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된 꿈의 단편선

미완성 원고

꿈 기반 단편선 (#190920)

새하얀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봄날, 렘브란 애터는 어느 외딴 마을의 입구에서 눈을 뜬다.

*

“렘브란 씨! 안에 계세요?”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가 읽던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책을 식탁에 내려놓는다. 흘러내린 적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일어서는 와중에도 나무를 가볍게 울리는 소음은 이어진다. 저러다 손을 다치거나 문이 부서지겠다 싶었는지, 문으로 향하는 남자의 발걸음에 조급함이 깃든다. 이윽고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앞니 하나가 빠진 앳된 아이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씩 웃는다.

“집에 안 계신 줄 알고 그냥 갈뻔했어요! 아빠가 그러는데, 오늘 새 우물을 파는 날인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지? 하마터면 잊을뻔했네. 바로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줄래?”

남자, 렘브란은 몇 분 뒤 움직이기 편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아이가 기다리는 현관을 다시 밟는다. 그새 짧은 인내심을 다 썼는지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보고 피식 웃는 바람에 입에 물고 있던 머리끈이 떨어진다. 렘브란이 끈을 빠르게 한 손으로 낚아채고 날개뼈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린다.

“오래 기다렸지? 길 안내 부탁할게.”

“제게 맡겨주세요, 용사님!”

제발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부르지 말래도. 부끄러움이 한가득 담긴 사정은 깔끔하게 무시당한다. 더 말리지도 못하며 홧홧하게 달아오른 귀만 만지작거리는 렘브란 옆에서 아이는 신난 표정으로 한껏 조잘조잘 떠든다.

“곰도 한 방에 때려잡으셨으니 우물 파는 건 10분이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끝나고 저 검 연습 좀 봐주세요. 목검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기 전에는 진검에 손끝도 대지 않겠다고 엄마하고 약속했다고요.”

“내 얘기도 좀 들어줄래….”

이미 아이가 자기 말을 흘려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렘브란은 꿋꿋하게 대화를 잇는다. 곰을 때려잡았다는 건 엄청난 과장이고, 또 나 혼자 무찌른 것도 아니잖니. 렘브란의 말은 아이의 발랄한 목소리에 잘려 나간다.

“그치만 렘브란 씨가 없었다면 분명 누군가는 크게 다쳤을 거라고 모두 말하는걸요!”

이에 렘브란은 아이를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마을로 내려온 곰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준 이후로 이방인이었던 렘브란은 마을에 완전히 녹아들게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용사님 호칭이 평범하게 렘브란 씨로 돌아온 것에 만족하기로 하며 렘브란은 총총걸음으로 앞서가는 아이를 뒤따른다.

╳╳╳

평화로운 하루, 여느 날과 같은 일상.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

마을이 멸망하기 열흘 전이었다.

╳╳╳

발갛게 익은 얼굴로 렘브란 애터가 바닥에 주저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다. 올려묶은 머리카락이 목에 끈적하니 달라붙는다. 손부채질하는 렘브란에게 물통을 건네주며 삽에 몸을 기댄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수고했어, 렘브란 씨. 이렇게 갑자기 더워질 줄 알았다면 작업을 일찌감치 시작했을 텐데. 늦봄이라곤 전혀 안 믿어지네. 잠깐. 우리 점심은 아직이야?”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세우자 돌아오는 건 모르겠다는 표정과 으쓱이는 어깨뿐이다. 건너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원하는 정보를 물어온다.

“거래가 늦어지고 있는갑네. 왜, 오늘 캐러밴이 간만에 마을에 들린다고 했잖수. 구매할 물건이 그간 많이 밀렸을 테니 그거 처리하느라 점심시간 된 줄도 모르고 있을걸.”

졸지에 기대했던 빵과 말린 고기 대신 먼지만 씹어먹게 생긴 남자가 울상이 되자 렘브란이 물통을 마저 비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남자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렘브란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제가 가서 점심시간 되었다고 알릴게요. 어차피 점심 나르려면 그쪽도 손이 필요하긴 할 테고.”

우물 파느라 지쳤을 텐데 심부름까지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은 짧았고, 그래도 체력 좋은 젊은이가 생겨서 좋다며 남자는 렘브란의 등을 팡팡 친다. 그럼 수고해주쇼! 격려를 뒤로하고 렘브란은 어느덧 익숙해진 마을 길을 터덜터덜 걷는다.

작업지에서 점심을 준비해주기로 한 공용 식당까지는 멀지 않다. 식당이 가까워질수록 갓 구워진 고소한 빵 냄새가 배고픈 위장을 자극한다. 머리를 빼꼼 들이밀자 낯선 이들과 한창 흥정하던 마을 주민들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요, 금방 준비할게요. 캐러밴 상인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기꺼이 물러선다. 멀찍이 떨어진 렘브란에게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대화가 재개된다.

“우리도 온 김에 여기서 식사 해결하고 갑시다. 물건 판매도 식후경 아니겠소?”

“그럴까요? 시장 자리 알아보러 나간 사람들은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곧 올 것 같은데. 누구 한 명 보내서 데려오라고 할까?”

무심하게 그들의 대화를 흘려듣던 차에 주방으로 들어갔던 중년 여자가 다시 나타나 식당 문으로 종종걸음치며 손짓한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리어카에 가득 담긴 음식 봉지가 렘브란의 시야에 들어온다.

“물도 챙겨 넣어서 조엘 혼자 끌기 무거웠을 텐데, 렘브란 씨가 와줘서 다행이에요. 괜찮겠어요?”

“네, 충분히 끌고 갈 수 있어요.”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렘브란이 시원하게 답하자 여자의 눈이 샐쭉 휜다. 그럼 우리 아들내미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요. 주방에 일을 남겨두고 나왔는지 바삐 사라지는 여자에게 알겠다고 대답할 틈은 없다. 할 일이 사라진 렘브란은 리어카 안을 살펴보다 하늘로 눈을 돌린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다.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았던 하늘처럼. 그 이전의 기억은 안개 낀 듯 흐릿해 저 맑은 하늘은 렘브란이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이다. 그래서 그런지 렘브란은 시간 장소 상관없이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곤 한다. 그러다 지나가던 타인과 부딪히는 사고도 적지 않았지만.

—어이쿠. 등을 강타하는 충격에 렘브란이 비틀거리다 중심을 다잡는다. 또 정신 놓고 길에 서 있다가 뛰어오는 누군가와 부딪혔나보다 생각하며 렘브란은 사과하려 뒤돌려고 한다. 그러나 제 허리를 꽉 안고 있는 두 팔 때문에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다. 뛰어오다 발이 꼬여 넘어지기 직전 무작정 붙들었는지, 팔이 간간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렘브란이 조심스레 시선만 약간 돌려 묻는다.

“괜찮아요?”

시선 끝에 새카만 머리카락밖에 없지만, 말을 건 순간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허리를 감은 팔이 사라지자 렘브란은 상대가 더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뒤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구불구불 늘어뜨린 여자가 그곳에 서 있다. 렘브란 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여자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임은 확실하다. 아마 캐러밴과 같이 온 상인이겠지 싶어 렘브란은 적당히 건넬 사과의 말을 고른다.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먼저 들려온 건 여자의 모기 같은 속삭임이다. 렘브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자는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왔구나, 에버… 어? 무슨 일 있었어? 왜 울어?!”

여자를 쫓아 들어갈까 고민했던 것도 잠시, 식당 안쪽에서 놀라 웅성거리는 말소리에 렘브란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다. 타지에서 낯선 남자와 부딪혀서 많이 놀랐겠지만, 그래도 사과 한마디는 하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닫힌 문을 바라보는 렘브란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친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의 청년이 비죽 웃으며 리어카를 가리키고 있다.

“좋은 오후, 렘브란! 이거 끌고 가면 되는 거지?”

