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된 꿈의 단편선

영웅의 유산

꿈 기반 단편선 (#221117)

오빠가 사라졌다. 아무런 연락도,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재산도 처분하지 않고 떠나 오빠가 살던 저택은 덩그러니 남겨졌다. 오빠가 고용한 요리사며, 청소부, 정원사, 심지어 오빠를 보필하던 집사님도 오빠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내게 연락을 준 건 집사님이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저택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나를 집사님은 십 년은 늙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경황없는 상황 속에서도 프로페셔널함을 잊지 않은 집사님은 현관문에 서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설명을 닦달하는 나를 응접실에 앉혀놓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꽃향기가 섞인 김이 피어오르는 연한 붉은색 홍차를 앞에 두고서야 나는 다시 제대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오빠가 사라졌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입니다. 주인님께선 아무리 늦어도 일곱 시면 내려와 아침을 드셨는데, 어제는 여덟 시가 넘도록 내려오시지 않아 제가 올라가 보니 침실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이상함을 느꼈지만,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고, 귀중품이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집사님은 오빠가 급한 일이 있어서 일찍 나갔겠거니 짐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빠는 저녁 시간이 되어도, 밤이 되어도, 다음 날 새벽이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집사님은 내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혹시 주인님께서 아가씨에게 따로 언질을 주신 게 있으십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오빠와 연락한 게 벌써 삼 주가 넘었다. 오빠는 도시의 유일한 히어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나도 학교 졸업식과 취업 준비가 겹쳐 의도치 않게 연락을 미뤄왔었다. 가장 최근에 오빠의 전화를 받은 게 졸업식 전날이었다. 일이 바빠 내 졸업식에 오지 못하겠다고,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는 오빠에게 나는 괜찮다고 했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듯, 씩씩하게. 사실 그 무엇보다 기대했다가 실망한 마음을 깊숙이 숨기고서.

졸업식에 오지 못한 오빠에게 동생이 실망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오빠와 나의 사이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오빠 동생이라 부르며 곧잘 연락하고 얼굴을 보긴 했지만, 우리는 친남매도 아닌 가족이라 정의하기도 민망한 먼 친척이었다. 팔촌을 넘어가면 남이나 다름없다고 한 말이 무색하지 않게, 오빠와 나는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서로의 얼굴이나 이름은커녕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후로 친근히 왕래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존재했다. 열다섯이라는 까마득한 나이 차이. 이미 사회에 굳건한 자리를 잡은 오빠와 미숙하게 방황하던 나.

그리고 무엇보다 오빠를 향한, 나를 구해준 히어로를 향한 존경심이 건너지 못할 간극을 만들었다. 사이가 좋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에게 오빠는 오빠이기 전에 히어로였고, 오빠에게도 나는 동생이기 전에 지켜야 하는 시민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오빠를 원망해선 안 됐다. 서운함이 목 끝까지, 눈물샘까지 차올랐으나 꾹꾹 눌러 담았다.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까닭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곧 돌아오실 겁니다. 주인님이 아가씨를 걱정시킬 분이 아니잖습니까.”

내 얼굴은 늘 감정에 솔직해서 탈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왔는데, 도리어 내가 위안받고 있으니 창피해서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꺼내려던 말이 뭉개져 나와, 나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혹시나 주인님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제게 곧바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답변을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물론 나는 오빠에 비하면 무얼 하든 어설프기 짝이 없었고, 집사님의 눈에도 찰 리 없었다. 내가 의지가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도 물러날 수 없었다.

“저도 나가서 오빠를 찾아보면….”

“되지도 않는 말씀 마세요. 주인님도 아가씨께 그렇게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잖아요.”

과보호처럼 들리는 만류의 이유를 모르지 않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집사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살살 달랬다.

“저도 주인님의 행방에 관해 무언가 알게 된다면 아가씨께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늘 조심하세요. 주인님의 부재 동안 마기 노출이 심해질 터이니 외출하실 때 각별히 주의하시고요.”

오빠가 없더라도 나는 언제나 저택에 환영이니 편히 찾아오라는 친절한 인사를 받으며 나는 저택을 나왔다. 집사님의 말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오빠가 나를 두고 갔다는 충격에, 지금 도시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는지 생각이 닿지 않았었다.

오빠를 찾는 건 당연히 내가 도와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오빠가 사라지고 난 후, 나는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했다.

*

나는 열 살에 마기를 정화하는 정화 능력자가 되었다. 내가 알기론 오빠 이후로 이 도시에 각성한 유일한 정화 능력자였다. 다른 도시의 상황은 잘 알지 못했으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은 유난히 정화 능력을 타고나는 이가 적다고들 말했다. 간신히 맥이 끊어지지 않는 수준으로, 몇 대째 히어로는 홀로 활동하며 마기를 정화해왔다.

그게 오빠가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바쁜 이유이기도 했다. 마계와 이어진 균열이 닫히고 마수가 더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았지만, 전쟁 같았던 시절의 흉터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혔다. 세계가 부딪히며 생긴 미세한 틈으로 마수는 넘어오지 못했으나, 마기가 노출되어 우리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덴 충분했다.

식물이 썩어갔다. 쌓아 올린 건물과 다리가 이유 없이 부식되어 예고도 없이 무너졌다. 불행 중 다행히도 마기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삶을 고되게 만들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늘 영웅을 찾았다. 마기를 정화할 수 있는 능력자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그들은 웃고 울며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초대 히어로부터, 그 후대, 그리고 그 후대. 오빠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선함의 유산이었다. 점차 정화 능력자가 사라지고, 히어로의 수가 적어져도 그 선한 마음의 크기는 줄지 않았다. 도시의 시민은 그래서 누구나 낮에 안심하고 돌아다니고, 밤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런 오빠가, 히어로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다.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 다들 조심하며 집에 틀어박히는 게 제일 낙관적인 예상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공황에 빠져 폭동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이 다치면? 죽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내 몸 하나 사린다고 막을 수도 있는 참사를 외면한다면?

