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님, 붉은 고양이를 잡아주세요!

사건번호 6. 진실은 언제나 마지막에 드러난다 (完)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기예르 파트롱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저택의 개인 사무실 안에서 서성대는 걸음, 미간의 패인 주름과 실룩거리는 콧수염,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잡아 뜯는 손길에서 분노의 깊이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이 도시를 위해 한 몸 바쳐 봉사한 게 몇 년인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고 튀어나오는 저 울분을 받는 게 몇 번째인지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셀 수 없었다. 그런 걸 일일이 세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안비체오는 기예르 파트롱의 반성 없는 한탄에 응대해 주는 대신 서류 가방에서 빳빳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검토부터 부탁드립니다. 확인하고 날인하셔야 하는 서류가 많습니다.”

안비체오의 사무적인 응대가 시원찮았던 건지, 박물관과 시청에 더해 법원 인장까지 찍힌 서류 더미에 기가 질린 건지 기예르 파트롱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서류에 날인을 해야 성왕의 왕관을 일시적으로나마 돌려받을 수 있었기에 기예르는 어질러진 책상에서 굴러다니는 인장을 집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끝 모를 호소는 멈추지 않았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을 눈 뜨고 코 베였는데, 도둑을 잡아주기는커녕 하나 남은 레갈리아를 돌려받겠다는 요청에도 이리 피눈물 없이 굴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자네도 내 옆에서 일하며 내가 이 마도구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보아왔잖나?”

“압니다. 시장님은 늘 그러셨지요.”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시계를 확인하는 안비체오의 목소리에 다소 건성인 태도가 배어 나왔으나 기예르 파트롱은 자기 연민에 빠져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일차원적인 긍정에 힘입어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 도둑놈의 얼기설기 끼워놓은 증거가 뭐 그리 믿을만하다고 나를 범죄자처럼 대해? 그럴 시간에 빌어먹을 레드캣을 체포하려 노력해야지! 잡을 능력이 없어서 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 아닌가!”

안비체오는 얼기설기 끼워 넣었다고 주장하는 레드캣의 증거가 상당히 치밀했고, 레드캣을 잡지 못한 건 그도 마찬가지라는 답을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째깍거리는 시계만 바라보는 안비체오의 침묵에 기예르는 결국 가장 깊숙한 곳에 깔려있던 본심을 토해냈다.

“억울하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안비체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기예르를 바라보았다. 천장 조명의 빛이 안경알에 반사되어 붉은 눈동자를 스쳐 간 감정이 순간 가려졌다. 격해진 기예르와 대조되는 기이하게 차분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시장님이 레갈리아의 소유권을 얻어낸 과정에서 고향을 잃은 피해자가 무수히 많다는 건 사실이지요.”

유리 상자에 든 왕관에 손을 뻗던 기예르가 멈칫했다. 안비체오를 돌아보는 보라색 눈이 당황과 분노로 매섭게 얼룩져 있었다.

“안비체오, 자네는 내 비서야.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건가?”

작은 삐빅거리는 소음이 기예르의 추궁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비체오는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이고 주머니에서 소형 통신 마도구를 꺼냈다. 씩씩대는 기예르를 앞에 두고도 안비체오의 목소리엔 일견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마저 배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통신기 반대편의 목소리는 안비체오의 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태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비서로 두며 개인적인 연락을 받는 모습은 보지 못했기에 기예르 파트롱은 비서실에서 온 연락이겠거니 짐작했다. 그 때문에 화가 치밀었지만, 기예르는 얼마 없는 인내심을 꾹꾹 다졌다.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자신의 지위가 현재 위태롭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생각 없진 않았다.

“그런 움직임은 예상치 못했지만, 나쁜 일은 아닐 수도 있어.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비서실에 저리 친근하게 말 놓고 지내는 사람이 있었던가? 왕관을 앞에 두고 책상 의자에 기대어 앉은 기예르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기예르가 안비체오를 힐끗 쳐다보았다. 단정한 그의 얼굴엔 보기 드문 진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나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을 건데? 네게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들어는 볼게.”

통화는 그 후로 길게 이어지지 않고 종료됐다. 그동안 하고픈 말을 쌓아둔 기예르가 불만을 터트리기도 전에 안비체오가 선수를 쳤다.

“개인 연락책이 전해 오길, 바깥에 수상한 사람이 포착되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마지막 남은 레갈리아를 노리고 온 레드캣일 확률도 없잖아 있어서 일단 잡아두라고는 했습니다.”

기예르의 머릿속에 정리되던 여러 항의가 깨끗이 표백되었다. 새하얘진 얼굴에 경악과 공포, 분노가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책상을 쾅 내려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기예르가 안비체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장 체포해서 끌고 오라고 전하게! 경비원, 아니 경찰까지 전부 대동해서라도!”

떨리는 손가락이 저를 향하고 있음에도 안비체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묵히 기예르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 속에서 기예르는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했다. 손끝에 힘이 조금 빠진 기예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제가 누구의 편을 드는 건지 물어보셨죠, 시장님.”

차분한 목소리가 기예르 파트롱을 가로막았다. 통신 마도구를 쥐고 있던 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작게 딸깍거리는 소리 틈으로 늦은 답변이 들려왔다.

“저는 정의의 편입니다.”

픽, 전구가 터지는 소음과 함께 정전이 찾아왔다.

* * *

태량에게 경찰서는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단체로 견학하러 온 경험도 있었고, 인턴으로 일하며 경찰서 내부 구조는 빠삭하게 꿰게 되었다. 탐정으로 직업을 전환한 이후에도 가끔 협조가 필요한 의뢰가 생기면 드나드는 곳이 경찰서였다.

하지만 이런 경우로 서에 출석하는 건 태량에게도 처음이었다. 유즈리하를 만나고 여러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 같은데. 취조 아닌 취조가 끝나고 지친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이 끼어들어 태량이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는지, 책상 반대편에 앉은 페라노 경감이 위로하듯 말을 꺼냈다.

“결정적으로 유즈리하가 경찰에 체포된 시각과 왕관의 절도 추정 시각에 무시 못 할 차이가 있어서 바로 풀려날 거다. 범인으로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을 무작정 잡아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태량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경찰서로 달려와서 오해가 있었을 거라며, 자세히 조사해달라고 열렬히 유즈리하의 결백을 피력해 페라노 경감을 당황하게 만든 죄송함이 뒤늦게 몰려왔다. 평소라면 조금 더 차분하게 증거부터 모았을 테지만, 유즈리하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급해졌었다. 어지간해서 제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던 태량이 저를 다급하게 찾아온 게 페라노 경감에게도 생소했는지, 그는 최선을 다해 조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체포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직장인의 퇴근 시간이 끝나갈 무렵인 어둑한 저녁, 태량은 유즈리하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페라노 경감이 일어서서 태량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 데리러 가자꾸나. 마냥 감옥 안에 앉혀두는 것도 미안한 일이니까. 태량 너도 많이 놀랐을 텐데,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을 테고.”

“…아마 제 일 때문에 그 부근에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변명 같은 추측은 유즈리하의 비밀이 탄로 날까 봐 튀어나온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태량은 유즈리하가 하필 시장 저택 부근에서 레드캣으로 오해받아 (완전한 오해는 아니었더라도) 체포된 게 우연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다음 날 아침 기차를 타고 떠날 예정인 사람이 왜 굳이 그곳을 찾아갔겠는가? 시장을 아니꼬워해서 얼굴 보는 것도 유쾌해하지 않던 그가?

저와 헤어진 후 그 짧은 사이에 분명히 가짜 레드캣과 일이 있었을 테다. 그렇다면 태량과 연관 없는 일이 아니었기에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페라노 경감은 아무런 의심 없이 태량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겠지. 사이가 꽤 가까워 보이던데, 이렇게라도 곤란한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앞으로 조금 조심해주렴.”

페라노 경감의 주의에 뒤를 따라 걷던 태량이 고개를 들었다. 태량을 돌아보는 페라노 경감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경비도 빈틈없는 기예르 시장님의 저택에 침입하고 성왕의 왕관까지 훔치는 것도 모자라 시장님을 공격한 흉악범이란다. 꼭 그뿐이 아니더라도 지금 세간의 관심이 레드캣에 쏠려 있어서 자칫하면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이 점에는 태량도 동의했기에 다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리하도 두 번 체포되는 경험은 원치 않을 테니 설득은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와중 누군가 태량을 불러세웠다. 며칠 전 태량과 함께 신문팔이 알바생 콜의 이야기를 같이 들었던 경찰서의 선배가 피곤한 얼굴로 태량에게 손짓했다.

“바쁘면 미안한데 잠깐 할 얘기만 하고 보내줄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앞서가던 페라노 경감이 괜찮다고 고갯짓했기에 태량은 발걸음을 돌려 선배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파일별로 분류된 서류를 정리하던 선배가 태량이 가까이 오자 소곤소곤 말을 건넸다.

“지난주에 네 사무실에 침입하려고 했다가 체포된 심부름센터 놈들 있잖아. 슬슬 잘 달래보면 한 명 정도는 정보를 뱉을 것 같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면회 전화 한 번 걸려 오고 난 이후로 부쩍 안절부절못하는 놈이 하나 있더라고.”

구체적인 정보가 나온 후에 연락하려 했지만 마침 태량이 경찰서에 온 김에 중간 결과도 전해주는 거라며 귀띔하고 선배가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그도 바빠 보였고 태량 역시 페라노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별다른 인사 없이 머리만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콜 씨의 입을 통해 들은 원 제보자가 이곳 감옥에 갇혀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유즈리하가 곧 풀려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 태량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 * *

“이럴 줄 알았으면 경찰서를 드나드는 개구멍이라도 미리 찾아볼 걸 그랬어.”

경찰서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 유즈리하가 투덜댔다. 임시 감옥의 서늘한 온도가 팔에 남았는지 연신 팔뚝을 문지르는 모습에 태량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농담하듯 물었다.

“왜 찾아보지 않았는데?”

“당연히 잡힐 일 없을 거라고 자신했으니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잖아.”

“고양이도 함정에 빠질 때가 있고?”

현역 괴도 시절, 경찰과 탐정의 손아귀를 쏙쏙 빠져나갔던 유즈리하의 오만한 발언 역시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여전히 부루퉁해 보이는 유즈리하에게 쓰디쓴 위로의 말이 닿았다.

“이참에 반성할 기회 얻었다고 생각해. 앞으로 위험하거나 법에 저촉되는 행동은 하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기왕이면 하지도 말고. 그래도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생각은 안 해서 다행이네.”

“아예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런데 진짜 탈옥하면 네가 곤란해질 것 같더라고, 그래서 도와줄 거라고 일단 믿고 기다려 봤지. 돌려받은 가방을 뒤적이며 건성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태량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유즈리하의 보폭이 느려진 걸 눈치채고 속도를 맞췄다.

“그렇게 나를 생각해 줬다니 조금 감동이긴 하네.”

“아니, 우리 화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내가 그 며칠간 얼마나 심란했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할걸?”

정말 억울하다는 듯 유즈리하가 가방 안에 거의 처박다시피 한 얼굴을 들고 항의했다. 날카로운 눈매도 크게 뜨니 조금은 동그래져 얼핏 귀여워 보인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태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이에 유즈리하는 가방 털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챙겨온 비상금이 얼마 없네. 혹시 모텔에 둔 내 짐 어디 있는지 알아? 서비스가 빵빵한 비싼 곳은 아니라 체크아웃 시간 지나서 맡아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유즈리하가 인상을 찡그리며 가방을 휘젓던 이유가 밝혀지자, 태량은 반대로 긴장이 풀렸다. 어깨의 작은 으쓱임과 가벼운 답이 돌아왔다.

“아까 물어물어 찾아와서 내 집에 뒀어.”

유즈리하의 얼굴도 밝아졌다. 걸음에 얹혔던 무게가 사라진 듯 몇 발짝 앞서나간 유즈리하가 멀지 않은 버스 정류장을 가리켰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정류장의 가로등이 비 오기 전날의 달처럼 흐릿한 노란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러면 잠깐 들러서 짐 찾아갈게. 괜찮지?”

“찾은 다음에 어디로 가려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유즈리하가 멈칫했다. 숙박 찾아야 하니 모텔로 가겠지? 짧은 고민 끝에 나온 대답에 태량이 유즈리하를 따라잡아 손짓했다. 자신을 지나쳐 정류장으로 먼저 걸어가는 그를 따라가던 유즈리하에게 뼈아픈 질문이 날아왔다.

“좀 실례되는 말이긴 한데, 모텔 신세 질만큼 지갑 사정 괜찮아?”

“…….”

침묵은 백 마디 말보다 정확한 액수를 전달했다. 눈을 아래로 반 바퀴 굴려 시선을 회피하는 유즈리하에게 태량이 다음 타격을 날렸다.

“오늘 자로 끊어놓은 기차표도 환불 안 돼서 고스란히 날렸을 텐데. 내일이나 모레나 기차표를 또 끊으려면….”

“안 끊을 건데?”

이번엔 태량이 눈을 크게 뜨고 유즈리하를 돌아볼 차례였다. 유즈리하가 팔짱을 끼고 입술을 꾹 물었다. 가늘어진 눈매가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빡쳐서 이대로 어떻게 떠나. 그 자식 면상에 엿이라도 한 번 날려줘야 화가 풀릴 것 같은데. 당한 건 그대로 갚아줘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체포엔 체포로 앙갚음하겠다고 열을 올리는 유즈리하를 태량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류장 유리 벽에 붙어있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 돌아서는 그에게 태량이 진지하게 말했다.

“더더욱 내 집으로 와야겠네. 우리 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어 머리를 긁적이던 유즈리하는 코너를 돌아 다가오는 버스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짐을 가지러 태량의 집에 들러야 하긴 했고,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숙박 문제야 그때 가서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유즈리하는 모텔비로 쓸 여윳돈이 얼마 없다는 현실을 다시 의식 너머로 묻으려 노력했다.

둘이 대화하기 위해 자리 잡은 곳은 한때 유즈리하가 침실로 썼던 태량의 작업실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던 중 거실의 전화기가 울리는 바람에 태량은 유즈리하를 먼저 올려보냈다.

“서에서 온 연락일 수도 있으니까 받고 갈게. 가서 짐 확인하고 있어.”

경찰서라면 이제 학을 뗄 것 같아서 유즈리하도 굳이 태량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바닥에 앉아 제대로 짐을 확인하기도 전에 태량이 곧바로 따라 올라와, 유즈리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빨리 끊은 거 보니 별로 중요한 용건은 아니었나 봐? 나 다시 데려오라는 연락일까 봐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너 데려와달라는 연락은 맞는데.”

태량이 의자에 걸터앉아 가볍게 대꾸하자 유즈리하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농담 아니고 진짜로? 반신반의하며 되묻는 말에 태량이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경찰서 말고 샤르잔한테서 온 전화였어. 내일 자기 사무실에 들러달라는데. 정보교환을 하고 싶대.”

유즈리하가 뒤늦게 태량의 살짝 찡그려진 얼굴을 눈치챘다. 샤르잔만 관련되면 열정적인 대결 요구에 시달렸던 과거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유즈리하 본인이야 샤르잔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었지만, 태량이 그의 요구를 승낙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관심을 짐 정리로 돌렸다.

“딱 잘라 거절하고 왔나 보네.”

“아니, 내일 오전에 들리겠다고 했어.”

경찰서에 다시 출석해달라는 말로 오해했을 때보다 더욱 놀라 유즈리하는 짐을 아예 팽개쳤다. 너 샤르잔 씨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유즈리하의 물음에 태량이 애매하게 머리를 흔들고 팔짱을 꼈다.

“싫다기보단 달라붙는 게 귀찮다고 해야 하나. 나도 별로 가고 싶진 않았는데 이번에 도움받은 게 있어서 거절할 수 없었어. 우리가 해야 할 얘기에 샤르잔 만나기 전에 말 맞추는 것도 포함해야겠네.”

긴 침묵이 흘렀다.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리라 예상했던 유즈리하는 태량의 시선이 제가 아닌 책장의 액자를 향하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태량이 탐정 시험 합격 증서를 들고 부모님과 함께 찍은, 유즈리하에게도 낯익은 사진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유즈리하가 의아하게 묻자, 태량이 그제야 눈을 떼고 유즈리하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의 푸른 눈에 일말의 무게가 깔려있었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만약 내가 탐정 시험을 치는 대신 경찰의 길을 걸었다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을까?”

“갑자기?”

갑자기 까진 아니고, 종종 품는 의문이야. 태량이 상념을 떨치듯 고개를 저었다.

“후회한다는 건 아니야. 다들 가끔 해보는 ‘만약의’라는 가정일뿐이지.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면 더 나았을까 하는. 유즈, 너는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진지한 물음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젖히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의’라는 가정. 만약에 제가 홀로 떨어져나오는 대신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이주했다면? 만약에 벨스토렌으로 오지 않았다면? 만약에 고양이 가면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태량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고민은 짧았고 결론은 명료했다. 유즈리하가 태량을 응시하며 씩 웃었다.

“지금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을 것 같아. 물론 이런저런 일들과 쓸데없는 잘못을 거쳐오긴 했지만…. 그 선택들이 아니었으면 너를 만나진 못했을 테니까.”

탐정이 아닌 경찰이었으면 여권이 걸렸든 말든 두 번 말을 붙이지도 않고 내뺐을 거라며 너스레 떠는 유즈리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태량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네. 조금 가벼워진 분위기를 타서 유즈리하가 툭 물었다.

“그런데 태량, 넌 왜 탐정이 됐어?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한 적 없던가? 사실 너무 소소한 이야기라서 재미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나 유즈리하의 관심이 식기는커녕 도리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는데 이르렀기에 태량은 결국 두 손을 들고 과거를 되짚었다.

“내가 탄생반지를 잃어버리고 찾아다녔을 때가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태량의 탄생반지에 많은 사건과 오해가 얽힌 걸 생각하면 유즈리하의 반응이 이해됐기에 태량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유즈리하를 놀리기 좋은 주제긴 했으나 밤은 깊어져 가고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있었으므로 태량은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때 반지 찾는 걸 도와준 탐정님이 있었거든. 지나가다 바닥에 시선이 박힌 나를 의아하게 여겼는지 잃어버린 게 있냐고 묻더라고. 그렇다고 하니까 그날만이라도 괜찮으면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거야. 마침 의뢰가 끝나 시간이 빈다고 하면서.”

