵 봉투를 내려놓았다.

“응, 오전 9시 기차야.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너와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싸운 채로 헤어지는 건 아무래도 개운하지 못했거든.”

나도 그래. 태량이 길게 눈을 깜빡이고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오후 햇살이 느지막하게 창문을 타고 들어와 태량의 고민을 녹여 없앴다. 벨스토렌에 머무를 시간이 하루조차 남지 않은 이에게 넬리우라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유즈리하는 그를 모르는 눈치였고, 일부러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대신 태량은 다른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내일 기차역에서 배웅해줄게. 네 말대로 그간 쌓인 정이 있는데,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어?”

네가 직접 배웅을?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유즈리하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는 길이 쓸쓸하진 않겠다며 유쾌하게 씩 웃었다.

“그럼 8시 반, 기차역에서 보자. 내일도 보겠지만, 이 인사는 미리 해둘게. 그동안 재밌었어.”

“나도 심심하진 않았지. 여러모로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이별이 다가오는 시간이 아쉬운 만큼. 유즈리하에게나 태량에게나 진심을 담은 인사였다.

* * *

“지갑, 여권, 기차표…. 중요한 건 다 챙겼으려나.”

모텔 침대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은 유즈리하가 가방 안을 재확인했다. 옷가지며 부피가 큰 짐은 현재 바닥에 굴러다니는 캐리어 가방에 쑤셔 넣은 터라 매는 가방에는 겉옷 하나를 포함한 자잘한 물건밖에 없었다. 손쉽게 내용물을 확인하고 가방 지퍼를 잠근 뒤 유즈리하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10시인데 뭐하지.”

남들이면 적당히 뒹굴뒹굴하다가 잠들어도 충분할 시간이었으나 유즈리하에겐 초저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세 시간쯤 누워있어도 잠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고, 유즈리하는 지갑만 챙겨서 모텔 밖으로 나왔다. 서늘해진 공기가 뺨에 닿자, 눈에 반짝반짝 생기가 돌아왔다.

돈도 없으니 카지노에서 놀 생각은 없었고 대부분 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어서 딱히 갈 곳도 없었지만,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벨스토렌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면 괜히 감성적인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색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호텔 간판 덕에 눈은 심심하지 않았으나, 입은 허전했기에 유즈리하는 사탕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한두 개는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어 유즈리하가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를 뒤엎는 데 신경 쓰는 와중에 발은 멈추지 않으니 길 가는 사람들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대다수는 얼큰하게 취한 상태라 대놓고 치고 지나갔어도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시끄럽게 웃으며 친구와 어깨동무하는 취객을 피하고 유즈리하가 반대쪽 주머니를 뒤져보려 몸을 돌렸다.

“아, 죄송.”

이번에는 사각에서 다가온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다소 성의 없는 사과를 건네며 유즈리하는 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또 다른 취객이겠지. 그러나 비틀거리며 갈 길 가는 대신 발을 멈추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지자, 유즈리하는 주머니에서 시선을 뗐다.

사과가 너무 싸가지 없었나, 거 참 예민한 사람이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으니 대충 사과나 다시 할 생각으로 고개를 돌린 유즈리하는 저를 뚫어지게 쏘아보는 탁한 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말투가 예정보다 공격적으로 나간 건 머리 위로 푹 눌러쓴 모자에도 감춰지지 않는 적의가 서린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와 부딪힌 여자의 체격은 늘씬했지만, 연약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잔뜩 웅크리고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치타와 같았다. 그가 노리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소소한 충돌로 싸우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시비가 저쪽에서 먼저 걸려 온다면 그건 다른 이야기였다. 유즈리하가 어깨를 긴장시키고 여자를 응시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로 하죠?”

“……딱히.”

황당하리만큼 딱 떨어지는 단답을 내놓고 여자가 홱 돌아섰다. 가로등 밑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며 모자 속으로 쑤셔 넣은 갈색 머리카락이 슬쩍 삐져나왔다. 의아하게 여자의 걸음이 눈에 밟혀 인상을 쓰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찰나, 화려한 붉은색으로 번쩍이는 간판 빛이 그를 감쌌다. 그 잔상에 유즈리하는 여태 느꼈던 기시감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지만 느리지는 않은 보폭, 시선을 내리깔고 주변을 힐끔거리며 경계하는 고갯짓, 긴장했을 때 나오는 습관인 듯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왼손까지.