오빠가 돌아왔을 때 나는 결코 오빠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을 터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평생을 살아온 도시, 오빠가 지켜온 도시가 망가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잠시만요! 그 버스 아직 출발하지 말아 주세요!”

뱃속부터 힘을 끌어올려 우렁차게 소리 지르자 노란색 시내버스를 타려던 손님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내게 한꺼번에 쏠린 시선이 극히 부담스러웠으나, 얼굴 상반을 가리는 검은 가면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솔직히 오빠의 자리를 대신하자니 무서웠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도 한참을 고민하다 옷장을 뒤져 고등학교 연극 발표회 때 쓴 가면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 상당히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끄트머리가 해진 청바지에 아무런 로고 없는 노란색 후드티, 화룡점정으로 뜬금없는 조잡한 가면.

……수상한 행인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당하는 거 아니겠지?

“버스 타려고요, 학생?”

다행히 조금 이상한 청년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버스 기사님에게 달려갔다. 버스 계단을 오르는 대신 손짓으로 버스의 앞바퀴를 가리키자 기사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바퀴에 마기가 많이 뭉쳐있어서요! 오 분만 주시면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학생, 배차 간격 맞추려면 지금 바로 떠나야….”

기사님의 짜증 어린 말이 내가 바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멈췄다. 기사님의 눈에도 바퀴에서 빠져나오는 꺼림칙한 검은 연기가 보였을 테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 이 검은 연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마기…….”

버스 안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바퀴에만 최대한 집중했다. 만년필에서 잉크가 쑥쑥 뽑히듯 마기가 내 손으로 옮겨왔다. 그렇게 손안에 야구공만 한 마기가 바퀴에서 축출되어 들어왔다.

이 이후가 아직 내게 조금 어려웠다. 정화한다, 나는 마기를 정화하길 원한다. 손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마기가 정전기처럼 튀는 걸 느끼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없어진다, 검은 연기가 없어진다. 수 분의 간절한 염원 끝에 정전기가 조금씩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검은 연기가 옅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해냈다. 나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려다 가면이 흔들리자 멈칫했다. 시선이 전부 내게 쏠린 상황에서 맨얼굴을 드러낼 정도로 용기가 있진 않았기에, 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무시하고 버스 기사님께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출발해도 괜찮아요.”

기사님은 바로 출발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전전긍긍해지려던 차에 기사님이 내게 질문을 툭 던졌다.

“학생도 히어로예요?”

못 보던 얼굴인데, 우리 히어로님은 어디 가고 학생이 일하고 있어요? 새로운 예비 히어로인가?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맞습니다! 히어로님이 급한 일로 출타 중이셔서요! 당분간 제가 대타로 일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행이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님은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구먼. 그럼 히어로님 돌아오실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히어로 학생. 버스 탈 건가요?”

“아니요, 가까운 곳부터 점검할 예정이어서요! 가셔도 돼요.”

그리고 저 이제 학생 아니에요. 삼 주 전에 칼리지 졸업했어요! 나는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잠깐 손을 흔들어주었다. 첫 마기 제거가 성공적으로 끝나 자신감이 끝 모르게 솟아올랐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나는 아까보다 자신 있게 발걸음을 뗐다.

*

“오늘 도시에 갑자기 젊은 여성 히어로가 나타났다는데, 제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아가씨.”

소식 한번 빨랐다. 해가 질 때쯤에서야 마기 제거 작업을 끝내고 오빠의 행방에 관해 알아낸 게 있느냐고 물어보려 저택에 방문한 나를 집사님이 추궁했다. 딱히 집사님에게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거 저예요.”

“지금 그걸 제가 눈치채지 못해서 물어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집사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의 실종 소식을 전해줬을 때만큼이나 심란한 얼굴이었다. 나는 괜히 혼나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옆으로 굴리고 자신을 열렬히 변호했다.

“하지만 오빠가 없다고 마기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빠가 당장 내일 돌아온다면 모를까, 언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마기를 마냥 방치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 다치면 어떡해요.”

혹시 오빠 소식은 없었어요? 집사님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실망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단서가 조만간 발견될 거라며 위로한 것도 잠시였고, 집사님은 다시 잔소리를 또박또박 내 귀에 꽂아 넣었다.

“주인님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아가씨의 상황도 만만찮게 심각합니다. 아가씨가 정화 능력자임을 비밀로 하라고 주인님이 그렇게 주의하셨는데, 히어로 활동에 뛰어드시다니요.”

“저인 걸 밝히진 않았어요. 활동하면서 가면을 단 한 번도 벗지 않았다고요.”

“완벽한 분장을 해도 모자랄 판에, 가면 하나로 정체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시에 이십 대 초반 갈색 단발머리의 여성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좀 평범하게 생긴 편이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님. 미덥지 않겠지만 저 잘할 자신 있어요.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집사님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말려봤자 내가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대신 집이 추적당하면 정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으니 오빠가 돌아올 때까진 저택에서 출퇴근하기로 타협했다. 빠르게 필요한 짐을 챙겨와 손님방에 풀고 저녁까지 먹은 후, 집사님이 내게 따듯한 차 한잔을 내주며 진지하게 물었다.

“아가씨는 정말로 히어로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요. 도시의 모든 아이가 한 번쯤은 품는 꿈이잖아요?”

집사님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나는 활짝 웃고 도자기 잔을 살짝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새콤하고 구수한 향이 나는 애플 루이보스가 혀를 타고 목으로 넘어갔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저 지금 진지해요. 제가 언제부터 히어로를 동경했는지 아세요?”

전 다섯 살이었어요. 유치원에서 공원으로 소풍을 간다고 해서 얼마나 들떠있었는지 아직도 기억나요. 좋아하는 하늘하늘한 분홍색 꽃은 다 져버린 초여름이었지만, 놀러 나간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끼던 원피스도 입고, 외숙모가 싸주신 도시락도 소중히 품고, 선생님의 등을 따라 공원으로 놀러 갔어요.

