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된 꿈의 단편선

초련은 그대의 이름으로

꿈 기반 단편선 (#230420)

D-365

“넌 사랑을 믿어?”

케리스가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훅 불면 꺼질 케이크 위 촛불처럼 시야가 위태롭게 흐려진다.

장시간 답이 없자 케리스가 재촉하듯 이름을 부른다. 윌로우. 그러자 세상이 잠시나마 생생해진다. 굳어가는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 믿지.”

어찌 부정하겠나. 그 증거가 코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손으로 가리고 눈을 감는다 해도, 피부로 스며드는 그 온기마저 어찌 부정하겠나.

*

*

D-3661

인간이란 놀랍고도 거추장스러운 생물이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길을 가고, 경탄할 만한 발전을 보이며, 그에 비례하는 퇴보의 진창에 빠지곤 한다. 독보적인 생명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인간은 또한 복잡한 생물이다. 백 년에 못 미치는 수명을 타고났으면서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무슨 욕심이, 꿈이 그렇게 원대한지.

그런 작은 불씨 같은 호기심이었을 거다. 잠시 유희를 즐길 현신체를 인간으로 삼기로 한 것은.

말랑거리는 육신, 살갗을 스치는 천의 감각이 낯설다. 두 눈으로 제한된 시야는 상상보다 갑갑하다. 3월의 날씨는 상쾌하면서도 피부에 아프게 다가온다. 아마 춥다는 감각일 터다. 손가락 끝이 불그스름해지는 게, 겨울이 덜 물러간 모양이다.

현신체로 기온엔 손댈 수 없다. 가능하더라도 섣불리 절기의 법칙을 흐트러트리는 게 내키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푸른 잎을 틔우기 시작한 단풍나무를 올려다본다. 저 나무도 겨울을 버티고 저리 굳건히 서 있는데, 변덕을 부리기로 했으면 그 끈기의 반이라도 보여봐야지.

더도 덜도 아닌 변덕이다. 굳이 현신체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인간이 제 손바닥을 살펴보듯 행성의 모든 구석구석을 살피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다른 눈을, 귀를, 손을 통해 보는 풍경이 다를까 궁금했던 것뿐이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 번쯤은 시야를 달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여겼을 뿐.

“안녕, 혹시 길을 잃었어?”

작다. 한없이 작은 아이다. 이 현신체도 같은 시선 높이를 공유하니 아이를 작다고 부르기 무색하지만, 뒤로 우뚝 솟은 단풍나무에 비하면 작은 건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소녀의 눈동자와 저 나무의 잎사귀는 비슷한 색의 진한 초록이다. 추위조차 잠시 잊게 하는 여름의 싱그러운 초록.

그 색이 한층 가깝게 다가온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니, 길은 알고 있어.”

입술을 떼고 혀를 움직인다는 감각도 낯설기 짝이 없다. 발음을 뭉개지 않는 데는 생각보다 섬세한 노력이 든다. 시도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의 소녀가 입꼬리를 양쪽으로 끌어올려 하얀 이가 보이게 활짝 웃는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길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길래, 혹시나 했지.”

행성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가장 깊은 심해 밑바닥에 던져져도 절대 길을 잃을 리 없지만, 소녀의 친절을 박대하고 싶진 않다. 그렇기에 소녀를 모방해 입꼬리에 힘을 주어 밀어 올린다.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지만, 저 밝은 미소와 조금이나마 비슷하게 보였길 바라며.

“물어봐 줘서 고마워.”

소녀가 까르르 소리 내 웃는다.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처럼 볼도 발그레하다.

“난 케리스! 넌 이름이 뭐야?”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설령 없다고 해도 아직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을 뿐.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소녀에게도 매우 익숙할 이름을 밝힌다.

“그건 이 행성 이름이잖아!”

소녀가 다시 웃는다. 아마도 농담이라 여겼을 테지. 명랑한 웃음이 앳된 목소리에 섞여 든다.

“아이 이름을 행성 이름으로 짓는 경우가 어딨어! 애들 이름조차 짓기 귀찮아하는 진짜 못된 고아원에서만….”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에 미소의 흔적이 싹 사라진다. 소녀의 얼굴은 솔직하다.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종 궁금했던 적이 있지만, 이 소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적나라하게 생각을 전부 드러낸다.

실수했다.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나한테 화내겠지? 상처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당혹감으로 얼굴을 물들이던 소녀가 눈을 질끈 감는다. 푹 숙인 붉은 정수리를 보며 조금 미안해진다.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려고 나온 유희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리를 피해준다. 시간이 흐른 후에 소녀, 케리스는 고개를 들고 사라진 또래 소녀의 부재에 의아해할 테지. 그러나 사과해야 하진 않을 터다. 아무렴 사과받을 만한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으니까.

*

D-3658

“정말, 정말 미안해!”

사흘이 지나고 다시 만난 소녀, 케리스의 얼굴은 변함없다. 구름 낀 하늘 같은 시무룩한 표정도, 덜 여문 단풍나무 잎 같은 눈동자도, 파도처럼 굽이치는 붉은 머리카락도.

조금 난감하다. 기껏 자리를 피해줬건만, 다음날 슬쩍 찾아보니 소녀는 저녁 내내 단풍나무 밑을 맴돌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 학교가 끝나자마자 모든 일을 마다하고, 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안타까웠던 건 아니다. 인간이란 시간 낭비의 대가 또한 아니던가.

하지만 결국 현신체란 껍데기를 입고 자리에 나타난 건, 그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 눈에 밟힌 까닭일 터다.

“변명은 아니지만 실수였어. 화 많이 났지?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릴까?”

“괜찮아. 화 안 났어.”

우다다 쏟아지는 사죄의 틈새로 짧은 말을 끼워넣기가 이리도 어려울 일인가. 혀를 움직이는 데 익숙지 않아 말이 느린 탓도 있다. 다행히 소녀의 폭포 같은 사과가 멈춘다.

“진짜? 용서해 주는 거야?”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소녀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오른다. 이번에도 생각은 솔직하게 읽힌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은 건가? 화가 안 났을 리 없는데? 그런데 진짜 화난 얼굴은 아니고.

“그럼, 우리 친구 해도 괜찮아? 그….”

아마도 이름을 부르려다가 멈춘 듯, 소녀가 눈치를 본다. 친구라. 소녀가 원하는 친구는 되어주지 못하겠지만, 이득 보는 일도 손해 보는 일도 아니다. 거절하면 울어버릴 것 같으니, 잠시나마 어울려주는 게 나을 터다. 교류에 이름은 중요한 법. 그 논리에 따라 자연스레 나온 제안이다.

“네가 이름 하나 새로 지어주면, 친구 해줄게.”

“내가? 이름을?”

소녀의 눈이 커진다. 어쩔 줄 모르며 사방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에게 너무 어려운 요구였나 싶어 덧붙인다. 예쁘지 않고, 평범한 이름이어도 상관없다고.

“안 돼! 내 친구가 평생 쓸 이름이 될 건데, 당연히 예쁘고 의미가 있어야지!”

당혹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투지가 불타오른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예쁜 단어들이 들숨 날숨보다 빠른 속도로 중얼중얼 나온다. 그 집중력을 깰 필요를 못 느껴 조용히 관찰만 한 게 몇 분 지났을까. 소녀가 고개를 번쩍 든다.

“윌로우, 어때?”

“윌로우?”

버드나무? 되묻자 소녀가 머리를 위아래로 흔든다. 활발한 어린 소녀에게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다. 묻기 전에 스스로 얘기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옛날에 살던 동네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거든. 레인브룩이라는 작은 도시인데,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응.”

이 행성에 모르는 장소는 없다. 레인브룩. 작은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지.

“무려 이백 년 된 버드나무라고 팻말도 걸려있었거든! 대단하지 않아? 이백 년이나 그곳에 있었다니.”

이백 년도 찰나일 뿐이지만, 십 년 겨우 넘겼을 소녀에겐 까마득한 시간처럼 보일 터다. 예의 삼아 소녀가 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자, 소녀가 신나서 말을 잇는다.

“그 나무가 내 친구였어! 그늘에 앉아서 놀기도 하고, 되는 데까지 타고 올라가 보기도 하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몰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소녀가 환하게 웃는다. 태양처럼 눈 부신 미소다.

“소중한 옛 친구의 이름이라면 우리도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마음에 들어?”

그 버드나무의 잎도 소녀의 눈 색과 비슷했을까. 진한 초록에 서린 기대감에 부응해 주기로 한다.

“응. 앞으로 윌로우라고 불러줘.”

윌로우. 그렇게 이 현신체에 이름이 부여되었다.

*

D-3281

윌로우가 소녀를 처음 만났을 당시, 소녀는 열세 살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윌로우는 여전히 케리스의 친구다.

케리스는 학교가 끝난 후 단풍나무 아래로 찾아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윌로우에게 전부 털어놓는다. 가족 이야기, 학교 선생님 이야기, 하기 싫은 숙제 이야기, 최근에 맛있게 먹은 디저트 이야기 같은 시시콜콜한 일상들.