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쪽 손잡이를 잡는 조엘은 그의 도움 없이도 씩씩하게 떠날 것 같았기에 렘브란은 서둘러 다른 쪽 손잡이를 잡는다. 마을 아저씨들이 쫄쫄 굶고 있을 테니 서두르자는 말에 긍정하면서도, 렘브란의 회색 시선이 식당 창가에 길게 머무른다. 희뿌연 유리 너머로 그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비칠까 하여.

*

마을 주민들은 종종 렘브란에게 젊은이의 낭만이 없다고 놀리듯 얘기하곤 한다. 렘브란은 그를 부정하지 않고 웃어넘기기 일쑤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누군가는 그가 처한 상황이 모험기의 주인공답게 낭만적이라고 하겠지만, 렘브란 본인에게는 작금까지도 난감한 현실밖에 되지 않는다. 가족도, 재산도, 기억도 하나 없는, 자기 몸뚱이와 이름밖에 남지 않은 청년.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운명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렘브란은 그저 곤란하게 웃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렘브란은 자각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 흑발의 여자를 앞에 두고 찻잔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을 테니까.

“에버 씨, 맞죠?”

시장 천막 아래 여자를 발견하고 말을 건 건 충동에 가까웠지만, 여자의 놀란 얼굴이 저를 올려다보자, 렘브란은 잠깐의 후회조차 잊는다. 오늘도 쨍쨍한 햇빛 탓인지, 발갛게 상기된 볼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여자가 묻는다.

“맞아요, 혹시 저를….”

“어제 동료분들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실례였다면 사과드릴게요.”

아, 풀죽은 감탄사를 흘리며 여자의 눈동자에서 빛이 약간 꺼진다. 입 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지만 여자가 머리를 숙여 렘브란은 입술을 읽어내지 못한다. 제가 무언가 또 잘못했나 싶어 다시 사과하려던 차에 여자가 고개를 든다. 짙은 눈썹 아래 눈동자가 뜻 모를 다짐으로 단단해져 있다.

“에버라고 해요. 오히려 어제는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제대로 사과드릴 수 있게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렘브란 애터입니다. 평민 신분에 흔치 않게 붙는 성에도 여자, 에버는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망설임은 잠깐이고, 에버는 당돌하게 렘브란에게 사과의 뜻으로 차 한잔 대접해도 되는지 물어온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은 마을 주민들이 둘이 마주 보고 선 판매대를 지나치며 휘파람을 부르자 에버의 얼굴이 또 달아오른다.

아무리 여자가 곤란해 보여도 렘브란은 어제 만난 타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위인이 아니다. 그러나 입을 타고 나오는 건 예의 바른 거절이 아닌 긍정이다.

“그래요.”

그렇게 렘브란과 에버는 마을의 유일한 찻집에 앉아 어색하게 찻잔만 응시한다. 데이트 신청에 모든 용기를 다 썼는지, 에버는 렘브란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무릎 위로 잡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본다. 결국 렘브란이 먼저 부드럽게 대화의 물꼬를 튼다.

“캐러밴의 상인이신 것 같던데, 이 마을을 방문하는 건 처음인가요?”

“네? 네… 캐러밴에 합류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어요.”

몇 개의 가벼운 질문이 오간다. 에버의 어깨에서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보여 렘브란은 조그맣게 웃다가 놀라 입에 손을 가져다 댄다. 에버뿐만 아닌 렘브란도 어느덧 상대방을 편하게 바라보고 있다. 단 몇 마디 나눴다고 이토록 좁혀진 거리가 신기해 렘브란은 홀린 듯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에버가 웃는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는다.

“당신의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사람이요.”

*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이 자신의 모든 기억을 앗아가는 대신 에버를 만나게 해준 거라면. 그렇다면 신에게 기꺼이 감사하겠다고 렘브란은 생각한다.

시간과 애정의 깊이에 관계성은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걸 에버를 통해서 깨닫는다. 고작 아흐레 말을 섞은 상대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면 누구나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보겠지. 본인 역시 타인의 이야기였으면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비슷한 나이의 젊은 훈남 훈녀가 보기 좋다며 달달한 분위기를 부추기던 마을 주민들도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얼떨떨한 눈빛으로 둘을 보곤 한다.

아무래도 좋다. 렘브란은 한쪽 무릎을 꿇는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 온 건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를 부담스럽게 느끼실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오늘 당신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어요.”

열흘을 마을에 머무르고 캐러밴과 함께 에버가 떠나는 날, 렘브란은 에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에버의 얼굴에 서린 게 당혹감도, 긴장감도 아닌 설렘이라는 사실이 용기를 북돋는다.

“제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임을 알아요. 당신을 붙잡는 게 염치없는 일인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는 늘 렘브란 앞에서 울고 싶은 얼굴로 웃는다. 렘브란은 두 손으로 서늘해진 에버의 손을 잡는다.

“당신을 사랑해요, 에버. 저와 결혼해서 에버 애터가 되어주세요.”

에버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다가 결국 흘러내린다. 소리 내 울지는 않는다. 간간이 들썩이는 가슴이 에버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대신한다.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가, 한참을 반복하던 에버가 드디어 입을 연다. 렘브란의 온 집중력이 에버에게 쏠린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에버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먼 곳에서 희미한 비명이 들린다.

에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서야 렘브란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손에서 힘이 빠져 에버의 온기가 저에게서 떨어진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렘브란이 알던 유일한 작은 세상이 검은 화염에 휩싸여 있다. 막 형체를 갖춰가던 새로운 우물도, 신세를 졌던 이장님의 집도, 에버와 처음 부딪혔던 식당도 재로 타들어 간다. 웃으며 제게 물통을 건네주던 아저씨도, 리어카를 같이 끌었던 조엘도, 저를 용사님이라 부르며 동경하던 아이도, 모두.

그 참혹한 광경 위로 해를 가리는 커다란 그림자가 깔린다. 렘브란은 딱딱하게 굳은 목을 가까스로 젖혀 푸른색이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태양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의 용이 있다.

╳╳╳

나는 저 용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손을 잡는다. 거대한 재앙을 올려다보자 차가운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낸 풍경은 어떻습니까?

들릴 리 없는 뱀 같은 속삭임이 멸망의 열기를 타고 핏기가 가신 뺨에 닿는다.

╳╳╳

렘브란은 달린다. 에버의 손을 꼭 붙잡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린다. 깨어날 수 없는 악몽 같다. 기억 없이 깨어난 후로 모든 것에 현실감이 부족해 어딘가 붕 뜬 느낌이었지만, 작금은 궤가 다르다.

어떻게 마을에서 벗어나 숲까지 도망쳤는지는 흐릿하다. 정신을 차리니 한쪽에 계곡으로 떨어지는 절벽을 두고 폐가 터질 듯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의 손을 놓고 에버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다리에 흙이 묻으니 털어줘야 하는데, 창백한 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데. 렘브란은 무거운 다리를 간신히 구부려 에버와 눈을 맞춘다. 젖은 눈으로 렘브란을 바라보던 에버가 시선을 떨군다.

“…미안해요.”

당신이 미안해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물음은 굉음에 묻힌다. 힘없이 우수수 쓰러지는 나무 사이로 어둠이 덮친다. 렘브란은 에버의 손을 잡고 빠르게 일어서지만, 흔들리는 발밑에 다시 몸의 중심이 절벽으로 쏠린다.

잠깐 손에 힘이 풀린 사이 땅바닥에 금이 간다. 무너지는 발아래의 중력이 아찔하다. 간절하게 손을 뻗지만, 온기는 이미 닿지 못할 거리로 멀어진다. 장막처럼 하늘을 덮은 황금 용, 점점 위로 멀어져가는 에버의 절망하는 얼굴이 흐릿해진다.

추락은 한순간이다. 고통과 찾아온 하얀 빛이 멀어지는 의식을 감싼다.