사실 그날 무얼 하며 친구들하고 놀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아요. 분명히 재미있는 하루였는데 말이죠. 숨바꼭질하고 있던 건 기억해요. 술래가 눈을 감고 육십초까지 세는 동안, 나는 나름 머리를 굴려 찾아낸 비밀 장소에 숨어 있었어요. 공원 관리실 건물 뒤에 창고가 있었는데 벽과 창고 사이에 좁은 틈이 있어서 어린아이가 비집고 들어가기엔 안성맞춤이었어요. 덤불 밑에 숨기엔 원피스에 흙이 묻을까 봐 싫었고, 다른 데는 탁 트여있어서 바로 잡힐 것 같았거든요. 거기서 난 숨죽이고 기다렸어요. 술래가 다른 아이들을 하나둘 찾아내는 소리를 들으면서요.

아마 들키지 않는 데 너무 집중했었나 봐요. 머리 위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인지했을 때는 늦었었어요. 올려다보니 창고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더라고요. 고민할 새도 없이 겁에 질려 뛰쳐나왔지만, 머리 위로 지붕 잔해가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팔로 머리를 감쌌어요. 그래봐야 덜 다치지는 않았겠지만, 본능이었죠. 잔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어요. 그래서 눈을 떴어요.

제 눈앞에 히어로가 있었어요. 그제야 전 제가 그 사람의 품에 꽉 안겨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로.

“아가씨가 주인님을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이군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계시던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방긋 웃었다.

“맞아요. 내가 다섯 살, 오빠가 스무 살이었을 때였죠. 벌써 십오 년이나 지난 이야기네요.”

신나게 추억을 회상하고 있자니 목이 말라와서 나는 남은 차를 쭉 들이켰다. 집사님이 차를 한 잔 더 따라주는 동안 둑이 터진 듯 내 입에서 끊임없이 옛날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수다쟁이라 자부한 적은 없었지만, 오빠 이야기를 이렇게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말할수록 고양감이 들었다.

“그때도 오빠는 애기 눈에도 무지하게 잘생긴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오빠가 도시의 유일한 히어로가 아니었어도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오빠도 절 알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오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구해준 사람은 많아서 셀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평범한 어린애였던 저를 기억했는지, 너무나 신기했어요. 물론 두 번째 만남은… 좀 큰 인상을 남겨서 저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지만요. 멀쩡해 보이는 건물에서 마기를 자각 없이 뽑아내던 여자애를 잊긴 힘들잖아요. 엄청 놀란 얼굴로 제 손을 덥석 잡던데.

“놀란 건 주인님뿐이 아니었지요. 갑자기 아가씨를 데리고 저택에 돌아오셔서 유괴인 줄 알았지 뭡니까.”

집사님의 농담에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한 잔 더 마시겠냐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젓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손에 턱을 괴었다.

“놀랄만하긴 했죠. 마기를 뽑아내긴 했지만, 정화는 할 줄 몰랐으니까요. 오빠가 없었으면 큰일 났을걸요. 그날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침착한 얼굴로 내 손을 붙들고 마기를 자기 손으로 옮겨 정화하더라고요. 그리고 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다정하게 물어봤었어요.”

“이름이 뭐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삼촌과 외숙모 가족과 살고 있다고 얘기하니까 오빠는 잘생긴 인상을 약간 찌푸리더니 고민하다가 다시 물었어요.

“네가 정화 능력자라는 걸 그분들도 알고 계시니?”

아셨을 리가요. 저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사실대로 직고하니 오빠가 한숨을 쉬고 삼촌과 숙모가 어디 계신지 물어봤어요. 혼자 심부름하러 나왔던 터라 집에 계신다고 하니 오빠가 잠깐 자기 집에 가서 얘기 좀 하자고 저를 설득하더라고요.

“그 건에 대해선 아가씨를 귀가시킨 후 주인님께 따끔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를 보호자에게 알리지도 않고 모르는 타인의 집에 들이다니요.”

아무리 먼 친척이라 하더라도, 만났을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지 않습니까. 집사님의 말이 옳았기에 나도 반성의 의미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 많이 혼났는지, 다시 만났을 때 오빠가 너무 진심을 담아 사과하길래 내가 다 뻘쭘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때 오빠의 손을 잡고 이 저택에 온 걸 하나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여태까지 인생을 평탄하게 살 수 있었잖아요. 마기를 감지하는 방법, 뽑아내고 정화하는 방법 전부 다 오빠한테서 배운 것들이니까요.”

그리고 오빠와 집사님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내가 정화 능력자인 걸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어렸던 나는 오빠가 부탁했으니 별다른 생각 없이 기쁜 마음으로 수긍했지만, 지금은 그게 내 어린 일상을 온전히 지켜주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성인이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였다. 그렇기에 내 선택에도 후회는 없었다.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나도 오빠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

“히어로 언니, 히어로님은 언제 돌아와요?”

눈을 깜빡이며 내려다보자, 내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작은 여자아이가 나를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가로등에서 마기 제거도 끝났던 터라,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씩 웃어주었다.

“바쁜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오실 거야.”

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끝으로 바닥을 탁탁 치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이내 조그마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았다.

“히어로님이 돌아오셔도 언니는 계속 히어로 해줄 거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사이로 아이의 빨개진 두 귀가 보였다. 나는 황급히 헤벌쭉 벌어진 입을 손 뒤로 감추었다. 일주일째 히어로로 활동하며 감사 인사는 여럿 받았었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내가 좋다고 말해온 사람은 이 애가 처음이었기에 나는 기쁨을 감추려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고 상냥한 어조로 아이에게 물었다.

“내가 계속 히어로로 활동했으면 좋겠어?”

“네. 히어로 언니가 제 롤모델이거든요.”

아이가 머리를 여전히 숙인 채로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를 슬쩍 올려다보는 빛나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감동스러웠다. 선연하게 보이는 순수한 동경과 호의 앞에서 나는 순간 어쩔 줄 몰랐다.

