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계속하시겠습니까?
꿈 기반 단편선 (#170503)
“여행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차분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구원 같았으나, 짧은 문장에 담긴 내용에 소스라치게 머리를 흔드는 여행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차원 여행 관리국에서 파견된 수습반의 팀장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명단을 옆 팀원에게 넘겼다. 종이 명단에 빼곡하게 적힌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팀원이 질색했다.
“팀장님, 이게 무슨 원시적인 확인 방법이랍니까…. 하다못해 검색 기능 장착한 태블릿이라도 쓰면 안 됩니까?”
“안 돼요. 아직 시공이 뒤틀린 영향이 남아있어서 태블릿 꺼내봤자 고장날 게 뻔한데. 괜히 기기와 시간만 날리느니 아날로그 방식으로 확인하세요.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단호한 대답에 팀원은 구시렁거리면서도 펜을 쥐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행을 그만두고 고향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분들은 이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실 분들은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다시 호명하겠습니다!
여행자들이 앞다투어 팀원 앞으로 몰려가는 모습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너덜너덜 먼지투성이로 훌쩍이는 사람, 간신히 눈물을 삼키는 듯 입술을 꾹 물고 있는 사람, 겉으론 의연해 보이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사람까지 가지각색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관리국이 생기고 나서 차원 여행이 비교적 안전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차원 여행은 많은 위험을 동반했다. 비단 새로운 차원의 환경에서 오는 위협뿐만 아니라 이번처럼 여행자들이 시공의 뒤틀림에 빠지는 일도 드물지언정 없지는 않았다. 심지어 뒤틀림의 내부엔 틈새 괴수라 불리는 괴물도 존재해 이번처럼 실종된 여행자 전원이 살아서 나온 건 기적이었다.
그런 사유로 아무 여행자나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초췌하게 울고 있는 이들을 보니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20년 이상 차원 여행 관리국에서 일하며 이골이 나도록 봐온 광경이지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건 여전했다. 팀장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타임 팀장님!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시공간 뭉친 게 뭔 수를 써도 풀어지지 않아요!”
다급한 도움 요청에 몸을 돌려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 다른 팀원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타임은 호명을 기다리는 여행자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이어서 시선이 먼저 끌렸지만, 타임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그의 이질적인 분위기 탓이 더 컸다. 긴장과 안도가 만연한 여행자 사이에서 그 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초연했다.
“팀장님! 저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찰나 마주 보았던 푸른 눈길이 비명에 의해 끊어졌다. 타임이 한숨을 삼켰다.
*
문제를 해결하고 타임이 다시 여행자들에게 관심을 돌렸을 무렵 이미 정리는 거의 끝나있었다. 조용히 모여있는 이들을 바라보다가 타임은 도움을 외쳤던 팀원에게 눈을 흘겼다.
“언제까지 조금만 복잡한 시공간 계산이 뜨면 절 부를 거예요?”
“사랑해요, 팀장님!”
냅다 팔로 하트를 만들어 애교를 선보인 팀원이 부랴부랴 변명을 덧붙였다. 저도 공부 안 해온 건 아닌데, 처음 보는 문제라 당황했어요. 다음부턴 잘할 수 있어요, 진짜로! 본부로 돌아가면 제가 커피 쏠게요! 타임은 결국 피식 웃고 손사래 쳤다.
“됐네요. 아래 직원 커피 삥뜯을 정도로 양심 없는 상사는 아니거든요. 그럼, 시공간 측은 해결됐고 좌표가 나오면 본부로 이동하는 일만 남았네요. 가서 도우세요. 정시 퇴근해야죠.”
정시 퇴근이란 당근에 힘차게 뛰어가는 팀원을 뒤로하고 타임은 지시를 기다리는 여행자들을 먼발치에서 훑어보았다. 대부분 차원 여행 관리국이 지급하는 여행 시계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행을 마무리하는 안내 매뉴얼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살았다는 기쁨, 여행이 끝난다는 아쉬움, 집을 향한 그리움이 담긴 표정들을 보던 타임의 시선이 아까 눈을 마주쳤던 여행자에게로 돌아갔다. 그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행자 무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까닭이었다. 여전히 이유 모르게 낯설지 않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와중 명단 작성을 맡겼던 팀원이 타임에게 다가왔다. 타임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원 고향 차원으로 귀환하기로 했나요?”