그전까진 경찰서에 협력 건으로 찾아온 탐정과 일은 해봤지만, 개인적으로 의뢰를 넣은 일은 없었다고 태량이 회상했다. 자신에게 의뢰금도, 하다못해 작은 보답이라도 바라지 않았다는 그 탐정에게 태량은 물었더랬다. 감사하긴 하나, 그에게 이익도 없는데 왜 자신을 도와주느냐고.

“그 탐정님이 그러시더라. 일상에서 소소하지만 소중한 도움을 주는 직업도 필요한 법이라고. 세상엔 악의만큼 많은 선의도 있고, 탐정이 그 선의를 베푸는 직업이 되기를 바란다고.”

그 말이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 비록 그날 내 탄생반지는 못 찾았더라도, 탐정님이 내게 준 도움은 정말 고마운 기억으로 남았거든. 태량의 눈이 다시 액자에 가 닿았다. 다만 이번에는 후련함을 담은 시선이 머물렀다.

“탐정 시험을 본 건 반쯤 충동이었어. 탐정으로 직업을 바꿔보자고 다짐한 건 레드캣 수사가 종결, 사실상 포기되고 나서였지.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았지만, 경찰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많았거든.”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니겠어? 내가 말한 대로 이보다 최선은 없었겠네.”

그렇네, 태량이 선선히 수긍하고 유즈리하를 마주 보았다. 빤히 보는 눈길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태량이 빙긋 웃었다.

“그럼, 이제 우리 밀린 이야기를 해보자. 벌써 시간이 꽤 늦었어. 어쩌다가 시장 저택 부근에서 레드캣으로 의심받아 체포되었는지부터 얘기해 볼까?”

잘못한 기분이 드는 건 실제로 무모하게 행동한 제 업보가 맞았기에, 유즈리하는 무의식적으로 바른 자세를 취하고 태량에게 어젯밤 있던 일들을 얘기할 준비를 했다.

* * *

응접실에 앉아 샤르잔을 기다리며 유즈리하는 나오는 하품을 참았다. 결국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니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어서 태량과 숙소에 관해 실랑이할 새도 없었다. 이 시간에 유흥거리로 돌아가 숙박을 찾고, 아침에 샤르잔을 만나러 탐정 거리까지 갈 자신이 있냐는 질문에 유즈리하는 백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수면이 부족했기에 유즈리하는 커피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따듯하고 씁쓸한 액체를 홀짝였다. 샤르잔도 직업이 탐정이니만큼 유즈리하의 말에 작은 모순이라도 있으면 예리하게 짚어낼 테고, 실수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왜 그런 위험한 일을 감행했나 했더니 거기서 레드캣을 찾아낼 줄은…. 네가 잘못 봤으면 어쩌냐고? 그럴 확률은 희박할 것 같은데. 네가 그 가짜 레드캣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기도 하고, 눈썰미가 좋기도 하니까.”

유즈리하가 기억을 되짚어 가짜 레드캣의 외관 특징을 나열하자, 받아적던 태량이 깔끔하게 결론지었다. 이제 문제는 샤르잔에게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는가인데. 이 문제에 관해선 태량과 유즈리하 둘 다 이의 없이 합의를 맺었다.

“고티카에서 레드캣을 본 것, 그리고 우연히 유흥 거리에서 발견해 시장 저택까지 미행한 것. 물어본다면 거기까지만 밝히자. 그가 네 정체를 알고 있었다거나 하는 건 입도 뻥긋하지 말고.”

다른 건 몰라도 정보 조사엔 능한 사람이라며, 응접실로 들어오는 샤르잔을 보고 태량이 유즈리하에게 주의의 눈빛을 보냈다. 유즈리하 역시 본인의 안위가 걸려있었기에 최대한 말을 줄이자고 재차 다짐했다. 샤르잔이 유즈리하에게 먼저 말을 거는 바람에 수포가 되었지만 말이다.

“무사히 나오셨나 보네요. 조수 씨가 레드캣 혐의로 잡혀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되게 놀랐었거든요.”

라이벌의 의리를 보아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바로 태량에게 연락을 취했다며 싱긋 웃는 샤르잔에게 유즈리하가 일단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움을 받은 이상 그냥 입 닦고 지나가기엔 태량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예의를 갖춰야 할 것 같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샤르잔 씨. 혹시 나중에 내가 도움 될 만한 일이 있으면 성심성의껏 도울게.”

“그 제의, 지금이라도 받아들일까 하는데요.”

괜찮겠지, 먹구름? 샤르잔이 묻자, 태량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빠르게 연락해 준 덕분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즈리하를 빼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나마 샤르잔이 무얼 요구할지 예측할 수 있었기에 불안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샤르잔은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정황을 유추해 보니 유즈리하 씨가 진짜 레드캣과 마주쳤을 가능성이 꽤 높다고 추측했거든요. 당신이 본 레드캣에 관해 듣고 싶은데요.”

태량과 미리 말을 맞춰둔 터라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유즈리하는 자연스럽게 몇 초 고민하는 척했다. 샤르잔은 당연하다는 듯 재촉하지 않았고 유즈리하는 보란 듯 태량에게 슬쩍 눈길을 주고 나서야 어물쩍 입을 열었다.

“거짓말할 필요도 소용도 없겠지. 샤르잔 씨 추측대로 어젯밤 레드캣을 마주친 건 맞아. 유흥 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보인 소소한 습관이 레드캣과 유난히 흡사하길래 미행해 봤거든. 시장 저택 부근에서 그를 놓쳐서 흔적을 찾다가 체포당한 거고.”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빼먹고 비튼 유즈리하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교묘한 증언을 내줬다.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샤르잔에게 도리어 유즈리하가 물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레드캣인지 확신할 수 있었는지는 안 물어보네?”

“믿고 있으니까요.”

의외의 대답에 유즈리하의 눈썹이 위로 치솟자, 샤르잔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에 흠잡을 수 없는 당당함이 배어있었다.

“정확히는 당신의 말 자체가 아니라, 제가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판단과 먹구름의 사람 보는 눈을 믿고 있다고 해야겠네요.”

이번엔 태량이 의문의 눈빛을 샤르잔에게 보낼 차례였다. 샤르잔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먹구름과 조수 씨가 고티카 박물관에서 왕홀 도난을 직접 목격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한참이나 조수를 들일 생각을 안 하던 먹구름이 당신을 선택했다면, 최소한 눈썰미나 직감은 수준급이겠죠. 당신의 감이 빗나갔다고 판단했으면 저한테 말하기 전에 먹구름 선에서 잘랐을 거고. 제 말이 틀려요?”

제일 위험한 비밀엔 근접하지 않았지만, 하지 않은 말을 짚어내는 솜씨는 정식 탐정다웠기에 유즈리하는 잠시 놓았던 긴장을 도로 챙겼다. 태량이 유즈리하를 슬쩍 돌아보고 대화를 가로채 왔다.

“그런데 넌 왜 레드캣에 관한 정보를 원하는 거야? 시장의 공개 의뢰가 철회된 걸 못 들었을 리는 없고. 단순히 흥미를 위해서 움직이는 건 시간적 낭비 같은데.”

“그러는 너도 여전히 레드캣을 쫓고 있는 거 아니야, 먹구름?”

그 이유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태량이 입을 잠깐 다문 사이 샤르잔이 활짝 미소 지었다. 밝은 초록색 눈에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왠지 내가 지는 것 같았거든. 모든 의뢰에 성공할 순 없을지라도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억울하지 않지.”

샤르잔의 호승심을 몇 년이 넘도록 겪어온 태량도, 짧은 기간 동안 샤르잔이란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한 유즈리하도 단번에 납득했다. 돌아오는 반박이 없자 샤르잔이 웃으며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그가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조수가 메모장과 펜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당신이 목격한 레드캣의 묘사를 해줄 수 있을까요?”

백 퍼센트 정확도는 기대하지 않으니 부담 갖지 말고 기억나는 대로만 말해줘도 충분하다며 샤르잔이 운을 띄웠다. 이에 유즈리하도 손에 턱을 괴고 기억을 되살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제게 엿을 먹인, 제대로 보지도 못한 그 면상을 떠올리고 있자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머리카락이 갈색이었던 같아. 키도 나와 엇비슷해서 여자치고는 큰 편이었고. 나이대도 충분히 비슷했을 테고.”

“여성이었다고요?”

샤르잔뿐만 아니라 유즈리하의 말을 받아 적던 조수도 유즈리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갈색 머리의 여성이라. 들은 바에 따르면 고티카에 나타난 레드캣은 붉은 머리카락이었던데, 가발을 썼나?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가려내는 게…. 먹구름,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내리깔던 태량이 푸른 눈동자를 샤르잔에게로 돌렸다. 그 속에 번뜩 떠오른 깨달음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반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레드캣이 누구인가에 집중하기보단, 누가 레드캣이 될 수 있는가를 가려내 보는 방식의 접근은 어떨까?”

“누가 레드캣이 될 수 있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유즈리하가 몰래 어깨를 긴장시키는 와중 샤르잔이 천천히 곱씹었다. 태량이 조금 빨라진 어투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가진 한정된 정보로 레드캣의 정체를 짚어내는 건 어렵겠지만, 레드캣의 후보를 추리는 덴 충분할지도 몰라. 붉은 머리카락, 또는 갈색 머리카락, 20대 정도의 여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열쇠는 따로 있어. 성왕의 레갈리아의….”

“주인 인식을 거친 소유 자격이 있을 법한 사람!”

샤르잔이 태량의 말을 끝맺고 벌떡 일어섰다. 조수가 열심히 받아적던 메모지를 빼앗아 숫자 여러 개를 휘갈겨 쓴 샤르잔이 종이를 도로 조수에게 돌려주며 지시했다.

“위층 자료실에 올라가서 이 박스에 들어있는 자료 전부 가져다주렴.”

조수가 한달음에 사라지고 샤르잔이 환해진 눈빛으로 태량을 돌아보았다. 태량에게는 다행히도 중간에 낮은 탁상이 가로막고 있어 샤르잔이 들뜬 마음에 그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내 라이벌이야! 그쪽으로 접근할 생각을 안 해봤네. 마침 이런 분야는 내 전공이란 말이지. 먹구름, 네가 결정적인 힌트를 내줬으니, 정보는 내 쪽에서 공유할게. 이걸로 쌤쌤으로 치자.”

샤르잔이 말을 마치던 차에 조수가 커다란 박스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탁자 위로 쿵 소리 나게 내려놓은 박스는 가지런히 정리된 종이로 가득 차 있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 안을 힐끗 들여다보던 유즈리하에게 반갑지 않은 소식이 떨어졌다.

“성왕의 레갈리아 조사에 들어갈 때 상타스 마을의 자료도 다 수집해 뒀지. 그 마도구의 배경이자 뿌리가 되는 곳이니까. 기예르 시장님이 레갈리아를 사들이기 전까진 대대로 상타스 마을 이장이 관리했다고 하니까 그에 관한 자료도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정보 공유받는 김에 시간 단축도 하자며 샤르잔이 박스를 가리켰다. 태량도 얻을 이득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지 불평 없이 묵묵히 박스로 손을 뻗었다. 유즈리하도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지루한 자료검토에 뛰어들었다.

* * *

“내가 살아온 24년 동안 읽은 활자보다 많은 양을 너와 함께한 한 달 동안 읽은 것 같아.”

태량이 숫제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투덜대는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태량의 집으로 가는 주택가의 인도엔 아직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그림자가 흐릿하게 늘어져 있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유즈리하를 보며 태량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료량에 비해서 나름 일찍 끝난 건데. 빠뜨린 게 없나 교차확인까지 하루 안에 마쳤으면 잘된 일이지.”

“그보다 오래 걸렸으면 자료에 머리 박고 있는 사이에 레드캣이 도시 뜨겠는데.”

“그런 리스크는 늘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오늘 소득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잖아.”

그에 관해선 불만이 없었기에 유즈리하도 어깨를 으쓱이고 태량이 현관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레드캣을 추려보겠다고 덤볐을 때 혹시 제 과거도 들통날까 봐 긴장했지만, 조사 범위는 상타스 마을을 벗어나지 않아서 유즈리하도 걱정을 떨치고 정보 찾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성왕의 레갈리아 관리는 상타스 마을의 이장이 맡아왔다고 해요. 여기까진 알고 있죠? 대대손손 자녀를 교육하고 가르치면서 소유와 관리의 책임을 물려줬다고 하네요.”

“소유자가 직계로 내려왔으면 찾기는 어렵지 않겠네. 기록만 제대로 남아있다면.”

“기록이야 당연히 남아있지. 공개된 기록이라면 말이야. 그런데 레갈리아를 관리했던 상티아 가문에 관한 기록이 엄청 세세하지는 않아. 거기까지 파고들 만한 시간이 없기도 했고, 마을이 몰락한 지 8년이나 지났으니 소실된 기록도 있을 테지.”

그때까지만 해도 유즈리하는 조사가 다시 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에 한숨을 쉴뻔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꼬리를 물어간 건 태량 쪽이었다.

“중간에 연결고리가 끊겨도 괜찮아. 유즈가 가늠한 레드캣의 나이대를 생각하면 최근 기록만으로 충분할 거야. 거기서부터 흔적을 짚어가면 돼.”

상티아 마을이 몰락한 시기가 8년 전이라면, 당시의 레드캣은 높은 확률로 미성년자였을 거야. 정식 관리인이 아닌 그 후계자를 찾는 게 빠를 수 있다는 거지. 태량의 깔끔한 논리와 결론에 유즈리하도 샤르잔도 토 달지 않았다. 그리고 유즈리하는 생각했다. 제가 레드캣으로 활동할 당시 태량이 경찰이든 탐정이든 정식 직위와 권위가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소득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정확한 신상까지는 찾지 못했잖아. 마지막 관리인의 이름조차도 기록엔 없었는데.”

“첫날부터 정답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건 로또 한 번 사서 바로 1등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현실성 있는 태량의 말에 유즈리하가 입을 비죽이고 현관문을 닫아걸었다. 그런데 말이야, 유즈리하가 화제를 전환하려던 찰나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그다지 중요한 용건은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전화부터 받으라며 손짓했다.

“샤르잔이 뭔가 더 알게 되면 연락해준다고 했는데 설마 벌써 찾은 건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면서 착실하게 수화기를 집어 든 태량이 사무적인 인사부터 건넸다. 태량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유즈리하는 차분하고 예의 바른 동의의 음성밖에 나오지 않자 잠시 부풀었던 기대를 내려놓았다. 샤르잔에게서 온 연락이면 미간이 저리 판판할 리가 없겠지. 오래 지나지 않아 태량이 전화를 끊자, 유즈리하가 넌지시 물었다.

“기다리던 연락은 아니었나 봐?”

“기다리던 연락은 맞긴 한 데 네가 기대하는 연락은 아니었지.”

태량이 소파로 걸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정리하기 시작하자 유즈리하가 한쪽 눈썹을 둥글게 휘었다. 그새 새로운 의뢰라도 받아서 진행 중이었냐고 묻는 얼굴에 태량이 간결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어. 내 사무실에 침입하려고 시도한 사람 중 한 명이 나와 대화하고 싶대.”

이젠 태량이 아닌 유즈리하가 이마를 찌푸릴 타이밍이었다. 김이 샜다는 듯 소파에 철퍼덕 몸을 파묻은 유즈리하가 작게 투덜댔다.

“맞다, 그 심부름센터 놈들. 체포된 지 며칠이나 지났지? 닷새 정도 됐나? 재판까지 가기 전에 대충 합의 볼 생각인가?”

“보통 형량을 받기보단 합의로 해결하고 싶어 하지. 그런 면에선 면회 요청이 들어온 게 한 명뿐이라는 게 오히려 의외네.”

태량이 고민하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자, 사탕을 찾아 주머니를 뒤지던 유즈리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툭 내뱉었다.

“뭐, 제 딴에는 형벌보다 두려운 협박을 받고 있었다거나.”

“협박?”

태량이 되묻는 동시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따라 태량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며 유즈리하가 나중에 말하겠다고 손짓했다. 두 번이나 대화가 끊겨 미안하긴 했지만, 전화가 저대로 울리게 놔둘 수도 없었기에 태량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들었다.

-많이 바빴나 봐, 태량 탐정. 사무실에도 집에도 하루 종일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여보세요’라는 단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선 건너편의 사람이 치고 들어왔다. 전화를 받은 태량은 물론이고 아직 소파에 늘어진 유즈리하도 성량 좋고 당당한 목소리의 주인을 몰라볼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리아나 씨. 오늘 일정이 있었던 터라 죄송하게 됐어요. 무슨 일로 연락하셨나요?”

-혹시 유즈리하 조수한테서 이야기 못 들었나? 우리 쪽이 조사하던 사람이 네 사무실 침입 건과 엮여있는 것 같아서 뭔가 알게 되면 연락한다고 했었는데.

아. 고작 며칠 사이에 터진 사건이 한둘이 아니라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오리아나 할페른에 관해선 깜빡하고 있었다. 이틀 전 유즈리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태량이 사과했다.

“전해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근래 많은 일이 있어서 잊고 있었어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이상할 일도 아니고, 사과할 일은 아니지. 오히려 이쪽이 먼저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오리아나 씨가요?”

태량과 유즈리하가 의문을 담은 시선을 교환했다. 수화기 반대편에서 조금 곤란해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면목 없지만, 네 사무실을 습격한 이들 중에 할페른 쪽으로 연관된 사람이 있는 것 같거든.

“네?”

태량이 반문하자 유즈리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게 대체 뭔 소리냐며 옆에 바짝 붙어 속삭이는 유즈리하에게 잠깐 기다려 보라는 손짓을 건네고 태량이 거실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저녁 8시를 넘긴 시각을 확인하고 오리아나의 저택으로 가는 시간까지 계산한 후에 태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짧게 끝날만한 얘기는 아니겠죠?”

-당장 와달라고 하기엔 미안한 시간이긴 하지. 내일도 일정이 바쁘려나? 되는 한 빠르게 상황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면 내일 오전에 찾아가겠다며, 오리아나와 약속을 잡고 태량이 전화를 끊었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유즈리하가 입꼬리를 애매하게 비틀었다.