나를 보던 오빠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괜한 감성에 젖어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아이가 용기를 얻었는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나도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늘 남자애들이 비웃었거든요. 여자가 무슨 히어로를 하냐고. 옛날에는 여자 히어로도 있었다고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런데 오늘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어요. 나도 히어로 언니처럼 될 거라고. 그랬더니 찍소리도 못하더라고요. 요즘 학교에서 히어로 언니 가면이 유행인 거 아세요?”

물론 히어로님이 싫다는 건 아닌데요, 잘생겼고, 친절하고, 힘도 세고. 급하게 변명 같은 해명을 늘어놓는 아이를 보며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는 키득키득 나오는 숨을 삼키고 도닥이듯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학교 다닐 때 똑같은 말을 들었거든.”

히어로 언니도요? 믿기지 않다는 듯 되묻는 아이에게 답해주려다, 아이가 왼발 오른발 무게중심을 바꾸는 걸 보고 나는 멀지 않은 벤치를 가리켰다. 우리 잠깐 앉아서 얘기하다 갈까? 나와 대화할 기회를 놓치기 싫었지만 다리는 아팠는지, 아이는 냉큼 벤치 위로 올라가 자리 잡고 다리를 흔들었다. 내가 옆에 앉자마자 아이가 곧바로 다시 질문해왔다.

“히어로 활동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전혀, 라고 말하기엔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이의 동심을 지켜줄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저 나이의 나였으면, 나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을까? 고민 끝에 나는 적당히 타협했다.

“힘들긴 해. 하지만 그만큼 보람차서 힘든 걸 잘 이겨낼 수 있어. 사람들을 돕는 일이잖아?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그리고 감사 인사를 받을 때마다 힘이 나고. 내가 히어로가 되기로 선택한 게 잘한 일이구나 생각해.”

“그럼 내 말도 히어로 언니한테 도움이 됐어요?”

물론! 이건 온전한 진심이었다. 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보조개가 파이도록 함박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꼭 언니 같은 히어로가 돼서, 히어로 언니에게 진짜 도움이 될 거예요.”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히어로 언니, 수줍음도 잊은 채 내게 신나게 말하던 아이가 멀리서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아마 아이의 엄마나 언니가 아이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아이를 달래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이만 갈 시간이 됐나 보네. 나랑 얘기해줘서 고마웠어. 다음에 만나면 꼭 인사해줘.”

그럴게요, 다음에 또 봐요, 히어로 언니.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내게 꾸벅 인사하고 아이는 뒤돌아 저를 찾는 보호자에게로 달려갔다. 아이에게 가볍게 흔들어주던 내 손이 천천히 멈췄다. 언젠가 히어로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아른거렸다.

내가 맞는 대답을 해준 걸까. 히어로가 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그 동경이 향하는 길이 최선이라는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보람차다. 뿌듯하다. 자랑스럽고, 힘이 난다.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말로 다 표현 못 할 만큼 지치는 부분도 확실히 있었다.

차라리 몸만 힘들었다면 버티기 쉬웠을 테다. 하지만 불시에 마주하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은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도 내 심신을 좀먹었다. 길을 잠깐 통제하는 바람에 일에 늦었다고 성내는 아주머니, 자기 집이 제일 급한데 왜 봐주지 않느냐고 성질내는 할아버지, 젊은 처자가 뭘 알고 설치느냐고 비꼬는 아저씨.

백 번의 감사 인사를 들어도 하나의 뾰족한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혀 잊히질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나 때문에 하루 장사 망쳤다며 화를 내는 큰 길가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포기하고 관둘 수는 없었다. 쓴소리 몇 번 들었다고 숨어버리는 건 너무 끈기 없지 않은가. 오빠를 동경해서 히어로가 되었는데, 도망치면 나부터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시작했고, 힘들 걸 알면서도 뛰어들겠다고 선택했다. 그렇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오빠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입맛이 조금 씁쓸할지라도.

*

악의에 분별력은 없지만, 표적은 있다. 누구나 다 살아오며 예상치 못한 악의의 표적이 된 경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히어로 활동을 하며 사랑과 존경만 받을 거란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악의가 화살처럼 나만을 향하는 게 이리 숨 막히는 것이었는지, 나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히어로 아가씨,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 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수십의 매서운 눈길 속에서 나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무너진 공사장의 잔해 사이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그 위로 구급차와 소방차의 사이렌이 시끄럽게 섞여 들었다. 피부에 열기가 느껴졌다. 반대로 내 손은 차갑게 식어갔다.

“철골이 마기 때문에 무너질 때까지 뭘 한 거야!”

날 선 비난에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지만 나는 차마 눈 돌리지 못했다.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었으면 결과가 어떻든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엉망으로 구겨진 철골 더미는 눈에 담기에도 끔찍했다. 그나마 새빨간 선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조그만 위안이었다.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인명, 인명 피해는….”

“나도 몰라! 그건 히어로 아가씨가 들어가서 살펴봐야지!”

“진정하세요, 아저씨. 얘기를 들어보니 어제부터 철거가 일시 중단돼서 오늘 공사장에 출근한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남자를 말리며 옆에 있던 대학생이 내게 알려주었다. 백 퍼센트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상자가 발생했을 확률이 확연히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진정이 돼서 나는 현장을 자세히 살피려다 멈칫했다.

마기가 무언가에 스며들고 형태를 무너뜨려 숙주가 붕괴하더라도, 그 잔해에서 그 흔적이 바로 없어지지는 않았다. 뿌리가 썩어 넘어진 나무에도, 부식된 건물에도 마기가 며칠 넘게 남아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오늘 무너진 공사장 철골엔 마기의 흔적이 없었다. 나는 내 감각을 의심하며 먼지 쌓인 철골에 손을 댔다. 당연히 빠져나오는 검은 연기는 없었다. 철골을 두 번 세 번 유심히 살피고 나는 물러선 군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철골은 마기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에요.”

이건 균열에 의한 재앙이 아닌 인재(人災)였다. 본래 부실했던 철골물, 아니면 부주의했던 철거 방식.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수많은 요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기는 아니었다. 나는 텅 빈 손을 내밀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여기 깃들어있는 마기가 없….”

