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는 어디로 떠났을까
꿈 기반 단편선 (#210831)
상공 10미터.
그곳에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
*
전구가 전부 꺼진 드넓은 야외 공연장에 드는 빛은 달의 광채가 전부였다. 그 희미한 빛 아래 거대한 철봉으로 세워진 구조물의 윤곽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거미줄처럼 얽힌 와이어가 한 아이의 시선을 붙들었다.
리드가 침을 삼켰다. 곧이어 근처에 지켜보는 사람이 없나 확인하듯 고개가 휙휙 돌아가고 고사리 같은 손이 사다리를 잡았다. 쿵쾅대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굳건한 땅에서 발을 뗐다.
조금씩 시야가 높아졌다. 아직 키가 다 자라지 않아 손을 쭉 뻗어야 다음 사다리에 간신히 닿아서 숨이 금세 차올랐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건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었다.
한두 번 사다리를 오른 게 아닌 듯, 리드는 오래 지나지 않아 사다리 꼭대기에 도착했다. 아이는 봉을 붙들고 크지 않은 플랫폼 위로 몸을 올렸다. 그리고 다리를 플랫폼 바깥으로 내리고 언제봐도 벅차오르는 절경을 눈에 담았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이 작아지는 새의 시선으로.
길게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처음 공중그네 플랫폼에 올랐을 때는 무서워서 봉에서 손을 떼지도 못했다. 하지만 겁먹은 와중에도 이 시야에 압도당했던 건 선명하게 기억났다. 호기심에 몰래 올랐던 공중그네는 그 후로 리드의 꿈이 되었다. 언젠간 저 그네를 타고 새처럼 날고 싶다는.
‘열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극단의 단장 파인은 엄격한 얼굴로 리드에게 신신당부했다. 나이가 차고 네가 원한다면 곡예 기술을 가르쳐주겠지만, 그전에는 절대 그네를 오를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를 어겼다간 눈물 쏙 빠지게 혼쭐날 각오를 하라고.
리드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혼쭐날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어느 밤, 몰래 공중그네의 사다리를 올랐다. 아이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딱 한 번만이라고 생각한 게 몇 번이 되고, 비밀이자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네만큼은 리드도 건드리지 않았다. 단장의 경고가 없었더라도 공중그네라는 장치가 매력적인 만큼 위험하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구름이 없어 드물게 환히 내리쬐는 달빛이 아름다웠고, 바람은 선선했다. 리드는 꿈 같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딱 한 번이면 괜찮지 않을까? 어려운 곡예를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는 건 안전하지 않을까?
그네를 고정한 줄을 푸는 손이 떨려왔다. 두려움이 아닌 설렘 탓이었다. 리드는 그네 위로 한 다리를 걸치고 심호흡했다. 두 손이 그네의 줄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플랫폼에서 까치발로 선 발을 떼고 그네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허공을 날았다.
플랫폼 위에 올랐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환희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앞으로 높이, 반달을 그리며 다시 뒤로 높이 올랐다. 긴 곡선이 부드럽게 리드의 몸을 이끌었다.
한참을 그네에서 흔들리던 리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어느덧 하늘의 중천에서 기울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리드는 그네에서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플랫폼에 가까워지자 발을 쭉 뻗었다.
리드의 발이 빈 허공을 갈랐다. 당황을 삼키며 리드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플랫폼을 바라봤다. 입술을 꾹 물고 그네가 다시 플랫폼에 다다랐을 때 다리를 뻗었다. 여전히 한 뼘의 거리가 모자랐다.
왜지? 긴급상황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머리가 답을 내놓았다. 그네를 처음 밀어낼 때도 아슬아슬했던 거리는 착륙 시에 더 많은 여유를 요구했다. 그네에서 뛰어내리지 않고서야 리드에게 주어질 리 없는 여유였다.
손바닥에 땀이 맺혀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리드는 손을 떼서 옷에 문지르지도 못했다. 마지막 이성이 울고 싶은 본능을 억눌렀다. 울어봤자 해결되는 건 없고 힘만 빠질 터였다. 리드의 눈이 밑에 깔린 그물에 닿았다. 목숨은 건지겠지만, 스스로 추락하기엔 공포가 앞서 리드는 그넷줄을 더 세게 붙잡았다.
소리 지르면 단장님이 나를 내려줄 수 있을까? 혼이야 나겠지만, 평생 그네에 오르는 걸 금지당할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밑을 내려다보기가 아찔해 고개를 든 리드의 시야에 건너편 플랫폼이 들어왔다. 그곳에 리드가 아는 이가 서 있었다.
‘루.’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푸른끼 도는 하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은 동갑내기 친구가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내려 리드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왜 거기 있냐는 물음이 그에게 닿을 리 없었다. 리드는 멍하니 그가 반대편 그네를 푸는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벌렸다.
무얼 하냐고 물을 겨를도, 단장님을 불러달라고 부탁할 틈도 없었다. 루가 그네를 밀고 나왔다.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공중에서 그네 하나에 의지한 채로 아슬하니 흔들렸다.
루를 태운 그네가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가 떨리는 마음에 신기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루가 그네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하늘에서 리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드. 내 손 잡아.”
홀린 듯이 리드도 그네에서 손을 놓았다. 허공에서 손과 손이 맞닿았다. 루의 등 뒤로 푸른 날개가 비상하는 새처럼 펼쳐졌다.
*
깃털 망토가 허공에 휘날린다. 마치 한 쌍의 파랑새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저 아래 관객들이 숨을 삼킨다. 하나로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청년이 손을 뻗자 고운 하얀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청년이 그 손을 맞잡는다.
그네도 줄도 없이 허공에 서로만을 의지한 채 머무르는 것은 한순간.
언제 아찔한 묘기를 펼쳤냐는 듯, 둘은 다시 그네에 올라탄다. 검은 청년의 그네에는 이제 하얀 청년이, 그리고 하얀 청년의 그네에는 검은 청년이. 그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양측 플랫폼으로 돌아가고 둘은 사뿐히 플랫폼을 밟고 허리를 꾸벅 숙인다.
밑에서 우레와 같은 갈채가 터진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리드의 귀에는 그저 먹먹하게 들려온다.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열일곱 살 그네 곡예사의 가슴엔 여전히 이 높이가 가장 큰 울림이다.
건너편 플랫폼에서 루가 아래를 슬쩍 가리킨다. 입 모양을 정확히 읽어내기엔 먼 거리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기엔 어렵지 않다.
‘내려가자.’
심장이 아드레날린으로 힘차게 박동한다.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리드는 사다리에 발을 올린다. 이제는 쭉 뻗지 않아도 여유롭게 닿는 사다리를 한 칸씩 내려오자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점차 가까워진다. 공중그네를 선망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다른 극단의 구경거리를 찾아 발을 옮기는 어른들, 다음 곡예를 준비하며 바삐 뛰는 극단원들.
그 사이로 새카만 그림자가 리드의 눈에 띈다. 슬슬 흩어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검은 인영이 홀로 공중그네를 바라보고 있다. 검은 후드 망토가 드문 의상은 아니나,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 칸을 잡는 리드의 손이 멈춘다. 그를 목격한 게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드의 검푸른 눈동자가 그에게 박힌다. 저 검은 인영이 응시하는 건 공중그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땅에 발을 딛는 루다.
“리드, 안 내려와?”
리드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아래로 돌린다. 어느새 루가 사다리 밑으로 다가와 있다. 고개를 휙 돌려 주변을 둘러보지만, 수상한 인영은 온데간데없다. 사다리에 붙어 가만히 멈춘 리드를 루가 다시 재촉한다.
“얼른 와. 저기 천막에 불이 보인단 말이야.”
“뭐?”
불이 났다는 말에 리드가 기겁한다. 극단의 천막들은 불에 쉽게 타는 재질이라 화재라도 일어나면 피해가 커지기 일쑤다. 사다리를 마저 타고 내려오는 대신 훌쩍 뛰어내린 리드가 루의 팔을 붙든다.
“어딘데? 빨리 단장님부터 찾아서 알려야지!”
“저기. 별 모양 전구 쓰는 저 천막.”
루가 가리킨 방향에서 특정 천막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예상한 것과 달리 천막은 너무나도 멀쩡해 리드가 다음 말을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불이 났다며?”
“불이 보인다고.”
루의 새파란 눈이 온순하게 리드를 바라본다. 장난기는 일체 찾아볼 수 없어서 질 나쁜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기엔 어렵다. 머리를 팽팽 굴리던 리드가 한 결론에 다다른다.
“…저 천막에 조만간 불이 난다는 얘기지?”
팔을 잡은 손으로 그를 가까이 끌어당겨 속삭인 말에 루가 고개를 끄덕인다. 긴장이 탁 풀린 리드가 루의 팔을 놓고 한숨을 쉰다.