팀원에게 던진 질문은 형식적이었다. 시공간의 뒤틀림에 한 번 휘말렸다 생존한 여행자는 열이면 열, 전부 여행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여행이 즐거워도 목숨보다 소중하겠는가. 그렇기에 팀원이 고개를 저었을 때 타임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찰나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여행을 계속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요?”
“저도 잘 못 들었나 싶어 세 번이나 물어봤습니다. 가끔 공포나 스트레스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사람도 종종 봤잖아요… 그런데 정신도 멀쩡해 보이고, 의사 표현도 명확하고. 저도 설득 안 해보려 한 건 아닌데 워낙 완고해서 말입니다.”
“누군데요?”
팀원이 고갯짓으로 한 여행자를 가리켰다. 타임이 조금 전까지 지켜보던 그 사람이었다. 별을 닮은 은빛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행자. 20대의 반절도 보내지 않은 얼굴이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을 지닌 젊은 남자였다.
“여행자 번호 3-6824, 나이는 23살… 이외는 안 물어봤어요?”
“귀환을 지망하는 게 아니라서 해당 사항이 없었어요. 제가 다시 가서 물어볼까요? 아니면 이제 태블릿 작동할 테니까 등록 인덱스라도 돌려서 여행자 정보 찾아볼까요?”
팀원이 태블릿을 꺼내서 톡톡 두드리는 시늉을 하자 타임은 잠깐의 고민 끝에 머리를 흔들었다. 명단을 도로 팀원에게 건네는 행동에서 팀원은 타임의 의도를 빠르게 눈치챘다.
“직접 얘기해 보시게요?”
“어차피 보고도 제가 해야 하니 이편이 효율도 좋겠죠. 뒤틀림의 틈새 안에서 있던 일도 물어보고 싶었고. 그쪽은 나머지 여행자들 데리고 본부로 돌아가서 귀환 절차 밟아주세요. 말씀하신 그 여행자는 제게 오라고 전해주시고요.”
거짓은 아니었다. 매뉴얼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건은 일개 팀원보다 팀장인 타임이 해결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뿐만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타임은 그와 대화해 보고 싶었다. 초면의 타인이지만, 묘하게 자꾸 시선이 가는 여행자와.
*
“안녕하세요, 차원 여행 관리국에서 나온 수습반 팀장 타임입니다.”
깍듯한 인사와 악수를 요청하며 내민 손을 여행자는 긴 순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혹여 악수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인가 싶어 타임이 손을 거두려는 찰나, 여행자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뜨겁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지닌 온기가 맞잡은 손을 통해 타임에게 전달되었다.
“안녕하세요. 타임, 향초 백리향(thyme) 맞죠?”
첫인사로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타임이 눈을 깜빡이다가 반갑게 웃었다.
“통성명에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몇 없는데. 맞아요. 혹시 주변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요?”
“네, 오래전 이야기지만요.”
어쩐지 낯익은 얼굴, 친근하게 다가오는 목소리, 그렇지만 선을 넘지 않는 태도는 단번에 타임의 호감을 샀다. 여행자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타임의 심적 경계가 확실히 허물어졌다.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타임이 메모장의 빈 페이지를 흔들었다.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형식상 질문 몇 개만 드리려고 따로 불렀어요. 가능하다면 틈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려주시면 더 좋고요. 여행자 번호 3-6824번 맞죠?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은 꼭 말씀드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흩어지던 경계가 잠시나마 형태를 되찾았다. 그러나 타임은 수상쩍든 안타깝든 사연 있는 여행자를 상대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덕분에 타임은 순간의 당황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물을 수 있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저를 편견 없이 대하는 데 제 이름을 모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거든요.”
수수께끼 같은 말에 타임은 이번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하지만 괴짜 여행자 또한 드문 편은 아니었기에 타임은 오래 머리를 싸매지 않았다. 어차피 여행자 번호는 알고 있으니 필요하다면 나중에 인덱스를 찾아봐도 될 일이었다. 타임이 빙그레 웃으며 메모장에 끄적였던 ‘이름’ 옆에 엑스 표시를 쳤다.
“대신 다른 질문에는 협조를 기대해도 좋을까요?”