한참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하필 지금. 벨스토렌을 떠나는 기차를 타기까지 12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레드캣 사칭범을 마주칠 줄이야.

얄궂은 운명인지 우연인지. 한탄할 새도 없이 유즈리하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 번째로, 유즈리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사칭범의 뒤를 밟았다.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여자를 찾아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길모퉁이를 돌면서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어 유즈리하는 모르는 척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어 길을 한 바퀴 빙 둘러와야 했다.

연락할 방도가 있었다면 태량에게 전언이라도 남겼을 텐데. 그럴 돈도 없긴 했지만, 유즈리하는 진작에 통신용 마도구를 장만하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조금 원망했다. 잠깐 멈춰서 공중전화를 쓰자니 보안도 보안이고, 전화를 붙잡고 설명하는 와중 사칭범의 발자취를 놓칠 것 같았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목적지만 알 수 있다면 앞질러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텐데… 이크.’

생각에 빠져 앞서가던 발소리가 멈춘 걸 뒤늦게 알아챈 유즈리하가 골목길을 꺾어지기 직전 벽에 몸을 밀착했다. 비싼 저택 지역에 접어들기 시작한 곳이라 유흥가의 북적이던 인파가 어느덧 사라진 상태였다. 유즈리하가 귀를 기울여 골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속삭임 같은 낮은 음성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벌써 떠난 것 아니었… 계획은 그럼 어떡….”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로 봐선 휴대용 통신 마도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가 배어들었는지 소리가 점차 고조되어 단어가 더 선명하게 귓가에 닿았다.

“오히려 좋다니. 결국 위험부담은 내가 지는 거잖아…. 알아, 여태 세운 계획이 문제없었다는 건 안다고. 그런데….”

나머지는 어찌나 소리를 죽였는지 통신기 반대편에 있는 얼굴 모를 누군가도 들었을지 의심이 들었다. 때마침 차가 한 대 쌩 지나가서 엿들을 엄두도 내지 못한 유즈리하는 속으로 욕만 뱉었다. 다시 정적이 찾아들고 난 후에는 골목에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유즈리하가 빼꼼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레드캣 사칭범이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의 반대 입구로 나가고 있었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까지 확인하고 유즈리하는 소리 없이 그가 사라진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유즈리하는 발을 멈추고 덤불 속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사칭범이 시장 저택은 왜 찾아온 거지?’

덤불 틈새로 저택을 둘러싼 보안 벽에 기대 주변을 주시하는 사칭범이 눈에 들어왔다. 정문을 지키고 선 경비원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여자가 주먹 쥔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기다렸다. 마치 무언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싸한 느낌이 유즈리하의 목을 타고 내려왔다.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고 이쯤이면 저도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 태량에게 연락부터 할 생각으로 유즈리하가 덤불에서 조용히 몸을 빼려 한 순간이었다.

“거기 움직이지 마! 손 들어!”

눈부신 인공적인 불빛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유즈리하가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 그러나 경찰임을 명백히 알리는 옷차림 셋이 저를 반겼다.

못 들은 척 도망칠까 하는 생각은 경찰의 손에 들린 총을 보자 사그라들었다. 유즈리하는 요구대로 천천히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사칭범이 있던 장소를 바라보자, 그곳은 비어있었다.

그에게 낚인 건가, 아니면 그냥 운이 없는 건가. 수상쩍은 모양새로 걸린 탓에 해명하는 데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달리 체포될 만큼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던 건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체념하고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내일 기차 시간에 맞춰서 풀려날 수 있을까. 늦은 시간에 미안하긴 한데 태량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달라고 해야 하나.

“이름이 뭐지?”

“아이네 유즈리하요.”

이때만 해도 일부 불량한 취객처럼 잠시 경찰서로 불려 갔다가 새벽쯤 다음엔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나오리라 예상했다. 죄송하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읊으면서 말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 무엇인지 착각할 수 없는 소름 끼치게 차가운 철의 감각이 유즈리하의 손목에 닿기 전까지는.

* * *

“……늦네.”

체감상 스무 번도 넘게 시계를 꺼내본 것 같았다. 혹시 자신의 시계가 고장 났나 싶어 역 플랫폼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를 확인해도 시간은 변함없었다.

오전 8시 50분. 유즈리하가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건 우려스러웠다.