“그 할페른과 연관된 사람, 좀 전에 경찰서에서 전화 온 너와 대화하고 싶다는 사람과 동일 인물일까?”

“양쪽 얘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연락이 온 타이밍을 봐선 높은 확률로 그럴 것 같지.”

상타스 마을에 관한 조사는 조금 미루고 내일은 할페른 저택과 경찰서를 둘 다 방문해야겠다며 태량이 차분히 일정을 정리했다. 바뀐 우선순위에 얌전히 수긍하는 유즈리하를 보며 태량이 뒤늦게 질문했다.

“전화 오기 전에 하려던 말이 뭐였어? 까먹진 않았겠지?”

그걸 용케 기억하고 있다며 유즈리하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중요한 건 아니었는데, 운을 떼며 유즈리하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태량을 뒤돌아봤다.

“네가 샤르잔 씨를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는데, 의외로 협동 조사에 동의해서. 통신 마도구 빌려주겠다는 것도 결국 받아왔잖아.”

태량이 집이나 사무실에 없는 시간이 많아서 연락하기가 너무 까다롭다며 반강제로 통신 마도구를 안기던 샤르잔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당장 그저께 유즈리하 체포 건 때문에 전화했을 때 연락에 차질이 생긴 문제까지 들먹이니 태량은 불만이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조사를 마치고 돌려주는 수밖에.

“안 받으면 조수 한 명 붙여서 쫓아다니게 시키겠다는데, 받고 빨리 돌려주는 게 낫지. 게다가 클라이언트의 의뢰가 아닌 개인적인 조사고, 협동이라고 하기엔 정보 공유에 가까우니까. …그리고 샤르잔이 딱히 싫은 건 아니야. 성향이 나랑 좀 안 맞다 뿐이지.”

일하기도 바쁜데 자꾸 대결 신청을 걸어와서 귀찮다며 중얼거리고 태량이 유즈리하를 따라 계단을 올라왔다. 앞서가던 유즈리하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샤르잔 씨가 건 대결에서 진 적 있어?”

“없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꾸에 유즈리하는 박수를 보내고 잔소리가 날아오기 전에 제 임시 침실로 쏙 피신했다.

* * *

“유즈리하 조수, 모레면 떠난다더니 아직 벨스토렌에 남아 있었네?”

“사정이… 있었어요.”

저번 만남에서 썼던 두루뭉술한 답변을 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설명하기엔 그 외에도 나눌 얘기가 많았기에 유즈리하는 머쓱하게 얼버무렸다. 오리아나가 유즈리하와 태량을 번갈아 보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태량 탐정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나 보지. 이해해.”

뭔가 오해가 점차 쌓이는 것 같았지만, 유즈리하에겐 핑계조차 댈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리아나가 바로 심각한 표정을 띠고 본론으로 들어간 까닭이었다.

“네 사무실 침입 시도 사건은 유즈리하 조수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조수 씨와 얘기 나눠본 결과 우리 쪽에서 주시하던 사람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추측하고 있었고. 심부름센터에 수상쩍은 의뢰를 넣던 의뢰인 말이야. 그래서 체포된 심부름센터 직원들을 좀 털어볼까 했는데, 거기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등장했더라고.”

오리아나가 딱 소리와 손가락을 튕기며 누군가를 호명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할페른 패밀리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오자, 그를 알아본 유즈리하가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저번에 사주신 빵 잘 나눠 먹었어요.”

안녕하시냐는 인사를 건너뛰고 건넨 말에 남자가 머리를 꾸닥거리고 잽싸게 태량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눈이 동그래진 태량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우렁찬 사죄가 남자에게서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오리아나 님이 말씀하신 그 자식이 제 동생입니다! 자꾸 죄송한 일만 만드는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동생이요?”

태량이 되묻고 유즈리하가 넌지시 이어서 물었다. 혹시 동생한테 사주해서 태량의 사무실을 습격하라고 했나요? 그럴 리가 없잖냐며 펄쩍 뛰는 남자에게 유즈리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그쪽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태량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단어 선택이 과격하긴 하지만… 유즈리하 말이 맞아요. 사과는 괜찮고 상황 설명만 해주시면 충분해요.”

남자는 여전히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으나 태량의 요청을 거부하진 않았다. 자리에 앉는 것도 사양하고 남자가 밤새워 준비해 온 듯 논리정연하게 말을 시작했다.

“동생이 침입 미수 건으로 경찰에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건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연락했는데 돌아오는 회신이 없어 집에 가봤더니 거기도 없고. 실종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어 경찰에 찾아갔더니 망할 놈이 거기 있더라고요.”

황당한 어조가 꾸밈없이 묻어나오자, 유즈리하로 인해 비슷한 사건을 겪은 태량이 잠시 동정의 묵념을 보냈다. 그 동생이 눈앞에 있었으면 머리카락을 전부 쥐어뜯을 기세로 주먹을 꾹 말아쥔 남자가 한탄과 사과가 뒤섞인 말을 이었다.

“불법 심부름센터에서 저 몰래 일하고 있었다는 것도 안 믿어지는데, 받고 다닌 의뢰가 탐정님 사무실 침입 따위였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더라고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오리아나 님에게 보고는 했는데….”

“나도 곧바로 네게 연락을 시도했고. 연결된 건 늦은 저녁이었지만.”

태량과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절 보자마자 잘못했다면서 빌긴 했습니다만, 선처를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탐정님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는 하는데,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어제 오리아나 씨의 전화를 받기 직전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긴 했어요. 저와 대화하고 싶다고 요청한 사람이 한 명 있다고요. 그게 아마 동생분 얘기 아니었을까 싶은데.”

남자가 머리를 푹 떨궜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오리아나의 담담한 질문이 절묘하게 겹쳤다.

“너는 어떡하고 싶은데, 태량 탐정? 어느 쪽으로든 강요할 생각은 없어. 선택은 네 몫이니까.”

태량이 고개를 저었다. 한쪽으로 올려묶은 레몬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원래 만나볼 생각이었어요. 충분히 협조만 해준다면 선처해 줄 의향도 있고요. 오리아나 씨네 일이라서가 아니라 저도 이쪽이 얻는 게 많아서 결정한 거니 빚졌다는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다면 굳이 미뤄둘 일도 아니지.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가려는데, 동행할 의향이 있나?”

감동한 표정으로 흡사 절이라도 할 기세던 남자를 오리아나가 손짓으로 제지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일어서서 태량과 유즈리하를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금색 눈에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체포된 동생의 이름이 닐이라는 건 경찰서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두 번이나 엮인 저 할페른 남자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걸 깨달았지만, 지금 와서 물어보기엔 귀찮아서 유즈리하는 대충 넘겼다. 태량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남자 쪽으로 힐끗 눈길을 주었으나 그 역시도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자네가 닉의 동생이군. 오리아나 할페른이다.”

단번에 압도되어 티 나게 쭈그러드는 심부름센터 직원 닐을 누구도 탓하지 못했다. 오리아나 할페른을 평범하게 길에서 마주쳤어도 긴장했을 법한데 만남의 장소가 감옥의 면회실이며, 제 잘못으로 수감된 상황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간단한 인사로 기선제압을 마친 오리아나가 닉에게 순서를 넘기고 물러섰다. 닉이 몸을 숙여 의자에 앉은 닐과 눈높이를 맞추고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협조만 잘한다면 형량은 줄일 수 있어. 탐정님도 선처해 주시겠다고 했고 오리아나 님도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네게 달린 셈이야.”

채찍과 당근의 조합이로구나, 유즈리하가 깨달았다.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닐이 냅다 무릎을 꿇고 오열에 가까운 사죄를 토했기 때문이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이런 건 형과 똑같다고 생각하며 쓸만한 정보를 집어내려고 유즈리하가 귀를 기울였다.

“정말 잘못했어요. 저희 형제가 이주자거든요. 열심히 일해도 돈은 부족하고, 형한테 그만 기대고 금전적으로 독립하고 싶은 욕심에 심부름센터 일에 손대게 되었어요. 아시다시피 벨스토렌 물가도 비싸고, 큰돈을 빨리 벌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어서…. 핑계죠. 죄송해요.”

구구절절한 사정은 딱했으나 유즈리하에게 큰 감흥은 주지 못했다. 사연을 멍하니 흘려듣던 유즈리하의 집중이 퍼뜩 돌아온 건 심부름센터 내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전부 이주자였어요. 벨스토렌에 정착한 지 1년 좀 넘은 사람도 있었고 고작 몇 주 된 사람도 있었죠. 대부분 돈 때문에 불법인 걸 알면서도 일하고자 했는데, 걸리면 무조건 추방형을 받을 걸 아니까 지금까지 다들 입 다물고 있었던 거예요.”

“그곳이 받는 의뢰 대부분이 제 사무실 침입 건처럼 범죄와 관련된 종류였나요?”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근까진 아니었어요.”

태량의 질문에 닐은 염치가 남아있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주눅 들어 대답했다. 거짓말처럼 들리진 않았기에 태량은 추궁하지 않고 닐이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따지자면 불법이니 범죄는 맞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잘한 비밀문서와 편지를 배달하는 의뢰나 받았었어요. 그런데 센터 점장님이 언젠가부터 위험한 의뢰도 시키시더라고요. 큰 연줄이 생겼다고, 절대 우리가 적발될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돈을 많이 벌면 너희도 좋지 않겠냐면서.”

“큰 연줄?”

일개 불법 심부름센터가 강력범죄를 저지르고도 기고만장할 정도의 연줄이라면 예상가는 곳은 몇 없었다. 유즈리하가 눈을 굴려 오리아나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오리아나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범죄에서 손 뗐다는 소문이 돈 만큼 할페른 패밀리일 가능성은 애초에 작긴 했지만, 오리아나의 반응을 보아하니 할페른은 확실히 후보에서 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유력한 후보는 둘뿐이었다.

“시청? 경찰? 아니면 둘 다?”

장소가 경찰서 내부의 임시 감옥이라는 걸 머릿속으로 상기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유즈리하가 태량에게 속삭였다. 태량은 잠시 고민하다가 면회실 밖에서 보초를 서는 경찰을 눈으로 가리켰다. ‘나중에’라는 함의를 담은 몸짓을 알아채고 유즈리하가 입을 다물었다. 속이 터졌는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화를 낸 건 닉 할페른이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고? 머리에 돌밖에 안 들었어? 어떤 높은 사람이든 간에 꼬리 자르기를 시전하면 결국 손해 보는 건 너밖에 없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

“처음엔 점장님 빼고 다들 꺼렸지만… 작은 의뢰가 하나둘 별 탈 없이 끝날 때마다 익숙해졌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손을 써서 추방형은 면하고 감옥살이만 조금 하고 끝날 수 있다고 했어. 그에 관한 보상도 충분히 나올 거라고.”

“그러니까 그걸 믿었냐고!”

닉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쳤다. 잠자코 닐의 말을 곱씹던 태량이 둘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 연줄이라는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마치 누군가 엿들을까 두려운 듯 닐이 안절부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망설임 끝에 나온 답은 침묵 속에서도 간신히 들릴 만큼 조용했다.

“확실하게 이름이나 직책을 말한 적은 없어요. 짐작 가는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불안한 표정이 한층 깊어지자,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태량이 약속했다. 닐 씨가 원치 않는다면 이곳에서 들은 것이 이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진 실토는 모깃소리보다 작았다.

“몇 주 전에 시청 근처에서 자료를 넘겨받아 방송국으로 대리 발송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도 늘 오던 연락책이 왔었죠. 후드를 눌러쓴, 음성변조기를 쓰는 사람. 늦은 밤이어서 사람도 아무도 없었고, 가로등만 피하면 어둠에 숨어들기 쉬울 정도로 건물에서 나오는 빛도 거의 없었어요.”

처음부터 뒤를 밟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닐이 변명했다. 다만 자료를 가지고 자리를 뜨려던 와중 그 연락책이 시청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호기심에 잠시 숨어 기다렸다고 했다.

“우리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이름이나 얼굴은 몰라도 어느 창문에 불이 켜지는지에 따라 부서는 짐작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이래 봬도 심부름 일 하면서 시청 약도는 외우게 되었거든요.”

그 좋은 머리로 왜 제때 발 뺄 생각을 하지 못했냐며 닉이 투덜거렸다. 오리아나가 닉을 조용히 시키고 계속 얘기를 이어가라며 손짓했다.

“그 사람이 들어가기 전에 불이 켜진 창문은 딱 하나였어요. 20분 후에도 그 창문 하나뿐이었고요.”

닐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뻥긋거렸다. 태량도 유즈리하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단어였다.

시장비서실.

그 순간 태량과 유즈리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둘은 차마 입 밖으로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길게 시선을 마주쳤다.

* * *

팽팽 돌아가는 추측과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둘의 말수가 훅 줄었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서 문을 잠글 무렵엔 충격에서 충분히 벗어나 있었다. 딱히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결백을 확신해서는 아니었다. 태량은 진실을 가려내고자 하는 직업정신으로, 유즈리하는 그간 느꼈던 불유쾌한 직감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기분으로 각자 납득의 단계에 이르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지.”

유즈리하가 흘린 말에 태량이 책상으로 걸어가며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닐 씨의 추측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에스트란 씨는 이 레드캣 사칭범에 관해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침묵하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 걸까?”

태량이 의자에 앉자, 유즈리하가 책상에 기대어 문장을 끝마쳤다. 무언가를 찾는 듯 서랍을 뒤적이던 태량은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윽고 한숨을 쉬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예상하곤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시장비서실에 근무하는 직원 명단은 극비 정보라 입수한 적이 없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정보를 요청하기도 어려울 텐데.”

“네 추측으론 어떤데?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여기에 관련되어 있어 보여?”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입을 여는 게 꺼려졌는지 태량은 한참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유즈리하가 그를 조금 기다렸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시청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 네가 성왕의 검을 훔친 게 레드캣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문을 표하자 바로 다음 도난 사건에서 도둑이 본인이 레드캣이라고 못 박는 쪽지를 남겼었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지 않아?”

그뿐만이 아니라며 유즈리하가 손가락을 꼽았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했고, 무엇보다 감이 의심에서 확신으로 기울고 있었다. 고작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엔 유즈리하의 감은 그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

“유령 사건 때도 퇴마사에게 뭐가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요지의 말을 꺼낸 것도 기억해? 시장 본인도 아니고 시장 비서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책임을 말할 수 있나? 누가 보면 에스트란 씨가 진정한 레갈리아의 주인인 줄 알겠어.”

“…네 말대로 이상하긴 해. 물증 없이 네 추측이 정답이라고 확신하긴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도 아직 네게 말하지 못한 게 있다는 걸 방금 기억해 냈어.”

뭔데? 유즈리하가 몸을 돌려 태량을 마주 보았다. 잊고 있던 게 머쓱했는지 태량이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에스트란 씨가 너를 레드캣으로 의심했던 적이 있어. 네가 성왕의 왕홀에 화상 없이 손대는 걸 본 적 이후로.”

“그걸 봤다고?”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소름이 쭉 돋아 유즈리하가 펄쩍 뛰었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직위를 생각하면 유즈리하의 뒷조사쯤은 쉽게 할 수 있을 터였다. 도적질의 꼬리가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않게끔 노력했다지만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하물며 제가 처음 손댄 마도구는 고향의 귀물이 아니었던가.

“그 이후 왕홀이 가짜 레드캣에게 도난당한 걸 목격하고 너에 대한 의심은 거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가짜 레드캣과 한 패일 가능성을 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가짜 레드캣이 저지른 건도 나한테 덮어씌우면 본인은 레갈리아도 얻고 책임도 피하고 일석이조겠네.”

유즈리하가 이를 빠드득 갈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표정을 짓던 태량이 팔짱을 끼고 천장을 응시했다.

“그런데 왜?”

“뭐가?”

유즈리하의 불퉁한 어조가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어 태량은 마음 상하지 않았다. 꼬았던 팔짱을 풀고 태량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에스트란 씨가 레갈리아를 탐낼 이유가 뭐지? 이 동기가 없으면 우리가 여태 한 추측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이런 종류의 계획범죄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기 마련이니까.”

태량이 유즈리하를 길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찔리는 바가 있었는지 유즈리하가 눈길을 피해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물론 상대가 화제를 회피한다고 물러날 태량이 아니었다.

“여기선 오히려 네가 나보다 핵심을 잘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황당하게 반문하면서도 유즈리하는 착실히 태량의 요구대로 생각나는 바를 하나씩 짚어나갔다. 재미나 스릴을 추구하는 건 아닐 테고. 돈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고.

“나처럼 시장에게 유감이 있었다거나? 총애받는 비서인 만큼 그런 기색은 딱히 없어 보였는데.”

“잠깐만.”

또 뭔데? 이번엔 호기심을 담아 유즈리하가 물었다. 혹시 너한테만 시장님 욕을 한 적이 있어? 반쯤 농담인 게 분명한 어조였기에 태량은 머리를 흔드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유즈리하가 망각한 점을 짚었다.

“에스트란 씨도 너처럼 타 도시 출신이잖아. 고향 마을이 어디라고 말 한 적이 있던가?”

“그것까진 기억나지 않는데, 우리 고티카 유령 사건 때 있잖아? 유독 상타스 마을의 몰락에 동정을 보이긴 했어.”

태량이 눈을 감고 차분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녹음한 것처럼 선명하게 단어를 복제하진 못했으나, 오랜 기간 공부하고 실전 경험을 쌓은 훈련은 대화의 핵심을 불러오기엔 충분했다.

“사람들의 고향이 흔적으로만 남게 되는 건 비극이라고 했었지.”

“만약 에스트란 씨가 몰락한 도시나 마을 출신이라면 충분한 동기가 되지 않을까? 그 사람 배경을 알아볼 방법은 없나?”

뒤적이던 서랍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태량이 종이를 한 장 끌어와서 펜을 들어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생각의 흐름을 작성하는 규칙적인 글씨체를 내려다보며 유즈리하도 같이 고민에 빠졌다.