말수 적은 윌로우는 좋은 경청자였고, 아마 그 점이 케리스의 호감을 샀으리라 추측한다. 밝은 아이답게 케리스 주변엔 친구가 많았지만, 케리스는 반드시 시간을 내어 윌로우를 찾았으니까.

반대로 케리스는 윌로우에게 묻는 것이 별로 없다. 윌로우의 가족, 거처, 다니는 학교. 친구라면 응당 궁금해할 만한 것들은 신비로 남는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첫 만남 때처럼 실수할까 봐 참는 게 훤히 보인다. 수많은 묻지 않은 질문 중 극히 일부만 소리를 찾는다.

“넌 몇 살이야? 나랑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이 곤란한 질문도 그중 하나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수억 년을 떠나보내다 보면 일 년 일 년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솔직한 숫자를 인간 소녀에게 말할 수는 없다.

“맞아, 열네 살.”

완전한 거짓이라기엔 애매하다. 숫자는 현신체 윌로우의 모습에 적절한 나이다. 어린 소녀의 외관을 택한 건 괜히 경계심을 사 인간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리스는 오히려 그 때문에 윌로우에게 다가왔겠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은 시간은 10년.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갈 터다. 이 또한 추억으로 남아 우주의 허공으로 사라지겠지.

이상하게,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

D-2256

인간은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살면서 많은 격동의 시기를 거친다. 자아를 처음 자각하는 순간, 독립해서 홀로 서게 되는 순간, 사회로 첫발을 딛는 순간, 그 외에 수많은 순간이 인생을 자신만의 형태로 주물러 어떤 두 인간도 똑같지 않게 만든다.

그런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면서도 안정감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오래된 본능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고, 다른 이들과 토론한다. 오늘 케리스의 얼굴에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그 일환이다.

“고작 열일곱 살에 남은 생을 뭘 하며 살고 싶은지 정해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케리스의 입김이 하얗게 번진다. 추우니까 카페 안에 들어가서 핫초코나 마시자고 설득한 게 얼마나 되었다고, 제 하루 일상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던 케리스는 답답해졌는지 윌로우를 밖으로 도로 끌고 나온다.

처음엔 계절 따라 옷을 바꾼다는 개념이 익숙지 않아 케리스에게 오해를 샀다. 선물이라며 억지로 떠넘기는 모자와 목도리 등을 피하고자 현신체에게 계절에 맞는 옷을 챙겨 입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이 나이의 인간은 생각보다 빨리 자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키가 크지 않는 게 아니냐며 간식을 잔뜩 싸 들고 오는 케리스로 인해 외관 조절에도 능숙해졌다.

케리스와 마찬가지로 이제 윌로우도 열일곱.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나무줄기처럼 곧게 떨어지고, 케리스보다 높이가 조금 낮은 눈은 초봄의 녹색이다. 이는 케리스가 언젠가 묘사한 윌로우의 모습이다.

“넌 정말 예뻐, 알아?”

인간의 미의 기준은 불가해한 영역이기에 객관적으로 윌로우가 예쁘게 보이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환하게 웃는 저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싶진 않아, 어느새 익숙해진 미소를 따라 만들어 화답한다.

오늘 케리스의 날씨는 아직 먹구름이다. 고민이 하얀 입김과 함께 형태를 찾는다.

“…그래서 그냥 털어놓고 싶었어. 너와 얘기하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도 편해지고, 보이지 않던 답도 찾게 되더라고.”

그건 4년간 케리스를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소녀를 잘 파악하게 된 까닭일 터다. 케리스는 언제나 솔직하다.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그저 경험이 부족해 보지 못하는 것을, 손을 잡고 이끌듯이 짚어줄 뿐.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오늘 무언가 정한다 해도, 그게 반드시 미래를 고정해 버리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막말로 10년 후에 자기가 뭘 하고 있을지는 선생님들도 모를 것 같은데!”

천진난만한 말에 낯선 느낌이 가슴을 스친다. 인간의 신체를 본떠 만들었지만, 현신체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아니라 질병은 걸리지 않을 텐데. 두꺼운 코트 위로 심장에 손을 대보지만 몇 겹의 옷을 타고 심장박동이 전해질 리 없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케리스, 지금 생각했을 때 넌 뭘 하고 싶어?”

빠르게 온 만큼 이상한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 다른 오해를 사기 전에 화제를 전환한다. 다행히 케리스는 눈을 깜빡이며 고민에 빠져든다.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기보단… 좀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내가 사는 곳에 관해서.”

“이 도시에 관해?”

“그보다 넓게. 이 행성에 관해 알고 싶어.”

막아뒀던 둑이 터진 것처럼 안색이 밝아진 케리스의 말이 쏟아진다. 어디에 어떤 곳이 있는지,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행성 반대편에도 계절이 똑같이 흘러갈지.

“아마 10년으로 모자라겠지, 이 행성의 모든 것을 알려면.”

다시 그 느낌이 쥐어짜듯이 가슴을 스치고 간다. 당혹스러움에 케리스의 말을 놓쳐 한 박자 늦게 되묻는다.

“미안, 마지막 부분을 잘 못 들었는데.”

“언젠간 현신한 행성을 보고 싶다고. 행성도 하나의 생명이라서 그 행성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하잖아? 전설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때 가면 생길 수도 있고! 그냥 만나보고 싶었어. 내가 사랑하는 세상의 일부이자 전부니까.”

사랑받는 행성이자 세상.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을 감정이지만, 직접 말로 듣는 건 다른 느낌이다.

“윌로우, 너는? 뭘 제일 하고 싶어?”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러나 케리스 본인도 답을 찾은 와중, 모르겠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분명히 실망할 터.

케리스에게 해준 조언을 되새긴다. 깊은 고민이 필요 없는, 단순한 대답이라도 괜찮다. 케리스 옆에서 4년 동안 세상을 지켜본 윌로우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듣고 싶어. 네가 세상을 탐구하며 알아낸 것들을.”

그럴 수 있는 날도 이제는 6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아. 그제야 이 쥐어짜는 이상한 느낌이 무엇인지 자각한다. 정해진 끝을 앞두고 생긴 욕심에서 비롯된 거부감이다.

*

D-2133

행성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전쟁이 일어나고, 국가가 멸망하고, 사람들이 수천수만 단위로 죽어 나가도 이는 신경 쓸 대소사가 아니다. 전쟁은 언젠가 종결되고, 국가는 새로 세워지고, 인구는 또 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행성이 인간의 형태로 현신체를 만들어 인간 사회에 슬쩍 발을 들여본다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에 손대는 일은 없다. 행성은 생명을 품는 자인 동시에 방관자다. 눈여겨 살피고, 관찰할지언정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름은 윌로우. 성은 불명. 나이 17세. 갓난아기였을 때 고아원 문턱에서 발견되어 그곳에서 키워졌고,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도서관 도우미로 일하면서 이르게 취직에 성공해 독립을 앞둔 똑똑한 소녀.

그것이 도시의 시스템 기록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이 현신체에게 부여한 서사이자 과거다. 오직 한 인간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윌로우! 나 깜짝 놀랄만한 소식 들고 왔다? 뭔지 맞춰볼래?”

케리스의 초록색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대학교 원서를 접수하고 난 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소식은 하나밖에 없기에 들뜬 이유를 모를 수 없지만, 신난 케리스의 장단을 맞춰준다.

“누구한테 깜짝 선물이라도 받았어?”

케리스는 인기가 많다. 밝고 예쁘고 성격 좋다는 칭찬을 달고 다니는 아이니, 또래들이 호감을 품는 건 당연하다. 우정의 선물도, 때로는 연심이 담긴 고백도 받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케리스는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특정한 선을 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단풍나무 아래로 찾아오는 소녀의 옆자리는 늘 비어있는 거겠지.

케리스가 윌로우 옆에 바짝 붙는다. 뛰어오느라 열이 오른 손끝이 윌로우의 서늘하게 식은 손을 스친다.

“깜짝 선물은 맞긴 하지! 나 합격했대! 1지망 대학에! 행성학으로 제일 유명한 곳이라 꼭 가고 싶었는데.”

“정말 축하해.”

이제 웃음 짓는 행위가 어색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입술 끝을 위로 끌어올리고 눈꼬리를 휜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태양처럼 빛을 발하는 저 웃음은 몇백 년을 노력해도 따라 할 수 없겠지.

“그런데… 집하고 거리가 좀 있어서 아마 근처에 자취방을 얻게 될 것 같아. 9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니 8월 말에는 짐을 정리하고 입주할 테고. 그래도! 주말마다 찾아올 거니까, 나 잊어버리면 안 된다? 손가락 걸고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케리스의 표정에 초조함이 깃든다. 손가락 네 개를 접고 새끼손가락만 내밀어 케리스의 손가락에 걸자 소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돌아오지만, 그것만으론 이제 부족하다 느끼게 된다.

“얘기해주고 싶은 게 있어. 어제 이력서를 넣은 도서관 중 한 곳에서 정식 취직 제안이 왔어. 특별전형이라 조건도 좋아서 수락할 생각이야.”

