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case. 우연이 쌓이면 필연이 된다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탐정괴도 AU)
유즈리하에게나 태량에게나 데이트는 생소한 단어였다. 유즈리하는 사람과의 교류보다 스릴 넘치는 상황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왔고, 태량은 성실하게 일에 몰두해서 보람을 찾는 편이었다. 그런 둘이 가슴이 뛰는 알콩달콩한 연애든, 마음이 따스해지는 차분한 연애든, 불화 가득한 위태위태한 연애든 해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태량과 유즈리하는 벨스토렌에서 가장 유명한 데이트 카페에 앉아 서로를 뻘쭘하게 바라보다가 직원이 다가오자 급하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직원이 테이블에 세련된 메뉴판을 내려놓고 떠나자, 태량이 약간 경직되었던 어깨를 풀고 유즈리하에게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꽃받침.”
허공에 손을 어색하게 두기도 뭐해서 냅다 턱을 받치고 태량을 응시하던 유즈리하가 씩 웃었다. 어때, 나 분위기 제법 잘 맞춰주지 않아? 같이 뻘쭘해하던 게 고작 몇 초 전인데, 그새 익숙해졌다고 저리 구는 유즈리하를 바라보던 태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집중하자, 유즈.”
기실 어서 메뉴를 고르라는 뜻만 내포하는 게 아님을 유즈리하도 알고 있었다. 바로 뒤 테이블에 앉아있어서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커플의 대화를 잡아내는 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한 남성의 소심한 목소리가 은은한 배경 음악을 타고 유즈리하의 귓가에 닿았다.
“웬일로 하루를 통째로 비워달라고 하더니, 여긴 오랜만에 오네. 무슨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어, 헤이젤?”
“이야기는~ 간만에 오래 같이 시간 보내고 싶어서 그랬지. 우리 요즘 바빴잖아. 넌 뭐 먹을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한 남자가 허둥지둥 헤이젤과 메뉴판을 번갈아보고 있을 게 뻔했다. 저 남자는 오늘 아침 태량의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도 저렇게 어벙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주문받으러 직원이 다시 다가오자 대충 메뉴판을 훑던 유즈리하가 태량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레모네이드를 가리키며 아침에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애셔라고 하고요…. 제게 헤이젤이라고 엄청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친구가 있어요. 만난 지 벌써 4년이 넘었는데 싸운 적도 별로 없고, 평생을 함께 살아도 좋겠다 싶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지금 의뢰하러 온 건지, 애인 자랑을 하러 온 건지. 연한 갈색 고수머리의 남자에게 번지수 잘 못 찾은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태량이 조용히 있으라고 유즈리하에게 눈치를 주는 게 먼저였다. 하여간 쓸데없이 성실하다고 마음속으로 투덜대며 유즈리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 무언가 문제가 생기셨나 봐요?”
“네… 그게요, 요즘 헤이젤이 좀 이상해요.”
태량 탐정사무소가 아니라 태량 연애 상담소로 개명해도 다를 거 없지 않을까. 남의 연애 사정이나 들어주게 생긴 유즈리하의 얼굴이 지루함으로 물들었다. 다행히 애셔는 자기 생각에 빠져 유즈리하의 불성실한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최근 비밀리에 외출하는 일도 잦아지고, 모르는 데서 오는 전화도 늘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말 돌리기 일쑤고. 연인이라도 당연히 모든 일을 공유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고뇌하는 애셔 앞에서 태량은 무표정을 고수하려 노력했지만, 곤란한 기색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량이 결국 직설적으로 조언했다.
“여기까지 도움을 청하러 오셨는데 죄송한 말이긴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사정은 애셔 씨가 직접 대화로 해결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생판 타인인 저희가 끼어들면 오히려 관계가 악화할 가능성이 있거든요.”
“저도 시도 안 해본 건 아닌데, 몇 번을 물어봐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더라고요. 그냥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만 하고.”