“그럼요.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여행자의 희미한 미소엔 거짓 없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
뒤틀림이 사라진 시공의 틈새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 좋은 의자가 우연히 있을 리 만무했다. 우주 같기도 한 광활한 검푸른 공간에 작은 빛의 구체와 길을 잃고 흘러들어온 물체만 떠다니는 풍경은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 원시적인 공포를 안겨주기 충분했다. 타임 본인도 이곳에 익숙해지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래서 처음엔 차원 여행 관리국 본부로 이동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여행자도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한 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지만, 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 좌표로 이동하고 싶은데, 무리한 부탁일까요?”
괴짜 같아도 참으로 괴짜 같았다. 이유를 물어도 애매하게 회피하거나 알쏭달쏭한 답만 돌아올 것 같다는 예감에 타임은 결국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바로 면담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장소도 장소겠다, 첫 질문을 결정하는 데엔 큰 고민이 필요 없었다.
“여행자님에 관해 묻기 전에, 저희 수습반이 도착하기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보통 시공의 뒤틀림이 터지면 사상자가 여럿 나오기 일쑤인데 전원 큰 부상 없이 생존해서 나왔다는 게 신기해서요.”
여행자가 말없이 한 손으로 제 손목을 가리켰다. 그의 오른쪽 손목엔 타임도 익히 알고 있는 여행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차원을 이동하는 여행자들의 생체 정보 저장, 관리국과의 통신, 차원 간 언어 통역을 비롯한 기본적인 기능은 물론이며, 비상시 산소 공급과 시공간 좌표 이동까지 지원하는 차원 여행 기술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여행 시계도 만능은 아니었다. 타임이 미간을 모았다.
“여행 시계로 해결했다고요? 시공의 뒤틀림 속에선 긴급 좌표 이동이 불가능하잖아요. 틈새 괴수에 대항할 공격이나 방어 수단이 탑재된 것도 아니고요.”
“시공간을 조절하는 기능은 있죠.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괴수를 물리칠 힘이 아닌, 수습반이 도착하기까지 버틸 시간이었으니까요. 그저 시간을 되돌리는 거예요. 누군가가 다치면, 누군가가 죽으면. 오히려 시공의 뒤틀림 속이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죠. 이곳이 아니었으면 반작용 효과 때문에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잡담이라도 나누는 듯 평온한 어조로 나온 말은 타임에게 파격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번에야말로 타임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 간신히 내뱉었다.
“시공간을 조절한다고요? 혹시 마법 사용자셨어요?”
종종 과학과 마법이 함께 발현되어 발전하는 차원도 드물지 않았다. 타임 역시 그러한 차원 출신이었고 마법 사용자기도 했다. 또한 마법 사용자가 차원 여행에 적성이 맞는 경우가 즐비해 여행자 중에 마법 사용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과학적 기술과 마법이 융합된 기기에서 원하는 기능만 뽑아 다루는 건 또 다른 궤의 능력이었다. 타임이 고개를 저었다.
“왜 여행자님이 자신만만하게 여행을 계속하겠다고 했는지 이제 조금 이해가 가네요. 그렇게 엄청난 능력자셨으면 무서울 게 없을 법도 하죠.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아니요. 마법 사용자는 맞지만, 고향 차원에서 측정한 제 마력 잠재성은 표준에도 못 미칠 정도로 낮았어요. 마법 사용자라 불리기도 좀 부끄러울 정도였죠.”
타임의 예측은 이어진 여행자의 말에 깔끔하게 깨졌다. 타임의 눈썹이 위로 둥글게 휘었다.
“시공간을 되돌렸다면서요? 그것도 여러 번? 그거 아무나 손대지 못하는 마법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시공의 뒤틀림 속이었으니까요. 능력의 잠재성과 응용력은 엄연히 다른 분야고요.”
정론이라 반박할 말이 없어 타임은 입술을 가늘게 다물었다. 여행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까웠던 사람 중에 마법 적성이 강한 이가 있었어요, 어깨너머로 마법을 다루는 방법을 따라 배웠달까.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뛰어난 마법 능력자였다면 수습반이 오기 전에 괴수를 처리하고 기다리고 있었겠죠. 덧붙인 변명 같은 해명에 타임은 미간을 펴고 오간 내용을 받아 적고 메모장을 덮었다. 여행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타임의 눈에는 투지마저 불타고 있었다.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한 궁금증은 일단 다 풀리긴 했네요. 당신에 대한 호기심은 더 커졌지만요.”