“증거 있어? 자기 잘못 회피하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게 아니라고 당장 해명해야 했으나 입술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얼어붙은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비아냥대는 추궁이 이어졌다.

“대타로 왔다더니, 게으름 피우다 마기를 방치해서 일어난 사고를 무마하려고 우리를 속이는 거지? 어림도 없는 소리. 히어로님이 있었을 땐 이런 일 없었는데, 역시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히어로 직을 맡기는 게 아니었어.”

아니야, 정말 아니야. 시야가 이상하게 뿌옇게 보여 눈을 비비려고 했으나, 손에 닿는 건 차가운 가면의 감촉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용기 내 조그맣게 꺼낸 말은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속닥임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진짜? 저 히어로 아가씨가?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데 일주일 내내 도시 이쪽으론 거의 안 오긴 했었던 것 같애. 그럼 히어로 아가씨 책임이 맞는 건가?

“그래서 이거 어떡할 거야? 철거 기계도 무너진 잔해에 전부 망가졌을 텐데, 재산 피해가 얼만지는 알아? 아가씨가 물어낼 거야?”

의기양양해진 아저씨가 나를 윽박지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겁을 먹고 물러섰다. 철골이 뾰족하게 내 등 뒤를 찔렀다. 한 발짝 더 다가오려는 아저씨를 멈춘 건 어린아이의 새된 비명이었다.

“히어로 언니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나와 아저씨의 눈이 동시에 아이에게 향했다. 며칠 전 내게 다가왔던 여자아이였다. 잔뜩 겁먹었는지 하얘진 얼굴로도 아이는 다시 용기 있게 소리 질렀다.

“히어로 언니는 거짓말하지 않아요! 언니 말을 들어주세요!”

아이가 나를 위해 내준 용기는 작은 불씨가 되었다. 아까 아저씨를 막아서던 대학생이 아이 곁에 다가섰다.

“증거가 없는 건 아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왜 자꾸 예비 히어로님의 잘못으로 몰아가세요?”

“맞아, 저 철거 공사도 붕괴 위험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인명 피해가 없었음 다행으로 여겨야지, 뭔 히어로 아가씨더러 물어내라 마라야.”

하나둘 내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때까지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나를 누군가가 잡아 이끌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내 소매를 잡고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어여 집에 가, 히어로 아가씨. 괜히 이런 데 있어봤자 못 볼 꼴만 보지.”

다른 사람이 택시를 잡고 문을 열어주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틈도 없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로를 달리는 택시에 타고 있었다. 택시 기사님이 백미러로 나를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예비 히어로님, 히어로님 저택으로 모셔다드리면 되나요?”

목이 메 대답할 수가 없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푹 숙였다. 다리에 포개듯 올려놓은 두 손 위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등을 문질러 물방울을 지워도 점차 떨어지는 눈물이 많아졌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가면 아래로 눈물이 나오는 대로 흘려보냈다.

*

눈물로 잔뜩 젖은 얼굴로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님은 말없이 나를 응접실에 앉혀놓고 신경안정에 좋다는 라벤더 차를 뜨겁게 끓여 내주었다. 나는 한참 훌쩍이며 앉아있다가 집사님이 재차 권유하고 나서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울기만 하면 탈수 증세 온다는 말만 딱 하고서 집사님은 내게 아무런 질책도,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따스한 배려였을 터다. 그러나 난 그 침묵에 위로받기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왜 저를 혼내지 않으세요?”

“아가씨가 잘못한 게 무엇 있다고 혼을 냅니까?”

잘못한 거 많아요. 마기의 흔적이 없었더라도 지나가다 공사장 확인 한번 했으면 무너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더 빨리 뛰었으면 현장에 조금 더 일찍 도착했을지도 모르고. 꼴사납게 겁먹지만 않았다면 나를 위해 나서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고 떠났을지도 모르고.

수많은 잘못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으나 무엇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소리를 띠고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입술만 한참 달싹이는 나를 집사님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셨다.

“…나는 히어로를 하면 안 됐어요.”

고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었다. 간신히 멈춘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시선을 떨구고 찻물만 바라보았다. 투명한 밝은 오렌지빛 수색 위에 비친 내가 너무 볼품없어 보였다. 애써 눌러두었던 감정이 폭발해서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히어로가 되겠다고 했을까요? 오빠와 같은 정화 능력자라서? 능력이 있으면 뭐 해요, 사고 하나 막지 못하는걸.”

오빠가 있었다면, 오빠가 여전히 이 도시의 히어로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가만히 듣고 계시던 집사님이 단호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적부터 히어로를 동경했다고 해서 빈말을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괴감에 침몰한 내게는 허울 좋은 위로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님은 내가 우울의 늪에 시간을 더 허비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게 아니고, 주인님이 계셨을 때도 비슷한 일은 많았습니다. 올해만 해도 크고 작은 사고가 몇 개 일어났다는 것은 아가씨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히어로는 만능이 아닙니다. 그건 주인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집사님이 나를 진중하게 응시했다. 내 가장 깊은 생각까지 꿰뚫어 보는듯한 눈빛에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빠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고, 마기도 능숙하게 정화하고….”

“아가씨는 주인님을 완벽한 히어로로 보는 경향이 있지요. 주인님이 여러모로 비범하고 뛰어난 분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답니다.”

주인님도 히어로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이니까요.

뎅, 뎅. 응접실의 괘종시계가 아홉 시를 알렸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였다. 나는 가까스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생각을 정리하고 남은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이미 차는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빠도 늘 이런 비난과 악의를 마주하며 살았나요?”

“예. 그래서 아가씨가 히어로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말렸던 겁니다.”

“오빠는 말려보셨었나요?”

“물론입니다. 주인님도 아가씨처럼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시더군요.”

“…오빠는, 어떻게 견뎠대요?”

막힘없이 내게 돌아오던 대답이 멈췄다. 오빠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집사님도 질문의 정답을 몰랐던 걸까. 나도 딱히 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터라 되묻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질문은 속으로만 삼켰다.