*

*

“—기요! 저기요, 괜찮아요? 정신이 들어요?”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시원하기보단 차가운 흙바닥이다. 고통의 기억에 매몰되어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워 손끝만 움찔거린다. 디딘 땅이 사라지던 느낌, 튀어나온 돌부리에 뼈가 부서지던 감각, 얼음장 같은 계곡물이 몸을 삼키던 온도까지 전부 선명하다. 하늘을 뒤덮은 용과 저를 보며 절규하던 누군가의 실루엣도.

렘브란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다급한 질문부터 나온다.

“혹시, 혹시 근처에 사람 못 보셨어요? 용은요? 용은 어떻게 됐어요?”

“용? 꿈이라도 꾸셨어요? 사람이라면, 근래 이방인은 당신 빼고 없었는데요.”

제게 답해주는 이가 당황하건 말건 렘브란은 그리운 이를 찾아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다.

절벽 계곡에 떠내려왔다면 지금 보이는 풍경이 현실일 리 없다. 울창한 숲이 아닌 바람에 살랑이는 아담한 덤불, 야생동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통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 오래 밟아 만들어진 사람이 다니는 흙길. 여느 데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을의 입구다.

렘브란이 손을 올려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부러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서 묻어나오는 물기도, 피의 흔적도 없다.

마치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게 없던 일이었단 듯이.

“…저기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면 잠깐 마을에 들러 약사라도 보고 가세요. 이대로 보내면 큰일 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자신을 염려하는 제의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렘브란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그저 저를 반강제로 이끄는 오지랖 넓은 손에 끌려간다. 꺼내지 못한 누군가의 이름이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혀끝에서 흩어진다.

새하얀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봄날, 렘브란 애터는 어느 외딴 마을의 입구에서 눈을 뜬다.

*

이 마을은 렘브란이 기억하는 마을과 굉장히 비슷하다. 마을 한가운데 주기적으로 시장이 열리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에 익숙하며, 이방인인 렘브란을 조금 경계할지언정 모질게 대하지 않는다. 푼돈조차도 없는 그를 불쌍히 여겨 주민들은 잡일이나 도와달라며 렘브란을 고용하고, 한 노인은 비는 방이 있다며 선뜻 임시 거처를 내주어 렘브란은 얼떨결에 마을에 눌러앉는다.

처음 기억을 잃고 눈을 떴을 때와 상황이 기이하게 흡사해서 렘브란은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게 아닌가 한동안 의심한다. 하지만 이 마을 옆엔 숲 대신 커다란 호수가 있고, 식당을 운영하는 조엘의 어머니도, 일을 돕는 조엘도 없다. 전에 살던 마을과 다른 점을 비교하며 멍때리고 있으면 신세 지는 집주인이 호통을 치며 나타난다.

“팔다리 멀쩡한 젊은이가 뭐 그리 힘없이 맹하니 서 있기만 해? 할 일 없으면 와서 검이나 들어!”

노인은 젊은 시절 수도에서 기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고향 마을로 내려와 흰머리 성성한 나이에도 마을의 경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노인의 집에서 머무르게 된 이유엔 방이 남는다는 것뿐만이 아닌, 렘브란이 마을에 해를 끼칠 사람인지 감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테다. 한 달이나 지난 지금은 그를 보는 시선에 경계가 사라졌지만, 한심해하는 눈빛이 깃들었음을 렘브란은 모르지 않는다.

“손잡이는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이게 뭔 장작떼기인 줄 알어? 목검이라고 해도 검은 검으로 대우해라, 욘석아. 집중해!”

요청하지도 않았지만, 노인은 언젠가부터 렘브란이 잡일을 하고 있지 않은 시간에 그를 붙잡고 검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처음엔 받아들일 여유도 없어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가 노인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더랬지. 매운 손맛에 머리를 감싸 쥔 렘브란에게 노인이 목검을 던져주며 버럭 화를 낸다.

“세상 잃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뭐가 해결돼? 그럴 시간에 자기 몸 하나 지킬 수 있게 검이라도 배워! 아무짝에 쓸모없는 고민 치우는 덴 검술만 한 게 없지.”

노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온 근육이 비명 지를 정도로 몸을 혹사하고 있으면 머릿속의 혼란이 잠재워진다. 올려묶은 머리카락 끝까지 푹 젖을 때쯤이면 기억 한편에 도사리는 황금 용을 떠올릴 힘도 없다.

혹시 근방 마을에 용이 나타났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나요? 이틀이나 꼬박 이어진 끈질긴 물음에 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용의 비늘 하나 본 적 없어, 그런 얘기 들은 적도 없고. 그런데 요즘도 용이 남아있긴 한가? 거 내 증조할머니가 어렸을 때 용을 만났다는 무용담은 들었었는데. 아니, 이 순진한 사람이 그 허풍쟁이 할머니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거야? 거짓 한 점 없는 진솔한 답변이 쌓여 렘브란의 포기를 만들어낸다.

잊을 수 있다. 용도, 전에 살던 마을도, 저를 기꺼이 받아들여 준 친절한 사람들도.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렘브란을 괴롭히는 잔재가 있다. 새 출발을 결심하려고 해도 계속 희미해진 기억을 돌아보게 하는 존재가 있다. 낙하하는 순간 잡지 못한 온기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목소리가.

“젊은이 체력이 그래서 쓰겠어? 다 쉬었으면 얼렁 일어나, 땅바닥에 퍼질러있지 말고.”

노인의 호통에 렘브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 앉는다. 저만큼 격하게 움직였음에도 노인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렘브란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찬다.

“내가 저 나이 때는 저리 허약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건 어르신 기준이죠. 어르신은 왕실 기사단의 전설이셨잖아요. 아직 어르신 따라갈 후임이 없다며 은퇴하지 말라고 그렇게 잡았다면서요?”

쾌활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간다. 마을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몸을 반쯤 일으키던 렘브란을 가리킨다.

“렘브란 씨가 오늘 제 창고 문짝을 고쳐주기로 했는데 반 시체를 만들어놓으면 어떡해요. 망치 들지도 못하겠네.”

“그 정도는 아닌데요….”

호들갑을 떨며 아주머니는 렘브란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려준다.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아주머니 옆에서 걸으며 렘브란은 수다의 청자가 되어준다.

“어휴, 검 실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는데 저 괴팍한 성질도 세상 제일이어서 말이지. 렘브란 씨가 그래도 잘 받아줘서 다행이지 뭐예요. 딸이 수도에 가 있는 동안 쓸쓸해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마치 신의 선물처럼 렘브란 씨가 와줘서 참 좋네요.”

“어르신에게 따님이 있었나요?”

렘브란에겐 금시초문이지만 아주머니는 날씨 이야기를 하듯 여상하게 웃어넘긴다. 어머, 이 노인네가 얘기 안 해줬어요? 하긴,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긴 하지. 멀뚱히 서 있는 렘브란에게 뒤늦은 설명이 돌아온다.

“친딸은 아니고, 수도에서 만난 아이를 입양했다고 해요. 은퇴하면서 딸도 같이 내려왔고, 이렇게 가끔 일 때문에 수도를 오가곤 하죠. 우리 마을이 수도에서 거리가 있다 보니 보통 한 달씩 자리를 비우곤 하는데, 곧 돌아올걸요?”

어쩌면 오늘내일쯤 만나볼 수도 있겠네. 렘브란 씨와 비슷한 나이일 테니 친하게 지내봐요. 창고에 도착한 아주머니가 도구를 건네주며 눈을 찡긋하고 사라진다. 그 속에 숨은 장난기를 모른 척 넘기며 렘브란은 주어진 일에 집중한다.

여태 마을의 미혼 여자들과 저를 엮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렘브란은 그 모든 작업을 기분 나쁘지 않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한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냐며 슬쩍 물어오는 이에게 렘브란은 애매한 미소만 지었더랬지. 그냥 자기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다고 둘러대는 바람에 전 삶과 다르게 낭만적인 청년이라 소문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그를 정정하기 귀찮아 렘브란은 소문을 방치한다. 어차피 렘브란을 놀리는 게 시들해지면 다들 잊어버릴 가벼운 사건이다.