“와, 진짜? 너무 잘 됐다! 오히려 네가 더 바빠져서 못 나오는 거 아니야?”

“어디로 가는지는 안 물어봐?”

“어딘데?”

입을 타고 익숙한 대학 이름이 흘러나온다. 케리스가 잠시 입을 헤 벌리고 눈을 깜빡인다. 그 후 거의 비명 같은 반응이 튀어나온다. 꼬였던 새끼손가락이 풀어지고 따듯한 두 손이 윌로우의 손을 덥석 잡는다.

“진짜? 정말?”

“꼭 이 단풍나무 아래에서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원한다면 지금만큼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너무너무 좋아! 너랑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게 제일 아쉬웠는데. 그럼, 있잖아. 아예 나랑 같이 방 구하는 건 어때?”

“방을?”

“응! 원룸보단 투룸이 살기가 좋고, 월세도 나눠서 낼 수 있고! 사실 그냥 너랑 같이 사는 게 즐거울 것 같아. 혹시… 이미 다른 정해진 계획이 있어?”

기쁨을 내비친 것도 한순간, 케리스는 눈치를 보며 부담 주려는 건 아니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케리스는 언제나 솔직하다. 아직 놓지 않은 손에서 간절한 온도가 느껴진다.

하루 몇 시간 현신체를 뒤집어쓰는 것과 하루의 모든 시간을 현신체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여태 어설프게나마 인간 행세를 해 온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고작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인간을 지켜본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할 필요 없는 고생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논리만으로 움직였다면, 애초에 행성의 불문율을 깨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자.”

짧지만 다정한 수락에는 한 행성의 무게가 담겨 있다.

*

D-1613

인간으로 사는 것은 놀랍고 거추장스러운 일의 연속이지만, 윌로우로 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케리스 윌라드라는 존재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다.

*

D-1518

책을 정리하고 있으면 묘한 안정감이 든다. 어느 유명한 대학교의 도서관, 그중에서도 행성학에 관한 서적이 나란히 서가에 꽂힌 경관은 행성의 기억을 닮았다.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역사처럼.

그중 한 권을 꺼내 펼친다. 두꺼운 하드커버 표지를 열자 빼곡히 인쇄된 작은 글씨가 드러난다.

거대한 대우주. 우주를 이루는 수많은 은하. 은하에 소속된 셀 수 없는 행성들. 그 속에서 다양한 생명이 살고 죽어간다.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굴러가는 수레바퀴처럼.

이는 행성도 마찬가지. 인간이 정해진 수명이 있듯, 행성의 수명도 무한하지 않다. 시간의 차이일 뿐, 생명에 기반한 모든 것은 언젠가 죽는다.

행성이 죽은 자리엔 빛나는 잔재만 남는다. 하나둘, 은하의 행성이 죽음을 맞이해 마지막 행성마저 사라지면, 은하 또한 끝을 맞이한다. 그렇게 대우주 속 거대한 행성들의 무덤이 된다.

펼쳐진 서적, 하얀 페이지 위에 챕터 제목이 선명하다.

닫힌 은하. 모든 행성의, 은하의 종착지다.

잔뜩 소리를 죽인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눈이 먼저 붉은 머리카락을 포착한다. 케리스가 맞은편에 앉아 턱을 책상에 대고 올려다보고 있다.

열아홉 살. 이제는 아이 티를 벗은 얼굴이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인다. 케리스의 초록색 눈이 샐쭉 휜다.

“바빠? 곧 퇴근 시간이잖아.”

“아니, 거의 끝났어. 이거만 정리하면 돼.”

펼쳐놓은 책을 덮고 책상에 남은 책 서너 권을 주섬주섬 챙기자, 케리스가 벌떡 일어서서 반을 뺏어간다. 도와줄 테니 빨리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자며 뒤에 졸졸 따라붙는 케리스의 존재는 이제 익숙하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면 매일 보는데도, 강의 중간중간, 강의가 끝난 후 꼬박꼬박 도서관에 출석해서 윌로우와 시간을 보낸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단풍나무 아래에서 만나던 어린 시절과 다름없다.

“아니 그래서, 전에도 말한 걔 있잖아. 귀찮아 죽겠는데 계속 치근덕거리는 거 있지? 관심 없다고 대놓고 눈치를 주는데도 못 알아먹는 거야. 저녁 약속 있다고 하고 얼른 튀었지. 어차피 거짓말도 아니고.”

도서관임을 고려한 목소리는 간신히 들리는 속삭임이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소소한 고자질에 설핏 미소가 걸린다.

“그렇게 싫어? 보통 이 나이대 인간은 대부분 연애에 관심 있지 않아?”

“가끔 넌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더라.”

마지막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다가 괜히 찔려 멈칫한다. 케리스가 입을 삐죽인다.

“연애가 싫은 건 아닌데, 걔는 진짜 아니야.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딱 사절이야. 린튼 교수님의 손자라고 또 잘난 척은 얼마나 하는지. 지가 행성학 교수인 것도 아니면서.”

“행성학과 교수님의 손자라고?”

처음 듣는 정보에 관심을 보이자 케리스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린튼 교수님이 유명하잖아. 행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해서 여러 논문도 내셨고, 더 나아가서 은하 간 소통에 관해서도 연구하고 계시고. 나도 정말 존경하는 분이야. 기회가 된다면 그분 밑에서 배우고 싶을 만큼.”

문제는 그 손자놈까지 같은 분야에서 공부할 것 같단 말이지. 내년에도 강의가 겹치는 건 싫은데, 휴학이나 해버릴까. 투덜대는 케리스의 손을 달래듯 잡자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케리스가 방글방글 웃는다.

“그래도 참아볼게! 진짜 하루하루가 아깝단 말이야. 드디어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행성 탄생의 연구라는 건 내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만큼 거대한 분야인걸. 그깟 남자 때문에 일 년이나 날릴 순 없지.”

꿈을 품은 인간에게선 빛이 난다. 그리고 그 빛은 가능성을 부른다. 본래라면 없었을 기적 같은 희망도.

“윌로우, 너는? 새로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케리스가 묻는다. 눈을 감자 우주가 펼쳐진다. 눈을 뜨면 그 우주는 케리스가 된다.

“글쎄.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려고 해.”

*

D-1517

인간이 같은 은하 내 행성 간 소통 창구를 구축한 건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아직도 한 행성에서 보낸 소식이 다른 행성에 닿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이 행성이 은하의 마지막 행성이라는 사실을 행성학자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시간문제일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답을 기다리다가 깨달을 즈음엔 그 어떤 대비를 하기에도 늦다. 운이 좋아 이르게 행성의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택한 이들이 역사에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것도 같은 은하에 이주민을 받아줄 행성이 존재할 경우다.

인간은 아직 은하를 건널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 행성의 인간에겐 남은 이주로가 없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한계일 뿐. 행성의 눈은 은하를 보고, 행성의 귀는 우주를 듣는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

D-1342

행성은 수많은 탄생과 죽음을 목도하고 증언한다. 그 작은 빛 하나하나를 눈에 담지만, 어느 한 생명의 시작과 끝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여태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행성의 불문율이 하나씩 깨진다.

“스무 번째 생일 축하해, 케리스.”

투룸 자취방 거실의 식탁. 그 위에 놓인 초콜릿 크림을 얹은 동그란 케이크. 케이크에 꽂힌 기다란 초 두 개. 심지에 붙은 작은 불꽃이 어슴푸레한 자취방을 부드럽게 밝힌다.

건너편에서 케리스가 입술 가까이 두 손을 모으고 있다. 기대감이 눈을 빛낸다. 나는 포장지를 두른 네모난 물건을 케이크 옆으로 밀어준다.

“선물이야.”

“원래 촛불부터 불고 주지 않았어?”

반문하면서도 선물을 받아 드는 케리스의 손길엔 설렘이 묻어있다.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뜯던 케리스가 탄성을 지른다. 포장지 사이로 책 한 권이 삐죽 모습을 드러낸다.

“이거 절판된 은하 역사서잖아! 국내에선 절대 구할 수 없다고 했는데!”

“다 방법이 있지.”

절판된 책을 구하는 것쯤이야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서가 깊숙이 박혀 일찍이 정리를 끝마치면 케리스의 강의가 끝날 때까지 나를 찾는 사람은 없다. 그때를 틈타 현신체에서 벗어나 행성을 뒤져서 책을 찾고, 다른 현신체를 뒤집어쓰고 값을 치르고, 우편으로 부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래, 시간만 충분하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케리스는 책을 어떻게 구했는지 자세히 캐묻지 않는다. 아마 도서관 인맥을 통하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있겠지.

“자, 그럼 눈 감고, 소원 빌고, 촛불 분다!”

책을 소중히 옆에 내려놓고 케리스가 다시 두 손을 모아 눈을 감는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는다.

아직은 알리지 못하는, 케리스에게 주는 두 번째 생일 선물. 눈을 감자 까마득한 어둠이 펼쳐진다. 나 홀로 남은 행성의 무덤 속, 닫혀가는 은하에서 참아왔던 숨을 내쉰다.