“내가 말은 좀 명확하게 해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런 말은 조심해서 하라고 한 것도 너잖아.”
하여간 대꾸는 잘한다며 투덜대고 리드가 몸을 돌리자 루가 바짝 따라붙는다. 지금 가보게? 천진난만하게 물어오는 질문에 리드가 척척 걸어가며 어깨를 으쓱인다.
“정확히 언제 일어나는 일인지 모르면 빨리 해결할수록 좋지. 우리 극단 바로 옆 천막이라 불나면 큰일이라고. 기억 안 나? 석 달 전에….”
들려오는 답이 없자 리드가 뒤돌아본다. 따라오다 말고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는 루를 발견하고 리드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조차 쉬지 않는다. 그저 다가가 소리 낮춰 물을 뿐이다.
“왜? 또 뭐가 보…“
쉿. 검지를 입술에 올린 루는 쳐다보는 곳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얼떨결에 입을 다문 리드가 루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 끝에 한 노파가 있다. 어린아이들이 노파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걸 보니 이야기꾼인듯싶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세월로 거칠어진, 그러나 다정함을 품은 목소리가 둘이 서 있는 곳까지 흘러온다.
“이곳은 이제 신이 버린 황폐해진 땅이지. 그래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단다. 슬픈 인생이라고 해서 웃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으냐. 그게 우리 이야기꾼이, 극단이 존재하는 이유지. 그래, 파랑새 이야기를 들려주마. 곡예사라면 다들 두르는 푸른 깃털 망토의 유래는 언제 들어도 좋은 이야기니까.”
리드가 루의 소매를 잡아끈다. 노파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루가 눈만 굴려서 리드를 쳐다본다. 말은 없어도 듣고 가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꼬리가 애처롭게 늘어진다. 예쁘장하게 생겨 단장님도 종종 못 이기듯 넘어가 주는 그 얼굴에도 리드는 꿈쩍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잖아. 파랑새의 전설이라면 과장 좀 보태 밥 먹는 횟수만큼 듣는다고. 텐트 불 처리하러 가야지.”
강하게 끌어당기자, 루가 마지못해 따라온다. 그러면서 계속 노파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는 게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는 꼴이다. 두 발짝 걷고 돌아보고, 세 발짝 걷고 돌아보고. 이러다가 텐트까지 가는데 한세월일 것 같아서 리드는 결국 약조한다.
“이따가 내가 해주면 되잖아, 파랑새 이야기.”
“진짜지? 약속이다?”
좋다고 다시 순순히 바짝 붙어 따라오는 루를 보며 리드는 미간을 짚는다. 지겹도록 들은 그 얘기가 뭐가 그리 좋냐고 타박하는 리드에게 루는 대답하는 대신 텐트를 가리킨다. 상앗빛 천이 드리워진 입구에 자잘한 별 모양 조명이 장식되어 있다. 극단 이름이 별자리 극단이었던가. 근래 리드네 극단과 이동 경로가 같아서 캠프를 공유한 지 오래되어 부쩍 친숙한 얼굴이 늘었더랬지. 마침 지나가는 극단원이 둘을 보고 아는체한다.
“어어, 잡초들아. 여긴 무슨 일이냐?”
“우리도 엄연한 이름이 있거든요?”
별자리 극단원이 깔깔 웃는다. 뚱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리드도 별로 화가 난 건 아니다. 안면 있는 타 극단의 사람들은 원래 파인네 단원들을 잡초라고 불렀다. 극단 단장 파인이 이름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주워 풀에서 딴 이름을 붙여주는 탓이었다. 참으로 괴상한 작명 센스가 따로 없다며 리드는 벌써 수백 번째 생각한다.
‘풀이 어떻고, 잡초가 어때서. 버려지고 방치당해도 튼튼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으라는 축복을 담은 이름 아니더냐.’
그렇게 잡초가 좋으면 극단 이름을 하늘날개가 아닌 잡초 극단으로 짓지 그랬냐고 한마디 했다가 리드는 가볍게 꿀밤을 맞았더랬다. 그래도 리드는 파인이 지어준 이름에 불만은 없다. 휘청일지언정 쓰러지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줬다고 했던가. 제 이름 뜻이 고작 갈대라는 걸 깨달은 꼬맹이에게 급하게 둘러댄 변명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누군가 애정을 갖고 지어준 이름이니 리드는 그걸 소중히 여길 줄 안다. 어찌 됐든 리드에게 가족이란 파인 단장과 루를 비롯한 하늘날개 극단원밖에 없었으니까.
“어라, 파인네 아이들 아니야? 파인이 좀 전에 너희 어디 갔냐고 찾고 있던데. 여기 볼일 있어?”
다른 별자리 극단원이 지나가다가 인사를 던진다. 일어나지도 않은 화재 점검차 왔다고 할 순 없기에 리드는 빠르게 둘러댄다.
“루가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왔어요. 곧 갈 거예요.”
허술한 변명이었음에도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럴 땐 멍하니 정신을 반쯤 꿈나라에 두고 다니는 루의 괴짜 기질이 도움이 된다고 리드가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대신 평소에 그를 챙기는 것은 전부 리드의 몫이 되었지만.
운 좋게도 별자리 극단원들은 곧이어 자리를 뜬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리드가 루의 팔을 툭툭 친다. 어디쯤이야? 주어 없는 질문에 루가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본다. 초점이 사라진 푸른색 눈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춘다.
“전선?”
“응.”
리드의 간결한 질문에 루도 짧게 대답한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리드가 무릎 꿇고 텐트 언저리에 엉킨 전선을 확인한다. 낡은 전선이라 철사가 삐져나오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라서 리드는 혀를 차며 아예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도 전선 테이프로 감는 조치밖에 할 줄 모르는데… 기술자 아저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얘기하고 가야 하나….”
“리드, 시간 있어?”
누구는 심각하게 고민 중인데 그런 해맑은 질문이라니. 리드가 눈을 치켜뜨고 루를 돌아보지만, 그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잡고 손장난하며 그저 빙긋 웃는다.
“기다릴 거면 시간 남잖아. 네가 고칠 수 있는 거 아니라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열은 받는다. 옆에 다가와 폭 주저앉는 루의 볼을 쭉 잡아 늘일지 고민하는 리드에게 예쁜 미소가 닿는다.
“이야기해준다며. 들려줘.”
*
“이야기할 시간 있어?”
“지금?”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할 건데?”
리드가 빗자루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루를 응시했다. 마찬가지로 빗자루를 손에 들고 바닥을 설렁설렁 쓸던 루가 맹하니 웃는 표정만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아무 일 없었다고 믿을 법했다.
그러나 리드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네에 앉아 하늘을 날았던 감각을. 한 사람의 손에만 의지해 허공에 부유했던 공포를. 두 눈을 가득 채운 푸른 날개가 싹틔운 경외심을.
당장이라도 우다다 쏟아내고 싶은 질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리드는 물어도 되는 것, 물어선 안 되는 것을 충분히 구분할 줄 알았다. 도망가기 직전의 소동물 앞에서 무기가 없다는 걸 보여주듯 리드가 빗자루에서 한 손을 떼서 들어 올렸다.
그 의도가 제대로 닿았는지는 몰랐다. 그저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루를 보고 리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젯밤 왜 그네에 올라왔었어?”
그네라는 단어를 꺼내기 전에 리드는 주변을 휙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단장님까지 불러서 혼날 각오를 했다지만, 천운이 따라 어른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그네에서 내려온 리드는 제 잘못을 자백할 마음을 단번에 접었다.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으면 됐지, 뭐. 다음부터는 조심하고. 그렇게 성의 없이 미래의 저와 약속했지만, 루가 만약 고자질이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터였다. 그래서 하루 종일 루를 예의주시했지만, 그 역시 단장을 찾는 일이 없었다.
말하면 그네에 오른 본인도 혼날 테니 그런가? 그래서 덮어주기로 한 건가? 그도 아니면 숨기는 비밀이 있어서?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리드는 결국 막내들에게 일임된 청소 시간에 루를 찾아 붙들었다. 루는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그네?”
아예 모르쇠 나오는 루를 보자니 리드는 김이 새버렸다. 그래, 꼰지를 생각만 없으면 됐지. 그래도 큰 도움을 받은 건 맞으니, 리드는 선선하게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아냐, 됐어. 어쨌든 어제는 고마웠어.”
“길이 보이길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떨어지는 걸 봤어.”
청소나 빨리 끝마치고 가려던 리드의 손이 빗자루를 쥐고 굳었다. 리드는 돌아보지 않고 루의 말을 정정하려고 했다.
“떨어질 뻔한 걸 봤다는 거겠지.”