이번에도 다를 것 없으리라고 렘브란은 생각한다. 작은 언덕에 위치한 노인의 집으로 돌아가는 비탈길을 오르며 렘브란은 잠시 상념에 빠져든다. 익숙한 그리움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온다. 저녁을 준비하기 전에 다시 검이라도 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이곳에서 듣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와 멈춰 선다.

현관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다. 저 사람이 곧 돌아온다던 노인의 딸인가 싶어 인사라도 해야 하나 주춤하지만, 여자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를 먼저 돌아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렘브란은 숨 쉬는 것을 잊는다.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여자의 짙은 눈썹 아래 어두운 눈동자가 웃음 짓듯 부드럽게 휘지만, 그 표정이 묘하게 서글프다. 다가오려는 듯 여자의 몸이 움찔하지만, 이내 여자는 자리에 서서 고개만 꾸벅 숙인다.

“렘브란 씨 맞지요? 이야기 들었어요.”

소리를 들었는지 노인이 안쪽에서 머리를 내밀어 렘브란에게 인상을 쓰며 손짓하고 여자에게 잔소리한다.

“빨리도 온다, 욘석아. 와서 불 피울 준비나 해. 에버, 너도 서 있지만 말고 얼렁 들어와.”

에버. 짧은 음절을 찬찬히 곱씹고 있자 노인이 버럭 소리 지른다. 귀먹었어? 여자가 노인을 달래서 들여보내고 고개를 돌려 렘브란과 눈을 맞춘다.

마음속에 부평초처럼 떠돌던 감정이 갑자기 자리를 찾은 기분에 렘브란은 눈물이 날 것 같다. 여자가 들어오라고,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

다시 주어진 기적 같은 만남. 이번 기회를 날리지 않겠다고 나는 몇 번이고 다짐한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서도, 나를 기꺼이 사랑해주었듯이.

╳╳╳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다. 에버와 재회하고 열닷새가 지나자 옆 옆 마을에서 소문이 흘러온다. 황금 용이 나타나 마을을 하나씩 불사르며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렘브란은 창백해진 얼굴로 마을 주민들의 대피를 설득하지만, 그들은 처음엔 뜬소문이라 흘려듣는다. 에버의 손을 붙잡고 우리만이라도 도피하자고 애원할까 고뇌해도 에버가 노인을 두고 그와 떠날 것 같지 않다.

“믿어요, 렘브란.”

상황은 바뀌지 않지만, 그 말이 위안 아닌 위안이 된다. 떨리는 손을 감싸 쥐는 온기에 렘브란은 단어를 오열하듯이 토해낸다.

“에버, 당신을 사랑해요.”

절절한 볼품없는 고백에 에버는 당황하지 않는다. 렘브란의 손을 놓지도 않는다. 렘브란이 눈을 들자 마주 보이는 것은 젖은 채로 빛나는 에버의 눈동자다.

“알아요.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진심을 담은 대답은 짧은 환희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 재앙이 도래한다. 황금 용의 그림자가 마을 위로 드리운다. 은퇴한 하얀 머리카락의 노인은 검을 들고 나서며 렘브란에게 명령한다. 에버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라고.

에버는 운다. 공포와 절망을 담은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노인은 부러 보지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렘브란도 정이 들었는지 발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그런 둘에게 노인은 화를 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용의 가벼운 숨결에 마을이 불에 잠긴다. 렘브란은 하얗게 질린 에버의 손을 힘주어 쥔다. 그리고 도망친다. 이번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도망이라는 현실에 분해하면서도, 렘브란은 최선을 다해 재해를 피해 에버와 달아난다.

그러나 멀리는 가지 못한다. 마을 입구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무너진 건물이 길을 막는다. 밤의 어둠처럼 번지는 검은 화염이 맨살에 따갑게 튄다. 옆에서 에버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린다. 에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자 노인의 무너지는 형체가 보인다. 에버의 몸이 움찔하자 손을 더 꽉 쥔다. 가족을 잃은 에버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나, 가봐야 허무한 죽음밖에 못 되리라.

마을 밖으로 나가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그리 말하려 렘브란은 에버와 시선을 맞춘다. 에버의 초점이 렘브란을 비껴간다. 검은 눈동자가 커지는 동시에 몸이 뒤로 넘어간다. 에버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밀쳤다는 걸 바닥을 짚고서야 깨닫는다. 눈앞은 불타는 잔해뿐이다. 에버의 이름을 외치는 렘브란의 목소리는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에 삼켜진다.

사위가 어두워진다.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용의 눈깔이 보인다. 해를 방불케 하는 찬란한 금색 눈이 소름 돋게 차갑다. 저를 비웃는듯한 눈동자에 홀려 렘브란은 용이 거대한 입을 벌리는 걸 멍하니 바라만 본다.

검은 화염이 폭풍처럼 렘브란을 삼킨다.

*

*

에버를 만나게 되면 렘브란은 반드시 사랑에 빠진다. 렘브란은 다시 새로운 마을 입구에서 눈을 뜬다. 비슷한 풍경, 하지만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세상.

마을에 머물러도 에버를 만나고, 마을을 떠나도 에버와 마주친다.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에버를 눈에 담는 순간 속절없이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에버의 울 것 같은 미소를 앞에 두고 사랑을 고백한다. 멸망하는 세상의 끝자락에서.

참으로 지독한 인연이라고 렘브란은 생각한다. 반복되는 죽음을 거치며 지쳐가는 마음이 에버 하나만큼을 놓지 못한다. 검은 머리의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도 섞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도 늘 수포가 된다. 렘브란은 에버를 절대 모질게 밀어내지 못한다.

“용사님, 오늘도 연인분과 같이 계시네요! 보기 참 좋아요.”

한때 농담으로 마을의 용사님이라 불리던 렘브란은 이제 곰 따위는 눈 감고도 해치울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발악으로 렘브란은 노인이 기초를 다져준 검술을 이 악물고 연마한다. 그럼에도 황금 용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항상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때는 불에 타서. 어떤 때는 목이 꺾여서. 어떤 때는 용의 발밑에 깔려서.

몇 번의 죽음을 겪고, 몇 번째의 삶을 살았는지 잊은 지 오래다. 만나는 이마다 젊은 사람이 산전수전 겪은 노인의 표정을 짓는다고 말하면 렘브란은 말없이 웃는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에버에게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버가 자신과 눈을 맞춰올 때면, 렘브란은 그만이 자신의 전부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 렘브란 애터는 그 손을 놓지 못한다. 결국 이번 생에도 다르지 않다.

“에버, 저와 결혼해서 에버 애터가 되어줘요.”

어찌하여 한시적인 감정을 위해 멸망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어찌하여 영원한 저주의 굴레에 갇혀버린 건지. 에버는 늘 그렇듯이 오열하듯 울음을 터트리며 웃는다. 황금 용이 지배하는 하늘 아래에서 렘브란은 창백하게 젖은 볼에 입 맞춘다.

*

*

왕실에서 하사받은 검을 옆에 차고 폐허가 된 들판을 본다. 식지 않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에 길게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먼 옛날, 존재가 다 한 시간에서 렘브란은 스러져간 마을을 보며 가슴 아파했겠지만, 이제는 건조한 눈으로 불타버린 땅을 디딜 수 있다. 발아래 밟히는 것이 재가 되어버린 타인의 유해라 할지라도.

그런 렘브란을 완벽한 용사로 우러러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답지 않다고 꺼리는 이들도 있다. 황금 용을 토벌하러 나선 토벌대도 그들을 이끄는 렘브란에게 호의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들의 눈에서 보이는 경계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나, 렘브란은 그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비단 황금 용,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맞이하러 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디에 있는 걸까.’