애셔가 시무룩해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한 달째 기다렸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다며, 이제는 위험한 일에 휘말렸을까 걱정이 든다는 토로에 태량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위험한 일이라니, 뭔가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있는 건가요?”
“전혀요. 헤이젤은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별일 아니겠거니 안심하려고 했는데, 며칠 전에 통장을 한참 노려보며 고민하는 모습을 봤어요. 돈 문제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제게 말도 없이 그러니까 좀 이상해서.”
그러면서 헤이젤은 벨스토렌에서 태어났지만, 헤이젤의 부모님은 타 도시 출신이라 부모님만 고향에 돌아가 계신다느니, 헤이젤과 부모님의 사이가 돈독해서 보기 좋다느니, 이렇게 알려줘도 괜찮은가 싶은 소소하고 사적인 정보가 와르르 쏟아졌다. 태량도 유즈리하도 끊을 타이밍을 찾지 못해 눈치만 보던 와중 급기야 애셔가 싹싹 빌기 시작했다.
“딱 하루만, 오늘 딱 하루만 멀리서 저희를 지켜보고 판단해 주세요. 하루 종일 헤이젤하고 데이트하기로 했거든요. 뭔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는 낌새만 안 보이는지 그것만 확인해주시면 돼요! 우선 점심 먹으러 11시 반까지 예술의 거리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지금 10시 반인데 준비 안 하셔도 괜찮으신가요?”
태량의 질문에 애셔가 동그래진 녹색 눈으로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초 후 그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저 먼저 가볼게요! 선불은 이 정도 두고 갈게요. 부족한 부분은 나중에 계산해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지폐 몇 장을 책상에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뛰어나가는 애셔를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애셔가 두고 간 돈을 보던 태량이 미간을 짚었다.
“의뢰받겠다는 얘기도 안 했는데….”
“그래서 어떡할 건데?”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태량 옆에 두며 유즈리하가 묻자, 태량이 일어나서 주섬주섬 외투를 챙겼다. 유즈리하에게서 선금을 받아 든 태량이 창밖을 가리켰다.
“의뢰받든지, 거절하고 선금을 돌려주든지 하나는 해야 하니까 일단 말해준 곳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지. 나갈 준비 하자.”
그때까지만 해도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하루 종일 커플 연기를 해야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 *
“주문하신 레모네이드 두 잔과 초콜릿 케이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애셔를 따라잡아 샌드위치 판매대에서 햄치즈 샌드위치를 살 때까지만 해도 유즈리하는 태량과 카페에 앉아 연인 행세를 하게 될 줄 몰랐다. 헤실헤실 웃으며 헤이젤과 팔짱 낀 애셔에게 말을 걸 틈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헤이젤의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밝은 연두색이었기에 둘의 뒤를 따라가는 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카페 이름을 확인한 태량과 유즈리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벨그란데 박물관을 비롯한 예술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2층의 카페 간판엔 앙증맞은 하트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카페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는 이들은 하나같이 손을 꼭 붙잡은 커플이었다. 뻘쭘하게 서서 눈알만 굴리는 유즈리하의 옆구리를 태량이 조심스레 찌르고 계단 앞에 놓인 광고판을 가리켰다. 눈을 살짝 찡그린 유즈리하가 동글동글한 글씨를 읽어내렸다.
“사랑하는 연인과 방문하면 30% 할인…. 어딜 봐도 데이트 카페네. 우리도 따라 들어갈 거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도 애매하겠지. 어느 쪽으로든 애셔 씨하고 해결 못 했으니까.”
“오케이, 자 그럼~”
유즈리하가 손을 내밀자, 태량이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유즈리하가 눈을 휘어 웃으며 간판을 턱짓했다.
“기왕 갈 거면 할인은 받아야지?”