“떨어지는 걸 봤어.”
리드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기껏 덮어주려고 했더니 할 말 담아둘 말 전부 꺼내놓는 저 애를 어떡하면 좋나 싶어 리드는 빗자루를 팽개쳤다. 그가 홱 돌아서 제 어깨를 붙들든 말든 루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맑게 웃었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리드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그런 말은 좀 조심해서 해. 아니, 그냥 하지 마. 너 진짜 큰일 나는 수가 있어.”
가벼운 어깨의 으쓱임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그가 영 말귀를 못 알아먹은 것 같아 리드가 가슴을 쳤다. 구운 지 일주일 넘은 퍽퍽한 비스킷을 먹었을 때도 이렇게 답답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도와준 건 고마워. 그런데 이런 건 함부로 말하고 다녔다간 큰일 난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먼저 손을 내민 건 너였으니까.”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리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루의 어깨에서 손을 떼자, 루가 구겨진 소매를 쭉쭉 잡아 폈다. 그러다가 슬쩍 비슷한 눈높이에 있는 리드의 검푸른 눈을 들여다봤다. 저를 마주 보는 새파란 시선에 압도된 것도 잠시였다.
“안 물어봐?”
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에 관한 것이려나 물어보려던 리드의 말문이 막혔다. 팔락팔락. 팔꿈치를 몸에 딱 붙이고 두 손만 어깨높이로 올려 위아래로 흔드는 동작. 누가 봐도 날개를 지칭하는 손짓에 리드는 기겁해서 재빨리 루의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은 취소였다. 그냥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이따위로 조심성 없이 굴 리 없었다.
“너 진짜 이럴래? 너… 너 그거잖아. 그거 맞지?”
파랑새. 단어는 소리 없이 입 모양을 타고 흘렀다. 사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기에 리드는 루가 입을 열고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요지는 따로 있었다.
“절대 입 밖으로 내면 안 돼. 날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날개를 다시 꺼내서도 안 돼. 네가 그거라는 게 알려지면 까마귀가 와서 널 잡아갈 수도 있다고.”
“까마귀?”
리드는 속이 터져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낀 잿빛 하늘이 저를 반겨주었다. 답답함이 전혀 해소되지 못한 채로 리드가 루의 손을 놓고 팔짱을 꼈다.
“넌 파랑새 전설도 못 들어봤어?”
루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길게 기른 하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들려줘. 천진난만한 요구에 리드는 한숨을 쉬고 근처 소품 상자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옆을 탁탁 치자 루가 리드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재촉했다.
“얼른 해줘. 누가 전설 이야기해 주겠다고 한 거 처음이야.”
“너무 기대하지 마. 나도 옛날에 이야기꾼 할머니한테서 들은 건데, 그만큼 재미있게 해준다고는 약속 못 하니까.”
루는 리드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한층 격렬해진 초롱초롱한 눈빛에 리드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나이를 먹어 갈라진, 그러나 뚜렷했던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세월을 타고 흘러와 리드의 입술 끝에 머물렀다.
*
아가,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먼 옛날, 이 황폐한 땅도 푸르고 풍요로웠던 때가 있었단다. 전쟁도 없고, 굶주리지도 않고, 눈물 흘리지도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 저 먼 상공 위에 존재한다는 천국을 쏙 베껴온 것 같은 지상낙원에서 사람들은 행복했어.
다만 불행의 신의 시기를 샀는지, 주기가 지날 때마다 땅에 재앙이 내려왔단다. 어떤 때는 가뭄으로, 홍수로, 어떤 때는 지진으로. 그때마다 낙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사람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다시 낙원을 재건했지. 그들에게는 파랑새가 있었으니까.
파랑새라고 불리긴 했지만, 그들도 겉은 인간과 크게 다르진 않았지. 우리와 같은 몸, 이목구비, 두 팔과 다리 또한 있었어. 다만 그들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두 개의 축복을 지녔었지. 하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푸른색의 날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행을 예지하는 눈.
그들은 자애의 신이 보낸 천사라 불리며 재앙이 오는 시기를 예지했고, 사람들은 충분히 재앙에 대비할 수 있었어. 재앙이 지나간 후 다 함께 낙원을 재건하며 사람들과 파랑새는 공생했단다. 그렇게 파랑새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상징이 되었지.
하지만 행복한 시간에도 끝은 있기 마련이란다. 재앙은 더 자주 찾아왔고, 파랑새는 하나둘 보이지 않게 됐어. 파랑새가 없어진 자리에는 새카만 까마귀만이 남아있었지. 불행의 신이 보낸 사자가 파랑새를 잡아갔다며 사람들은 불안해했어.
파랑새는 사라졌고, 낙원은 종말을 맞이했단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고. 행복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누군가가 나섰어. 평소에 잔재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곤 했던 광대였지. 그는 극단을 만들어 매일 사람들 앞에서 공연했단다. 등 뒤에 염색한 깃털로 만든 푸른 날개를 매달고.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오는 순간까지, 우리 웃음을 잃지 말아요.’
그 덕분에 잿빛이 된 하늘 아래, 검게 오염된 땅을 딛고 사람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 공연을 보고 감동해서 극단에 들어오는 이들도 늘어났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황폐하지만, 극단은 하나둘 늘어나 명맥을 굳게 이어오고 있단다.
그러니 아가, 유랑하는 극단으로서 선대의 유지를 잊지 말거라. 파랑새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들의 노고로 우리는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루가 박수를 친다.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리드를 졸라 들은 이야기지만, 보여주는 열정적인 반응은 언제나 한결같다. 박수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기에 리드는 기꺼이 관심을 만끽한다.
강풍이 훅 불어온다. 텐트가 막아주는 방향이 아니어서 리드와 루는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인다. 이 부근의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바람은 금세 잠잠해지지만, 그 여파는 말썽이 된 둘의 머리카락에 잔류한다.
“아, 진짜. 묶었는데도 엉키고, 풀면 또 엉키고. 머리카락을 확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아깝잖아. 열심히 길렀으면서.”
“공중그네 탈 때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멋있거든. 곡예에서 멋이 얼마나 중요한데.”
하지만 멋을 위해 얼마나 많은 귀찮음을 자신이 그네 아래서 감수하는지 사람들은 모를 거라며 리드가 투덜댄다. 리드가 두 손으로 쥐고 씨름하던 머리카락을 루가 가져가서 풀어낸다. 벌써 정돈된 루의 하얀 머리카락을 힐끗 보고 리드가 중얼거린다.
“내 머리카락도 네 것처럼 하얬으면 좋겠다. 까마귀 같은 이 시꺼먼 색이 아니라.”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그러나 이루어질 리 없으니 별 뜻 없는 푸념에 가깝다. 이보다 어렸을 적엔 정말로 까마귀의 불길한 색이라며 다른 아이들에게 짓궂은 놀림도 많이 당했었지. 지금에야 무시하고 넘길 수 있지만, 아직도 기억날 만큼 그때의 여린 마음에는 비유가 상처로 남았었다.
“굳이 하얀색은 아닐지라도, 불행의 새를 닮은 검은색일 건 뭐람.”
“하지만 까마귀는 불행의 새가 아닌걸.”
“…너 여태 뭘 들은 거야?”
리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야말로 루의 볼을 쭉 잡아 늘이자, 루가 아프다며 울상짓는다. 약간 붉어진 볼을 놓고 리드가 팔짱을 낀다.
“전설에 따르면 파랑새가 사라진 자리엔 늘 까마귀가 남아있었다고 했잖아. 까마귀가 잡아간 게 틀림없지.”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었을 수도 있고.”
“네가 와전이라는 단어도 알아? 그럼 넌 까마귀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안내자.”
뜬금없는 단어에 리드가 눈썹을 모은다.
“불행으로 안내하는?”
“어느 곳으로든.”
끝까지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루가 일어선다. 리드가 따라서 몸을 일으키고 바지의 흙을 탈탈 터는 것을 보며 루가 싱긋 웃는다.
“그리고 검은색이 뭐가 어때서? 난 네 머리카락 색도 정말 좋아하는데.”
“그래? 물물교환하듯 딱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검은색은 불길한 게 맞아. 안 그래도 네 주변에….”
투덜대던 리드의 말이 끊어진다. 리드의 눈이 텐트 너머, 아까 노파가 이야기를 들려주던 곳에 고정된다. 검은 망토 아래 눈은 보이지 않지만, 또다시 나타난 검은 인영이 둘을 바라보는 건 확실하다. 본능적으로 루의 팔을 잡자, 루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다.
“왜 그래?”
루의 시선이 리드의 것을 따라가지만, 검은 인영은 그새 사라지고 없다. 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돌아보고, 리드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다.