오빠가 이제 히어로도, 도시도 싫어져서 떠난 거라면,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 거라면 어떡해요?

내가 빈 찻잔을 손에 들고 가만히 앉아있자 집사님이 괘종시계에 힐끔 눈길을 주었다. 어느덧 커다란 시곗바늘의 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오늘은 이만 주무시러 가시지요. 심신이 피로한 날에는 수면을 충분히 취하시는 게 좋습니다. 기왕이면 내일은 외출하지 말고 푹 쉬시고요.”

그럴 수는 없다고, 히어로 일을 정말로 관두고 싶지 않다고 얘기해야 했으나 눈꺼풀처럼 입술도 무거워져 떨어지지 않았다.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도 갈수록 추를 단 듯 묵직해져 침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쓰러지듯 이불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정말 지쳤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

눈이 저절로 떠진 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왜 갑자기 깼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잘 보이지 않는 벽시계를 노려보다가 옆으로 굴러 누웠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유난히 거슬려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일어나 앉아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아, 내 옷.”

기절하듯 잠들어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느릿하게 일어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정신이 완전히 맑아졌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도 뜬 눈으로 새벽을 지새울 것 같아 나는 발에 슬리퍼를 꿰고 침실을 나섰다.

복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조용히 텅 빈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복도의 맨 안쪽에는 청동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문이 있었다. 베란다가 딸린 고즈넉한 서재로 향하는 문이었다. 어릴 적 이곳에서 나는 오빠에게 마기를 정화하는 법을 배웠고, 레슨이 일찍 끝난 날에는 쿠션을 베고 누워 오빠가 책을 읽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서재를 자주 찾지 않았지만, 저택에 놀러 왔을 때 오빠가 나를 마중 나오지 않으면 이곳부터 들렸다. 그럼 오빠는 십중팔구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거나, 베란다에 나가 저택을 두르고 있는 해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노크하고 들어오면 오빠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다정하게 웃어주었었다.

손이 온기가 달아난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가볍게 누르자 문이 저항 없이 열렸다. 이 방은 늘 나를 환영한다는 듯 잠겨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안에 나를 반겨주는 오빠가 없었다. 어둑한 서재에 쓸쓸하게 홀로 서 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베란다로 나가는 커다란 창문이 열려있었다.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내게 손짓하는 것처럼 보여, 나는 홀린 듯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베란다 바닥을 디뎠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으나, 차가운 타일이 맨살에 닿자 발바닥이 시렸다. 나는 천천히 난간에 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는 온통 새카만 물이었다. 오빠가 히어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저택 경비를 강화할 필요를 느껴 인공해저를 설치했다고 들었다. 수영해서 넘어올 수 없게 무언가 조치를 해뒀는지, 오빠는 내게 해저 안으로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넘실거리는 까만 물이 무섭게 느껴질 만도 했으나, 불규칙적으로 잔잔하게 물결이 이는 걸 구경하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에 조그만 평온이 찾아왔다.

오빠도 그래서 가끔 여기서 해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서 나는 난간에 몸을 밀착했다. 든든히 나를 지탱하는 난간에 무게를 맡긴 채 나는 까치발을 들어 목을 길게 뺐다. 해저의 수면이 성큼 앞으로 다가온 기분이 든 순간, 몸이 갑자기 뒤로 홱 쏠렸다.

“저기 빠지면 그냥 젖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낮고 부드럽고, 또 낯익은 목소리. 익숙한 온기가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손이 나를 베란다에서 방 안으로 끌어당겼고, 나는 거칠지 않은 힘에 순순히 이끌려 들어왔다.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오빠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어둠 속에 묻힌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 밝고 맑은 하늘색 눈동자, 피로해 보이지만 잘생긴 얼굴까지. 지난 열흘간 애태웠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내게 닿는 다정함의 온도는 여전해서, 나는 아침 인사를 나누듯 여상하게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

“오늘. 자정 넘어서.”

내가 한창 잠들어 있던 시각이었다. 아마 자고 있던 나를 깨우기 싫었던 거겠지. 또는 내가 깨어나기 전에 다시 떠날 생각이었다던가. 나는 붙잡힌 팔이 아닌 손으로 오빠의 손을 힘주어 쥐었고, 오빠는 아무런 불평 없이 손을 잡힌 채로 두었다. 그것을 도망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는 다음 질문도 침착하게 꺼낼 수 있었다.

“아주 돌아온 거야?”

“당분간은.”

그 한마디가 뭐라고, 나는 긴장이 탁 풀려 오빠의 손을 놓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빠도 말없이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달도 없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미미했음에도, 오빠의 눈이 빛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왜 돌아왔어?”

오빠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오빠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네 소식을 신문에서 봤어.”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돼서 돌아온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둬.”

평소 차분하고 상냥하던 오빠라고 생각지 못할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오빠를 본 순간부터 돌아온 이유를 반쯤 짐작하고 있던 터라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내가 활짝 웃자 오빠가 가지런한 눈썹을 모았다. 오빠가 나를 한 번 더 설득하려는지 입을 열려는 찰나, 내가 먼저 새치기해 들어왔다.

“오빠는 내가 왜 히어로가 되었는지 알아?”

오빠가 다시 선택한 침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몰랐다. 사실 그게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는 오빠가 왜 히어로가 되기로 선택했는지 몰라. 하지만 이제 알고 싶어.”

무슨 이유로 히어로가 되었는지, 무슨 이유로 계속 버텼는지, 무슨 이유로 떠났는지까지.

기나긴 침묵이 이어져 오빠가 거절하려나 싶은 생각이 슬슬 들 무렵, 오빠가 깊은 한숨을 쉬고 내 맨발을 가리켰다.

“일단 슬리퍼부터 신고 담요 꺼내와서 덮어. 조금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

*

“이제는 부모님의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 그날, 날 보던 형의 얼굴과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해.”

오빠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밝지 않았다. 나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옛날처럼 쿠션을 베고 누워 오빠의 말을 경청했다. 책상 의자를 끌어와 앉은 오빠의 표정은 어두운 어조에도 담담했다.