그게 태량과 유즈리하가 데이트 카페에 앉아있게 된 사유였다. 커플 할인 받자며 자신감 있게 카페로 올라간 유즈리하도 정작 커플들의 깨 볶는 분위기가 가득한 카페 내부를 보고 조금 기가 질린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침 애셔와 헤이즐 근처 테이블이 비어있어 자리를 잡기는 쉬웠다. 보너스로 주문한 레모네이드는 시원하니 상큼했고 케이크도 적당히 꾸덕하고 달달하니 맛있었다.
“여기 레몬 케이크가 진짜 맛있다고 들었는데, 벌써 다 나갔다니 아쉽다. 다음엔 일찍 와서 꼭 먹어보자.”
레몬 케이크가 유명하구나, 테이크아웃이 된다면 다음엔 그거 사러 와봐야지. 헤이젤의 메뉴 추천 정보까지 알뜰하게 챙기며 유즈리하가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개인적인 대화를 엿듣는다는 찜찜한 기분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여기까지 온 겸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태량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별일 없다고 빠르게 결론짓고 손 털고 싶었는지 케이크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애셔와 헤이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자기야, 혹시 다음 달쯤 시간 괜찮아?”
“다음 달? 시간은 낼 수 있는데,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응~ 별건 아니고 여행이라도 갈까 해서. 우리 벨스토렌 밖으로 나가본 지 꽤 오래됐잖아?”
“…갑자기??”
얼굴은 보지 못해도 애셔가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사전에 얘기한 적 없는 주제였는지 애셔는 한참을 헤이젤을 붙잡고 캐물었다.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었느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느냐, 정확히 어디를 가고 싶은 거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을 틈타 유즈리하가 태량과 눈을 맞추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좀 이상한가?’
태량이 빨대를 입에 문 채 눈썹을 모았다. 작게 으쓱이는 어깨가 아직은 더 지켜봐야 파악할 수 있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태량과 유즈리하가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 뒤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셔의 질문을 손쉽게 떨쳐낸 헤이젤의 발랄한 목소리가 새 목적지를 알렸다.
“이러다 늦겠다, 내가 벨그란데 특별전시 표를 미리 구해놨거든? 전시 구경하고 저녁 먹으면서 찬찬히 이야기하자!”
얼빠지게 어어 소리나 웅얼거리던 애셔가 순식간에 끌려 나갔다. 유즈리하가 남은 레모네이드를 한입에 털어 넣고 맑은 종소리를 울리며 닫힌 카페 문을 눈짓했다.
“우리도 갈까?”
“천천히 결제하고 나가면 될 것 같아.”
카페 안에서 대놓고 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순 없었기에 유즈리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지갑을 꺼내는 태량 뒤에 섰다. 그리고 잔돈을 챙기는 태량에게 애교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잘 먹었어, 자기야!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태량이 뭐라 하기 전, 유즈리하가 직원을 향해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냅다 그의 손을 잡고 카페를 나왔다. 종이 다시 울리며 문이 닫히자, 유즈리하가 태량에게 속닥였다.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해야지.”
분명히 커플 연기 얘기렷다. 태량이 한숨을 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진심은 반만 담아 유즈리하를 타박하는 태량의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즈, 어쩐지 의뢰가 아니라 연기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은….”
“어라, 오랜만이네. 태량 탐정, 유즈리하 조수.”
성량 좋고 쾌활한 인사에 둘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오토바이에 앉아 느긋하게 둘에게 손을 흔드는 이는 벨스토렌 어디를 가도 착각할 수 없는 유명 인사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리아나 씨.”
“그러게, 한 달 전 그 사건 이후로 처음이지? 여러모로 도움받았는데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하네.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초대했어야 하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태량이 손을 내젓는 사이 오리아나의 시선이 태량에게서 유즈리하로, 그다음엔 카페 간판으로, 그리고 다시 태량에게로 돌아왔다. 알 것 같다는 히죽거리는 미소가 오리아나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저런, 내가 눈치가 없었군. 그럼, 그만 방해하고 이만 가보지. 닉이 동생 문제를 덕분에 탈 없이 해결했다고 한 끼 대접하겠다고 벼르고 있던데, 그쪽이 끼어드는 건 내가 알아서 막아줄 테니 좋은 시간 보내고.”