오늘만 두 번째, 이번 주에만 일곱 번째 검은 인영이 루의 주변을 맴도는 것을 포착했다. 맹한 루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리드가 홀로 삼키는 불안도 늘었다. 넌지시 단장 파인을 포함한 어른 극단원들에게 수상쩍은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는지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
리드가 처음 검은 인영을 목격한 시기는 이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나, 그 인영을 인지하고부터는 보지 못한 척 넘어갈 수 없었다. 처음엔 자신을 따라다니는 귀신인 줄 알고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그 수상한 시선 끝에는 자신이 아닌 루가 있다는 걸 깨닫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를 납치하는 노예 상인인가, 아니면 단순한 도둑인가 의심했으나 검은 인영은 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우연인가 싶어 리드는 한시름 놓았었다.
그러나 갈수록 검은 인영이 눈에 띄는 빈도가 늘어나자, 불안은 다시 몸집을 부풀린다. 다음에 보이면 반드시 쫓아가 보겠다고 다짐하는 리드의 어깨를 루가 흔든다.
“왜?”
초조한 짜증이 깃든 리드의 질문에 답한 건 루가 아니다.
“웬일로 루가 아니라 리드 네가 정신을 빼놓고 있냐?”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아직 외우지 못한 별자리 극단의 기술자다. 여기서 뭣하냐는 듯 눈썹을 둥글게 추켜세우는 남자를 보자 리드의 정신이 퍼뜩 현재로 돌아온다. 루가 먼저 수습에 나선다.
“잠깐 놀러 왔다가 뭔갈 발견했는데, 리드가 그걸 아저씨한테 말하고 가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게 뭐였냐면….”
루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기술자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는 걸 보며 리드가 한숨을 쉰다.
“전선 철사가 삐져나온 부분을 발견했어요. 몇 달 전 크리스타 씨네 극단에서 발생한 화재도 불량 전선 때문이라고 해서, 알려드리고 가려고 했어요.”
기술자의 시선이 리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간다. 이리저리 엉킨 전선을 보는 기술자의 이마가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주름진다.
“점검할 때가 지나긴 했지…. 어휴, 그런데 진짜 오래 방치한 것도 아닌데 전선은 왜 맨날 저 꼬라지가 나는지. 아무튼 알려줘서 고맙다, 꼬맹이들아. 어여 가봐라. 잡초 대장이 너희 어디 갔냐고 찾고 있더라.”
할 말을 다 했는지 기술자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리드와 루에게서 신경을 끈다. 리드가 슬쩍 돌아보자 하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던 루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괜찮다는 뜻이다. 리드가 길게 숨을 내뱉고 발길을 돌린다. 루가 그 뒤를 총총 따라붙는다.
별자리 극단의 텐트에서 조금 멀어지자, 리드가 발걸음을 멈춘다. 귀신같이 따라 멈춘 루가 리드의 어깨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민다.
“왜 그래?”
단시간에 두 번째 받는 질문에 리드는 아까 끝맺지 못한 질문을 꺼낸다.
“너 요즘 주변에 수상한 사람 본 적 없어?”
“수상한 사람?”
질문에 질문이 돌아온다. 리드는 인상을 쓰고 루는 곰곰이 고민하듯 파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다. 짧은 기다림 끝에 나온 답은 허탈할 만큼 순진하다.
“없는데?”
리드가 한숨을 쉬고 돌아서서 루의 어깨를 잡는다. 세지 않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염려와 답답함이 섞여 있다.
“정신 빼놓지 말고 신경 쓰고 다녀. 요즘 자꾸 검은 망토를 입은 수상한 사람이 네 근처에 보인단 말이야. 불길하기 짝이 없다고. 납치범이나 노예 상인이면 어떡해.”
“그럴 일 없어. 걱정하지 마.”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핀잔주려다가 리드는 입을 다문다. 아무렴 루는 다가오는 불행을 감지할 수 있으니, 위험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 터다. 그래도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해 입술을 굳게 다문 리드를 보고 루가 빙긋 웃는다.
“내가 말했잖아. 검은색은 안내자를 상징하는 색이라고.”
“뭐, 그럼 우리 극단의 다음 행선지라도 점지해 주러 온 사람이란 뜻이야?”
루가 어깨를 붙들린 채로 으쓱인다. 그냥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제나처럼 가벼운 어조에 결국 리드의 손에서도 힘이 빠진다. 팔짱을 끼고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리드의 등을 루가 슬쩍 찌른다.
“가자. 모레도 공연이 있으니 연습해야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리드를 루가 조금씩 밀며 보챈다. 마지못해 다시 걸음을 옮기는 리드의 시야에 하늘로 높게 솟은 공중그네가 들어온다. 언제 봐도 고양감이 차오르는 광경에 리드의 입꼬리가 마음에 묻은 불편한 의구심을 배신한다.
*
오늘 밤 공중그네에 몰래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이제 아침이면 공식적으로 단장의 허가를 받아 그네에 올라갈 수 있는데, 들키고 혼날 위험부담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가슴이 설레 잠이 오지 않아, 잠깐만 마음을 다스리려 그네만 올려다보려고 한 리드의 눈에 이질적이지만 낯익은 색채가 들어왔다.
달빛 아래에서 오묘한 푸른빛을 띠는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루가 왜 혼자 저곳에? 의아함에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현재 시각을 자각하고 리드는 스스로 목소리를 삼켰다. 다들 잠들었을 테지만, 혹여 누군가 듣고 깨기라도 하면 루는 틀림없이 징계받을 터였다. 리드는 그 정도로 의리가 없진 않았다.
루가 선 높이를 올려다보는 시야에 검은색 물체가 잡혔다. 어디서 날아온 천 쪼가리인가 싶어 팔을 휘저어 물체를 낚아채자,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리드가 눈을 찌푸리며 손을 내려다보고 일순 굳었다. 손에 잡힌 건 검은색 새 깃털이었다.
까마귀. 까마귀가 근처에 있나? 루를 잡아가려고 왔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 리드는 더 이상 파랑새의 전설을 맹신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온전히 허구의 이야기라고 넘기지도 못했다. 루의 푸른 날개를 직접 눈으로 봤는데, 어떻게 그랬겠는가. 그러니 본능이었을 터다. 리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공중그네의 사다리를 올라갔다.
루가 서 있는 플랫폼에 다다랐을 무렵, 리드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리드가 바들거리는 팔을 뻗어 플랫폼 위로 몸을 올리자 달을 응시하던 루가 고개를 숙여 리드를 내려다보았다. 죽을힘을 다해 사다리를 오른 제 마음도 몰라주는 저 해맑은 미소를 보니 리드는 당장이라도 루의 뺨을 잡아당기고 싶었다. 다리까지 후들거리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리했을 터였다.
“잠이 안 와서 올라왔어?”
“너… 진짜… 후우, 내가 말을 말자.”
루의 맥 빠지는 질문을 넘기고 플랫폼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니 리드의 마음에 기묘한 평화가 찾아왔다. 하늘과 맞닿은 아찔한 높이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온이었다. 이 높이를 제외한 세상 다른 모든 것들이 중요치 않게 느껴지는 감각에 취해 리드는 결국 검은 깃털에 관해 루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편안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루의 맑은 목소리였다.
“날이 밝으면 공식적으로 공중그네를 탈 수 있겠네?”
“긴 기다림이었지.”
“얌전히 기다린 건 아니잖아.”
얄밉게 들리는 대답에 리드는 눈썹을 추켜세웠고 루는 간단히 외면했다. 네가 파랑새처럼 하늘을 날면 그 광경이 정말 예쁘겠다. 반대편 플랫폼을 향해 한 손을 쭉 뻗고 중얼거리는 루의 진심 어린 말에 리드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봤자 진짜 파랑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새처럼 날아다니던 곡예사 선배들을 동경해서 그네를 타고 싶었던 건 맞지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예의적 차원의 응원이라기엔 너무 확신이 담긴 어조라서 리드도 웃었다. 불행을 예지하는 눈이 행운을 예지하기도 하나? 리드가 몸에 힘을 빼고 플랫폼에 등을 대고 누웠다. 플랫폼 너머로 삐져나온 발을 덜렁덜렁 흔들며 리드가 하늘을 보고 물었다.
“있잖아, 파랑새는 전부 어디로 갔을까? 곡예사는 하늘을 날아도 결국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루의 파랗게 빛나는 눈도 리드가 보는 하늘로 향했다. 골똘히 생각하듯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것 치고는 별 볼 일 없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뭐, 전설에 나오는 낙원 같은 곳?”
답이 성의 없다며 투덜거리는 리드를 보며 루가 손뼉을 쳤다. 맞아, 낙원으로 갔겠지. 리드가 한숨을 푹 쉬고 몸을 일으켰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거나, 말하기 싫으면 말하기 싫다고 하거나.”