“형은 평소에 내게 절대 웃어주지 않았어. 그런데 그날만큼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살갑게 다가왔었지. 손에 짙은 보랏빛을 띠는 유리잔 하나를 들고서.”

왜 안 마셔? 네가 특별히 좋아하는 포도 주스로 구해왔는데.

오빠는 오늘까지도 그 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단어 하나하나, 싸늘하게도 다정한 척하는 어조, 잔을 억지로 쥐여주던 손힘까지.

단 냄새가 잔에서 피어올랐다고 했다. 인공 해저의 물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것처럼, 어렸던 오빠는 잔잔한 보라색 수면을 빤히 바라보았다고 했다.

“결코 대답할 용기는 없었어. 독인 걸 아니까, 형이 준 주스를 마실 수 없다고.”

오빠는 정체 모를 독이 들어있는 주스를 결국 마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오빠의 앞날이 평탄해지지는 않았다.

오빠의 나이 열세 살. 오빠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뉴스에도 하루에 몇 건씩 나오는 흔하디흔한 교통사고는 오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고작 중학생이었던 오빠에게 남겨진 것은 부모의 흔적이 남은 저택과 유산의 일부, 그리고 제 존재 자체를 거슬려 했던 형이었다.

유산의 관리는 성인인 형에게 넘어갔고, 오빠는 성인이 되는 해에 유산의 반을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빠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남긴 저택과 유산을 전부 포기하고서라도 오빠는 저택을 떠나고 싶어 했다. 목숨이 소중했다면 포기해야만 했다.

“형이 내 죽음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오빠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학창 시절은 희미하다고 돌이켰다.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은듯했다. 독이 든 잔 사건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화 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게 오빠의 생명을 구했을 터였다. 독을 해독하거나 칼을 막아주는 능력 따윈 얻지 못했지만, 도시 차원에서 유일한 예비 히어로에게 보이는 관심은 하나의 방패막이 되었다.

오빠에게 히어로란 선택지가 아닌 생존 수단이었다.

“아직도 가끔 생각해. 형은 왜 나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이유는 사실 중요치 않았다. 형은 이미 오빠를 죽일 만큼 미워했고, 계기만 필요로할 뿐이었다. 불행히도 그 계기는 오빠가 성인이 되어 연을 끊고 탈출하기 전에 찾아왔다.

오빠가 집에서 유산 문제로 학대당하고 있다는 기사가 갑작스럽게 동네 신문에 기재되었다. 기사라기보단 찌라시에 가까웠지만,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진실도 일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설령 진실 한 톨 들어있지 않은 새빨간 거짓투성이였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기사에 분노했고 또 열광했다. 오빠는 반 친구들이 기사에 관해 종일 물어오는 탓에 하교하기도 전에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빠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갔다가는 오늘이야말로 형에게 살해당할 것이라 직감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갈 곳은 없었어. 그저 공원 벤치에 앉아 멍때리고 있는 게 전부였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 같아. 그것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어. 형이 직접 나를 찾으러 왔거든.”

사람을 풀어 오빠의 행방을 찾아낸 건지, 오빠는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형을 마주했다고 한다. 형은 오빠를 향해 살갑게 웃어주었다고 했다. 잔에 독을 타서 권했던 한 과거의 날처럼.

“나를 구해준 건 전대 히어로님이었어. 나를 아껴주던 집사님에게서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으러 오신 거겠지. 형은 내 목을 졸라 죽이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어. 그리고 이제 어떡하면 되냐고 매달리는 내게 히어로님이 말해주셨어.”

기반을 다져. 네 형이 감옥에 간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출소할 테고 네 앞에 다시 나타날 거야. 그때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네 목숨을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 해.

그런 이유로 오빠는 히어로라는 기반을 다졌다. 단지 살기 위해 성년이 되지 못한 나이에 성인조차 지기 힘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그래도 강한 사람이라서 버텼다. 그나마 형과 같이 살던 시절보다는 나아서 버텼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형은 사 년 징역을 살고 모범수라는 이유로 일찍 출소했어. 초범이었고, 반성의 여지가 보인다고 애초에 감량된 형량을 받았었지. 내겐 한마디 사과도 없었는데도. 출소 직후 형이 제 몫의 유산을 가지고 다른 도시로 이사해서 나는 그냥 잊기로 했어.”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본인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잊기로 선택했다고 했다. 아직도 포도 주스와 와인은 입에도 대지 못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를 모르는 척 살아왔다. 하지만 세상은 그마저도 오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전 신문에서 형 소식을 보게 되었어. 결식아동 단체에 거액을 기부해서 모범 시민 훈장을 받았다고 하더라. 부모를 일찍 여의고 힘겨운 생활을 했음에도 선행을 베풀 줄 아는 보기 드문 선인이라고.”

그냥 전부 허무하더라. 내가 해온 일도, 내가 하는 일도. 계속 버텨야 할 이유도 이젠 기억나지 않았어. 그래서 떠났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한번 뒤돌아보지 않고.

오빠의 이야기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

나는 오빠를 동경해서 히어로가 되었다. 그러나 내 동경에 비친 게 가면에 불과한 모습이 아니었다고는 이제 자신하지 못했다.

오빠가 왜 떠났는지 이해됐다. 나는 고작 열흘 버티고 무너질뻔한 악의를 오빠는 거의 이십 년을 버텨낸 사람이었다. 다리가 무게를 버틴다 해도 차차 금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보수할 시간도 여유도 없이, 점차 무거워지는 책임으로 어깨는 굽어갔다. 지친 표정을 짓는 오빠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는 히어로로 살아가는 게 싫었어?”

“처음부터는 아니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오빠의 말에 깃든 것이 절망이 아닌 피로라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 어깨에 두른 담요를 손에 꼭 쥐고 있던 나를 오빠가 불렀다.

“너도 이제는 알겠지만, 호의는 영원하지 않아. 반대로 악의는 사라지지 않지. 나는 독이 든 잔을 받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지만, 악의가 넘치는 잔을 거부할 만큼 현명하진 않았어.”