“정식으로 정보 제공 요청을 넣는 게 제일 정확할 테지만, 명확한 사유가 없는 지금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고, 이건 다른 탐정에게 의뢰해도 마찬가지겠지. 샤르잔 정도의 정보 네트워크를 가졌다면 몰라도….”

“어차피 정보 공유하기로 한 김에 샤르잔 씨한테 요청 넣어보는 건 어때?”

“레드캣이 도시를 뜨기 전에 행적을 파악해야 하니 여러 군데 물어볼수록 좋긴 하겠지. 나중에 이걸 빌미로 대결 받아달라고 요구하면 나만 귀찮아질 것 같지만.”

중립적인 무표정을 고수해도 미묘하게 내키지 않는다는 마음이 태량의 얼굴에서 새어 나와 유즈리하는 고개를 돌려 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그의 심기를 거스를 웃음을 참아내고 다시 시선을 주니 태량은 이미 종이에 도로 몰두하고 있었다.

“페라노 경감님에게 여쭤볼 수도 있지만, 경감님이 인맥을 봐서 정보를 빼돌려 준다는 오해를 사기 좋아서 되도록 다른 방법을 찾고 싶네.”

“시청, 비서실, 경찰, 탐정은 전부 아웃이고. 불법 심부름센터를 쓰고 싶을 생각은 없을 테고. 그 사람 여기 가족이나 친척은 따로 없다고 했나?”

“친척?”

태량이 번개처럼 떠오른 이름 하나를 종이에 휘갈겼다. 유즈리하가 인상을 찡그리고 낯선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넬리우라. 며칠 전에 잠깐 얘기했던 것 같은데, 에스트란 씨의 사촌 동생이 벨스토렌에 방문해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었잖아?”

“…아, 유흥가에서?”

기억을 불러오는 속도가 반 박자 늦긴 했지만, 유즈리하는 가까스로 태량과 화해한 날 오갔던 대화를 상기해냈다.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즈리하가 이름 뒤에 빈 부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넬리우라 에스트란이야? 사촌이면 같은 도시 출신이려나?”

“성까진 못 들었어. 따로 뭘 물어볼 틈도 없었고, 간단한 안부를 묻는 말에도 별로 열정적인 답을 주진 않아서.”

“특이할 정도로 경계하는 낌새가 있다거나 그랬어?”

“낯을 가린다고 듣긴 했는데… 맞아, 너를 아는 눈치였어. 저번에 얘기했을 때 별말 없이 넘기길래 착각인가 싶었는데.”

“나를? 난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즈리하가 그를 바라보자, 태량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네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내게 조수를 찾고 있냐고 묻더라고. 나와 초면인 사람이 내게 조수가 있는지, 그 조수가 자리를 비웠는지 어떻게 알고 있나 싶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확실히 이상한데. 벨스토렌 주민도 아니고 관광객인데, 나를 알고 있고 너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이라는 것도 안다?”

답이 코앞에 있지만, 짚으려 하는 손가락이 자꾸 빗나가는 기분에 유즈리하가 이마를 짚었다. 태량도 유즈리하와 종이를 번갈아 보다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만나서 다시 얘기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넬리우라 씨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벨스토렌에 남아있는지도 모르니 무턱대고 찾는 건 비효율적이겠지. 사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싶어.”

“그게 뭔데?”

“에스트란 씨에게 직접 찾아가기.”

넬리우라의 이름 밑에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이름을 쓰고 동그라미 치는 태량을 잠시 쳐다보던 유즈리하가 눈썹을 둥글게 휘고 팔짱을 꼈다.

“혹시 고양이의 아홉 목숨이 아직 남아있었니?”

“고양이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해두는데, 넌 같이 가면 안 돼.”

“아니 왜?”

반사적으로 항의하면서 이성적으로는 유즈리하도 태량이 펼칠 논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사라졌던 레드캣으로 의심받은 데다가, 제게 원한이 있어 보이는 가짜 레드캣과 연관되었을 소지가 다분한 인물 앞에 목을 들이밀 정도로 유즈리하는 머리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태량을 혼자 보내야 한다는 점이 짜증이 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몇 번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닫는 유즈리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태량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가볍게 흔들었다. 샤르잔이 반강제로 빌려준 소형 통신 마도구가 손에 들려있었다.

“비상 연락이 가능한 수단도 있고, 아예 따라오지 말란 말은 아니야. 밖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 정도는 괜찮아. 애초에 당신이 범인 맞느냐고 추궁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정보만 떠보러 가는걸.”

오히려 기다리면서 또 위험한 일 벌이지 말라며 태량이 반대로 유즈리하에게 주의를 주고 안비체오 에스트란과 약속을 잡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그에게 태량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되었기에 유즈리하는 입을 강제로 봉인 당한 채로 태량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 * *

일이 바빠서 주중엔 시간이 안 되니 일요일이라도 괜찮겠냐는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제안을 태량은 급한 티를 내지 않으며 승낙했다. 안비체오와의 전화를 끊고 태량이 샤르잔에게 연락하는 사이 유즈리하는 재빠르게 기차역에 다녀왔다. 버스 정거장에서부터 뛰어오는 바람에 숨이 약간 찬 상태로 유즈리하가 보고했다.

“이번 주말에 벨스토렌을 떠나는 표는 전부 일찌감치 예약된 표래. 당장 내일이나 모레 레드캣이 여기를 떠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레갈리아를 전부 성공적으로 훔쳐내기 전에 표를 미리 끊어뒀을 가능성은 작을 거야. 레갈리아에 집착하던 걸 보아하면 네 개 다 손에 들어오기 전에 도시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을걸.”

9월 10일, 화요일. 태량이 탁상달력에 날짜를 펜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시장님의 저택에서 레드캣이 왕관을 훔쳐낸 건 이날 밤이었지. 태량이 상기시키자 제가 체포되었던 사건도 떠올라 유즈리하가 얼굴을 찡그렸다. 태량이 차분하게 펜을 두 칸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 이후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어. 표를 구했다 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떠나는 일자는 아니겠지.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태량의 추측대로 안비체오 에스트란과의 약속이 다가올 때까지 기차역 부근엔 레드캣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찍힌 그가 레드캣을 찾으러 유흥가를 돌기엔 위험이 크다는 태량의 지적에, 유즈리하는 강제로 떠나는 기차의 감시역을 맡게 되어 이틀 내내 역을 서성이며 따분함과 싸워야 했다.

유즈리하 대신 유흥가를 수색한 태량도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넬리우라를 마주칠 수 있다는 기대마저 엇나가 안비체오를 만나러 시청으로 가는 발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다른 방법이 막힌 상태에서 그가 유일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인물임을 유즈리하도 자각하고 있었기에 딱 한 마디의 불평을 끝으로 태량과 떨어져 이동했다.

“일요일도 시청으로 출근 예정이라 이쪽으로 와달라니, 대체 얼마나 일에 미친 사람인 거야? 아니면 우리 엿 먹어보라고 일부러 바쁜 척하는 건가?”

밖에서 기다리는 유즈리하에게 전자는 모르겠으나 후자는 빗나간 예상이라고 얘기해줄 방도는 없었다. 안내원이 부재해 비서실에 홀로 올라온 태량을 맞이한 건 안비체오가 아닌 비서실의 다른 직원이었다.

“죄송합니다. 에스트란 씨에게 손님이 있을 거라고 전해 듣긴 했는데, 잠깐 일이 생겨서 나갔다 오신다고 하셨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오실 겁니다.”

창문이 딸린 회의실로 태량을 안내하며 직원이 거듭 사과했다. 직원의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새겨진 모습은 충분히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태량은 그저 고개를 젓고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에스트란 씨뿐만 아니라 다들 바쁘신가 봐요.”

“말도 마세요. 터진 사태가 조금 수습될 만하니 이번엔 더한 사고가 터지고…. 어휴, 그래도 에스트란 씨가 제일 고생이죠. 레드캣이 시장님의 저택을 습격한 날 밤에 에스트란 씨가 성왕의 왕관을 시장님에게 돌려드리러 갔다가 휘말릴 뻔했잖습니까.”

“에스트란 씨가요?”

태량이 놀라 되묻자, 직원이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역으로 질문했다. 모르셨어요? 전 에스트란 씨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오신 줄로 알았는데. 혹시 직원이 더는 말해주지 않고 자리를 뜰까 봐 태량이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둘러댔다.

“자세한 상황을 물어볼 기회는 없었어요. 바쁜 사람 붙잡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그것도 그렇긴 하죠, 직원이 근래 소화하던 살인적인 근무 일정을 떠올렸는지 급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한탄처럼 흘러나오는 말에는 며칠에 걸쳐 쌓인 피로와 짜증이 배어있었다.

“에스트란 씨의 말에 따르면, 시장님에게 왕관을 전해드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에 통신이 와서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연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수상쩍은 사람이 저택 밖을 배회하고 있다는 제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즉시 경찰에 신고를 넣고 방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시장님은 습격받아 쓰러져 계셨고 왕관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첫 목격자가 에스트란 씨였다는 이야기네요.”

혼잣말에 가까운 감상이 태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득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하마터면 나란히 습격받아 시장님과 함께 병원에 누워있을 뻔했죠. 보고서도 작성하랴, 경찰에 제출할 진술서도 작성하랴, 차라리 누워있는 게 몸은 편했을 수도 있지만요. 시장님 곁에서 레갈리아 관련된 일은 도맡아 하시다 보니 레드캣에 관한 서류도 다 에스트란 씨가 처리하고 있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직원은 죄송하지만 이만 가보겠다며,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인사를 하고 헐레벌떡 떠나갔다. 진심으로 바빠 보였기에 태량은 그를 붙잡지 않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그에게서 들은 정보를 곱씹었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처음 만났던 왕홀 유령 사건부터 현재의 왕관 도난까지, 그 또한 레드캣과 수많은 접점이 있었다. 이게 과연 그가 시장 비서였기 때문에 발생한 우연인 걸까? 아니면 유즈리하의 의심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걸까?

“오래 기다리게 해드렸습니다, 태량 탐정님.”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긴 보라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에 태량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가벼이 대답했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에스트란 씨가 바쁘신 걸 알고 있으니 시간 내달라고 요청한 게 죄송하죠.”

“죄송할 필요가 있습니까. 탐정님이 절 보고자 하셨으면 그만큼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안비체오가 태량의 맞은편에 앉았다. 태량의 등 뒤에 있는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와 그의 안경을 비추자 붉은 눈동자가 잠깐 가려졌다. 그가 손깍지를 끼고 대화를 시작해도 좋다며 미소 지었다. 피곤한 낯이어도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시장님은 좀 어떠신가요? 입원하신 후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해서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습격 당시 머리를 크게 다쳐서, 깨어나도 회복까지 오랜 기간이 걸릴 거라고 병원에서 그러더군요.”

좋지 못한 소식에 태량이 잠시 숙연해졌다. 안비체오 에스트란도 심각해진 표정으로 여러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회의실 밖을 가리켰다.

“시장직 문제는 물론이고, 레갈리아와 관련된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시장님이 부재하시니 아무것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죠. 그렇다고 마냥 손 놓을 수는 없어서 일시적인 서류처리만이라도 밀리지 않게끔 비서실의 모든 인원이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출근하는 중입니다.”

“설마 밤에도 퇴근 못 하시는 건 아니죠?”

태량이 짐짓 놀란 척하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안비체오는 온전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다가 누구라도 쓰러져서 인원이 빠지게 되면 더 손해니까요. 밤에는 돌아가며 한 명씩 당직을 섭니다. 야간 당직은 레갈리아 전시를 준비할 때부터 해오던 터라 오히려 익숙한 편입니다.”

그렇군요.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맹렬히 두뇌를 회전했다. 심부름센터 직원 닐의 이야기에 따르면 레드캣 관련자에게서 서류를 넘겨받았을 때 시청의 시장비서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고 했으니, 정확한 날짜를 받아 야간 당직 스케줄과 대조해 보면 유력한 조력자의 이름이 나올 터였다. 나중에 오리아나 할페른을 통해 닐과 면회를 한 번 더 신청해야겠다고 머릿속에 메모하며 태량이 안비체오를 떠보았다.

“비서실 인원이 꽤 있으니, 차례가 자주 돌아오진 않겠네요. 에스트란 씨는 특히 담당하는 일이 많으실 텐데, 최근에 당직까지 서셨으면 매우 피곤하시겠어요.”

“비서실 일이 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안비체오가 주제를 돌리자, 태량도 자세한 날짜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일찍 관둘 수밖에 없었다. 태량이 일부러 닫힌 회의실 문에 시선을 준 후, 음성을 낮추고 안비체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드캣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었는데, 에스트란 씨도 들어야 할 내용 같아서 찾아왔어요.”

의심을 사무적인 무표정 뒤로 감추는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떠보는 상대방의 표정을 모르는 척 살피는 일도 익숙했다. 그러나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으로 어두웠으나, 불안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도 떨림 하나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정보만으로 찾아오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중요한 단서를 찾으셨나 보군요.”

정말 우연에 휘말린 결백한 사람일까, 아니면 필사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는 걸까? 안비체오를 만나기 직전 비서실 직원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의심을 어느 정도 거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연이 하나둘 겹칠 때 눈 돌리는 것은 탐정으로서 직무 유기였다. 그렇기에 태량은 단호하게 패를 꺼내 들었다.

“에스트란 씨, 시장 비서실에 레드캣 본인, 또는 그의 조력자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태량은 두 가지 반응을 예상했다. 그 말이 정말이냐며 놀라거나, 그럴 리 없다며 일축하거나. 어떤 방향이든 사전에 태량의 질문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빈틈을 보이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안비체오의 입에서 나온 답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어디서 들은 정보인지 알 수 있을까요?”

목소리도, 표정도 평소의 안비체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태량은 망설이는 척 뜸을 들였다가 사과를 건넸다.

“정보원의 신원 비밀 유지를 위해 아직은 알려드리기 어렵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다만 믿을만한 정보라는 건 보장할 수 있습니다.”

팔짱을 낀 안비체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가 없어 태량이 먼저 슬쩍 찔러보았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탐정님의 정보원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여러 정황이 맞아떨어지니까요. 아예 허황한 추측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레갈리아의 보안이 허술하지 않았음에도 손쉽게 도둑맞은 점이라거나, 시장님에게 왕관이 반환되는 시각에 정확히 저택에 침입해서 왕관까지 빼돌린 점이라거나, 우연만으로 치부하기엔 운이 매우 좋았죠. 태량과 유즈리하가 짚어낸 일련의 우연들이 안비체오의 입을 통해 반복되었다. 그 분석에 태량은 짧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정말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레드캣과 관련 없는, 다소 운이 없었던 피해자인가? 아니면 순순히 우연이 아님을 시인하는 것조차 연기일까? 태량에게 주어진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정보는 감사합니다. 이른 시일 내에 비서실 내부를 세심히 점검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 과정에서 무언가 알게 되면 탐정님에게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더 떠보기도 전에 안비체오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다는 눈짓으로 시계를 가리키는 안비체오의 눈 밑에 그늘이 깔려있었다. 저도 일정이 많고, 탐정님 역시 이 이상 정보를 공유하기 곤란해 보이시니까요. 남은 대화는 후일 다시 하도록 하죠. 깔끔하지만 단호한 맺음에 태량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 이상 파고드는 건 역으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기엔 아쉬워 태량은 인사를 건네는 척, 주제를 바꾸었다.

“에스트란 씨도 몸조심하시고요. 레드캣이 시장님을 공격한 걸 보니 강도질도 서슴지 않던데, 혹여 다치시기라도 하면 비서실이 마비되는 건 물론이고, 넬리우라 씨도 걱정하실 테니까요.”

“넬리가요?”

문을 열고 태량을 배웅할 준비를 하던 안비체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안경알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의문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태량이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가족이니까 당연하겠지요. 벨스토렌에 놀러 오실 정도면 친근하게 지내는 사이 같았거든요. 에스트란 씨도 반대로 넬리우라 씨가 걱정되기도 하겠네요. 레드캣 사건 이후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니까요.”

넬리우라 씨는 아직 벨스토렌에 계시나요? 시간을 확인하는 척, 태량이 고개를 돌려 가볍게 흘리듯 물었다. 잠깐의 틈을 두고 안비체오의 답변이 부드럽게 돌아왔다.

“네. 하지만 탐정님 말씀대로 워낙 분위기가 좋지 않아 돌아가는 것을 권유한 참입니다. 관광 기회는 다음에도 있을 테니까요.”

“유감이네요. 하필 이런 타이밍에 방문해서 안 좋은 기억만 남기고 돌아가는 건 아쉬울 텐데요. 그러고 보니 어느 도시에서….”

꾸준히 질문 공세는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란에 의해 끊겼다. 귓가에 닿은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태량의 시선이 대번에 창문으로 향했다. 회의실의 창문에선 시청 정문이 바로 내려다보여 소란의 원인을 짚어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인영이 있었다. 건물 그림자에 가려 그들의 표정이 명확히 보이진 않았으나, 한 사람의 손에 들린 물건에서 반사된 빛은 상황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태량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다행히 침착한 성정이 이성을 붙들어, 태량은 빠른 판단을 내리고 가방을 뒤져 샤르잔에게서 받아온 통신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이걸 경찰에 신고하는 용도로 쓰게 될 줄이야. 먼저 가보겠다고 말할 여유도 없었으나, 태량이 발을 떼기도 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비체오가 창문으로 다가와 같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태량은 순간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안비체오의 붉은 눈에 스친 것은 명백한 분노와 실망이었다.

* * *

눈썰미가 좋은 것 치곤 유즈리하는 사람 자체에 큰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우체국에서 일할 때 상사와 동료의 이름을 전부 외우기까지 한 달 넘게 걸렸겠는가. 핑계를 대자면 동료 이름은 몰라도 우편물의 주소만 알면 일하는 덴 전혀 지장이 없었다. 자주 다니는 골목은 하루 이틀 안에 외웠으니,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그저 관심사가 아닌 분야에 노력을 쏟지 않을 뿐이었다.

해당 사람이 아이라면 특히나 더 그랬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아 보통 아이들은 그를 피해 다니기 일쑤였고, 유즈리하 또한 그를 개선할 만큼 특별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와 엮일만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 유즈리하가 개인적으로 아는 아이는 손에 꼽았다.