오리아나의 말뜻을 이해한 건 태량보다 유즈리하가 빨랐다. 유즈리하가 태량의 눈치를 슬쩍 보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요.”
“괜찮아, 괜찮아. 쑥스러우면 못 본 척 넘어가 줄게. 어쨌든 오늘 하루 잘 보내!”
더 해명하기도 전에 오리아나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깨달은 태량이 유즈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유즈리하가 소리 없는 책망에 익숙한 대답을 꺼냈다.
“미안?”
“…아냐, 됐어. 그보다 애셔 씨하고 거리가 많이 벌어졌겠다. 어서 가자.”
돌아서는 태량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기에 유즈리하도 히죽 웃고는 불평 없이 태량의 뒤를 따랐다.
* * *
그런데 왜 하필 벨그란데 박물관이란 말인가. 벨그란데가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단골 데이트 장소라는 사실을 깔끔하게 무시한 유즈리하가 지루함에 몸을 비틀었다. 희귀한 마도구고 기간 한정 특별전시고, 그 시간에 신문팔이 알바나 뛰어서 사탕값 벌이나 하는 게 백배는 나았을 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특별전시 관람 표는 진작에 매진되어서 태량과 유즈리하는 애셔와 헤이젤을 쫓아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 꼭 박물관 안에서 기다려야 할까? 딱히 볼 것도 없는데,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유즈리하가 투덜대자 멀리서 애셔를 곁눈질하던 태량이 고민하듯 입술을 물었다. 투정에 불과한 유즈리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벨그란데를 떠나려면 반드시 정문으로 나가야 하니, 의뢰인을 놓칠 걱정은 없었다. 차라리 애셔와 잠깐 따로 얘기할 수 있으면 의뢰를 마무리하든 말든 이 애매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가 헤이젤과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해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자기야, 저기 기념품 가게에서 가장 최신 마도구 자료집 좀 사 와줄 수 있어? 오는 길에 사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지나쳤네. 이따가 사려니 다 팔릴까 봐 무서운데.”
“어? 어, 그래. 같이 갈까?”
“난 잠깐 화장실 다녀오려고. 먼저 가 있을래? 아까 보니까 사람 많아서 계산줄 시간 꽤 걸릴 것 같더라.”
“알았어, 그럼 얼른 가서 사고 있을게, 천천히 와.”
태량과 유즈리하가 눈빛을 교환했다. 홀로 있는 애셔를 붙잡을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헤이젤의 부탁을 이행하려 기념품 가게로 후다닥 달려가는 애셔를 뒤따라가려던 순간, 밝은 목소리가 둘의 발걸음을 붙들어 맸다.
“안녕하세요, 전 헤이젤 루이즈라고 해요. 그런데 이미 알고 계실 것 같네요. 오늘 하루 종일 저희 따라다니셨잖아요.”
사람을 착각했다기엔 헤이젤은 명확하게 태량과 유즈리하를 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 눈이 굳어버린 둘을 번갈아보다가 생긋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애셔의 의뢰가 있었다고는 해도 커플의 뒤를 밟은 건 맞았기에 둘은 헤이젤이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머,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뻔하죠, 뭐. 사설탐정이죠? 애셔가 요즘 제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조언을 구하러 갔다가 따라오게 된 걸 테고.”
예리한 추측에 유즈리하는 혹시 그쪽도 탐정이냐고 물을 뻔했다. 고민 끝에 태량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헤이젤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셨을 텐데.”