죽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 두 달 가까이 흘렀지만, 에버는 렘브란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황금 용이 나타나 마을을 하나둘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검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허전함을 견디다 못한 렘브란이 먼저 에버를 찾아 나서지만, 신분패를 요구하는 병사와 시비가 붙어 오히려 감옥에 투옥될뻔한다. 출중한 검술이 지나가던 왕실 기사의 눈에 띄어 토벌대 후보로 불려 간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렘브란은 쓰게 고민한다.

황금 용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 왕의 선포에 렘브란은 사람도 찾아줄 수 있냐고 묻지 않는다. 수십번 죽은 기억은 용과 대적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게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승낙한 까닭은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렘브란이 불복했다면 에버를 찾아 나설 자유마저 빼앗겼을 테니까.

어차피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이 또한 무슨 상관이랴 싶겠지만, 렘브란에게 남은 유일한 행복이 에버인 이상, 그 어떤 바보짓도 불가항력이다.

그게 제 발로 용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자살행위일지라도.

“저 마을의 상공에서 황금 용이 이틀 전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마을과 연락이 끊겼고….”

렘브란의 반응이 없자 말을 꺼낸 일행이 눈치를 살핀다.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예감한 다른 이들이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이어지는 침묵에 렘브란이 들판 너머를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계속하라고 눈짓한다. 그는 렘브란의 무감한 회색 눈동자가 닿자 움츠러든다.

“…생명 감지 마법을 쓴 결과, 생존자가 있다고 합니다. 용이 인질을 잡은 것 같습니다.”

인질. 생경한 단어에 렘브란의 표정이 살짝 깨진다. 전에도 용이 인질을 잡은 적이 있던가?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은 모른다지만, 적어도 렘브란이 아는 한 용이 지나간 마을에선 생존자가 나온 적이 없다. 확실한 정보인가요? 렘브란의 물음에 토벌대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에 확인을 마쳤습니다. 생존자 수도 상당히 많습니다.”

마법사의 얼굴에 간절함과 잔인한 희망이 뒤섞여있다. 저 마을에 가족이 있다고 했던가. 일행이 나누는 개인적인 대화에 끼는 일이 없었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절망을 앞에 두고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의 눈은 몰라볼 수 없다.

하지만 그뿐이다. 인질 구조를 우선시하라는 지시를 바라는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타인의 고통에 마음 써주기엔 렘브란은 너무 지쳐있다. 그렇기에 단 한마디를 끝으로 등을 돌린다.

“해가 떨어지는 시기에 맞춰 마을로 진입합니다. 준비하세요.”

피도 눈물도 없다며 작게 들려오는 욕설은 무시한다.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다. 수많은 삶을 반복하며 한 인간이 흘릴 수 있는 피와 눈물의 양은 이미 전부 흘려버렸을 테니까.

╳╳╳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욕심임을 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이기적인 소원임을 알고 있다.

당신이 다음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하얀 문을 건너며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나를 보는 당신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지어지면, 나는 또다시 무너지듯 안도하고 말 테지.

그러나 다음 생에는 당신이 부디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당신이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정했던 미소를 되찾을 수 있도록.

╳╳╳

렘브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에버와 재회한다. 그것은 황금 용에 의한 죽음과 더불어 렘브란의 세상을 이루는 두 가지 법칙이다.

용의 고함이 만들어낸 세찬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려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그 창백한 인상을, 짙은 눈썹과 어두운 눈동자를 렘브란이 몰라볼 리 없다. 렘브란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게 용과 계약한 마녀인가 보네요.”

왜 에버가 용의 곁에 서 있는지다.

“용을 부리며 마을을 태우라 지시하는 여자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모양입니다. 용사님, 어떻게 할까요?”

잘못 본 게 틀림없다고, 아니면 무언가 오해가 있으리라는 말은 에버가 고개를 돌려 용의 다리에 손을 얹자 먼지처럼 흩어진다. 포악하던 용은 손길이 닿아도 에버를 불태우긴커녕 조용히 내려다본다. 옆얼굴의 입술이 달싹인다. 렘브란이 에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마법사에게 묻는다.

“감지 마법 발동 중인가요? 방금 에… 저 여자가 뭐라고 했나요?”

마법사의 미간에 집중으로 주름이 진다. 나오는 말은 짧고 간결하다.

“약속은 지켜요, 랍니다.”

무슨 약속? 렘브란에게 물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용이 다시 포효한 탓이다. 숨결 끝에 검은 불씨가 섞여 나와 광장에 도살장의 양 떼처럼 모인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마법사가 다급하게 렘브란의 어깨를 붙잡는다.

“인질부터 구합시다. 지시를 내려주세요.”

렘브란의 머릿속에 여러 형상이 어지럽게 떠돈다. 저를 불태우던 황금 용, 저를 용사로 추대하며 우러러보던 사람들, 저에게 살려달라 구걸하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 저를 보며 무해하게 웃던 에버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간다.

타인의 목숨이 귀중함을 렘브란은 모르지 않는다.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선택이 오랫동안 심장에 남아 저를 괴롭히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렘브란에겐 저울의 반대편에 무엇이 걸릴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

“용을 견제하면서 인질이 다치지 않게 구해내세요. 마법사님이 공격 마법으로 최대한 주의를 끌어주시고요. 저는 저 여자와 대화를 해봐야겠습니다.”

“용사님?”

당황하며 저를 부르는 일행을 무시하고 렘브란은 몸을 돌린다. 그들이 제가 내린 지시를 따르는지 확인할 여유조차 없다. 곧장 저를 향하는 렘브란을 보고 에버의 눈이 동그래진다.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용의 날개를 인지하자 에버의 입술이 비명처럼 열리지만, 렘브란은 검을 들어 가볍게 가시가 박힌 날개를 흘려낸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친다. 왕실 소속 가장 뛰어난 마법사의 공격을 황금 용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받아 낸다. 어스름한 황혼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 비늘엔 흠집 하나 없다. 절망의 탄식이 들린다.

거대한 용의 몸집을 파고들어 렘브란은 에버 앞으로 뛰어든다. 장갑조차 끼지 않은 맨손으로 에버의 훤히 드러난 손목을 붙잡는다. 그 순간, 둘의 머리 위에서 용이 숨을 들이쉰다.

하늘에는 밤의 장막이 깔리고, 땅에는 검은 화염이 생명을 뒤덮는다. 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는 산채로 불타는 비명에 의해 묻힌다.

렘브란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돌아가려는 머리를 붙잡는 건 에버의 두 손이다. 에버의 입 모양은 명확하다. 돌아보지 마요. 연약한 힘을 뿌리치기는 쉽지만, 렘브란은 에버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머리 위에서 기이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렘브란은 눈동자만 굴려 시선을 위로 돌린다. 황금 용이 둘을 내려다보고 있다. 짐승답지 않은 비웃음을 띠고서, 동시에 비인간적인 흥미를 담고서.

용의 날갯짓 한 번에 거센 바람이 인다. 렘브란은 팔로 머리를 감싼다. 어느샌가 머리끈이 끊어져 렘브란의 긴 적갈색 머리카락이 시야 앞에 커튼처럼 휘날린다. 바람이 잦아들자 렘브란은 고개를 든다.

황금 용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번에는 왜 그를 살려두고 떠났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어 뒤늦게 얼굴에 날카로운 고통이 스치는 걸 알아챈다. 손을 올려 뺨을 훔치니 새빨간 피가 묻어나온다. 이번에 뒤를 돌아보는 렘브란을 에버는 말리지 못한다. 먼지와 흙, 피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새까매진 시체를 끌어안고 핏발선 눈으로 렘브란을 노려본다.