그러나 손을 흔들며 저를 향해 뛰어오는 곱슬곱슬한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몰라볼 수 없었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제 소개를 다시 하지 않았어도 바로 알아보았을 터다.

“조수님! 그때 고티카의 그 조수님 맞죠? 저 이벨리에요. 기억나세요?”

몰라보면 그야말로 바보였다. 저 아이로 인해 시작된 유령 소동이 시발점이 되어 가짜 레드캣 사건에 얽히게 되었는데 일부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이벨리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태량의 지시대로 조용히 숨어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릴 예정이었던 유즈리하는 아이의 명랑한 인사 때문에 이목이 쏠릴까 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혹시 탐정님하고 같이 의뢰받으러 오셨나요?”

유즈리하에겐 불행히도 이벨리는 해맑게 곤란한 질문만 골라 질문 세례를 이어갔다. 마침 심심하던 차에 그를 발견한 건지 두 눈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대충 맞장구치고 빨리 보내자는 심정으로 유즈리하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냥 일이 있어서 왔어. 이제 곧 갈 거야. 그러는 너는 여기에 무슨 일이야? 주말이면 마도구 구경하러 박물관에 있을 줄 알았는데.”

“비서님에게서 제 투명화 마도구를 돌려받기로 했거든요.”

유령 소동에 큰 역할을 한 이벨리의 마도구를 기억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밤에 몰래 빠져나와 돌아다닌 벌로 압수당한 마도구를 떠올리며 유즈리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한 달간 압수라고 하지 않았어? 한 달 채우기엔 한참 남았을 텐데?”

“비서님이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라서 시간이 없을 테니 지금 받아 가라고 하셨어요. 아빠도 별말 없으셨고요. 제가 그동안 열심히 반성해서 용서해 주셨나 봐요.”

아마도 이벨리의 태도보단 작금의 상황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터다. 이벨리의 아버지, 반세르의 입장에선 제 소유의 박물관에서 1급 마도구가 도둑맞고, 형이 레드캣에게 공격받아 병원에 누워있기까지 하니 이벨리의 마도구에 할애할 정신이 없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을 이벨리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토 달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님이 잠깐 나와서 마도구를 전해준다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곧 나오실 것 같은데 조수님도 인사하고 가실래요?”

“아니.”

흔들던 고개의 방향이 단번에 바뀌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을 깜빡이는 이벨리를 보고 나서야 유즈리하는 제 대답이 너무 빠르고 단호하게 튀어나왔음을 깨달았다. 쓸데없는 의심을 사기 전에 유즈리하가 뒤늦게 핑계를 주워섬겼다.

“싫다기보단, 비서님도 바쁘고 나도 바쁘니 굳이 용건이 없는 데 만날 필요는….”

이벨리가 답이 없자 유즈리하는 잠시 초조해졌지만, 곧 아이가 아예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유즈리하를 지나친 한 지점을 바라보는 이벨리의 눈에 설렘과 기대가 차 있었다. 유즈리하의 감이 위험을 알리는 경종을 울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비서님은요?”

“…오늘 바빠서 다음에 직접 찾아가서 주겠다고 했어.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미안하대.”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것이 아닌, 낮은 여성의 목소리라는 데 안도감을 느껴 반사적으로 돌아본 유즈리하는 탁한 금안을 마주쳤다. 눈을 찌를 듯 길게 내려오는 갈색 앞머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간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곧이어 그것을 덮어버린 날카로운 적대감도. 사냥터에서 만난 맹수처럼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와중, 이벨리가 풀 죽은 표정으로 꾸벅 머리를 숙였다.

“네,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차, 조수님. 여기 이분은 비서님의 사촌 동생 되시는 넬리우라 씨에요. 혹시 만나본 적 있으세요?”

그럼. 그뿐만이랴, 아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지. 긴장한 듯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넬리우라의 왼손을 힐끗 보고 유즈리하가 입꼬리만 휘어 웃었다. 악수를 청하듯 내민 손은 가히 도전적이었다.

“만난 적 있죠, 우리?”

가면 같은 갈색 머리카락 아래 붉은 머리카락이 분노처럼 선명히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넬리우라가 말없이 유즈리하를 노려보았다.

이상하게 긴장된 분위기에 눈치를 보기 시작한 이벨리를 심부름 핑계 삼아 시청 건물 안으로 보낸 건 넬리우라였다. 아이가 싸움에 휘말릴까 봐 걱정했다기보단, 제가 레드캣인 게 들통날 걸 우려해서였을 터였다. 유즈리하 역시 이벨리 앞에서 말을 함부로 뱉다간 안위가 위험해지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시비 걸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벨리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넬리우라가 홱 돌아섰다. 유즈리하를 응시하는 눈동자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감옥에 처박혀 있지 않아서 아쉽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곧장 받아친 유즈리하가 시청 건물 출입구를 곁눈질했다. 태량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죽기 살기로 덤비면 넬리우라를 제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를 체포해서 경찰에 넘기기엔 유즈리하는 고작 임시 조수일 뿐이라 명분이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통신기 하나 빌려달라고 하는 건데. 속으로 혀를 차는 와중 넬리우라가 유즈리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채고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누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나 본데, 그렇게 되면 당신도 잡혀 들어갈걸?”

“위험하기론 그쪽이 훨씬 더 위험하지.”

시간 벌이이기도 했고 빈틈을 노리는 도발이기도 했지만, 나름 논리를 거친 말이었다. 두 손을 으쓱이며 유즈리하가 넬리우라를 향해 얄밉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난 이미 한 번 잡혔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니 똑같은 혐의로 끌고 갈 확률은 낮아. 참, 그날 날 경찰에 수상한 사람으로 제보한 거 그쪽이지? 오히려 여기서 내가 시장 저택을 배회하던 당신을 봤다고 증언하면 판도가 뒤집히는 건 한순간이겠네.”

넬리우라의 뺨이 당혹감과 분노로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흐름을 타 유즈리하가 더 세게 몰아붙였다.

“심지어 에스트란 비서님의 사촌 동생이라며? 이거 시장님 못지않게 큰 스캔들이 되겠는데. 그 깐깐하신 비서님이 이런 큰일을 몰랐을 리는 없고. 공범으로 몰리기 전에 버림받는 거 아냐?”

“…그렇게 되기 전에 당신의 입을 다물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넬리우라의 손이 번개같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유즈리하를 겨눴다. 유즈리하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뒷걸음질 치다 굳었다. 이 상황 전에도 겪은 적 있는 것 같은데. 레드캣이 총을 지닌 걸 알고도 방심한 자신을 멍청하다 탓했지만, 설마하니 그가 대낮에 총을 꺼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나 열심히 눈을 굴려보았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타이밍이 안 좋았던 건지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아마 사람이 있었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터였다. 둘이 인적이 없는 구석에 있는 것도 한몫했고, 넬리우라의 각도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어서 총은 코트에 숨겨져 그저 유즈리하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을 터다. 감정으로 붉어진 뺨이 차츰 가라앉으며 넬리우라가 다시 차분해진 얼굴로 유즈리하를 응시했다.

“그런 흔해빠진 스캔들 말고, 비서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사촌이 경찰망을 빠져나갈 뻔했던 벨스토렌의 악명 높은 범죄자를 잡다… 이런 제목이 더 흥하지 않을까?”

자신 있는 말투였지만 조금의 망설임이 묻어있었다. 현재는 넬리우라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도 대놓고 총을 쏠 수는 없었다. 총기를 소유한 사실을 들키면 잡혀가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유즈리하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넬리우라가 발포를 망설이는 사이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다만 간단한 만큼 위험부담이 제일 컸다. 레드캣이 공포탄 따위가 든 총을 들고 다닐 리 없으니, 한 번이라도 실수로 맞았다간 큰일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다른 방법은 누군가 우연히 이 상황을 보고 신고해주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염없이 행운이 찾아오길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이건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 어쩌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레드캣 사칭범을 붙잡을 기회.

태량이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랬는데. 그래도 사정을 참작해서 덜 혼내지 않을까. 유즈리하가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가 발포한다면 당연히 맞고도 남을 짧은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총을 든 상대는 레갈리아를 훔치던 무모한 레드캣이 아닌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사촌 동생, 넬리우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즈리하의 입을 다물린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쏘기엔 그도 잃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총을 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말 그대로 가능성이었다. 애초에 총구가 제게 들이밀어져 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면 미친놈이었다. 종종 미친놈이라 불리긴 해도 유즈리하는 자신을 나름 이성을 겸비한 미친놈이라 자부했다. 그래서 유즈리하는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넬리우라의 뒤쪽을 바라보며 승부수부터 던졌다.

“태량, 벌써 나왔어?”

유즈리하는 그가 흠칫하며 돌아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곧장 몸을 낮춰서 넬리우라와 거리를 좁혔다. 미끼에 낚였다는 걸 알아챈 넬리우라가 총의 방향을 고쳤지만, 유즈리하가 그의 손목을 쳐서 총을 떨어뜨리는 게 빨랐다. 바닥에 총이 떨어진 걸 확인한 즉시 유즈리하가 총을 발로 차서 사정거리 밖으로 내보냈다. 어차피 유즈리하 또한 넬리우라에게 총을 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총은 없는 셈 치는 게 나았다.

무기를 잃은 넬리우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유즈리하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주먹을 피하는 것쯤은 한 손을 묶어놓고도 할 수 있었다. 양쪽 공평하게 무기가 없는 단순한 몸싸움에선 유즈리하가 유리했다. 다만 목적은 넬리우라를 곤죽으로 만드는 게 아닌 제압이 전부였기에, 유즈리하는 마주 주먹을 날리기보단 재빠르게 발을 걸기를 택했다. 그가 비틀거리는 틈에 유즈리하가 손쉽게 제 무게를 사용해 그를 바닥에 팽개쳤다. 넬리우라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못 움직이는 사이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끔 무릎을 내리눌렀다.

긴장했던 유즈리하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두 가지 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빙긋 웃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궁금했는데, 레드캣에 어울리는 머리카락을 가졌네.”

넬리우라가 넘어지며 가발이 벗겨지는 바람에 밝은 빨간색 머리카락이 여실히 드러났다. 가장 큰 위기는 넘겼겠다, 이제 다 잡은 범인을 놓치지 않고 태량에게 넘겨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혼나지 않고 잘 풀어 말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차라리 저번처럼 익명 신고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경찰을 마주하는 건 여전히 꺼려졌지만, 태량에게 혼나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경찰차 사이렌의 환청마저 들리는 걸까.

“유즈!”

익숙한 목소리에 유즈리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태량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시청 건물 안쪽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통신 마도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전원이 켜져 있단 뜻이었다. 유즈리하가 마도구를 한 번 보고 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번쩍이는 사이렌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아직 핑곗거리는 생각해 놓지도 못했는데. 태량의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을 대충 파악한 걸 넘어서 발 빠르게 신고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어차피 망한 상황, 유즈리하는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태량,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일단 이야기는 경찰서 가서 하자.”

한 치 부끄럼 없이 말하건대, 유즈리하가 24년생에 들어본 것 중 제일 무서운 말이었다.

* * *

경찰서에 너무 자주 방문하는 것 같다는 뻘생각을 하며 일어난 일을 전부 증언한 뒤에 집으로 돌아온 유즈리하는 한숨만 푹푹 쉬며 저를 빤히 바라보는 태량 앞에 섰다. 그리고 얌전히 두 손을 들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도 유즈리하의 우려만큼 오래 혼나지는 않았다. 거기서 가짜 레드캣, 넬리우라와 마주칠 줄은 유즈리하 역시 꿈에도 몰랐으며, 결국 다치지 않고 레드캣 체포라는 성과를 이뤄내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경찰서에서 나왔을 무렵 하늘은 어둑해지다 못해 공기가 쌀쌀하다 느껴질 정도로 늦은 시각이어서 꼭 필요한 대화만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넬리우라의 체포 직후, 불법 총기 소지를 이유로 그가 머무르던 호텔 방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성왕의 왕관이 나와 경찰서가 발칵 뒤집힌 까닭이었다.

단번에 레드캣으로 지목된 넬리우라는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서의 임시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면회를 신청해서 정보를 캘 생각이었던 태량과 유즈리하에겐 좋은 소식이기도,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그나마 유즈리하가 직접적 피해자였다는 이유를 내세워 간신히 다음 날 오후에 짧은 대면 시간을 허락받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샤르잔 씨에게도 연락해야 하지 않나?”

유즈리하와 태량이 정보 공유를 약속한 샤르잔을 떠올린 건 새벽 2시였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연락하기에 실례되는 시각이라 둘은 연락을 아침으로 미뤘다. 아침 8시에 강제로 기상해 비몽사몽인 유즈리하를 뒤로하고 샤르잔에게 연락한 태량은 한숨을 삼켜야 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새벽 3시여도 연락해 줬어야지!

연락받는 입장에서나 요구가 쉽지, 연락하는 입장에선 당연히 저어될 수밖에 없다고 항의하기엔 태량도 상당히 피로했다. 샤르잔이 당장 조사하던 방향을 대폭 수정해야겠다고 냅다 전화를 끊어버려 태량은 없는 인내심까지 끌어모아 다시 전화해서 넬리우라의 면회 시각을 알려야 했다.

-오후 2시? 그전까지 대략적인 조사만이라도 끝내려면 엄청 촉박한데? 진짜 안타깝다, 새벽 3시부터 시작했으면 데드라인 맞출 수 있었을 텐데.

“…됐고, 페라노 경감님에게 너도 올 수 있다고 얘기는 해둘 테니까 오려면 적당한 시간에 와.”

결국 시간이 부족할 거란 샤르잔의 예측대로 2시가 다가오는 시각, 경찰서에 방문한 건 태량과 유즈리하뿐이었다. 기자 한 명 없는 모습으로 봐선 아직 레드캣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밖으로 퍼지지 않은 듯했다.

“최소한 일이 벌어진 시청 쪽에선 알지 않을까?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사촌이기도 하니까.”

유즈리하의 추측에 태량은 백번 동의했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사촌 동생의 체포 소식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의 반응 역시 궁금했던 태량은 둘을 맞이한 페라노 경감에게 넌지시 물어보았고 그는 간략하게나마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에스트란 비서님이라면 오늘 아침 조사를 위해 방문해 주셨단다. 자세한 사항은 말해줄 수 없지만 가족이 연루되어 있는데도 굉장히 협조적으로 나오셨지.”

“사촌 동생이 레드캣 유력 용의자임을 시인하셨다는 건가요?”

“동생이 그런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지만, 공정한 수사를 위해 본인이 끼어들지 않겠다고 면회를 거절하셨단다.”

시간이 많지 않다며 시계를 확인하고 먼저 임시 감옥으로 걸어가는 페라노 경감의 뒤에서 태량과 유즈리하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태량이 작게 손짓했다. 여기서 더 캐봤자 넬리우라와 얘기해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의심받지 않도록 조용히 가자. 명확하게 전달되는 메시지에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 *

“30분 드리겠습니다. 여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터라 무얼 기대하고 오셨든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면회실로 들어가기 전 경찰관이 말을 건넸다. 호출이 들어온 탓에 페라노 경관이 그에게 태량과 유즈리하를 맡기고 떠난 터였다. 태량과 안면 있는 이는 아니었는지 깍듯이 건네오는 존대에 둘은 마찬가지로 감사하다는 예의를 표하고 면회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가발이 사라진 넬리우라는 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손에 수갑을 찬 채로 테이블 한쪽에 앉아있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들어 탁한 금색 눈동자로 노려보고 다시 고개를 푹 떨궜다. 경찰의 말대로 둘이 반대편 의자에 앉을 때까지 넬리우라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긴장 서린 침묵 속에서 태량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나머지 레갈리아의 행방은 왜 털어놓지 않는 건가요?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전부 반환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현명할 텐데도요.”

재판 날짜도 잡히기 전이었지만, 정황상 모두가 레드캣이 넬리우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왕관이 발견되고 나서 방은 물론이고 호텔 전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다른 레갈리아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이 넬리우라를 닦달하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여기서 태량은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혼자 저지른 짓이 아니죠? 당신은 지금 누군가를 보호하려 입을 다물고 있는 거고요.”

이미 심적인 증거는 충분했기에 유추하기 어렵지 않았다. 넬리우라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려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태량과 넬리우라를 번갈아보던 유즈리하가 툭 내뱉었다.

“남의 마도구를 함께 도둑질하면서 쌓인 의리가 이렇게 두터운 줄은 몰랐는데.”

“남의 마도구? 남의 마도구를 도둑질한 건 너와 그 빌어먹을 시장 놈이겠지.”

날카로운 대답과 넬리우라의 고개가 홱 들리자, 유즈리하가 느긋한 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두려움보다 분노를 자극하는 게 효과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유즈리하는 남의 성질을 돋우는 데 정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을 유즈리하는 넬리우라 앞에서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렇다고 그게 네 거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깐죽대는 유즈리하를 태량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봤다. 넬리우라가 너무 흥분해서 수갑을 찼든 말든 유즈리하에게 달려든다면 둘은 격리되어 퇴장당할 게 분명했다. 정보를 캐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자극하라고 눈치를 주려던 차에 넬리우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우리에겐 자격이 있어!”

걸렸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에 턱을 괴어 넬리우라를 응시하던 유즈리하가 씩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태량이 반대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차분하게 되물었다.

“‘우리’요?”

넬리우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수했다는 표정이 역력해 태량이 굳이 재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넬리우라 또한 부정하는 것이 소용없다 느꼈는지 시선을 아래로 깔며 한 문장만 씹어먹듯 뱉었다.

“변호사를 선임 받기 전까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당신의 자유지만, 그 어떤 변호사를 고용해도 자백하고 나머지 레갈리아를 반환하는 게 당신에게 유리하다는 조언을 할 거예요. 이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고 하면 모든 혐의는 당신에게 씌워질 테니까요.”

“당신 사촌 오빠 되는 비서님도 딱히 당신을 구제해 줄 생각은 없던 것 같고. 제일 앞서서 그 쪽에게 불리한 증언을 제공할 기세던데. 하긴, 그렇지 않으면 비서님도 바로 공범으로 의심받을 테니 이성적인 결단인 건 맞긴 하지.”

“날 낚으려는 뻔한 거짓말….”

“안타깝게도 사실이에요.”