보이지 않는 손, 들리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반드시 은하 너머 어딘가에 닿을 구조 요청. 그 첫 번째를 허공으로 멀리 퍼트린다.

케리스, 나는 너에게 미래의 시간을 선물할 거야.

*

D-1242

구조 요청을 발신한 지 100일째. 어떤 행성에서도 답신은 없다.

괜찮다. 아직 시간은 있다. 기회는 있다.

*

D-1142

구조 요청을 발신한 지 200일째. 여전히 답신은 없다.

어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지 좀 됐다. 은하 너머 연결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게 이렇게 지치는 일이었는지 처음 알게 된다.

아직은 괜찮다.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

D-1042

구조 요청을 발신한 지 300일째.

…조금씩 눈을 뜨기가 힘들어진다. 시간이 바닥나기 전, 답신이 올까?

*

D-810

낮은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거기 갈색 머리. 너지? 케리스의 도서관 사서 친구.”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올려다보자, 인상 쓴 남자가 보인다. 꿀 같은 금발, 짜증 서린 새파란 눈동자, 표정만큼 날카로운 턱선.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를 알고 있다. 단서를 조합하면 이 남자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머리에 옅은 안개가 낀 기분이다. 생각의 흐름이 전만큼 명료하지 않다. 시야각으로 비유하자면 360도에서 200도로 줄어든 기분이라고 할까.

“왜 답을 안 해?”

사색에 너무 몰두해 남자에게 반응해 주는 걸 잊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나를 내려다본다.

“케리스를 찾고 있다면, 지금 여기 없는데.”

“누가 그걸 모른대?”

케리스를 찾아온 게 아니었나. 오늘치 일도 끝냈겠다, 모니터 화면을 끄고 일어선다. 여태 용건을 제대로 꺼내지 않은 남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중요한 일은 아닌 듯하여 퇴근 준비나 할 심산이다.

손이 책상에 세게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그늘이 진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남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있다.

“네가 ‘윌로우’냐고 묻고 있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익숙지 않은 분노가 배어있지만, 주인을 착각할 수 없는 맑은 목소리가 끼어든다. 눈을 돌리자, 뺨이 잔뜩 상기된 케리스가 저벅저벅 걸어온다. 퍼즐이 뒤늦게 맞아떨어진다. 그제야 나는 남자의 정체를 눈치챈다.

“요아쉬 린튼. 윌로우한테 무슨 짓이야?”

“아무것도. 네 친구라길래 인사하던 중이었어.”

입학생 시절부터 졸업반인 지금까지도 케리스가 대학 생활의 최고 불운으로 꼽는, 케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눈치는 없는 주제에 자아만 비대해서 황소처럼 들이받을 줄밖에 모르는’ 요아쉬 린튼을 처음 보는 순간이다. 4년 내내 그와 전공 수업이 겹쳐 케리스는 치를 떨었고, 들이대는 그를 무시하려다 머리끝까지 열받아 내게 하소연하곤 했다.

확실히, 지금도 꿀릴 것 없다는 표정을 보니 자존감 하나는 충만한 남자 같다. 케리스가 고생이 많네. 마저 퇴근 준비를 하며 드는 감상은 그뿐이다.

“…말은 드럽게 못 알아 처먹어서 내가 그렇게 돌려 거절하니 윌로우까지 건드려? 나도 이제 안 참아. 확 그냥….”

케리스가 도서관에서 폭발해서 출입금지 당하면 곤란하다. 재빠르게 코트를 입고 팔꿈치를 슬쩍 잡아당기자, 케리스가 요아쉬에게 화내다 말고 돌아본다.

“배고프니까 얼른 가자.”

마법처럼 케리스가 얌전해진다. 마지막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요아쉬에게 던지고 케리스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요아쉬가 무어라 하려는 듯 입을 열지만, 뒤에서 어떤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불러세운다. 케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끌고 도서관 건물을 나선다.

“오늘은 저 자식하고 겹치는 강의가 없어서 좋아했더니, 이제는 도서관까지….”

“저 사람이 린튼 교수님의 손자라고?”

가벼운 질문에 케리스가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대학원에서도 저 재수 없는 얼굴 계속 볼 것 같아서 불길해. 행성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게 뭐 이렇게 험난한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금 걱정하진 말자. 오늘 저녁, 일주일 전부터 예약한 곳인데 입맛 떨어지면 곤란하잖아.”

“그건 그렇지. 잊자, 잊어! 오늘 난 너랑 끝내주는 데이트를 즐길 거야!”

농담조의 어조는 발랄하다. 입가는 솔직해서 부정 못 할 애정이 배어있다.

꿈을 품은 초록색 눈에서 여전히 빛이 난다.

*

D-653

구조 요청을 발신한 지 689일째.

졸업식에서 케리스는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는다. 같은 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건데, 이리 요란법석 떨 필요가 있냐고 하면서도 기쁜 기색은 감추지 못한다.

“이제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거야.”

케리스의 말에 축하를 건넨다. 진심을 담은 미소가 초조함을 잘 숨겨줬길 바란다.

*

D-562

린튼 교수의 연구실은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서 멀지 않다. 오늘은 오전 근무라 퇴근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자니, 케리스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나타난다.

“늦어서 미안. 강의가 오버타임 되었어. 그런데 교수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어?”

나는 보던 책을 덮고 일어선다. 어차피 시간을 죽일 겸 책장만 넘기던 중이었다.

“나도 같이 가자.”

“그럴래?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긴 해.”

도서관을 나와 케리스 옆에서 기다란 복도를 걷는다. 창문이 열려있어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들바람은 칼바람으로, 하늘하늘한 카디건은 두꺼운 겨울 코트로 바뀌게 될 터다.

인간의 시점에서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러니 순환하는 계절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의미를 두는 거겠지.

“정말 괜찮아?”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고 케리스를 돌아보자, 답지 않게 입꼬리가 처져 있다. 녹색 눈에는 걱정의 흔적이 있다.

“응.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며?”

“그거 말고. 너 요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는 거 알아?”

다른 이의 눈에 띌 만큼 현신체에 부정적인 변화가 있었던가. 거울을 잘 들여다보지 않아 몰랐다. 손을 올려 얼굴을 만져보지만 늘 그렇듯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

구조 요청 발신을 시작하고부터 몸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케리스에게 말할 수도 없다. 설명하기도 곤란하거니와, 정말 병에 걸린 게 아니니 하얀 거짓말을 입에 담을 뿐이다.

“좀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계절 탓이거나.”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하지만, 어느덧 린튼 교수의 연구실 문 앞이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오라는 손짓에 케리스는 마지못해 문에 노크한다. 들어오라는 목소리와 케리스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다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케리스와 린튼 교수의 대화는 단어를 집어내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들린다. 원한다면 청각만 현신체를 이탈해 엿들을 수 있으나, 내게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여 힘을 빼지 않는다.

강의 내용에 관한 얘기. 진로에 관한 얘기. 그런 자잘한 것들은 어차피 묻지 않아도 집에 가며 케리스가 전부 말해줄 터다.

시야가 흐릿하다. 조금 어지럽다. 복도에 의자가 없어 잠깐 쭈그려 앉을까 고민하던 찰나.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 같은 충격이 퍼진다.

허리가 절로 구부러진다. 머리를 붙잡아도 종은 계속 울린다. 물을 탄 듯 번져버린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무언가 말한다. 괜찮냐고 묻는 걸까.

나는 깨닫는다. 이 종소리는 내게만 들리는구나. 오롯이 나에게 걸려 오는 연락이다.

은하 너머로부터 간신히 받은 답신.

연결을 허락한다. 눈앞이 어두워진다.

*

D-561

구조 요청을 발신한 지 781일째.

아예 현신체를 벗어났으면 연결이 빨라졌을 텐데.

들려오는 건 실체 있는 목소리가 아니다. 전언을 담은 파동이 적합한 표현이다. 내 정신 또한 공허를 부유한다. 입을 통하지 않은 말을 전하는 게 얼마 만인가.

현신체가 갑자기 사라지면 곤란한 상황이라서. 기다려줘서 고마워.

이 먼 은하까지 왜 연결을 시도했지?

보이지 않지만 연결된 공간을 더듬어보니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은하다. 연결을 받아줄 행성을 찾고 찾다가 신호가 이곳까지 흘러온 모양이다.

조금 더 가까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쉬움은 사치다.

이주민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

잠시간 파동 하나 없이 잠잠하다. 연결이 끊긴 건 아니어서 차분히 기다린다. 답신은 느릿하게 온다.

같은 은하 내 행성으로 이주시키는 게 편할 텐데.

그 속에 생략된 질문이 있다. 원래 행성과 함께 죽을 운명인 생명을 이주시킬 필요가 있나? 어차피 삶과 죽음은 돌고 도는 법. 그것이 우주의 이치이며, 모든 생명은 그 굴레 속에 살고 죽는다. 이는 인간도, 행성도 마찬가지.