“당신도 저 마녀와 한패였습니까? 왜 우리를 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까? 왜!!”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살아남은 이들은 분노한다. 선택의 끝에 남은 것은 풀리지 않은 의문과 타당한 적의뿐. 공포에서 깨어나 상실을 마주한 사람들의 눈에 살심이 깃든다. 그 끝에 자신뿐만 아닌 에버까지 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몸이 먼저 움직인다.

렘브란은 에버의 손을 잡고 도망친다.

*

“…이거 놔요.”

마법사까지 떨쳐내는 건 힘들었으나, 깊은 숲속까지 도망치자 느껴지는 인기척은 단둘밖에 없다. 렘브란 본인, 그리고 에버. 에버의 떨리는 요구에 렘브란은 순순히 쥐고 있던 손을 놓는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는다. 고개를 숙인 에버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마른 흙 위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굵은 눈물은 선명하다.

아직 물어야 할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왜 용과 같이 있었는지, 용과 무엇을 약속한 건지, 정말 인류를 배신한 것이라면 왜 자신을 보호하려 했는지.

그러나 렘브란은 침묵한다.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버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공허하던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오히려 숨이 넘어갈 듯 오열하는 건 에버다.

“왜 그랬어요. 당신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으로 이런 선택을 했는데….”

비단 잔인한 선택을 내린 이는 렘브란뿐이 아니었나 보다. 렘브란이 조용히 묻는다.

“후회하나요?”

에버는 말이 없다. 렘브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엔 지침이 묻어있지만 단단하다.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하나다.

“에버, 당신을 사랑해요.”

누가 봐도 미쳤다고 할 터다. 그러나 그것이 렘브란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에버는 오랫동안 젖은 눈으로 렘브란을 바라본다.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 탓인지, 에버의 뒤에서 하얀 후광이 비춰 보인다.

“알아요. 그래서 당신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요.”

렘브란은 눈을 깜빡인다. 착각이 아니다. 하얀빛이 에버를 집어삼킨다. 에버를 향해 손을 뻗지만, 그는 손을 마주 내밀어주지 않는다.

렘브란은 이번엔 망설이지 않는다.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 그가 에버를 껴안는다.

*

새하얀 빛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렘브란 애터는 눈을 뜬다.

이 상황을 렘브란은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황하지 않고 몸을 일으킨다. 목숨을 건 도주를 감행하며 무리를 호소하던 폐도, 다리도 멀쩡하다. 손으로 뺨을 문질러도 상처 없는 매끈한 얼굴이다. 언제나 처음 새롭게 깨어났을 때처럼, 그 전의 시간은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한 가지가 다르다. 빛이 가신 후에 보이는 이곳은 어느 마을 입구가 아니다. 옆에서 쓰러진 이방인에게 말을 걸어주던 친절한 사람들도 없이 혼자다. 당연히 에버도 보이지 않는다. 렘브란은 자신이 짚고 있던 바닥을 내려다본다. 야외의 흙길이 아닌 차가운 대리석이다. 눈을 천천히 들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복도다. 성인 다섯 명은 부딪히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복도는 해가 내려간 하늘처럼 어둑하지만, 양쪽 벽면에 끝없이 줄지은 문은 문제없이 눈에 들어온다. 문 뒤에서 하나같이 빛이 새어 나오는 까닭이다.

하얀빛, 또는 검은빛. 특정한 규칙도 없고, 문에 표시도 없다. 렘브란이 가장 가까이 있는 문손잡이를 잡는다. 검은빛이 새어 나오는 문은 잠겨있지 않다. 부드럽게 돌아가는 손잡이를 보는 렘브란의 눈에 경계심이 깃든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복도에 다른 이의 인기척은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에버를 찾기 위해서는 어느 문이든 열어볼 필요가 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예상했던 검은빛이 아니다. 회색으로 변한 하늘. 새카맣게 타버린 땅.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폐허.

그리고 바스러지는 잔해의 한가운데 자리한 짓다 만 우물.

렘브란은 저 우물을 알고 있다. 수많은 기억이 쌓이고 흘러가도, 그가 잊지 않으려 매달리는 것은 전부 에버에게로 귀결되어 있기에 에버를 처음 만난 날을 그가 잊을 리 없다. 더불어 그 배경이 되었던 마을까지도.

사라졌다고 생각한 시간이 왜 제 눈앞에 있는지 렘브란은 모른다. 마법에 홀린 듯 렘브란은 문 너머로 손을 뻗는다. 그리고 강제로 저지된다.

검은빛이 문을 통과하려는 렘브란의 손을 단단한 벽처럼 막아선다. 힘 있게 밀어 봐도 소용이 없다. 렘브란이 손을 거두고 몸을 던져 돌파해보려 어깨에 힘을 준다.

“소용없을걸요. 그 문의 연결은 이미 차단되어 있거든요.”

렘브란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며 습관적으로 검을 차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다. 허공만 잡혀 당황한 것도 잠시, 렘브란은 방어적인 자세로 몸을 낮춘다. 제 앞에 선 이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믿거나 말거나 전 당신의 선택을 도우러 온 이곳의 관리자니까요.”

“관리자?”

자신을 관리자라 지칭한 이가 렘브란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색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머리 위에 놓인 광대 모자가 흐트러진다. 모자를 고쳐 쓰며 렘브란을 바라보는 이의 황금색 시선이 기이하다.

“네, 이 소박한 복도의 관리자이죠. 궁금하신 게 있다면 제게 물어봐 주시면 된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발랄하다. 여성인지 남성인지조차 추측하지 못하고, 나이대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는 렘브란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다는 듯 두 손을 허공에 들고 있다. 하지만 렘브란의 긴장된 몸은 풀리지 않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마치 호랑이 앞에 굳은 토끼가 된 것처럼.

“물어보고 싶은 게 없다면, 문이나 하나 선택하겠어요?”

“…혹시, 이곳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여성 못 봤습니까.”

“봤지요.”

태평한 긍정에 렘브란은 잠시 멈칫한다. 그리고 본능적인 두려움도 잊고 관리자와 거리를 좁힌다.

“어디로 갔습니까?”

관리자의 입에 걸린 미소가 찢어지듯 커진다. 그가 광대처럼 과장되게 두 팔을 활짝 벌린다.

“그야 이 많은 문 중 하나로 나갔겠지요.”

진지하지 못한 어투에 렘브란은 그가 저를 놀리는 건가 싶어 확 인상을 쓴다. 어이구 무서워라, 관리자는 너스레를 떨며 손을 등 뒤로 감춘다.

“그 여성분의 문 선택에 제가 관여하진 않아서요. 다만 힌트를 드리자면,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분도 검은빛의 문은 통과할 수 없답니다.”

자, 그럼 당신은 어떤 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다시 묻는 관리자를 렘브란은 무시하고 돌아선다. 긴장으로 목뒤가 굳어있지만, 렘브란은 에버를 떠올리며 억지로 발을 움직인다.

그렇게 한참 복도를 거닌다. 모든 문은 잠겨있지 않고, 모든 검은빛의 문은 통과하지 못한다. 하얀빛의 문은 렘브란을 막지 않지만, 그 안으로 발을 디디면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그를 붙든다. 혹시나 에버가 남겨놓은 표식이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은 셀 수 없는 문을 거칠수록 사그라든다. 지쳐가는 렘브란의 눈이 어느 한 문에 닿는다.

그 문에서는 빛이 나오지 않는다. 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어도 빛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여태 지나온 문과 다른 점이 없다. 렘브란이 손을 손잡이 위로 올리려다 망설인다. 제 머리 뒤에 박히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 탓이다.

“…이 문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수많은 문을 열어보는 동안 관리자는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터라, 이 문이 함정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어 렘브란은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씩 웃고 있는 관리자가 순순히 답을 준다.

“반복되는 생의 끝이 있지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대답이다. 하지만 그 의미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렘브란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말해드렸을 텐데요? 이 복도의 관리자라고.”

그를 닦달하고 협박해도 그 이상의 답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입을 여는 순간 관리자가 커다랗게 한숨을 쉰다.