신경전 사이로 끼어든 목소리가 태량의 것이 아니었기에 유즈리하가 넬리우라에게서 눈을 떼고 돌아보았다. 삭막한 면회실에서 눈에 튀는 밝은 오렌지빛 머리카락은 급하게 뛰어온 듯 바람에 약간 휘날린 상태였다. 면회실 문이 다시 닫히자, 샤르잔이 당찬 짧은 인사를 건넸다.

“시간 맞춰 온다고 열심히 애들 시켜서 조사했는데, 그래도 늦었나 보네.”

“어디부터 들었어?”

유즈리하가 슬쩍 일어서서 샤르잔에게 의자를 양보하는 사이 태량이 물었다. ‘고마워요, 조수님’ 한마디와 유즈리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은 샤르잔이 의자에 사뿐히 앉아 메고 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자료를 꺼내 들었다.

“우리 운운하는 부분부터? 사실 나도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샤르잔의 고양이 같은 녹색 눈동자가 넬리우라를 향했다. 적대감이 서린 시선을 받아내는 샤르잔의 얼굴에 복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격이 있다는 게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해. 동정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당신의 사정은 좀 안타깝게 생각해요, 넬리우라 상티아 씨.”

당신이죠? 상타스 마을 이장의 외동딸이자, 레갈리아 관리인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이가. 샤르잔의 낭랑한 목소리가 뒤따른 적막에 잠겨 사라졌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어진 면회 시간이 짧다는 걸 태량도 유즈리하도 샤르잔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샤르잔은 가타부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설득에 들어갔다.

“제 정보망이 대단한 건 맞지만, 제가 더 빨리 찾았다 뿐이지 결국 경찰이든 검사든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계속 묵비권을 행사해도 당신에게 유리할 것 하나 없다는 뜻이고요.”

“말했다시피 에스트란 비서님이 적극적으로 경찰에 협조하고 있으면 더욱 그럴 테고.”

유즈리하가 중얼거리듯 덧붙인 말에 흔들리던 넬리우라의 눈동자에 다시 힘이 실렸다. 괜히 잘 되어 가던 설득에 짱돌을 던졌나 싶어 머쓱해진 유즈리하에게 넬리우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내가 입을 열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해요? 누가 믿어주기는 한대요? 뭐라 하건, 나는 이미 레갈리아를 도둑질한 레드캣으로 확정 지어졌잖아요?”

귀까지 빨개진 모습이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 강렬히 다가온 건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억울함이었다. 폭포처럼 울분을 토해낸 뒤 변명처럼 나온 진심은 힘이 없었다.

“나라고 이렇게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동정심을 가지기엔 아직 넬리우라는 그 무엇도 털어놓지 않았기에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넬리우라 역시 진심이든 빈말이든 위로를 반기진 않았을 터다. 그래서 태량은 대신 최선이라 생각되는 현실적인 조언을 내놓았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사실대로 얘기해주시면 우리 측에서 힘써드릴 수 있어요. 레갈리아 전시 때부터 관련 의뢰를 받아왔고, 시장님의 레드캣 체포 의뢰에도 참여했었으니까,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자격은 충분해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경찰서에 연이 있기도 하고요.”

자기 편이라곤 남지 않은 채로 벼랑 끝에 내몰린 넬리우라에겐 충분히 솔깃할 제안이었다. 어쩌면 태량과 샤르잔만 있었다면 곧바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점칠 만큼 넬리우라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그러나 넬리우라의 시선이 유즈리하에게 돌아왔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의심은 선명했다. 유즈리하도 모른 체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가 훼방이라도 놓을까 봐? 난 그냥 일개 조수거든? 태량 탐정님이 하고자 한다면 별말 없이 따를 거라고.”

눈빛만으로 공격받는 느낌에 말투가 뾰족하게 나가긴 했지만, 유즈리하의 기분은 나쁘기보단 묘했다. 유즈리하와 넬리우라가 앞세운 동기가 약간 다를지언정, 한때 둘을 둘러쌌던 상황이 불편할 만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유즈리하는 운이 좋았고, 넬리우라는 운이 나빠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뿐이지, 지금 넬리우라의 자리에 있는 건 유즈리하였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넬리우라를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유즈리하가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쓸데없이 힘을 들여 원한을 품고 가고 싶진 않았다.

속마음이야 그랬지만, 그걸 낱낱이 까발려 넬리우라를 설득할 의향도 시간도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부러 불퉁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당신 뒤에 진짜 계획을 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거든? 나한테 엿먹인 사람을 족치고 싶으면 그 사람을 잡아야지, 당신만 잡아서 뭐 하게.”

“협조해 주신다면 넬리우라 씨의 형량이 감면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라 약속해요. 하지만 빠른 결정을 내려주셔야 해요. 저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다소 거칠게 나온 유즈리하의 말을 태량이 중화했지만, 어투엔 조급함이 깔려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면회실에 들어온 후 아무리 못해도 10분은 흘렀을 터다. 남은 시간 안에 모든 이야기를 듣고 가는 건 불가능했지만, 넬리우라가 협조한다면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내는 건 가능했다.

태량이 보이지 않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시 눈을 내리깐 넬리우라를 바라보는 눈에 긴장이 서렸다.

“…성왕의 레갈리아를 훔친 건 내가 맞아요.”

역시 묵비권을 고집할 생각인가 싶어 답을 기다리던 셋의 어깨에서 약간 힘이 빠졌다. 그러나 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넬리우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타스 마을의 귀물인 레갈리아를 되찾고자 한 건 나 혼자가 아니에요.”

넬리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탁한 금빛 눈동자에 어떤 결단이 빛나고 있었다.

“저쪽 탐정이 이미 조사해 온 내용이겠지만, 나는 레갈리아를 관리하는 상티아 가문의 후계자였어요. 그 책임을 물려받기 전에 레갈리아가 매매되어 기예르 파트롱에게 넘겨졌지만요.”

시간이 없다는 태량의 말을 상기하고 있는지, 넬리우라의 이야기는 셋이 예상했던 이상으로 빠르고 간결했다. 어쩌면 그의 응어리진 원망과 소망이 둑이 터지듯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태량도 샤르잔도 메모장을 꺼내는 대신 집중하며 경청했다.

“당시 상타스 마을은 매우 어려웠어요. 몇 해간 농사가 잘되지 않아 마을의 식량 창고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달리 수익을 낼 만한 특산품을 재배하는 것도 아니었죠. 다른 마을과 교류를 할 만큼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성왕의 레갈리아를 보러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받는 관람료와 숙박비로 간신히 연명하는 상태였어요.”

익숙한 이야기여서 태량은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려 옆에 선 유즈리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타까운 사연에도 유즈리하는 무덤덤했다. 예전에 유즈리하 본인은 고향 마을에 그리 애착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떠올라 태량은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도리어 더 안쓰러워해야 할지 몰랐다. 태량이 고민하는 잠깐의 틈새로 유즈리하의 목소리가 새치기해 들어왔다.

“그런데 그나마 연명 수단이었던 레갈리아를 팔 생각을 했다고?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아마 레갈리아를 판 돈으로 마을을 재건하거나, 아예 다른 곳으로 마을 주민을 이주시켜서 새로운 시작을 해볼 생각이었겠죠.”

유즈리하의 의문에 답한 건 넬리우라가 아닌 샤르잔이었다. 자신이 유추한 답이 옳다는 걸 확신하듯 샤르잔의 자신감 어린 미소엔 흔들림이 없었다. 고티카 박물관에서 보았던 매매계약서의 금액 단위를 떠올리듯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기예르 시장님과 상타스 마을 사이에 작성된 매매계약서를 봐도 그렇게 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었으니까.”

넬리우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를 회상하듯 얼굴빛이 어둡고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버지에게도 쉬운 결단은 아니었죠. 마을 주민 회의만 수십 번 열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그렇게 끝내 과반수의 동의를 얻은 거예요.”

“그 동의에 당신의 표도 포함되어 있었나요?”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샤르잔의 질문에 넬리우라가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내키진 않았죠. 난 평생을 아버지처럼 상타스 마을의 이장이, 레갈리아의 관리인이 되기 위해 교육받았고, 한순간에 내가 배워온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어요. 무턱대고 고집 피울만한 힘도 없었으니까요.”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려다가 수갑 때문에 움직임을 제지당한 넬리우라가 입술을 짓씹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디 한군데에 머무르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도는 시선을 태량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당신이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건, 달리 설득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겠네요.”

넬리우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눈매는 반대로 날카로워져 어쩐지 무표정일 때보다 험악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태량을 쏘아보던 눈길이 천장을 향했다. 천장에 대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혼잣말 같았다.

“그는 늘 나보다 레갈리아를 물려받은 핏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품었죠. 상티아의 직계가 아니라서 관리인 자격에서 내게 밀려난 게 한이었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성왕의 레갈리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던 사람이었어요.”

누구에 관해 얘기하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정확한 이름을 물으려 넬리우라의 말을 끊지 않았다. 넬리우라는 잠시 기다렸다가 고요하게 말을 이었다.

“레갈리아를 뺏기고 마을이 몰락해서 뿔뿔이 흩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 그가 갑자기 저를 찾아왔어요. 아버지가 한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그때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성왕의 레갈리아를 되찾아 마을을 재건하는 게 상티아 핏줄을 이은 우리의 의무라고.”

넬리우라의 시선이 유즈리하와 태량, 샤르잔을 순서대로 훑었다. 그것이 당신의 동기였냐고 묻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태량과 눈을 마주한 넬리우라의 입가에 서린 가짜 웃음이 진해졌다.

“사실 내게 의무감 따윈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하지만 고향 잃은 떠돌이 주민은 어디에 정착하려 해도 살기가 팍팍했어요. 기예르 파트롱이 약속한 대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넘어갔던 거겠죠. 레갈리아만 되찾으면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 따위를 믿으면서.”

넬리우라가 공허하게 웃었다. 마치 제가 처한 상황을 보라는 듯 두 손을 눈높이로 들어 흔들자, 수갑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면회실을 울렸다.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가 워낙 계획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 자신만만해했어요. 몇 년의 작업 끝에 얻은 지위고, 쌓아온 신뢰라고. 레갈리아에 손댈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으니, 나는 그것만 가지고 나오면 된다고.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어요.”

한순간, 얼굴에서 표정이 싹 지워졌다. 금빛 눈동자에 원망과 분노, 서러움이 복잡하게 섞여 비쳤다.

“내 사촌 오빠는 언제나 말은 유려하고 설득력 있게 했죠. 레갈리아에 대한 자부심만큼 가족을 향한 애정은 없었다는 걸 좀 더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더라고요, 안비체오 에스트란이라는 사람은. 마지막 말을 씹듯이 내뱉고 넬리우라가 모든 걸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 * *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고 경찰에 협조하겠다는 동의를 얻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의 의논 끝에 조수에게서 받을 연락이 있다며 나가봐야 한다는 샤르잔이 페라노 경감까지 불러서 돌아오기로 합의를 봤다. 어차피 페라노 경감과 도로 면회실에 들어와야 할 테니 그냥 거기서 기다리라는 경찰의 지시에 태량은 침묵에 불편한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 바깥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유즈리하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속삭이듯 질문을 던졌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누구인지는 어떻게 알고 있었어?”

바닥만 내려다보던 넬리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태량도 긴장하고 닫힌 면회실 문에 시선을 주었다가 유즈리하에게 조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장소나 대화 내용이나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유즈리하도 알았지만, 이것만큼은 물어보고 싶었기에 질문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넬리우라도 유즈리하와 비슷한 성량으로 답을 내놓았다.

“아이네 유즈리하. 당신 이름은 안비체오를 통해 들었어.”

“내가 2년 전 사라진 레드캣이었다는 사실도?”

“그래.”

레드캣이라는 단어에 와서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모기 같은 소리였으나 넬리우라는 문제없이 알아듣고 긍정했다. 유즈리하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인상이 험악해진 건 덤이라 다음 질문이 의도치 않게 위협적으로 나왔다.

“그는 또 어떻게 알았대?”

“그것까지는 나는 몰라.”

넬리우라에겐 유즈리하가 기분이 나쁘던 인상이 나쁘건 별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이후로 입을 다물어서 유즈리하는 억지로 표정을 풀고 얘기해달라고 손짓했다. 넬리우라가 뜸을 들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거기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모든 추측은 안비체오에게서 나왔으니까. 하지만 레드캣이 애용하던 고양이 가면 마도구가 당신 고향 마을의 귀물이었다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건 나도 동의했어.”

그리고 당신을 직접 만났을 때 보인 반응을 보고 확신했지. 넬리우라의 말에 유즈리하는 고티카 박물관에서 가짜 레드캣을 처음 조우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당신이 진짜 레드캣이구나. 이 위선자. 워낙 인상적인 만남이었던 터라 대화까지 선명하게 떠올라 유즈리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를 위선자라고 부른 이유가 뭐야?”

“그건 그때 이미 답하지 않았던가?”

넬리우라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깃들었다. 무의식적으로 팔짱을 끼려다 다시 실패한 넬리우라가 신경질적으로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두 주먹이 꾹 쥐어져 있었다.

“당신은 정의로운 괴도를 자처하며 마도구를 훔치다가, 결국 그 사기꾼 기예르 파트롱에게 보물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명성만 홀라당 얻어갔으니까.”

유즈리하가 실소하자 넬리우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넬리우라를 자극해서 얻을 이득이 별로 없다는 건 유즈리하도 자각하고 있었지만,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나온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정의로운 괴도를 자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넬리우라의 눈썹이 치솟아 짧은 머리카락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믿든가 말든가 유즈리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소 허탈하게 들릴 진실을 뱉었다.

“내가 마도구를 훔친 이유는 그냥 기예르 파트롱을 엿먹이고 싶어서였고, 계속한 건 거기서 오는 스릴을 즐겨서였어. 그만둔 것도 들통나서 잡혀가기 싫어서였고. 인성 파탄자라 부른다면 할 말은 없지만, 위선자라 불리기엔 기분이 조금 미묘한데.”

다른 건 몰라도 정의의 괴도 따위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타인이 제게 멋대로 씌우는 기대와 의무는 사절이었다. 내가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으로 보였냐며 투덜대는 유즈리하를 넬리우라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금빛 눈동자엔 아직 의심이 가득했다.

“그러면 왜 그에게 마도구를 되돌려줬어?”

“내가 갖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돌려줄 수 있는 건 허탈한 진실밖에 없었다. 유즈리하가 눈썹을 추켜세우고 넬리우라를 빤히 마주 보았다.

“아니면 왜 마도구의 진짜 주인들을 찾아서 되돌려주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거야? 미안한데, 나한테 무슨 의무가 있어서? 안타깝게도 난 여기 탐정님처럼 생판 모르는 타인의 일에 신경 쓸 만큼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애초에 기예르 파트롱에게 당한 피해자를 일일이 찾을 능력이나 연줄이 있었겠냐는 대꾸에 넬리우라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유즈리하의 태도가 얄밉고 재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넬리우라는 결국 욕설로 끝맺었다.

“치사하고 이기적인 사람.”

유즈리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려 고개를 끄덕이며 열정적으로 동의해서 넬리우라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 만들었다.

“그것까진 인정하는 바고. 그래서 날 또 신고하기라도 하려고?”

하. 넬리우라가 한숨 같기도 하고 탄성 같기도 한 소리를 뱉었다. 진심으로 묻는 말이냐는 허탈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인제 와서 그게 중요하겠어? 그런다고 내가 풀려날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한 번 혐의가 풀렸으니 같은 죄목으로 다시 체포될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한 건 그쪽이었잖아.”

“그렇지.”

유즈리하의 뻔뻔한 대답에 넬리우라가 얼굴을 왈칵 찡그렸다.

“난 당신이 정말 짜증 나.”

“피차 마찬가지야.”

여유롭게 응수한 유즈리하가 면회실 문에 잠깐 시선을 줬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곧 샤르잔이 페라노 경감을 대동하고 돌아올 터였다. 멀리서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태량이 이만 대화를 마무리하라며 유즈리하에게 눈짓하고 넬리우라를 바라보았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진지했다.

“저희를 싫어하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당신도 남을 팔아먹고 이득만 챙겨서 빠져나가려는 안비체오 에스트란을 막는 게 우선이라는 데 동의할 거라 믿어요. 염치없지만 협조를 부탁드려요.”

태량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철컥 열렸다. 샤르잔이 이야기를 아주 긍정적으로 전달했는지 페라노 경감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회색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페라노 경감이 넬리우라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앉아서 물었다.

“그래서, 드디어 혐의를 인정하고 입을 열 마음이 들었다고?”

늘 처음에 마음먹기가 어렵지, 두 번째는 훨씬 쉽기 마련이었다. 다시 시작한 넬리우라의 이야기는 더욱 정돈된 상태로 빠르게 끝났다. 태량이나 유즈리하, 샤르잔마저 중간에 따로 첨언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넬리우라의 고해가 끝난 후에 페라노 경감의 심각해진 얼굴을 보아하니 일이 어려워지는 건 여기부터일 거라고 태량은 예측할 수 있었다.

“상티아 씨가 제기한 안비체오 에스트란에 관한 혐의는 신중히 다뤄야 하네. 비록 그가 시장 비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몇 년간 도시를 위해 일하며 쌓아온 굳건한 믿음과 신뢰가 그를 받치고 있어 쉽게 믿어줄 사람이 없는 까닭이지. 이야기를 들은 나도 솔직히 반신반의한 심정이고.”

아니나 다를까, 페라노 경감의 반응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많은 경험으로 인한 건지, 태량이 허투루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으리란 믿음이 있는 건지 곧바로 말도 안 되는 혐의라며 부정하진 않았다. 태량과 샤르잔 역시 실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혐의를 뒤받칠 증거는 충분히 제공할 생각이에요.”

“나머지 성왕의 레갈리아는 안비체오의 사택에 있어요.”

샤르잔의 말이 끝나자마자 넬리우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치 집의 구조도를 보여주듯 그가 테이블 위로 커다란 네모를 그리고 한쪽 모서리를 짚었다.

“거실 창가 쪽의 마루를 들어내면 작은 공간이 있어요. 왕홀도 검도 보주도 다 거기에 숨겨져 있죠.”