“그럼 다음 질문이 어떤 걸지는 예상이 가네요.”
여행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작게 웃었다.
*
“보고 받은 명단에 나이가 스물셋이라고 적혀있던데 맞나요?”
“네.”
“차원 여행을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
“정확한 날짜까지는 외우고 있지 않지만, 대략 6년하고도 3개월가량 됐을 거예요.”
“6년이요?”
타임은 이름 모를 이 여행자를 양파 여행자라 불러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원 여행 관리국 직원 22년 인생에 이렇게 까도 까도 끝없이 자신을 놀라게 하는 여행자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차원 여행 기간이 평균 1년 안팎인 걸 고려했을 때, 타임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길어봐야 2년이 지나면 다들 고향 차원으로 귀환하는데. 그러고 보니 고향 차원이 어떻게 되나요?”
“차원 F-170이에요. 과학보다는 마법 위주의 문화가 발달했고, 도시보다는 자연이 차지하는 면적이 넓은, 조금은 심심할 만큼 평화로운 차원이죠. 이곳저곳 여행 다녀보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요.”
당신은요? 여행자가 타임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타임은 생각하기도 전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제 고향 차원이요? B-503이에요. 과학과 마법이 서로 보완하며 문화와 기술이 빠르게 발달한 곳이죠. 여행자님의 차원만큼 자연이 풍성하리라 생각하진 않네요.”
“고향 차원을 좋아하시나요?”
이어진 질문도 조금 생뚱맞았다. 그러나 여행자의 태도에서 악의가 보이진 않았기에 타임은 성실하게 답했다.
“네, 이러나저러나 소중한 추억이 많은 고향이니까요. 대부분 여행자도 여행의 끝에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하잖아요? 자기 뿌리에 대한 근본적인 그리움이라는 게 있나 봐요.”
여행자님은 안 그러세요? 6년이나 고향을 떠나 있었으면 그리울 법도 한데. 도로 차례를 돌려받은 타임의 질문에 여행자는 미묘하게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애매하게 머리를 흔들고 타임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이 얼핏 보였다.
“고향을 싫어하진 않아요. 하지만 별개로 그립지는 않아요. 돌아가고 싶은 이유가 없으니까요.”
삽시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타임의 입술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그런 타임을 위한 배려인지 침묵은 몇 초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여행자가 스스로 입을 열어 묻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차원 여행의 존재를 알게 된 건 15살 때였어요. 고향 마을을 떠나 여행하던 중 차원 여행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전 그 길로 가장 가까운 차원 여행 지부를 찾아가서 적성 시험을 쳐서 합격했고요.”
“차원 여행의 최소 나이 요건이 16살인데, 필수 훈련 기간을 거치면서 나이를 간신히 맞추셨나 보네요.”
“맞아요, 여러모로 운이 좋았죠.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제가 먼저 차원 여행을 하고 있었다면 적성이나 나이가 합격선에 들어도 여행 승인이 나지 않으니까요.”
이제는 놀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타임이 헛웃음을 터트리고 팔짱을 꼈다.
“여행자 경험 6년 차면 관리국 신입 사원을 가르쳐도 되겠어요. 아마 제 팀원 중에서도 이 규정을 모르는 사람이 몇 있을 텐데.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다른 차원의 자신을 만난 적이라도 있으신가요?”
농담 반, 진심 반이 섞인 감탄에 여행자의 눈꼬리가 휘었다. 설마요, 관리국의 취업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익히 들어왔는데요. 그리 말하며 여행자는 다시 손목의 여행 시계를 흔들어 보였다.
“차원 여행 매뉴얼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잖아요. ‘존재의 혼란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여행 지표를 선정할 시 가급적 다른 차원에 존재할 수도 있는 자신을 마주치지 않게 짜는 게 원칙이다.’”
“그런 규율이 있긴 하죠. 하지만 워낙 이론적인 부분이라 여행자는 물론, 관리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해요. 수천 개의 존재하는 차원에서 나와 똑같은 생체 정보를 지닌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 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에요. 일부러 찾는다고 해도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걸요. 관리국의 기록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이기도 하고요.”