“어차피 문을 골라 나가면 이곳에서의 기억은 또 깡그리 잊을 텐데, 물어서 뭐 하나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는 제 입만 아프지.”

가벼운 투덜거림에서 렘브란은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는다. 렘브란은 오묘한 빛을 띠는 관리자의 금색 눈동자를 응시하다 툭 내뱉는다.

“제가 이곳에 오는 게 처음이 아니군요.”

물음은 아니다. 긍정도 없다. 그러나 기억은 없어도 제 추측이 옳다는 확신은 든다. 렘브란은 색다른 감정을 담아 빛없는 문을 바라본다.

“이 문으로 나가면, 더는 반복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결말. 이 문 뒤에 끝없이 이어지던 굴레의 결말이 있다. 고통의 끝이 있다. 렘브란은 반사적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하지만 당신이 찾는 그 사람과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어떠한 결박 마법보다 효과적인 말이 렘브란의 손을 멈춘다. 다시 돌아본 관리자의 얼굴은 전과 다르게 진지하다. 말없이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에 관리자가 광대 모자를 매만진다.

“끝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삶의 끝이 있는 곳에 인연의 끝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나요?”

렘브란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과거의 선택이 어떠했는지 이제 짐작할 수 있다. 이 복도에 방문한 것이 처음이 아니고, 이 빛없는 문을 마주한 것 또한 처음이 아니리라는 것을. 렘브란의 손이 문의 손잡이에서 떨어진다.

“하얀빛의 문으로 나가면, 에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군요.”

당신의 행복한 결말을 바란다는 에버의 눈물 섞인 애원이 귓가에서 맴돈다. 렘브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당신은 알까요, 에버. 나에게 있어 행복한 결말이 되려면, 당신과의 이별은 절대로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

차가운 하얀빛이 당신을 삼킨다. 휘날리는 적갈색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이 있던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빛이 다 가시기도 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그럼, 이번 이야기도 기대해보겠습니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싼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해졌던 내 몸에 색이 돌아온다. 나는 소매 단추를 매만지는 관리자를 노려본다. 관리자의 금색 눈이 샐쭉 휜다.

“참 대단하지 않나요? 당신을 온전히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저리 맹목적인 사랑이라니. 제가 다 감동할 지경입니다.”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훔치는 모양새가 가증스럽다. 잔혹한 농담조의 말이 돌아서는 나를 칼처럼 찌른다.

“그 사랑을 받는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나는 도망친다. 이 복도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지만, 내가 다다르는 곳이 감옥일지라도 나는 필사적으로 저자에게서 멀어진다. 당신이 외면한 빛없는 문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 나게 쾅 닫는다.

그대로 나는 등을 기대어 미끄러지듯 주저앉는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다. 미지근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혔다가 툭 떨어진다. 힘없이 바닥으로 내려둔 손 위로 빈 종이 한 장이 펄럭이며 내려앉는다.

고개를 든다. 내 머리 위로 셀 수 없는 종잇장이 태풍에 휘말린 듯 휘몰아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변함없이.

*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악마와 계약했다.

사실 그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어두운 밤의 병실이다. 간이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아서 일어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더랬지.

생명을 강제로 유지하는 기계가 단조롭고 규칙적인 삑 소리를 낸다. 파리한 손등에서부터 링거 스탠드까지 줄이 늘어져 있다. 침대에 누워있는 당신은 오늘도 말이 없다.

“이제 일어나주면 안 될까요.”

작은 속삭임에도 닫힌 눈꺼풀은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당신의 시간만 정지한 것처럼. 혹여 호흡도 정지한 게 아닐까 무서워져 미동 없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본다. 미세한 숨결에 안도한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떨군다.

“일어나줘요. 무엇이든 할게요. 그게 무엇이든… 내가 할 테니까, 제발.”

“그 소원, 제가 들어드릴까요?”

내 목소리가 아니다. 당연히 당신의 것도, 하물며 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의 것도 아니다. 화들짝 놀라 머리를 드니 침대 반대편에 그가 서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 창백한 얼굴에 부자연스럽게 커다란 미소가 걸려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게 꾸벅 인사하자 우스꽝스러운 광대 모자가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다. 그것도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장기 입원 환자의 병실에. 수상한 사람이 확실해 신고해서 내쫓으려 내 손이 간호사 호출 벨로 향한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하시게요?”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나가라는 말이 중간에서 끊긴다. 그의 손에 빛이 마법같이 모여있다. 그리고 그 빛 아래, 당신이 움직인다. 아니, 움직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조그만 눈꺼풀의 떨림이지만, 근래 본 것 중 가장 큰 증거다. 당신이 아직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그가 빛을 거둔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굳어있다.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어떤가요? 소리 없는 물음에 내가 낼 답은 정해져 있다.

“무엇을,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나요?”

20개월. 1년하고도 반 넘게 당신은 이 병실 침대에 누워있다. 사고로 머리를 부딪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른 큰 상처는 없었기에 금방 일어나 걱정시켜 미안하다며 웃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타박상이 낫고, 금 간 뼈가 붙고, 계절이 바뀌어도 당신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의사에게 절박하게 매달렸으나 코마의 원인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은 나와 당신의 일상이 된다. 당신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죽지 않기만을 바라며.

금색 눈을 휘며 저자가 내게 내미는 것이 천사의 기적인지 아니면 악마의 유혹인지는 모른다. 내게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이를 살려주신다면, 일어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할게요.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의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진다. 색 없는 입술에서 나오는 속삭임은 차갑고 부드럽다.

“당신의 이야기를 제게 주시지요.”

*

이것은 나와 당신의 이야기다. 내가 써 내려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펜이 종이에 닿는 순간 끔찍하게 생생해지는, 현실보다 진짜 같은 이야기.

나는 마을을 순회하는 상인 캐러밴에 타고 있다. 마을이 가까워져 긴장을 한시름 놓은 동료 상인들이 왁자지껄 대화를 이어간다. 왕국의 수도에서 가져온 귀한 천이 이 구석진 마을에도 유행이라거나, 자신이 아는 마법사가 이곳 마을 출신이라거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단어의 향연에 어색할 법도 하지만 뇌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또한 계약의 강제성일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자신을 그저 관리자라 칭한 자는 나를 무한의 문이 있는 복도로 데려와 계약서를 내밀었다. 멋들어진 글씨가 빼곡한 계약서는 내게 단 한 가지를 요구했다. 나와 당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를 완결이 날 때까지 쓸 것. 이야기가 완성되면 관리자는 현실에서의 당신이 깨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완결의 조건이 따로 있나요?”

“해피 엔딩이 좋지 않겠습니까?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조금은 뻔하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그런 엔딩이요.”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된다. 내 작업실이 된 빛없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빈 종이가 빼곡하다. 내게 주어진 첫 문장은 늘 똑같다.

—새하얀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봄날, 렘브란 애터는 어느 외딴 마을의 입구에서 눈을 뜬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순간 나는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나는 달린다. 당신이 머무르는 마을을 향해.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마지막 문장을 향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당신은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당신임을 모를 수가 없다. 비록 현실의 당신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당신이 움직인다. 걷고, 목소리를 낸다. 내 손이 닿으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반응해온다.

“괜찮아요?”

괜찮고, 또 괜찮지 않다. 오랜 기다림에 지쳤고, 이곳에선 당신이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이렇게나마 당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뿐이라.

“…정말 미안해요.”

파도처럼 요동치는 감정 속에서 마지막만 음성을 띠고 흘러나온다. 당신에게 웃어주고 싶지만 터지기 시작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 나는 뒤돌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당신에게 보여주는 첫 얼굴을 눈물로 얼룩진 것으로 남기기는 싫다.

“에버 씨, 맞죠?”

두 번째 만남에선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나는 당신의 첫 마디부터 흔들린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희망 섞인 대답을 꺼낸다.