이 은하에 남은 다른 행성이 없어. 은하의 끝이 멀지 않았어. 그전에 이주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

나 역시 자질구레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는다. 행성은 감정에 호소한다고 설득될 존재가 아니다. 그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

…거리가 멀어. 이주로를 지금부터 연결한다 해도 수명이 끝나기 전에 열린다고는 장담하지 못해.

입이 없으니 미소를 지을 수 없지만, 보내는 파동에 분명히 웃음이 담겨 있다.

되게 할 거야.

불가능해.

가능해. ‘나’를 매개체로 쓴다면.

행성의 눈은 은하를 보고, 행성의 귀는 우주를 듣는다. 그리고 행성의 손은 우주를 잇는다. 내가 케리스를 끝까지 품을 수 없다면, 미래로 나아갈 발판이 되어주겠다.

성공은 약속할 수 없어.

이는 말하지 않은 승낙이다.

연결을 받아주는 것으로 충분해.

울음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온다. 케리스다. 대화를 시작하고 인간의 시간으로 얼마나 흘렀지? 오래되진 않았겠지만, 놀라기엔 충분했을 터다. 아까 괜찮다고 둘러댄 게 무색해진다.

이만 내 몸으로 돌아가 봐야겠어. 이주로는 바로 연결을 시작할게. 문제가 있으면 연락해.

‘내’ 몸?

파동에 의아함이 실려 있다.

언제부터 현신체를 ‘나’로 지칭하게 됐지?

행성은 행성인 동시에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흙 한 줌, 공기 한 모금, 바다의 한 방울 전부 행성이라는 커다란 존재를 구성한다. 하지만 현신체는 그림자일 뿐. 계절에 따라 잠시 걸쳤다가 벗는 옷이나 다름없다.

윌로우.

별 뜻 없이 허락한 이름이 그림자에 의미와 생명을 부여한다.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욕심이 이 몸에 깃들어 나의 일부로 만든다.

*

D-521

“원인을 모르겠다니, 그걸 말이라고! 그러고도 의사야?”

발전을 거듭한 인간의 의료 기술은 훌륭하지만, 제아무리 세심한 검사를 거쳐도 현신체에 이상이 잡힐 리 없다. 소득 없는 검진 결과를 받고 병원을 나서며 케리스가 분통을 터트린다.

내가 쓰러지고 눈을 뜨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 케리스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 후로 별일 없이 한 달이 넘었으나, 케리스는 여전히 불안해한다. 이주로 연결을 시작하고 내 몸이 눈에 띄게 쇠약해진 탓이다. 병원 검진이 쓸데없을 걸 알아 거절하고 싶었지만, 케리스가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두 손 들었을 뿐.

“단순히 과로인 것 같으니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겠지. 이참에 일을 조금 쉬려고.”

“그래, 잘 생각했어. 푹 쉬어. 생활비는 걱정하지 말고.”

케리스의 얼굴이 약간 밝아진다. 나는 그렇게 거짓말에 익숙해진다.

*

D-500

조금씩, 조금씩. 이주로를 은하 너머로 연결한다.

막다른 길이었던 곳에 서서히 문의 윤곽이 생겨난다.

*

D-422

근래 들어 어둠이 편해진다. 작은 빛에도 눈이 쉽게 피로해져서 도서관 업무에 복귀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주로 연결에 집중해야 하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익숙해졌는지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든다.

케리스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면 정말로 아쉬웠을 터였으나, 케리스는 학교 일정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나중에 쌓을 수 있었던 경험을 놓친 걸 후회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얘기를 꺼낼라치면 케리스는 귀를 닫는다.

나도 내키지 않는 일을 하라고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분명히 기회는 미래에도 있을 테니.

“맛은 괜찮아?”

“응. 파스타 맛있네.”

어둑하니 분위기 있는 1층 건물 레스토랑. 케리스는 조개와 새우를 올린 해산물 토마토 스파게티를, 나는 버섯을 얇게 썰어 넣은 크림 파스타를 앞에 두고 있다. 다행이라며 활짝 웃는 케리스를 눈에 담고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머금는다.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처럼, 다른 감각도 둔해진다. 처음 현신체를 입었을 때만큼 혀에 느껴지는 맛이 선명하지 않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게 있으면, 그에 비례해 잃는 것도 있는 법. 내 일부를 떼어 이주로를 만들고 있으니 당연한 변화다.

“그럼 언젠가 또 오자. 다음엔 아직 안 가본 데를….”

케리스의 말이 뚝 끊긴다. 내 뒤를 바라보며 얼굴을 확 찡그렸다가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는 걸 보니, 뒤에 누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케리스가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은 몇 없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케리스.”

꿀 같은 금색 곱슬머리가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그 주인만큼 강하게 자기주장을 한다. 케리스는 꿋꿋하게 남자를 무시하지만, 그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우리 식사 중인데.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도 감탄할 만하다. 케리스가 결국 포크를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무례하게 굴고 있는지는 자각하고 있어? 여기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진짜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할아버님이 널 찾으셔.”

“이젠 린튼 교수님까지 팔아먹니?”

케리스가 기가 찬 표정을 짓는 동시에 레스토랑 직원이 다가온다. 예의 차원에서 동행이냐고 묻고 케리스가 단번에 고개를 젓자, 직원이 요아쉬 린튼에게 정중하게 나가달라고 요청한다. 끝까지 돌아보는 요아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케리스가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사과한다.

“미안. 괜히 분위기만 망쳤네.”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먹자. 음식엔 죄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다행히 남은 식사는 평화 속에 이루어진다. 케리스의 미소가 돌아온다.

“정말 미안한데, 5분만 시간 내주면 고맙겠어.”

“다음은 너니, 베사 린튼?”

사촌끼리 아주 날을 망치려고 작정했냐며 케리스가 분통을 터트린다. 식당 밖에서 기다린 듯, 문을 나서자마자 케리스에게 말을 건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요아쉬 린튼 근처에 자주 보이던 얼굴이라는 걸 깨닫는다.

외관이 그리 닮지는 않았다. 무작정 들이받는 요아쉬 린튼보다 차분한 분위기가 돋보이지만, 그런다고 들어줄 케리스가 아니다. 케리스가 내 손을 잡고 홱 돌아선다.

“너까지 린튼 교수님을 들먹일 생각이면 실망이야.”

“핑계가 아니고, 교수님이 진짜 널 찾으셔. 지금 연구실을 떠나지 못하셔서 우리를 보낸 거야.”

요아쉬가 무례하게 군 건 미안하다며 베사가 대신 사과하지만, 케리스의 눈빛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그래도 베사 린튼은 물러서지 않는다. 이런 면에선 요아쉬 린튼과 사촌지간이 맞는 것 같다.

“헛소리처럼 들릴 건 아는데, 이 행성은 멸망을 앞두고 있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너야, 케리스 윌라드.”

싸한 침묵이 흐른다. 베사 린튼의 얼굴은 진지하다. 그럴 수밖에. 저 허황한 말은 전부 사실이다. 고명한 행성학자들이 눈치챌 만큼 눈에 보이는 징조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정말 미쳤니?”

당연히 케리스에게 아직 상황이 와닿을 리 없다. 하지만 케리스가 보기에도 이상할 만큼 베사 린튼은 끈질기게 설득한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아. 오늘, 아니, 내일도 좋으니까 린튼 교수님 연구실에 들러줘. 부탁할게.”

“안 돼. 내일 윌로우하고 따로 일정이 있어.”

“잠깐이라도 좋으니 시간 내줘. 윌로우도 데려와도 돼.”

케리스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베사 린튼을 버려두고 집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케리스는 말이 없다.

케리스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때론 예외를 두어야 할 때도 있다.

“내일 잠깐만 가보면 안 될까? 네 담당 교수님인데 혹시라도 미운털 박히면 곤란하잖아.”

“그런 걸로 불이익을 줄 속 좁은 사람은 아니야. 괜찮아.”

“사실 내가 궁금해서 그래. 베사 린튼까지 저렇게 군 적은 없잖아.”

케리스는 반박하지 못한다. 조금 더 설득에 공을 들이자 케리스는 결국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준다. 진짜 잠깐만 들리는 거라며 과장되게 으름장을 놓는 걸 보며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사이에 일부러 져주는 건 내가 아닌 케리스일지도 모른다고.

*

D-421

공기가 진동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피부로 느끼지 못할 감각이겠지만, 내겐 그 떨림이 선명하게 와닿는다. 이는 탄생의 울음이다.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며 우주 전체에 울려 퍼지는 고동.

린튼 교수의 연구실에는 온갖 측정기가 널려 있다. 공기처럼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일정하게 삑 소리를 내뱉는 것, 조용히 숫자 바늘만 이리저리 오가는 것.

인간의 과학적 발전은 언제나 눈부시게 빠르고 경이롭다. 이 기계들이 정확히 무엇을 도출해 내는지는 모르지만, 그 데이터로 어떤 결론에 다다랐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행성은 앞으로 1년 후에 멸망한다.”