오랜 기간 근무한 경찰답게 최대한 무표정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게 보였으나, 이리 적나라한 증언이 들이밀어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페라노 경감의 눈에서 경악이 드러났다. 그가 목소리를 한차례 가다듬고 물었다.

“확실한 위치인가?”

“그의 지시에 따라 내가 직접 가져다 두었어요. 안비체오는 레갈리아의 주인 인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 시일 내에 세 개나 되는 레갈리아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어려웠을 거예요. 왕관을 같은 곳에 보관하기 전에 덜미를 잡힌 게 당신들에겐 행운이었겠네요.”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 시간을 오래 끌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요. 넬리우라가 중얼거리자, 당장이라도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레갈리아를 들고 잠적할 가능성을 상상한 유즈리하가 조급하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영장 받아서 수색해 보면 문제 해결 아닌가요?”

“상티아 씨가 직접 증언한 만큼 수색 영장을 받을 여지는 있지만, 절차도 있고 안비체오 에스트란의 지위도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터다.”

“만약 다른 혐의도 추가된다면요?”

무언가를 고민하듯 물끄러미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태량이 머리를 들고 페라노 경감을 올려다보았다. 기억하시죠, 제 사무실에 침입한 혐의로 구금된 불법 심부름센터 직원들? 페라노 경감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량이 말을 이었다.

“그중 한 명이 시장비서실의 관련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에게서 어떤 자료를 받아 다른 곳으로 전달했다고 증언했었어요. 정황상 의뢰한 사람이 안비체오 에스트란 씨였을 확률이 높고, 비서실 야간 근무 스케줄과 증인이 기억하는 날짜와 대조하면 그가 관여했단 증거가 나올 거예요. 공인의 불법 심부름센터 의뢰 혐의가 가볍진 않잖아요. 저희 외의 증인이 필요하다면 오리아나 할페른 씨도 그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물리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면 대조해도 되고, 증인이 필요한 거라면 그것도 내가 답해줄 수 있는데.”

모든 시선이 도로 넬리우라에게 쏠렸다. 집중된 눈길에 압도당한 티 없이 넬리우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그 직원이 만났던 사람이 나였을 테니까요. 8월 29일 새벽 맞죠? 레드캣이 다시 나타나 레갈리아를 되찾겠노라 밝히는 입장문을 작성해서 심부름센터를 통해 방송국에 보냈었죠. 안비체오의 필체가 드러나면 안 되니 내가 쓰긴 했지만, 내용은 전부 그가 부르는 대로 쓴 거예요.”

이래도 부족하냐는 넬리우라의 눈빛에 페라노 경감이 노트에 자백한 내용을 받아적다가 작게 날숨을 뱉었다.

“이걸 토대로 영장 신청을 진행할 순 있지만, 절차상 그래도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하진 못할….”

“복잡하네, 정말.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그냥 도난 현장에서 잡으시죠? 차라리 그게 빠르고 확실하겠네. 어차피 그는 찾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넬리우라의 파격적인 발언에 면회실 안에 잠시 깊은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설명을 요구한 건 샤르잔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아는 안비체오 에스트란은 절대로 완전한 성왕의 레갈리아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넬리우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가 면회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었다.

“애초에 포기할 성정의 사람이었으면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왕관 없이는 소유주 인식 절차를 밟지도 못할 거고, 그 자격 없이 세 레갈리아를 숨기고 도망가기엔 힘들 테죠. 무슨 수를 쓰든 왕관을 가지러 올 거예요.”

넬리우라의 확신에 페라노 경감과 태량이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목표가 명확할수록 세워야 할 계획이 쉬워지긴 한다며 중얼거리는 태량 옆에서 페라노 경감이 턱을 쓸었다.

“하지만 성왕의 왕관은 이미 이곳에서 철통같은 보안 아래 지켜지고 있지. 그가 정말 위험을 감수하고 찾아올까?”

“찾으러 오게끔 만들면 되죠.”

갑자기 튀어나온 유즈리하의 발랄한 목소리에 이번엔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유즈리하가 눈을 접어 씩 웃었다.

* * *

벨스토렌의 자랑거리를 단 한 가지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벨스토렌 시민 10명 중 8명은 벨그란데 박물관을 꼽을 터였다. 도시 한가운데 인공 해저로 둘러싸인 마도구 박물관은 밤낮 가리지 않고 금빛으로 빛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일쑤였다. 벨그란데는 벨스토렌 시민들에겐 심장이나 다름없는 랜드마크였고, 도시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겐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관광 코스였다.

그런 만큼 벨그란데 부근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북적였고, 늦은 밤에도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건물을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배회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정이 넘어가는 심야에 다다라서야 벨그란데는 고요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진귀한 1급, 2급 마도구도 취급하는 박물관인 만큼 벨그란데는 벨스토렌에서 제일 높은 수준의 보안을 자랑했고 하루 24시간 내내 경비가 정문을 지켰다. 쥐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드나들지 못한다는 요새로 명성이 자자하여 레드캣이 처음 벨그란데에서 마도구를 성공적으로 훔쳐냈을 때 그만큼 파장이 일었었다. 레드캣이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된 이유에 이 또한 영향을 미쳤을 터다.

최근 돌아온 레드캣으로 인해 경비가 더 삼엄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성왕의 레갈리아를 대부분 도난당했지만, 귀한 마도구가 레갈리아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령 오늘 밤 새로 들어온 마도구도 레갈리아에 버금가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마도구라고 전해 들은 경비원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페라노 경감이 직접 특별전시관의 보안을 확인하고 마도구를 배치하지 않았던가. 문제라도 생겼다간 당직 경비원이 책임지고 잘리는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마도구가 든 유리 상자 위에는 들려왔을 때처럼 하얀 천이 덮여있었다. 모든 문이 닫혀 있어 빛 한 점 없이 사방이 깜깜했다. 그리고 그만큼 조용했다. 잔뜩 소리를 죽인 누군가의 가벼운 발소리마저 들릴 만큼.

발소리의 시작점은 경비가 밖에서 지키고 선 정식 출입구가 아니었다. 그 반대편의 닫힌 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조용히 바닥을 밟는 소음이 침묵을 깨뜨렸다. 느릿한 걸음 소리는 자신감을 얻은 듯 조금씩 커졌지만, 어둠 속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만이 차츰 유리 상자가 놓인 전시관 중앙으로 다가왔다.

발걸음이 멈춘 동시. 딸각거리는 소리와 작은 불빛이 촛불처럼 공간을 밝혔다.

“거기까지만 오세요, 안비체오 에스트란 씨.”

유령처럼 희끄무레한 남자의 윤곽선이 손전등의 빛에 의해 드러났다. 손전등을 손에 든 태량이 중앙 전시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 눈썹을 살짝 모으고 안비체오를 응시하던 태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벨리의 투명화 마도구네요. 본인이 도둑질할 때 필요한 물건이라 이벨리에게 돌려주지 않은 건가요?”

태량이 혼자인 걸 확인하고 굳이 모습을 숨길 필요를 못 느꼈는지 안비체오가 주머니에서 마도구를 꺼내 작동을 중지시켰다. 태량을 바라보는 색을 되찾은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니요, 본래 이렇게 쓸 예정은 없었는데 일이 틀어졌습니다. 그나저나 저를 보고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탐정님이 똑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확신이 아닌 증거가 필요했으니까요.”

“확실히 증거 없이 공권력을 움직일 순 없었겠죠. 당신이 직접 나선 것도 조금 놀랍긴 합니다만. 언제부터 저를 의심하고 계셨나요?”

태량이 손전등을 고쳐 잡고 한쪽 손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었다. 어깨에 긴장이 바짝 들어간 모습이 선명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의심스러운 단서는 많았지만, 확신하게 된 건 넬리우라 씨가 체포된 순간이었어요. 에스트란 씨가 넬리우라 씨와 무관했다면 놀랐어야 함이 마땅한데, 도리어 화난 표정을 짓고 계셨죠. 계획하던 일이 한순간에 틀어진 사람처럼요.”

그런데 당신도 레드캣의 도적질에 한 패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으시네요. 태량의 지적에 안비체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어투에서 여유마저 흘러넘쳤다.

“탐정님이 오늘 저를 여기서 만났다는 증거를 경찰에 제출하기 전에 전 이미 떠나고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확신하시는 걸 보니 넬리가 적어도 당신에겐 모든 걸 털어놓은 모양입니다. 사촌 동생이 입이 가벼운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좀 서운하긴 하군요.”

“누군들 그런 상황에서 입을 다물고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겠나요? 심지어 시장님을 직접적으로 다치게 한 건 넬리우라 씨가 아닌 당신이잖아요. 되려 배신감을 느껴야 마땅한 건 넬리우라 씨겠죠.”

날카로워진 목소리를 눈치챘는지 안비체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려 태량을 곁눈질했다. 그와 얘기하는 와중에도 안비체오의 시선 끝은 유리 상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거리를 좁혀 상자를 낚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기에 태량 역시 안비체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계속 한쪽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고 태량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넬리우라 씨와 에스트란 씨가 레갈리아를 되찾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알고 있어요. 사실 정당하다고도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에스트란 씨가 선택한 과정이 옳은 게 되지는 않아요. 시장님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대신 법의 처분에 맡기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안비체오가 피식 웃었다. 태량에게도 들릴 만큼 선명한 비웃음엔 안타까움마저 담겨있었다.

“이상주의적인 접근 방식이군요. 하지만 살다 보면 누구든 이상 앞에 서는 우선순위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건 탐정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 조수의 과거를 알면서도 여태 눈감아주고 있지 않습니까?”

유즈리하에 관한 주제가 나오리라곤 예상했지만, 이리 직접적으로 물어올 줄은 몰랐기에 태량이 잠시 말을 골랐다. 찰나의 침묵 끝에 나온 것은 맞질문이었다.

“언제부터 그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그가 성왕의 왕홀에 손을 대고도 멀쩡한 걸 확인한 순간부터 모를 수가 없었죠.”

안비체오가 팔짱을 끼고 태량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그때 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탐정님도 이상한 점을 느꼈는데 저라고 몰랐을 리가. 인내심을 갖고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어투는 친절을 가장한 오만이었다. 상대가 누구인들 열받아서 말을 끊을 법했지만, 태량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시다시피 레갈리아를 다룰 자격을 가진 이는 손에 꼽지요. 상티아 핏줄의 직계인 넬리, 레갈리아와 함께 소유권을 도둑질한 기예르 파트롱. 그리고 중간에 소유권을 잠시나마 강탈해 갔던 레드캣. 수년을 기예르 파트롱 옆에 붙어 감시했는데, 신뢰받던 저에게도 내주지 않은 틈을 평범한 일반인이 파고들었을 리 만무하죠. 그렇다면 결론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과거 조사까진 사실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확신만 더했을 뿐이죠.”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느냐는 듯 안비체오가 눈짓했다. 태량이 입술을 조용히 깨물자 그의 고개가 다시 유리 상자로 향했다. 태량이 조금 조급하게 질문을 꺼냈다.

“왜 하필 레드캣을 당신의 가짜 아이덴티티로 내세운 건가요? 안비체오 씨의 말대로 레드캣도 레갈리아를 도적질한 도둑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습니다.”

시선은 태량에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안비체오가 아직 움직일 낌새는 없었다. 그저 한 손을 들어 유리 상자를 가리킬 뿐이었다.

“레드캣이 처음 나타났을 땐 오히려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때의 전 준비가 되지 않아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레드캣은 과감하게 원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고 결과를 만들어냈으니까요. 다만 그의 마지막 결정에 실망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쌓아온 신념을 한순간의 변덕처럼 버리고 사기꾼에게 보물을 반환하다니, 차라리 레드캣이 레갈리아를 가지고 영원히 잠적했으면 덜 실망했을 겁니다.”

“그의 과거 행실을 옹호하진 않지만, 제가 볼 때는 안비체오 씨 역시 본인이 지은 죄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것으로만 보여요.”

“그렇게 보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안비체오가 한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가 손을 주머니에 넣어 마도구를 하나 꺼냈다. 이벨리의 투명화 마도구는 아니었다. 태량의 눈이 커지는 찰나 안비체오는 마도구가 든 손을 내밀었다.

“그가 레드캣임을 알게 된 순간 계획을 앞당기느라 많은 수고가 들었죠. 하지만 위험을 감수한 가치는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당신을 비롯한 모든 벨스토렌 시민에게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레드캣이 마땅히 밟아야 했던 전철, 그가 완벽하게 끝내야 했던 일을.”

안비체오의 손에서 하얀빛이 작게 점멸하다가 번쩍하고 전시관을 삽시간에 눈 부신 빛으로 물들였다. 태량이 급하게 눈을 감고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윤곽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돌아오는 덴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걸렸다. 눈물이 고인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전시대를 확인한 순간 태량은 몸을 틀어 전시관을 뛰쳐나갔다.

전시대에 남은 것은 하얀 천뿐, 성왕의 왕관이 담긴 유리 상자가 없었다. 안비체오 에스트란 역시도.

아무리 보안이 철저한 박물관이라 한들 비상 출구는 하나쯤 있기 마련이었다. 혹여 모를 화재나 기타 재난 상황이 발생하면 등급 높은 마도구는 가능한 최대한 옮겨둬야 하는 까닭이었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벨그란데에 들어올 때 사용한 통로도 옛날에 만들어진 화재용 비상 통로였다. 비록 지금은 화재 대비를 따로 해두어 쓰지 않는 출입구였지만, 문만 잠겨있을 뿐 아예 폐쇄되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다시 쓰게 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흘러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었다.

그 소수에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섞여 있었다는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벨그란데의 관계자가 아니어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통로를 가르쳐준 이는 없었다지만, 시장 비서로 있으면서 원하는 정보를 몰래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걸 토대로 왕관 절도 계획을 짜는 것 또한.

하지만 그런 안비체오 에스트란에게도 불운은 있었다. 그 불운은 한 손에 손전등을 들고 재수 없는 미소를 짓는 청년의 형태로 안비체오의 눈앞에 나타났다.

“책상 앞에서 머리 굴리는 책사라고만 생각했는데, 과감한 일에 뛰어들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 괴도 하기에도 손색이 없을 듯한데.”

관리가 안 되어 먼지가 쌓인 어두컴컴한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안비체오의 발걸음이 멈췄다. 후드를 푹 눌러썼다지만 유즈리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어쩐지 탐정님 곁에 조수님이 없다 싶더라니. 넬리가 체포된 날 근처를 기웃거리고 계시던데 화해한 게 아니었습니까?”

“그것까진 당신이 신경 쓸 바 아닌 것 같은데.”

“아직 좀 껄끄러운 부분이 남아있나 봅니다. 그러니 이 통로를 탐정님에게 알려주는 대신 본인이 직접 온 거겠죠.”

의문형이 아닌 확신이었다. 유즈리하는 대꾸하는 대신 팔짱을 끼었다. 안비체오는 이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진하게 웃었다.

“절 잡으러 오신 것도 탐정님께 잘 보여서 만회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겠군요. 그런데 아깝지 않습니까?”

뭐가? 유즈리하가 입을 다문 채로 매서운 눈길만 쏘아 보냈다. 안비체오도 딱히 답이 필요하지 않았는지 편하게 말을 이었다.

“레드캣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의의 상징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걸 버리고 한다는 게 고작 탐정 뒤치다꺼리나 하는 조수라니 아쉽지 않습니까?”

한숨 같은 날숨을 한번 내뱉은 유즈리하는 사양하지 않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한 웃음이 두 사람이 있는 통로를 가득 채우자 안비체오가 뒤를 돌아보고 눈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즈리하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삐딱하게 안비체오를 쳐다보았다.

“넬리우라도 그러더니, 그쪽도 왜 자꾸 나한테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지? 난 한 번도 정의의 괴도나 영웅 따위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죠.”

“그거야말로 내 알 바 아니고.”

웃음을 싹 지운 유즈리하가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남은 손으로 안비체오가 든 유리 상자를 가리켰다. 그의 갈색 눈이 위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 쓸데없는 환상을 깨고 그거나 돌려줬으면 하는데.”

당신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싸움에서 나만큼 하겠냐며 유즈리하가 도발을 던졌다. 안비체오는 난감해진 기색으로 고민하듯 유리 상자를 한쪽 옆구리에 꼈다. 당신 말이 맞지만, 오해가 있는 부분을 먼저 하나 지적하고 싶군요. 안비체오가 천천히 한 단어씩 뱉었다.

“그 ‘환상’은 당신이 2년 전 마도구를 반환하고 사라졌을 때 이미 깨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손으로 뜻을 이루기로 마음먹었고요.”

상자를 들지 않은 한 손이 정장 재킷 안쪽을 잠시 더듬다가 새카만 권총을 꺼내 유즈리하를 겨눴다. 안비체오에게 다가오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유즈리하가 팍 인상을 썼다. 사촌과 겉은 전혀 안 닮았는데 하는 짓거리는 왜 이리 똑같냐며 중얼거리는 유즈리하에게 안비체오가 두 손을 올리라고 턱짓했다.

“굳이 실탄임을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앞장서서 나가시죠. 허튼 생각하지 말고요.”

몇 초간 움직임 없이 유즈리하가 그저 그를 노려보고 있자 안비체오가 먼저 한 발짝 다가왔다. 거울처럼 한 발짝 물러선 유즈리하가 입술을 가늘게 물고 요구대로 등을 돌려 천천히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짧은 통로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유즈리하도 안비체오도 아무 말 없었다.

안비체오가 박물관에 침입하며 들어온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 유즈리하가 손잡이에 손을 대자 녹슨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바깥으로 열렸다. 차가워진 새벽 공기가 유즈리하의 뺨에 달라붙어 온기를 식혔다. 눈을 굴려 둘러보지 않아도 벨그란데의 구석진 뒷마당으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즈리하 본인도 몇 번 사용해 본 통로인데 모를 리 없었다.

유즈리하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안비체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비체오도 팔 한 개 반의 거리를 유지한 채 다가오지 않았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라 어둑한 통로에서 그늘지게 보였던 안비체오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사뭇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안비체오가 유즈리하에게 인사를 건네듯 고개를 까닥 숙였다.

“다시 볼 일은 없겠군요.”