타임 역시 신입 사원 시절, 제 상사가 담당 여행자 때문에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기억하지도 못했을 터다. 당시 백몇십여 년 만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했었더랬지. 타임은 물론이고 상사 선에서 해결될 일도 아니어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자세한 부분은 몰랐다. 사례 기록을 지금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며 타임이 슬쩍 물었다.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은 있나요? 다른 차원의 자신이란 존재에 호기심이 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데.”
“전혀요. 질투 나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거든요.”
질투요? 무엇 때문에요? 반사적으로 나온 질문에 여행자는 답하지 않았다. 타임도 한 박자 늦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나 싶어 멋쩍어졌다. 그러나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 이를 어찌 무마할까 고민하던 와중 여행자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차원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적 없나요?”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듯 평온한 얼굴에 상냥한 어조였다. 그에 타임은 일종의 사과 표시로 자신의 정보를 일부 내어주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일이래도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여행자를 일방적으로 심문하자니 마음이 조금 불편하던 차였다.
“궁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실제로 여행 적성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진지하게 떠날 생각은 한 적 없어요. 차원 여행 관리국에서 일하는 걸로 호기심은 충분히 충족시킨 데다가, 고향 차원을 오래 떠나고 싶진 않았거든요. 말했다시피 소중한 추억이 많은 곳이라서요.”
예상치 못하게 솟아난 충동이었다.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그리운 기억을 타임은 문득 꺼내서 보여주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적으로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 근거 없이 이 사람이라면 들어줄 것 같다는 예감이, 괜찮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여태 보여준 예의 바른 거리감 때문에. 어쩌면 아마 다시는 볼 일 없을, 부담 없이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였기 때문에.
“지루하고 다소 사적인 이야기라도 괜찮다면 들어보실래요?”
이유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가진 여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저는 리스발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제 차원의 과학 기술이 많이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드물게 마법이 더 인기 있던 변두리 마을이었어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어린 시절 자연이 주는 축복은 마음껏 누릴 수 있었죠.”
애틋한 미소가 타임의 입꼬리에 머물렀다. 일부러 꾸며내려 하지 않아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만한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게 하는 마법 같은 기억들. 오랜만에 그 속에 잠겨 타임은 기억의 바다가 비추는 흐릿한 형상을 들여다보았다.
“또래 마을 아이들과 하루 종일 신나게 들판을 뛰어놀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체력이 고갈돼서 집에 못 가겠다고 흙바닥에 주저앉기 일쑤였어요. 그럼 제 쌍둥이 오빠는 저를 어르고 달래다가 결국 저를 업고 집에 오곤 했죠. 같은 나이여서 체격도 비슷했는데 그래도 몇 분 일찍 태어난 오빠라고 꿋꿋이 절 챙겨서 가더라고요.”
“좋은 추억이네요. 그런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해 갈 만큼요. 오빠분은 여전히 당신의 고향 마을에 살고 있나요?”
타임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깊은 슬픔은 시간마저 온전히 퇴색시키지 못해, 새파란 눈동자에 선명하게 일렁였다. 여행자가 그를 눈치채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거나, 사과부터 하려 했을 터다. 타임이 그 순간을 새치기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괜찮아요. 오래전 일인걸요. 오빠는 25년 전 사고로 죽었어요. 잘못 시동이 걸린 무인 마차로 인한 교통사고였죠. 저도 하마터면 같이 죽을뻔했는데 오빠가 저를 먼저 밀치는 바람에 큰 부상 없이 살았어요.”
타임은 여행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검푸른 시공간 너머, 다시는 닿지 못할 과거의 잔상이 그 시선의 끝에 있었다. 여행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 마디의 말보다 침묵에서 타임은 오히려 이야기를 끝맺을 위로를 얻었다.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며 집안에 박혀 살았어요. 보다 못한 부모님이 저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차원 여행 관리국 지부가 있는 도시에 가게 되었고요. 그 후로는 뻔한 이야기죠. 저는 다시 일어섰고, 적성 시험을 치고 합격한 후로 관리국에 취직했어요. 본래 제 차원의 지부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본부의 수습반으로 발령받아 오게 된 거고요.”
“보통 강하신 분이 아니네요. 많은 이들은 평생 떨쳐내지 못할 상흔이었을 텐데요.”