“에이, 솔직히 이 정도는 예상 범위였어요. 애셔가 겁도 많고 걱정도 많아서 귀여운 면이 있거든요. 안 그래도 데이트 때 30분은 일찍 오던 사람이 약속 시간 딱 맞춰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걸 보고 뭔가 일을 벌이고 있구나 눈치챘죠.”
…‘귀엽다’? 너무나 확연한 진심이 담겨있어서 태량도 유즈리하도 눈을 깜빡일 뿐, 토 달지 못했다. 헤이젤이 애셔가 사라진 방향을 흘깃 보고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사과는 안 하셔도 되는데, 애셔가 준 의뢰를 수행하는 김에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 장담해요.”
거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반짝이는 눈을 마주 보던 태량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젤이 태량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닥거리자, 유즈리하도 가까이 다가서서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전부 마친 헤이젤이 방긋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잠깐 침묵하던 태량도 작게 미소 지었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일 같네요.”
* * *
애셔와 헤이젤의 저녁 식사는 무난하게 흘러갔으리라고 예상했다. 예상에서 그친 이유는 레스토랑 예약이 꽉 차 있어서 태량과 유즈리하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주말이었지, 사람이 많은 게 당연하네. 중얼거리는 유즈리하 옆에서 태량이 레스토랑 앞에 서 있는 애셔를 바라보았다. 애셔 역시 상황을 파악했는지 티 나게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태량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이 정도면 헤이젤 씨가 모른 척해주는 게 더 어려운 일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무슨 핑계를 둘러댔는지, 애셔가 헤이젤을 레스토랑 안에 먼저 들여보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떡하냐며 울상을 짓는 애셔를 태량이 적당히 달래서 들여보냈다. 그 후 커플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리며 둘도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웠다. 유즈리하가 다 먹은 컵밥 그릇을 손에 들고 태량을 곁눈질하며 피식 웃었다.
“커플 연기보단 이런 쪽의 연기에 재능있던데? 조금만 기다리면 헤이젤 씨가 직접 모든 걸 털어놓을 것 같으니, 오늘은 끝까지 얌전히 따라다니라는 설득이 통할 줄은.”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으니까.”
같이 산 따듯한 어묵 국물을 호로록 마시고 태량이 대꾸했다. 슬슬 해가 넘어가 쌀쌀해지는 늦은 10월의 날씨에 일회용 국물 그릇은 좋은 핫팩 대용이었다. 태량이 두 손으로 그릇을 쥐고 손가락을 녹이며 레스토랑 방향을 눈짓했다.
“처음 애셔 씨를 쫓아 나올 땐 어떡하면 좋으려나 싶긴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좋게 끝날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런데 우리가 끝까지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나? 지금 와서 이런 말도 웃기긴 한데, 이거 사생활 침해 아니야?”
“솔직히 나도 비슷한 심정이긴 한데, 우리가 갑자기 사라지면 애셔 씨가 불안해할 것 같… 마침 나왔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도 헤이젤의 밝은 연두색 머리카락은 선명하게 보였다. 헤이젤이 레스토랑 옆에 붙은 작은 정원을 손짓하자 애셔가 고개를 끄덕이고 헤이젤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도 슬쩍 뒤돌아보며 태량과 유즈리하가 있는 걸 확인하고 안심한 표정을 짓자, 유즈리하는 태량의 예리한 판단에 내적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도 되려나?”
“조금만 움직여서 가볼까? 헤이젤 씨의 계획이 끝난 것만 확인하면 바로 돌아가도 되니까. 탐정 일에 밤낮없다지만 오늘도 늦게까지 붙잡아둬서 미안하네.”
“일이 늘 그렇지 뭐.”
빈 일회용 그릇을 정리해서 분리수거 통에 집어넣은 유즈리하가 앞서가는 태량을 따라잡았다. 유즈리하가 후드티 주머니에서 사탕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입에 넣고 하나는 태량에게 건네자, 태량도 거절하지 않고 사탕을 받았다. 상큼한 레몬 사탕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던 유즈리하가 우물거렸다.