설마 늦잠 잔 건 아니겠지? 어젯밤 유즈리하가 한 고뇌와 똑같다는 걸 알 길 없었지만, 태량은 유즈리하나 저나 통신용 마도구를 장만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기차가 떠나는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창구에 문의도 했지만, 돌아온 건 9시 정각에 기차가 출발한다는 대답뿐이었다.

초조해진 태량은 플랫폼을 서성거리다가 아예 기차역을 나왔다. 건너편 정류장에 사람들을 내려주는 버스,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 가방을 끌고 직접 걸어오는 사람들 틈새에서 눈에 익은 붉은색 한 가닥 섞인 검은 머리카락도, 유쾌하게 웃는 갈색 눈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 드립니다. 벨스토렌에서 프로미시아로 가는 9시 기차가 곧 플랫폼으로 들어옵니다. 승객분들은 미리 짐과 여권을 준비하여 제시간에 탑승해주시기를 바라며….

플랫폼 직원의 안내방송까지 들려오자 심란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유즈리하가 지금 뛰어온다 해도 탑승이 아슬아슬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저나 눈썰미 좋은 유즈리하가 플랫폼에서 서로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렸다. 태량이 황급히 시계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9시가 되기까지 1분도 남지 않았다. 태량이 입술을 꾹 깨물고 기차역에서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이제 도착한다 해도 기차를 타진 못할 터였다.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보단 직접 유즈리하를 찾아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표까지 끊어놓은 기차를 놓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어디서부터 그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태량의 팔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았다. 태량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빼고 방어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실례했습니다. 이름을 불렀는데 듣지 못하신 것 같아서요.”

태량이 눈썹을 찡그렸다. 앞에 선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샤르잔의 조수… 맞죠? 제겐 무슨 용건인가요?”

“샤르잔 님이 긴급히 전해야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실로 방문했는데 거기 계시지 않아서 태량 님을 찾아오라고 지시하셨는데, 같이 사무실로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미안한데 저도 급한 일이 있어서 나중에….”

거절의 틈새로 여자의 주머니에서 삐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량에게도 익숙한 통신용 마도구의 수신음이었다. 여자가 손바닥보다 작은 타원형 기계를 귀에 가져갔다.

“네, 네. 태량 님을 찾았습니다. 기차역입니다.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지금 급한 일이 있다고 하셔서… 네, 바로 바꾸겠습니다.”

여자가 태량에게 마도구를 내밀었다. 태량이 그와 통신기를 번갈아보자 여자가 신원을 확인시켜주었다. 샤르잔 님이 잠깐만 받아달라고 하십니다. 태량이 한숨을 내쉬고 마도구를 받아 들었다. 빠르게 용건을 끝낼 생각에 말투가 조금 퉁명스럽게 나왔다.

“뭔데. 바쁘니까 될 수 있으면 나중에 연락해.”

-그쪽 조수님 때문에 그래?

예상치 못한 정곡에 태량이 침묵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기도 전에 통신기 건너편에서 또박또박 질문이 돌아왔다.

-먹구름, 너 지금 네 조수가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어?

“갑자기 사라져서 찾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뭘 알고 있어?”

심상치 않은 어조에 태량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샤르잔 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다행히 아침부터 타들어 간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 심각해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하지 말고 들어. 네 조수님 어젯밤에 시장 저택 부근에서 체포되었어. 침입 및 강도 혐의로.

“뭐?”

자세히 캐물을 생각도 못 하고 태량의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그런 태량을 배려할 여유는 없는지 샤르잔이 계속 채근했다.

-네 사무실, 아니, 내 사무실이 낫겠다. 나도 아직 알아보는 중이지만 너보단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고. 일단 이쪽으로 와서 얘기를….

“호외요, 호외!”

아침 신문이 태량의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졌다. 모르는 얼굴의 알바생이 뻔뻔하게 생긋 웃으며 신문을 흔들었다.

“아직 신문 못 보셨으면 싸게 드릴게요. 어젯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알고 싶지 않으세요? 무려 레드캣에 관한 뉴스라고요?”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샤르잔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태량이 홀린 듯 신문을 들었다. 첫 면의 헤드라인이 태량이 그토록 찾던 이의 소식을 냉정하게 알렸다.

수수께끼의 괴도 레드캣, 드디어 체포되다.


Written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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