다정한 위로가 도리어 부끄러워서 타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띄워주시는 것만큼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부정하는 타임의 목소리는 조금 씁쓸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떠나고 싶었어요. 리스발엔 어딜 가든 오빠의 추억과 흔적투성이라 너무나도 아팠거든요. 하지만 떠나 있으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원했던 건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함께 나눴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그러기 위해선 제가 슬픔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었죠.”
타임이 눈을 감았다 뜨고 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여행자와 시선을 맞췄다. 여태 삼켜온 질문이 드디어 소리의 형태를 찾아 입 밖으로 굴러 나왔다.
“여행자님도 비슷한 이유로 귀환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시는 건가요?”
비슷한 상실을 겪은 이들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고들 한다. 어쩌면 초연한 여행자에게 눈길이 계속 가던 이유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타임은 생각했다. 여행자는 머리를 숙인 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엔 타임의 표정과 흡사한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많이 닮았죠, 저희. 타인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없겠지만, 적어도 저희는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해 온 반쪽 같은 가족을 잃은 기분은 공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행자가 한 손을 쭉 뻗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시공간을 잡으려 드는 그의 손끝에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단 한 순간의 사고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머나먼 차원엔 동생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제가 아는 동생이 아니더라도, 아예 다른 삶을 살아온 동생이더라도, 흘러간 시간이 달라서 몇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냥 보고 싶었어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좋았다.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좋았다. 그저 먼 발치에서 한 번만 눈에 담을 수 있다면. 살아 숨 쉬는, 행복한 미래의 가능성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여행자가 손을 거두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당신이 전에도 말했다시피 수많은 차원을 여행하며 특정 인물을 찾기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죠. 무엇보다 간절한 소망이었지만, 사실 저도 큰 기대를 하고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어요. 실낱같아도 가능성이 존재했기에 포기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다른 차원의 동생분을 만나신 적 있나요?”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은 이상일뿐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희망을 품고 이상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마음이기에 타임은 필연적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행의 목적지에서 많은 인연을 만났지만, 동생은 아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을 계속하실 건가요?”
“행복하게 살 수는 없어도, 희망을 품고 내일을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타임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제안이 오지랖을 넘어 월권에 가깝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그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호의가 늘 호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 어떤 바람은 불가항력이었다.
“여행자님만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제가 좌표 지정을 담당해 드릴게요. 차원 여행자만큼은 아니지만, 수습반에서 일하면서 여러 차원을 잠깐이나마 들리게 되거든요. 동생분의 정보를 알려주신다면, 혹여나 제가 그 동생분을 만나게 된다면 꼭 알려드릴게요. 알려드리고 싶어요.”
여행자가 환하게 웃었다. 머리를 잠깐 숙여 감사를 표하는 그의 입술이 열리기 전에 타임은 직감했다. 그가 제안을 거절하리라고.
“당신의 호의엔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동생분의 정보가 무분별하게 퍼지는 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다만 현실적으로 당신에게 불가능한 부탁일 뿐이에요.”
“여행자님도 여태 만나지 못했으니, 저라고 쉽게 만날 수 있을 리는 없겠죠. 그렇지만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타임, 당신은 만나지 못할 거예요.”
단호한 확신이 담긴 말에 타임이 의문을 담아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선명한 웃음이 배어있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나요?”
“가급적 다른 차원의 자신을 마주하지 않는 게 원칙이니까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타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시간 속에 흐려진 익숙한 얼굴이 타임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타임이 볼 수 없었던 시간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
“처음부터 닮았다고 생각은 했죠? 그러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어도 저와 대화할 기회를 만들었겠죠.”
세월처럼 느껴지는 정적 끝에 먼저 말문을 뗀 건 여행자였다. 그것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타임이 굳어있다가 파드득 놀라 여행자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여행자에게 닿기 직전 연륜과 경험이 그의 이성을 일깨웠는지 손은 반도 올라가지 못하고 멈췄다. 그러나 타임의 두 눈만큼은 여행자에게 굳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익숙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그런데 저는 어떻게 알아본 건가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릴 적 모습과 지금 제 나이의 얼굴을 겹쳐보긴 힘들었을 텐데요.”
“같을 수는 없지만, 세월만으로 사람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진 않으니까요.”
여전히 상냥하고, 여전히 오지랖 넓고, 여전히 모르는 타인에게도 다정을 베푸는. 이름을 듣지 않았더라도 알아봤을 거라며 웃음 짓는 여행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타임이 눈을 내리깔았다. 잠긴 목소리엔 미안함이 묻어있었다.