“그렇지만 거짓말은 아닐걸.”
또 또 저 애매한 대답. 그들이 있는 곳이 공중그네 플랫폼만 아니었어도 리드는 벌떡 일어서서 루의 뺨을 꼬집었을 터였다. 리드의 눈이 샐쭉 가늘어져 루를 흘겨보았다.
“그렇다고 치자. 그럼 너는? 그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이번에 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름에 잠시 가렸던 달빛이 루의 머리카락 위로 쏟아져 내리자, 그 모습이 기이하게 비현실적으로 보여 리드는 그가 제 앞에서 사라질까 덜컥 불안해졌다. 탁 소리가 나게 그의 손을 잡자, 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드를 쳐다보았다.
“너 아직 하고 싶은 종목 안 정했지? 같이 공중그네 곡예 배우자. 나도 공식 곡예사가 되면 파트너가 필요한데, 지금 선배들은 다 고정 파트너가 있잖아. 너도 공중그네가 싫은 건 아닌 것 같고.”
얼떨결에 꺼낸 말이었으나, 갈수록 제안은 리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정도면 나름 친한 사이고, 공중그네에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는 편 아닌가? 루는 여전히 말없이 리드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조금 머쓱해진 리드가 루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저 그네 위에 오르면, 어쩌면 낙원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분이 들 수도 있잖아?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낙원. 루가 단어를 입속에서 굴리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맑은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좋아. 하자.”
진짜지? 리드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아침이 되어 마음 바꾸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 리드를 보며 루는 그저 생글생글 웃었다. 같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티 나지 않게 숨기려 애쓰던 리드의 시선이 그네에, 그리고 하늘에 닿았다.
“그런데 정말 높이 오를수록 낙원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딱히 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으나, 한 들숨의 찰나가 지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리드의 귓가에 다다랐다.
“그건 우리가 내일 날아보면 알 수 있겠지.”
*
“루, 얜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하늘날개 극단 소유의 텐트를 전부 뒤지고도 제 공중그네 파트너를 찾는데 허탕 친 리드가 짜증 어린 한탄을 내뱉는다. 공연이 시작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 평소라면 공연 의상을 차려입고 실없는 얘기나 하며 리드의 옆에 붙어있었을 루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날개 극단이 할당받은 캠프 부지를 방황하던 리드는 결국 그를 찾아 옆 극단 텐트로 조급히 걷는다.
“가지 않을 거야. 아직은.”
몇십 걸음 가지 않아 수확이 있다. 루의 꿈꾸는 듯 부유하는 목소리에 드문 단단함이 서려 있어 리드는 처음엔 그냥 지나칠 뻔한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쳐나가는 대신 텐트 뒤로 몸을 숨긴 건 본능이다. 머리만 슬쩍 내민 리드는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챈다.
멀지 않은 곳에 등을 돌리고 선 루는 혼자가 아니다. 그 앞에 있는 검은 인영은 리드의 눈에 익은 이다.
올 게 왔구나. 까마귀가 파랑새인 루를 잡아가려고 온 거야. 주변에 그를 쫓아낼 무기로 쓸만한 막대기라도 있나 두리번거리던 차에 검은 인영의 낮은 음성이 리드를 붙든다.
“벌써 그렇게 미뤄온 것만 몇 년인지 아나? 이젠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억지로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었나? 납치범이 납치당할 사람의 의사를 묻기도 하나?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온 혼란을 틈타 루와 검은 인영의 대화는 계속된다. 검은 인영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깃든다.
“이번엔 또 이유가 뭐지?”
“곧 공중그네 공연이 시작하거든. 리드가 기다리고 있어.”
본인의 이름이 들려오자 리드가 움찔하고 정신을 차린다. 다시 머리를 텐트 뒤에서 내밀자, 루가 할 말이 끝난 듯 가볍게 돌아서고 있다. 푸른 깃털 망토가 그 움직임을 따라 휘날린다.
“그 가짜 날개를 달고 인간행세를 하는 게 그리도 즐거운가?”
얼굴이 반쯤 돌아가 있음에도 루 특유의 해맑은 미소는 선명하다.
“궁금하면 공연 보러 와. 인간도 제법 높게 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줄게.”
루가 머리를 완전히 돌리기 전에 리드는 텐트 뒤로 숨는다. 이유 모를 긴장감에 가슴이 무섭게 뛰고 있다. 리드는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제야 공연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루가 떠난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곳에 검은 인영이 리드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쉿.”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검은 인영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걸로 손쉽게 막는다. 리드는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그를 올려다본다. 멀리서 본 적은 여러 번이지만, 이리 가까이서 그를 보는 건 처음이다.
검은 망토, 검은 피부,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 후드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분명 머리카락도 저를 닮은 불길한 검은색이겠지. 그 생각까지 닿자 짜증이 두려움을 이긴다. 리드는 꼿꼿이 가슴을 편다.
“이상한 짓을 하면 소리 질러서 사람을 부를 거야.”
“정말로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인가? 너도 나에게 묻고 싶은 게 적지 않을 텐데.”
가까이서 들은 그의 목소리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처럼 거칠다. 그 어조에 공격성은 느껴지지 않아 리드의 어깨에 긴장이 약간 풀린다. 그러나 눈에는 의심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여태까지 슬쩍 도망 다니다가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뭔데?”
검은 인영은 리드의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네 친구가 영원히 날개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너도 원하는 일이 아닐 텐데. 정말 그 아이를 친구라고 여긴다면 말이지.”
“날개를 잃는다니?”
그에게서 어떠한 답이 나오든 단단히 쏘아붙여 주리라 준비한 모든 말이 하얗게 지워진다. 리드의 손이 검은 인영의 망토를 낚아챈다. 손안에 느껴지는 천이 마치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다.
“파랑새는 너희 까마귀들이 전부 잡아가서 사라진 거잖아.”
“이제는 전설이 그렇게 구전되고 있나?”
그는 리드의 손을 억지로 떨쳐내는 대신 빤히 내려다본다. 새카만 동공이 저를 응시하자 리드는 위압감에 침을 삼킨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건 그의 성정이 아니기에 꾸역꾸역 질문을 내뱉는다.
“그게 아니라면 왜 계속 루의 근처를 맴도는 건데?”
“그 아이가 날개를 잃기 전에 낙원으로 인도하는 게 내 역할이니까.”
“낙원?”
혓바닥에 굴러가는 단어는 친근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다. 파랑새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과 더불어 살며 지상낙원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 검은 인영도 그리 생각했는지 낙원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파랑새는 재앙을 예지하는 눈을 가지고 땅에 내려와 인간을 도우며 살았지. 하지만 그들은 본래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땅에 오래 머물러있으면 날개를 잃어버리게 돼. 날개와 함께 재앙을 보는 눈도, 힘도 사라지고 다시는 하늘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낮고 거친 목소리는 이따금 들려오던 이야기꾼 할머니와 비슷하게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리드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파랑새는 천성이 자애로웠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잊을 만큼 인간을 사랑했지. 그래서 그들을 다시 하늘로 이끌기 위해 우리가 내려왔다. 그들이 나는 것을 잊기 전에.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검은 인영이 망토를 붙잡은 리드의 손을 거칠지 않게 떼어낸다. 새롭게 들은 파랑새의 이야기로 생각이 어지러워 리드의 갈 곳 잃은 손이 허공을 헤맨다.
“그 아이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코앞에 닥친 재앙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테지. 곧 날개를 꺼내는 방법도 잊어버리게 될 터다. 날개를 잃은 파랑새는 두 팔을 잃은 인간이나 다름없지.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바인가?”
힐난의 어조는 아니다. 그러나 건조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질문은 리드의 목구멍으로 얼음물을 쏟아붓는다. 꺼내려던 말이 마비되어 차마 나오지 못하게끔.
“네가 그 아이를 설득해주었으면 한다.”
리드가 땅을 내려다본다. 만약에 자신이 더 이상 공중그네에 올라서 하늘을 날지 못한다고 하면, 그 자유를 상실하고도 저는 행복할 수 있을까? 답을 확신할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뱅글뱅글 돌아간다.
파랑새는 전부 어디로 떠났을까? 날개를 잃기 전에, 다들 낙원으로 떠나갔을까? 리드가 고개를 들자,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이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
루가 시야에 보이지 않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과 별개로 루는 신출귀몰해 극단의 어른들은 리드에게 루의 행방을 묻기 일쑤였다. 루가 어디로 사라질지 저한테 일러주고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제게 묻느냐고 짜증 낸 것도 몇 번이었지만, 그때마다 단장 파인은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네가 데려왔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벌써 몇 번째 이 핑계를 우려먹는지 모르겠다며 리드는 투덜댔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아 루를 찾아내는 건 늘 그의 몫이 되었다. 극단 내에서 유일한 또래 친구여서 그랬는지, 감이 좋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리드는 루를 찾아내는 데 도가 텄고, 비공식적으로 루의 담당을 맡게 되었다.