은퇴에 가까운 나이에도 눈빛의 총기는 흐리지 않다. 아비드 린튼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행성학 교수다. 케리스도 그런 린튼 교수를 존경해서 이 대학에 들어왔었지. 합격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던 케리스를 아직 기억한다.

이제는 상황이 반대다. 케리스가 이 대학에, 린튼 교수 아래 들어온 것에 아비드 린튼은 감사해야 한다.

“교수님,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요아쉬와 베사 린튼의 질 나쁜 장난이라고 확신하며 연구실을 찾은 케리스의 말문이 막힌다. 최소 사흘 밤낮을 샌 얼굴로 린튼 교수가 케리스에게 자료 뭉치를 건넨다. 종이를 한 장씩 넘기는 케리스의 표정이 의심에서 경악으로 물든다.

경험만 부족할 뿐이지, 케리스는 똑똑한 학생이다. 린튼 교수를 비롯한 행성학자들이 도출한 수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지 않을 정도로.

“고작 1년… 그러면 빨리 다른 행성과 연락을 취해서 이주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주할 수 있는 행성이 없다.”

피로해 보이는 린튼 교수가 케리스 건너편 의자에 앉는다. 내가 이미 아는 이 은하의 처지가 린튼 교수의 갈라진 입술을 통해 그려진다.

“징조가 보인 순간부터 꾸준히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 은하에 남은 마지막 행성이야.”

의미는 명백하다. 은하 간 이주는 물론 소통마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현재, 닫히기 직전의 은하는 그곳에 속한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다. 케리스가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수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떨리는 목소리는 한참 후에 나온다.

“이걸 왜 저에게 알려주시는 건가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린튼 교수의 눈이 작게 진동하는 측정기로 향한다. 케리스가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끊임없이 진동하던 기계다.

“다른 은하의 행성으로 이주로가 열리고 있어.”

“다른 은하로요?!”

케리스가 벌떡 일어선다. 흥분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여태 은하 간 짧은 전언 하나 발신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갑자기 소통을 넘어선 이주로라니.

“멸망 전까지 완전히 구축될지 확실하진 않지만, 현재로선 이 이주로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지. 불행히 모두가 이주하진 못해. 수용의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니 케리스, 너도 네 친구도 이 사실이 함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괜한 혼란을 일으켜 이주로에 문제가 생기면, 다 같이 죽는 수밖에 없어.”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다. 그러나 케리스는 생각하고, 인내하고, 참고, 소화한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이해했어요. 하지만 아직 제 질문에 답해주시지 않으셨어요, 교수님. 이걸 왜 저한테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간신히 그러모은 침착의 가면은 곧 깨질 터다. 나는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린튼 교수의 목소리가 등대처럼 빛난다.

“이주로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이주로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따로 있어. 열쇠가 없으면 이주로가 완성돼도 무용지물이지.”

측정기는 여전히 공기를 따라 진동한다. 종말, 또는 희망의 징조를 알리듯이.

“케리스 윌라드, 네가 바로 그 열쇠다.”

*

D-414

케리스는 그저 대학 유명 교수 밑의 석사생이다. 누구도 이주로의 열쇠가 케리스가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터다. 하지만 케리스가 연구실에 방문할 때마다 반응하는 측정기가 가리키는 건 명확하다. 그러니 린튼 교수도 위험을 감수하고 케리스를 회유했을 테지.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도 기회가 올 터이니.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이주로는 케리스를 위한 선물이지만, 어차피 케리스 홀로 살아남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가족, 친구, 가까운 사람들. 모두를 살릴 순 없더라도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이 곁에 있고 없는 건 천지 차이다.

가끔은 내가 그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이는 부질없는 욕심이다.

“어떻게 생각해, 윌로우?”

린튼 교수는 케리스에게 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유예 기간의 마지막 날, 케리스가 날 보고 묻는다. 막막한 질문에 서린 건 거대한 불안이다.

정말 행성은 멸망하는 걸까. 이주로는 진짜 존재하는 걸까. 나만 그 이주로를 열 수 있다는 게 사실일까. 그렇다고 해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누구에게 살 기회를 주어야 하는 걸까. 내가 이런 책임을 짊어져도 되는 것일까.

언제나 솔직한 케리스. 나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진심을 담은 조언을 건넨다.

“덧셈과 뺄셈처럼 정해진 정답은 없어. 네가 생각하는 최선을 선택한다면, 그걸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거야. 행성의 무게를 네 어깨에 얹을 필요는 없어.”

이것은 내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책임도 당연히 내 몫이다.

케리스는 말없이 침대에 앉아 고민을 거듭한다.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인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 케리스의 두 눈에 어떠한 결단이 담긴다.

“살 수 있다면 살아봐야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살려봐야지. 그러니까 윌로우,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질문이 아니기에 나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 케리스에게 해야 하는 거짓이 하나 줄어든다.

행성은 천성이 방관자며, 제 땅을 밟은 모든 생명체를 품는 동시에 그 누구도 특별히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천칭이 기울어진 불공평한 사랑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감정이 아니다. 초련(初戀)은 내게 케리스의 모습을 띠고, 케리스의 이름을 갖는다.

*

D-365

케리스, 난 사랑을 믿어.

사랑에 미래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

D-339

잠들어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창문을 열어둔다.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어 목을 간질이면 아직 이 몸이 땅에 발붙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웃기는 일이다. 애초에 이 땅 전체가 나임을 모르지 않는데도.

케리스는 조심스럽게 병원 입원을 권유하지만, 병원에서도 점차 약해지는 몸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기에 나는 집에 머무르겠다고 케리스를 설득한다. 케리스는 결국 내게 져준다.

잠을 자고 있을 때면 감각은 본체로 돌아간다. 내 시선은 언제나 케리스를 향해 있다. 강의마저 빠지고 시간 대부분을 린튼 교수의 연구실에서 보내는 케리스 곁에는 린튼 교수뿐만 아니라 요아쉬와 베사 린튼도 있다.

“네 친구는 이제 안 데리고 오네? 무슨 병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신경 꺼.”

케리스는 내 앞에선 밝은 미소를 짓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땐 바늘이 잘못 쓸린 고슴도치처럼 예민해진다. 다가오는 행성의 종말, 내 컨디션 악화, 이주로 연결의 책임이라는 악재가 겹치고 겹쳐 신경을 갉아 먹고 있겠지. 터지기 직전의 화산임을 저도 알고 있어 요아쉬 린튼을 피해 다니지만, 그 남자는 부러 케리스를 찾는다.

“아픈 사람한테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어? 딱히 치료법도 없어서 입원하지도 않았다며. 너도 네 삶을 살아야지. 이주에 데려가겠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 어쩌면 오래 살지도 못할 텐데, 다른 가족이나 친구를….”

커다란 소리가 허공을 채운다. 보이는 건 주먹 쥔 케리스의 손. 그리고 새빨개진, 나중엔 시퍼렇게 물들 요아쉬의 얼굴. 거의 10년간 곁에 있으면서 케리스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처음 본다. 요아쉬 린튼 역시 마찬가지인지 표정에 충격이 서린다.

악문 이 사이로 케리스의 경고가 흘러나온다. 눈에는 머리카락보다 붉은 분노가 선연하게 보인다.

“또 그따위 말을 했다간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꺼져, 요아쉬 린튼. 그리고 똑똑히 새겨들어. 윌로우가 같이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고, 아무도 가지 않는 거야. 지금 빈말하는 거 아니야.”

소란을 들은 베사 린튼이 달려와서 케리스에게 사과하고 할 말을 잃은 요아쉬 린튼을 끌고 간다. 잠시 홀로 남겨진 시간. 케리스는 바닥만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문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케리스는 내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그저 침묵으로 위로한다.

*

D-247

케리스의 23번째 생일. 케이크에 긴 초 두 개, 작은 초 세 개를 꽂은 케리스가 굳은 얼굴로 미소 짓는다.

“내 소원 들어볼래?”

소원을 소리 내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미신은 절실한 마음 앞에 힘을 쓰지 못한다. 한 단어, 한 단어에 무거운 바람이 실려 있다.

“우리는 함께 새로운 행성으로 갈 거야. 거기서 너는 치료받아서 건강해지고, 나는 행성학 공부에 전념해서 학자가 되고. 그렇게 언젠가 이 행성이 다시 태어나면 돌아올 거야. 우리 집으로.”

가벼운 입김에 촛불이 전부 꺼진다.

*

D-143

이제 멸망의 징조는 행성학자가 아니더라도 관측할 수 있다.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넘치고, 대기가 수시로 뒤바뀐다. 바다 건너편에선 나라 몇몇이 무너졌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불안이 행성 전체를 뒤덮는다.

시간이 아슬아슬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생명을 아끼는 게 낫지 않나?

그 행성이 첫 연결 이후로 전언을 보낸다. 파동에 답신하는 것도 이제는 필요 이상의 노력이 든다.

시간 안에 될 거야.

내 근거 없는 확신을 파헤치지 않는 건 아마도 배려일 터다. 아니면 언젠가 같은 끝을 맞이할 존재를 향한 동질감이든가.