“나도 그러기를 바라는데, 그렇다고 영원히 보지 않게 해주겠다 이따위 말을 하면서 총을 쏜다면 곤란해지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설마 그것도 생각하지 않았겠냐며 안비체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미소 짓지 않는 붉은 눈이 안경알 뒤에서 유즈리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물론 당신을 죽인다면 일이 더 귀찮아지긴 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그대로 놓아주어도 리스크가 큰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적당히 타협해야죠. 가령 저를 쫓아오지 못하게 다리 하나 정도 내어주시든가요.”

“그건 싫은데.”

유즈리하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달빛이 둘 위로 환하게 쏟아져 내렸다.

“이래 봬도 정식 조수로 취직하고 싶어서 다리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거든.”

—탕!

총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찢었다. 무너진 건 미소 짓고 있는 유즈리하가 아닌 안비체오였다. 총을 놓친 안비체오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태량도 총을 들고 서 있었다. 태량의 총 끝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걸 확인하고 유즈리하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밤에 익숙해진 눈이 굴러다니는 고무탄 하나를 잡아냈다. 실탄이 아닌 고무탄으로 안비체오가 든 총을 맞췄대도 충격이 상당했을 터였다. 실제로 꼼짝도 못 하는 안비체오를 손쉽게 제압하며 유즈리하가 혀를 내둘렀다.

‘어두운 곳에서 목표를 진짜 잘도 맞췄네.’

멀리서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유즈리하가 머리를 돌려 해저를 건너오는 다리를 바라보다가 태량과 눈을 마주쳤다. 태량이 한 손을 들어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계획 성공이네.

유즈리하도 빙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앞서 다가오는 페라노 경감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태량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동의를 얻고자 그를 열심히 설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찾으러 오게끔 만들면 되죠.”

“함정을 파자는 소리야?”

그의 발언에 태량이 질문하자 유즈리하가 활짝 웃고 손뼉을 쳤다. 역시 우리 탐정님이야,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유즈리하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면회실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넬리우라를 향해 눈짓했다.

“우리가 여기 넬리우라 씨 외에 다른 공범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왕관을 당장 오늘 밤에 새로운 장소로 비밀리에 옮길 거라고 정보를 흘리는 거지. 안비체오 에스트란도 넬리우라 씨가 언제 자백할지 모르니 빠르게 왕관을 훔쳐 달아나고 싶을 텐데, 그러면 계획이 틀어질 걸 우려해서라도 준비가 됐든 말든 급하게 찾아오지 않겠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는 페라노 경감 대신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리던 샤르잔에게서 도움의 손길이 날아왔다. 샤르잔이 허리에 손을 얹고 유즈리하를 바라보았다.

“대신 계획을 그대로 이행한다면 장소 선정을 신중히 해야겠네요. 그에게 방심할 여지를 주면서도, 저희가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만한 곳이 필요해요.”

“가장 안전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장소는 이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페라노 경감의 저어하는 태도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레갈리아를 전부 도난당한 경험이 있고 왕관이나마 간신히 되찾은 상황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유즈리하가 제시한 계획도 없는 셈 치긴 아쉬웠는지 페라노 경감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가짜 왕관을 구해서 계획을 세우는 건 어떤가? 물건을 임시로 복제하는 마도구는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통한다면 좋긴 할 텐데요. 그렇지만 안비체오 에스트란도 오랜 기간 레갈리아를 가까이서 봐왔는데, 가짜인 걸 알아챌 위험도 있지 않을까요?”

유즈리하의 지적에 페라노 경감이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에 도움은 넬리우라에게서 왔다. 다른 1급 마도구가 아닌 이상 레갈리아를 완전히 똑같이 복제하는 건 불가능하고, 레갈리아에 유난히 집착하던 안비체오라면 멀리서라도 알아챌 거라는 넬리우라의 말에 페라노 경감이 신음을 흘렸다. 그가 고뇌하는 모습을 보며 태량도 손을 보탰다.

“안전을 최우선시해서 왕관을 여기에 보관한다고 해도 위험을 감수하는 건 같아요. 에스트란 씨는 왕관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건 맞지만, 전 유즈리하의 의견에 동의해요.”

페라노 경감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 한번 자신을 설득해 보라는 기색이 눈빛에 가득했다.

“생각해 둔 장소라도 있나?”

“박물관에 놔요.”

넬리우라가 툭 내뱉자, 세 명의 고개가 돌아갔다. 박물관? 페라노 경감이 되묻자, 넬리우라가 머리를 끄덕였다.

“여태 박물관 침입 계획은 안비체오가 짜왔으니까,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죠. 자신이 알고 있는 통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방심하고 있을 거고. 하지만 우리 쪽엔 그런 방면에선 안비체오를 압도하는 인재가 있잖아요?”

저를 뻔뻔하게 응시하던 넬리우라의 얼굴이 떠올라 안비체오를 잡은 유즈리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폭탄 같은 발언 이후 어찌어찌 태량까지 동원해 페라노 경감과 샤르잔의 의문을 수습했던 몇 분을 떠올리니 식은땀이 흘렀다.

“내 고발이 진짜라면 그 자리에서 당신들이 원하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테고, 거짓이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절차대로 재판하시죠.”

유즈리하에게 한방을 먹이고 조금 후련한 표정을 지은 넬리우라가 쐐기를 박자 페라노 경감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안비체오를 방심시키기 위해 경찰 인력 투입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태량과 유즈리하의 활약을 중심으로 짠 계획은 큰 우려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페라노 경감이 가까이 다가오자 안비체오가 머리를 들었다. 무언가 항의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페라노 경감이 그에게 수갑을 채우는 게 빨랐다.

“안비체오 에스트란, 당신은 침묵을 지킬 권리가 있고, 지금부터 하는 모든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알리며….”

페라노 경감의 고지를 들으며 안비체오의 형형한 눈빛이 유즈리하와 태량에게로 옮겨왔다. 이미 몸을 돌린 태량은 그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했지만, 유즈리하는 잠시간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태량의 목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유즈리하가 되돌아섰다.

“가자, 유즈.”

“그래.”

유즈리하는 두 번 돌아보지 않았다.

* * *

월요일 아침의 벨스토렌은 어딜 가나 북적북적했지만, 탐정 거리는 출근하는 직장인과 일찌감치 사무소를 찾는 의뢰인으로 인해 특히 숨 가쁘게 바빴다. 환기하려고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조금씩 쌀쌀해지는 바람과 발랄한 목소리가 타고 들어오자, 태량이 창문을 슬쩍 내다보았다.

“신문 팔아요~ 시장비서실과 레드캣이 얽히고설킨 사건의 전말이 1부터 100까지 나온, 디테일 클래스가 남다른 벨스토렌 타임즈! 단돈 3달러! 몇 부 남지 않았으니 빨리들 오세요~”

클래스가 남다른 신문팔이 알바생의 광고 실력에 태량이 피식 웃고 창문을 닫았다. 책상 위에 놓인, 저 밖의 알바생이 팔고 있는 똑같은 신문을 펼치기도 전에 1면에서 찾고 있던 기사가 태량을 반겼다.

< 괴도 레드캣의 정체! 등잔 밑이 어두웠던 벨스토렌 시장비서실의 비밀 >

전 시장 기예르 파트롱의 스캔들에 이어 밝혀진 레드캣의 정체는 벨스토렌을 다시 한번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았다.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성왕의 레갈리아를 훔친 레드캣이라고 밝힌 기사가 처음 떴을 때 시민들은 반신반의했다. 그 신임받던 비서가? 괜한 사람이 덤터기 쓴 거 아닐까? 그러나 페라노 경감의 증언과 먼저 체포된 넬리우라의 자백이 실린 후속 기사가 나오자, 사람들의 말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 시장에 그 비서였던 거지. 어쩐지 예전부터 좀 싸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 사람, 벨스토렌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며? 흥미로운 가십거리를 얻은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다가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레드캣은 2년 전 사라졌던 레드캣하고 다른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다며? 그게 사실이라면 그 레드캣은 누구였을까?”

온갖 추측이 난무하다가도 대화의 온점은 도로 기예르 파트롱과 안비체오 에스트란이 받게 될 재판으로 돌아갔다. 안비체오가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예르 파트롱은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았고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물론 회복 후에 사기죄와 계약 위반죄로 법정에 서게 될 예정이었으니 빠른 회복이 그에겐 축복이 아닌 불운일 수도 있었다.

기예르 파트롱이나 안비체오 에스트란이나 본인의 유죄를 인정하진 않았지만, 경찰은 넬리우라의 자백과 안비체오가 체포되었을 때 태량이 확보한 녹음본이라는 유리한 증거를 들고 있어 재판은 문제없을 터였다.

“대화를 잘 유도해서 자백을 얻어내 준 덕분에 일이 많이 순조로워졌구나. 역시 우리 쪽에서는 아까운 인재를 놓쳤다 싶은데, 다시 경찰서에서 근무해 볼 생각은 없는 거니?”

페라노 경감의 제의에 태량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안비체오를 벨그란데 박물관의 전시관에서 조우한 밤, 태량은 주머니에 숨겨온 녹음기 마도구로 안비체오가 본인을 레드캣이라 인정하는 자백을 녹음해서 경찰에 넘겼다. 사실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유즈리하에 관한 위험한 대화가 나오기 전에 녹음기를 눈치껏 끄는 것이었다고 회상하며 태량이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당분간은 계속 탐정 일을 하고 싶어서요.”

“그래, 아쉽지만 그게 네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페라노 경감도 더는 밀어붙이지 않고 수긍했다. 수고가 많았다며 감사 인사를 받고서 태량이 약간 뜸을 들이다 물었다.

“성왕의 레갈리아에 관한 소유권은 어떻게 될 예정인가요?”

안비체오의 체포 직후 이루어진 그의 자택 수사에서 나머지 레갈리아가 발견되었고, 무사히 회수한 왕관과 함께 경찰서에서 24시간 감시하에 보관 중이었다. 정확한 장소는 극히 소수만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잠깐 주위를 둘러본 페라노 경감이 목소리를 한 단계 낮췄다. 태량도 머리를 가까이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최종 판결은 법원에서 내리겠지만, 넬리우라 상티아 씨가 레갈리아를 돌려받을 수 있도록 힘을 쓸 예정이란다. 형량을 받는 동안은 아마 벨스토렌 시에서 보관하게 되겠지만, 기예르 파트롱과 상티아 마을의 계약이 무효로 판결된다면, 석방 즉시 마땅히 소유권을 돌려받아야지.”

안심한 표정을 지은 태량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비체오는 절도죄는 물론이고 기예르 파트롱에게 가한 상해죄와 불법 총기 소지죄까지 더해져 형량이 무겁게 나오겠지만, 넬리우라는 안비체오의 체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형량을 감소할 거란 말까지 덧붙이고 페라노 경감이 헛기침했다.

“재판에는 너도 증인으로 출석해야 하니 일정이 나오면 알려주마. 그러고 보니 네 조수도 같이 나올 예정이겠지?”

당연히 그러리라 확신하고 확인차 물어본 질문에 태량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문을 도로 내려놓고 조금 심란해진 기분으로 태량이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홀로 있는 사무실과 대조되는 떠들썩한 바깥 풍경엔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붉은 가닥 하나 있는 새카만 머리도, 장난기 섞인 갈색 눈동자도, 선명하게 눈에 띄는 붉은 재킷도 없었다. 창문에서 시선을 뗀 태량이 커튼을 반쯤 치고 돌아섰다. 그때 페라노 경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이유이자 지금 마음이 무거운 이유의 원인을 태량은 모르지 않았다.

‘유즈는 곧 떠날 사람이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벨스토렌을 떠날 계획이었던 유즈리하였다. 여권 사고부터 시작해서 가짜 레드캣의 레갈리아 도난 사건에 휘말리며 예정된 작별이 유예되어 온 것뿐이었다. 근 며칠 제집에 머무르는 유즈리하가 자주 밖을 들락거리며 짐 정리를 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태량은 둔하지 않았다.

솔직히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거짓이었다. 그러나 태량 본인부터 그를 설득할 명분이 없었다. 말이나마 꺼내 볼까, 고민하기도 몇 번째. 입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노크 소리 없이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에 태량이 머리를 돌렸다. 한 손에 일회용 커피 컵 두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든 유즈리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머쓱하게 웃었다.

“맞다, 노크. 미안. 좀 늦어서 서두르다 보니 깜빡했네. 아무튼, 이거 하나 받아.”

요 밑에 있는 카페에서 타임세일을 하길래 라떼 두 잔을 사 왔다며 태량의 손에 따듯한 종이컵 하나를 쥐여주고는 유즈리하도 본인의 커피를 꺼내고 캐리어를 접어두었다.

“참, 오늘 길에 샤르잔 씨를 만났다? 커피 식을까 봐 너한테 전해달라는 전언만 빠르게 듣고 오긴 했는데.”

“샤르잔을? 무슨 얘기였는데?”

레드캣 수사는 이제 종료되었는데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나 싶어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태량에게 유즈리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흥미로운 의뢰를 받았는데, 혹시 공동 의뢰로 진행해서 누가 먼저 문제를 해결하나 대결할 생각이 없냐고 하던데.”

“그럴 일 없으니까, 다음부터 그런 건 너도 그냥 무시하고 와.”

용건을 듣자마자 딱 잘라 거절하는 태량의 눈에 익숙한 귀찮음이 스쳤다. 예상했던 반응에 유즈리하가 키득거리고 부드러운 라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태량도 책상에 기대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벽시계에 눈길을 줬다.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오늘 아침 일찍 나가더니,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할 게 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그런가, 좀 오래 걸리긴 했지? 유즈리하도 시계를 잠깐 보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차역. 계속 거기 있던 건 아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긴 했지만.”

첫 단어를 듣는 순간 태량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기차역에 왜 갔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정말 떠날 준비가 되었구나. 오히려 관계의 끝이 실감 나기 시작하니 여태 삼켜온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어차피 마지막 기회라면 부딪혀 보는 게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 같았다. 태량은 문제를 외면하기보단 눈앞에서 마주하기를 선택했다.

“유즈, 예전에 벨스토렌 도시 자체는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 생각 아직도 유효해?”

“갑자기? 싫어진 건 아니긴 한데.”

유즈리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큰 고민 없이 바로 대답을 내어주었다. 긍정적인 대답에 태량이 보이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꾹꾹 눌러뒀던 바람을 꺼내기엔 그 어떤 의뢰를 받을 때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벨스토렌에 남겠다는 의향이 있다면, 내 조수로 일해주지 않을래? 임시 말고, 정식 조수로.”

마지막엔 또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져 시선을 틀어버리는 바람에 태량은 유즈리하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설렘과 기쁨으로 반짝이는 두 개의 갈색 눈동자도.

“난 좋아!”

“그래, 떠날 계획까지 다 세운 마당에 부담되는 질문이었다는 건 충분히 이해… 좋다고?”

태량이 눈을 크게 뜨고 유즈리하를 돌아보았다. 상기된 얼굴에 의문을 가득 담아 유즈리하가 그를 멀뚱히 마주 보았다.

“무슨 계획? 벨스토렌을 떠날 계획? 아니 물론 처음 만났을 때 이사 준비 중이긴 했지만, 그 계획이 틀어진 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너 나가려고 짐 정리하고 있었잖아?”

“당연히 나가야지?”

유즈리하가 당황한 어투로 반문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오래 눌러앉긴 했는데, 나도 양심을 아예 뱉은 건 아니거든? 태량의 집에서 세월아 네월아 신세 질 생각은 없었다며 유즈리하가 빠르게 해명했다.

“요새 새 월셋집 찾아다니느라 좀 바빴어. 괜찮아 보이는 곳 몇 군데 찾아놨으니, 잘하면 다음 주쯤엔 입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 오늘은 왜 기차역에 다녀온 건데? 기차표 알아보러 간 거 아니었어?”

그건 오해할만했다며 유즈리하가 깔깔 웃었다. 콜 기억해? 나하고 안면 있는 신문 파는 알바생인데. 사무소 침입 사건 당시 유즈리하 대신 제보자로 경찰서에 출석해 안절부절못하던 청년을 잊기는 쉽지 않았다. 태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즈리하가 종이컵 테두리를 잘근거리다 입을 떼고 투덜거렸다.

“걔한테 내가 빚진 것도 있고, 갚아야 하는 것도 있고 해서 오늘 무상으로 대타 뛰어주고 왔어.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평소 돌리는 양보다 배는 쥐여준 것 같더라…. 머리 굴리다가 요즘 관광객이며 기자며 외부인이 늘었길래 기차역에서 속보 좀 보라며 다 털고 왔지.”

조금 전 신문팔이 알바생이 외치던 말이 유즈리하의 음성을 띠고 들려오는 것 같아서 태량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고서야 유즈리하가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채로 물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해? 정식 조수면 계약서부터 써야 하나?”

“나쁘지 않은 시작이긴 하지.”

서랍 안에 표준근로계약서를 보관하고 있긴 할 텐데. 태량이 책상을 반 바퀴 돌아서 서랍을 열어보려던 와중 갑자기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둘이 문을 돌아봄과 동시에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탐정님 안에 계실까요?”

태량과 유즈리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긋 미소 지은 유즈리하가 입 모양으로 태량에게 속삭였다. 계약서는 잠시 미뤄두고 늘 하던 대로 의뢰부터 받을까? 유즈리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태량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가 그를 올려다보자, 유즈리하가 최대한 친절하게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태량 탐정님의 조수 유즈리하라고 합니다. 어떤 의뢰를 하러 오셨나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따라 소녀가 주춤주춤 사무실로 들어서서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소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비장하게 물었다.

“실은요… 제가 키우던 고양이가 어젯밤에 집을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같이 찾아달라고 부탁하기엔 다들 바쁘고, 경찰에 도움을 청하기는 너무 사소한 일 같아서 이곳을 찾게 되었는데…. 혹시 탐정님께선 고양이를 잡아달라는 의뢰도 받아주시나요?”

의뢰인 뒤에서 문을 닫고 오던 유즈리하와 책상에 앉아 고개를 든 태량의 눈이 마주쳤다. 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유즈리하가 자신 있게 말했다.

“딱 맞게 찾아오셨네요. 여기 탐정님이 마침 고양이 잡는데 전문이시거든요.”

화려한 도시 벨스토렌에 기어이 눌러앉은 붉은 고양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Written 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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