공중그네에서의 일이 있었던 이후로 리드는 어른들의 재촉이 없어도 루를 찾아 곁에 두기 시작했다. 파인을 비롯한 단원들은 그렇게 귀찮아하더니 언제 그리 친해졌냐며 놀리기 일쑤였지만, 리드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몰래 공중그네에 올라 큰일 날뻔했던 걸 어떻게 실토할 것이며, 루가 사실은 전설에 나오는 파랑새라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둘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돈독하게 만들었다.
루는 매번 저를 찾으러 오는 리드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되려 이끄는 대로 졸졸 잘 따라다녀서 리드는 졸지에 병아리를 키우는 어미 닭이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야! 루! 너 거기 올라가서 뭐 하는 거야!”
정말로 사고뭉치 병아리를 감시하는 기분이 들어 리드는 때때로, 아니, 자주 아찔해졌다. 이날도 다르지 않았다. 고정되지도 않은 사다리를 타고 텐트 창고 선반으로 올라간 루를 본 순간 리드는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사다리 끝에 매달렸다. 가벼운 아이 하나가 밑에서 사다리를 붙잡는다고 뭐가 달라지리란 생각은 들지 않아 리드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루를 협박했다.
“당장 내려와! 너 거기서 떨어지면 최소한 뭔가 부러진다고. 운 좋으면 팔이거나! 운 나쁘면 목이거나!”
“잠깐만. 이거만 치우면 되거든.”
“잠깐이고 뭐고 내려오라고!”
그러나 루는 리드가 길길이 날뛰든 말든 느긋하리만치 차분하게 선반 위를 뒤적거렸다. 그를 잡으러 올라갈 수도 없어 리드는 사다리를 끌어안고 발만 굴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루가 나지막하게 찾았다는 말과 함께 작은 상자를 품에 안았다. 리드는 결국 버럭 화를 냈다.
“이번에도 내 말 안 들으면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알았어, 지금 내려갈게.”
원하는 걸 얻어서인지 루는 순순히 사다리를 한칸 한칸 밟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루가 다 내려오고 나서야 리드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사다리에서 뗐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루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생각으로 저길 혼자 올라간 거야? 찾을 게 있으면 어른을 불러!”
선반에서 가지고 온 상자를 안고 루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그 해맑은 미소가 더욱 분통을 터트려 리드는 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세차게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고 리드는 다시 일어서서 루의 품에 든 상자를 뺏어 들었다.
“대체 이게 뭔데 이 사달을 낸 거야?”
“폭죽.”
상자를 열어젖히려던 손이 멈칫했다. 화재 위험에 관해선 리드도 지겹도록 반복 교육을 받았던 터라 리드는 조심스레 상자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루의 하늘색 눈과 리드의 검푸른 눈이 몇 초간 상자에 머물렀다.
“…그래서 이건 왜 가지고 온 건데? 폭죽놀이라도 하고 싶었어?”
“선반이 무너지면서 폭죽이 터졌거든. 큰 불이 났어.”
이미 말은 다 나왔지만, 리드가 뒤늦게 손을 덮어 루의 입을 막았다. 제발 그런 말은 조심해서 해. 루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리드는 숨을 길게 내쉬며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곧 폭발할 위험물질을 경계하는 것처럼 상자를 노려보던 리드가 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상자는 우연히 창고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걸 발견했다고 어른들한테 얘기하자. 선반이 많이 삐걱거리는 것 같다고 덧붙이면 네가 말한 사고가 일어나진 않겠지.”
“응, 그럼 괜찮을 거야.”
허무하리만큼 가볍게 문제는 종결되었다. 상자를 구석에다 밀어놓고 발길을 돌리려던 리드가 갑자기 돌아서서 루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란 기색도 없이 루는 눈만 깜빡였다.
“너 또 이럴 거지?”
“뭘?”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보이면 혼자 가서 해결하려고 할 거냐고.”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루라면 분명 그럴 거라 리드는 확신했다. 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리드가 루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선수를 쳤다.
“앞으로 나한테 꼭 말하고 가. 나도 같이 데려가라고.”
“왜?”
천진난만한 질문에 리드가 바로 내놓을 수 있는 답은 없었다. 리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차피 널 찾는 건 내 책임이니 신경 쓰이니까, 다치면 어른들에게 혼나니까, 온갖 자잘한 이유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널 여기로 데려온 사람은 나니까, 네가 바보 같은 짓 하다가 다치지 않게 하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나한테 꼭 말하고 가.
루가 눈을 접어 빙긋 웃었다.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약조의 미소였다.
*
“넌 어디 박혀 있다가 지금 나타나냐?”
단장 파인의 꾸지람에 리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 평소라면 파트너인 루를 옆에 끼고 몸을 풀며 공연 준비에 한창일 시간이다. 검은 인영과 나눈 대화 후 복잡해진 머리를 싸매고 돌아오니 루를 찾으러 간지 벌써 40분이나 지나있었단다. 루는 진작에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리드가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바로 몸 풀고 준비할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리드의 머리가 번쩍 들린다. 파인은 원체 너그러운 사람이라 어지간해서 단원들을 혼내는 경우가 없다. 다만 안전 수칙을 어기는 것과 공연에 소홀히 임하는 것만큼은 봐주지 않았다. 질책이 오늘 공연에서 제외되는 징계로 이어질까 봐 리드는 다급하게 입을 연다.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리드의 얼굴이 절박해 보였는지 파인이 표정을 풀고 손사래를 친다. 파인의 마디마디가 굵어진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다 말고 리드가 눈썹을 모은다.
“전광판이 안 켜져 있네요?”
극단들의 공연 시간을 알리는 캠프의 커다란 전광판이 꺼져 있다. 그 밑에 기술자로 보이는 사람 몇몇이 심각한 얼굴로 모여들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리드가 파인을 쳐다보자, 그가 눈가를 찡그리고 어깨를 으쓱인다.
“지금 전선 불량으로 캠프의 전기가 다 끊겼어. 거의 30분째인가? 기술자란 기술자는 다 불러 모았는데 영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네. 어, 네틀. 어떻게 됐어?”
붉은 머리카락을 대충 틀어 올린 여자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자 파인이 반기며 묻는다. 하늘날개 극단의 전선 기술자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안 될 것 같은데요?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는지도 몰라서 다들 쳐다만 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뭐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르고.”
네틀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꺼진 전광판을 한 번, 각자 소속된 극단으로 흩어지는 기술자들을 한 번 쳐다보고 팔짱을 낀다. 목소리엔 체념이 묻어나온다.
“안타깝지만 오늘 공연은 전부 취소예요. 전력이 필수적인 공연만 있는 건 아니지만… 뭐가 문제인지 모르니 안전하게 가기로 합의했어요. 통보가 끝나면 다시 모여서 원인을 찾아보려고요.”
파인이 혀를 끌끌 찬다. 그의 눈에도 아쉬움이 남아있지만, 안전을 최우선 순위로 여기는 사람답게 지시에 머뭇거림은 없다.
“문제가 생겼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우리는 둘째치고 찾아온 손님들에겐 미안하게 됐네. 취소 공지는 캠프 관리인이 알아서 내보낼 거지? 좋아, 다들 해산해. 내일 무사히 공연할 수 있게 빌어보자고.”
주변에 모여있던 하늘날개 극단원들이 너나없이 실망한 얼굴을 애써 숨기며 돌아선다. 리드 역시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공중그네를 올려다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굴린다. 익숙한 하얀색 머리카락이 시야 끄트머리에 있다.
“…이건 못 봤어?”
루가 말없이 머리를 흔든다. 그답지 않은 울적한 표정을 보고 리드는 아직 꺼내지 못한 질문들을 삼킨다. 검은 인영의 말이 진실인지. 네가 진짜 재앙을 예지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곧 푸른 날개도 잃게 되는지.
아니면 그리되기 전에, 까마귀의 인도에 따라 낙원으로 떠날 것인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루가 상체를 옆으로 숙여 리드를 올려다본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파드득 놀란 리드가 가슴 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젓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공연이 취소돼서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었을 뿐이야.”
“그러게. 오후와 저녁이 통으로 비었네.”
루가 곰곰 고민에 빠진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열심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가 마침내 손뼉을 치며 활짝 웃는다.
“산책하러 갈까?”
“산책?”
보나 마나 이야기꾼 할머니를 찾아가서 또 전설 이야기나 듣자고 하리라 한 예상이 단번에 깨진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리드를 향해 루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텐트 너머를 가리킨다.