“전 확신이 없어요. 먼저 얘기해주지 않았더라면 떠나간 이후에도 몰랐을 테죠. 늘 이런 식이었어요. 오빠가 제게 준 사랑만큼, 저는 그만한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 것 같아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당신이 기억하는 오빠와 지금의 저는 매우 다를 테니까요.”
세월만으론 본질이 변하진 않으나, 상처는 아무리 작더라도 사람을 뒤바꾸기에 충분하니까요. 타임이 고개를 들자, 여행자가 희미한 미소를 띠고 물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오빠의 모습은 어떤가요? 타임은 눈을 감았다. 흩어진 단어가 하나의 연결점을 갖고 한 치의 꾸밈 없이 기억 속에서 흘러나왔다.
“밝고, 긍정적이고. 당차고.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그럼에도 선량하고, 타인을 챙기며 부조리에 맞설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너무 미화된 것 같은데요.”
여행자와 타임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럴 때도 있었죠, 세상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시절이. 여행자의 말에 미소는 잦아들었지만, 침잠했던 분위기는 조금 전처럼 마냥 무겁지는 않았다. 타임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의 제안은 전보다 꺼내는 데 더욱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있잖아요.”
—삑. 작은 알림음에 둘의 시선이 여행자의 손목으로 향했다. 시계 화면에 알파벳 하나와 숫자 세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행자도 타임도 모를 리 없었다.
“다음 여행 좌표가 도착했네요.”
여행자의 짧은 감상에서 이 대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타임은 빠르게 눈치챘다. 타임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거절당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붙잡아 보고는 싶었다.
고향 차원으로 돌아가기가 정 싫다면, 차원 여행 관리국에 취직하는 건 어떻겠냐고. 그렇게 저와 연결고리를 유지하지 않겠냐고.
“늘 상상해 왔어요. 만약 동생이 사고로 죽은 날,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요. 내가 더 빨랐다면, 아예 다른 길로 갔더라면, 동생을 나들이에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여행자가 중얼거리는 목소리 위로 차마 제안을 건네지 못한 타임은 입을 도로 다물었다. 여행자가 타임을 보며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겐 미안한 얘기겠지만, 그쪽의 제가 당신을 지켜내서 기뻐요.”
“…정말 여행을 계속하실 건가요?”
“네.”
설득이 무의미하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타임은 결국 개인적인 욕심을 꾹 눌러 삼켰다. 하지만 여행자의 눈을 속일 순 없었는지, 마치 타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여행자가 위로를 건네왔다.
“알아요. 또다시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고, 차원 여행은 여전히 위험을 동반하죠. 하지만 덧없는 희망이 아니니까요. 지금, 이 순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잖아요.”
눈물 나도록 따듯한 어조에 타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차원의 문이 열렸다. 검푸른 시공간에 열린 소용돌이에 떠다니는 빛의 구체가 홀린 듯 몰려들어 길을 밝혔다. 여행자의 목적지는 희뿌연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앞에 서서 타임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요. 당신의 앞날에 행복만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타임 역시 담담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목이 메 그가 돌아설 때까지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 한 발짝, 여행자가 차원의 문안으로 들어섰다. 빛무리가 은빛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찰나에 타임은 한 단어를 꺼낼 수 있었다.
“세이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도, 인덱스에 찾아볼 필요도 없는 이름. 많은 추억과 시간에 바래지 않는 감정이 함축된 이름을 타임은 몇 년 만에 입에 담았다. 소리 내 불렀다. 그 부름에 답해줄 수 있는 이에게.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었어. 앞으로도 너의 여행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희망의 끝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덧없는 바람이라 하더라도, 희망을 품는 건 죄가 아니기에, 기나긴 인고가 지나간 후 그만큼 찬란한 보답이 너에게 찾아오기를.
여행자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맑은 푸른빛을 담은 눈이 휘었다. 연결이 사라지는 시공간 속에서 목소리는 잘 전달되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은 작별의 전언을 남기기엔 충분했다.
‘안녕, 타임. 내 희망이 되어줘서 고마워.’
그렇게 여행자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타임이 미소 지으며 그의 여정을 배웅했다.
Written 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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