이주로 연결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붓고 있어. 생명을 다 태우면 다음 탄생을 위한 불씨도 남기지 못해.

행성이 죽은 자리엔 빛나는 잔재가 남는다. 이는 무덤인 동시에 윤회에서 태어날 행성의 씨앗이다. 수십 년, 수백 년, 혹은 수억 년이 걸려 다시 숨 쉬게 될 새로운 은하의 시작점.

그 잔재를 끝까지 끌어모아 이주로를 연결한다. 내게 부족한 시간을 생명으로 메꾼다.

감사할 일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단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이.

내 잔재는 이곳에 남지 않을 거야. 그곳으로 넘어가 다른 은하에 잠시 머무르겠지. 탄생의 불씨가 다시 지펴질 때까지 잠드는 것뿐이야.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순간을 기다리며.

이 희망만이 끝없는 불안 속, 침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

D-41

“행성을 떠나기 전에 혹시 가보고 싶은 곳 없어?”

케리스가 묻고 나는 고민한다. 잠에서 덜 깬 기분으로 가만히 머리를 굴리자, 문득 먼 옛날의 대화가 떠오른다.

“내 이름을 따왔다는 그 버드나무를 한번 보고 싶어.”

레인브룩, 케리스의 고향.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이백 년이 넘은 버드나무가 줄기를 드리워 물그림자를 만드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도시.

고향을 떠올린 듯 한순간 들뜬 표정을 짓지만, 케리스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진다.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지금 내 몸 상태로는 레인브룩으로의 여행을 감당할 수 없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가 무너지고, 그나마 건재한 도시로 피난민이 몰려드는 시기에 더더욱 꿈도 꿀 수 없는 모험이다.

동시에 꿈일 뿐이다. 케리스의 옛 친구를 윌로우의 눈을 통해서 보고 싶었던 것뿐. 불가능한 일에 고집부릴 생각은 없다. 그러니 낙엽이 흔들리듯 부스스 웃어 보인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우리 처음 만났던 단풍나무 아래는 어때? 그리 멀지는 않잖아.”

버스로 30분. 다행히 이 도시의 버스는 아직 운행 중이다. 날이 춥지만 않다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케리스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럼 다음 주, 날씨가 좀 따듯해지면 보러 가자. 똑같지는 않을 테지만, 버드나무는 새로운 행성에 가면 찾아보고. 거기에도 버드나무가 있겠지?”

있기를 바란다. 그 나무를 새로운 친구 삼아 내 부재에 마냥 슬퍼하지 않도록.

*

D-8

나에겐 생일이 없다. 이 행성의 첫 달력이 생기기도 전에 태어났으니, 정확한 숫자를 계산할 방도가 없다.

윌로우의 생일은 3월 25일. 케리스와 처음 만난 날이다. 매년 자신만 축하받고 넘어갈 순 없다며 케리스가 내게 준 첫 생일 선물이다.

나의 탄생일.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겨운 마지막 시간이 흘러간다. 하지만 이날만은 거대한 노력을 들여 하루 종일 깨어있다. 식료품이 금보다 귀하게 된 지금 케이크를 구할 순 없지만, 케리스와 함께 작은 빵에 초를 꽂고 촛불을 불어 끈다.

소원은 단 하나다.

케리스, 너에게 부디 찬란한 미래를.

*

D-7

주어진 유예의 시간은 끝났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도시는 행성의 마지막 요새다.

이제 최후의 최후까지 버틸 뿐이다.

*

D-Day

3028년 4월 2일. 오늘 이 행성은 멸망한다.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이 깊은 잠을 깨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깜깜한 우주가 사라지고 빛이 들어온다. 실낱같이 뜬 눈을 감지만, 도로 잠들지는 않는다.

이주로 완성이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문에서 철컥거리는 소음이 들린다. 누군가가 급하게 열쇠를 잘못 쑤셔 넣은 듯 작은 욕설이 거듭된다. 30분 같은 3초가 흐르고 문이 벌컥 열린다. 다시 눈을 뜨니 붉은 머리카락이 버드나무 줄기처럼 내 위로 흐드러져 있다.

“윌로우, 떠나야 해. 비상사태가 터졌어. 상황은 가면서 설명할 테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 못 걷겠으면 내가 업을게.”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사실 조금 무리다. 나를 구성하는 대부분을 이주로에 쏟아부어 현신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 하지만 아직 이 몸에도 남은 역할이 있기에 집중력을 바닥까지 끌어모은다.

정신을 차려보니 케리스가 어느새 나를 부축해서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다. 벽이 사라지자 사이렌이 귀를 찢을 듯 더 시끄럽게 울린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소리 지르며 필사적으로 뛴다. 목적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는 명확하다.

암흑색의 길쭉한 물체가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빈다. 머리로 추측되는 동그란 부분을 제외하면 나머지 형태는 일정하지 않다. 찢어진 커튼처럼 하늘거리는 천 같다 싶다가도, 갑자기 뼈만 남은 팔의 형태가 비집고 나와 가로등을 휘어놓고, 빨판처럼 바닥에 들러붙어 수 미터 반경의 콘크리트를 부순다.

괴물. 사람들의 뒤섞인 비명 가운데 이 단어는 선명하게 들린다.

이미 행성의 예정된 멸망일은 지났다. 마지막 생명의 불씨를 한 곳에 집중해서 아직 케리스가 밟고 선 땅이 남아있는 것뿐이다.

이는 삶과 죽음의 굴레에,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우주의 커다란 균형에서 용납할 수 없는 반역이다.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자면 컴퓨터 에러. 그리고 에러가 발생한 곳에는 고치기 위한 프로그램이 투입된다.

프로그램에게 이름은 없지만, 필요시 다양하게 불리곤 한다. 대우주의 의지, 섭리의 집행자, 균형의 수호자.

또는 이를 마주한 인간들이 으레 부르듯이, 괴물.

검은 물체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들이, 대우주가 바라는 것은 행성이 순리대로 멸망을 맞이하는 것. 그러니 땅을 가르고, 대기를 자극하고, 차근차근 행성을 부숴나간다. 단지 그 과정에서 인간도 죽어 나갈 뿐이다.

“아직 이주로가 열리지 않았어. 진짜 곧이라고 린튼 교수님이 말했는데! 일단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버티기로 했어. 관측 결과 분명 그 부근에서 이주로가 열릴 거래.”

나를 이끄는 케리스가 빠르게 속삭인다. 본능적인 공포를 덮은 침착한 가면은 어설프지만, 그걸 짚어내진 않는다. 나는 케리스의 손길을 따라 묵묵히 발을 옮긴다.

몸이 무겁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케리스!”

저 목소리를 들은 케리스가 처음으로 반색한다. 흐릿한 시야에 선명한 금발, 그 뒤로 새카만 흑발의 남자가 나타난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연구실로 피신하라는 연락이 간 게 언젠데!”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윌로우 부축하는 거나 도와줘!”

“그냥 두고….”

억 하는 신음과 요아쉬 린튼의 목소리가 끊기고 베사 린튼이 차분하게 말한다.

“도울 테니까 빨리 가자. 네가 없으면 이주 계획도 무용지물이야.”

조심스럽지만은 않은 손길이 내게 닿는다. 거의 질질 끌려가듯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

이것은 시간의 경주다. 멸망이 먼저일까, 이주로가 열리는 게 먼저일까.

벼락같은 빛이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그 자리에 멈춘다. 요아쉬 린튼이 무어라 짜증 내는 소리도, 케리스가 걱정스럽게 괜찮냐고 묻는 말도, 말없이 나를 다시 잡아끄는 베사 린튼의 손도 전부 무시한다.

이주로가 완성되었다. 나의 승리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제일 화려하다. 이제는 선명하게 보인다. 몇 년간 흐릿한 눈을 통해 보던 세상이 환하다. 검은 물체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눈이 있을 법한 자리에는 텅 빈 구멍뿐이지만, 나를 보고 있는 건 확실하다.

그것들은 인간을 직접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다.

케리스에게로 눈을 돌린다. 창백한 얼굴,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를 마음에 담는다. 나는 손을 뻗어 케리스를 붙잡는다. 케리스는 저항하는 대신 내게 몸을 숙인다.

…천천히, 죽음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모든 게 잘될 거야, 케리스. 린튼 교수의 연구실로 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케리스의 손을 놓는다. 검은 물체가 내게 닿는 순간 이미 한계였던 현신체가 서서히 흩어진다. 케리스의 비명이 들린다. 나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삼켜진다.

아마 케리스는 한참을 반항했을 터다. 요아쉬와 베사 린튼이 케리스를 설득했는지, 강제로 끌고 갔는지는 모른다.

아니, 어쩌면 케리스는 내 말을 믿고 바로 연구실로 향했지만, 가는 길이 험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일 수도 있다.

알 길은 없다. 이제는 행성의 시선을 유지할 힘도 없으니, 추측에 그칠 뿐이다.

“……이게 이주로의 입구라고요?”