“캠프 부근에 호수가 있다고 했잖아. 여기 도착해서 기구 설치하고 준비하고 공연하느라 바빠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갔다 오자.”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한 리드는 루의 요청을 들어준다. 파인에게 잠시 캠프 밖으로 나갔다 올 거라고 통보하고 둘은 이름 없는 작은 호수로 걸음을 옮긴다. 루의 말대로 호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캠프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공기 속에 스며든 물 내음을 맡을 수 있다.
호수의 물은 뿌옇다. 리드가 보아온 호수와 강은 대체로 그랬기에 별로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옆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물속을 들여다보는 루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하늘이 비쳐 보이지 않네.”
“뭘 기대한 건데?”
“그렇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던 호수의 물은 정말 맑았었단 말이야.”
기억 안 나? 루의 순박한 질문에 리드가 대꾸한다. 기억나. 긍정적인 반응에 루가 해맑게 웃으며 물꼬 터진 둑처럼 조잘조잘 이야기를 잇는다.
“그날은 하늘이 맑았어. 파랗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회색이 많이 옅었잖아. 그런 호수를 또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네가 낙원으로 간다면, 푸른 하늘도, 맑은 호수도 마음껏 볼 수 있지 않을까? 리드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여태껏 제게 할 말이 있지 않냐고 묻지 못한 것처럼. 친구를 위한 최선을 바라는 결의와 친구가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욕심이 마음을 속절없이 뒤흔들어 입술을 봉인한다.
“루.”
“왜?”
그러나 꼭 해야 하는 한마디는 용기가 되어 소리로 변한다. 루가 리드를 올려다보자, 리드의 시선에 푸른 눈동자가 박힌다. 그 속에 하늘이 있다.
“어디 가게 된다면, 나한테 꼭 말하고 가.”
루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휜다.
“그럼. 약속했잖아.”
짧은 맞장구에 리드는 불안함 속에서도 위안을 얻는다. 그가 루를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
리드가 정체불명의 아이를 발견한 장소는 어느 맑은 호수의 갈대밭이었다. 어른들이 새 캠프를 세우느라 바쁜 사이에 나이가 어리다고 일에서 제외된 리드는 홀로 탐험하러 나왔었다. 단장 파인이 캠프 밖으로는 벗어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하고 멀어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드는 제 키보다 조금 작은 갈대밭 속에 있었다.
캠프가 눈에 보이지 않아 무모함을 곧잘 무기로 삼는 리드조차 겁이 났었다. 슬슬 돌아가야겠지. 그런데 캠프가 어느 방향이었지? 갈대밭 속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리드는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느껴지는 흙이 질척해지는 걸 눈치채고서야 리드는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멈춰 섰다.
그대로 뒤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가면 되나? 갈대를 밟아 비비며 신발 밑창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던 리드의 눈에 반짝이는 물이 들어왔다. 리드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물이 이렇게 맑을 수도 있었어?”
하늘이 비쳐 보이는 호수를 난생처음 본 리드는 그 황홀함에 잠시 두려움을 잊고 물속을 응시했다. 물속으로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는 느낌일까 싶어서 손을 담그려던 순간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든 리드가 후다닥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일 없으면 야생 토끼 같은 초식동물이겠지만, 들개 정도만 되어도 작은 아이에겐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드를 빤히 쳐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는 토끼도 들개도 아닌 사람의 것이었다. 그것도 리드의 또래로 보이는 한 신비로운 아이의. 드물게 구름이 적어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었기에, 아이의 긴 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오묘하게 푸른빛이 도는 하얀 머리카락을, 새파란 눈동자를 쳐다보던 리드가 홀린 듯 물었다.
“넌 누구야?”
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리드를 마주 보았다. 그 눈에 두려움이나 거부감은 보이지 않아 리드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리드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을 때까지 아이는 도망가지 않고 바닥에 앉아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저쪽 캠프 친 극단 소속이야? 난 하늘날개 극단의 리드야. 아직은 예비 단원이지만.”
혹시 그가 누군지 몰라 경계하는 건가 싶어 리드가 먼저 이름을 밝혔다. 그럼에도 아이가 말이 없자 리드는 더 기다리는 대신 답을 재촉했다.
“이름이 뭐야?”
“몰라.”
드디어 대답이 나왔지만, 리드가 예측했던 내용은 아니었기에 잠깐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너 극단 소속 애 아니야? 설마 싶어 되물은 질문에 아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제야 리드의 머리에 새로운 가정이 떠올랐다.
“가족은? 친척은? 보호자는?”
답이 전부 부정형으로 돌아오자, 리드는 곤란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데서 미아를 찾을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아하니 배움이 좀 느려서 이곳에 버려졌나보다 싶었다. 리드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기억나?”
아이가 처음으로 방긋 웃었다. 밝은 미소와 함께 가리킨 곳은 하늘이었다. 하늘을 한번, 아이를 한번 번갈아 쳐다본 리드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면 이제 어쩐다. 돌아오지 않는 리드를 찾아 단장 파인이 혼내러 오기 전에 리드는 돌아가야 했고,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는 아이를 차마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갈 곳이 있냐고 물어 봤자였다. 있었다면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진 않았겠지. 리드가 큰마음을 먹고 벌떡 일어서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나도 어딘가에 버려진 걸 주워 왔었다니까, 널 데려가도 단장님이 뭐라고 하진 않을 거야. 이름도 줄 거고. 나처럼 풀떼기 이름을 받을 테지만.”
아이가 눈을 깜빡이며 리드를 올려다봤다. 리드는 순간 그가 거절하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아사할 게 뻔한데 양심상 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억지로 끌고 가기도 벅차고, 어떻게든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리드가 재촉했다.
“내 손 잡아.”
아. 손을 내미는 게 무슨 뜻인지 처음 깨달은 것처럼 아이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따듯한 온기가 리드의 손에 닿았다.
*
이른 아침에 기상한 리드는 오랜만에 루를 찾는 데 실패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하늘날개 극단의 텐트는 이미 다 한 번씩 뒤져봤지만, 루의 온기는 없다. 검은 인영과 나눈 대화 이후 리드는 루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마다 그가 말도 없이 떠나버린 건 아닐까 싶어 초조해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몰려오는 불안에 리드는 가까스로 어제 루에게 받아낸 약속을 떠올린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었으니, 분명 캠프 어딘가엔 있겠지. 의상을 보관하는 텐트까지 뒤져본 리드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걸 인지한다.
전선이 드디어 고쳐졌나? 그럼 오늘은 공연할 수 있는 건가? 들뜬 마음은 다시 루에게로 생각이 닿자 침잠한다. 루가 정말로 떠난다고 하면 자신은 어떤 대답을 할지 결정하지 못한 탓이다.
잘 가라고 인사해야겠지. 검은 인영의 부탁대로 설득하지는 못할지언정, 꼴사납게 붙잡지는 말아야지. 다짐은 쉽지만, 때가 오면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처진 입꼬리를 자각하고 리드는 두 손으로 자기 뺨을 찰싹찰싹 친다. 친구가 되어 웃으며 배웅해 주지는 못할망정, 대놓고 서운함을 티 낼 순 없다.
리드가 커다란 한숨을 내쉰다. 뭐가 되었든 루를 찾는 게 먼저다. 오늘의 공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리드! 이 꼬맹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텐트 입구가 세차게 펄럭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본 리드를 보는 순간 텐트 안으로 돌격하다시피 한 파인의 눈에 안도감이 찬다.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얼른 나와. 캠프 여러 군데에서 화재가 발생했어. 전선 문제인지 아무튼 뭔가가 잘못 건드려진 것 같다. 텐트 안은 위험하니까 공터로 나가. 얼른.”
파인의 말이 리드의 머릿속에 제대로 인식되기도 전에 그가 리드를 끌어내고 있다. 텐트에서 끌려 나가며 리드가 묻는다.
“루는요? 찾았어요?”
“루? 너와 있는 것 아니었어?”
리드와 파인은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본다. 파인의 눈엔 근심이, 리드의 눈엔 공포가 깃든다. 파인이 다시 잡기 전에 리드가 무작정 뛰쳐나간다. 뒤에서 파인이 소리 지른다.
“내가 찾아볼 테니까 넌 공터로 피신해 있어!”
“루를 찾는 건 내가 더 빨라요!”
돌아보지도 않고 마주 소리 지른 리드는 숨돌릴 시간도 없이 하늘극단 텐트를 누비며 루를 찾는다. 하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 초조함이 극에 다른 리드가 옆 극단의 텐트로 눈을 돌린다. 이미 그곳에도 사람들이 소리치며 물을 나르고, 어린 단원들을 피신시키며 바삐 움직이고 있다. 가서 루를 본 적 있냐고 물어도 대답해 줄 정신이 남아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리드의 발이 멈추고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찰나.