“맞아요, 혹시 저를….”

혹시 나를 기억하나요?

“어제 동료분들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실례였다면 사과드릴게요.”

불가능을 기대했으니,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받아야 하는 실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처에 물을 부은 듯 쓰라리다. 괜찮아, 이제부터 시작이야. 소리 없이 읊조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렘브란 애터, 이미 알고 있는 그 소중한 이름을.

나는 당신의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사람이다. 당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일까.

“당신을 사랑해요, 에버.”

내 행복의 형태가 당신이듯, 당신에게도 내가 행복이라면. 그럼 우리는 반드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터다.

“저와 결혼해서 에버 애터가 되어주세요.”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이 내게 그 말을 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두 번을, 세 번을, 수십번을 물어도 나의 답은 언제나 똑같을 것이다. 원하던 결말을 목전에 두고, 나는 기쁨에 겨워 입을 연다. 그리고 얼어붙는다.

먼 곳에서 희미한 비명이 들린다. 새파란 하늘에 금색 재앙이 드리운다. 차갑게 낯익은 저 황금색을 나는 몰라볼 수가 없다. 나는 저 용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손에 힘이 빠져 당신의 손을 놓친다. 황금 용이 나를 비웃듯이 내려다본다. 다가오는 경고는 멸망이다.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낸 풍경은 어떻습니까?

*

*

내가 당신을 만나게 되면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다.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면 이야기는 중단되어 우리는 복도로 돌아온다. 복도에서 당신은 나를 보지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다. 당신은 새로운 이야기의 문으로 나가고, 나는 이 종이로 가득 찬 방으로 수십번 회귀하며 점차 무너진다.

나는 반드시 당신을 만난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를 사랑해준다. 그렇게 죽고, 복도로 돌아가 문을 선택해 다시 삶을 반복한다. 이야기의 근본은 정해져 있다. 어쩌면 이미 결말까지도.

“이야기의 완결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자꾸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가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슬프고, 아픈 것은 똑같을 텐데.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금색 악마가 나를 응시한다. 용을 닮은 황금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난다.

“이야기는 본디 작가의 마음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지요. 많은 작가가 그러지 않습니까? 캐릭터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곤 한다고요.”

고삐를 잡고 결말을 끌어내는 것은 작가인 당신의 기량에 달렸지요. 나는 입술을 깨문다. 이야기 속의 생을 반복하며 그는 마모되어간다. 종종 나를 보지 않는 눈에 묻어나는 지침이 언젠가 차라리 죽고 싶다는 감정으로 변할까 덜컥 두려워진다.

기다릴걸. 몇 년이 걸리더라도 당신이 깨어나리라 믿고 병실에 앉아 기다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악마에게 애원한다.

“없던 일로 할게요. 계약을 파기할게요. 이쯤이면 되지 않았나요,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나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악마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온기가 없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듯한데, 저는 당신의 고통을 보고 싶어 계약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면 왜?”

그가 무대 위의 배우처럼 두 팔을 벌려 복도 양쪽에 줄지은 문을 가리킨다. 그의 얼굴에 찬란하고 잔인한 환희가 담긴다.

“미완성의 원고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요. 이 복도처럼 말입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광경 아닙니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담으며 관리자는 과장되게 혀를 쯧쯧 찬다.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그의 손안에 두루마리 종이가 나타난다. 그가 그것을 쭉 펴서 내게 들이민다. 어리석은 과거의 내가 절박함에 서명한 계약서다.

“하지만 이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죠. 그래서 계약서에 파기 조항까지 넣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가 계약서의 한 부분을 손끝으로 짚는다. 친절히 소리 내 읽어주기까지 한다.

“렘브란 애터가 현실로 돌아가는 빛없는 문으로 들어가기를 스스로 택하거나, 에버 애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이 계약은 무효가 된다.”

악마가 나를 보며 웃는다. 참 한결같은 사랑을 가슴에 품은 세기의 애처가더군요. 당신이 왜 그를 놓지 못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고요.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못 본척하며 그가 계약서 맨 아래에 서명된 내 이름이 보이게끔 종이를 흔든다.

“그럼 계약을 계속 이행해주시지요, 에버 애터 씨. 남편이 기다리지 않습니까.”

악마는 나를 버려두고 사라진다. 서늘한 복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손톱이 파고들도록 손을 꾹 쥔다. 우리에게 행복한 결말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에 해피 엔딩 따위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당신이 다음 생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당신이 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되찾을 수 있도록.

내 손으로 그리 이끌 것이다.

*

*

나는 또다시 종이가 가득한 이 방으로 돌아온다.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문에 기대어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벌을 받는 걸까. 당신을 믿지 못한, 기다리지 못한 벌을 당신까지 같이 받게 된 걸까. 오로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당신을 고통의 굴레에 밀어 넣은 걸까.

이토록 숨 막히는 죄책감에 나는 당신과 재회하며 늘 울게 된다. 울면서 미안하다고 빌게 된다. 당신이 이 사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지만 과거를 사죄함으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우리는 다시 멸망 속에서 만날 것이다. 끝이 정해져 있지만 끝나지 않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겠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약속을 한 가지 하겠다.

빈 종이를 잡는다. 손에 펜을 든다. 펜촉에 잉크가 고여 종이에 떨어지는 순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당신과의 재회, 그리고 또 다른 첫 만남이 다가온다.

나는 이 미완성 원고에 마침표를 찍겠다. 기필코 우리의 이야기를 끝맺을 것이다.

당신의 행복한 결말을 위하여.

╳╳╳

새하얀 한기가 어느덧 가신 봄날, 렘브란 애터는 왕국의 수도 광장에 걸린 게시판을 조용히 응시한다. 색바랜 종이는 최근에 인쇄되었는지 모서리가 구겨짐 없이 깔끔하다. 까막눈 신세는 벗어난 지 오래라 렘브란은 문제없이 공고를 읽어내린다.

“황금 용에게 납치당한 공주를 무사히 구출할 용사를 모집함. 성공 시 보상은 최소 백작 이상의 작위와 사만 골드… 솔직히 반쯤 농담 삼아 보여준 공고인데 렘브란 씨가 진짜 지원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의 옆에서 활기차게 공고를 소리 내 읽던 청년이 렘브란의 어깨에 손을 탁 올린다. 탐탁지 않은 접촉이지만 떨쳐내기도 피로해 그냥 둔다. 그것을 친밀감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청년이 밝은 얼굴로 재잘재잘 얘기를 이어간다.

“보상이 탐날만하죠, 그쵸. 렘브란 씨의 검 솜씨도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뛰어나고. 물론 시골뜨기 청년이 검사를 몇이나 봤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저도 슬쩍 끼어서 수도 구경을 해보네요!”

그런데 정말 길 안내해줄 사람 필요 없어요? 저도 처음 와보긴 하지만, 메릭 씨가 필요하면 왕궁 앞까진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는데. 청년의 권유에 렘브란은 고개를 젓는다. 사라진 시간선의 일이었긴 해도, 수도의 방문이 처음은 아니다. 청년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고 몸을 돌린다.

“그럼 저 먼저 돌아가 볼게요. 일도 안 하고 사라졌다고 찾고 있겠네. 행운을 빌어요, 렘브란 씨!”

청년이 사라진 후에도 렘브란은 한참이나 공고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나 렘브란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공고 내용이 아닌, 저를 보며 울던 한 여자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이번에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까. 이번에 우리에게 멸망이 닥치기 전,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까. 이번에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멀리서 종탑이 울린다. 한 무리의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며 그의 뒤를 지나간다. 렘브란은 뒤돌아서 발걸음을 옮긴다. 왕궁으로, 황금 용에게로, 에버에게 향할지도 모르는 가시밭길로. 허리에 검 한 자루만 차고서, 길게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리고 먼 발치에서 그를 지켜보는 한 검은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Written 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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