너는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네가 다른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오빠의 권유가 애정으로 묵직함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떠난 오빠가 오직 나 한 명 때문에 괴로움을 무릅쓰고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나는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오빠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일단은 미안해. 아무것도 모르고 오빠를 히어로로만 봐와서.”

이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사과였다. 오빠는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은 말은 하지 말라는 듯, 오빠는 내가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너에게 그런 말을 듣고자 내 이야기를 해준 게 아니야. 내가 그 긴 시간을 버틴 이유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나?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만 묻자, 오빠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난 이름도 모르던 너를 처음 만난 날을 아직 기억해. 무너지는 창고 지붕 아래에서 널 빼냈을 때 내 품에 들어오고도 공간이 남는 작은 아이였지. 그래서 당연하게 상황을 파악할 정신이 돌아오면 울음을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고.”

그때도 참 이상한 아이였었지, 넌. 오빠가 중얼거리자 나는 오빠를 밉지 않게 흘겼다. 오빠의 입술 끝이 살짝 더 올라갔다.

“그런데 너는 날 보고 웃더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세상 환하게. 보는 사람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난 그날 너에게서 보았어.”

그다음에 너를 만나서 저택에 데려왔을 때도, 네게 능력을 쓰고 조절하는 법을 가르칠 때도, 아무 용건 없어도 종종 날 만나러 와줄 때도, 넌 언제나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지. 네가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했어. 하지만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을 테고, 더 이상 웃지 않을까 봐 두려웠어.

오빠의 진심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 보답으로 나는 옛적부터 오빠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오빠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웃음을 짓고 오빠와 눈을 맞췄다.

“오빠의 말은 잘 알아들었어. 그리고 다시 미안해. 그래도 난 히어로를 관두지 않을 거야.”

“왜?”

오빠는 화내지 않았다.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유를 알려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나 역시 나의 진심을 꺼낼 수 있었다.

“호의는 영원하지 않지만, 잠깐 스쳐 지나간 호의가 누군가에겐 구원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오빠의 호의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고, 내가 호의를 베풂으로서 다른 누군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의무감으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정말 원하는 거야.”

“호프.”

오빠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손을 뻗어 오빠의 손을 잡았다.

“오빠, 난 이름뿐만이 아닌, 진정한 희망이 되고 싶어.”

호의가 지속되지 않고, 악의는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희망이 되고 싶었다. 내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던 버스 기사님에게. 내게 계속 히어로로 남아달라고 부탁하던 어린아이에게. 나를 군중 속에서 빼내 주었던 할머니에게. 그리고 다섯 살 때부터 내 희망이 되어주었던 오빠에게도.

“살아간다는 건 그런 작은 희망의 연속이 아닐까? 언젠가 멈춰 서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고 싶어.”

삶은 작은 희망의 연속이다. 첫 번째 히어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소중한 유산이다. 그 후대의 히어로에게 이어지고, 또 그 후대로, 많은 시간을 지나 오빠에게로, 그리고 이제 내게로 내려온 꺼지지 않는 촛불이다.

“고마워, 오빠. 이젠 내 차례야.”

그 촛불은 위로이기도 하고, 격려이기도 하다. 내가 걸어갈 길이 순탄치 않을 걸 알고, 어쩌면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웅은 가는 길에 희망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오빠에게서 타오르는 희망의 횃불을 받아 들었다.

*

도시는 언제나처럼 활기찼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찾아가야 할 곳도 많았다. 오늘은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 사람도 많아 나는 한층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아무래도 이른 시일 내에 자전거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발을 멈췄다.

“히어로 아가씨! 오늘도 일하러 나왔어? 하루쯤은 푹 쉬고 나오지.”

평소에도 나를 보면 사탕이나 초콜릿을 하나씩 챙겨주는 아주머니였다. 그러다 병난다는 걱정에 나는 밝게 웃으며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사탕을 받았다.

“괜찮아요! 어제 일찍 들어가서 푹 쉬었거든요. 사탕 감사합니다.”

반가운 얼굴의 행렬은 하루 내내 이어졌다. 늘 똑같은 시간에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 기사님, 거뭇한 다크서클을 눈 밑에 달고서도 꼬박꼬박 인사해주는 대학생 오빠, 어제 나를 저택까지 데려다준 택시 기사님까지.

“히어로 언니, 정말 안 그만두는 거 맞죠?”

그리고 나를 위해 용감하게 나서준 꼬마 아가씨도 만났다. 학원을 끝마치고 나왔는지 책가방을 메고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아이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무릎을 굽혀 내 앞에 멈춰 선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당연하지. 난 네가 커서 내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 이 도시의 히어로로 남아있을 거야. 저번에 도와줘서 고마웠어. 정말 큰 힘이 됐어.”

아이가 나를 보며 환히 웃었다. 십오 년 전, 나를 보던 오빠의 마음이 이해될 만큼 보이는 순수한 호의에 나는 잠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갑자기 울상이 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빨리 들어가 봐야 하지? 곧 있으면 해가 질 테니까. 내일도 만나면 인사해주는 거야?”

“약속이에요!”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이가 히어로 언니도 잘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다가 멈칫했다. 아이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지나 내 뒤에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헤 벌어진 조그만 입술에서 소리 없는 달싹임이 나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오빠가 서 있었다. 밝게 켜진 가로등을 등지고 기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로, 오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어로님이다. 히어로님이 돌아오셨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를 두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오빠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세 뼘 남았을 때 나는 멈춰 섰다. 가까이 보이는 오빠의 그늘진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돌아온 거야, 오빠?”

오빠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함에 잠긴 눈가가 나를 내려다보며 살짝 휘었다.

“돌아왔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천천히 벗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오빠를 보며 눈부시게 미소 지었다.

“어서 와, 오빠. 잘 돌아왔어.”

오빠를 반기는 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오빠가 돌아온 후에도, 나는 여전히 도시의 히어로였다.


Written 22-12-21

25425자 (19170)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