공중그네 플랫폼 위에 길게 나부끼는 하얀색의 땋은 머리카락과 어깨에 얹은 푸른 깃털 망토가 보인다.
루가 왜 지금, 왜 저곳에 있지? 의문이 든 것도 한순간. 플랫폼 난간에 까마귀가 한 마리 눈에 들어온다. 리드의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서늘해진다.
루가 서 있는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까지 뛰어간다면 순식간이다. 하지만 그 사이로 온갖 장비가 무너지고 모래주머니와 물통을 든 사람들이 뛰어다닌다. 리드의 시선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반대편 플랫폼 사다리로 가는 길은 뻥 뚫려있다.
“리드! 이 미친놈아! 당장 내려오지 못해?!”
이제는 팔을 쭉 뻗지 않아도 칸이 닿는 공중그네 사다리. 그럼에도 어렸을 적 그랬던 것처럼 팔을 뻗어 리드는 두 칸씩 사다리를 오른다. 밑에서 고함치는 파인에게 신경 쓸 정신도 남아있지 않다. 리드는 더욱 빠르게 사다리를 오르는 데만 집중한다.
리드의 손이 플랫폼을 짚는다. 차오른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리드가 플랫폼에 매여있는 그네를 풀어낸다. 시선은 단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
공중그네 건너편. 그곳에 루가 있다.
*
공중그네 건너편. 그곳에 리드가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재앙이 눈에 환영처럼 겹쳐 보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루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곧 날개가 돋아나겠구나.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지식이 철새의 귀향 본능처럼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루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늘로 오르는 연습을 하듯 높은 곳을 찾고는 했다. 그 발길이 이끈 곳은 공중그네 플랫폼 위였다.
사다리를 오르며 고개를 위로 젖혔을 때 보인 건 반대편 플랫폼에 앉아 있는 리드였다. 하늘을 쳐다보느라, 또는 벅찬 감정을 다스리느라 루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루가 플랫폼에 다다랐을 무렵, 리드는 이미 그네에 앉아 허공을 날고 있었다. 밤에 녹아든 긴 검은 머리카락이 새의 날개처럼 리드의 등 뒤로 너풀거렸다.
얼마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까. 루가 눈을 깜빡였다. 리드가 그네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한순간 소리 지를 틈도 없이, 어둠 속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물 아래로 추락했다. 가슴이 철렁해 또래의 이름을 부르려던 루가 멈칫했다. 리드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안정적으로 보였으나 루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곧 어떤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게 된 까닭에.
뒤에서 날갯짓이 들려왔다. 루가 눈만 살짝 굴렸다. 플랫폼 난간에 까마귀가 한 마리 있었다. 까마귀의 부리가 열리고 새의 울음소리 대신 낮고 거친 인간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떠날 준비가 되었다.”
검은 안내자가 루에게 하늘로 오르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루는 리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리드의 그네가 하늘로 오를 때마다 달빛이 아이의 얼굴을 비췄다. 리드의 표정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지?”
정해진 길, 행복이 보장된 길 앞에서 왜 망설이느냐는 다그침보다 날카롭게 와닿는 건 그네에서 흔들리는 리드의 소리 없는 도움 요청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제 땋은 머리카락이 시야 언저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예쁜 머리카락이 아깝게 방치하고 다니지 말라며 저를 앉혀놓고 머리카락을 땋아 내리던 리드의 목소리가 기억 저편에서 울려왔다. 루의 결심을 굳히는 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직 떠날 때가 아니야.”
달은 밝고 추억은 선명했다. 떠나가는 날갯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까마귀가 사라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마 다음 기회에 다시 길을 안내하러 찾아오겠지. 그네에서 흔들리던 리드가 루를 발견했다. 루가 미소 지었다. 그네를 풀어내는 손이 가벼웠다. 이제 리드가 떨어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가 그네를 밀고 나갔다.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공중에서 그네 하나에 의지한 채로 아슬하니 흔들렸다. 허공에서 손과 손이 맞닿았다.
루의 등 뒤로 푸른 날개가 펼쳐졌다. 파랑새의 날개가 밤하늘 아래 꽃처럼 만개했다.
*
상공 10미터. 그곳에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 인간에게 날개를 부여하는 거대한 장치 위에서 루는 연기로 희뿌연 하늘을 응시한다.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순 없다.”
처음 찾아왔던 밤처럼, 까마귀의 부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루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새파란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건너편 플랫폼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리드다. 루의 입가에 웃음이 맺힌다.
“선택은 이미 했어.”
새의 표정을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오직 가라앉은 음성만 유감을 드러낼 뿐이다.
“이곳에 남아 죽겠다는 건가?”
“내가 왜 죽어? 그냥 인간으로 남겠다는 건데.”
“파랑새가 미래를 보는 눈도, 하늘을 나는 날개도 잃으면 죽음이나 다름없지.”
루가 고개를 흔든다. 리드가 플랫폼에 손을 짚고 몸을 작은 공간 위로 올리고 있다. 아래에선 사람들이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있다. 몇몇 이들은 루와 리드를 발견했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삿대질한다. 루는 아름답고 평온하다고는 하지 못할 풍경을 눈에 담는다.
“눈이 없어도, 날개가 없어도 괜찮아. 다른 길을 안내해 줄 안내자를 만났으니까.”
리드가 재빠르게 그네를 풀어내고 있다. 이 상황에서 그네를 밀고 나오는 게 안전할까? 루에겐 이제 그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느 인간처럼 불확실성에 몸을 맡겨볼 수밖에 없다. 루의 손이 그네에 닿는다.
“후회할 테다. 낙원으로 갈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
루의 손이 능숙하게 그네를 풀어낸다.
“괜찮아.”
저를 보지 않는 루를 바라보는 까마귀의 목소리가 무겁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포기하겠다는 건가?”
루가 그네에 한 발을 얹는다. 다른 발은 위태롭게 플랫폼을 디디고 서 있다.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 루는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서 느낀 행복 또한 거짓된 게 아니니까.”
마지막 한 발짝. 그 틈새로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파랑새가 전부 어디로 떠났는지 알고 있나?”
루의 움직임이 멈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작은 날갯짓 소리가 까마귀가 떠날 채비를 한다는 걸 알려준다.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않을 테지. 언젠가 공중그네 플랫폼 위에서 리드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안내자의 마지막 인사가 된다.
“모든 파랑새는 똑같은 선택을 했다. 약속된 낙원을 포기하고 땅의 인간들과 남았지. 스스로 날개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다.”
여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루의 선택이 놀랍지는 않다는 어투다. 그 속에 꺼내어 묻지 않은 질문이 있다. 땅에 남기로 한 이유가 무엇이지? 루가 환하게 웃는다. 그 역시 식상한 말 대신 답변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우린 행복의 상징이잖아.”
인간이 파랑새와 함께해서 행복했듯, 파랑새의 행복 또한 인간과 무관하지 않다. 공생이란 한쪽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닌 마음이 쌍방으로 오가는 관계다.
“우리 홀로 행복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날개 대신 인간을 선택했다고, 이별 대신 희망을 선택했다고 파랑새가 유언을 남긴다. 루와 리드가 동시에 그네를 밀고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처음에는 작은 반원. 추를 그리며 하늘을 가를수록 그네의 고도는 조금씩 높아지고 둘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3미터. 2미터. 이제 루에게 리드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인다. 망설임 없는 검푸른색 눈동자에 단단한 결심이 있다.
1미터. 리드가 그네를 박차고 날아오른다. 쭉 뻗은 팔이 필사적으로 루를 향한다.
“루! 내 손 잡아.”
루도 그네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하늘에서 리드를 향해 손을 뻗는다. 허공에서 손과 손이 맞닿는다.
아이 둘이 추락한다. 날개가 없는 인간은 중력을 거스를 수 없기에 도약 후 필연적으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찔한 하강 속에서 리드의 눈에 푸른빛이 스친다.
루의 깃털 망토 사이로 리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진짜 날개가 돋아난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날개의 깃털이 반짝이며 가루처럼 부스러진다. 리드는 직감적으로 이제 루의 날개를 볼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떨어지는 속도는 느려진다.
리드는 파랑새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이후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다. 이는 파랑새의 눈을 잃은 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둘은 떨어지며 서로를 보며 웃는다.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락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또 다른 도약으로 가는 길목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오를 수 있는 공중그네의 사다리가 건재하기에. 그네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남아있기에. 그리고 허공에서 날아오를 때 손을 잡아줄 이가 남아있기에.
상공 10미터.
그물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에서 파란 깃털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는 하늘 위에서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
Written 24-07-26
32773자 (24584)
댓글 0
추천 포스트