“그래. 어떤 형태일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눈에는 보이는 종류니 다행이라고 하지.”

“하지만… 어떻게 열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문처럼 손잡이 같은 것도 없고.”

“네게 반응하고 있는 건 틀림없어.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생각 같은 건 없나?”

“잘 모르겠어요….”

“손이라도 대보는 건 어때.”

“저기에 갑자기 손을 갖다 대면 불탈지, 잘릴지 어떻게 알고… 야, 케리스!”

캄캄한 암흑 속. 오직 희미한 목소리만 들려오는 곳. 형체도 없이 의식만 떠도는 내게 익숙한 온기가 닿는다. 내게 처음 손을 뻗어준 사람의 온기다.

행성은 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한다. 오로지 케리스가 내민 손을 잡기 위해.

어둠이 점차 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 빛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한다. 나는 케리스를 향해 웃음 짓는다.

“윌로우! 윌로우, 너지? 정말 너 맞지?”

케리스가 떨리는 손으로 나를 잡는다. 붉은빛이 내 몸을 잔잔한 불처럼 휘감고 있는데도 거리낌 없다. 케리스의 얼굴은 젖어 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흐른다. 저 눈물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알기에 닦아줄 염치는 없다. 그러니 그저 화답하듯 케리스의 손을 힘 있게 맞잡는다.

“기다리고 있었어, 케리스. 믿어줘서 고마워.”

내 대답을 신호로 케리스가 크게 울음을 터트린다. 하염없이 우는 케리스 너머, 모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아는 얼굴도 몇, 내가 모르는 얼굴이 다수, 어쩐지 케리스를 닮아 누구인지 추측 가능한 사람도 몇.

최초로 은하를 건너 이주할 피난민이 이곳에 모여있다.

“케리스, 준비해야 해. 이주로의 입구는 오래 열려있지 못해. 통로는 어두울 거야. 눈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서워하지 말고 계속 걸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그 끝에 도착할 거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

“같이 가는 거지? 그렇지?”

케리스의 목소리는 절박하다. 마지막까지 와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케리스가 비명을 토하듯 절규한다.

“왜! 왜 넌 같이 안 가는 건데!”

“네가 윌로우라 칭하는 친구는 이 행성 자체니까.”

아비드 린튼이 나를 보고 있다. 불투명한 드레스처럼 내 몸을 휘감은 불길이 거대한 붉은빛의 원과 이어진 형태를, 평생을 행성학에 바친 학자가 관찰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나는 경외 어린 그 시선을 마주 본다.

“왜 케리스 윌라드가 이주로의 열쇠였는지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 조금 이해되는 기분이군요. 케리스를 위한 길이었겠지만, 결국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를 표합니다.”

케리스는 똑똑한 학생이다. 아비드 린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드디어 내 비밀을 알게 된 케리스의 얼굴에 깃든 감정은 경악도, 분노도, 배신감도 아니다. 깊은 슬픔에서 싹틔운 절망이다.

“정말… 정말 방법이 없는 거야?”

“나는 곧 이 행성이고, 행성이 멸망하면 나도 사라지는 건 자명해. 하지만 내 끝이 네 끝까지 단정 짓는 건 원치 않아. 너에겐 아직 수많은 가능성이 있으니까.”

케리스의 손을 잡고 붉은빛의 원 앞에 선다. 멀리서 대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끝이 코앞이다.

맞잡은 손을 원에 대자 손이 닿는 부분부터 붉은빛이 사라지고 검은 허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손에서 힘을 뺀다. 이제는 이별을 마칠 시간이다.

“케리스. 행성은 제 땅에 뿌리 내린 모든 생명체를 품지만, 누구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 행성의 역할은 지켜보는 것뿐이니까.”

고백은 담담하다. 케리스는 조용히 내게 귀 기울인다. 발끝에서부터 인간의 형태가 사라지고, 붉은빛이 거대한 원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너는 달랐어. 인간의 수명인 백 년 남짓은 내게 눈 깜짝할 사이밖에 안 되지만, 너와 함께한 시간은 하루가 영원 같았거든.”

케리스의 초록색 눈동자는 끝까지 내 눈만을 바라본다. 손의 형태도 사라졌지만, 손끝에 온기가 남았던 감각은 머무른다.

여전히 눈물자국이 남은 케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꽃피운다. 오직 나만을 위한 미소다. 점차 어둠으로 물드는 시야 속에서 그만이 어찌나 찬란하던지. 나는 케리스가 안겨주는 마지막 선물을 기쁘게 받는다.

“멸망 앞에 선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미래를 살아가, 케리스. 네게 별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내 진심을 그대 발밑에 바치나니, 절망을 딛고 서소서.

*

*

*

D+8027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치가 보인다. 22년 전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여인의 얼굴은 매끈했으나, 이제는 주름이 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곧다.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바삐 걷는 모양을 보니 급하게 가는 곳이 있나 보다.

다급한 발걸음이 향한 장소는 어느 대학의 행성학과 건물 꼭대기 층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조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을 맞이한다.

“윌라드 교수님! 교수님이 맞았어요. 말씀하신 우주의 각도에서 행성의 탄생이 관측되었어요. 새로운 은하의 시작이에요! 우리 기술로 관측될 정도면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을 거예요. 와, 진짜 처음 발표하셨을 땐 긴가민가했는데….”

천체관측관으로 들어가며 남자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정말 축하드려요, 취임하시고 이 분야에 쭉 뼈를 묻겠다고 선언하셨잖아요. 다들 죽기 전까지 결과를 보지 못할, 명예 없는 연구라고 했는데… 기적이에요.”

“별의 축복일지도 모르지.”

“네?”

윌라드 교수는 더는 말이 없다. 데이터 수치를 확인하고 망원경만 들여다볼 뿐이다. 남자가 되물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옆에 선 다른 조교가 눈치를 준다.

윌라드 교수는 친절하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어느 학자가 안 그러겠냐만, 유독 행성과 은하의 탄생에 무섭게 몰두하는 점이 사람들과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더 예민한 부분까지 파고들면, 최초로 은하를 건넌 이주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과 이주로를 여는 열쇠였다는 소문도 한몫할 터다. 처음에는 도리어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이들이 많았으나, 윌라드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이주 경험담은 입에 담지 않는다.

고향 행성에서 이주하며 말 못 할 사연을 겪은 게 아니겠냐는 의견이 모아져서 이제 윌라드 교수에게 관련 주제를 일부러 꺼내는 사람은 없다. 윌라드 교수의 동향 사람들도 각자의 경험만 이야기할 뿐, 윌라드 교수에 관해선 입을 다문다. 고명한 행성학자였던 아비드 린튼만 죽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우리의 침묵은 그 행성의 생존자이자 이주자로서 케리스 윌라드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예우라고.

그러니 윌라드 교수의 조교들 역시 침묵하고 추측에 그친다. 어차피 그 밖에도 해야 할 일은 많다.

“대우주 통합 검색 시스템을 돌려봤는데, 교수님이 최초 관측자가 맞는 것 같아요. 정식으로 협회에 관측 사실을 제출하면 새로운 행성의 이름을 짓는 영광이 교수님에게 돌아갈 텐데, 미리 생각해 두신 이름은 있으세요?”

케리스 윌라드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지만, 질문에 답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가 무엇을,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행성은 천성이 방관자다. 땅 위에 머무르는 생명이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그들의 죽음을 배웅할 뿐. 미련이란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그 행성은 달랐다. 인간의 맹랑함을 닮아, 원하는 바를 얻고자 자신이 속한 은하 너머로 손을 뻗었다. 거절에 거절을 거듭하면서도 생명을 깎아가며 수신자를 끊임없이 찾았다.

연결을 받아준 건 작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수억 년 굳건하던 행성이 우주의 섭리를 이탈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거대한 행성에 변화를 불러온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이 땅에 도착한 이후로 쭉 케리스 윌라드를 눈여겨봤지만, 그는 다른 인간들과 크게 남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학문의 업적을 세운 대단한 인물로 기억될지 모르나, 행성의 시선에서 인간의 인생이란 결국 거기서 거기다.

다만 때때로 케리스 윌라드에게서 그 행성의 파동이 느껴진다. 절대 잊히지 않을 기억을 품은 무덤처럼.

“교수님, 근래 은하 간 이동 기술 연구에도 진척이 있었잖아요. 운이 좋으면 언젠가 교수님이 관측한 행성에 직접 가보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볍게 건넨 질문이 케리스 윌라드가 평생 품어온 염원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를 터다. 여름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가 하늘의 특정한 지점을 향한다.

케리스 윌라드는 이주자다. 이곳에 머무르며 삶을 살아가지만, 결코 정착하진 않는다. 그는 언젠가 버드나무가 잠든 자리로 돌아가 긴 여행을 마칠 터다. 다만 기적 같은 별의 축복이 언제 맺어질지는 오직 미래만이 아는 일이겠지.

행성 번호 CN-180325, 명칭 ‘윌로우.’ 최초 관측자, 케리스 윌라드.

초련의 잔재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한다.


Written 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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