“어차피 일찍 가봐야 집에서 할 일도 없는데. 너와 같이 노는 게 훨씬 재밌어.”
“우리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건데 말이지.”
“겸사겸사 데이트도 하고?”
태량의 농담 식 답변에 유즈리하도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뭐????”
태량과 유즈리하가 눈빛을 교환했다. 곧 집에 갈 수 있겠네. 그러게, 오래 걸릴 것 같진 않네. 길을 건너 레스토랑 모퉁이를 돌자 헤이젤과 애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포토존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하트 모양 야광 의자에 애셔가 앉아서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그 앞에 선 헤이젤은 태량과 유즈리하에게 등을 돌리고 애셔에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입을 뻐끔거리는 애셔를 두고 헤이젤이 깔깔 웃었다.
“진짜 눈치를 못 챘다고? 자기도 엄청 둔하긴 하다…. 그 점이 귀여운 거지만.”
“이, 이런 걸 어떻게 예상해….”
“근데 나 대답 아직 못 들었는데, 그것부터 답해줘야지. 나와 결혼해 줄 거야?”
“…그건 당연하지….”
숫제 눈물을 글썽거리는 애셔를 확인하고 태량이 유즈리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끝났다, 이제 가자. 명확한 턱짓에 유즈리하가 활짝 웃으며 태량 옆에 쏙 붙었다. 남의 연애는 지겹도록 봤으니 슬슬 집에 가고 싶었다.
감동에 빠져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애셔는 둘이 근처에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헤이젤은 둘을 지나치면서 고맙다고 고개 인사를 했다. 애셔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헤이젤의 팔을 흔들었다.
“그럼, 여태 하던 외출은 반지 맞추기 위해서였고, 계속 걸려 오던 전화는 뭐였어?”
“결혼 준비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몇 개월은 걸리는데, 빨리 예약 잡아놔야지. 그렇게 정신 놓고 있다간 여름에나 하게 될 거라고.”
“우리 자기 야무지네…. 어, 다음 달에 시간 있냐고 물어본 건?”
“내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러 가야지! 딸의 애인으로 만나는 것과 예비 사위로 인사드리는 건 다르니까.”
커플이 멀어지자 들려오는 대화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태량이 향하는 정류장을 보고 유즈리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돌아본 태량에게 유즈리하가 옆길을 가리켰다.
“집으로 가는 거 아니야?”
“사무실에 가서 의뢰비 받은 내역만 정리하려고. 제때 해둬야 기록이 꼬이지 않으니까. 너 먼저 들어가도 돼.”
“아냐, 같이 가자.”
길을 가리키던 손을 거두고 냅다 따라붙는 유즈리하를 보며 태량이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정류장에 다다라 탐정 거리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며 태량이 물었다.
“이렇게 의뢰 완수를 열심히 하는데, 혹시 공부해서 탐정 시험 쳐볼 생각은 없어? 조수로만 남아있는 것도 아까울 것 같은데.”
“전혀. 난 탐정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너와 같이 일하는 게 좋은 거야.”
태량이 돌아보자, 유즈리하가 밝게 웃었다. 샛노란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서 유즈리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 멀리 다가오는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시야에 들어오자, 유즈리하가 태량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즐거웠어. 일이긴 했지만, 인생 첫 데이트가 생각보다 재밌었네.”
눈을 깜빡이던 태량이 이내 눈꼬리를 휘었다. 한 발짝 다가가 유즈리하의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친 태량이 마주 웃었다.
“재밌었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땐 제대로 놀러 가자.”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는 유즈리하 앞에 버스가 멈춰 섰다. 둘을 태운 버스가 느긋하게 출발해서 조용히 탐정 거리로 사라졌다. 저물어 가는 금요일 밤 속에 따스하게 오간 감정의 온기만 남았다.
Written 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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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겸손함과 오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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